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연시혁이 만나는 여자가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고 석씨 가문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한 후 부모님께 연 씨 저택에 먼저가 계시라고 말씀드렸고 내가 동성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면 모시러 가겠다고 했다.사실 동성에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나는 그저 부모님께서 나중에 나 때문에 걱정하실까 봐 그랬다. 배 속의 아이 때문에...앞으로 내가 이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러니 부모님께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고현성과도 상의해야 했다.그가 어떤 조건을 내걸어야 부모님을 보내줄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윤다은이 저녁 먹으러 내려오라고 불렀다. 부모님이 먼저 내려가시고 윤다은은 내 팔짱을 끼고 뒤따라 내려오며 다정하게 물었다.“수아 언니, 임신했어요?”“어떻게 알았어?”나는 웃으며 물었다.윤다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언니 예전엔 되게 말랐잖아요. 배도 납작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살짝 나왔잖아요.”“응. 난 임신했어.”내가 인정하자 윤다은은 내 배에 손을 얹으며 신기한 듯 말했다.“여기에 작은 생명이 있다니 상상이 안 돼요.”“나도 상상이 안 돼.”나도 웃으며 대답했다.하늘이 내게 다시 이런 기회를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윤다은은 손을 거두며 갑자기 말했다.“오빠는 아직 내 일을 몰라요.”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응?”“내가 연애하는 거요.”순간 윤다은이 말했던 그 의사가 떠올랐다.내가 물었다.“그 의사 집에서는 알아?”“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 매일 바빠서 우리는 사귀는 사이여도 연락을 자주 하진 않아요. 근데 그게 이상하게 당연하게 느껴져요.”윤다은은 그 의사에게 매달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감히 묻지 못했다. 용기 내어 시작한 사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일깨워주기만 했다.“사랑한다면 더 소중히 여겨야 해.”놓치면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지금의 석지훈과 나처럼
고현성의 목소리에 조롱기가 섞여 있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전화를 받았다.나는 기쁜 마음으로 불렀다.“오빠.”“나야.”수화기 너머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목소리였다. 한참 생각한 끝에 누군지 떠올랐다.한민영, 내 원수였다.나는 순식간에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너야?”“새해 인사하려고.”“우리 사이에 그럴 만한 친분은 없잖아!”“하아, 지훈 씨 만나고 싶지 않아?”한민영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그 사람 어디 있어?”“한씨 가문으로 와. 기다릴게.”거절하려던 찰나 한민영이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한씨 가문의 주소였다.헬스투, 핀란드의 수도였다.나는 문자를 무시했다.지금은 임신 중이라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다. 게다가 한민영이 나쁜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런데 한민영은 어떻게 석지훈의 휴대폰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그게 마음에 걸려 계속 불편했다.나는 휴대폰을 들고 윤다은의 옆에 돌아와 앉았다. 다행히 그녀는 석지훈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에 앉은 사람들 대부분은 석지훈을 알고 있었다. 그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이었다.고현성 외에는 아무도 새해 분위기를 망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저녁 식사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엄마는 나를 방으로 불러 석지훈과의 관계를 물었다.“아까 너랑 지훈이랑 지금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네.”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석지훈과 나는 지금 헤어진 상태였다.하지만 내 뱃속에는 그의 아이가 있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석지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엄마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나는 한숨을 쉬고 방을 나섰고 풀이 죽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가 뒷마당으로 향했다. 매화꽃이 한
이 말을 들은 고정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나도 담현아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서 너에게 물어본 거야."'고정재는 지금 날 떠보려는 건가?'나는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정재 씨, 현아랑 친해요?""친하다기보다는 몇 번 본 적이 있을 뿐이야."'몇 번 봤다고 계속 담현아를 쫓아다니는 건가?'나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현아는 두 사람 사이에 일이 있긴 했지만 별일 아니라고 하던데요. 오히려 정재 씨가 오바하는 거라고 하던데."고정재는 멈칫하더니 약간 낙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오바했다고?"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정말 별일 아니라 말할 필요도 없어."고정재는 갑자기 나의 주의를 돌리며 말했다."현아가 그러는데 한민수가 손님을 아주 잘 대접한다며. 두 사람이 핀란드에서 한동안 같이 놀았다고 하더라."이 일은 나도 알고 있었다. 당시 한민수는 나를 속여 나웨이로 보냈었기 때문이다."맞아요. 한민수가 현아를 좋아해요. 그저께 설 전날에도 고백했는데 현아가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면서 받아주지 않았대요."이때 나는 고정재의 안색이 굳어졌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을 이었다."현아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사람과 연애를 꺼리는 것 같아요."그래, 현아에게는 어린 남자애가 더 어울리지."고정재의 말이 끝나자 나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더니 아까 그 낯선 번호에서 온 메시지였다.[석지훈의 생명이 위독하다.]순간 나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재빨리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걸자마자 원태웅이 나의 번호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직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을 때 고정재는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너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어."나는 고정재에게 말했다."지훈 오빠가 위험하대요."나는 한민수가 내 전화를 받을지 확신할 수 없
