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하는 고현성의 표정이 너무 차가워서 나는 둘 사이에 필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물었다.“무슨 일인데요?”그는 내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내 볼을 쓰다듬으려 손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나 때문에 고현성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붕 뜨게 되었다.웬일인지 그는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네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 네가 이렇게 제멋대로이면 그분들이 힘들어지실 거야.”“우리 부모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무슨 짓이라니? 두 분은 그냥 우리 집에 손님으로 계시는 거야.”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건 또 어떻게 안 건지 이번에도 기가 막히게 내 약점을 찾아내 나를 쥐고 흔드는 고현성이었다.“당신은 진짜 비겁한 인간이에요.”밀려오는 분노에 내가 몸을 떨며 말하자 눈을 감았다 뜬 고현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네가 석지훈이라 계속 같이 있는 다면 가장 먼저 다치는 건 네 부모님이 될 거야, 네가 아무리 석씨 집안 가주라 해도... 그러고 보니 석지훈도 대단하다 참, 집안을 너한테 다 넘겨주다니.”내가 석씨 집안 핏줄인 건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굳이 해명하지는 않았다.이내 고현성은 하던 말을 마무리 지었다.“네가 석씨 집안을 무기 삼아 나한테 덤빈다 해도 난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야, 내 목숨을 걸고 널 괴롭힐 거야.”눈에 보이는 게 없는 고현성은 그야말로 미친놈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고 보는 또라이가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였다.“연수아, 아이를 무사히 낳고 싶다면 석지훈한테서 멀어지는 방법 밖에 없어. 아, 그리고 네가 한 가지 더 협조해야 할 일이 있어.”“뭔데요.”“나랑 사진 좀 찍자.”나는 당연히 거절하려 했지만 역시나 고현성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 강제로 사진을 찍게 되었다.그는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며 나를 협박했다.“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난 이걸 석지훈한테 보내줄 거야. 아무리 너그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잠은 자는 둥 마는 둥해서 그냥 눈 뜬 채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때 고현성이 나와 찍었던 다정해 보이는 사진을 보내왔다.그에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유산 방지약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석만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내 친아버지라는 석씨 집안 옛 가주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면서 내가 아무리 빌어도 눈 깜짝하지 않고 석지훈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집중하던 사람의 연락이라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그러자 그는 바로 문자를 보내왔다.[가주님,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전 가주님께 반지를 하나 드렸을 겁니다, 다른 하는 석지훈 손에 있었는데 그것도 아마 이미 받으셨을 거고요. 두 반지를 합치면 주소가 하나 나올 텐데 그곳에 석씨 집안이 몇백 년 동안 모아온 금이 있어요. 그 정도면 한 나라의 재산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물론 그 금을 쓸지 말지는 가주님의 결정에 달렸지만 가주님이 이제 석씨 집안의 주인이시니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석만호의 말대로 석지훈의 반지는 나한테 있었다.“이 반지만 있으면 석씨 집안의 모든 세력을 움직일 수 있어.”나는 그가 이 반지를 건네며 했던 말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그때는 그가 나를 이 집안의 안주인으로 인정해서 주는 선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석지훈은 내가 석씨 집안의 핏줄인 걸 알고 그저 내 것이었던 것을 돌려주려 한 것 같았다.석지훈은 조금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걸 진작 내려 놓은 것이다.구청에 서류를 접수하러 간 날도 치마를 입고 있은 탓에 목에 건 이 반지가 훤히 보였을 텐데, 그렇다면 석지훈이 이미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한다는 것도 알았을 텐데, 석만호는 그에게 그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나의 친아버지라는 사람은 참 이기적이면서도 헌신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그는 나에게 모든 걸 내어주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놔주지 않았다.그날 밤, 친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받은 서류를 나는 석지훈한테 제일 먼저 보여주면서도 그는 한사코
