아일랜드의 눈은 잠깐만 내렸고 기온은 영하 2도 정도로 크게 춥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몸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치게 쇠약해진 몸 상태 때문일 것이다.WT의 위치는 아일랜드 북쪽의 깊은 숲속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6시였다.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현정우는 차를 WT 기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다.나는 두꺼운 옷을 단단히 여미고 차에서 내렸다. 백미러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숨이 넘어갈 듯 창백했고 붉게 충혈된 눈은 생기가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내 창백한 얼굴과 대비되어 더더욱 비참해 보였다. 나는 눈 덮인 땅 위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옆을 돌아보니 석씨 가문의 수백 명이 무기를 들고 현정우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그들이 모두 내 곁을 지나간 뒤에야, 나는 조용히 옆에 있던 함승윤에게 물었다.“제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요?“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켜 복수를 한다는 것. 이 방법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싶었다.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함승윤은 차분하게 답했다.“희생은 원치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석씨 가문이 복수를 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전 세계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결단을 내리신 것은 옳은 선택입니다.“그의 말이 논리적임은 알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메시지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죽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에게 최소한의 정의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WT 기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현정우와 나머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은 내 바로 뒤에서 내 안전을 지키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5분 정도를 걸었을 때, 우리는 눈더미를 돌아 WT 기지
한 달 만에 만난 석지훈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 차가웠고 그의 옆에는 무장한 크리스가 서 있었다.크리스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곧 내 주머니 속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받을 필요가 없었다.조소를 담아 크리스를 쏘아보자 그는 움찔하며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눈을 감고 물었다.“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죠?”“가주님, 대략 10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네.”대답을 마치고 나는 아래에서 벌어질 참혹한 상황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7, 8분쯤 흘렀을 때, 함승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끝났습니다! 가주님, 크리스를 생포했습니다.”“네. 석지훈은요?”내가 물었다.“석 대표님은 스스로 투항했습니다. 지금 저희 요원들이 그들을 끌어오는 중입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몇십 미터 정도 남았습니다.”함승윤은 시종일관 석지훈을 ‘석 대표님’이라고 불렀다.지금은 우리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석지훈에게 늘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송 어르신이라는 작자는 어디 있어요?”“아일랜드에는 없습니다.”눈을 떠보니 아무도 석지훈을 제압하지 않고 있었다. 현정우가 그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았다. 반면 크리스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이고 상처투성이였다.그들은 크리스를 마대 자루처럼 내 앞에 내던졌고 석지훈은 크리스 옆에 서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당연했다. 석지훈 이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나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나는 그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추스르고 크리스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뻔뻔스럽게 히죽거리며 말했다.“연수아 씨는 지훈의 여자이고 나는 지훈의 친구야. 결국 보면 다 같은 편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리고 그날 일은 내가...”나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사모님, 암 말기입니다...”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뭐라고요?”의사는 진단서 위에 팔을 올려놓고 또박또박 말했다.“사모님, 2년 전 유산했을 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다가 후에 감염까지 된 바람에 자궁에 암 덩어리가...”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의사의 말을 가로챘다.“그럼 얼마나 남았나요?”“암세포가 퍼져서 길어야 석 달 정도...”그 후로 의사가 더 뭐라 말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고 머리가 윙 했다. 머릿속에 3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해서 맴돌았다......그날 저녁, 고씨 가문 별장.조금 전 나와 뜨거운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의 남편 고현성이다.결혼 3년 동안 그는 매번 별장으로 돌아와 나와 관계를 가진 후 욕실로 들어가서 씻었다. 마치 더러운 뭔가를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에는 매정하게 나가버렸다.별장으로 들어와서부터 나갈 때까지 나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오늘도 그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후 양복을 갈아입고 또다시 나가려고 했다.나는 침대에 앉아 고현성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러자 고현성이 입술을 깨물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그의 무관심한 눈빛과 마주한 순간 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이 전부 목구멍에 막혀 결국 이 한마디만 했다.“조심해서 가요.”아래층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의 검은색 마이바흐를 내려다보면서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성이 전화를 받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나와 고현성은 올해로 결혼한 지 3년 되었다. 고현성과 결혼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시아버지는 그 여자의 목숨으로 고현성을 협박하면서 나와의 결혼을 강요했다.고현성은 반항도 해봤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포기하고 나와 결혼했다.3년 동안 나를 대하는 고현성의 태도는 늘 차가웠고 잔인하기만 했다. 심지어 나와 잠자리를 할 때도 그 여자의 이름 임지혜를 부르곤 했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현성 씨.”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 씨.”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왜?”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한 달 만에 만난 석지훈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 차가웠고 그의 옆에는 무장한 크리스가 서 있었다.크리스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곧 내 주머니 속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받을 필요가 없었다.조소를 담아 크리스를 쏘아보자 그는 움찔하며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눈을 감고 물었다.“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죠?”“가주님, 대략 10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네.”대답을 마치고 나는 아래에서 벌어질 참혹한 상황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7, 8분쯤 흘렀을 때, 함승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끝났습니다! 가주님, 크리스를 생포했습니다.”“네. 석지훈은요?”내가 물었다.“석 대표님은 스스로 투항했습니다. 지금 저희 요원들이 그들을 끌어오는 중입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몇십 미터 정도 남았습니다.”함승윤은 시종일관 석지훈을 ‘석 대표님’이라고 불렀다.