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노인은 노련하고 충성심 깊으며 일 처리 또한 빈틈이 없었다. 그는 석씨 가문에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나에겐 가장 골치 아픈 존재였다.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잘 가요.”석만호가 떠나고 나는 석씨 가문의 권력 분포도를 들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나는 분포도를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주방으로 갔다.점심을 만들어 먹은 뒤에야 나는 침실로 돌아와 권력 분포도를 집어 들었다. 분포도라고는 했지만 사실 문서에 가까웠다. 거기에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에 걸쳐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표시되어 있었다.어쩐지 모두 석씨 가문을 두려워하더라니.실제로 석씨 가문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나는 일어나 권력 분포도를 금고에 넣고 잠갔다. 금고 안에는 고풍스러운 반지 두 개도 함께 있었다.나는 반지를 꺼내 두 개를 겹쳐 안쪽을 보니 일련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모스 부호인가?잘 알지는 못했지만 관심도 없었다.반지를 다시 금고에 넣고 권력 분포도를 보니 ‘최고의 석씨 가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최고의 석씨 가문이라…석씨 가문의 뿌리는 석씨 가문 저택에 있었다.문득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금이 석씨 가문 저택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그렇다면 방금 본 숫자는 비밀번호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나는 더 생각하지 않고 금고를 잠갔다. 오후에는 태아 보호 주사를 맞으러 가야 했다.요즘에는 주사를 맞으러 갈 때마다 나는 반경우에게 전화를 했다. 고현성이 갑자기 나타나 괴롭힐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었다.경호원 몇 명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동성에서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은 반경우뿐이었다.요즘은 반경우 덕분인지 고현성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아니면 그가 약속을 지킨 것일지도 모른다.그는 내가 석지훈을 떠나면 가만히 놔두겠다고 했었으니까.반경우는 꽤 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태아 보호 주사를 맞고는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듯 서둘러 떠났다.나는 아
강해온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석씨 가문의 비서가 돼주기로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석지훈이 7년 동안 운영해왔던 그 회사로 향했다.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회사는 웅장하고 거대했는데 광활한 비즈니스 단지 전체가 석씨 가문의 소유였다.회사 책임자는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마중 나왔다.나는 회사 문 앞에서 용기가 없어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발을 내디뎌야 했다.나는 강해온의 팔을 잡고 석지훈의 옛 사무실로 향했다. 차갑고 절제된 색조의 인테리어는 영락없이 그의 스타일이었다.나는 사무실에 들어간 뒤, 모든 직원을 내보냈다.석지훈이 7년을 보낸 이곳에서 나는 마침내 견고한 껍질을 벗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속에 슬픔이 밀려왔다.이제 내 곁에는 배 속의 아이밖에 없었다. 만약 아이가 무사히 세상에 나온다면...그건 이 아이의 아빠를 만난 것 다음으로 큰 행복일 것이다.소파에 한참 앉아 있다가 안쪽 방으로 갔다. 침대, 옷장, 바가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옷장을 열어보니 석지훈의 옷이 가득했는데 검은 정장과 흰 셔츠뿐이었다.나는 옷장 문을 닫지 않고 침대에 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두 시간 정도 짧게 잤지만 무척이나 편안했다.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문 앞에서 강해온과 책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미안해요.”책임자는 바로 답했다.“아닙니다, 가주님.”나는 책임자에게 강해온을 소개했다.“이분은 나의 전 비서입니다. 앞으로 회사의 모든 업무를 이 사람에게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가주님. 다른 지시사항은 없으십니까?”책임자가 물었다.“없어요.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회사에 자주 오지 못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알겠습니다. 가주님의 안전을 위해 석씨 가문 사람들을 배치해 항상 가주님 곁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고현성을 경계해야 했기에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리고 다른 위험 요소도 배제할 수 없었다.“몇 명이나요?”“스무 명입니다. 모두 최고의 경호원들입니다.”“
[수아 언니, 오빠는 아직 몰라요.][언제 말할 거예요?]윤다은은 답했다.[설날에 말하려고요.]설날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의 곁에 있고 싶었다.정말 보고 싶었다.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휴대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 산후 도우미는 내가 우울해 보이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 있나요?”“아줌마, 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산후 도우미는 아이 아빠냐고 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보고 싶으면 만나러 가야죠.”“말씀처럼 그렇게 쉽나요.”나는 씁쓸하게 답했다.산후 도우미는 조용히 말했다.“요즘은 교통이 발달해서 아무리 멀어도 하루면 갈 수 있잖아요. 우리 때는 달랐어요. 남편이 일찍 죽었는데,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요.”산후 도우미의 말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설날에 비아드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석씨 가문의 전용기를 타고 갔다.동성에서 비아드까지는 네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비아드 거리에 도착했지만 에르크에 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솔직히 석지훈이 에르크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를 찾기 위해 따로 알아보지도 않았으니까.