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용재가 어떻게 내 어머니를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의문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본 석만호는 황급히 설명했다.“어르신께서는 아가씨를 도련님으로 착각하신 듯합니다.”정신이 혼미한 노인을 보며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어서려는 순간, 그가 내 팔을 꽉 붙잡고 낮고 거친 숨소리로 말했다.“네 어머니는 착하고 강인한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유일한 사랑을 줄 수 없었지. 얘야, 내가 네 어머니를 처음 만난 곳은 운성이었어. 비와 눈이 자주 내리고 항상 날씨가 음울한 도시였지. 나는 그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여자 때문에 그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단다.”예전에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사람은 죽을 때 마지막으로 좋은 기억들을 떠올린다고 하셨다. 나는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겼다.그는 노인치고는 젊은 편이었지만 병세가 너무 깊었다.나는 그의 앞에 얌전히 쪼그리고 앉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얘야, 나는 네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었어. 하지만 내 뒤에는 석씨 가문이 있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와 떠날 수 없었지... 결국, 그녀는 내 세상을 떠나갔고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어. 나는 가끔 생각해. 왜 나는 석씨 가문 남자로 태어났을까? 만약 내가 석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놈의 책임감이 없었다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면 나는 그녀와 함께 평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네가 자라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하고 사랑과 정의를 가르쳐 주면서 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모습까지 보았을 거야. 그랬다면 나는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그는 이미 자신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 눈길로 석만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수아 씨, 어르신은 이 말들을 평생 가슴에 담아두셨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해 드리십시오.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석만호는 말을 멈췄지만 우리는 모두
나는 응수하며 말했다.“그럼 일단 제가 보관하고 있을게요.”석만호는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물었다.“그 반지는요?”석용재가 돌아가시기 전에 반지를 준 건 맞지만 나는 방금 그 반지를 핸드백에 넣어 두었다.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지금 드릴까요?”석만호는 고개를 저으며 자세히 말했다.“연수아 씨, 그건 어르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건입니다. 석씨 가문의 비밀과 관련된 것이죠. 언제든 알고 싶어지면 이 반지를 가지고 저를 찾아오십시오. 제가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나는 궁금해서 되물었다.“알고 싶어 해야 할 사람은 지훈 씨가 아닌가요?”석만호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으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원을 떠났다.보슬비와 산들바람 속에서 평소 허리를 굽히고 다니던 석만호의 등은 유난히 꼿꼿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서류 안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어 열어볼 수 없었다. 게다가 유언장을 몰래 열어보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그 당시 나는 단순한 누런 서류 봉투 하나가 석지훈을 파멸시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일을 직접 저지른 사람은 바로 나였고 더 끔찍한 건 그 남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내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파멸시키는 행위조차도 그는 묵인했던 것이다.석용재가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바람에 그는 장례식 준비로 밤샘을 하다가 날이 밝아올 무렵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슬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소매를 잡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그는 내 뺨을 두드리며 말했다.“상복으로 갈아입어.”석지훈은 상복을 가져왔고 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 나를 빈소로 데려갔다.우리는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조문객들의 조의를 받았고 정오 무렵, 나는 잠시 방으로 돌아왔다.방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석지훈의 곁으로 돌아가려고 빈소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연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나를 막아섰다. 모두 석지훈 쪽의
