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훈이 떠난 그 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겨우 잠들었는데 얼마 못 가 전화벨 소리에 깨고 말았다.최희연이었다.나는 전화를 받으며 호기심에 물었다.“무슨 일이야?”최희연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지 않는 성격이었다.“수아야, 방금 삼촌한테 물어봤어.”그녀가 말하는 삼촌은 진유겸이었다.나는 초조하게 물었다.“지훈 씨와 관련 있는 일이야?”최희연은 한숨을 쉬었다. “어. 지훈 씨와 관련된 일이야.”나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지훈 씨에게 무슨 일 생겼어?”어젯밤에 떠났는데 설마 벌써...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 최희연은 한참 망설이다 말했다.“지훈 씨의 상황은 많이 위험하대. 예전에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잖아. 그동안은 지훈 씨가 강해서 감히 건드리지 못했지만 이젠 기회가 생긴 거지. 유겸 씨말로는 앞으로 반년 동안 지훈 씨는 도망자 신세가 될 거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고...”석지훈이 나를 떠난 것도 이 때문일까?자신도 위험한 상황이라서...나는 최희연에게 물었다.“유겸 씨가 또 뭐라고 했어?”“이렇게 몰린 지훈 씨는 처음 봤다고 하더라. 하지만 영웅은 결국 영웅이라고 언젠가 다시 일어설 거라고 했어. 그리고 유겸 씨가 너한테 전해주라고 하더라. 지훈 씨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오해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때가 되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진유겸이 최희연에게 그런 말을 전해 달라고 하다니.나는 씁쓸하게 말했다.“그건 유겸 씨 생각일 뿐이잖아. 어젯밤에... 내가 8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지훈 씨는 아무 말도 안 했어.”내 말에 최희연도 침묵했다.“내가 지훈 씨에게 잘못했어.”최희연은 나와 석지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말했다.“남자 마음은 잘 모르겠어. 난 예전에 고현성이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는... 너무 자기중심적이야. 그런데 지훈 씨는... 유겸 씨
고현성은 나의 가장 큰 약점을 쥐고 있으니 당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한 달 후, 석만호가 석씨 가문의 전 세계 권력 분포도를 가지고 찾아왔다. 석씨 가문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나는 거절했다.“전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그것은 석지훈의 석씨 가문이었다.내 생각을 읽은 듯 석만호는 말했다.“가주님, 지금의 석씨 가문은 당신께 충성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받아들이시든 아니든 석씨 가문은 가주님의 것입니다! 게다가 석지훈 씨도 자신이 명백히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주님께 반지를 넘겨준 것입니다. 설령 나중에 가주님께서 석씨 가문을 그에게 주고 싶다 하더라도 그분의 자존심과 기개를 생각하면 절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가주님께서 지금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석씨 가문을 물려받고 관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장차 아이에게 든든한 버팀목을 마련해주셔야죠.”그의 말은 모두 옳아 반박할 수 없었다.맞는 말이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석씨 가문은 내 것이었다.석씨 가문은 더 이상 석지훈의 것이 될 수 없었다.석지훈은 절대로 석씨 가문을 다시 원하지 않을 테니까.석만호는 이 나이까지 살면서 정말 노련하고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몇 마디로 나를 할 말 없게 만들었다.내가 눈을 감자 그는 말을 이었다.“석 씨 저택의 첩들은 모두 내보냈고 일부 가정부들만 남겨 저택을 관리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씨 가문의 안주인은... 옛 가주의 유언에 따라 석씨 가문에 계속 거주할지 선택할 수 있었지만 옛 가주를 원망하고 있어서 얼마 전 운성으로 이사했습니다.”그럼 석나은도 석씨 가문을 떠난 건가?나는 병원 앞에서 그녀와 만났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석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이 될 거라고 장담했었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그녀는 연적이었지만 호의적인 연적이었다.온화하고 우아한 그녀는 석지훈에게 잘 어울렸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석나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오히려 눈앞의 석만호가 대단해 보였
석만호가 갑자기 친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 유산 공증 사무소에서 나온 이후로 나는 그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누가 나를 연 씨 가문에 보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아빠가 준 전화번호는 석지훈 어머니의 연락처였다. 아빠는 그녀가 내 친어머니라고 했다.하지만 그녀는 내 친어머니가 아니었다.친어머니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리고 그녀 스스로도 내 어머니라는 사실을 부정했다.하지만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석만호는 알고 있을 것 같았다.나는 그가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가주님, 가주님의 친어머니는 24년 전 가주님을 석씨 가문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안주인을 믿었기에 그녀에게 가주님을 맡긴 것입니다.”