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 언니, 오빠는 아직 몰라요.][언제 말할 거예요?]윤다은은 답했다.[설날에 말하려고요.]설날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의 곁에 있고 싶었다.정말 보고 싶었다.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휴대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 산후 도우미는 내가 우울해 보이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 있나요?”“아줌마, 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산후 도우미는 아이 아빠냐고 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보고 싶으면 만나러 가야죠.”“말씀처럼 그렇게 쉽나요.”나는 씁쓸하게 답했다.산후 도우미는 조용히 말했다.“요즘은 교통이 발달해서 아무리 멀어도 하루면 갈 수 있잖아요. 우리 때는 달랐어요. 남편이 일찍 죽었는데,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요.”산후 도우미의 말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설날에 비아드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석씨 가문의 전용기를 타고 갔다.동성에서 비아드까지는 네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비아드 거리에 도착했지만 에르크에 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솔직히 석지훈이 에르크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를 찾기 위해 따로 알아보지도 않았으니까.나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나는 주스 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자 백화점에 가서 새해 선물을 샀다.값비싼 롤렉스 시계였다.시계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나는 경호원들과 함께 에르크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나는 경호원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혼자 내렸다.커다란 저택은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누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석지훈이 집에 있는 걸까?아마 집에 있을 것이다.나는 대문 앞에 서 있었지만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며 나는 문 앞에 십여 분이나 서 있었다.마음속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가 차갑게 대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혹시나 그가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면...심호흡을 하고 나는 마당으로 들어가 초인종
저택 안의 불빛은 여전히 환했으니 분명 누군가 있었다. 나는 다시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빠, 이제 두 시간 후면 새해에요.]그가 아직 이 번호를 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석지훈은 답장이 없었다.손이 얼어 시뻘겋게 되자 나는 입김을 불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발밑의 쌓인 눈은 어느새 신발과 양말을 적시고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임신 중인 내 몸은 더 이상 이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더는 버틸 수 없어서 잠시 생각하다 다시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내 스물네 번째 생일이에요.]작년의 오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경험했다.그런데 올해도 마찬가지였다.나는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 그것도 내 손으로 그를 떠나보냈다.보낸 문자는 답장 없이 텅 빈 메아리만 남겼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이제 석지훈과 나는 완전히 남남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더 이상 그 사람 곁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따뜻한 눈길도 다정한 손길도 이젠 내 것이 아니었다.이런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 숨쉬기조차 힘들었다.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슬픔은 더욱 깊어만 갔다.그때, 이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올려다보니 냉랭한 표정의 원태웅이었다.그는 내 오빠이기 전에 석지훈의 동생이었다.그러니 그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석지훈의 행방을 묻고 싶었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창문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한씨 가문의 혼외자 한민수였다.그와 나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는데 그 역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왔어요?”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그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원태웅이 말을 받았다.“그 사람?”그는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굴?”석지훈을 찾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곤란하게 만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탐스러운 눈송이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려앉고 있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고요하고 순수한 그 남자를 닮아 너무나 아름다웠다.운성은 비와 눈이 잦은 곳이라 예전에 나는 습하고 차가운 눈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런데 이제는 이런 날씨가 좋았고 비아드의 눈 특히는 에르크의 눈이 좋았다.한 사람 때문에 한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이것은 돌아가신 석씨 가문의 옛 가주가 남긴 말이었다.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2층 창가에 서 있는 남자의 곧고 강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전히 잘생겼지만 표정은 차갑고 냉정했다.그는 정말 별장 안에 있었던 거였다.