의사는 불안해하는 나를 진정시키며 서둘러 검사를 진행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결론을 내렸다.“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생긴 출혈입니다. 유산 징조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리 위험한 건 아니에요.”유산 징조라는 말에 내가 다급히 의사의 팔을 부여잡으며 아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 하자 의사는 나는 다독이며 말했다.“아이는 무사해요, 병원에서 일러준 시간에 검사받고 약도 잘 먹으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흥분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해요, 기쁘거나 슬프거나 너무 지나친 흥분은 산모한테도 아이한테도 안 좋아요. 많은 산모분들이 감정통제를 어려워하셔서 유산을 하곤 하세요.”“척추가 안 좋으시네요.”“네?”“병원 이력에는 척추가 다치셔서 검사받은 적이 있다고 뜨네요. 중추신경이 지금 회복 중이라서 지금 임신하면... 본인 몸이니까 잘 아실 거예요, 지금은 임신이 적합한 시기가 아니에요. 저는 아이 지우는 걸 추천 드립니다, 잘 쉬시고 건강 회복한 다음에...”계속해서 내 병원 이력을 찾아보던 의사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나를 보며 물었다.“자궁암 걸린 적 있으세요?”“네.”“자궁을 잘라낸 건 아니지만 암으로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어요, 게다가 척추도 그렇고... 지금 임신을 유지하면 산모님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아이를 지우시는 게...”나는 의사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제 몸 상태는 보셨으니 아실 거예요, 이런저런 병도 많고 신장 이식도 받은 몸이죠. 그래서 이번 기회 아니면 다시는 임신 못 할 거예요. 엄마가 될 수 있다면 목숨은 얼마든지 걸 수 있어요.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가장 좋은 약 써주시고 아이 잘 낳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가족분들은 알고 계세요?”“네, 알아요.”“남편분은요?”의사가 내 병에 대해서 물어볼 때 나는 석지훈이 나에게 아이를 지우라 한 것도 내 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게라도 착각하는
나는 서둘러 사과했다.“미안해요.”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아이는 잘 있어?”나를 보자마자 아이의 안부를 묻는 모습에 나는 그가 오늘 밤 내 배 속의 아이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나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언제 돌아왔어요?”“방금 도착했어.”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싸늘했다. 나는 약간 두려웠지만 그리운 마음에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그 앞에 서서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난 오빠의 반평생 사업을 망쳐버린 범인이에요!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파요. 오빠한테 미안하고 오빠의 호의를 저버려서. 나도 정말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난...”석지훈은 담담하게 응수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동자엔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런 눈빛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몹시 괴로웠다.“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석지훈이 갑자기 던진 질문에 나는 멍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그는 내 작은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담담하게 물었다.“내가 떠날까 봐 겁나?”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지훈은 돌연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남자의 뛰는 심장 박동을 선명하게 느끼며 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오빠는 나를 원망하지 않아요?”내가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자 그는 갈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야, 내가 전에 했던 말을 어떻게 다 잊었어?”여전히 나를 아가라고 불러주다니!나는 순간 억울한 마음이 북받쳐 물었다.“무슨 말을요?”“우리 인생은 너무 짧은데 너와 함께할 시간은 더 짧아. 적어도 내 삶의 거의 삼십 년 동안은 네가 없었으니까. 오해, 고통, 숨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만 할 뿐이야. 기쁘든 슬프든 난 너를 밀어내지 않을 거야. 네가 이 말을 평생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그가 전에도 했던 말이었지만 석지훈이 다시 이 말을 꺼내자 내 마음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동안의 답답함이 뻥
석지훈은 진유겸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내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귓불을 매만졌다.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행복에 겨워 웃음을 터뜨렸다.그가 나를 오해하지 않아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믿어줘서 정말 고마웠다.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드는 순간, 아이를 지우라는 그의 말과 고현성의 협박이 떠올랐다...“오빠, 태웅 오빠한테서 오빠 얘기 들었어요.”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렸다.“어. 알아.”그가 말했다.“우리 사이 끝났다고 했다던데.”그는 솔직하게 말했다.“난 네가 아이를 지우길 바랐어.”“하지만 이 아이는 내게 정말 소중해요.”