나는 어젯밤에 핀란드에 다녀왔는데 오늘 또 고생하고 나니 너무 피곤했다. 나는 배를 살짝 만지며 옆에 있는 고정재에게 말했다."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요."고정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석지훈은 현성이보다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너를 더 세심하게 신경 써줄 줄 아는 사람이야."석지훈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지훈 오빠의 성격이 그리 다정한 편은 아니에요. 차갑고 누구에게나 무심한 태도를 보이죠. 그런 지훈 오빠와 연애하면 보통의 여자들은 참기 어려울 거예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테니까요. 하지만 나는 알아요. 그런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는 걸요. 정재 씨, 예전에는 내 곁에 나를 정말로 아껴주고 나를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남자가 없었어요. 그래서 연애가 뭔지 몰랐죠. 한때는 정말 누군가와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고정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석지훈이 너에게 그런 감정을 준 거야?"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서 눈이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경호원은 눈치 빠르게 다가와 팔에 걸려 있던 외투를 내 어깨에 덮어주었다.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다가 고정재의 핸드폰을 아직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고정재에게 돌려주었다."네. 지훈 오빠는 나에게 너무 많은 감정을 줬어요."나는 석지훈을 처음 만났을 때의 짧은 순간이 떠올랐다. 다시 만났을 때 석지훈은 높은 자리에 앉아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존재였다.세상 사람들에게 석지훈은 냉혹하고 무자비한 웃음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이다.나도 때로는 석지훈이 너무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그가 순수하고 깨끗했기에 내가 그를 괴롭히고 망쳐도 그가 다 참았던 것 같다."꼬마 아가씨, 석지훈이 너의 진정한 안식처가 되길 바랄게."나는 슬퍼하며 말했다."하지만 지훈 오빠는 지금 나를 용서하지 않으려 해
내 옆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경호원이 말했다."알겠습니다, 가주님."나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그는 간략하게 대답했다."현정우입니다.""정우 씨, 내가 어디로 가는지 함승윤에게 연락해서 알려줘요."현정우는 공손하게 말했다."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현정우는 몸을 돌리더니 전화를 걸어 방금 내가 지시한 일을 처리했고 남은 경호원들은 나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거실에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엄마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자신의 곁으로 오라며 나를 불렀다.나는 엄마 곁으로 가서 말했다."엄마, 나 조금 있다가 떠나야 해요."엄마는 나를 말리지 않고 물었다."어디 가는데?"이때 고현성은 무심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고현성에게도 나의 목적지를 알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이연 씨가 방금 전화 와서 설 연휴인데 승아랑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요."아빠는 추측하며 물었다."그 시혁이의 아이 말이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빠가 제안했다."그러면 시혁이도 같이 가는 게 어때?"나는 서둘러 말했다."두 사람 아직도 싸우고 있잖아요."나의 말에 아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모두의 앞에서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현성에게 말했다."현성 씨, 내가 조금 있다가 시간이 없으니까 아빠랑 엄마를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요?"나는 일부러 어른들 앞에서 말했다.이렇게 해야 고현성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나의 의도를 알아챈 듯 고현성은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나의 말에 고승철이 말했다."수아야, 사돈을 여기 며칠 더 머물게 하자."'사돈? 고승철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설마 또 고현성과 나를 합치게 하려는 건가?'이때 현정우가 밖에서 들어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말했다."가주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