지금은 우리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석지훈에게 늘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송 어르신이라는 작자는 어디 있어요?”“아일랜드에는 없습니다.”눈을 떠보니 아무도 석지훈을 제압하지 않고 있었다. 현정우가 그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았다. 반면 크리스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이고 상처투성이였다.그들은 크리스를 마대 자루처럼 내 앞에 내던졌고 석지훈은 크리스 옆에 서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당연했다. 석지훈 이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나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나는 그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추스르고 크리스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뻔뻔스럽게 히죽거리며 말했다.“연수아 씨는 지훈의 여자이고 나는 지훈의 친구야. 결국 보면 다 같은 편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리고 그날 일은 내가...”나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아일랜드의 눈은 잠깐만 내렸고 기온은 영하 2도 정도로 크게 춥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몸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치게 쇠약해진 몸 상태 때문일 것이다.WT의 위치는 아일랜드 북쪽의 깊은 숲속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6시였다.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현정우는 차를 WT 기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다.나는 두꺼운 옷을 단단히 여미고 차에서 내렸다. 백미러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숨이 넘어갈 듯 창백했고 붉게 충혈된 눈은 생기가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내 창백한 얼굴과 대비되어 더더욱 비참해 보였다. 나는 눈 덮인 땅 위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옆을 돌아보니 석씨 가문의 수백 명이 무기를 들고 현정우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그들이 모두 내 곁을 지나간 뒤에야, 나는 조용히 옆에 있던 함승윤에게 물었다.“제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요?“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켜 복수를 한다는 것. 이 방법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싶었다.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함승윤은 차분하게 답했다.“희생은 원치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석씨 가문이 복수를 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전 세계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결단을 내리신 것은 옳은 선택입니다.“그의 말이 논리적임은 알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메시지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죽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에게 최소한의 정의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WT 기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현정우와 나머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은 내 바로 뒤에서 내 안전을 지키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5분 정도를 걸었을 때, 우리는 눈더미를 돌아 WT 기지
‘이걸 왜 인제서야 떠올린 거지? 나도 참 멍청해.’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원태웅에게 물었다.“태웅 오빠, 무슨 일이세요?”“수아야, 석지훈 말이야. 한 달째 실종됐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가 에르크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랑도 연락이 전혀 닿지 않아. 마치 모든 걸 버리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아.”나는 대략 석지훈이 아직 WT에 머물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하지만 원태웅의 말투로 보아 그는 내가 석지훈과 갈라섰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왜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이 사실을 내게 말하는 걸까? 그리고 왜 석지훈은 계속 WT에 머물러 있는 걸까?크리스가 말하길 WT는 그의 영역이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이 맞다고 믿었다.하지만 석지훈이 왜 원태웅과의 연락을 끊고 한 달이나 자취를 감춘 걸까?이건 그의 평소 행동과는 너무도 달랐다. 가슴 한구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와 나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왜 이제야 저한테 말해요?”그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전부터 계속 너한테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 됐잖아. 그뿐만 아니라 지훈이도 실종되고 너도 연락 두절이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며칠 전이라면...나는 그때 계속 의식이 없었다. 며칠 전 깨어났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핸드폰 기록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게다가 저장된 통화 기록만 해도 수백 개라 누구한테 전화가 왔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미안해요. 제가 그동안 핸드폰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요.”원태웅은 석지훈의 행방을 걱정하며 그의 소식을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저도 지훈 오빠와 연락하지 않았어요. 우리 둘은... 이미 헤어졌어요.”그는 충격을 받은 듯 물었다.“헤어졌다고?”“네, 지훈 오빠가 먼저 얘기했어요.”원태웅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지훈 오빠는 너랑 헤어질 리가 없다고!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수아야, 제발 오해하지 마.”나는
2년 전, 나는 고현성의 세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내가 깨어난 후, 최희연이 그가 얼마나 슬프고 절망했는지 과장되게 이야기해 줬다. 그녀는 그때 그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이후로 계속 그를 편들었다고 말했다.“이번에는 내가 알아.”그가 했던 이 말은 무겁고 낮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지금의 고현성은 나를 마주할 때마다 끝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과거 내가 그를 대할 때처럼.그 모습은 내 마음을 찌르고 흔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고현성을 보고 있기가 어려워 눈을 감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세요. 좀 쉬고 싶어요.”그는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갑자기 눈을 뜨며 날카롭게 외쳤다.“그러지 마세요!”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간절히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런 목소리로, 그런 태도로 저를 대하지 말아 주세요. 저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고현성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더니,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그 순간, 내가 너무 가혹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통증이 한참 가라앉고 나서야 나는 멍하니 링거 주사를 바라보다가 문밖에 있는 함승윤을 불렀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자 나는 물었다.“제 상태가 어떤가요?”그는 이미 내가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숨김없이 말했다.“가주님의 몸 상태는 현재로선 좋지 않습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의사는 뭐라고 하나요?”“병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약을 제때 먹고 치료를 잘 따라야 병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조용히 물었다.“얼마나 더 살 수 있나요?”병이 억제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 그건 의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진지하게 말했다.“이 일은 절대 외부로 새지 않게 하세요. 고현성 외에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책임을 물을 겁니다.”
