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이는 수아 씨가 오기 전에 이미 떠났어요."나는 목숨을 걸고 온몸에 상처를 입으며 석지훈을 찾아왔지만 결국 석지훈을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온몸이 떨렸고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현정우는 나의 이상함을 감지하고서는 뒤에서 내 어깨를 잡으며 부축했다.덕분에 나는 쓰러지지 않았지만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이때 병원에 종소리가 총 열두 번 울려 퍼졌다.올해의 설날은 이렇게 끝났다.나는 핀란드에 두 번이나 왔지만 보고 싶었던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나는 한민수에게 물었다."지훈 오빠는 정말 나를 그렇게 싫어해요?"한민영은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 고마워서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어?"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목구멍에 수많은 말이 걸렸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한민영은 비웃으며 말했다."연수아, 넌 재앙 덩어리야."나는 차갑게 한민영을 째려보며 말했다."닥쳐.""흥,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해?"한민영은 나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석지훈의 손에서 빼앗은 석씨 가문으로 잘난 척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말 뻔뻔하네."나는 몇 걸은 앞으로 나아가 한민수가 보는 앞에서 한민영의 뺨을 세게 때렸다.한민영의 얼굴은 순간 확 돌아갔고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석지훈도 내 얼굴을 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네가 뭔데 날 때려? 연수아, 네가 믿건 말건 다음번엔 반드시 너를 죽여버릴 거야."내가 다시 한민영의 뺨을 내리치자 한민영은 원망 어린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이 광경을 본 한민수는 다급하게 나를 막았다.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경고했다."첫 번째 뺨은 나를 눈 속에 묻은 대가고 두 번째 뺨은 오늘 내 뱃속 아이를 거의 죽일 뻔한 대가야. 한민영, 난 결코 순진하거나 착한 사람이 아니야. 뱃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너희 한씨 가문 전체가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야. 그리고 나는 석지훈의 석씨 가문을 이용해 너희 가족 모두에게
석씨 가문의 크고 작은 일은 지금 석씨 가문의 책임자인 함승윤이 처리하고 있다.그래서 나는 석씨 가문에 대해 어느 정도 눈을 가린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다.마음속으로는 지금 석씨 가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깨끗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믿을 만한 사람을 키우는 것도 나쁠 것이 없었다.게다가 석만호도 이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강해온이 석씨 가문에 들어오는 것은 석씨 가문의 투명성을 더 잘 보장할 수 있고 석씨 가문이 내 앞에서 투명하고 어떤 비밀도 숨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나는 이내 명령했다."함승윤에게 직접 나와 연락하라고 전하세요.""네, 가주님."내가 아파트로 돌아오니 산후 도우미 박영희도 와 있었다. 박영희는 내 얼굴의 상처를 보고 놀라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아가씨, 얼굴의 상처는 어떻게 된 거예요?"나는 간단히 설명했다."어젯밤 차가 미끄러져서 전복됐어요."박영희는 걱정하며 말했다."아가씨,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괜찮아요. 오늘은 무슨 음식을 준비하셨어요?""갈비탕과 삼계탕을 준비했는데 드셔보실래요?"나는 갈비탕을 한 그릇 먹고 나서 침실로 가 잠을 잤다.오후에 고현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현성은 보기 드물게 아주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네 부모님을 연씨 가문 저택으로 모셔다드렸어."나는 시선을 창밖에 수북이 쌓은 눈밭에 둔 채 전화를 받았다.고현성은 이어서 말했다."연수아, 많은 사람이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래. 하지만 지금의 내가 내가 아니면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이야?"고현성의 말은 방황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는 듯했다.지금의 성격은 아마도 여전히 나를 증오하는 그 성격일 것이다.하지만 그런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내 부모님을 놓아주다니 어쩌면 고현성이 나아지고 있다는 뜻 아닐까?나는 낮은 목소리로 고현성에게 물었다."고현성 씨, 당신은 스스로 누구라고 생각해요?""잘 모르겠어. 때로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널 다치게 하잖아."고현성은
"승아는 태어난 후 몸이 약해서 줄곧 병치레가 많았어요. 이 7개월 동안 거의 병원에서만 지냈죠. 나는 승아와 함께 끝까지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방금 의사가 백혈병에 걸렸다고 진단했어요."핸드폰 너머에서 송이연은 어쩔 줄 몰라 울먹이며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이렇게 어린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 한다니. 수아 씨,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송승아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송이연이 지금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기에 내가 먼저 당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침착하게 물었다."언제 진단받았어요?"송이연이 대답했다."조금 전에요."나는 차분히 물었다."그럼 의사가 또 뭐라고 했어요?"골수 이식이 필요하대요. 하지만 적합한 골수가 없어요.""함께 방법을 찾아봐요. 내일 내가 상주로 갈게요."나는 요 며칠간 계속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어젯밤에는 유산할 뻔한 일도 있었기에 지금 당장은 무리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송이연은 울음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 수아 씨.""