나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나는 주스 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자 백화점에 가서 새해 선물을 샀다.값비싼 롤렉스 시계였다.시계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나는 경호원들과 함께 에르크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나는 경호원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혼자 내렸다.커다란 저택은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누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석지훈이 집에 있는 걸까?아마 집에 있을 것이다.나는 대문 앞에 서 있었지만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며 나는 문 앞에 십여 분이나 서 있었다.마음속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가 차갑게 대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혹시나 그가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면...심호흡을 하고 나는 마당으로 들어가 초인종
저택 안의 불빛은 여전히 환했으니 분명 누군가 있었다. 나는 다시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빠, 이제 두 시간 후면 새해에요.]그가 아직 이 번호를 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석지훈은 답장이 없었다.손이 얼어 시뻘겋게 되자 나는 입김을 불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발밑의 쌓인 눈은 어느새 신발과 양말을 적시고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임신 중인 내 몸은 더 이상 이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더는 버틸 수 없어서 잠시 생각하다 다시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내 스물네 번째 생일이에요.]작년의 오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경험했다.그런데 올해도 마찬가지였다.나는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 그것도 내 손으로 그를 떠나보냈다.보낸 문자는 답장 없이 텅 빈 메아리만 남겼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이제 석지훈과 나는 완전히 남남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더 이상 그 사람 곁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따뜻한 눈길도 다정한 손길도 이젠 내 것이 아니었다.이런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 숨쉬기조차 힘들었다.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슬픔은 더욱 깊어만 갔다.그때, 이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올려다보니 냉랭한 표정의 원태웅이었다.그는 내 오빠이기 전에 석지훈의 동생이었다.그러니 그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석지훈의 행방을 묻고 싶었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창문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한씨 가문의 혼외자 한민수였다.그와 나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는데 그 역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왔어요?”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그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원태웅이 말을 받았다.“그 사람?”그는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굴?”석지훈을 찾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곤란하게 만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탐스러운 눈송이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려앉고 있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고요하고 순수한 그 남자를 닮아 너무나 아름다웠다.운성은 비와 눈이 잦은 곳이라 예전에 나는 습하고 차가운 눈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런데 이제는 이런 날씨가 좋았고 비아드의 눈 특히는 에르크의 눈이 좋았다.한 사람 때문에 한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이것은 돌아가신 석씨 가문의 옛 가주가 남긴 말이었다.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2층 창가에 서 있는 남자의 곧고 강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전히 잘생겼지만 표정은 차갑고 냉정했다.그는 정말 별장 안에 있었던 거였다.눈을 깜빡일 수도,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 찰나의 환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그러나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몇 초도 되지 않아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창가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내가 본 건 환각이었을까?나는 손으로 배를 감싸 안고 눈을 감았다.동성에 도착하니 새벽 5시였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잠들었고 눈을 뜬 건 다음 날 정오였다.새해라 산후 도우미도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우유를 한 잔 따라 소파에 앉아 카톡을 확인했다. 새해 인사 메시지가 많이 와 있었다.담현아의 문자가 눈에 띄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일 언니 집에 놀러 갈게요! 그리고 있잖아요. 민수 씨가 어제 나한테 자기 여자 하라고 했어요.]나는 웃는 얼굴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보냈다.[뭐라고 답했는데?]문자를 보내자마자 담현아의 답장이 왔다.[내가 뭐라고 답하겠어요. 난 내년 8, 9월이나 돼야 성인인데 민수 씨는 나보다 무려 열세 살이나 많잖아요. 엄마가 내 나이에 그런 사람 만난다는 거 알면 내 다리 분질러놓을걸요!]담현아의 문자를 보며 모처럼 웃음이 나왔다. 답장을 쓰려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세
