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나는 정중하게 설명했다.“저는 석지훈의 여자 친구이고 아저씨는 그의 아버지시니까요.”내가 석지훈을 언급하자 그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지훈의 여자 친구라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처음 고승철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왔었지만 나는 그 앞에서도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지, 지금처럼 불안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어쩌면 반경우와 그의 비서들의 섬뜩한 경고가 석씨 가문에 대한 공포를 내 마음 깊이 새겨 놓은 것 같았다. 그러니 석씨 가문의 옛 가주 앞에서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더 이상 석지훈에 관해 묻지 않았고 대신 나에게 손짓하며 그의 앞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석만호를 쳐다보았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연수아 씨, 어르신께서 아가씨를 만져보고 싶어 하십니다.”처음 만나는 사이에 이런 행동은 적절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석용재의 온화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자, 그는 손을 들어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수아야, 우리 처음 만나는구나.”그는 나에게 매우 다정했고 하는 말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들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거친 손바닥이 천천히 내 뺨에 닿더니 내 얼굴 윤곽을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이상하게도 불편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고 편안했다. 그는 얼굴 윤곽을 더듬고 나서 내 귀를 만졌다. 그리고는 흐릿한 눈가에 눈물이 천천히 맺혔다.나는 마음속에 의문이 가득했다. 일어서려던 찰나, 그가 회상하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수아야, 지금 이 나이를 먹도록 나에게는 겨우 자식 하나만 남았어. 나는 좋은 아버지도 좋은 남편도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세상 모든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싶었단다. 그 무엇보다 내 혈육과 함
석용재가 어떻게 내 어머니를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의문으로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본 석만호는 황급히 설명했다.“어르신께서는 아가씨를 도련님으로 착각하신 듯합니다.”정신이 혼미한 노인을 보며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어서려는 순간, 그가 내 팔을 꽉 붙잡고 낮고 거친 숨소리로 말했다.“네 어머니는 착하고 강인한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유일한 사랑을 줄 수 없었지. 얘야, 내가 네 어머니를 처음 만난 곳은 운성이었어. 비와 눈이 자주 내리고 항상 날씨가 음울한 도시였지. 나는 그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여자 때문에 그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단다.”예전에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사람은 죽을 때 마지막으로 좋은 기억들을 떠올린다고 하셨다. 나는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겼다.그는 노인치고는 젊은 편이었지만 병세가 너무 깊었다.나는 그의 앞에 얌전히 쪼그리고 앉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얘야, 나는 네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었어. 하지만 내 뒤에는 석씨 가문이 있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와 떠날 수 없었지... 결국, 그녀는 내 세상을 떠나갔고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어. 나는 가끔 생각해. 왜 나는 석씨 가문 남자로 태어났을까? 만약 내가 석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놈의 책임감이 없었다면,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면 나는 그녀와 함께 평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네가 자라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하고 사랑과 정의를 가르쳐 주면서 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모습까지 보았을 거야. 그랬다면 나는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그는 이미 자신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 눈길로 석만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수아 씨, 어르신은 이 말들을 평생 가슴에 담아두셨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해 드리십시오.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석만호는 말을 멈췄지만 우리는 모두
나는 응수하며 말했다.“그럼 일단 제가 보관하고 있을게요.”석만호는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물었다.“그 반지는요?”석용재가 돌아가시기 전에 반지를 준 건 맞지만 나는 방금 그 반지를 핸드백에 넣어 두었다.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지금 드릴까요?”석만호는 고개를 저으며 자세히 말했다.“연수아 씨, 그건 어르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건입니다. 석씨 가문의 비밀과 관련된 것이죠. 언제든 알고 싶어지면 이 반지를 가지고 저를 찾아오십시오. 제가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나는 궁금해서 되물었다.“알고 싶어 해야 할 사람은 지훈 씨가 아닌가요?”석만호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으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원을 떠났다.보슬비와 산들바람 속에서 평소 허리를 굽히고 다니던 석만호의 등은 유난히 꼿꼿했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류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서류 안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어 열어볼 수 없었다. 게다가 유언장을 몰래 열어보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그 당시 나는 단순한 누런 서류 봉투 하나가 석지훈을 파멸시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일을 직접 저지른 사람은 바로 나였고 더 끔찍한 건 그 남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내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파멸시키는 행위조차도 그는 묵인했던 것이다.석용재가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바람에 그는 장례식 준비로 밤샘을 하다가 날이 밝아올 무렵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슬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나는 그의 소매를 잡고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그는 내 뺨을 두드리며 말했다.“상복으로 갈아입어.”석지훈은 상복을 가져왔고 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 나를 빈소로 데려갔다.우리는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조문객들의 조의를 받았고 정오 무렵, 나는 잠시 방으로 돌아왔다.방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석지훈의 곁으로 돌아가려고 빈소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연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나를 막아섰다. 모두 석지훈 쪽의