호수 바닥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은 분명 나를 향한 계획적인 범행이었다.석씨 가문에서 누가 이렇게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걸까?석씨 가문은 방계 가족이 많으니 용의자는 수두룩했다. 다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조금 전에 이쪽으로 걸어오던 남자를 떠올리며 그가 분명 나를 구해주리라 생각했다.나는 호수 바닥으로 끌려가며 침착함과 호흡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바닥에 닿으니 산소마스크를 쓴 남자가 보였고 손에는 날카로운 작은 칼이 들려 있었다.나는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그가 갑자기 내 쪽으로 헤엄쳐 오더니 내 손목의 혈관을 그었다. 피가 물줄기를 따라 빠르게 흩어졌다.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심장에 칼을 꽂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그말고 이렇게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으니까!석지훈은 그를 발로 차버린 뒤 나를 데리고 위쪽으로 헤엄쳐 올라갔다. 내가 거의 숨 막혀 질식하려는 순간,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나는 마치 생명줄을 잡은 듯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공기를 빨아들였다. 석지훈은 내 손목의 상처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꾹 눌러 지혈했다.곧 석지훈은 나를 호수 밖으로 데리고 나왔고 나는 흠뻑 젖은 채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사방은 온통 석씨 집안 사람들이었다. 석지훈은 내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불렀다.“아가야.”하지만 나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이때 누군가 담요를 건네주자 석지훈은 담요를 받아 내 몸에 둘러주었다. 그는 여전히 내 손목의 상처를 꼭 누르고는 부드럽게 물었다.“아가야, 내 말 들려?”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그는 석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나를 아가라고 부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대답하려고 힘겹게 입을 벌려 소리쳤다.“오빠.”석지훈은 미소를
석나은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의사를 데리고 나갔다.그들이 나가자 석지훈은 내 옆에 앉아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는 늘 이런 남자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차갑고 무뚝뚝하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한없이 다정했다.석지훈은 수건을 가져다 축축한 내 머리를 계속 말려주었다. 온몸이 젖은 채로 이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그를 보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내 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야 석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슈트를 벗었다. 젖은 흰 셔츠가 그의 피부에 딱 달라붙어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그가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벗자 등에 있는 여러 개의 흉터가 드러났다.전에 그의 가슴에서도 흉터를 본 적이 있었는데 모두 그가 예전에 입은 상처였다.대체 석지훈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그는 마치 깊은 바다처럼 나에게 끊임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석지훈은 검은색 셔츠를 꺼내 입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뺨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당부했다.“잠깐 볼일 보고 저녁에 돌아올게.”나는 침대에 누워 그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물었다.“아버님 장례는 언제 치러요?”“내일 아침. 나랑 같이 가자.”그가 대답했다.석지훈이 나와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니 평소 그답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혼자 묵묵히 처리하고 나를 끌어들이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훨씬 나중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관 속에 누워 있던 그 노인은 사실...석지훈이 방을 나가고 나서 나는 침대에 누워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어젯밤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졸음이 쏟아졌다. 깜빡 잠이 들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석지훈은 문을 두드리는 법이 없었다. 나는 눈을 뜨고 호기심에 물었다.“누구세요?”문밖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다.”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목소리였다...나는 공손하게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고 석지훈의 어머니가 들어왔다.하지만 석지훈의 어느 어머니인지 알 수 없었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
나는 석용재가 그날 밤 했던 말을 모두 그녀에게 전했다. 단, 반지와 유언에 관한 이야기는 숨겼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슬픔에 잠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일한 사랑? 감히 그런 말을 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난 이제까지 뭘 위해 이렇게까지 발버둥 쳤던 거냐고?”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그녀는 섬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지훈은 내 아들이야. 넌 절대로 걔를 가질 수 없어!”나는 놀라서 물었다.“지훈 씨가 날 사랑하는 걸 아시면서 왜...”내 말에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지훈이가 널 사랑한다고?”밤하늘은 어둡고 빗소리는 거셌다. 그녀는 내 앞으로 와 쪼그리고 앉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슴에 비수를 꽂듯 말했다.“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그 말은 마치 천둥처럼 내 귓가에 울렸다.나는 당황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혼녀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었고 암까지 걸렸던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아들을 가지겠다는 거야? 연수아, 지훈은 석씨 가문의 가주야. 이 세상에 적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 애가 어떤 여자가 없어서 너를 만나야 하겠니?”많은 사람이 나에게 했던 말이었고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으며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먼저 제게 다가온 건 지훈 씨였어요. 저는 먼저 다가간 적도 없고 오히려 피하려고 했지만 지훈 씨가 계속해서 제 삶에 나타났다고요. 네. 맞아요. 전 지훈 씨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하지만 제 과거를 다 떠나서 우리는 사랑하고 있어요!”나와 석지훈은 서로 사랑했고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사랑해?”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뭔가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너희 둘, 정말 닮았구나. 그 여자는 내 남편을 빼앗아 갔으니 이번엔 절대로 내