내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현성은 내 태도를 눈치챘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이젠 내 전화도 받기 싫은 거야?”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그럼 내가 받고 싶겠어요?”고현성과 나 사이의 모든 정은 그가 다 닳아 없애 버렸다. 정말 그가 지긋지긋했고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연수아.”그가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예전에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건 맞아. 하지만 난 계속 만회하려고 노력했어.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예전에 내가 그렇게 널 상처 줬는데도 넌 날 사랑하고 용서해 줬잖아. 근데 내가 혜원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널 구하려고 했을 때 왜 날 떠난 거야?”나도 그 질문에 대해 수없이 생각했었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깊이 사랑했던 건 사실이지만 상처가 쌓이고 쌓이다 보니 두려워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믐날 그날, 바로 그가 임지혜와 결혼하기 전날 밤, 나는 희망을 잃고 침대에 누워 죽기만을 기다렸다.사실 그때 이미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중에 다시 고현성을 용서할 수 있었던 건 단지 내 병이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나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고 손에 닿는 따스함이 간절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준 것이었다.하지만 그는 또다시 나를 밀어냈다.그때 나는 그에게 오혜원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그는 내 뜻을 거스르고 말았다.물론 그도 날 살리려고 그랬다는 건 알지만 오혜원과 나 사이의 악연을 생각하면... 내게 좋다는 명목으로 날 상처 주는 건 정말 견딜 수 없었다.고현성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지금까지 너무 많은 걸 용서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용서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혜원의 부탁을 들어준 건 내게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마지막 일격이었어요. 이젠 정말 당신과 다시 얽히는 게 두려워요!”게다가 나는 그의 죽음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는 용서하기로 했다.“그럼 석지훈은?”고현성은 갑자기 석지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저희는 석씨 가문 최고 경호팀으로 이전에는 석 대표님을 수행했었습니다. 방금 함 집사의 전화를 받고 여기서 가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석씨 가문의 현 책임자 이름은 함승윤이었다.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운성에도 저희 석씨 가문의 사람이 있으니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스무 명의 경호원들은 그동안 암중에서 나를 보호했기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직 모두의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했다.“고마워요. 이건 세뱃돈이에요.”나는 가방에서 스무 개의 봉투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운성에 도착하면 나눠주세요.”경호원 중 한 명이 그것을 받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가주님.”“갑시다. 운성으로.”고현성을 만나러 가는 이 순간에도 나는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운성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석양 아래 맑은 하늘이 펼쳐졌는데 운성에서 이렇게 좋은 날씨는 보기 드물었다.경호원들이 고 씨 저택 앞에 차를 세웠다. 나는 차에서 내려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이것은 전남편의 집이었다.안에는 옛 지인들이 있었다.고씨 가문은 새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입구에는 색색의 등불과 대련이 걸려 있었다. 고 회장이 매년 직접 쓰는 대련이었다.“초인종을 누르세요.”내 말에 경호원이 초인종을 눌렀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다.고씨 가문의 오랜 집사였다.한때 나에게 잘 대해주었던 사람이었다.사실 고씨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아마도 내가 고씨 가문에 하향 결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나를 본 집사는 놀란 표정이었다.“사모님.”나는 그의 말에 정정했다.“전 사모님이 아니에요.”그는 그제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어오세요.”안으로 들어가자 놀랍게도 고정재와 윤다은 그리고 이혼한 지 오래된 고 회장님의 전처까지, 모두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온 가족이 모인 것은 정말 오랜만일 것이다.그때 문득 고현성이 오늘 나를 부른 것
오늘은 설날이었다. 다른 친척들은 오지 않았지만 집 안에는 가족들과 가정부들이 많았다.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은 너무나 부적절했고 게다가 고현성 그 자신도 답을 알고 있었다.몇 년간의 부부의 정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한참 뒤, 그가 먼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날 따라 올라와.”고현성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몇 미터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갔다. 내 뒤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따라붙었다.고현성은 나를 2층으로 데려갔다. 엄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무슨 말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엄마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수아가 올까요?”아빠가 대답했다.“오겠지. 현성이 그 녀석은 믿을만해.”“그러게요. 우리 수아랑 이혼한 게 참 아쉬워요.”“아쉽긴 뭐가 아쉬워. 인연이 다한 것뿐이지.”부모님의 대화를 듣고 고현성이 이 기간 동안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게 지내도록 배려했음을 알았다.