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현을 만날 때마다 그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었고 그가 내 말을 듣지 못할 때는 이어폰을 벗은 상태였다.나는 대담하게 그에게 청각 장애가 있다고 추측했다.‘두 번이나 귀머거리라고 욕하다니!’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의 죄책감은 점점 더해졌다.욱현이 언제 무시했냐고 물을 때 나는 얼버무리며 답했다.“장난은 그만 치고 이따가 현정우랑 먹을 거 좀 사러 다녀와. 나는 별장에서 기다릴게.”욱현이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집에 가도 되는 거야?”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거절해도 돼.”결국 나는 그를 완전히 밀어내지 못했다.욱현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역시 수아는 나한테 다정해.”나는 먼저 산속의 별장으로 돌아왔고 욱현과 현정우는 장 보러 갔다.나는 두 사람에게 봉투 스물다섯 개의 추가로 사 오라고 특별히 부탁했다.별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쯤이었다.눈도 차츰 잦아들고 있었고 나는 다른 경호원 몇 명과 함께 부엌에서 한참 동안 저녁 준비를 했다.저녁이 다 준비될 즈음 욱현과 현정우가 물건을 잔뜩 들고 돌아왔다.그들은 먼저 집안을 예쁘게 단장하고는 정원에 폭죽을 준비해 두었다.자정이 되면 불꽃놀이를 하기로 했다.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나는 내 경호를 맡고 있는 24명의 경호원들과 함께 설날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낯선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예전의 23명을 떠올렸다.그들은 생존을 위해 내 곁에 머물렀지만 나는 그들에게 평안과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그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마음속 분노는 점점 더 깊어졌다.식사 중 나는 술잔을 쳐들고 건배사를 외쳤다.“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들의 노고에 대하여 건배!”경호원들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가주님, 그건 저희 의무입니다.”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도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그들의 존재는 나에게 어느 정도 안정감을 주었다.술잔을 비운 나는 목구멍이 뜨겁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머리가 어지러워질 때쯤 옆에 있던 욱현이 바로 이상함을 눈치채고는
아름답고도 외롭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석지훈을 떠올렸다.어쩌면 석지훈은 내가 본 가장 화려한 불꽃놀이였고 또 내가 경험한 가장 아프고 깊은 외로움이기도 했다.가끔은 예쁜 달빛도 쉽게 식어버리는 화려한 불꽃에 비할 바가 못 됐다.나는 한숨을 쉬며 깊어지는 슬픔을 느꼈다.옆에 있던 욱현이 갑자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었다.“꼬마 아가씨, 불꽃의 이명이 뭔지 알아?”‘또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네.’“이명이 뭔데?”“기녀. 예전에는 기생을 불꽃이라고 부르기도 했어. 예쁘긴 하지만 결국은 단명하잖아. 불꽃이 쉽게 사라지듯 기생도 비슷한 삶을 살아서 그런 이명이 붙기도 했어.”욱현은 F 국에서 자랐기에 국내의 문화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을 수 있었다.그래서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기녀는 불꽃이 아니야. 오히려 그녀들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을 불꽃의 성지라고 했지.”“뭐가 달라?”“네가 지냈던 곳이 F국이라고 해서 네 이름이 F 국이야?”직설적인 내 설명에 욱현은 바로 이해했다.그는 이어폰을 빼고 눈을 감으며 말했다.“나 이제 잘게.”나는 조용히 그를 불렀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다시 한번 불렀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예전에는 욱현이 나를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에게 청각장애가 있다고 확신했다.나는 일어나서 남은 봉투를 그의 베개 옆에 두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속삭인 뒤 방을 나왔다.현정우와 다른 사람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내가 나가자 그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나는 문 앞에서 그들의 젊은 얼굴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다.하지만 어떤 일들은 내가 직접 마주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나는 입술을 깨물다 입을 열었다.“내일 하루는 쉬세요. 다들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명절을 보내세요. 모레 오후 3시에 여기 모여서 아일랜드로 출발할 거예요. 위험한 임무이니 각자 마음의 준비도 잘 해주세요.”함승윤은 어제 글로벌 위치 시스템을 통해 타이탄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했다.정확히 말하면 크
재앙이든 영광이든, 그것은 모두 그의 세계였다.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때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와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답답한 마음으로 별장에 들어가 최욱현의 옆방에 누웠다. 휴대폰을 꺼내 연예 기사들을 뒤적였지만 전부 별거 아닌 가십거리뿐이었다.그러다 문득 석지훈이 예전에 올린 트위터를 찾아봤다. 좋아요는 이미 300만을 넘었고 댓글은 그를 동경하는 팬들로 가득했다.[201X년 11월 27일 저녁 8시, 나는 연수아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약혼을 맺었다. 201X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는 내 생에 가장 행복한 하루였다.”나는 이 글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글을 읽다가 나는 눈가가 붉어지며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오빠.”이 말은 깊은 밤, 고요한 순간에만 나 혼자 속삭일 수 있었다....다음 날 아침, 최욱현이 나를 깨웠다. 그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서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나는 피곤한 눈으로 그를 보며 험하게 말했다.“또 이러면 너 바로 돌려보내 버릴 거야.”