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연 씨 딸이자 나의 조카잖아요."내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송이연은 나에게 주의를 주며 말했다."시혁 씨한테 알리지 마세요."연시혁이 송승아의 친아버지이기에 그와 골수가 일치할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송이연도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연시혁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이걸 보면 송이연이 연시혁에게 가진 원망이 예상보다 깊은 것 같았다."네, 비밀로 할게요."송이연은 원래 더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의사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니 거실에서 게임 하고 있는 담현아를 발견했다.놀란 나는 담현아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언제 왔어?"담현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어제 나한테 놀러
동성의 겨울은 유독 차가웠다. 그 추위는 뼛속까지 스며들어 고정재의 마음마저 얼어붙게 했다.어젯밤, 고정재는 급하게 동성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의 댁에서 담현아와 그녀의 오빠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중에야 선생님의 아내가 담현아의 고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담현아는 고정재를 보고도 별다른 놀라움 없이 담담히 인사하고는 어린 조카와 놀기 시작했다.고정재는 담현아가 가족들 앞에서 무척 순수하고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았다. 담현아는 고정재의 앞에서 차갑고 무관심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리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마치 가족들의 분위기에 녹아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완벽히 연기하려는 듯했다.그제야 고정재는 담현아가 남들 앞에서 연기를 잘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과 뒤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고정재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담현아의 고모는 고정재가 담현아와 함께 공연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두 사람이 친한 사이인 줄 알고 담현아에게 배웅하라고 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눈 내리는 밤길을 아무 말 없이 함께 걷다가 헤어질 때쯤 고정재가 물었다."현아야, 나 많이 싫어하니?"고정재는 31년 동안 살아오면서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쓴 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 눈앞의 이 사람만은 달랐다.담현아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고정재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정재가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윤다은의 말처럼 이것이 바로 신경 쓰이는 마음일지도 몰랐다.고정재는 처음으로 담현아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연수아에게 느꼈던 지켜주고 싶다는 단순한 감정보다 더 깊었고 담현아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그 순간 고정재는 최근 느꼈던 혼란의 이유가 바로 이 감정 때문임을 깨달았다.눈 내리는 밤 담현아의 곁에 서 있는 지금 고정재는 자신의 마음을 피하지 않고 인정했다.고정재는 담현아를 사랑하고 있었다.고정재는 자기가 언제부터 담현아를 신경
담현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더니 기쁜 듯 말했다."나 오빠들이랑 내기했어요. 만약 내가 여기 와서 언니가 오빠들을 초대해 밥을 먹게 하면 오빠들이 각각 나한테 천만 원씩 세뱃돈을 준대요.이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너희 진짜 유치하다."담현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내가 올해 세뱃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맞혀봐요."담현아는 돈을 잘 벌 줄 아는 사람이었고 실제로도 잘 벌었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이었다.나는 대충 추측하며 물었다."2억 정도 돼?담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1억도 안 돼요."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왜 그렇게 적어?"명문가의 자녀라면 설날마다 세뱃돈으로 엄청나게 많이 받을 것이다.담현아는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귀찮아서 친척들 안 찾아갔거든요. 그냥 부모님이랑 오빠들만 나한테 세뱃돈을 줬어요. 근데 정재는 진짜 짠돌이예요. 어젯밤에 일부러 고정재가 준 세뱃돈을 열어봤는데 안에 겨우 100만 원밖에 안 들어 있더라고요. 언니는 그래도 나한테 200만 원을 줬잖아요.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내가 준 세뱃돈 언제 열어봤어?"담현아는 손으로 돈봉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두께가 다르잖아요. 만져보면 알 수 있어요."나는 담현아에게 제안했다."내 방에 세뱃돈 봉투 하나 더 있는데 줄까?"담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돼요. 그러면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 보이잖아요."나는 담현아의 정교한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그럼 다음번에는 더 많이 줄게."담현아는 손에 들고 있던 스포츠카 키를 흔들며 말했다."이거보다 더 큰 게 있을까요?"최근 느껴졌던 답답함은 담현아와 함께 있으니 사라졌고 나는 모처럼 담현아와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담현아는 세뱃돈과 차 키를 소파 위에 놓고 계속 게임을 했다.이때 갑자기 고정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꼬마 아가씨, 동성으로 돌아가는 걸 잠시 미뤘어. 이따 너희 집으로