고현성은 몸을 돌려 나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부모님 편하게 지내시라고 모셔온 거야. 내 부모님도 여기 사시니까, 네 분 어르신들 같이 계시면 더 좋으실 거잖아.”나는 나지막이 말했다.“내 부모님은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어요.”“꼭 이렇게 가시 돋친 말을 해야겠어?”“그렇게 들렸어요? 그렇다면 내가 예전에 너무 물렀었나 보죠.”그가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여도 무너졌던 나였다.고현성은 더 이상 나를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문을 두드렸다. 엄마가 얼른 나와 웃으며 물었다.“수아 온 거야?”내 앞에 서 있던 고현성은 엄마가 나오자 옆으로 비켜섰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울면서 말했다.“미안해. 얼마 전에 우리는 널 밀어낼 수밖에 없었어. 이제 석씨 가문은 너의... 앞으로 아빠 엄마는 다시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내가 석씨 가문의 대표라는 사실은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며칠 전에 석씨 별장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미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어젯밤 강물에 빠진 후로 바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파서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의사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약을 처방받은 뒤 링거를 맞았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깨어나니 이미 점심이었다.운성시는 다시 우중충한 날씨가 되었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고 눈은 오지 않았지만 초봄이라 비가 유난히 자주 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한민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그는 의도적으로 말했다.“오늘 밤 놀러 갈래?”“안 가요.”“알겠어, 그럼 끊을게.”전화를 끊고 배가 고팠지만 아직 링거를 맞고 있는 상태라 배달을 시킬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고정재가 전화를 걸어왔다.“집이야?”어젯밤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운성시의 아파트로 갔고 고정재는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그가 물어본 집은 바로 그 아파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어 고정재에게 물었다.“어느 집이요?”“아파트, 여기서 보니까 현성의 위치가 네 집 근처에 있더라. 근데 나 지금 지금 국내에 없어서 혹시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미안,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현성이가 네 말만 듣는 것 같아서.”“알겠어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나는 링거를 빼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고현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검은 우산을 들고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비에 젖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여전히 비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급히 달려가서 물었다.“여기서 뭐 해?”고현성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너 오늘 나 보러 온다고 했잖아. 근데 집에서 기다리다 못 참고 여기까지 왔어. 네 연락처도 없고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수아는 역시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그는 본능적인 기억을 따라 이곳으로 찾아왔다.“그럼 왜 비를 피하지 않고
방금 그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원태웅은 갑자기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방금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맞혀볼래?”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얼른 알려줘요.”“네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어.”이건 석지훈에게 꽤 어려운 일이었다.나는 웃으며 물었다.“그거 말고 또 있어요?”“그리고 오늘 밤에 한 말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냐고 하더라? 네가 형 앞에서 몇 번이고 그 얘기를 했다고.”석지훈은 이혼한 여자를 좋아할 이유가 있냐고 했었다.나 역시 그 말을 생각하면서 그의 앞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다. 나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럼 뭐라고 대답했어요?”“답을 못 할 뻔했지. 눈치도 못 채고 되레 형한테 물었단 말이야. 다른 여자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냐고?”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리고 오빠는 전화를 끊었겠죠?”“내가 방심했나 봐! 바로 둘째 형한테 메시지 보낼 거야. 누구든지 그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지, 특히 예쁘고 자존심 강한 여자는 더욱 상처받을 거라고 해야겠어.”원태웅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오빠들은 항상 둘째 오빠 앞에서 내가 예쁘다고 말하네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 원래 예쁘잖아. 아무래도 우리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형도 궁금해하지 않을까?”“괜찮아요, 이미 나에게 관심을 가진 것 같은데요?”이제는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우리 수아 자신감 넘치는데?”“당연한 거 아닌가요? 유진 씨도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오늘 깜짝 놀랐잖아요, 다행히 잘 넘겼지만.”그 말을 꺼내자마자 원태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네가 말 안 했으면 까맣게 잊었을 거야, 유진 때문에 둘째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전화해서 경고해야겠어.”원태웅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다른 한편...통유리 창 너머로 반짝이는 온 도시의 네온 불빛과 달리 집 안은 깜깜했다. 유일하게 석지훈의 핸드폰만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영상을 보고 나서 원태웅이 보낸 메