호수 바닥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은 분명 나를 향한 계획적인 범행이었다.석씨 가문에서 누가 이렇게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걸까?석씨 가문은 방계 가족이 많으니 용의자는 수두룩했다. 다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조금 전에 이쪽으로 걸어오던 남자를 떠올리며 그가 분명 나를 구해주리라 생각했다.나는 호수 바닥으로 끌려가며 침착함과 호흡을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바닥에 닿으니 산소마스크를 쓴 남자가 보였고 손에는 날카로운 작은 칼이 들려 있었다.나는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그가 갑자기 내 쪽으로 헤엄쳐 오더니 내 손목의 혈관을 그었다. 피가 물줄기를 따라 빠르게 흩어졌다.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심장에 칼을 꽂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석지훈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그말고 이렇게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으니까!석지훈은 그를 발로 차버린 뒤 나를 데리고 위쪽으로 헤엄쳐 올라갔다. 내가 거의 숨 막혀 질식하려는 순간,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나는 마치 생명줄을 잡은 듯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공기를 빨아들였다. 석지훈은 내 손목의 상처를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꾹 눌러 지혈했다.곧 석지훈은 나를 호수 밖으로 데리고 나왔고 나는 흠뻑 젖은 채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사방은 온통 석씨 집안 사람들이었다. 석지훈은 내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불렀다.“아가야.”하지만 나는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이때 누군가 담요를 건네주자 석지훈은 담요를 받아 내 몸에 둘러주었다. 그는 여전히 내 손목의 상처를 꼭 누르고는 부드럽게 물었다.“아가야, 내 말 들려?”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그는 석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나를 아가라고 부르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대답하려고 힘겹게 입을 벌려 소리쳤다.“오빠.”석지훈은 미소를
석나은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의사를 데리고 나갔다.그들이 나가자 석지훈은 내 옆에 앉아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는 늘 이런 남자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차갑고 무뚝뚝하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한없이 다정했다.석지훈은 수건을 가져다 축축한 내 머리를 계속 말려주었다. 온몸이 젖은 채로 이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그를 보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내 머리를 다 말리고 나서야 석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슈트를 벗었다. 젖은 흰 셔츠가 그의 피부에 딱 달라붙어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그가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벗자 등에 있는 여러 개의 흉터가 드러났다.전에 그의 가슴에서도 흉터를 본 적이 있었는데 모두 그가 예전에 입은 상처였다.대체 석지훈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그는 마치 깊은 바다처럼 나에게 끊임없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석지훈은 검은색 셔츠를 꺼내 입고는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뺨을 어루만지며 나지막이 당부했다.“잠깐 볼일 보고 저녁에 돌아올게.”나는 침대에 누워 그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물었다.“아버님 장례는 언제 치러요?”“내일 아침. 나랑 같이 가자.”그가 대답했다.석지훈이 나와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겠다니 평소 그답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혼자 묵묵히 처리하고 나를 끌어들이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훨씬 나중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관 속에 누워 있던 그 노인은 사실...석지훈이 방을 나가고 나서 나는 침대에 누워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어젯밤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졸음이 쏟아졌다. 깜빡 잠이 들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석지훈은 문을 두드리는 법이 없었다. 나는 눈을 뜨고 호기심에 물었다.“누구세요?”문밖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다.”어디선가 들어본 듯 익숙한 목소리였다...나는 공손하게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고 석지훈의 어머니가 들어왔다.하지만 석지훈의 어느 어머니인지 알 수 없었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