현정우는 내 질문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은 내가 석씨 가문의 가주였기에 그들은 당연히 내 말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이유를 말해줘요."현정우가 답했다."저희에게는 규칙이 있습니다. 차기 가주님을 섬긴 후에는 전임 가주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를 어기면 석씨 가문에서 추방됩니다."'석씨 가문의 규칙이 이렇게 철저한가?'"그럼 석지훈에 관한 어떤 일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겠다는 건가요?""죄송합니다, 가주님. 이는 제 의무입니다."이 말을 들으니 나도 더 이상 현정우를 난처하게 만들 수 없었다.나는 다시 물었다."함승윤는 준비를 잘하고 있나요?""가주님, 걱정하지 마십쇼.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이번 핀란드행은 위험천만하기에 최대한 충분히 준비해야 했다. 핀란드에서 석씨 가문 사람들이 우리를 맞이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20명의 인원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시차로 인해 핀란드 헬싱크에 도착하니 아침 9시였다.설날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오늘 안에 석지훈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헬리콥터가 약속된 장소에 착륙했다. 내려서 보니 눈앞에 무장한 경호원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현정우는 내 귀에 대고 설명했다."도로는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아무 이상도 발생하지 않았으니 가주님께서는 안심하시고 한씨 가문 병원으로 가시면 됩니다."현정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했지만 나는 마음속의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한민영이 나를 이렇게 순순히 놓아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바로 이때 앞쪽 차량이 폭발했다.현정우는 재빨리 나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철수하셔야 합니다."현정우와 다른 몇 명의 경호원은 나를 차에 태웠다. 백미러로 보니 뒤따라오는 무장 차들이 보였다.내가 뒤를 쳐다보자 현정우가 설명했다."저희 쪽 사람들입니다. 가주님, 차량의 엠블럼 아래 엑스 표시가 있는 차량은 모두 석씨 가문의 소
30분쯤 지나자 옆에 앉아 있던 현정우가 7, 8분 후면 도착한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속의 설렘을 억누르며 말했다."안전에 주의하세요.""네, 가주님은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1분 후, 갑자기 차창 밖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고 앞쪽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폐차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현정우는 침착하게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들이받아."차가 부딪치기 직전 현정우는 나를 꼭 끌어안으며 보호했고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쌌다. 충격이 너무 커서 내 턱이 현정우의 어깨에 부딪혔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눈이 빨개진 채로 물었다."다들 괜찮아요?""네, 가주님은 괜찮으십니까?""다치지 않았어요."차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지만 갑작스럽게 도로에 장애물이 솟아올랐다. 차는 이내 전복되었고 나는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차 안에서 세게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아픈 몸을 겨우 움직여 현정우를 불렀다."정우 씨.""여기 있습니다."내가 탄 차가 전복된 뒤 주변은 갑자기 조용해졌다.총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나는 그제야 한민영이 일부러 일을 벌였다는 걸 깨달았다. 한민영은 나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었다.온몸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지만 뒤따라온 석씨 가문 사람들이 재빨리 차를 해체했고 나는 그들의 도움으로 차에서 빠져나와 다른 차로 옮겨졌다.차 안의 백미러를 통해 내 얼굴에 흐르는 피를 봤다.내가 눈을 감고 고통을 참고 있을 때 현정우는 나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말했다."저희 쪽 사람들이 이미 그들을 추적 중입니다."나는 조용히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었다."한씨 가문에 대해 잘 알아요?"현정우가 대답했다."네, 잘 압니다. 석씨 가문과 협력 관계를 이어오고 있으니까요.""내일 한씨 가문 경영진에 경고를 날려요."현정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가주님, 이것은 한민영의 짓입니다."나는 눈을 떠 현정우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요?현정우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가주님께서는 한민
"지훈이는 수아 씨가 오기 전에 이미 떠났어요."나는 목숨을 걸고 온몸에 상처를 입으며 석지훈을 찾아왔지만 결국 석지훈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온몸이 떨렸고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현정우는 나의 이상함을 감지하고서는 뒤에서 내 어깨를 잡으며 부축했다.덕분에 나는 쓰러지지 않았지만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이때 병원에 종소리가 총 열두 번 울려 퍼졌다.올해의 설날은 이렇게 끝났다.나는 핀란드에 두 번이나 왔지만 보고 싶었던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나는 한민수에게 물었다."지훈 오빠는 정말 나를 그렇게 싫어해요?"한민영은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 고마워서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어?"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목구멍에 수많은 말이 걸렸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한민영은 비웃으며 말했다."연수아, 넌 재앙 덩어리야."나는 차갑게 한민영을 째려보며 말했다."닥쳐.""흥,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한민영은 나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석지훈의 손에서 빼앗은 석씨 가문으로 잘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말 뻔뻔하네."나는 몇 걸은 앞으로 나아가 한민수가 보는 앞에서 한민영의 뺨을 세게 때렸다.한민영의 얼굴은 순간 확 돌아갔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석지훈도 내 얼굴을 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네가 뭔데 날 때려? 연수아, 네가 믿건 말건 다음번엔 반드시 너를 죽여버릴 거야."내가 다시 한민영의 뺨을 내리치자 한민영은 원망 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이 광경을 본 한민수는 다급하게 나를 막았다.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경고했다."첫 번째 뺨은 나를 눈 속에 묻은 대가고 두 번째 뺨은 오늘 내 뱃속 아이를 거의 죽일 뻔한 대가야. 한민영, 난 결코 순진하거나 착한 사람이 아니야.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너희 한씨 가문 전체가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석지훈의 석씨 가문을 이용해 너희 가족 모두에게
