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 이중인격의 남자?그게 내가 얻은 것일까.고현성은 내가 그를 사랑할 동안 조금씩 우리 사랑을 갉아먹고 있었다.나는 문득 임지혜가 그를 차로 차는 장면을 떠올렸다.그때는 나도 고현성이 나를 떠날까 봐 많이 무서워했는데, 마치 지금 내가 석지훈의 빈자리를 무서워하는 것처럼.나는 그때 고현성을 지키지 못한 것처럼 이번에도 석지훈을 지키지 못했다.그뿐만이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그가 한평생 일궈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그를 감옥에 집어넣었다.석지훈 생각을 하자 또 가슴이 아파 난 나는 고현성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이거 놔요!”하지만 내가 그럴수록 고현성은 점점 더 나를 결박해왔고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내 이마에 입을 맞추려는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하지 말라고!”“나 힘들어 수아야. 네가 석지훈 그놈 옆에 있는 걸 보는 게 난 너무 힘들어. 나 자신도 싫고 석지훈 그놈도 싫은데 가장 미운 건 너야... 내 마음이 너무 아파...”“나 좀 그만 괴롭혀요! 나 임신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흥분하면 안 좋아요. 아이 가지는 게 나한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나 좀 놔줘요...”“뭐라고?”나를 떼어놓고 빨개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에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말했다.“임신했다고요, 내 몸 상태가 아주 안 좋대요. 임신도 불가능한 몸에서 기적처럼 생긴 아이예요. 이번에도 유산하면 나는 평생 엄마가 되지 못할 거에요. 고현성 씨,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당신이 날 아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내가 이 아이라도 지킬 수 있게 좀 도와줘요.”그의 동정심이라도 얻어보자고 한 말에 고현성은 차갑게 물어왔다.“석지훈 애야?”“네.”내 말을 들어주려는 건지 고현성은 눈을 감으며 뒤로 한발 물러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네 첫 아이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 일단은 네 말대로 할게. 그러니까 너도 약속 하나만 해줘.”“무슨 약속이요?”고현성이 나를 건드리지만
그 말을 하는 고현성의 표정이 너무 차가워서 나는 둘 사이에 필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무슨 일인데요?”그는 내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내 볼을 쓰다듬으려 손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나 때문에 고현성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붕 뜨게 되었다.웬일인지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네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이면 그분들이 힘들어지실 거야.”“우리 부모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무슨 짓이라니? 두 분은 그냥 우리 집에 손님으로 계시는 거야.”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건 또 어떻게 안 건지 이번에도 기가 막히게 내 약점을 찾아내 나를 쥐고 흔드는 고현성이었다.“당신은 진짜 비겁한 인간이에요.”밀려오는 분노에 내가 몸을 떨며 말하자 눈을 감았다 뜬 고현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네가 석지훈이라 계속 같이 있는 다면 가장 먼저 다치는 건 네 부모님이 될 거야, 네가 아무리 석씨 집안 가주라 해도... 그러고 보니 석지훈도 대단하다 참, 집안을 너한테 다 넘겨주다니.”내가 석씨 집안 핏줄인 건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해명하지는 않았다.이내 고현성은 하던 말을 마무리 지었다.“네가 석씨 집안을 무기 삼아 나한테 덤빈다 해도 난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야, 내 목숨을 걸고 널 괴롭힐 거야.”눈에 보이는 게 없는 고현성은 그야말로 미친놈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고 보는 또라이가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였다.“연수아, 아이를 무사히 낳고 싶다면 석지훈한테서 멀어지는 방법 밖에 없어. 아, 그리고 네가 한 가지 더 협조해야 할 일이 있어.”“뭔데요.”“나랑 사진 좀 찍자.”나는 당연히 거절하려 했지만 역시나 고현성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 강제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그는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며 나를 협박했다.“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난 이걸 석지훈한테 보내줄 거야. 아무리 너그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잠은 자는 둥 마는 둥해서 그냥 눈 뜬 채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때 고현성이 나와 찍었던 다정해 보이는 사진을 보내왔다.그에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유산 방지약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석만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내 친아버지라는 석씨 집안 옛 가주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면서 내가 아무리 빌어도 눈 깜짝하지 않고 석지훈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집중하던 사람의 연락이라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그러자 그는 바로 문자를 보내왔다.[가주님,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 가주님께 반지를 하나 드렸을 겁니다, 다른 하는 석지훈 손에 있었는데 그것도 아마 이미 받으셨을 거고요. 