하지만 그는 전혀 겁먹지 않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꼬마 아가씨!”최욱현은 가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년 같아서 화를 내고 싶어도 내킬 수가 없다.“너도.”그는 침대 옆에 앉아 다리를 꼬고 말했다.“오후 비행기로 미상국에 돌아갈 거야.”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가며 말했다.“조심해서 가.”그는 나를 따라오며 물었다.“F국으로 같이 갈래?”“거긴 내 집도 아니야. 그리고 시간 없어.”“나랑 같이 가서 어머니께 새해 인사드리자.”그건 그의 어머니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했던 한마디가 아직도 내 마음에 깊게 남아 있다.“너는 내 딸이지만 딸이라는 관계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에 무슨 유대가 있는지 모르겠구나.”그녀에게는 나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었다. 내가 새해를 함께 보내든 말든 그녀에게는 아무런 차
안쪽에서 한 남자가 빛을 등지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속으로 애타게 외쳤다.“구해주세요, 현성 씨...”곧 고현성이 다가와 나를 품에 안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나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려 했고 나는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속삭였다.“핸드폰...”고현성은 방으로 돌아가 내 핸드폰을 챙겨왔다. 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나는 간신히 힘을 내어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주님, 제가 석씨 가문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운성에는 석씨 가문이 인수한 병원이 있었고 이런 병원은 운성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 퍼져 있었다.“알겠어요.”내 대답을 들은 함승윤이 물었다.“현정우는요? 왜 가주님 곁에 없습니까?”나는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대답했다.“오늘 하루만 쉬라고 했어요.”함승윤은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주님, 이런 결정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정우가 저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어요.”“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면 반대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산 아래에는 석씨 가문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잖아요. 저는 별장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으니 위험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함승윤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가주님, 곁에 아무도 없는 상황은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처럼 이런 일이 생기면 어쩌실 겁니까? 가주님의 몸 상태를 고려하면 절대 혼자 계셔선 안 됩니다.”그가 내 건강 상태에 대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대답했다.“알겠어요. 병원 주소를 보내주세요.”전화를 끊은 뒤, 함승윤은 곧바로 병원 주소를 보내왔다.나는 핸드폰을 고현성에게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잃고 말았다.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누구세요?”이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야.”나는 무의식중에 물었다.“누구죠?”“수아야, 넌 한때 나를 믿고 사랑했던 사람이야.”“제가 사랑했던 사람이요
2년 전, 나는 고현성의 세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한다.내가 깨어난 후, 최희연이 그가 얼마나 슬프고 절망했는지 과장되게 이야기해 줬다. 그녀는 그때 그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이후로 계속 그를 편들었다고 말했다.“이번에는 내가 알아.”그가 했던 이 말은 무겁고 낮은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지금의 고현성은 나를 마주할 때마다 끝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마치 과거 내가 그를 대할 때처럼.그 모습은 내 마음을 찌르고 흔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고현성을 보고 있기가 어려워 눈을 감으며 차갑게 말했다.“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제 돌아가세요. 좀 쉬고 싶어요.”그는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나는 갑자기 눈을 뜨며 날카롭게 외쳤다.“그러지 마세요!”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간절히 말했다.“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런 목소리로, 그런 태도로 저를 대하지 말아 주세요. 저를 더 힘들게 하지 마세요!”고현성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더니,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그 순간, 내가 너무 가혹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통증이 한참 가라앉고 나서야 나는 멍하니 링거 주사를 바라보다가 문밖에 있는 함승윤을 불렀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자 나는 물었다.“제 상태가 어떤가요?”그는 이미 내가 상황을 짐작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숨김없이 말했다.“가주님의 몸 상태는 현재로선 좋지 않습니다.”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의사는 뭐라고 하나요?”“병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습니다. 약을 제때 먹고 치료를 잘 따라야 병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조용히 물었다.“얼마나 더 살 수 있나요?”병이 억제된다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 그건 의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진지하게 말했다.“이 일은 절대 외부로 새지 않게 하세요. 고현성 외에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책임을 물을 겁니다.”