확실히 24년 전이었다. 며칠만 지나면 설날이고 내 24번째 생일이었으니까.시간은 정말 소리 없이 흘러갔다.어느새 또 한 해가 지나갔고 그 일 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나는 좀처럼 평온을 찾지 못했다.나는 감히 추측하며 물었다.“그 당시 안주인은 당신의 주인 몰래 나를 연 씨 가문에 보냈겠죠? 그래서 그분은 내 존재 자체를 몰랐고 그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도 몰랐던 거고요.”여전히 긴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쓴 석만호는 옛날 사람처럼 대답했다.“맞습니다. 저희가 안주인의 수상한 행동을 눈치채고 뒤쫓지 않았다면 옛 가주님께서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진실을 알지 못하셨을 겁니다.”석만호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눈물이 맺혔다. 그는 슬픔과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석씨 가문은 혈통을 가장 중시하는데 안주인의 행동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죠. 옛 가주님께서 그녀에게 편안한 최후를 허락하신 것만으로도 자비를 베푸신 겁니다.”나는 그의 모습에 놀라 멍하니 있었다. 석만호는 자신의 감정이 격해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옛 가주님께서는 석지훈 씨처럼 어린 시절 추방당하셨다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석씨 가문으로 돌아오셨고 형제
눈앞의 노인은 노련하고 충성심 깊으며 일 처리 또한 빈틈이 없었다. 그는 석씨 가문에는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나에겐 가장 골치 아픈 존재였다.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잘 가요.”석만호가 떠나고 나는 석씨 가문의 권력 분포도를 들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나는 분포도를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주방으로 갔다.점심을 만들어 먹은 뒤에야 나는 침실로 돌아와 권력 분포도를 집어 들었다. 분포도라고는 했지만 사실 문서에 가까웠다. 거기에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에 걸쳐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표시되어 있었다.어쩐지 모두 석씨 가문을 두려워하더라니.실제로 석씨 가문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나는 일어나 권력 분포도를 금고에 넣고 잠갔다. 금고 안에는 고풍스러운 반지 두 개도 함께 있었다.나는 반지를 꺼내 두 개를 겹쳐 안쪽을 보니 일련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모스 부호인가?잘 알지는 못했지만 관심도 없었다.반지를 다시 금고에 넣고 권력 분포도를 보니 ‘최고의 석씨 가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최고의 석씨 가문이라…석씨 가문의 뿌리는 석씨 가문 저택에 있었다.문득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금이 석씨 가문 저택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그렇다면 방금 본 숫자는 비밀번호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나는 더 생각하지 않고 금고를 잠갔다. 오후에는 태아 보호 주사를 맞으러 가야 했다.요즘에는 주사를 맞으러 갈 때마다 나는 반경우에게 전화를 했다. 고현성이 갑자기 나타나 괴롭힐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었다.경호원 몇 명으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동성에서 그럴 힘이 있는 사람은 반경우뿐이었다.요즘은 반경우 덕분인지 고현성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아니면 그가 약속을 지킨 것일지도 모른다.그는 내가 석지훈을 떠나면 가만히 놔두겠다고 했었으니까.반경우는 꽤 늦게 도착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태아 보호 주사를 맞고는 무슨 급한 일이 있는 듯 서둘러 떠났다.나는 아
강해온은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석씨 가문의 비서가 돼주기로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석지훈이 7년 동안 운영해왔던 그 회사로 향했다.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회사는 웅장하고 거대했는데 광활한 비즈니스 단지 전체가 석씨 가문의 소유였다.회사 책임자는 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마중 나왔다.나는 회사 문 앞에서 용기가 없어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발을 내디뎌야 했다.나는 강해온의 팔을 잡고 석지훈의 옛 사무실로 향했다. 차갑고 절제된 색조의 인테리어는 영락없이 그의 스타일이었다.나는 사무실에 들어간 뒤, 모든 직원을 내보냈다.석지훈이 7년을 보낸 이곳에서 나는 마침내 견고한 껍질을 벗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속에 슬픔이 밀려왔다.이제 내 곁에는 배 속의 아이밖에 없었다. 만약 아이가 무사히 세상에 나온다면...그건 이 아이의 아빠를 만난 것 다음으로 큰 행복일 것이다.소파에 한참 앉아 있다가 안쪽 방으로 갔다. 침대, 옷장, 바가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옷장을 열어보니 석지훈의 옷이 가득했는데 검은 정장과 흰 셔츠뿐이었다.나는 옷장 문을 닫지 않고 침대에 누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두 시간 정도 짧게 잤지만 무척이나 편안했다.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문 앞에서 강해온과 책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미안해요.”책임자는 바로 답했다.“아닙니다, 가주님.”나는 책임자에게 강해온을 소개했다.“이분은 나의 전 비서입니다. 앞으로 회사의 모든 업무를 이 사람에게 알려주세요.”“알겠습니다, 가주님. 다른 지시사항은 없으십니까?”책임자가 물었다.“없어요.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회사에 자주 오지 못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세요.”“알겠습니다. 가주님의 안전을 위해 석씨 가문 사람들을 배치해 항상 가주님 곁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고현성을 경계해야 했기에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그리고 다른 위험 요소도 배제할 수 없었다.“몇 명이나요?”“스무 명입니다. 모두 최고의 경호원들입니다.”“