두 반지를 합치면 주소가 하나 나올 텐데 그곳에 석씨 집안이 몇백 년 동안 모아온 금이 있어요. 그 정도면 한 나라의 재산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물론 그 금을 쓸지 말지는 가주님의 결정에 달렸지만 가주님이 이제 석씨 집안의 주인이시니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석만호의 말대로 석지훈의 반지는 나한테 있었다.“이 반지만 있으면 석씨 집안의 모든 세력을 움직일 수 있어.”나는 그가 이 반지를 건네며 했던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그때는 그가 나를 이 집안의 안주인으로 인정해서 주는 선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석지훈은 내가 석씨 집안의 핏줄인 걸 알고 그저 내 것이었던 것을 돌려주려 한 것 같았다.석지훈은 조금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걸 진작 내려 놓은 것이다.구청에 서류를 접수하러 간 날도 치마를 입고 있은 탓에 목에 건 이 반지가 훤히 보였을 텐데, 그렇다면 석지훈이 이미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한다는 것도 알았을 텐데, 석만호는 그에게 그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나의 친아버지라는 사람은 참 이기적이면서도 헌신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그는 나에게 모든 걸 내어주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놔주지 않았다.그날 밤, 친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받은 서류를 나는 석지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면서도 그는 한사코
의사는 불안해하는 나를 진정시키며 서둘러 검사를 진행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결론을 내렸다.“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생긴 출혈입니다. 유산 징조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리 위험한 건 아니에요.”유산 징조라는 말에 내가 다급히 의사의 팔을 부여잡으며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 하자 의사는 나는 다독이며 말했다.“아이는 무사해요, 병원에서 일러준 시간에 검사받고 약도 잘 먹으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분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기쁘거나 슬프거나 너무 지나친 흥분은 산모한테도 아이한테도 안 좋아요. 많은 산모분들이 감정통제를 어려워하셔서 유산을 하곤 하세요.”“척추가 안 좋으시네요.”“네?”“병원 이력에는 척추가 다치셔서 검사받은 적이 있다고 뜨네요. 중추신경이 지금 회복 중이라서 지금 임신하면... 본인 몸이니까 잘 아실 거예요, 지금은 임신이 적합한 시기가 아니에요. 저는 아이 지우는 걸 추천 드립니다, 잘 쉬시고 건강 회복한 다음에...”계속해서 내 병원 이력을 찾아보던 의사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나를 보며 물었다.“자궁암 걸린 적 있으세요?”“네.”“자궁을 잘라낸 건 아니지만 암으로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어요, 게다가 척추도 그렇고... 지금 임신을 유지하면 산모님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아이를 지우시는 게...”나는 의사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제 몸 상태는 보셨으니 아실 거예요, 이런저런 병도 많고 신장 이식도 받은 몸이죠. 그래서 이번 기회 아니면 다시는 임신 못 할 거예요. 엄마가 될 수 있다면 목숨은 얼마든지 걸 수 있어요.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가장 좋은 약 써주시고 아이 잘 낳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가족분들은 알고 계세요?”“네, 알아요.”“남편분은요?”의사가 내 병에 대해서 물어볼 때 나는 석지훈이 나에게 아이를 지우라 한 것도 내 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라도 착각하는
나는 서둘러 사과했다.“미안해요.”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아이는 잘 있어?”나를 보자마자 아이의 안부를 묻는 모습에 나는 그가 오늘 밤 내 배 속의 아이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언제 돌아왔어요?”“방금 도착했어.”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싸늘했다. 나는 약간 두려웠지만 그리운 마음에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그 앞에 서서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난 오빠의 반평생 사업을 망쳐버린 범인이에요!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요. 오빠한테 미안하고 오빠의 호의를 저버려서. 나도 정말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난...”석지훈은 담담하게 응수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동자엔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런 눈빛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몹시 괴로웠다.“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석지훈이 갑자기 던진 질문에 나는 멍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그는 내 작은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담담하게 물었다.“내가 떠날까 봐 겁나?”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지훈은 돌연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남자의 뛰는 심장 박동을 선명하게 느끼며 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오빠는 나를 원망하지 않아요?”내가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자 그는 갈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야, 내가 전에 했던 말을 어떻게 다 잊었어?”여전히 나를 아가라고 불러주다니!나는 순간 억울한 마음이 북받쳐 물었다.“무슨 말을요?”“우리 인생은 너무 짧은데 너와 함께할 시간은 더 짧아. 적어도 내 삶의 거의 삼십 년 동안은 네가 없었으니까. 오해, 고통, 숨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만 할 뿐이야. 기쁘든 슬프든 난 너를 밀어내지 않을 거야. 네가 이 말을 평생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그가 전에도 했던 말이었지만 석지훈이 다시 이 말을 꺼내자 내 마음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동안의 답답함이 뻥