안쪽에서 한 남자가 빛을 등지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속으로 애타게 외쳤다.“구해주세요, 현성 씨...”곧 고현성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나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 했고 나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속삭였다.“핸드폰...”고현성은 방으로 돌아가 내 핸드폰을 챙겨왔다. 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나는 간신히 힘을 내어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주님, 제가 석씨 가문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운성에는 석씨 가문이 인수한 병원이 있었고 이런 병원은 운성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 퍼져 있었다.“알겠어요.”내 대답을 들은 함승윤이 물었다.“현정우는요? 왜 가주님 곁에 없습니까?”나는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대답했다.“오늘 하루만 쉬라고 했어요.”함승윤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주님, 이런 결정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정우가 저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어요.”“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면 반대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산 아래에는 석씨 가문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잖아요. 저는 별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니 위험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함승윤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가주님,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은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처럼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실 겁니까? 가주님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절대 혼자 계셔선 안 됩니다.”그가 내 건강 상태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대답했다.“알겠어요. 병원 주소를 보내주세요.”전화를 끊은 뒤, 함승윤은 곧바로 병원 주소를 보내왔다.나는 핸드폰을 고현성에게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고 말았다.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누구세요?”이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야.”나는 무의식중에 물었다.“누구죠?”“수아야, 넌 한때 나를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야.”“제가 사랑했던 사람이요
재앙이든 영광이든, 그것은 모두 그의 세계였다.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때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와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답답한 마음으로 별장에 들어가 최욱현의 옆방에 누웠다. 휴대폰을 꺼내 연예 기사들을 뒤적였지만 전부 별거 아닌 가십거리뿐이었다.그러다 문득 석지훈이 예전에 올린 트위터를 찾아봤다. 좋아요는 이미 300만을 넘었고 댓글은 그를 동경하는 팬들로 가득했다.[201X년 11월 27일 저녁 8시, 나는 연수아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약혼을 맺었다. 201X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는 내 생에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나는 이 글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글을 읽다가 나는 눈가가 붉어지며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오빠.”이 말은 깊은 밤, 고요한 순간에만 나 혼자 속삭일 수 있었다....다음 날 아침, 최욱현이 나를 깨웠다. 그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서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나는 피곤한 눈으로 그를 보며 험하게 말했다.“또 이러면 너 바로 돌려보내 버릴 거야.”하지만 그는 전혀 겁먹지 않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꼬마 아가씨!”최욱현은 가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년 같아서 화를 내고 싶어도 내킬 수가 없다.“너도.”그는 침대 옆에 앉아 다리를 꼬고 말했다.“오후 비행기로 미상국에 돌아갈 거야.”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가며 말했다.“조심해서 가.”그는 나를 따라오며 물었다.“F국으로 같이 갈래?”“거긴 내 집도 아니야. 그리고 시간 없어.”“나랑 같이 가서 어머니께 새해 인사드리자.”그건 그의 어머니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했던 한마디가 아직도 내 마음에 깊게 남아 있다.“너는 내 딸이지만 딸이라는 관계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에 무슨 유대가 있는지 모르겠구나.”그녀에게는 나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었다. 내가 새해를 함께 보내든 말든 그녀에게는 아무런 차
아름답고도 외롭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석지훈을 떠올렸다.어쩌면 석지훈은 내가 본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였고 또 내가 경험한 가장 아프고 깊은 외로움이기도 했다.가끔은 예쁜 달빛도 쉽게 식어버리는 화려한 불꽃에 비할 바가 못 됐다.나는 한숨을 쉬며 깊어지는 슬픔을 느꼈다.옆에 있던 욱현이 갑자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었다.“꼬마 아가씨, 불꽃의 이명이 뭔지 알아?”‘또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네.’“이명이 뭔데?”“기녀. 예전에는 기생을 불꽃이라고 부르기도 했어. 예쁘긴 하지만 결국은 단명하잖아. 불꽃이 쉽게 사라지듯 기생도 비슷한 삶을 살아서 그런 이명이 붙기도 했어.”욱현은 F 국에서 자랐기에 국내의 문화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을 수 있었다.그래서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기녀는 불꽃이 아니야. 오히려 그녀들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을 불꽃의 성지라고 했지.”“뭐가 달라?”