석지훈은 마당에 핀 수선화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는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니, 저는 선량한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뭘 소중히 여기는지 어머니가 가장 잘 아시잖아요. 어머니가 저와 그녀를 적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거라면, 죄송해요. 전 못해요.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마저 잃게 하지 마세요.”또다시 석지훈은 다른 어머니를 협박하던 익숙한 수법을 쓰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정희가 도대체 누구를 그의 적으로 만들려는지 알 수 없었다...분명 석지훈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 것 같았다.설마 나인가?그렇지만 나는 아닌 것 같았다...이정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지훈아!”그때, 정원 입구에 이정희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나타났다. 석씨 가문의 안주인이었지만 대역일 뿐이었다.그들은 모두 내가 엿듣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만약 그 여자가 널 파멸시키려고 한다면?”나는 이정희가 말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석지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약 그녀라면 상관없어요. 어머니,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제 결심은 확고해요. 내일 전 석씨 가문을 떠날 것이고 중요한 일이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이정희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석씨 가문을 버리겠다는 거야?”“나는 이 고리타분하고 썩어빠진 가문을 인정한 적도 없는데 뭘 버린다는 거죠?”그 말에 귀부인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는 황급히 돌아섰다. 정원 입구에 서 있던 여자는 그녀의 팔을 잡고 나지막이 불렀다.“언니.”이정희가 말했다.“따라와.”정원에는 갑자기 나와 석지훈 단둘만 남았고 나는 방 안에, 그는 방 밖에 서 있었다. 그는 들어오지 않았고 나도 나가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창가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다 들었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분 오빠 걱정 많이 하시던데요.”석지훈은 이정희가 내게 뭔가 말했을 거
석지훈은 샤워하러 갔다.잠시 후, 가운을 입은 그는 침대로 와서 내 손목을 잡고 상처를 뚫어져라 살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오후에 아팠어?”그가 물었다.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좀 욱신거렸어요. 다친 것도 잊고 침대 모서리에 부딪혔다가 너무 아파서 울 뻔했어요.”석지훈의 앞에서 나는 나약한 모습을 감춘 적이 없었다.내가 가련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는 피식 웃으며 내 코를 살짝 긁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보같이. 다쳤으면 조심해야지.”나는 더욱 가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이 내 옆에 앉자 나는 그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누워 물었다.“힘들어요?”그가 내려다보며 말했다.“아니.”석지훈의 눈은 슬픔 없이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는 늘 그랬듯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침착했다.나는 그의 소매를 잡고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석지훈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턱을 얹자 그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목에 얼굴을 묻었다.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차분한 모습이었다. 한참 후, 그는 나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두 개의 그릇이 들려 있었다.내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저녁을 먹고 나서 석지훈은 그릇을 탁자에 놓고 침대에 누웠다. 그는 내 곁에 누워 나를 품에 안았다.나도 그에게서 떨어지기 싫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지훈은 잠들었다.이틀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그가 너무 안쓰러워 나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나도 이내 잠이 들었다.아침에 눈을 뜨니 석지훈은 여전히 내 옆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눈을 비비고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매끄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나는 조용히 물었다.“무슨 생각해요?”문득 석지훈은 눈을 감더니 나지막이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아버지는 나와 세 형을 어렸을 때 석씨 가문에서 내보냈어. 아무런 도움 없이 먼저 석씨 가문으로 돌아오는 자가