석지훈은 진유겸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내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귓불을 매만졌다.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행복에 겨워 웃음을 터뜨렸다.그가 나를 오해하지 않아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믿어줘서 정말 고마웠다.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드는 순간, 아이를 지우라는 그의 말과 고현성의 협박이 떠올랐다...“오빠, 태웅 오빠한테서 오빠 얘기 들었어요.”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렸다.“어. 알아.”그가 말했다.“우리 사이 끝났다고 했다던데.”그는 솔직하게 말했다.“난 네가 아이를 지우길 바랐어.”“하지만 이 아이는 내게 정말 소중해요.”곧 몇 번의 천둥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동성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우리 관계의 끝을 예고하듯이.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놓고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멍하니 뒤로 물러나 침대에 앉았고 더 이상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비아드에선 어떻게 나왔어요?”“진유겸도 날 계속 잡아둘 순 없다는 걸 알았겠지. 게다가 원하는 걸 이미 얻었으니 굳이 날 잡아둘 이유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호의를 베풀어 보내준 거지.”진유겸이 석씨 가문의 압박을 무릅쓰고 석지훈을 풀어주다니...나는 그들의 관계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것은 그저 단순한 사업적 경쟁 수단일 것이다.“그럼 오빠의 권력은...”그의 남은 권력이 얼마나 될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권력을 무너뜨린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석지훈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인생사 새옹지마라잖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배를 응시했다.“아이는 지워.”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그의 확고한 태도에 너무나 두려워진 나는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석지훈이 내 손길을 거부한 건 처음이었다.예전
나는 아직도 그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아이를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하게 하다니. 나는 문득 석지훈이 나를 떠나려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그래서 이런 답이 뻔한 선택을 제시한 것이다.그는 내가 떠나도록, 내가 나쁜 사람이 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에 나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물었다.“나를 떠나고 싶은 거예요?”내 말에 석지훈은 침묵했다. 그의 눈에는 창밖으로 흐르는 강물과 화려한 불빛만이 담겨 있는 듯했다.나는 그의 결심을 깨달았다.내 선택과 상관없이 그는 떠날 거라는 걸. 오늘 나를 만난 건 그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에게 오해는 우리의 이별 이유가 아니었다.확실히 그는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니까.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떠나고 싶어 했다.상처 입은 사자는 상처를 핥을 시간이 필요하니까.나는 그렇게 생각했다.이것이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그를 망가뜨린 건 나였으니까.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슬픔은 너무나 선명했다.“오빠, 나는 아이를 선택할 거예요.”나는 진심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그는 돌아서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몇 초간 응시한 후,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나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한마디 말만 꺼냈다.“그동안 날 사랑해줘서 고마웠어요.”그 말을 들은 그는 아무 말 없이 차갑게 방을 나섰다.단 한마디도 없이 매정하게 방을 떠났다.석지훈은 생각보다 훨씬 더 냉정했다.나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서럽게 울었다.나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나에게도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그러니 우리의 이별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이젠 때가 된 것이었고 우리는 결국