곧 몇 번의 천둥소리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동성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우리 관계의 끝을 예고하듯이.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놓고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난 멍하니 뒤로 물러나 침대에 앉았고 더 이상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비아드에선 어떻게 나왔어요?”“진유겸도 날 계속 잡아둘 순 없다는 걸 알았겠지. 게다가 원하는 걸 이미 얻었으니 굳이 날 잡아둘 이유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호의를 베풀어 보내준 거지.”진유겸이 석씨 가문의 압박을 무릅쓰고 석지훈을 풀어주다니...나는 그들의 관계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것은 그저 단순한 사업적 경쟁 수단일 것이다.“그럼 오빠의 권력은...”그의 남은 권력이 얼마나 될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권력을 무너뜨린 건 다름 아닌 나였으니까.석지훈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인생사 새옹지마라잖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배를 응시했다.“아이는 지워.”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그의 확고한 태도에 너무나 두려워진 나는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석지훈이 내 손길을 거부한 건 처음이었다.예전
나는 아직도 그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아이를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하게 하다니. 나는 문득 석지훈이 나를 떠나려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그래서 이런 답이 뻔한 선택을 제시한 것이다.그는 내가 떠나도록, 내가 나쁜 사람이 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이런 생각에 나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물었다.“나를 떠나고 싶은 거예요?”내 말에 석지훈은 침묵했다. 그의 눈에는 창밖으로 흐르는 강물과 화려한 불빛만이 담겨 있는 듯했다.나는 그의 결심을 깨달았다.내 선택과 상관없이 그는 떠날 거라는 걸. 오늘 나를 만난 건 그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에게 오해는 우리의 이별 이유가 아니었다.확실히 그는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니까.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떠나고 싶어 했다.상처 입은 사자는 상처를 핥을 시간이 필요하니까.나는 그렇게 생각했다.이것이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그를 망가뜨린 건 나였으니까.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슬픔은 너무나 선명했다.“오빠, 나는 아이를 선택할 거예요.”나는 진심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그는 돌아서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몇 초간 응시한 후,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어.”나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고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한마디 말만 꺼냈다.“그동안 날 사랑해줘서 고마웠어요.”그 말을 들은 그는 아무 말 없이 차갑게 방을 나섰다.단 한마디도 없이 매정하게 방을 떠났다.석지훈은 생각보다 훨씬 더 냉정했다.나는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서럽게 울었다.나는 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는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나에게도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그러니 우리의 이별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이젠 때가 된 것이었고 우리는 결국
폭우가 더 거세졌다. 나와 거리가 멀었던 탓에 나는 석지훈이 내가 한 말을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목 터져라 소리쳤다.“내가 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8개월만 시간을 줘요. 그때 내가 살아있다면... 아이랑 함께 오빠 찾아갈게요. 그땐, 오빠의 아내가 되어도 될까요?”한 번도 나를 상처 입히지 않고 한없는 응석을 받아주었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내준 고고한 이 남자를 나는 진심으로 사랑했다.다시는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아내가 되고 싶었다.나는 두 번 다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그는 내 인생의 유일한 남자는 아니었을지라도, 분명 마지막 남자일 것이다.석지훈은 대답이 없었다. 그의 성격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가 야속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오빠, 나도 너무 두려워요. 오빠가 떠나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워요. 하지만 이 아이를 잃는 건 더욱 두려워요. 난 생각만큼 강하지 않아요. 오히려 나약하기 그지없죠. 하지만 이 아이는 내 유일한 용기예요. 내 말, 이해하겠어요?”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온몸이 흠뻑 젖은 그의 모습에 나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감옥에서 다친 걸까?“다쳤어요?”나는 걱정스레 물었지만 그는 차갑게 침묵했다.더 이상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맥이 탁 풀리는 순간, 석지훈은 돌아서서 밤 속으로 사라졌다.그때,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반지였다.얼마 전, 나는 선물을 들고 비아드에 갔었다. 그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 선물로 결혼반지를 주려고 준비한 것이다.하지만 그날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진유겸이 안에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지만 마음이 아팠다.물론 그에게도 나를 만나지 않을 이유는 있었다.결국, 그에게 심한 타격을 입힌 건 나였으니까.그를 실망시킨 것도 나였다.사실 석지훈은 최선을 다했다. 오해하지 않았다고 말하러 온 건