[수아 언니, 오빠는 아직 몰라요.][언제 말할 거예요?]윤다은은 답했다.[설날에 말하려고요.]설날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나는 석지훈의 곁에 있고 싶었다.정말 보고 싶었다.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휴대폰을 내려놓고 소파에 멍하니 앉았다. 산후 도우미는 내가 우울해 보이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가씨, 무슨 일 있나요?”“아줌마, 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산후 도우미는 아이 아빠냐고 묻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보고 싶으면 만나러 가야죠.”“말씀처럼 그렇게 쉽나요.”나는 씁쓸하게 답했다.산후 도우미는 조용히 말했다.“요즘은 교통이 발달해서 아무리 멀어도 하루면 갈 수 있잖아요. 우리 때는 달랐어요. 남편이 일찍 죽었는데,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요.”산후 도우미의 말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설날에 비아드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석씨 가문의 전용기를 타고 갔다.동성에서 비아드까지는 네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비아드 거리에 도착했지만 에르크에 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솔직히 석지훈이 에르크에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를 찾기 위해 따로 알아보지도 않았으니까.나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나는 주스 가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자 백화점에 가서 새해 선물을 샀다.값비싼 롤렉스 시계였다.시계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나는 경호원들과 함께 에르크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나는 경호원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혼자 내렸다.커다란 저택은 불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누군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석지훈이 집에 있는 걸까?아마 집에 있을 것이다.나는 대문 앞에 서 있었지만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망설이며 나는 문 앞에 십여 분이나 서 있었다.마음속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가 차갑게 대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혹시나 그가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면...심호흡을 하고 나는 마당으로 들어가 초인종
저택 안의 불빛은 여전히 환했으니 분명 누군가 있었다. 나는 다시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빠, 이제 두 시간 후면 새해에요.]그가 아직 이 번호를 쓰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석지훈은 답장이 없었다.손이 얼어 시뻘겋게 되자 나는 입김을 불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발밑의 쌓인 눈은 어느새 신발과 양말을 적시고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임신 중인 내 몸은 더 이상 이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더는 버틸 수 없어서 잠시 생각하다 다시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은 내 스물네 번째 생일이에요.]작년의 오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경험했다.그런데 올해도 마찬가지였다.나는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 그것도 내 손으로 그를 떠나보냈다.보낸 문자는 답장 없이 텅 빈 메아리만 남겼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이제 석지훈과 나는 완전히 남남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더 이상 그 사람 곁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따뜻한 눈길도 다정한 손길도 이젠 내 것이 아니었다.이런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 숨쉬기조차 힘들었다.손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애써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슬픔은 더욱 깊어만 갔다.그때, 이층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렘과 불안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올려다보니 냉랭한 표정의 원태웅이었다.그는 내 오빠이기 전에 석지훈의 동생이었다.그러니 그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석지훈의 행방을 묻고 싶었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창문에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한씨 가문의 혼외자 한민수였다.