폭우가 더 거세졌다. 나와 거리가 멀었던 탓에 나는 석지훈이 내가 한 말을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목 터져라 소리쳤다.“내가 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8개월만 시간을 줘요. 그때 내가 살아있다면... 아이랑 함께 오빠 찾아갈게요. 그땐, 오빠의 아내가 되어도 될까요?”한 번도 나를 상처 입히지 않고 한없는 응석을 받아주었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준 고고한 이 남자를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다.다시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나는 두 번 다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그는 내 인생의 유일한 남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분명 마지막 남자일 것이다.석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가 야속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오빠, 나도 너무 두려워요. 오빠가 떠나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워요. 하지만 이 아이를 잃는 건 더욱 두려워요. 난 생각만큼 강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약하기 그지없죠. 하지만 이 아이는 내 유일한 용기예요. 내 말, 이해하겠어요?”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온몸이 흠뻑 젖은 그의 모습에 나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감옥에서 다친 걸까?“다쳤어요?”나는 걱정스레 물었지만 그는 차갑게 침묵했다.더 이상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맥이 탁 풀리는 순간, 석지훈은 돌아서서 밤 속으로 사라졌다.그때,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반지였다.얼마 전, 나는 선물을 들고 비아드에 갔었다. 그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 선물로 결혼반지를 주려고 준비한 것이다.하지만 그날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진유겸이 안에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지만 마음이 아팠다.물론 그에게도 나를 만나지 않을 이유는 있었다.결국, 그에게 심한 타격을 입힌 건 나였으니까.그를 실망시킨 것도 나였다.사실 석지훈은 최선을 다했다. 오해하지 않았다고 말하러 온 건
“고현성의 이름 한 번만 더 입에 올리면 그 자식 죽여 버릴 거야.”석지훈의 숨결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목소리에는 섬뜩한 위협이 담겨 있었다.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나한테는 직접 어쩌지 못하니 고현성을 건드리겠다는 건데, 하필이면 그게 내 약점이었다.나는 더 이상 고현성 얘기를 꺼내지 못했지만 이 상황이 너무 불편해서 석지훈을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당장 놔줘요!”석지훈의 품은 너무나 편안했지만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날 번쩍 안아 올려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소파에 내려놓았다.크고 푹신한 소파에 푹 파묻히자 나는 잠시 멍해졌다...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의 아름다움에 취한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물었다.“대체 뭘 어쩌자는 거예요?”석지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여전히 내 말을 무시했다. 마치 냉혹하고 잔인한 킬러처럼 차가운 표정이었다.그의 긴 손가락이 셔츠 깃을 풀더니 검은 넥타이를 풀어 내 몸 위로 던졌다. 내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그가 나지막이 경고했다.“다시 움직여 봐.”‘내가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나?!’일어서서 나가려는데 석지훈이 내 손목을 잡아 그의 품 안에 가뒀다.나는 그의 품에서 있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꾸준히 무술 단련을 해 온 강한 남자였고 나는 여자였다. 아무 힘도 없는 연약한 여자가 그에게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대체 어떻게 해야 그를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석지훈은 소파에 있던 검은 넥타이로 내 양손을 묶었다.‘그는 대체 뭘 하려는 걸까?! 현정우 일행이 아직 별장 입구를 지키고 있을 텐데!’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다급해진 순간, 석지훈이 갑자기 갑자기 앉더니 내 손을 풀어주고는 나지막이 말했다.“윤아야, 나 약 좀 발라줘.”‘그냥 약을 발라 달라고? 그럼 지금까지 내가 혼자 김칫국 마신 거였나?’나는 얼굴이 굳은 채 석지훈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는 차 문을 열고 들어가 병원을 떠났다.석지훈을 따돌렸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나는 시내 아파트로 돌아가지 않고 하늘이 밝아오는 틈을 타 산꼭대기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 뒤에는 현정우의 차량 행렬이 따라오고 있었다.산꼭대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다. 나는 차를 별장 입구에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잔디밭에 세워진 헬리콥터를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뒤따라온 현정우에게 물었다.“누구 거예요?”현정우도 당황하며 말했다.“모르겠습니다.”나는 주저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보자 가슴이 답답해져 짜증이 밀려왔다.“짜증나게 이럴 거예요?”그는 내 행적을 꿰뚫고 있었다.그래서 헬리콥터를 타고 별장에 직접 온 것이었다.석지훈은 나를 흘끗 쳐다보면서 말했다.“어른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른인 척 훈계까지 했다.나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져서 현관에 서서 말했다.“전에 지훈 씨가 헤어지자고 했고 나도 동의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태웅이가 설명 안 해줬어?”원태웅이 설명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내가 따지려던 참에 석지훈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석지훈의 외모는 매우 수려했다. 예전에 그를 천상계에서 내려온 신선 같다고 말한 적이 있듯이 나는 이 얼굴을 보면 정말 화를 낼 수가 없었다.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의 가슴을 찌르는 말을 했다.“예전에 현성 씨도 해명했지만 내가 용서하던가요?”석지훈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손으로 내 머리를 잡고 그의 티 하나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보도록 강요했다.나는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석지훈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정말 나를 떠날 거야?”헐?!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그가