나만 손해를 보게 될 거라고?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손해 보는 게 그와 무슨 상관이지?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순간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내게 경고하듯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 세상에는 항상 더 강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수아 씨가 석씨 가문을 쥐고 있지만 그것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여지를 두는 게 결국 좋을 겁니다.”강가에 파도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훈 씨라는 건가요?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지훈 씨도 잘 알잖아요.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상처만 남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제가 왜 가만히 있어야 하죠? 그때마다 항상 사람들에게 당하기만 했는데 이제 석씨 가문을 제 손에 쥐었는데 제가 왜 참아야 하죠?”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말 고집이 심하네요.”나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지훈 씨 마음대로 하세요.”석지훈과 처음 만난 건 우리가 강에 빠졌을 때였다.그때 나는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었고 그 일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방금 내가 했던 말이 상처가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나는 서로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석지훈은 내 태도에 한참을 멈춰 서 있다가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강에 뛰어들었다.차가운 강물에 휩쓸려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수영을 거의 할 줄 몰랐다. 석지훈이 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 경호원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가 있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석지훈이 나를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쯤 누군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나를 물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나는 급히 그의 목을 끌어당긴 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속에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분명히 그에게 입을
나는 잠시 멈춘 뒤 말했다.“한씨 가문 쪽은 함 집사에게 맡겨. 어르신께서 운성시를 떠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만약 떠나려고 하면 지훈 씨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가두어 두면 돼. 참, 아까 어르신께서 에르크 별장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비서가 설명했다.“오늘 금방 운성시에 도착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속에 쌓인 분노를 가라앉혔다.고현성은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내 손을 꼭 잡은 채 위로를 건넸다.“수아야, 나 때문에 화내지 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이제 와서야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다니.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 화 안 났어.”그리고 곧장 물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고현성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훤칠했다.비록 정신이 온전치 않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다.“아까 민영이 따라 쇼핑몰에 갔다가 민영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거든. 그때 갑자기 그 여자가 나타난 거야. 나를 수아한테 데려다주겠다고 했어.”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여자는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난 수아를 만났고 수아는 내 손도 잡아 줬잖아.”그는 우리가 맞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나는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집까지 데려다주세요.”그러자 고현성은 서운한 듯 물었다.“수아야, 나를 보내려고? 이제 금방 만났는데...”그는 예전에도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그는 내가 이런 모습에 약하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곁에 있던 비서가 나를 대신해 말했다.“현성 씨,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대표님께서 현성 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 나면 곧 찾아가실 겁니다.”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수아야, 정말
나는 애초에 그들이 이렇게까지 고현성을 모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눈앞에서 잔뜩 위축된 채 겁먹은 듯한 그를 보니 가슴 속에 답답함이 차오르며 알 수 없는 연민이 느껴졌다.나는 몰래 눈물을 훔치며 애써 참아냈다. 그리고 한성범을 바라보며 물었다.“고현성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단지 모욕하기 위해서입니까?”한성범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굳이 바보 같은 놈과 엮일 이유가 없지 않니? 스스로 찾아온 거지, 우리 한씨 가문과 무관하네.”주변의 하객들은 대부분 자리를 떠났고, 이 일과 관련 있는 자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 중 나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주민솔이었다.그녀는 이미 모습을 감췄고 나는 곧바로 담유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유미 씨가 데려온 거예요?”담유미 역시 나에게 호의를 가질 리 없었다.