진유겸은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며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동성에 있는 그 여자는 괜찮겠어?”“괜찮지 않아도 별수 있나.”석지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평소답지 않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내 곁에 있으면 위험해질 거야. 게다가 다음 달이면 석씨 가문을 물려받는데 혼자서 성장할 시간이 필요해. 대가족을 이끄는 법도 배우고, 아이를 낳을 준비도 해야지...”석지훈은 그녀에게 임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억지로 막지 않았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결국, 그는 그녀에게 약해지고 만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하지만 지금은 그녀 곁에 있어 줄 수 없었고 기다려 달라는 이기적인 말은 할 수 없었다.살아서 동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희망을 주지 않는 게 나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을 십수 년간 알고 지냈다. 곁의 이 남자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밑바닥에서부터 한 계단씩 올라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 고통을 누구보다 공감했기에 그들은 적이면서도 친구였다.“그 여자가 그렇게 잘났어? 이혼에 낙태까지 한 여자가 너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진유겸은 일부러 석지훈의 심기를 건드렸다.지난번 자기 여자 나이를 두고 비꼬았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하지만 진유겸은 석지훈을 오해하고 있었다.그때 비아드 감옥에서 연수아의 나이를 묻자 석지훈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었다.“네 여자보단 몇 살 어리지.”그런데 진유겸은 그것을 자신의 여자를 조롱하는 말로 받아들였다.이 말에 석지훈은 그를 흘끗 보며 되물었다.“그럼 넌?”“적어도 내 여자는 결혼한 적 없어.”그런 걸로 우월감을 느끼는 진유겸이었다.세상 풍파 다 겪은 두 남자는 마치 공통된 화제를 찾은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었다.석지훈은 진지하게 말했다.“내겐 오직 그녀뿐이야. 그녀라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진유겸도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최욱현은 아이처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현정우가 입고 있는 검은색 군복에도 관심을 보였다.“우리 옷이랑 다르네. 여기 허리띠가 있네.”나: “...”나는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현정우의 허리띠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지만 현정우는 그를 무시했다.최욱현은 재미없다는 듯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고 대신 나에게 물었다.“석씨 가문 가주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 무기력해? 아까 왜 그 이씨 가문 사람들을 그냥 뒀어?”나는 설명했다.“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니 권세로 억누르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다은이 시댁 될 사람들인데 예의는 지켜야지. 정재 씨도 의사 선생님 체면을 생각해서 고급 차로 데려오지 않고 검소하게 했는데 네가 나타나서 다 망쳐놨잖아! 이제 이씨 가문 사람들과 의사 선생님 동료, 친구들이 다 다은이가 돈이 많다는 걸 알게 됐으니 앞으로 그녀를 귀찮게 할 일도 많아지겠지. 그 사람들 눈에 다은이는 졸부로 보일 거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돈은 다은이에게는 껌값일 테니 한 번 도와주고 두 번 도와주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뒷말이 나올게 뻔해.”최욱현은 내 옆에 앉아 말했다.“사람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나. 네 말이 맞아. 앞으로 돈이 필요하면 신부를 찾을 거야. 신부는 시댁 식구들이나 친구들이니 분명 도와 줄것이고 그 사람들은 신부가 만만하니까 돈 뜯어낼 궁리만 하겠지.갈수록 더 심하게 말이야! 하지만 너는 한 사람을 간과했어. 바로 신랑이야. 신랑이 자기 쪽 사람들이 신부를 괴롭히는 걸 그냥 두고 보고만 있을까? 게다가 오늘 일을 크게 벌인 건 앞으로의 많은 문제를 예방하는 거야. 아무도 신부를 얕보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아무도 신부를 괴롭히지 않겠지.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의사의 동료 중에 신부를 괴롭혔던 사람도 있었어.”“나는 그런 일은 잘 몰라.”내가 말했다.나는 윤다은의 성격상 스스로 해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여러 사람들 속에서 혼자 나를 구해준 적도 있었으니까.“됐다, 그 얘긴 그만하자.”