그 말에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마침 옆에 있던 남자가 잡아주었고 나는 애써 기운을 차리고 현정우를 따라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차에 타자 현정우는 계속 차 문을 닫지 않았다. 그래서 의아함에 물었다.“왜 안 가요?”현정우가 대답했다.“석 대표님께서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시려는 것 같은데 가주님이랑 같이 가려는 것 같습니다.”“문 닫아.”나는 지시했다.“가주님, 전...”현정우는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는 예전에 석지훈의 밑에서 일했었기에 그를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가 직접 차 문을 닫으려는데 남자의 손바닥이 이미 차 문에 닿았다. 나는 멍하니 물었다.“무슨 뜻이죠?”석지훈은 내 말을 무시하고 거만하게 내 차에 올라탔다.나: “...”계속 말도 안 하고 예전처럼 과묵 모드로 돌아간 것 같아서 진짜 짜증 났다.“내 차예요.”내가 경고했다.석지훈은 정곡을 찌르며 말했다.“친구 걱정 안 해?”나: “...”이 사람한테 시간 낭비할 겨를이 없어서 나는 기사님께 빨리 가자고 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 수술실 앞에는 진유겸이 지키고 있었다.그의 온몸은 피투성이였는데 그 피는 최희연의 피였다.지금은 누가 그랬는지 따질 상황이 아니었고 다들 최희연이 살아남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새벽까지도 그녀는 수술실에 있었고 석지훈은 신기하게도 병원을 떠나지 않았다.최희연이 수술실에서 나온 것은 새벽 네 시였다.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폭발로 인한 흉터가 가득했다.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지만 그녀는 죽은 듯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진유겸이 의사에게 물었다.“어떻습니까?”“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환자는 내일쯤 의식을 되찾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얼굴의 흉터는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다리에 파편이 많이 박혀서 제거하는 과정에서 구멍이 많이 생겼습니다.”나는 의사의 말뜻을 이해했다. 구멍 하나하나가 흉터가 될 것이었다.그래도
현정우가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그에게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나는 그녀의 몸에 바로 발길질을 했다. 새하얀 드레스에는 순식간에 발자국이 남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때리지는 못하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지시했다.“최희연을 패!”그들을 화나게 한 것은 나였지만 그들이 때리려는 사람은 최희연이었다.요즘 세상은 이렇게 삭막했다.강한 자는 약한 자를 괴롭히고 어른은 아이를 괴롭혔다.나는 2층에서 두 남자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는 것을 곁눈질로 보고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유겸 씨, 당신 여자 안 챙길 거예요? 안 챙길 거면 평생 챙길 생각 말아요!”왠지 모르게 석지훈의 눈가에 미소가 어려있는 것 같았다.진유겸과 석지훈이 아래층으로 내려오기도 전에 그 재벌가 아가씨들의 어른들이 와서 그녀들을 끌어갔다. 최희연은 짜증 난다는 듯이 말했다.“저 사람들 파리처럼 엄청 귀찮게 구네.”“아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얼굴이 그렇게 안 좋아 보여”내 질문에 최희연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솔이.”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왜?”“아까 계속 그녀가 유겸 씨를 차버렸다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엄청 곤란했지. 마치 내가 둘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잖아!”“정말 네가 그랬다 해도 너도 피해자야!”최희연은 우울하게 말했다.“맞아. 난 유겸 씨에게 약혼녀가 있는 줄 몰랐어. 그리고 나랑 유겸 씨는... 우린 1년 전에 혼인 신고를 했단 말이야. 나는 그의 법적인 아내라고!”나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한 번도 말 안 했어?”“혼인 신고할 때 유겸 씨는 별로 날 사랑하지 않았어. 그래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저 우리 사이가 앞으로 더 굳건해지길 바랐었지! 수아야, 난 지금 유겸 씨가 나랑 이혼하자고 할까 봐 제일 두려워. 혼인 신고할 때 약속했거든. 누구든 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그만둘 수 있다고. 그건 내가 그에게 한 약속이야. 지금은 너무 후회되지만!”나: “...”최희연은 어떻게 진유겸에게 그런 바보 같은 약속을