나는 석용재가 그날 밤 했던 말을 모두 그녀에게 전했다. 단, 반지와 유언에 관한 이야기는 숨겼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쏟으며 슬픔에 잠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일한 사랑? 감히 그런 말을 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난 이제까지 뭘 위해 이렇게까지 발버둥 쳤던 거냐고?”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그녀는 섬뜩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지훈은 내 아들이야. 넌 절대로 걔를 가질 수 없어!”나는 놀라서 물었다.“지훈 씨가 날 사랑하는 걸 아시면서 왜...”내 말에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되물었다.“지훈이가 널 사랑한다고?”밤하늘은 어둡고 빗소리는 거셌다. 그녀는 내 앞으로 와 쪼그리고 앉아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슴에 비수를 꽂듯 말했다.“네가 그럴 자격이 있어?”그 말은 마치 천둥처럼 내 귓가에 울렸다.나는 당황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이혼녀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었고 암까지 걸렸던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아들을 가지겠다는 거야? 연수아, 지훈은 석씨 가문의 가주야. 이 세상에 적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 애가 어떤 여자가 없어서 너를 만나야 하겠니?”많은 사람이 나에게 했던 말이었고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참으며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먼저 제게 다가온 건 지훈 씨였어요. 저는 먼저 다가간 적도 없고 오히려 피하려고 했지만 지훈 씨가 계속해서 제 삶에 나타났다고요. 네. 맞아요. 전 지훈 씨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하지만 제 과거를 다 떠나서 우리는 사랑하고 있어요!”나와 석지훈은 서로 사랑했고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사랑해?”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뭔가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너희 둘, 정말 닮았구나. 그 여자는 내 남편을 빼앗아 갔으니 이번엔 절대로 내
석지훈은 마당에 핀 수선화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는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어머니, 저는 선량한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뭘 소중히 여기는지 어머니가 가장 잘 아시잖아요. 어머니가 저와 그녀를 적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거라면, 죄송해요. 전 못해요.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마저 잃게 하지 마세요.”또다시 석지훈은 다른 어머니를 협박하던 익숙한 수법을 쓰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정희가 도대체 누구를 그의 적으로 만들려는지 알 수 없었다...분명 석지훈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 것 같았다.설마 나인가?그렇지만 나는 아닌 것 같았다...이정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지훈아!”그때, 정원 입구에 이정희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나타났다. 석씨 가문의 안주인이었지만 대역일 뿐이었다.그들은 모두 내가 엿듣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만약 그 여자가 널 파멸시키려고 한다면?”나는 이정희가 말하는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석지훈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약 그녀라면 상관없어요. 어머니, 더 이상 말씀하지 마세요. 제 결심은 확고해요. 내일 전 석씨 가문을 떠날 것이고 중요한 일이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이정희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석씨 가문을 버리겠다는 거야?”“나는 이 고리타분하고 썩어빠진 가문을 인정한 적도 없는데 뭘 버린다는 거죠?”그 말에 귀부인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고는 황급히 돌아섰다. 정원 입구에 서 있던 여자는 그녀의 팔을 잡고 나지막이 불렀다.“언니.”이정희가 말했다.“따라와.”정원에는 갑자기 나와 석지훈 단둘만 남았고 나는 방 안에, 그는 방 밖에 서 있었다. 그는 들어오지 않았고 나도 나가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창가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다 들었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분 오빠 걱정 많이 하시던데요.”석지훈은 이정희가 내게 뭔가 말했을 거
석지훈은 샤워하러 갔다.잠시 후, 가운을 입은 그는 침대로 와서 내 손목을 잡고 상처를 뚫어져라 살폈다. 그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오후에 아팠어?”그가 물었다.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좀 욱신거렸어요. 다친 것도 잊고 침대 모서리에 부딪혔다가 너무 아파서 울 뻔했어요.”석지훈의 앞에서 나는 나약한 모습을 감춘 적이 없었다.내가 가련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는 피식 웃으며 내 코를 살짝 긁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보같이. 다쳤으면 조심해야지.”나는 더욱 가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이 내 옆에 앉자 나는 그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누워 물었다.“힘들어요?”그가 내려다보며 말했다.“아니.”석지훈의 눈은 슬픔 없이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는 늘 그랬듯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침착했다.나는 그의 소매를 잡고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내가 석지훈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턱을 얹자 그는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목에 얼굴을 묻었다.석지훈은 아무 말 없이 차분한 모습이었다. 한참 후, 그는 나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두 개의 그릇이 들려 있었다.내가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저녁을 먹고 나서 석지훈은 그릇을 탁자에 놓고 침대에 누웠다. 그는 내 곁에 누워 나를 품에 안았다.나도 그에게서 떨어지기 싫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지훈은 잠들었다.이틀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그가 너무 안쓰러워 나는 다치지 않은 손으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나도 이내 잠이 들었다.아침에 눈을 뜨니 석지훈은 여전히 내 옆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눈을 비비고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매끄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나는 조용히 물었다.“무슨 생각해요?”문득 석지훈은 눈을 감더니 나지막이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아버지는 나와 세 형을 어렸을 때 석씨 가문에서 내보냈어. 아무런 도움 없이 먼저 석씨 가문으로 돌아오는 자가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