“네가 오늘 빠졌던 그 호수.”호수 바닥에 억울하게 죽은 세 영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석지훈의 말을 들었다.“나는 그들을 구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땐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어... 나는 그때 깨달았어. 석씨 가문은 낡아빠지고 고리타분한 곳이라는 걸. 언젠가 아버지가 늙으면 같이 무너질 곳이라는 걸 말이야.”지금의 석씨 가문을 석지훈이 포기했으니 몰락은 시간문제였고 이 저택의 여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여기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그리고 다시는 새로운 사람이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이다.나는 석지훈의 매끄러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어. 심지어 여기에도 거의 돌아오지 않았지. 그리고 7년 동안 나는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아 아버지처럼 강한 남자가 됐어. 물론 나도 자연스럽게 아버지처럼 잔인한 남자가 돼버렸지.”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오빠는 달라요! 오빠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타협도 없이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잖아요. 두 사람은 완전히 달라요.”내 말에 석지훈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어. 나와 아버지는 달라. 아버지에겐 석씨 가문이 있었고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이 있었지. 하지만 난...”석지훈은 말을 멈추고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난 석씨 가문과 아무 관계도 없어. 내게 중요한 건 오직 너뿐이야. 그게 전부야.”석씨 가문과 아무 관계도 없다는 말의 의미를 그땐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석지훈의 눈빛은 확고했다.나는 그의 눈빛에서 사랑을 보았고 그에게서 확신, 한결같은 사랑, 그리고 굳건한 믿음을 배웠다.내게 중요한 건 오직 너뿐이야.그게 전부야.나는 석지훈에게 전부였다.그 말은 마치 따스한 봄 햇살처럼 내 마음속의 어둡고 축축했던 대지를 비추었다. 왜 내가 석지훈을 선택하고 그를 따라왔는지 분명하게 깨달았다.그는 사랑을 아는 사
내가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데 누군가 말했다.“고현성은 이제 끝났어. 잘나가던 인생이 재앙 덩어리를 아내로 맞는 바람에 망한 거잖아!”재앙 덩어리...나는 눈을 감고 화를 가라앉혔다. 그때 고현성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그는 모든 것을 잊었지만 수아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는 오직 그의 수아만을 옹호하고 있었다.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침묵하는 석지훈을 바라봤다. 그 사람은 내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때 오히려 담유미가 물었다.“그럼 넌 바보야?”바보에게 바보냐고 묻다니.나는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입 다물어요!”“왜? 부끄러워서 화내는 거야?”한성범은 이때다 싶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그럼 고현성이 바보가 아니라는 거야? 연수아, 난 널 초대 안 했으니 나가. 곧 ‘바보극' 공연이 있거든!”한성범은 석지훈의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눈앞의 술잔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석지훈은 그를 위해 막아냈다. 마음속에서 갑자기 분노가 치솟았다.그때 고현성이 황급히 일어나 나를 진정시켰다.“저 사람들 때문에 화내지 마. 수아는 재앙 덩어리가 아니야. 수아는 그냥 내 아내일 뿐이야!”나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차가운 눈빛으로 석지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저 사람을 감쌀 건가요?”석지훈은 차가운 침묵으로 나에게 답했다.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술잔을 다시 한성범에게 던졌다. 하지만 남자는 가볍게 받아 바닥에 던져버렸다.유리 조각들이 순식간에 바닥에 흩어졌다.그때 담유미가 차갑게 말했다“연수아 씨, 너무 건방지네요.”그러자 담현아가 차갑게 꾸짖었다.“입 닥쳐!”담유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원태웅은 황급히 나를 껴안으며 말했다.“윤아야, 화내지 마. 우리 여기서 나가자!”나는 눈
석지훈은 당연히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에서 위로 그를 올려다보며 비판했다.“오후에 그 일은 당신이 잘못했어요!”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음?”“나는 그 사람들과 친분이 있어요. 친구처럼. 그들이 나를 유람선에 초대한 건 내가 그들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석지훈 씨라고 했죠? 설마 내가 당신을 좋아해서 당신 주변에 자주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근데 내가 당신의 무엇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당신이 우리 석씨 가문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요?”내 말은 다소 따끔했고 석지훈의 얼굴은 차가워졌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어떤 사람들은 가끔 자기 생각에 빠져 착각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혹시 당신 마음속으로는 나를 좋아하는데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나를 피하고 당신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거죠? 설마 마음이 흔들릴까 봐 두려운 건가요?”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나는 눈치껏 말을 돌렸다.“물론. 나는 당신이 아니니까 당신 속마음을 알 수는 없죠. 됐어요, 당신이랑 말싸움하기 귀찮아요!”그는 차갑게 말했다.“허튼소리.”나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평소에 나한테 신경 끄세요!”석지훈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나는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못 참네. 그 성격에 어떻게 여자 없이 지금까지 버텼을까? 아마도 내가 운이 좋은가 봐. 안 그러면 당신을 어떻게 얻었겠어!”‘지훈 씨,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신앙처럼. 당신 말대로 이 길을 따라갈게! 당신이 나에게 아무리 차갑게 굴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 기억해둘 테니까! 나중에 똑같이 갚아줄 거야!’담현아는 몇 분 동안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나는 놀리듯 물었다.“부부끼리 무슨 달콤한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네. 이제 푹 빠진 거야?”담현아는 웃으며 물었다.“푹 빠졌다는 게 사랑한다는 뜻이에요?”내가 되물었다.“그럼 아니야?