방금 고현성의 이름을 부른 건 일부러 석지훈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우리 사이는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까.그가 찌른 칼 때문이 아니라 가장 큰 이유는 내 병 때문이었다...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좋은 것 같았다.서로에게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켜줄 수 있으니까.나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난 현성 씨를 선택할게요.”난 고현성을 따라 아까 그 방으로 돌아갔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욕실에서 따뜻한 수건을 찾아 그에게 건넸다.그는 수건을 받아 얼굴에 대고 사과했다.“미안해, 방금 그 말들은... 일부러 그를 힘들게 하려고 한 말이야.”“괜찮아요. 나도 방금 당신 이용했으니까.”나는 그를 이용해서 석지훈을 밀어내려고 했다.고현성은 이해하는 듯했지만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알아, 네 몸 때문이라는 거. 2년 전처럼... 근데 2년 전엔 날 밀어내지 않고 사귀자고 했잖아. 근데 왜 지금은 그때만큼 용기가 없는 거야?”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당신은 그때 날 사랑하지 않았으니까.”이 말에 고현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현성이 날 사랑하지 않았으니 그와 연애를 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내가 떠날 때 그가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석지훈은 날 사랑했다. 그래서 난 그가 나를 잃는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 난 석지훈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어딘가에 숨을 것이다.“찜질 좀 하세요. 희연이도 이젠 왔을 테니 내려가 볼게요.”난 서둘러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하자마자 최희연이 여러 재벌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최희연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해 큰 억울함을 당한 것처럼 말이다.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누군가 묻는 말을 들었다.“솔이 씨는?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솔이?!설마 진유겸의 그 약혼녀인가?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최희연을 바라보며
석지훈: “...”고현성이 나를 말하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고현성의 이 말은 석지훈의 마음을 깊이 찔렀다.석지훈을 화나게 하기 딱 좋은 말들이었다.고현성은 나지막이 말했다.“난 예전엔 걔가 내 평생 마누라가 될 거라고 확신했었어. 날 사랑했으니까. 비록 그때 그녀는 자신이 엉뚱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몰랐지만 난 그녀를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지! 그런데 나중에... 난 그녀를 계속해서 실망시켰고 바로 그때 네가 그녀 옆에 나타나서 그녀가 원하는 따뜻함을 줬어. 난 그녀가 왜 널 선택했는지 항상 이해할 수 있었어.그녀라는 사람을 내가 너무 잘 아니까. 그녀는 따뜻함이 엄청 부족해서 조금이라도 따스하면 꼭 붙잡으려고 했어!”“그래. 그녀는 연씨 가문의 대표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린 나이에 유명하고 권력이 대단했지만 결국은 애에 불과했지.”이렇게 말한 건 석지훈이었다.나는 그가 고현성의 말에 대답할 줄은 몰랐다.그의 성격답지 않았다고현성은 후회와 억울함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난 그녀를 살리고 싶었어. 그녀가 잘 살기를 바랐기에 서정과 결혼했던 거지. 근데 그게 오히려 그녀를 무너뜨리는 마지막 계기가 돼서 그녀를 너한테 보내버렸어. 결국 난 아무것도 못 하고 그녀를 잃었던 거야! 그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다 내가 그때 너무 쉽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탓에 그녀랑 남이 돼버린 거야!”멀리서 석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마워.”고현성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뭐가?”“그녀를 내 곁으로 보내줘서.”두 사람의 대화에서 석지훈은 먼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고현성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넌 그저 줍줍남일 뿐이야! 너희 사랑이 순탄할 거 같아? 지금 그녀는...”석지훈은 담담하게 경고했다.“뒷말은 닥쳐.”고현성은 겁 없는 남자였고 제일 싫어하는 게 위협이었다. 그는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석지훈에게 물었다.“내가 길들인 여자, 만족스러워?”석지훈은 몸을 돌려 고현성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고현성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원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성으로 돌아온 후 형이 말하더라. 널 칼로 찔렀다고. 너도 알잖아. 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꾹 참고 말 안 하는 성격이라는걸. 그런데 이번에는... 네가 오해할까 봐 엄청 걱정하더라.”석지훈은 원태웅에게 말했고 원태웅은 내게 설명해주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날 송 어르신이 석지훈에게 나를 찌르라고 시켰던 게 떠올랐다. 그 얘기를 하자 원태웅은 잠시 침묵하더니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은 타이탄의 새 두목인데 형한테 기술은 많이 가르쳤지만 질투가 심하고 잔인해서 누구도 형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꼴을 못 봐. 그 상황에서 형은 너한테 관심 없는 척해야 널 살릴 수 있었어. 송 어르신의 질투심 달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지.”잠시 말을 멈춘 후, 원태웅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송 어르신은 네가 석씨 가문 사람이라는 게 좀 껄끄러웠겠지만 형이 너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드러냈다면 그는 석씨 가문과 척질 각오였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상황에선 형이 너한테 차가운 척해야 송 어르신의 질투심이 약해지고 네가 석씨 가문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널 보내줄 수 있었던 거라고.”