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거짓말하지 말고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지금 거짓말을 해도 곧바로 사람을 시켜 이 일을 전부 조사할 수 있어요.”그녀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눈빛에는 순간적인 당혹감이 스쳐 갔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그때, 갑자기 고현성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수아야,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나 데려가 줄 수 있어?”이 순간, 그는 나를 수아라고 불렀다.나는 전에 그에게 내 이름이 수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렇다면... 그의 아내 수아뿐만 아니라 나도 기억하는 걸까?나는 애틋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 데려갈게.”그리고 원태웅에게 비켜달라고 말한 뒤, 덤덤한 시선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내 뒤에 서 있던 비서를 향해 조용히 지시했다.“이 일이 누구의 짓인지 철저히 조사해 주세요. 만약 어르신의 소행이라면 즉시 이 저택을 폭파해 버리세요. 혹여나 담유미 씨가 한 짓이라면 담씨 가문을 매입해서 담현아에게 넘겨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유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소리를 질렀다.“수아 씨가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내가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고현성은 이제 끝났어. 잘나가던 인생이 재앙 덩어리를 아내로 맞는 바람에 망한 거잖아!”재앙 덩어리...나는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그때 고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그는 모든 것을 잊었지만 수아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오직 그의 수아만을 옹호하고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침묵하는 석지훈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오히려 담유미가 물었다.“그럼 넌 바보야?”바보에게 바보냐고 묻다니.나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입 다물어요!”“왜? 부끄러워서 화내는 거야?”한성범은 이때다 싶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그럼 고현성이 바보가 아니라는 거야? 연수아, 난 널 초대 안 했으니 나가. 곧 ‘바보극' 공연이 있거든!”한성범은 석지훈의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눈앞의 술잔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위해 막아냈다. 마음속에서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그때 고현성이 황급히 일어나 나를 진정시켰다.“저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 수아는 그냥 내 아내일 뿐이야!”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차가운 눈빛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저 사람을 감쌀 건가요?”석지훈은 차가운 침묵으로 나에게 답했다.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술잔을 다시 한성범에게 던졌다. 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받아 바닥에 던져버렸다.유리 조각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흩어졌다.그때 담유미가 차갑게 말했다“연수아 씨, 너무 건방지네요.”그러자 담현아가 차갑게 꾸짖었다.“입 닥쳐!”담유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원태웅은 황급히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윤아야, 화내지 마. 우리 여기서 나가자!”나는 눈
석지훈은 당연히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에서 위로 그를 올려다보며 비판했다.“오후에 그 일은 당신이 잘못했어요!”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음?”“나는 그 사람들과 친분이 있어요. 친구처럼. 그들이 나를 유람선에 초대한 건 내가 그들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석지훈 씨라고 했죠? 설마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당신 주변에 자주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근데 내가 당신의 무엇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우리 석씨 가문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내 말은 다소 따끔했고 석지훈의 얼굴은 차가워졌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어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생각에 빠져 착각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혹시 당신 마음속으로는 나를 좋아하는데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나를 피하고 당신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설마 마음이 흔들릴까 봐 두려운 건가요?”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말을 돌렸다.“물론.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 속마음을 알 수는 없죠. 됐어요, 당신이랑 말싸움하기 귀찮아요!”그는 차갑게 말했다.“허튼소리.”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평소에 나한테 신경 끄세요!”석지훈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못 참네. 그 성격에 어떻게 여자 없이 지금까지 버텼을까? 아마도 내가 운이 좋은가 봐. 안 그러면 당신을 어떻게 얻었겠어!”‘지훈 씨,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신앙처럼. 당신 말대로 이 길을 따라갈게! 당신이 나에게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 기억해둘 테니까! 나중에 똑같이 갚아줄 거야!’담현아는 몇 분 동안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나는 놀리듯 물었다.“부부끼리 무슨 달콤한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이제 푹 빠진 거야?”담현아는 웃으며 물었다.“푹 빠졌다는 게 사랑한다는 뜻이에요?”내가 되물었다.“그럼 아니야?