최욱현이 F국을 언급하자 F국에 정착한 나의 친어머니 안혜인이 떠올랐다. 고귀한 공작부인 말이다.나는 패딩을 여미며 거절했다.“시간 없어.”최욱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가 너 보자고 하셔. 지금 F국 성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우리 엄마 알아?”최욱현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다가 내가 눈을 부릅뜨자 자기 머리 쓱 만지면서 말했다.“알지. 옛날부터 알았어. 너 지난번에 입은 드레스도 네 엄마가 보내준 거야.”“엄마가 그런 식으로 보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지난번 일 때문에 솔직히 너 못 믿겠어.”최욱현이 되물었다.“내가 네 엄마 아는 거 못 믿는 거야?”나는 아무 말 없이 헬리콥터 쪽으로 걸어갔다. 최욱현은 내 뒤를 따라오며 설명했다.“진짜야. 나 네 엄마 알아. 우리 삼촌 와이프거든. 어릴 때 네 엄마랑 몇 년 같이 살았어. 비록 숙모지만 난 어머니라고 불렀지.”나는 걸음을 멈췄다. 최욱현도 예전에 자기 엄마가 도라지 꽃을 좋아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우리 엄마도 도라지꽃을 좋아하셨는데.그렇지 않고서야 석 씨 저택 아래의 운산 기슭에 그렇게 많은 도라지꽃을 심어 놓았을 리가 없었다. 최욱현의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내가 동요하는 것을 보고 그는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번호를 누르고 내게 건넸다.“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봐.”나: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야?”최욱현은 대답 안 하고 씩 웃으면서 나를 봤다.나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수화기 너머에서 유난히 부드럽고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야, 나야.”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누구...”묻자마자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최욱현이 그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수아야, 나 안혜인이야.”그녀는 감히 자신을 나의 엄마라고 칭하지 못했다.“네. 욱현 씨가 건 거예요.”나의 어조는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매우 차분했다.“수아야, 널 만나고 싶구나.”비록 그녀는 나를 버렸지만 나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었다.
지금의 최욱현은 마치 오지랖 넓은 할아버지 같았다.나는 다시 물었다.“금운에는 어떻게 온 거야?”“아까 말했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그가 말했다.나는 차갑게 말했다.“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 아니잖아.”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나는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적어도 나는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잖아? 눈보라 속에서 너를 업고 몇 시간이나 걸었고.”나는 솔직하게 말했다.“지훈 씨가 네가 꾸민 일이라고 했어.”“진실을 알고 있었네.”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화가 나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는 친구 아니야. 얼른 가.”최욱현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흠칫 놀라 그의 손을 쳐냈다.“만지지 마.”“그냥 쓰다듬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그는 어린아이처럼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차마 미워할 수 없었다.석지훈이 그에게 백혈병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병으로 나와 너무나도 닮았다.우리 둘은 다 건강한 몸이 아니었다.“허락 없이 만지는 건 성추행이야.”내 말을 듣자 그는 순순히 말했다.“그럼 앞으로 허락을 받고 터치할게.”12월의 날씨에 들러리 드레스만 입고 있으니 너무 추웠다. 담현아가 패딩을 가져다주자 나는 패딩을 받아 들고 웃으며 말했다“나는 이따 핀란드에 갈 거야. 너는 정재 씨랑 같이 동성으로 돌아가.”그러자 담현아가 말했다.“나랑 그 사람은 사는 도시가 다르잖아요.”나는 작게 말했다.“어쩌면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수도 있잖아.”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굳이 길을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담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한참 망설이다가 나에게 물었다.“언니, 아저씨에 대한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많이 망설여져요...”나는 차분히 물었다.“뭐가 망설여지는데?”내 옆에는 최욱현이 서 있었지만 담현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내 인생은 이제 막 시작했잖