그럼 석지훈이 날 찌른 건 날 살리기 위해서였던 건가?그럼 내가 그동안 힘들어했던 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단 말인가?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를 위한답시고 날 구했다.그야말로 따귀를 때리고 사탕을 주는 격이었다.이게 그 당시 고현성이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원태웅은 내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아직도 속으로 형을 원망해? 그런 상황에서, 네 생사가 걸린 선택 앞에서 형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비록 칼은 네게 꽂혔지만 형 가슴에 꽂힌 거나 마찬가지지! 형도 똑같이 아프고 괴로웠다고. 윤아야, 형이 널 얼마나 아끼는지 우린 다 알아. 넌 형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형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네가 다치거나 그로
고 씨 저택은 환한 불빛에 잠겨 있었고 2층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석지훈은 너무나 낯설었다. 낯설고 차가워서 온몸에서 음침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석지훈은 진유겸을 무시했다. 나는 진유겸을 흘끗 쳐다보고는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본인 일이나 신경 쓰시죠.”“허, 협박하는 거예요?”나는 협박이 아니라 정중한 충고를 한 것이었다.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나는 진유겸이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묻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었다.“또 저 여자를 화나게 한 거야?”석지훈은 대답하지 않았고 진유겸은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는 정말 귀찮아.”그의 말투를 들으니 어젯밤 최희연이 그를 괴롭혔던 것 같았다.하지만 최희연의 성격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서서 방에 있는 생수를 찾아 한 모금 마시고 한참 후에 가방에서 항암제를 꺼내 두 알을 먹었다.내 병세는 확실히 악화됐다. 지금 내 상태로는... 그저 이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의사는 자궁 적출을 권유했다.자궁 적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겨둬도 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임신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는 내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난 이번 생에 엄마가 되긴 글렀다.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아 있는데,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정우 씨, 누구세요?”“가주님, 원태웅 씨입니다.”원태웅?맨발로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원태웅이 품에 붉은 장미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그는 꽃다발을 내 품에 안겨주며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이야. 이건 형이 너에게 주는 거야.”“오빠가 주는 거면 오빠가 준 거라고 해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형에게 점수 따주려고 그러는 거잖아.”나와 석지훈은 헤어졌지만 원태웅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항상
[핀란드예요. 석지훈의 지시를 받고 일하러 왔어요.]나는 이 페이지를 캡처해서 고정재에게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재의 답장이 왔다.[고마워. 꼬마 아가씨.]그와 한민수 사이에서, 결국 난 고정재 편을 들었다.나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욕실로 가서 세수하고 나와 주방에서 컵라면 하나를 끓였다. 혼자 있을 때는 항상 컵라면을 먹었다.식사 후 고현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금은 의외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나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씨 가문 경축 행사에 나를 초대하려는 걸까?어젯밤 나는 최희연에게 저녁에 그녀를 따라 경축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주인의 초대 없이 함부로 가는 건 곤란했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오늘 밤은 고씨 가문 20주년 기념행사인데 널 초대하고 싶어. 수아야, 고씨 가문은 결국 네가 발전시킨 곳이잖아.”역시 그랬다.나는 대답했다.“알겠어요. 저녁에 갈게요.”내가 이렇게 흔쾌히 승낙하자 고현성은 조금 놀란 듯 말했다.“너...”“희연이랑 같이 갈게요.”전화를 끊고 손목시계를 보니 지금 화장하고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이때 마침 최희연에게서 문자가 왔다.고 씨 저택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그래. 이따 봐.]나도 답장했다.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느긋하게 화장을 했다. 진한 화장이 아니라 창백한 얼굴을 가리려고 볼 터치만 살짝 한 뒤, 어제 최희연이 선물해 준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코트를 들고 집을 나서니 현정우 일행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타면서 나는 현정우에게 제안했다.“함 집사에게 내 옆집 아파트 두 채를 사두라고 하세요. 내가 외출하지 않을 때는 거기서 쉬시고요.”현정우는 감격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가주님.”그들도 온종일 나를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현정우만 데리고 고 씨 저택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뒤뜰로 가서 사람들을 기다렸다.몇 분 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