그와 나는 나쁘지 않은 사이였는데 그 역시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긴 왜 왔어요?”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그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원태웅이 말을 받았다.“그 사람?”그는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굴?”석지훈을 찾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곤란하게 만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탐스러운 눈송이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내려앉고 있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고요하고 순수한 그 남자를 닮아 너무나 아름다웠다.운성은 비와 눈이 잦은 곳이라 예전에 나는 습하고 차가운 눈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런데 이제는 이런 날씨가 좋았고 비아드의 눈 특히는 에르크의 눈이 좋았다.한 사람 때문에 한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이것은 돌아가신 석씨 가문의 옛 가주가 남긴 말이었다.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2층 창가에 서 있는 남자의 곧고 강인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여전히 잘생겼지만 표정은 차갑고 냉정했다.그는 정말 별장 안에 있었던 거였다.눈을 깜빡일 수도,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 찰나의 환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그러나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고 몇 초도 되지 않아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창가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내가 본 건 환각이었을까?나는 손으로 배를 감싸 안고 눈을 감았다.동성에 도착하니 새벽 5시였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 잠들었고 눈을 뜬 건 다음 날 정오였다.새해라 산후 도우미도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우유를 한 잔 따라 소파에 앉아 카톡을 확인했다. 새해 인사 메시지가 많이 와 있었다.담현아의 문자가 눈에 띄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일 언니 집에 놀러 갈게요! 그리고 있잖아요. 민수 씨가 어제 나한테 자기 여자 하라고 했어요.]나는 웃는 얼굴 이모티콘과 함께 답장을 보냈다.[뭐라고 답했는데?]문자를 보내자마자 담현아의 답장이 왔다.[내가 뭐라고 답하겠어요. 난 내년 8, 9월이나 돼야 성인인데 민수 씨는 나보다 무려 열세 살이나 많잖아요. 엄마가 내 나이에 그런 사람 만난다는 거 알면 내 다리 분질러놓을걸요!]담현아의 문자를 보며 모처럼 웃음이 나왔다. 답장을 쓰려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세
최욱현은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현정우가 입고 있는 검은색 군복에도 관심을 보였다.“우리 옷이랑 다르네. 여기 허리띠가 있네.”나: “...”나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현정우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지만 현정우는 그를 무시했다.최욱현은 재미없다는 듯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대신 나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가주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무기력해? 아까 왜 그 이씨 가문 사람들을 그냥 뒀어?”나는 설명했다.“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니 권세로 억누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다은이 시댁 될 사람들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정재 씨도 의사 선생님 체면을 생각해서 고급 차로 데려오지 않고 검소하게 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다 망쳐놨잖아! 이제 이씨 가문 사람들과 의사 선생님 동료, 친구들이 다 다은이가 돈이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앞으로 그녀를 귀찮게 할 일도 많아지겠지. 그 사람들 눈에 다은이는 졸부로 보일 거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돈은 다은이에게는 껌값일 테니 한 번 도와주고 두 번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뒷말이 나올게 뻔해.”최욱현은 내 옆에 앉아 말했다.“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나. 네 말이 맞아. 앞으로 돈이 필요하면 신부를 찾을 거야. 신부는 시댁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니 분명 도와 줄것이고 그 사람들은 신부가 만만하니까 돈 뜯어낼 궁리만 하겠지.갈수록 더 심하게 말이야! 하지만 너는 한 사람을 간과했어. 바로 신랑이야. 신랑이 자기 쪽 사람들이 신부를 괴롭히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까? 게다가 오늘 일을 크게 벌인 건 앞으로의 많은 문제를 예방하는 거야. 아무도 신부를 얕보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아무도 신부를 괴롭히지 않겠지.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의 동료 중에 신부를 괴롭혔던 사람도 있었어.”“나는 그런 일은 잘 몰라.”내가 말했다.나는 윤다은의 성격상 스스로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여러 사람들 속에서 혼자 나를 구해준 적도 있었으니까.“됐다, 그 얘긴 그만하자.”