눈을 깜빡일 수도,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 찰나의 환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그러나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몇 초도 되지 않아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창가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내가 본 건 환각이었을까?나는 손으로 배를 감싸 안고 눈을 감았다.동성에 도착하니 새벽 5시였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잠들었고 눈을 뜬 건 다음 날 정오였다.새해라 산후 도우미도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우유를 한 잔 따라 소파에 앉아 카톡을 확인했다. 새해 인사 메시지가 많이 와 있었다.담현아의 문자가 눈에 띄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일 언니 집에 놀러 갈게요! 그리고 있잖아요. 민수 씨가 어제 나한테 자기 여자 하라고 했어요.]나는 웃는 얼굴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보냈다.[뭐라고 답했는데?]문자를 보내자마자 담현아의 답장이 왔다.[내가 뭐라고 답하겠어요. 난 내년 8, 9월이나 돼야 성인인데 민수 씨는 나보다 무려 열세 살이나 많잖아요. 엄마가 내 나이에 그런 사람 만난다는 거 알면 내 다리 분질러놓을걸요!]담현아의 문자를 보며 모처럼 웃음이 나왔다. 답장을 쓰려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세
내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고현성은 내 태도를 눈치챘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이젠 내 전화도 받기 싫은 거야?”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그럼 내가 받고 싶겠어요?”고현성과 나 사이의 모든 정은 그가 다 닳아 없애 버렸다. 정말 그가 지긋지긋했고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연수아.”그가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예전에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건 맞아. 하지만 난 계속 만회하려고 노력했어.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예전에 내가 그렇게 널 상처 줬는데도 넌 날 사랑하고 용서해 줬잖아. 근데 내가 혜원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널 구하려고 했을 때 왜 날 떠난 거야?”나도 그 질문에 대해 수없이 생각했었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깊이 사랑했던 건 사실이지만 상처가 쌓이고 쌓이다 보니 두려워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믐날 그날, 바로 그가 임지혜와 결혼하기 전날 밤, 나는 희망을 잃고 침대에 누워 죽기만을 기다렸다.사실 그때 이미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중에 다시 고현성을 용서할 수 있었던 건 단지 내 병이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나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고 손에 닿는 따스함이 간절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준 것이었다.하지만 그는 또다시 나를 밀어냈다.그때 나는 그에게 오혜원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그는 내 뜻을 거스르고 말았다.물론 그도 날 살리려고 그랬다는 건 알지만 오혜원과 나 사이의 악연을 생각하면... 내게 좋다는 명목으로 날 상처 주는 건 정말 견딜 수 없었다.고현성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지금까지 너무 많은 걸 용서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용서하지 못했어요. 당신이 혜원의 부탁을 들어준 건 내게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마지막 일격이었어요. 이젠 정말 당신과 다시 얽히는 게 두려워요!”게다가 나는 그의 죽음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는 용서하기로 했다.“그럼 석지훈은?”고현성은 갑자기 석지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저희는 석씨 가문 최고 경호팀으로 이전에는 석 대표님을 수행했었습니다. 방금 함 집사의 전화를 받고 여기서 가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석씨 가문의 현 책임자 이름은 함승윤이었다.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운성에도 저희 석씨 가문의 사람이 있으니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스무 명의 경호원들은 그동안 암중에서 나를 보호했기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직 모두의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했다.“고마워요. 이건 세뱃돈이에요.”나는 가방에서 스무 개의 봉투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운성에 도착하면 나눠주세요.”경호원 중 한 명이 그것을 받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가주님.”“갑시다. 운성으로.”고현성을 만나러 가는 이 순간에도 나는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운성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석양 아래 맑은 하늘이 펼쳐졌는데 운성에서 이렇게 좋은 날씨는 보기 드물었다.경호원들이 고 씨 저택 앞에 차를 세웠다. 나는 차에서 내려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이것은 전남편의 집이었다.안에는 옛 지인들이 있었다.고씨 가문은 새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입구에는 색색의 등불과 대련이 걸려 있었다. 고 회장이 매년 직접 쓰는 대련이었다.“초인종을 누르세요.”내 말에 경호원이 초인종을 눌렀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다.고씨 가문의 오랜 집사였다.한때 나에게 잘 대해주었던 사람이었다.사실 고씨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아마도 내가 고씨 가문에 하향 결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나를 본 집사는 놀란 표정이었다.“사모님.”나는 그의 말에 정정했다.“전 사모님이 아니에요.”그는 그제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어오세요.”안으로 들어가자 놀랍게도 고정재와 윤다은 그리고 이혼한 지 오래된 고 회장님의 전처까지, 모두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온 가족이 모인 것은 정말 오랜만일 것이다.그때 문득 고현성이 오늘 나를 부른 것