담현아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듯했지만 나는 급히 그녀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밥 먹자."내 말을 들은 담현우는 분위기를 알아차리고서는 입을 다물더니 주방으로 와서 도왔다.다들 식탁에 앉은 뒤 나는 맥주를 가져왔다. 담현아도 술을 마시고 싶어 했지만 나는 담현아가 술을 한 잔도 버티지 못한다는 걸 떠올리고 급히 막으며 말했다."넌 아직 어려."담현아는 순순히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고정재를 제외한 남자들은 모두 말이 많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갔다.대화는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주제로 흘러갔고 반경우는 결국 화제를 나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우리 아기, 너희 석지훈은 왜 안 와?"반경우는 나와 석지훈 사이의 구체적인 사정을 알지 못했다.나는 잠시 생각한 뒤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핀란드에서 일하느라 바빠."내가 얘기를 더 하고 싶지 않은 태도를 보이자 반경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대신 지난날을 회상하며 말했다."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넌 지금의 현아보다 세 살 더 어렸잖아.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버렸고 또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네. 이제 몇 달 뒤면 엄마가 된다니. 믿어지지 않아."반경우가 엄마라는 두 글자를 언급하자 나의 마음은 따뜻해졌고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모습이 몹시 기대되었다.나는 과일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너도 이제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리 잡아야지."반경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비혼주의자야."옆에서 이 말을 들은 담현아는 푸아그라를 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진정한 비혼주의자가 어디 있겠어? 그냥 좋아하는 사람을 못 만났거나 좋아해도 마음을 얻지 못했겠지."담현우는 웃으며 물었다."현아야, 네 말은 경우가 좋아해도 얻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거야?"반경우는 담현아를 살짝 째려보며 위협하듯 말했다."너한테 줄 천만 원 아직 안 준 것 같은데?"담현아는 순간 화제를 바꾸더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경우
동성의 하늘에는 가벼운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정재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정재의 입장을 생각했을 때 내가 너무 많은 걸 묻는 건 부적절해 보였지만 또 그와 오해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나는 신중하게 설명했다."현아가 말한 그 사람은 석지훈이에요. 현아는 석지훈의 보호 아래 자랐거든요. 현아에게 석지훈은 평생 따를 사람이에요. 다만 현아는 석지훈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없어요. 그냥 일적으로 멘토이자 따르는 대상일 뿐이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고정재는 똑똑했기에 나에게 물었다."석지훈과 담현아가 어떻게 얽힌 거야?"모든 걸 캐물으려는 고정재의 태도에 나는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어 먼저 그에게 물었다."정재 씨는 현아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내 말을 들은 고정재의 표정은 순간 굳어졌다.나는 고정재가 담현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나는 설명을 이어갔다."현아는 담씨 가문과 예전 석씨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소녀예요."예전의 석씨 가문은 석지훈의 세대를 뜻했다.고정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석씨 가문이 왜 현아를 보호했는데?""고정재 씨, 현아는 천재 소녀예요."고정재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뭔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나는 간단히 말했다."많은 걸 어떻게 정재 씨에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현아는 보통 사람보다 아이큐와 감성 지수가 높아요. 우리보다 훨씬 많은 걸 볼 수 있고 생각도 더 예민하죠."고정재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곤란하네."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요?"고정재는 천천히 눈을 떠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현아는 어젯밤 분명히 나를 거절했어."나는 순간 멈칫했다. 평소에 냉담하고 차가운 고정재가 정말 어린 소녀 담현아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수십 년 동안 고정재를 쫓아다닌 윤다은조차 고정재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는데 고정재는 몇 번 보지도 못한
고정재는 인내심을 갖고 다시 물었다."그 사람이 누군데?"나는 원태웅이 전화로 담현아를 핀란드로 초대한 것이 한민수의 지시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담현아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말했다."석지훈이죠. 원태웅은 석지훈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핀란드로 가야 해요."고정재는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담현아는 설명을 덧붙였다."석지훈은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대요. 내가 딱 적임자죠."나는 담현아의 기술적인 능력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컴퓨터 분야의 얘기는 처음 들었다.그러나 담현아는 워낙 똑똑했기에 못 하는 게 없을 것이다.담현아는 지금 석지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하지만 나는?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다.