며칠 전에 석씨 별장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미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어젯밤 강물에 빠진 후로 바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파서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의사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약을 처방받은 뒤 링거를 맞았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깨어나니 이미 점심이었다.운성시는 다시 우중충한 날씨가 되었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고 눈은 오지 않았지만 초봄이라 비가 유난히 자주 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한민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그는 의도적으로 말했다.“오늘 밤 놀러 갈래?”“안 가요.”“알겠어, 그럼 끊을게.”전화를 끊고 배가 고팠지만 아직 링거를 맞고 있는 상태라 배달을 시킬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고정재가 전화를 걸어왔다.“집이야?”어젯밤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운성시의 아파트로 갔고 고정재는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그가 물어본 집은 바로 그 아파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어 고정재에게 물었다.“어느 집이요?”“아파트, 여기서 보니까 현성의 위치가 네 집 근처에 있더라. 근데 나 지금 지금 국내에 없어서 혹시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미안,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현성이가 네 말만 듣는 것 같아서.”“알겠어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나는 링거를 빼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고현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검은 우산을 들고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비에 젖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여전히 비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급히 달려가서 물었다.“여기서 뭐 해?”고현성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너 오늘 나 보러 온다고 했잖아. 근데 집에서 기다리다 못 참고 여기까지 왔어. 네 연락처도 없고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수아는 역시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그는 본능적인 기억을 따라 이곳으로 찾아왔다.“그럼 왜 비를 피하지 않고
방금 그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원태웅은 갑자기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방금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맞혀볼래?”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얼른 알려줘요.”“네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어.”이건 석지훈에게 꽤 어려운 일이었다.나는 웃으며 물었다.“그거 말고 또 있어요?”“그리고 오늘 밤에 한 말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냐고 하더라? 네가 형 앞에서 몇 번이고 그 얘기를 했다고.”석지훈은 이혼한 여자를 좋아할 이유가 있냐고 했었다.나 역시 그 말을 생각하면서 그의 앞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다. 나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럼 뭐라고 대답했어요?”“답을 못 할 뻔했지. 눈치도 못 채고 되레 형한테 물었단 말이야. 다른 여자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냐고?”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리고 오빠는 전화를 끊었겠죠?”“내가 방심했나 봐! 바로 둘째 형한테 메시지 보낼 거야. 누구든지 그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지, 특히 예쁘고 자존심 강한 여자는 더욱 상처받을 거라고 해야겠어.”원태웅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오빠들은 항상 둘째 오빠 앞에서 내가 예쁘다고 말하네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 원래 예쁘잖아. 아무래도 우리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형도 궁금해하지 않을까?”“괜찮아요, 이미 나에게 관심을 가진 것 같은데요?”이제는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우리 수아 자신감 넘치는데?”“당연한 거 아닌가요? 유진 씨도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오늘 깜짝 놀랐잖아요, 다행히 잘 넘겼지만.”그 말을 꺼내자마자 원태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네가 말 안 했으면 까맣게 잊었을 거야, 유진 때문에 둘째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전화해서 경고해야겠어.”원태웅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다른 한편...통유리 창 너머로 반짝이는 온 도시의 네온 불빛과 달리 집 안은 깜깜했다. 유일하게 석지훈의 핸드폰만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영상을 보고 나서 원태웅이 보낸 메