12월 금운의 날씨는 포근했고 부드러운 햇살이 쫙 쏟아져 짙은 색 군용 점퍼를 입은 남자에게 따스하게 내려앉았다.한 달 만에 만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그랬다. 그는 아름다웠다.최현욱, 아니지. 그의 이름은 최욱현이었다.최욱현은 사람을 홀릴만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선글라스를 손에 든 채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그의 긴 부츠는 반짝반짝 빛났는데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요정 같았다.이씨 가문 친척들과 하객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고급 차 수십 대가 한꺼번에 있는 모습을 본 적도 거의 없었다. 모두 경악과 부러움에 휩싸였다.이주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구신지?”최욱현은 여전히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다만 화려한 분홍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나는 그가 왜 항상 이어폰을 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최욱현은 우리 앞에 와서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신부 친구입니다. 원래 신부 데리러 오려고 했는데, 좀 늦어져서 아쉽네요. 이 고급 차 수십 대를 활용하지 못했으니 사과의 의미로 신부에게 선물할게요. 다은 씨, 어때요?”최욱현과 윤다은이 아는 사이라고?윤다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혹시 도와주러 온 건가?윤다은은 재치 있게 대답했다.“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차는 뭐 하러 줘요? 나도 살 수 있는데.”신부의 당당한 말에 이씨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었다. 최욱현은 웃으며 물었다.“다들 왜 입구에 서 계시는 거죠?”윤다은은 시무룩하게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했다고 내 들러리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그러자 최욱현은 나를 보며 물었다.“수아 씨는 어떻게 생각해?”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어?”최욱현은 다시 이씨 가문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이씨 가문 사람들도 멍해졌다.“네?”최욱현은 허리에 손을 얹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비꼬는 척하며 말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고향에서 부랴부랴 달려오신 윤다은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수아야.”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아주머니.”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맙다.”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윤다은도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방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인터넷에서 화제였던 그 연수아 맞죠? 이혼한 사람이 어떻게 다은이의 들러리를 설 수 있죠?”맞다. 이혼한 내가 어떻게 들러리를 설 수 있겠는가?사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윤다은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지적하다니.윤다은의 결혼식이었기에 나는 그 사람과 논쟁하기 싫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윤다은은 내가 억울한 거 같았는지 립스틱 내려놓고 정색하면서 말했다.“수아 언니가 이혼한 건 맞지만, 지금은 미혼이에요. 왜 들러리를 설 수 없다는 거죠?”그 여자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불길해요.”하지만 윤다은은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길하다고 하면 길한 거예요.”“집안이 좋다고 우리 이씨 가문을 무시하지 마세요. 작은어머니께 말씀드릴 테니, 그때 어떻게 될지 두고 보자고요!”알고 보니 그녀는 이주원 쪽 친척이었다.그녀가 방을 나가자 나는 윤다은을 달래며 말했다.“저 사람 말이 맞아. 나는 이혼했으니 네 들러리로는 적합하지 않아.”나는 혹시라도 이씨 가문 사람들이 윤다은을 곤란하게 할까 봐 걱정되었다.윤다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나는 언니가 꼭 내 들러리를 서 줬으면 좋겠어요. 오늘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나: “...”점심때쯤 이주원이 신부를 데리러 왔다. 이주원의 들러리들은 모두 같은 과 의사들이나 오랜 친구들이었는데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주원에게 들러리 중 한 명을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이주원은 나와 최희연에게 이미 남