고정재가 방을 나가자 다현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영재반과 예전 석지훈의 사람들이 모두 핀란드에 모였어요. 원태웅의 말에 따르면 나도 그곳에서 몇 달 머물러야 한대요."석지훈은 그의 인맥과 세력을 다시 구축하려 했다.나는 갑자기 담현아가 석지훈의 곁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담현아가 물었다."언니도 나랑 같이 갈래요?"두 번이나 핀란드에 갔지만 석지훈을 만나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현아야, 나는 석지훈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담현아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왜요?""나랑 석지훈은 싸우고 헤어졌어."담현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함께하자고 하면 함께하는 거고.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지고. 어른들의 감정은 왜 이렇게 장난 같아요?"나는 말문이 막혔다.담현아의 생각에는 내가 이미 여러 남자를 만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담현아가 나를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지만 고현성이든 석지훈이든 그 어느 관계도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게다가 이번에는 내가 석지훈에게 상처를 줬다."현아야, 나는 석지훈을 정말 사
최희연은 이곳에서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문을 열고 나가자, 왕자현은 붉은색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컬러가 그에게는 전혀 과하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매력적인 느낌을 더했다.그는 복도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악기가 놓여 있었다. 그 악기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재민이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자현 씨, 악기 다룰 줄 아세요?”정원에는 눈이 두텁게 쌓여 있었고 온천에서는 여전히 증기가 오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악기를 다루며 말했다. “어릴 때부터 배웠어요.”그는 말 그대로 고귀함이 물씬 풍겼다.최희연은 속으로 감탄했다. 왕자현은 정말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와도 같았다. 모든 게 완벽할뿐더러 온화하며 세심하게 다듬어진 느낌이었다.“자현 씨는 어릴 적부터 많은 걸 배우셨네요.”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집안이 부유하다 보니 생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죠. 원하지 않는 걸 배울 이유도 없고 여유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악기를 배운 거죠.”부유한 집안에 대해 그는 마치 당연한 듯 말했다.그녀는 조금 시큰둥하게 말했다. “정말 부럽네요.”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부러워하는 거죠?”“부유한 집안이요.”그는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더 이상 그녀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최희연은 그 곡을 이해할 수 없었다.악기라고 배운 적이 없었기에 감상하기 어려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률이 매우 아름다운 곡이었다.그녀는 왕자현 곁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진유겸이었다. 그녀는 별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혹여나 여기까지 찾아올까 봐 할 수없이 통화 버튼을 클릭했다.진유겸은 충분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복도 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전화해서 뭐 하려고요?”진유겸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수아 씨가 그러는데 네가 결혼했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VIP 병실이었고 나는 크고 부드러운 병상에 누워 있었다. 눈앞에는 소파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그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더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깨어났어요?”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네, 지금 몇 시예요?” 석지훈은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새벽 3시예요.”“아, 그렇군요. 고마워요.”“별말씀을.”“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워요.”그는 가볍게 대답한 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유진이랑 태웅이는 수아 씨가 형수님이 되어주길 바라던데 전 아직 여자 친구 찾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네?”“수아 씨도 저를 둘째 오빠라고 부르세요.”둘째 오빠...석지훈은 2년 전부터 자신을 둘째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었다.마치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일부러 물었다.“왜요?”그는 돌아서서 나를 향해 물었다.“원하는 게 뭐예요?”나는 술에 취해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말했다.“절 가지세요.”웃음이 피식 나오는 석지훈이었다.“전 수아 씨를 갖고 싶지 않아요.”“너무 단호하시네요. 저 되게 쉬운데, 한 번 해보세요.”그 역시 그날 밤처럼 대답했다.“흥미 없어요.”나는 웃으며 말했다.“마침 잘됐네요. 우리 그냥 이렇게 끝내죠.”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왜 시나리오대로 안 가는 거예요?”나는 물었다.“뭔 시나리오죠?”“그날 술 취해서 비슷한 말을 했잖아요.”석지훈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전 이미 다 잊었어요. 그날 밤 술에 취했다 보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그는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진짜 취했어요?”혹시 내가 취한 척하는 걸 눈치라도 챘나?