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그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아이를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하게 하다니. 나는 문득 석지훈이 나를 떠나려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그래서 이런 답이 뻔한 선택을 제시한 것이다.그는 내가 떠나도록, 내가 나쁜 사람이 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에 나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물었다.“나를 떠나고 싶은 거예요?”내 말에 석지훈은 침묵했다. 그의 눈에는 창밖으로 흐르는 강물과 화려한 불빛만이 담겨 있는 듯했다.나는 그의 결심을 깨달았다.내 선택과 상관없이 그는 떠날 거라는 걸. 오늘 나를 만난 건 그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에게 오해는 우리의 이별 이유가 아니었다.확실히 그는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니까.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떠나고 싶어 했다.상처 입은 사자는 상처를 핥을 시간이 필요하니까.나는 그렇게 생각했다.이것이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그를 망가뜨린 건 나였으니까.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슬픔은 너무나 선명했다.“오빠, 나는 아이를 선택할 거예요.”나는 진심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그는 돌아서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몇 초간 응시한 후,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나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한마디 말만 꺼냈다.“그동안 날 사랑해줘서 고마웠어요.”그 말을 들은 그는 아무 말 없이 차갑게 방을 나섰다.단 한마디도 없이 매정하게 방을 떠났다.석지훈은 생각보다 훨씬 더 냉정했다.나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서럽게 울었다.나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나에게도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그러니 우리의 이별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이젠 때가 된 것이었고 우리는 결국
폭우가 더 거세졌다. 나와 거리가 멀었던 탓에 나는 석지훈이 내가 한 말을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목 터져라 소리쳤다.“내가 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8개월만 시간을 줘요. 그때 내가 살아있다면... 아이랑 함께 오빠 찾아갈게요. 그땐, 오빠의 아내가 되어도 될까요?”한 번도 나를 상처 입히지 않고 한없는 응석을 받아주었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준 고고한 이 남자를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다.다시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나는 두 번 다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그는 내 인생의 유일한 남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분명 마지막 남자일 것이다.석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가 야속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오빠, 나도 너무 두려워요. 오빠가 떠나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워요. 하지만 이 아이를 잃는 건 더욱 두려워요. 난 생각만큼 강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약하기 그지없죠. 하지만 이 아이는 내 유일한 용기예요. 내 말, 이해하겠어요?”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온몸이 흠뻑 젖은 그의 모습에 나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감옥에서 다친 걸까?“다쳤어요?”나는 걱정스레 물었지만 그는 차갑게 침묵했다.더 이상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맥이 탁 풀리는 순간, 석지훈은 돌아서서 밤 속으로 사라졌다.그때,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반지였다.얼마 전, 나는 선물을 들고 비아드에 갔었다. 그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 선물로 결혼반지를 주려고 준비한 것이다.하지만 그날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진유겸이 안에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지만 마음이 아팠다.물론 그에게도 나를 만나지 않을 이유는 있었다.결국, 그에게 심한 타격을 입힌 건 나였으니까.그를 실망시킨 것도 나였다.사실 석지훈은 최선을 다했다. 오해하지 않았다고 말하러 온 건
진유겸은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며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동성에 있는 그 여자는 괜찮겠어?”“괜찮지 않아도 별수 있나.”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평소답지 않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내 곁에 있으면 위험해질 거야. 게다가 다음 달이면 석씨 가문을 물려받는데 혼자서 성장할 시간이 필요해. 대가족을 이끄는 법도 배우고, 아이를 낳을 준비도 해야지...”석지훈은 그녀에게 임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억지로 막지 않았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결국, 그는 그녀에게 약해지고 만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하지만 지금은 그녀 곁에 있어 줄 수 없었고 기다려 달라는 이기적인 말은 할 수 없었다.살아서 동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희망을 주지 않는 게 나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을 십수 년간 알고 지냈다. 곁의 이 남자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밑바닥에서부터 한 계단씩 올라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 고통을 누구보다 공감했기에 그들은 적이면서도 친구였다.“그 여자가 그렇게 잘났어? 이혼에 낙태까지 한 여자가 너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진유겸은 일부러 석지훈의 심기를 건드렸다.지난번 자기 여자 나이를 두고 비꼬았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하지만 진유겸은 석지훈을 오해하고 있었다.