최욱현이 F국을 언급하자 F국에 정착한 나의 친어머니 안혜인이 떠올랐다. 고귀한 공작부인 말이다.나는 패딩을 여미며 거절했다.“시간 없어.”최욱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가 너 보자고 하셔. 지금 F국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우리 엄마 알아?”최욱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내가 눈을 부릅뜨자 자기 머리 쓱 만지면서 말했다.“알지. 옛날부터 알았어. 너 지난번에 입은 드레스도 네 엄마가 보내준 거야.”“엄마가 그런 식으로 보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지난번 일 때문에 솔직히 너 못 믿겠어.”최욱현이 되물었다.“내가 네 엄마 아는 거 못 믿는 거야?”나는 아무 말 없이 헬리콥터 쪽으로 걸어갔다. 최욱현은 내 뒤를 따라오며 설명했다.“진짜야. 나 네 엄마 알아. 우리 삼촌 와이프거든. 어릴 때 네 엄마랑 몇 년 같이 살았어. 비록 숙모지만 난 어머니라고 불렀지.”나는 걸음을 멈췄다. 최욱현도 예전에 자기 엄마가 도라지 꽃을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도라지꽃을 좋아하셨는데.그렇지 않고서야 석 씨 저택 아래의 운산 기슭에 그렇게 많은 도라지꽃을 심어 놓았을 리가 없었다. 최욱현의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내가 동요하는 것을 보고 그는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번호를 누르고 내게 건넸다.“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나: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최욱현은 대답 안 하고 씩 웃으면서 나를 봤다.나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 유난히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나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누구...”묻자마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최욱현이 그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수아야, 나 안혜인이야.”그녀는 감히 자신을 나의 엄마라고 칭하지 못했다.“네. 욱현 씨가 건 거예요.”나의 어조는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매우 차분했다.“수아야, 널 만나고 싶구나.”비록 그녀는 나를 버렸지만 나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지금의 최욱현은 마치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 같았다.나는 다시 물었다.“금운에는 어떻게 온 거야?”“아까 말했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그가 말했다.나는 차갑게 말했다.“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나는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잖아? 눈보라 속에서 너를 업고 몇 시간이나 걸었고.”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지훈 씨가 네가 꾸민 일이라고 했어.”“진실을 알고 있었네.”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는 친구 아니야. 얼른 가.”최욱현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흠칫 놀라 그의 손을 쳐냈다.“만지지 마.”“그냥 쓰다듬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그는 어린아이처럼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차마 미워할 수 없었다.석지훈이 그에게 백혈병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병으로 나와 너무나도 닮았다.우리 둘은 다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허락 없이 만지는 건 성추행이야.”내 말을 듣자 그는 순순히 말했다.“그럼 앞으로 허락을 받고 터치할게.”12월의 날씨에 들러리 드레스만 입고 있으니 너무 추웠다. 담현아가 패딩을 가져다주자 나는 패딩을 받아 들고 웃으며 말했다“나는 이따 핀란드에 갈 거야. 너는 정재 씨랑 같이 동성으로 돌아가.”그러자 담현아가 말했다.“나랑 그 사람은 사는 도시가 다르잖아요.”나는 작게 말했다.“어쩌면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수도 있잖아.”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굳이 길을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담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 망설이다가 나에게 물었다.“언니, 아저씨에 대한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많이 망설여져요...”나는 차분히 물었다.“뭐가 망설여지는데?”내 옆에는 최욱현이 서 있었지만 담현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내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잖
12월 금운의 날씨는 포근했고 부드러운 햇살이 쫙 쏟아져 짙은 색 군용 점퍼를 입은 남자에게 따스하게 내려앉았다.한 달 만에 만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그랬다. 그는 아름다웠다.최현욱, 아니지. 그의 이름은 최욱현이었다.최욱현은 사람을 홀릴만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선글라스를 손에 든 채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긴 부츠는 반짝반짝 빛났는데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요정 같았다.이씨 가문 친척들과 하객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고급 차 수십 대가 한꺼번에 있는 모습을 본 적도 거의 없었다. 모두 경악과 부러움에 휩싸였다.이주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신지?”최욱현은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다만 화려한 분홍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나는 그가 왜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최욱현은 우리 앞에 와서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신부 친구입니다. 원래 신부 데리러 오려고 했는데, 좀 늦어져서 아쉽네요. 이 고급 차 수십 대를 활용하지 못했으니 사과의 의미로 신부에게 선물할게요. 다은 씨, 어때요?”최욱현과 윤다은이 아는 사이라고?윤다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혹시 도와주러 온 건가?윤다은은 재치 있게 대답했다.“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차는 뭐 하러 줘요? 나도 살 수 있는데.”신부의 당당한 말에 이씨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최욱현은 웃으며 물었다.“다들 왜 입구에 서 계시는 거죠?”윤다은은 시무룩하게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했다고 내 들러리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그러자 최욱현은 나를 보며 물었다.“수아 씨는 어떻게 생각해?”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어?”최욱현은 다시 이씨 가문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이씨 가문 사람들도 멍해졌다.“네?”최욱현은 허리에 손을 얹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비꼬는 척하며 말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고향에서 부랴부랴 달려오신 윤다은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수아야.”