담현아는 의리가 있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홀을 나와 뒤뜰을 찾아갔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갑자기 고현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담현아가 먼저 그를 언급했던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며 말했다.“나 아저씨한테 고현성의 현재 상황을 들었어요. 그의 지금 상황이... 아저씨는 아주 괴로워하더라고요. 결국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수아 언니는 어때요?”담현아는 내 마음이 아픈지 묻고 싶어 했다내 마음이 안 아플 리가 있겠는가?그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내 전남편인데.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게다가 지금의 고현성은 변하고 있었다.그는 예전의 그 남자와는 완전히 달랐다.그는 심지어 아이를 나의 생일선물로 돌려주기까지 했었다.나는 담현아 앞에서 고현성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아무렇지도 않아. 근데 희연이가 요즘 연락 오던?”“네. 흉터 제거 수술을 받아서 아이스랜드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한대요. 왕자현 씨가 옆에서 계속 돌봐주고 있다고 하더라고요.”담현아가 왕자현을 언급하자 나는 흥미가 생겨 말했다.“왕자현 씨 집안이 엄청 부자라며?”담현아는 뭔가 아는 듯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왕씨 가문은 세력은 없어도 돈은 엄청 많죠.”돈이면 다 되지. 돈이 곧 힘인데.담현아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급히 일어서며 고정재의 전화라고 했다.담현아가 남편 전화를 받으러 뒤뜰을 나가자 앉아서 할 일이 없던 나는 일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나는 2층 발코니에서 고독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미소를 짓고 떠나려 했다.그런데 그가 뜻밖에도 나를 불러 세웠다.“연수아 씨.”나는 걸음을 멈췄다. 석지훈이 나를 부른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웠다.오후에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그가 그렇게 차가우니 나도 굳이 아부할 필요는 없었다.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우리가 그렇게 친했나요?”그는 내 질문
담현아는 옷을 갈아입고 싶어 했다. 내 차에도 여벌 옷은 있었지만 우린 키 차이가 있었고 예지한도 여기 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를 근처 쇼핑몰에 데려갔다.담현아는 쇼핑이 빨랐다. 핑크색 롱드레스를 입으니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그녀는 또 반지 몇 개를 손가락에 끼고는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뻐요?”담현아는 워낙 예뻤기에 뭘 입어도 예뻤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말했다.“아주 예뻐.”담현아는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꾸미는 걸 잘 안 해서...”그녀는 쇼핑몰 화장대에서 가볍게 화장을 하고 나서야 나와 함께 한씨 가문으로 갔다. 그리고 경호원을 많이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오늘 한씨 가문에는 일부러 트집 잡으러 가는 거라 나도 준비를 해뒀다. 휴가가 방금 끝난 비서에게 문자를 해두었던 것이다.한씨 가문에 도착하니 비서는 이미 와 있었다. 내 옆에 있는 23명 외에도 비서는 꽤 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다.비서는 우리 뒤를 따라 들어가고 나머지는 입구를 지켰다. 담현아는 초대장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담유미를 발견했다.흰색 이브닝드레스에 진한 화장을 한 담유미는 큰 키 덕분에 드레스가 참 잘 어울렸다. 담현아는 그녀를 불러 세우며 물었다.“담유미, 너 엄마 아빠 앞에서 무슨 말을 했어?”담유미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 지금 언니한테 따지는 거야?”“미안하지만, 난 오빠밖에 없어.”담현아의 말은 너무 매몰찼다.담유미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곧 설명했다.“난 네 일에 관심 없어. 부모님은 오빠한테 네 남자친구 얘기 들으신 거야.”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너랑 상관없는 일이네!”담현아의 말투는 꽤나 퉁명스러웠지만 담유미는 별말 없이 얼굴만 굳힌 채 가버렸다.그녀가 가고 나서야 담현아가 말했다.“우리 집의 골칫거리는 바로 저 여자인데 집안 사업까지 쥐고 흔들고 있죠. 하지만 뭐, 나쁘진 않아요. 어차피 나랑 오빠는 담씨 가문의 사업에는 관심 없으니까!”담유미에게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다니.