‘이걸 왜 인제서야 떠올린 거지? 나도 참 멍청해.’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원태웅에게 물었다.“태웅 오빠, 무슨 일이세요?”“수아야, 석지훈 말이야. 한 달째 실종됐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가 에르크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랑도 연락이 전혀 닿지 않아. 마치 모든 걸 버리고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아.”나는 대략 석지훈이 아직 WT에 머물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하지만 원태웅의 말투로 보아 그는 내가 석지훈과 갈라섰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왜 한 달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이 사실을 내게 말하는 걸까? 그리고 왜 석지훈은 계속 WT에 머물러 있는 걸까?크리스가 말하길 WT는 그의 영역이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이 맞다고 믿었다.하지만 석지훈이 왜 원태웅과의 연락을 끊고 한 달이나 자취를 감춘 걸까?이건 그의 평소 행동과는 너무도 달랐다. 가슴 한구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와 나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왜 이제야 저한테 말해요?”그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며칠 전부터 계속 너한테 전화했는데 연결이 안 됐잖아. 그뿐만 아니라 지훈이도 실종되고 너도 연락 두절이었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어!”며칠 전이라면...나는 그때 계속 의식이 없었다. 며칠 전 깨어났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핸드폰 기록을 볼 여유조차 없었다. 게다가 저장된 통화 기록만 해도 수백 개라 누구한테 전화가 왔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미안해요. 제가 그동안 핸드폰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요.”원태웅은 석지훈의 행방을 걱정하며 그의 소식을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저도 지훈 오빠와 연락하지 않았어요. 우리 둘은... 이미 헤어졌어요.”그는 충격을 받은 듯 물었다.“헤어졌다고?”“네, 지훈 오빠가 먼저 얘기했어요.”원태웅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지훈 오빠는 너랑 헤어질 리가 없다고!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수아야, 제발 오해하지 마.”나는
아일랜드의 눈은 잠깐만 내렸고 기온은 영하 2도 정도로 크게 춥지 않았다. 하지만 내 몸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지나치게 쇠약해진 몸 상태 때문일 것이다.WT의 위치는 아일랜드 북쪽의 깊은 숲속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6시였다.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현정우는 차를 WT 기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다.나는 두꺼운 옷을 단단히 여미고 차에서 내렸다. 백미러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숨이 넘어갈 듯 창백했고 붉게 충혈된 눈은 생기가 없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내 창백한 얼굴과 대비되어 더더욱 비참해 보였다. 나는 눈 덮인 땅 위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옆을 돌아보니 석씨 가문의 수백 명이 무기를 들고 현정우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그들이 모두 내 곁을 지나간 뒤에야, 나는 조용히 옆에 있던 함승윤에게 물었다.“제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요?“더 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켜 복수를 한다는 것. 이 방법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 싶었다.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함승윤은 차분하게 답했다.“희생은 원치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석씨 가문이 복수를 하는 것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전 세계 권력자들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결단을 내리신 것은 옳은 선택입니다.“그의 말이 논리적임은 알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메시지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죽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에게 최소한의 정의를 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WT 기지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이 쌓인 길을 걷는 것이 쉽지 않았고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현정우와 나머지 스물세 명의 경호원들은 내 바로 뒤에서 내 안전을 지키며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5분 정도를 걸었을 때, 우리는 눈더미를 돌아 WT 기지
한 달 만에 만난 석지훈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 차가웠고 그의 옆에는 무장한 크리스가 서 있었다.크리스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하게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곧 내 주머니 속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받을 필요가 없었다.조소를 담아 크리스를 쏘아보자 그는 움찔하며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눈을 감고 물었다.“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죠?”“가주님, 대략 10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네.”대답을 마치고 나는 아래에서 벌어질 참혹한 상황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7, 8분쯤 흘렀을 때, 함승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끝났습니다! 가주님, 크리스를 생포했습니다.”“네. 석지훈은요?”내가 물었다.“석 대표님은 스스로 투항했습니다. 지금 저희 요원들이 그들을 끌어오는 중입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몇십 미터 정도 남았습니다.”함승윤은 시종일관 석지훈을 ‘석 대표님’이라고 불렀다.지금은 우리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석지훈에게 늘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송 어르신이라는 작자는 어디 있어요?”“아일랜드에는 없습니다.”눈을 떠보니 아무도 석지훈을 제압하지 않고 있었다. 현정우가 그에게 베푸는 최소한의 예의인 것 같았다. 반면 크리스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이고 상처투성이였다.그들은 크리스를 마대 자루처럼 내 앞에 내던졌고 석지훈은 크리스 옆에 서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당연했다. 석지훈 이 남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나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나는 그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추스르고 크리스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뻔뻔스럽게 히죽거리며 말했다.“연수아 씨는 지훈의 여자이고 나는 지훈의 친구야. 결국 보면 다 같은 편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그리고 그날 일은 내가...”나는 가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