담현아와 나는 호텔에서 근처 야시장까지 걸어갔고 배가 고파진 그녀는 꼬치구이를 먹자고 했다. 그녀가 이것저것 엄청 많이 시키는 걸 보자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둘이서 다 먹을 수 있겠어?”그녀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희연 언니에게 전화해서 같이 먹자고 해요. 희연 언니는 술도 잘 마시니까 오늘 취할 때까지 마셔보자고요.”나는 못마땅한 듯 말했다.“누군가는 술 한 잔에 취했던 것 같은데?”담현아는 투덜거렸다.“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나는 웃음을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최희연에게 카톡을 보냈다. 곧 그녀의 답장이 왔다.[미안. 유겸 씨가 왔어.]나: ...진유겸은 꽤 집착하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최희연이 금운에 오자마자 바로 따라온 걸 보면 말이다.문득 나도 석지훈이 보고 싶어 졌다.그는 떠난 지 한참이 되었고 그동안 나는 그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나는 휴대폰을 들고 석지훈에게 문자를 보냈다.[잘 자요.]하지만 그는 답장이 없었다. 나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오빠, 자요?]잠시 후, 그의 답장이 왔다.[어?]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듯했다.그는 최소한의 안부 인사조차 없었다.나는 더 이상 그에게 답장하지 않았다. 담현아가 메뉴를 고르고 내 옆에 앉자 나는 그녀가 주문한 맥주를 보며 물었다.“취하지 마. 난 너 호텔까지 못 업고 가니까. 그럼 정재 씨를 불러야 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담현아는 겁도 없이 대답했다.“아저씨는 완전 신사예요.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진작 일어났겠죠! 그 사람은 보수적이라 그의 신혼 아내 외에는 누구에게도 선을 넘지 않을걸요. 그런 사람한테 뭘 하기를 바라겠어요?”나는 숨은 뜻을 알아채고 물었다.“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얘기 같은데?”담현아는 나를 흘겨보았다.“내가 언제요?”나는 진지하게 말했다.“너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한 거잖아.”“수아 언니, 나이 들면 다 이렇게 생각이 구려지는 거예요?”나: “...”내가 늙었나?갑자기 좀 서운했다.
그는 두 사람의 표정 차이가 워낙 커서 분간할 수 있었다. 고정재는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고현성은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윤다은과 고정재는 강가를 따라 그의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윤다은은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었다.뭔가 겁먹고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이주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윤다은의 긴장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왔다.“오빠, 미안해. 이제야 결혼한다는 얘기를 해서. 난 그저... 미안해... 많이 보고 싶었어.”고정재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어떤 위로를 담고 있었다.“다은아, 네가 결혼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었는데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 같아.”“오빠, 난 수십 년 동안 오빠를 따라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수아 언니를 놓치게 만들었어... 미안해. 내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내가 잘못했다는 것도 알아. 사실 오래전부터 오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 오빠, 난 이제 오빠를 놓았고 내 행복을 찾았어. 그러니 오빠도 날 축복해 줬으면 좋겠어.”그 말을 듣고 이주원은 마침내 윤다은이 마음속에 숨겨온 비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이 행복은 진정한 행복일까?윤다은은 한 남자를 수십 년 동안 사랑했고 그를 따라 전 세계를 누볐다.하지만 그 남자는 그녀에게 마음이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니 이주원은 그녀가 안쓰러웠다.“다은아, 네 행복을 빌어.”고정재는 손을 들어 윤다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윤다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말했다.“내가 성인이 된 후로 오빠는 더 이상 이렇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어. 내가 그동안 오빠에게 짐이 되고 불편하게 했지?”고정재는 그녀를 불렀다.“다은아.”“오빠...”“너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야.”윤다은은 고정재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고 연수아는 가장 소중한 가족이었다.그렇다, 그는 그녀를 가족으로 여겼다.담현아는 고정재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여자였다.“오빠, 지금까지 날 지켜줘서 고마워.”고정재는 웃으며 말했다.“오빠는 평생 너를 지켜줄 거야.”