나만 손해를 보게 될 거라고?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손해 보는 게 그와 무슨 상관이지?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순간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내게 경고하듯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 세상에는 항상 더 강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수아 씨가 석씨 가문을 쥐고 있지만 그것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여지를 두는 게 결국 좋을 겁니다.”강가에 파도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훈 씨라는 건가요?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지훈 씨도 잘 알잖아요.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상처만 남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제가 왜 가만히 있어야 하죠? 그때마다 항상 사람들에게 당하기만 했는데 이제 석씨 가문을 제 손에 쥐었는데 제가 왜 참아야 하죠?”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말 고집이 심하네요.”나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지훈 씨 마음대로 하세요.”석지훈과 처음 만난 건 우리가 강에 빠졌을 때였다.그때 나는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었고 그 일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방금 내가 했던 말이 상처가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나는 서로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석지훈은 내 태도에 한참을 멈춰 서 있다가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강에 뛰어들었다.차가운 강물에 휩쓸려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수영을 거의 할 줄 몰랐다. 석지훈이 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 경호원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가 있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석지훈이 나를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쯤 누군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나를 물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나는 급히 그의 목을 끌어당긴 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속에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분명히 그에게 입을
나는 잠시 멈춘 뒤 말했다.“한씨 가문 쪽은 함 집사에게 맡겨. 어르신께서 운성시를 떠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만약 떠나려고 하면 지훈 씨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가두어 두면 돼. 참, 아까 어르신께서 에르크 별장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비서가 설명했다.“오늘 금방 운성시에 도착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속에 쌓인 분노를 가라앉혔다.고현성은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내 손을 꼭 잡은 채 위로를 건넸다.“수아야, 나 때문에 화내지 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이제 와서야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다니.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 화 안 났어.”그리고 곧장 물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고현성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훤칠했다.비록 정신이 온전치 않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다.“아까 민영이 따라 쇼핑몰에 갔다가 민영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거든. 그때 갑자기 그 여자가 나타난 거야. 나를 수아한테 데려다주겠다고 했어.”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여자는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난 수아를 만났고 수아는 내 손도 잡아 줬잖아.”그는 우리가 맞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나는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집까지 데려다주세요.”그러자 고현성은 서운한 듯 물었다.“수아야, 나를 보내려고? 이제 금방 만났는데...”그는 예전에도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그는 내가 이런 모습에 약하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곁에 있던 비서가 나를 대신해 말했다.“현성 씨,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대표님께서 현성 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 나면 곧 찾아가실 겁니다.”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수아야, 정말
나는 애초에 그들이 이렇게까지 고현성을 모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눈앞에서 잔뜩 위축된 채 겁먹은 듯한 그를 보니 가슴 속에 답답함이 차오르며 알 수 없는 연민이 느껴졌다.나는 몰래 눈물을 훔치며 애써 참아냈다. 그리고 한성범을 바라보며 물었다.“고현성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단지 모욕하기 위해서입니까?”한성범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굳이 바보 같은 놈과 엮일 이유가 없지 않니? 스스로 찾아온 거지, 우리 한씨 가문과 무관하네.”주변의 하객들은 대부분 자리를 떠났고, 이 일과 관련 있는 자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 중 나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바로 주민솔이었다.그녀는 이미 모습을 감췄고 나는 곧바로 담유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유미 씨가 데려온 거예요?”담유미 역시 나에게 호의를 가질 리 없었다.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나는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렸다.