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건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의 모습이었다.나는 그의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시크한 척은.비는 쏟아졌고 고현성은 계속해서 내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나는 원래 그를 무시하고 떠날 생각이었지만 석지훈이 가볍게 말했다. “협박하고 싶지 않아요.”협박하고 싶지 않다...이미 협박이었다.나는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도대체 뭐 하려는 거죠?”“말했잖아, 민수가 수아 씨를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석지훈의 말투는 너무나 가벼워서 마치 오늘 이 일을 끝내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내가 떠나는 것도 나를 놓아주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 강압적인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어쨌든 이 일은 그냥 지나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고현성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비서한테 부탁해서 집까지 데려다줄게. 며칠 후에 다시 너랑 놀아주면 어때?”그의 눈빛엔 실망이 담겨 있었지만 나를 괴롭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내 말을 따랐다.“알겠어.”그 말을 듣고 비서는 즉시 차에 올라타더니 고현성을 집으로 데려다줬다.고현성이 떠난 뒤 나는 석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지훈 씨의 성격상 민수 씨 부탁으로 절 데려갈 사람이 아닌데요? 혹시 저한테 관심이라도 생겼어요?”석지훈은 내 말을 듣더니 차갑게 쏘아봤다.나는 다시 물었다. “혹시 질투하는 건 아니죠?”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차로 돌아갔다.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윤 비서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수아 씨, 농담 그만하시고 얼른 차에 타세요.”나는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접고 차에 올랐다. 석지훈은 곁에서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몸이 계속해서 나른하고 불편해서 결국 눈을 감고 쉬기로 했다. 차가 거의 도착할 즈음, 석지훈이 갑자기 물었다.“자주 연락하세요?”석지훈이 가리키는 건 고현성이었다.“지훈 씨랑 상관없을 텐데요.”“그래, 상관없지.”석지훈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담담했다.나는 몸 상태가 안 좋다 보니 힘없이 석지훈에게 말했다. “약속대로 저를 데려왔으
그의 촉촉한 눈망울을 마주하며 나는 결국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먼저 옷부터 갈아입어.”고현성은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의 모습에 나는 잠시 눈이 반짝였다. 비서는 그에게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사주었고 흰색 니트는 그의 몸에 딱 맞아 보였다.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는 더욱 훤칠해 보였다.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가자.”나는 먼저 문을 나섰고 고현성은 내 뒤를 따라 나섰다. 비서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서는 고현성에게 우산을 씌워주었고 나는 혼자서 우산을 썼다. 그런데 고현성은 나를 위해 우산을 씌워주고 싶어 했다.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말했다.“말 들어.”고현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우산을 쓰고 앞서갔고 고현성과 비서는 뒤에서 따랐다. 아파트 입구에 다다를 때 나는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그때, 석지훈이 갑자기 몸을 살짝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윤아야.”기억을 되찾은 건가?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태웅이가 그렇게 불렀죠?”괜히 설렜네.내가 답을 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고현성이 급히 설명했다. “수아예요.”고현성은 내 앞에 서서 소유욕을 보이며 석지훈을 막아섰다. 석지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쪽은?”“전 수아의 남편, 고현성이라고 해요”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조금 망설였다. 마치 자기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듯했다.계속해서 그를 현성이라고 부르자 석지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다시 물었다. “남편?”고현성은 확고하게 말했다.“네!”석지훈은 나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태웅이가 어젯밤까지 전남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고현성은 잠시 멈칫하더니 내게 물었다. “수아야, 전 남편이 뭐야?”석지훈은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그의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하지만 그는 절대로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물론 어젯밤에 그