석지훈을 이렇게 놀리는 건 한민수밖에 없을 것이다.석지훈은 침묵으로 한민수에게 답했다.한민수는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수아 씨는 동성에서 잘나가는 집 딸이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줄 서는지 알아? 게다가 예쁘기도 하지!”크루즈선 위라서 석지훈은 평소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얇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실크 바지만 입고 있었다. 평소 차가운 이미지에 뭔가 좀 자유로운 느낌이 더해져 꽤 매력적으로 보였다.한민수가 계속 석지훈의 앞에서 나를 칭찬하자 옆에 있던 원태웅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윤아는 확실히 예쁘지.”석지훈은 원태웅을 홱 쳐다보며 물었다.“너 뭐라고 불렀어?”“윤아. 애칭이야!”석지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너희 둘, 앞으로 얘 내 앞에 데려오지 마.”그는 한민수와 원태웅의 속셈을 눈치챘던 것이다.그는 분명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다른 평범한 아가씨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래서 그들 두 사람에게 나를 자기 앞에 데려오지 못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이런 그를...지금 이 순간 나는 석지훈이 정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나는 착하게만 굴면 석지훈의 눈에 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내가 가죠. 뭐.”나는 한민수의 손을 뿌리치고 크루즈선에서 내려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차에 타니 원태웅의 문자가 왔다.[형님이 마누라 잡다가 나중에 엄청 후회할 것 같은데!]나는 입술을 깨물고 답장했다.[다 적어둘 거예요.]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켜서 몇 년 몇 월 며칟날에 석지훈이 나에게 한 일을 적었다. 나중에 그의 병이 나으면 모조리 계산할 생각이었다.나는 쪼잔하게 하나하나 다 적어둘 것이다.나는 차를 몰고 카페로 돌아왔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나니 피곤해져서 나는 카운터에 엎드려 7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담현아를 깨우러 안으로 들어갔다.담현아는 이미 깨어 있었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서 그녀의 뺨
담현아는 지난번 일 때문에 계속 앙금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주민솔이 경찰서에서 나왔다고 하니 순순히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녀는 나에게 카페에서 30분 동안 기다리라고 했다.30분은 금방 지나갔다. 검은 라이더 재킷을 걸친 담현아가 까만 머리를 땋은 채 캐리어를 끌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겨우 끝났어요!”나는 웃으며 물었다.“왜 이렇게 힘들어?”“일찍 들어오려고 며칠 밤샜어요. 일단 카페에서 좀 자고 있을게요. 이따가 7시에 깨워줘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2층에 방 있어.”고양이 카페 2층은 며칠 전 내가 임대해 놓은 것이었다.담현아는 짐을 1층에 두고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잤고 나는 그녀의 여행 가방을 끌고 그녀를 따라 올라가 방에 짐을 놓아주었다.내려와 보니 예지한이 얼굴을 찌푸리며 나에게 물었다.“사장님 가게에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자주 와요?”이상한 사람?어디가?그냥 다 그녀가 아는 사람일 뿐이지.나는 그녀를 잠시 쳐다보며 말했다.“들켰네요!”그것도 내가 실수로 들키게 한 것이었다.이 말에 예지한은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내 정체를 알았어요?”“네. 방금.”내가 대답했다.“아, 여기 좀 더 있으려고 했는데.”예지한은 이곳을 떠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내가 물었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한 달 더 있을 거예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여기 떠나기 아쉬워요.”예지한은 여기서 2년을 살면서 모든 것에 정이 들었고 또 여기는 한가로워서 떠나기 아쉬울 만도 했다.하지만 한민수의 말이 맞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책임이 있었다. 예지한이 아직도 저렇게 놀 수 있는 건 할아버지가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었다.그리고 한민수, 예유진 그리고 진유겸, 심지어 나까지도 우리 모두는 자신이 가진 것을 굳건히 지켜야 했다.예지한도 마찬가지였다.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예 씨 가문이 있었다.예지한은 좀 시무룩해 하면서 다시 일하러 갔다. 나는 카운터를 보고
어젯밤 길바닥에서 자고 두 시간이나 걸었더니 피곤해서 그런가, 감기 기운이 있었다.내가 막 나가려는데 원태웅의 문자가 왔다. [형이 방금 운성에 도착했어. 이틀 정도 여기에 머물 거야.]그는 바쁜 남자였다.항상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기에 이틀이나 머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석지훈과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니 항상 만남은 짧고 헤어짐은 길었다. 며칠 함께 있으면 또 헤어져야 했고 헤어지면 한두 달, 길면 반년 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나는 운성으로 돌아온 후 진유겸의 결혼식이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나는 그가 왜 결혼식을 연기했는지 잘 몰랐지만 최희연이 국내에 없으니 그녀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운성에 도착한 후, 나는 고양이 카페에 가서 최희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 답장이 왔다.[나도 방금 알았어. 원래 일찍 돌아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미룰 수밖에 없네! 수아야, 나 방금 수술을 마쳤고 얼굴의 흉터가 아직 회복 중이라 아이스랜드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할 것 같아. 