담현아는 의리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홀을 나와 뒤뜰을 찾아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갑자기 고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담현아가 먼저 그를 언급했던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나 아저씨한테 고현성의 현재 상황을 들었어요. 그의 지금 상황이... 아저씨는 아주 괴로워하더라고요. 결국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수아 언니는 어때요?”담현아는 내 마음이 아픈지 묻고 싶어 했다내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있겠는가?그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내 전남편인데.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게다가 지금의 고현성은 변하고 있었다.그는 예전의 그 남자와는 완전히 달랐다.그는 심지어 아이를 나의 생일선물로 돌려주기까지 했었다.나는 담현아 앞에서 고현성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희연이가 요즘 연락 오던?”“네.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아서 아이스랜드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한대요. 왕자현 씨가 옆에서 계속 돌봐주고 있다고 하더라고요.”담현아가 왕자현을 언급하자 나는 흥미가 생겨 말했다.“왕자현 씨 집안이 엄청 부자라며?”담현아는 뭔가 아는 듯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왕씨 가문은 세력은 없어도 돈은 엄청 많죠.”돈이면 다 되지. 돈이 곧 힘인데.담현아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급히 일어서며 고정재의 전화라고 했다.담현아가 남편 전화를 받으러 뒤뜰을 나가자 앉아서 할 일이 없던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나는 2층 발코니에서 고독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미소를 짓고 떠나려 했다.그런데 그가 뜻밖에도 나를 불러 세웠다.“연수아 씨.”나는 걸음을 멈췄다. 석지훈이 나를 부른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웠다.오후에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그가 그렇게 차가우니 나도 굳이 아부할 필요는 없었다.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우리가 그렇게 친했나요?”그는 내 질문
담현아는 옷을 갈아입고 싶어 했다. 내 차에도 여벌 옷은 있었지만 우린 키 차이가 있었고 예지한도 여기 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를 근처 쇼핑몰에 데려갔다.담현아는 쇼핑이 빨랐다. 핑크색 롱드레스를 입으니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그녀는 또 반지 몇 개를 손가락에 끼고는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뻐요?”담현아는 워낙 예뻤기에 뭘 입어도 예뻤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말했다.“아주 예뻐.”담현아는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꾸미는 걸 잘 안 해서...”그녀는 쇼핑몰 화장대에서 가볍게 화장을 하고 나서야 나와 함께 한씨 가문으로 갔다. 그리고 경호원을 많이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오늘 한씨 가문에는 일부러 트집 잡으러 가는 거라 나도 준비를 해뒀다. 휴가가 방금 끝난 비서에게 문자를 해두었던 것이다.한씨 가문에 도착하니 비서는 이미 와 있었다. 내 옆에 있는 23명 외에도 비서는 꽤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비서는 우리 뒤를 따라 들어가고 나머지는 입구를 지켰다. 담현아는 초대장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담유미를 발견했다.흰색 이브닝드레스에 진한 화장을 한 담유미는 큰 키 덕분에 드레스가 참 잘 어울렸다. 담현아는 그녀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담유미, 너 엄마 아빠 앞에서 무슨 말을 했어?”담유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 지금 언니한테 따지는 거야?”“미안하지만, 난 오빠밖에 없어.”담현아의 말은 너무 매몰찼다.담유미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곧 설명했다.“난 네 일에 관심 없어. 부모님은 오빠한테 네 남자친구 얘기 들으신 거야.”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너랑 상관없는 일이네!”담현아의 말투는 꽤나 퉁명스러웠지만 담유미는 별말 없이 얼굴만 굳힌 채 가버렸다.그녀가 가고 나서야 담현아가 말했다.“우리 집의 골칫거리는 바로 저 여자인데 집안 사업까지 쥐고 흔들고 있죠. 하지만 뭐, 나쁘진 않아요. 어차피 나랑 오빠는 담씨 가문의 사업에는 관심 없으니까!”담유미에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