“우리 와이프는 당연히 예쁘지.”“...”그 순간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뜨거운 우유 한 잔을 가져와 내내 뒤를 따라오던 고현성에게 건넸다.“따뜻한 우유 좀 마셔.”고현성은 내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고 원피스 밑단은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는 순순히 우유를 받아 마시고는 고양이처럼 입술을 핥았다.나는 갑자기 그 뚱뚱한 고양이가 떠올랐다.그 고양이는 언제나 고현성의 별장에서 먹고 마시며 돌아다니던 녀석이었다.나는 시선을 거두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우유 잔을 손에 쥔 채 마치 초등학생처럼 공손하게 내 옆에 앉더니 지긋이 나를 쳐다봤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계속 나만 쳐다보는 거야?”“수아가 사라질까 봐.”나는 그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그는 손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우유 잔을 꽉 쥔 채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나는 항상 수아를 볼 수 없어. 꿈에서도 볼 수 없고, 사실 난... 진심으로 수아가 그리워. 언제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형은 수아한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근데 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 형은 수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아. 만약 수아가 사랑하는 사람이...”그는 잠시 멈추더니 계속해서 말했다.“그럼 난 누구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치명적인 질문을 던졌다.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우리는 이미 과거의 인연일 뿐이었다.그는 대답을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으려 했다.나는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지만 갑자기 고현성은 두려운 눈빛을 띠고 손을 뗐다.“수아야, 나 무서워.”“고현성,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나.”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리고 분명히 나보다 더 예쁠 거야.”그는 급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안 돼, 난 수아만 원해. 형이 말했잖아, 수아는 내 와이프라고. 그게 과거일지라도 나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모
며칠 전에 석씨 별장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미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어젯밤 강물에 빠진 후로 바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파서 급히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의사를 데리고 집으로 찾아왔다. 나는 약을 처방받은 뒤 링거를 맞았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깨어나니 이미 점심이었다.운성시는 다시 우중충한 날씨가 되었다. 겨울은 이미 지나갔고 눈은 오지 않았지만 초봄이라 비가 유난히 자주 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 한민수가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그는 의도적으로 말했다.“오늘 밤 놀러 갈래?”“안 가요.”“알겠어, 그럼 끊을게.”전화를 끊고 배가 고팠지만 아직 링거를 맞고 있는 상태라 배달을 시킬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고정재가 전화를 걸어왔다.“집이야?”어젯밤 너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운성시의 아파트로 갔고 고정재는 그 주소를 알고 있었다.그가 물어본 집은 바로 그 아파트를 뜻하는 것 같았다.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어 고정재에게 물었다.“어느 집이요?”“아파트, 여기서 보니까 현성의 위치가 네 집 근처에 있더라. 근데 나 지금 지금 국내에 없어서 혹시 네가 도와줄 수 있을까? 미안,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 근데 현성이가 네 말만 듣는 것 같아서.”“알겠어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나는 링거를 빼고 몸을 힘겹게 일으켜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층에는 고현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검은 우산을 들고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비에 젖은 남자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여전히 비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나는 급히 달려가서 물었다.“여기서 뭐 해?”고현성은 머뭇거리며 설명했다.“너 오늘 나 보러 온다고 했잖아. 근데 집에서 기다리다 못 참고 여기까지 왔어. 네 연락처도 없고 여기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 수아는 역시 여기서 살고 있었구나.”그는 본능적인 기억을 따라 이곳으로 찾아왔다.“그럼 왜 비를 피하지 않고
방금 그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원태웅은 갑자기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기쁨이 넘치는 얼굴로 물었다.“방금 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맞혀볼래?”나는 그를 흘겨보며 답했다.“얼른 알려줘요.”“네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어.”이건 석지훈에게 꽤 어려운 일이었다.나는 웃으며 물었다.“그거 말고 또 있어요?”“그리고 오늘 밤에 한 말이 너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냐고 하더라? 네가 형 앞에서 몇 번이고 그 얘기를 했다고.”석지훈은 이혼한 여자를 좋아할 이유가 있냐고 했었다.나 역시 그 말을 생각하면서 그의 앞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다. 나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럼 뭐라고 대답했어요?”“답을 못 할 뻔했지. 눈치도 못 채고 되레 형한테 물었단 말이야. 다른 여자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냐고?”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리고 오빠는 전화를 끊었겠죠?”“내가 방심했나 봐! 바로 둘째 형한테 메시지 보낼 거야. 누구든지 그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지, 특히 예쁘고 자존심 강한 여자는 더욱 상처받을 거라고 해야겠어.”원태웅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오빠들은 항상 둘째 오빠 앞에서 내가 예쁘다고 말하네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당연하지, 원래 예쁘잖아. 아무래도 우리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니까 형도 궁금해하지 않을까?”“괜찮아요, 이미 나에게 관심을 가진 것 같은데요?”이제는 그냥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우리 수아 자신감 넘치는데?”“당연한 거 아닌가요? 유진 씨도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데요. 오늘 깜짝 놀랐잖아요, 다행히 잘 넘겼지만.”그 말을 꺼내자마자 원태웅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네가 말 안 했으면 까맣게 잊었을 거야, 유진 때문에 둘째 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 전화해서 경고해야겠어.”원태웅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다른 한편...통유리 창 너머로 반짝이는 온 도시의 네온 불빛과 달리 집 안은 깜깜했다. 유일하게 석지훈의 핸드폰만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는 영상을 보고 나서 원태웅이 보낸 메