“거짓말하지 말고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지금 거짓말을 해도 곧바로 사람을 시켜 이 일을 전부 조사할 수 있어요.”그녀의 표정은 침착했지만 눈빛에는 순간적인 당혹감이 스쳐 갔다. 하지만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그때, 갑자기 고현성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수아야,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나 데려가 줄 수 있어?”이 순간, 그는 나를 수아라고 불렀다.나는 전에 그에게 내 이름이 수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그렇다면... 그의 아내 수아뿐만 아니라 나도 기억하는 걸까?나는 애틋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래, 데려갈게.”그리고 원태웅에게 비켜달라고 말한 뒤, 덤덤한 시선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내 뒤에 서 있던 비서를 향해 조용히 지시했다.“이 일이 누구의 짓인지 철저히 조사해 주세요. 만약 어르신의 소행이라면 즉시 이 저택을 폭파해 버리세요. 혹여나 담유미 씨가 한 짓이라면 담씨 가문을 매입해서 담현아에게 넘겨주세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유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소리를 질렀다.“수아 씨가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
내가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고현성은 이제 끝났어. 잘나가던 인생이 재앙 덩어리를 아내로 맞는 바람에 망한 거잖아!”재앙 덩어리...나는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그때 고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그는 모든 것을 잊었지만 수아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오직 그의 수아만을 옹호하고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침묵하는 석지훈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오히려 담유미가 물었다.“그럼 넌 바보야?”바보에게 바보냐고 묻다니.나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입 다물어요!”“왜? 부끄러워서 화내는 거야?”한성범은 이때다 싶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그럼 고현성이 바보가 아니라는 거야? 연수아, 난 널 초대 안 했으니 나가. 곧 ‘바보극' 공연이 있거든!”한성범은 석지훈의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눈앞의 술잔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위해 막아냈다. 마음속에서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그때 고현성이 황급히 일어나 나를 진정시켰다.“저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 수아는 그냥 내 아내일 뿐이야!”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차가운 눈빛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저 사람을 감쌀 건가요?”석지훈은 차가운 침묵으로 나에게 답했다.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술잔을 다시 한성범에게 던졌다. 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받아 바닥에 던져버렸다.유리 조각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흩어졌다.그때 담유미가 차갑게 말했다“연수아 씨, 너무 건방지네요.”그러자 담현아가 차갑게 꾸짖었다.“입 닥쳐!”담유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원태웅은 황급히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윤아야, 화내지 마. 우리 여기서 나가자!”나는 눈
석지훈은 당연히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에서 위로 그를 올려다보며 비판했다.“오후에 그 일은 당신이 잘못했어요!”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음?”“나는 그 사람들과 친분이 있어요. 친구처럼. 그들이 나를 유람선에 초대한 건 내가 그들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석지훈 씨라고 했죠? 설마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당신 주변에 자주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근데 내가 당신의 무엇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우리 석씨 가문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내 말은 다소 따끔했고 석지훈의 얼굴은 차가워졌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어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생각에 빠져 착각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혹시 당신 마음속으로는 나를 좋아하는데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나를 피하고 당신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설마 마음이 흔들릴까 봐 두려운 건가요?”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말을 돌렸다.“물론.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 속마음을 알 수는 없죠. 됐어요, 당신이랑 말싸움하기 귀찮아요!”그는 차갑게 말했다.“허튼소리.”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평소에 나한테 신경 끄세요!”석지훈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못 참네. 그 성격에 어떻게 여자 없이 지금까지 버텼을까? 아마도 내가 운이 좋은가 봐. 안 그러면 당신을 어떻게 얻었겠어!”‘지훈 씨,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신앙처럼. 당신 말대로 이 길을 따라갈게! 당신이 나에게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 기억해둘 테니까! 나중에 똑같이 갚아줄 거야!’담현아는 몇 분 동안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나는 놀리듯 물었다.“부부끼리 무슨 달콤한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이제 푹 빠진 거야?”담현아는 웃으며 물었다.“푹 빠졌다는 게 사랑한다는 뜻이에요?”내가 되물었다.“그럼 아니야?