“그 사람은 누구야? 너한테 뭘 요구했어?”내가 다그쳐 묻자 윤다은은 어물거리며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담현아는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머리를 나의 어깨에 기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얼굴이 어두워진 윤다은을 보고 나는 그녀가 너무 난처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더는 캐묻지 않았지만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감돌았다.그러다가 갑자기 고현성이 떠올랐는데 그의 머리가 공백이 된 것을 생각하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나는 화제를 바꾸려고 물었다.“정재 씨는 아직 안 왔어?”담현아는 담담하게 말했다.“저야 모르죠.”1년 시간이 지났어도 고정재에 대한 태도가 여전한 담현아를 보며 나는 그녀의 속마음이 궁금했다.내가 담현아의 머리를 톡톡 치자 그녀는 두 손으로 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저랑 내려가서 산책할래요?”담현아는 어리지만 눈치가 빨랐다. 나와 윤다은 사이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우리 둘을 갈라놓아 냉정함을 되찾으려는 것이다.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다.담현아와 아래층에 내려오자마자 마침 호텔 문 앞에 주차하고 있는 고정재를 만났는데 그도 나와 담현아를 보고 멍해졌다.“나를 마중하러 온 거야?”담현아가 발끈해서 말했다.“아저씨는 망상이 심하네요.”이 말을 듣고 고정재는 부드럽게 웃었고 나도 웃으면서 설명했다.“우린 산책 중이에요.”“먼저 다은이 보러 갈게.”......고정재는 호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우람지고 곧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담현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고정재는 내가 어렸을 때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어. 너무 눈부셔서 탐욕이 생겼지만 빛은 여전히 빛이었을 뿐 난 다가갈 수 없었어...”오늘따라 금운시의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반짝였다. 담현아는 나의 팔을 잡고 호기심에 물었다.“왜 다가갈 수 없어요?”나는 담현아의 예쁘고 어린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빛은 너무 뜨거워서 사람은 그 빛에 다칠 수 있거든. 내가 그
하물며 그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모두 평범했다... 내가 이렇게 경호원을 데리고 결혼식에 나타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웠다.현정우는 기타 경호원은 대기시키고 그만 나를 따라다녔다.마침 내려와 보니 문준혁이 지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어 우리는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잠시 후 그는 내 곁으로 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다은 씨는 안전감이 부족하지만 또 독립적인 여자예요. 저는 왠지 다은 씨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요.”나는 대뜸 그 말을 알아들었다.“다은이의 속마음을 물어보는 거죠?”“아마 연수아 씨는 알 것 같아서요.”문준혁이 말했다.문준혁은 잘 생겼고 외모로 보면 윤다은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윤다은을 배려했으며 태도도 비굴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괜찮아 보였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임신으로 인한 우울증이 아닐까요? 임산부라면 다 그럴 겁니다.”윤다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사람은 고정재였다. 물론 이건 이전의 상태였고 지금은 잘 모른다.의사는 멍해졌다.“임신이요?”나는 미간을 찌푸렸다.“몰랐어요?”“죄송해요. 저도 방금 들었어요.”“아니. 남편과 아빠가 될 분이 어떻게...”“연수아 씨, 전 다은 씨를 만지지 않았어요.”나는 거의 도망하다시피 떠났고 방에 돌아와 윤다은에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도 몰랐다. 윤다은의 어른으로서, 또 그녀를 관심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일은 꼭 물어봐야 했다.나는 립스틱을 다시 바르고 있는 윤다은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아이의 아빠가 누구야? 닥터 문을 아빠로 만들어줄 생각이었어?”윤다은은 나에게 진심을 알려주기 싫어 건성으로 대답했다.“수아 언니, 묻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에게 설명할게요.”나는 눈을 감고 말했다.“닥터 문은 호텔을 떠났어.”윤다은은 말이 없었다....오후 3시쯤, 최희연과 담현아가 도착했고 기타 세 들러리도 도착했는데 보아하니 문준혁은 결혼식을 계속할 계획인 것 같다.내가 윤다은에게 이 문제를 물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