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아주머니.”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맙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윤다은도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인터넷에서 화제였던 그 연수아 맞죠? 이혼한 사람이 어떻게 다은이의 들러리를 설 수 있죠?”맞다. 이혼한 내가 어떻게 들러리를 설 수 있겠는가?사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윤다은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지적하다니.윤다은의 결혼식이었기에 나는 그 사람과 논쟁하기 싫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윤다은은 내가 억울한 거 같았는지 립스틱 내려놓고 정색하면서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한 건 맞지만, 지금은 미혼이에요. 왜 들러리를 설 수 없다는 거죠?”그 여자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불길해요.”하지만 윤다은은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길하다고 하면 길한 거예요.”“집안이 좋다고 우리 이씨 가문을 무시하지 마세요. 작은어머니께 말씀드릴 테니, 그때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요!”알고 보니 그녀는 이주원 쪽 친척이었다.그녀가 방을 나가자 나는 윤다은을 달래며 말했다.“저 사람 말이 맞아. 나는 이혼했으니 네 들러리로는 적합하지 않아.”나는 혹시라도 이씨 가문 사람들이 윤다은을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윤다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나는 언니가 꼭 내 들러리를 서 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나: “...”점심때쯤 이주원이 신부를 데리러 왔다. 이주원의 들러리들은 모두 같은 과 의사들이나 오랜 친구들이었는데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주원에게 들러리 중 한 명을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이주원은 나와 최희연에게 이미 남
담현아와 나는 호텔에서 근처 야시장까지 걸어갔고 배가 고파진 그녀는 꼬치구이를 먹자고 했다. 그녀가 이것저것 엄청 많이 시키는 걸 보자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둘이서 다 먹을 수 있겠어?”그녀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희연 언니에게 전화해서 같이 먹자고 해요. 희연 언니는 술도 잘 마시니까 오늘 취할 때까지 마셔보자고요.”나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누군가는 술 한 잔에 취했던 것 같은데?”담현아는 투덜거렸다.“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웃음을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최희연에게 카톡을 보냈다. 곧 그녀의 답장이 왔다.[미안. 유겸 씨가 왔어.]나: ...진유겸은 꽤 집착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최희연이 금운에 오자마자 바로 따라온 걸 보면 말이다.문득 나도 석지훈이 보고 싶어 졌다.그는 떠난 지 한참이 되었고 그동안 나는 그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나는 휴대폰을 들고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잘 자요.]하지만 그는 답장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오빠, 자요?]잠시 후, 그의 답장이 왔다.[어?]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듯했다.그는 최소한의 안부 인사조차 없었다.나는 더 이상 그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담현아가 메뉴를 고르고 내 옆에 앉자 나는 그녀가 주문한 맥주를 보며 물었다.“취하지 마. 난 너 호텔까지 못 업고 가니까. 그럼 정재 씨를 불러야 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담현아는 겁도 없이 대답했다.“아저씨는 완전 신사예요.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진작 일어났겠죠! 그 사람은 보수적이라 그의 신혼 아내 외에는 누구에게도 선을 넘지 않을걸요. 그런 사람한테 뭘 하기를 바라겠어요?”나는 숨은 뜻을 알아채고 물었다.“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얘기 같은데?”담현아는 나를 흘겨보았다.“내가 언제요?”나는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한 거잖아.”“수아 언니, 나이 들면 다 이렇게 생각이 구려지는 거예요?”나: “...”내가 늙었나?갑자기 좀 서운했다.
그는 두 사람의 표정 차이가 워낙 커서 분간할 수 있었다. 고정재는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고현성은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윤다은과 고정재는 강가를 따라 그의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윤다은은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었다.뭔가 겁먹고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이주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윤다은의 긴장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오빠, 미안해. 이제야 결혼한다는 얘기를 해서. 난 그저... 미안해... 많이 보고 싶었어.”고정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어떤 위로를 담고 있었다.“다은아, 네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었는데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 같아.”“오빠, 난 수십 년 동안 오빠를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수아 언니를 놓치게 만들었어... 미안해. 내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알아. 사실 오래전부터 오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 오빠, 난 이제 오빠를 놓았고 내 행복을 찾았어. 그러니 오빠도 날 축복해 줬으면 좋겠어.”그 말을 듣고 이주원은 마침내 윤다은이 마음속에 숨겨온 비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 행복은 진정한 행복일까?윤다은은 한 남자를 수십 년 동안 사랑했고 그를 따라 전 세계를 누볐다.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이주원은 그녀가 안쓰러웠다.“다은아, 네 행복을 빌어.”고정재는 손을 들어 윤다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다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내가 성인이 된 후로 오빠는 더 이상 이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어. 내가 그동안 오빠에게 짐이 되고 불편하게 했지?”고정재는 그녀를 불렀다.“다은아.”“오빠...”“너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야.”윤다은은 고정재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연수아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었다.그렇다, 그는 그녀를 가족으로 여겼다.담현아는 고정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여자였다.“오빠, 지금까지 날 지켜줘서 고마워.”고정재는 웃으며 말했다.“오빠는 평생 너를 지켜줄 거야.”