담현아는 의리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홀을 나와 뒤뜰을 찾아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갑자기 고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담현아가 먼저 그를 언급했던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나 아저씨한테 고현성의 현재 상황을 들었어요. 그의 지금 상황이... 아저씨는 아주 괴로워하더라고요. 결국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수아 언니는 어때요?”담현아는 내 마음이 아픈지 묻고 싶어 했다내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있겠는가?그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내 전남편인데.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게다가 지금의 고현성은 변하고 있었다.그는 예전의 그 남자와는 완전히 달랐다.그는 심지어 아이를 나의 생일선물로 돌려주기까지 했었다.나는 담현아 앞에서 고현성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희연이가 요즘 연락 오던?”“네.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아서 아이스랜드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한대요. 왕자현 씨가 옆에서 계속 돌봐주고 있다고 하더라고요.”담현아가 왕자현을 언급하자 나는 흥미가 생겨 말했다.“왕자현 씨 집안이 엄청 부자라며?”담현아는 뭔가 아는 듯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왕씨 가문은 세력은 없어도 돈은 엄청 많죠.”돈이면 다 되지. 돈이 곧 힘인데.담현아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급히 일어서며 고정재의 전화라고 했다.담현아가 남편 전화를 받으러 뒤뜰을 나가자 앉아서 할 일이 없던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나는 2층 발코니에서 고독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미소를 짓고 떠나려 했다.그런데 그가 뜻밖에도 나를 불러 세웠다.“연수아 씨.”나는 걸음을 멈췄다. 석지훈이 나를 부른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웠다.오후에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그가 그렇게 차가우니 나도 굳이 아부할 필요는 없었다.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우리가 그렇게 친했나요?”그는 내 질문
담현아는 옷을 갈아입고 싶어 했다. 내 차에도 여벌 옷은 있었지만 우린 키 차이가 있었고 예지한도 여기 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를 근처 쇼핑몰에 데려갔다.담현아는 쇼핑이 빨랐다. 핑크색 롱드레스를 입으니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그녀는 또 반지 몇 개를 손가락에 끼고는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뻐요?”담현아는 워낙 예뻤기에 뭘 입어도 예뻤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말했다.“아주 예뻐.”담현아는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꾸미는 걸 잘 안 해서...”그녀는 쇼핑몰 화장대에서 가볍게 화장을 하고 나서야 나와 함께 한씨 가문으로 갔다. 그리고 경호원을 많이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오늘 한씨 가문에는 일부러 트집 잡으러 가는 거라 나도 준비를 해뒀다. 휴가가 방금 끝난 비서에게 문자를 해두었던 것이다.한씨 가문에 도착하니 비서는 이미 와 있었다. 내 옆에 있는 23명 외에도 비서는 꽤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비서는 우리 뒤를 따라 들어가고 나머지는 입구를 지켰다. 담현아는 초대장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담유미를 발견했다.흰색 이브닝드레스에 진한 화장을 한 담유미는 큰 키 덕분에 드레스가 참 잘 어울렸다. 담현아는 그녀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담유미, 너 엄마 아빠 앞에서 무슨 말을 했어?”담유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 지금 언니한테 따지는 거야?”“미안하지만, 난 오빠밖에 없어.”담현아의 말은 너무 매몰찼다.담유미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곧 설명했다.“난 네 일에 관심 없어. 부모님은 오빠한테 네 남자친구 얘기 들으신 거야.”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너랑 상관없는 일이네!”담현아의 말투는 꽤나 퉁명스러웠지만 담유미는 별말 없이 얼굴만 굳힌 채 가버렸다.그녀가 가고 나서야 담현아가 말했다.“우리 집의 골칫거리는 바로 저 여자인데 집안 사업까지 쥐고 흔들고 있죠. 하지만 뭐, 나쁘진 않아요. 어차피 나랑 오빠는 담씨 가문의 사업에는 관심 없으니까!”담유미에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