그때 비아드 감옥에서 연수아의 나이를 묻자 석지훈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었다.“네 여자보단 몇 살 어리지.”그런데 진유겸은 그것을 자신의 여자를 조롱하는 말로 받아들였다.이 말에 석지훈은 그를 흘끗 보며 되물었다.“그럼 넌?”“적어도 내 여자는 결혼한 적 없어.”그런 걸로 우월감을 느끼는 진유겸이었다.세상 풍파 다 겪은 두 남자는 마치 공통된 화제를 찾은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었다.석지훈은 진지하게 말했다.“내겐 오직 그녀뿐이야. 그녀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진유겸도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석지훈이 떠난 그 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겨우 잠들었는데 얼마 못 가 전화벨 소리에 깨고 말았다.최희연이었다.나는 전화를 받으며 호기심에 물었다.“무슨 일이야?”최희연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지 않는 성격이었다.“수아야, 방금 삼촌한테 물어봤어.”그녀가 말하는 삼촌은 진유겸이었다.나는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와 관련 있는 일이야?”최희연은 한숨을 쉬었다. “어. 지훈 씨와 관련된 일이야.”나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 생겼어?”어젯밤에 떠났는데 설마 벌써...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 최희연은 한참 망설이다 말했다.“지훈 씨의 상황은 많이 위험하대. 예전에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잖아. 그동안은 지훈 씨가 강해서 감히 건드리지 못했지만 이젠 기회가 생긴 거지. 유겸 씨말로는 앞으로 반년 동안 지훈 씨는 도망자 신세가 될 거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고...”석지훈이 나를 떠난 것도 이 때문일까?자신도 위험한 상황이라서...나는 최희연에게 물었다.“유겸 씨가 또 뭐라고 했어?”“이렇게 몰린 지훈 씨는 처음 봤다고 하더라. 하지만 영웅은 결국 영웅이라고 언젠가 다시 일어설 거라고 했어. 그리고 유겸 씨가 너한테 전해주라고 하더라. 지훈 씨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오해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때가 되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진유겸이 최희연에게 그런 말을 전해 달라고 하다니.나는 씁쓸하게 말했다.“그건 유겸 씨 생각일 뿐이잖아. 어젯밤에... 내가 8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지훈 씨는 아무 말도 안 했어.”내 말에 최희연도 침묵했다.“내가 지훈 씨에게 잘못했어.”최희연은 나와 석지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말했다.“남자 마음은 잘 모르겠어. 난 예전에 고현성이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는... 너무 자기중심적이야. 그런데 지훈 씨는... 유겸 씨
고현성은 나의 가장 큰 약점을 쥐고 있으니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한 달 후, 석만호가 석씨 가문의 전 세계 권력 분포도를 가지고 찾아왔다. 석씨 가문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나는 거절했다.“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그것은 석지훈의 석씨 가문이었다.내 생각을 읽은 듯 석만호는 말했다.“가주님, 지금의 석씨 가문은 당신께 충성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받아들이시든 아니든 석씨 가문은 가주님의 것입니다! 게다가 석지훈 씨도 자신이 명백히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주님께 반지를 넘겨준 것입니다. 설령 나중에 가주님께서 석씨 가문을 그에게 주고 싶다 하더라도 그분의 자존심과 기개를 생각하면 절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가주님께서 지금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석씨 가문을 물려받고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장차 아이에게 든든한 버팀목을 마련해주셔야죠.”그의 말은 모두 옳아 반박할 수 없었다.맞는 말이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석씨 가문은 내 것이었다.석씨 가문은 더 이상 석지훈의 것이 될 수 없었다.석지훈은 절대로 석씨 가문을 다시 원하지 않을 테니까.석만호는 이 나이까지 살면서 정말 노련하고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몇 마디로 나를 할 말 없게 만들었다.내가 눈을 감자 그는 말을 이었다.“석 씨 저택의 첩들은 모두 내보냈고 일부 가정부들만 남겨 저택을 관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씨 가문의 안주인은... 옛 가주의 유언에 따라 석씨 가문에 계속 거주할지 선택할 수 있었지만 옛 가주를 원망하고 있어서 얼마 전 운성으로 이사했습니다.”그럼 석나은도 석씨 가문을 떠난 건가?나는 병원 앞에서 그녀와 만났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석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이 될 거라고 장담했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그녀는 연적이었지만 호의적인 연적이었다.온화하고 우아한 그녀는 석지훈에게 잘 어울렸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석나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오히려 눈앞의 석만호가 대단해 보였
석만호가 갑자기 친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 유산 공증 사무소에서 나온 이후로 나는 그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누가 나를 연 씨 가문에 보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아빠가 준 전화번호는 석지훈 어머니의 연락처였다. 아빠는 그녀가 내 친어머니라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내 친어머니가 아니었다.친어머니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그녀 스스로도 내 어머니라는 사실을 부정했다.하지만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석만호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나는 그가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가주님, 가주님의 친어머니는 24년 전 가주님을 석씨 가문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안주인을 믿었기에 그녀에게 가주님을 맡긴 것입니다.”확실히 24년 전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설날이고 내 24번째 생일이었으니까.