오늘은 설날이었다. 다른 친척들은 오지 않았지만 집 안에는 가족들과 가정부들이 많았다. 그가 내게 던진 질문은 너무나 부적절했고 게다가 고현성 그 자신도 답을 알고 있었다.몇 년간의 부부의 정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그의 체면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한참 뒤, 그가 먼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날 따라 올라와.”고현성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몇 미터 간격을 두고 그를 따라갔다. 내 뒤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따라붙었다.고현성은 나를 2층으로 데려갔다. 엄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무슨 말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엄마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수아가 올까요?”아빠가 대답했다.“오겠지. 현성이 그 녀석은 믿을만해.”“그러게요. 우리 수아랑 이혼한 게 참 아쉬워요.”“아쉽긴 뭐가 아쉬워. 인연이 다한 것뿐이지.”부모님의 대화를 듣고 고현성이 이 기간 동안 부모님을 힘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게 지내도록 배려했음을 알았다.고현성은 몸을 돌려 나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부모님 편하게 지내시라고 모셔온 거야. 내 부모님도 여기 사시니까, 네 분 어르신들 같이 계시면 더 좋으실 거잖아.”나는 나지막이 말했다.“내 부모님은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어요.”“꼭 이렇게 가시 돋친 말을 해야겠어?”“그렇게 들렸어요? 그렇다면 내가 예전에 너무 물렀었나 보죠.”그가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여도 무너졌던 나였다.고현성은 더 이상 나를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문을 두드렸다. 엄마가 얼른 나와 웃으며 물었다.“수아 온 거야?”내 앞에 서 있던 고현성은 엄마가 나오자 옆으로 비켜섰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울면서 말했다.“미안해. 얼마 전에 우리는 널 밀어낼 수밖에 없었어. 이제 석씨 가문은 너의... 앞으로 아빠 엄마는 다시는 너를 떠나지 않을 거야.”내가 석씨 가문의 대표라는 사실은 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아빠는 연시혁이 만나는 여자가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고 석씨 가문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 후 부모님께 연 씨 저택에 먼저가 계시라고 말씀드렸고 내가 동성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면 모시러 가겠다고 했다.사실 동성에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나는 그저 부모님께서 나중에 나 때문에 걱정하실까 봐 그랬다. 배 속의 아이 때문에...앞으로 내가 이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니 부모님께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고현성과도 상의해야 했다.그가 어떤 조건을 내걸어야 부모님을 보내줄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윤다은이 저녁 먹으러 내려오라고 불렀다. 부모님이 먼저 내려가시고 윤다은은 내 팔짱을 끼고 뒤따라 내려오며 다정하게 물었다.“수아 언니, 임신했어요?”“어떻게 알았어?”나는 웃으며 물었다.윤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언니 예전엔 되게 말랐잖아요. 배도 납작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살짝 나왔잖아요.”“응. 난 임신했어.”내가 인정하자 윤다은은 내 배에 손을 얹으며 신기한 듯 말했다.“여기에 작은 생명이 있다니 상상이 안 돼요.”“나도 상상이 안 돼.”나도 웃으며 대답했다.하늘이 내게 다시 이런 기회를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윤다은은 손을 거두며 갑자기 말했다.“오빠는 아직 내 일을 몰라요.”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응?”“내가 연애하는 거요.”순간 윤다은이 말했던 그 의사가 떠올랐다.내가 물었다.“그 의사 집에서는 알아?”“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 매일 바빠서 우리는 사귀는 사이여도 연락을 자주 하진 않아요. 근데 그게 이상하게 당연하게 느껴져요.”윤다은은 그 의사에게 매달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감히 묻지 못했다. 용기 내어 시작한 사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일깨워주기만 했다.“사랑한다면 더 소중히 여겨야 해.”놓치면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지금의 석지훈과 나처럼
고현성의 목소리에 조롱기가 섞여 있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전화를 받았다.나는 기쁜 마음으로 불렀다.“오빠.”“나야.”수화기 너머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목소리였다. 한참 생각한 끝에 누군지 떠올랐다.한민영, 내 원수였다.나는 순식간에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너야?”“새해 인사하려고.”“우리 사이에 그럴 만한 친분은 없잖아!”“하아, 지훈 씨 만나고 싶지 않아?”한민영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그 사람 어디 있어?”“한씨 가문으로 와. 기다릴게.”거절하려던 찰나 한민영이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한씨 가문의 주소였다.헬스투, 핀란드의 수도였다.나는 문자를 무시했다.지금은 임신 중이라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다. 게다가 한민영이 나쁜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런데 한민영은 어떻게 석지훈의 휴대폰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그게 마음에 걸려 계속 불편했다.나는 휴대폰을 들고 윤다은의 옆에 돌아와 앉았다. 다행히 그녀는 석지훈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에 앉은 사람들 대부분은 석지훈을 알고 있었다. 그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이었다.고현성 외에는 아무도 새해 분위기를 망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저녁 식사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엄마는 나를 방으로 불러 석지훈과의 관계를 물었다.“아까 너랑 지훈이랑 지금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석지훈과 나는 지금 헤어진 상태였다.하지만 내 뱃속에는 그의 아이가 있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석지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엄마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나는 한숨을 쉬고 방을 나섰고 풀이 죽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마당으로 향했다. 매화꽃이 한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