나만 손해를 보게 될 거라고?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손해 보는 게 그와 무슨 상관이지?나는 몰래 눈물을 훔쳤다. 순간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내게 경고하듯 귓가에 울려 퍼졌다.“이 세상에는 항상 더 강한 사람이 있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수아 씨가 석씨 가문을 쥐고 있지만 그것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여지를 두는 게 결국 좋을 겁니다.”강가에 파도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석씨 가문을 빼앗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훈 씨라는 건가요?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지훈 씨도 잘 알잖아요.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상처만 남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제가 왜 가만히 있어야 하죠? 그때마다 항상 사람들에게 당하기만 했는데 이제 석씨 가문을 제 손에 쥐었는데 제가 왜 참아야 하죠?”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표정이 굳어졌다.“정말 고집이 심하네요.”나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지훈 씨 마음대로 하세요.”석지훈과 처음 만난 건 우리가 강에 빠졌을 때였다.그때 나는 강에서 그에게 키스했었고 그 일이 그의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방금 내가 했던 말이 상처가 됐을지 몰라도 나는 그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나는 서로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석지훈은 내 태도에 한참을 멈춰 서 있다가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강에 뛰어들었다.차가운 강물에 휩쓸려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수영을 거의 할 줄 몰랐다. 석지훈이 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 경호원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그가 있으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석지훈이 나를 구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며 물을 삼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쯤 누군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며 나를 물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나는 급히 그의 목을 끌어당긴 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물속에서는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분명히 그에게 입을
나는 잠시 멈춘 뒤 말했다.“한씨 가문 쪽은 함 집사에게 맡겨. 어르신께서 운성시를 떠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만약 떠나려고 하면 지훈 씨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가두어 두면 돼. 참, 아까 어르신께서 에르크 별장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비서가 설명했다.“오늘 금방 운성시에 도착했습니다.”나는 눈을 감고 속에 쌓인 분노를 가라앉혔다.고현성은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내 손을 꼭 잡은 채 위로를 건넸다.“수아야, 나 때문에 화내지 마. 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이제 와서야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다니.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 화 안 났어.”그리고 곧장 물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고현성은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훤칠했다.비록 정신이 온전치 않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다.“아까 민영이 따라 쇼핑몰에 갔다가 민영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거든. 그때 갑자기 그 여자가 나타난 거야. 나를 수아한테 데려다주겠다고 했어.”그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여자는 나를 속이지 않았어. 난 수아를 만났고 수아는 내 손도 잡아 줬잖아.”그는 우리가 맞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나는 그의 순진한 표정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비서에게 지시했다.“집까지 데려다주세요.”그러자 고현성은 서운한 듯 물었다.“수아야, 나를 보내려고? 이제 금방 만났는데...”그는 예전에도 종종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그는 내가 이런 모습에 약하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곁에 있던 비서가 나를 대신해 말했다.“현성 씨,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대표님께서 현성 씨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 나면 곧 찾아가실 겁니다.”그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수아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