하나한테서 이미 영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가 시간이 된다면 카페를 좀 돌봐줘!]나는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후 다시 물었다.[흉터는 어때?]최희연이 답장했다.[아직 회복 중이지만 왕자현 씨가 흉터가 남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어. 나는 그를 믿어. 다 나으면 귀국할게!][그래. 그때의 너는 분명 아름다울 거야.]최희연은 바로 답장하지 않고 30분 뒤, 갑자기 슬픈 어조로 말했다.[왕자현 씨가 내가 그림을 배웠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고 싶어 해. 그는 그 분야에 조예가 깊거든. 근데 내 손목이... 수아야, 나는 붓을 잡을 수는 있는데 손이 떨려서 도저히 붓을 댈 수가 없어!]최희연은 그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정성을 쏟았다. 그 노력으로 힘들게 성과를 내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주민솔 그 여자는 정말 죽어 마땅했다.며칠 전에 진유겸은 그녀를 경찰서에서 꺼내주었다.나는 최희연에게 조심스럽게
석지훈은 내가 생떼를 부린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 섰고 그는 내가 따라오지 않자 몸을 돌려 차가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내 모습이 전혀 비치지 않았다.나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아주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생떼 부리지 마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석지훈: “...”이번에 석지훈은 나를 완전히 무시했다.그는 별장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돌려 별장 밖으로 나가 길가에서 도라지꽃 몇 송이를 꺾었다.나는 꽃을 옆에 두고 길가에 옆으로 누워 눈을 떴다. 늘씬한 몸매, 아름다운 드레스, 그리고 꽃 한 송이. 2층에서 보면 아름다운 그림 같을 것이다.내 행동은 아주 이상했다.정상적인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지금 술에 취한 상태였다. 비록 대부분은 연기였지만 술에 취한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석지훈은 분명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여기 누워서 그를 기다릴 것이다.석지훈은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참을성이 있었다. 나는 그가 2층 방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나도 몸을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나는 별장 입구에 밤새도록 누워 있었고 그러다가 먼저 잠들어 버렸다. 깨어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술에 취한 척할 수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서 의식이 흐릿했다고 해도 하룻밤이 지나면 알코올은 이미 다 날아가 버렸을 테니 말이다.나는 재채기를 하고 일어났다. 원래는 함승윤에게 전화해서 나를 데리러 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때야 내 가방이 석지훈의 차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초인종을 눌렀다.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내가 거의 포기하려고 할 때 정장 차림의 석지훈이 나왔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런 석지훈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리움이 더 컸다.예전처럼 차갑
이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설명해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형, 이분은 석씨 가문 가주, 형의 석씨 가문을 빼앗은 여자야! 방금 보니까 술에 취했더라고. 곁에 비서도 없이 말이야. 전에 날 도와준 적이 있는데 차마 그녀를 혼자 둘 수 있어야지. 그래서 집에 데려다주려고.”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했지?”원태웅: “...”석지훈이 지시했다.“이 여자를 네 차에 태워.”“형, 내 차 고장 났어. 우리 두 사람 좀 집까지 데려다줘! 얘는 술 취하면 얌전해. 절대 방해 안 할게.”석지훈: “...”석지훈은 결국 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원태웅은 전화를 받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야 했다. 정말 일이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석지훈의 운전기사가 그를 길가에 내려주자 차에는 나와 석지훈 두 사람만 남았다.나는 일부러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는 신사답게 나를 밀어내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팔을 껴안고 웅얼거리며 말했다.“정우 씨.”“허, 정우까지 네 손에 넘어간 거야.”남자가 갑자기 뜬금없이 말하자 나는 당황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이때 운전기사가 물었다.“아가씨, 어디 사세요?”나는 계속 당황한 척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무관심하고 간결하게 말했다.“주소.”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무슨 주소요?”그는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네 집 주소.”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정말 오랫동안, 거의 돌처럼 굳어 버릴 때까지 생각하다가 석지훈의 품에 쓰러졌다.그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운전 기사에게 지시했다.“동성으로 돌아가.”2년 전 석지훈은 동성에 살았었다.동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보니 창밖에는 온통 도라지꽃이 피어 있었다. 여기는 석 씨 저택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석지훈은 몰래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나는 깨어난 후 계속 멍하니 차 안에 앉아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다행히 술에 취해서 그런지 그는 나를 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