“그 사람은 누구야? 너한테 뭘 요구했어?”내가 다그쳐 묻자 윤다은은 어물거리며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담현아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머리를 나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얼굴이 어두워진 윤다은을 보고 나는 그녀가 너무 난처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더는 캐묻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그러다가 갑자기 고현성이 떠올랐는데 그의 머리가 공백이 된 것을 생각하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물었다.“정재 씨는 아직 안 왔어?”담현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저야 모르죠.”1년 시간이 지났어도 고정재에 대한 태도가 여전한 담현아를 보며 나는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했다.내가 담현아의 머리를 톡톡 치자 그녀는 두 손으로 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저랑 내려가서 산책할래요?”담현아는 어리지만 눈치가 빨랐다. 나와 윤다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우리 둘을 갈라놓아 냉정함을 되찾으려는 것이다.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다.담현아와 아래층에 내려오자마자 마침 호텔 문 앞에 주차하고 있는 고정재를 만났는데 그도 나와 담현아를 보고 멍해졌다.“나를 마중하러 온 거야?”담현아가 발끈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망상이 심하네요.”이 말을 듣고 고정재는 부드럽게 웃었고 나도 웃으면서 설명했다.“우린 산책 중이에요.”“먼저 다은이 보러 갈게.”......고정재는 호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우람지고 곧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담현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고정재는 내가 어렸을 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어. 너무 눈부셔서 탐욕이 생겼지만 빛은 여전히 빛이었을 뿐 난 다가갈 수 없었어...”오늘따라 금운시의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였다. 담현아는 나의 팔을 잡고 호기심에 물었다.“왜 다가갈 수 없어요?”나는 담현아의 예쁘고 어린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빛은 너무 뜨거워서 사람은 그 빛에 다칠 수 있거든. 내가 그
하물며 그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모두 평범했다... 내가 이렇게 경호원을 데리고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다.현정우는 기타 경호원은 대기시키고 그만 나를 따라다녔다.마침 내려와 보니 문준혁이 지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어 우리는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그는 내 곁으로 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다은 씨는 안전감이 부족하지만 또 독립적인 여자예요. 저는 왠지 다은 씨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나는 대뜸 그 말을 알아들었다.“다은이의 속마음을 물어보는 거죠?”“아마 연수아 씨는 알 것 같아서요.”문준혁이 말했다.문준혁은 잘 생겼고 외모로 보면 윤다은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윤다은을 배려했으며 태도도 비굴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괜찮아 보였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임신으로 인한 우울증이 아닐까요? 임산부라면 다 그럴 겁니다.”윤다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사람은 고정재였다. 물론 이건 이전의 상태였고 지금은 잘 모른다.의사는 멍해졌다.“임신이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몰랐어요?”“죄송해요. 저도 방금 들었어요.”“아니. 남편과 아빠가 될 분이 어떻게...”“연수아 씨, 전 다은 씨를 만지지 않았어요.”나는 거의 도망하다시피 떠났고 방에 돌아와 윤다은에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도 몰랐다. 윤다은의 어른으로서, 또 그녀를 관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일은 꼭 물어봐야 했다.나는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있는 윤다은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아이의 아빠가 누구야? 닥터 문을 아빠로 만들어줄 생각이었어?”윤다은은 나에게 진심을 알려주기 싫어 건성으로 대답했다.“수아 언니, 묻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에게 설명할게요.”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닥터 문은 호텔을 떠났어.”윤다은은 말이 없었다....오후 3시쯤, 최희연과 담현아가 도착했고 기타 세 들러리도 도착했는데 보아하니 문준혁은 결혼식을 계속할 계획인 것 같다.내가 윤다은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