시간은 정말 소리 없이 흘러갔다.어느새 또 한 해가 지나갔고 그 일 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나는 좀처럼 평온을 찾지 못했다.나는 감히 추측하며 물었다.“그 당시 안주인은 당신의 주인 몰래 나를 연 씨 가문에 보냈겠죠? 그래서 그분은 내 존재 자체를 몰랐고 그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도 몰랐던 거고요.”여전히 긴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쓴 석만호는 옛날 사람처럼 대답했다.“맞습니다. 저희가 안주인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채고 뒤쫓지 않았다면 옛 가주님께서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진실을 알지 못하셨을 겁니다.”석만호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눈물이 맺혔다. 그는 슬픔과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석씨 가문은 혈통을 가장 중시하는데 안주인의 행동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죠. 옛 가주님께서 그녀에게 편안한 최후를 허락하신 것만으로도 자비를 베푸신 겁니다.”나는 그의 모습에 놀라 멍하니 있었다. 석만호는 자신의 감정이 격해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옛 가주님께서는 석지훈 씨처럼 어린 시절 추방당하셨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석씨 가문으로 돌아오셨고 형제
눈앞의 노인은 노련하고 충성심 깊으며 일 처리 또한 빈틈이 없었다. 그는 석씨 가문에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나에겐 가장 골치 아픈 존재였다.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잘 가요.”석만호가 떠나고 나는 석씨 가문의 권력 분포도를 들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나는 분포도를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주방으로 갔다.점심을 만들어 먹은 뒤에야 나는 침실로 돌아와 권력 분포도를 집어 들었다. 분포도라고는 했지만 사실 문서에 가까웠다. 거기에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에 걸쳐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표시되어 있었다.어쩐지 모두 석씨 가문을 두려워하더라니.실제로 석씨 가문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나는 일어나 권력 분포도를 금고에 넣고 잠갔다. 금고 안에는 고풍스러운 반지 두 개도 함께 있었다.나는 반지를 꺼내 두 개를 겹쳐 안쪽을 보니 일련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모스 부호인가?잘 알지는 못했지만 관심도 없었다.반지를 다시 금고에 넣고 권력 분포도를 보니 ‘최고의 석씨 가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최고의 석씨 가문이라…석씨 가문의 뿌리는 석씨 가문 저택에 있었다.문득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금이 석씨 가문 저택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그렇다면 방금 본 숫자는 비밀번호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나는 더 생각하지 않고 금고를 잠갔다. 오후에는 태아 보호 주사를 맞으러 가야 했다.요즘에는 주사를 맞으러 갈 때마다 나는 반경우에게 전화를 했다. 고현성이 갑자기 나타나 괴롭힐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었다.경호원 몇 명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동성에서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은 반경우뿐이었다.요즘은 반경우 덕분인지 고현성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아니면 그가 약속을 지킨 것일지도 모른다.그는 내가 석지훈을 떠나면 가만히 놔두겠다고 했었으니까.반경우는 꽤 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태아 보호 주사를 맞고는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듯 서둘러 떠났다.나는 아
강해온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석씨 가문의 비서가 돼주기로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석지훈이 7년 동안 운영해왔던 그 회사로 향했다.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회사는 웅장하고 거대했는데 광활한 비즈니스 단지 전체가 석씨 가문의 소유였다.회사 책임자는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마중 나왔다.나는 회사 문 앞에서 용기가 없어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발을 내디뎌야 했다.나는 강해온의 팔을 잡고 석지훈의 옛 사무실로 향했다. 차갑고 절제된 색조의 인테리어는 영락없이 그의 스타일이었다.나는 사무실에 들어간 뒤, 모든 직원을 내보냈다.석지훈이 7년을 보낸 이곳에서 나는 마침내 견고한 껍질을 벗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속에 슬픔이 밀려왔다.이제 내 곁에는 배 속의 아이밖에 없었다. 만약 아이가 무사히 세상에 나온다면...그건 이 아이의 아빠를 만난 것 다음으로 큰 행복일 것이다.소파에 한참 앉아 있다가 안쪽 방으로 갔다. 침대, 옷장, 바가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옷장을 열어보니 석지훈의 옷이 가득했는데 검은 정장과 흰 셔츠뿐이었다.나는 옷장 문을 닫지 않고 침대에 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두 시간 정도 짧게 잤지만 무척이나 편안했다.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문 앞에서 강해온과 책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미안해요.”책임자는 바로 답했다.“아닙니다, 가주님.”나는 책임자에게 강해온을 소개했다.“이분은 나의 전 비서입니다. 앞으로 회사의 모든 업무를 이 사람에게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가주님. 다른 지시사항은 없으십니까?”책임자가 물었다.“없어요.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회사에 자주 오지 못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알겠습니다. 가주님의 안전을 위해 석씨 가문 사람들을 배치해 항상 가주님 곁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고현성을 경계해야 했기에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리고 다른 위험 요소도 배제할 수 없었다.“몇 명이나요?”“스무 명입니다. 모두 최고의 경호원들입니다.”“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