“네가 지냈던 곳이 F국이라고 해서 네 이름이 F 국이야?”직설적인 내 설명에 욱현은 바로 이해했다.그는 이어폰을 빼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나 이제 잘게.”나는 조용히 그를 불렀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불렀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예전에는 욱현이 나를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에게 청각장애가 있다고 확신했다.나는 일어나서 남은 봉투를 그의 베개 옆에 두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속삭인 뒤 방을 나왔다.현정우와 다른 사람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내가 나가자 그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나는 문 앞에서 그들의 젊은 얼굴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다.하지만 어떤 일들은 내가 직접 마주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나는 입술을 깨물다 입을 열었다.“내일 하루는 쉬세요. 다들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명절을 보내세요. 모레 오후 3시에 여기 모여서 아일랜드로 출발할 거예요. 위험한 임무이니 각자 마음의 준비도 잘 해주세요.”함승윤은 어제 글로벌 위치 시스템을 통해 타이탄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했다.정확히 말하면 크
욱현을 만날 때마다 그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었고 그가 내 말을 듣지 못할 때는 이어폰을 벗은 상태였다.나는 대담하게 그에게 청각 장애가 있다고 추측했다.‘두 번이나 귀머거리라고 욕하다니!’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의 죄책감은 점점 더해졌다.욱현이 언제 무시했냐고 물을 때 나는 얼버무리며 답했다.“장난은 그만 치고 이따가 현정우랑 먹을 거 좀 사러 다녀와. 나는 별장에서 기다릴게.”욱현이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집에 가도 되는 거야?”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거절해도 돼.”결국 나는 그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욱현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역시 수아는 나한테 다정해.”나는 먼저 산속의 별장으로 돌아왔고 욱현과 현정우는 장 보러 갔다.나는 두 사람에게 봉투 스물다섯 개의 추가로 사 오라고 특별히 부탁했다.별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쯤이었다.눈도 차츰 잦아들고 있었고 나는 다른 경호원 몇 명과 함께 부엌에서 한참 동안 저녁 준비를 했다.저녁이 다 준비될 즈음 욱현과 현정우가 물건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그들은 먼저 집안을 예쁘게 단장하고는 정원에 폭죽을 준비해 두었다.자정이 되면 불꽃놀이를 하기로 했다.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나는 내 경호를 맡고 있는 24명의 경호원들과 함께 설날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낯선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예전의 23명을 떠올렸다.그들은 생존을 위해 내 곁에 머물렀지만 나는 그들에게 평안과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마음속 분노는 점점 더 깊어졌다.식사 중 나는 술잔을 쳐들고 건배사를 외쳤다.“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들의 노고에 대하여 건배!”경호원들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가주님, 그건 저희 의무입니다.”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그들의 존재는 나에게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었다.술잔을 비운 나는 목구멍이 뜨겁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머리가 어지러워질 때쯤 옆에 있던 욱현이 바로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예전의 나는 참으로 비참했다.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현정우에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려 주세요.”나는 눈 내리는 거리를 밟으며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길고 긴 골목은 새하얀 눈으로 가득했다.나는 예전에 그 가로등 아래까지 걸어가며 혼잣말로 한탄했다.“요즘 왜 이렇게 슬프지?”나는 눈을 감으며 울먹였다.“석지훈, 네가 내 믿음을 산산조각 냈어.”석지훈은 내가 힘들 게 다시 쌓아 올린 사랑에 대한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거기, 아가씨. 혼자야?”깜짝 놀라서 눈을 뜬 나는 놀라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왜 여기 있어?”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너 보고 싶어서.”내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내 옆에 따라붙으며 물었다.“나 싫어해?”사실 나는 그를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다.오히려 죽어가던 나를 구해줘서 감사하고 있었지만 그와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석지훈이 그를 변덕이 심하고 기분도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안 그래도 불안정한 환경 속에 있는데 이런 사람과 엮여서 더 불안정해지고 싶지는 않았다.내가 그를 밀어내고 있을 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야, 생일 축하해.”고현성을 제외하고 생일 축하한다고 직접 말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리고 내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첫 축복이었다.그 순간 마음속의 강인함과 자제력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뭐가 그렇게 슬픈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밀려왔다.소년은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왜 울어?”‘내가 왜 울고 있을까?’“나도 모르겠어.”그는 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슬퍼?”“욱현아, 이번 생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야.”그는 단호하게 답했다.“네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그렇다. 이제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