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고현성과 결혼했던 나는 죽음을 앞두고 사랑받는 연애를 그토록 갈망했었다.그러나 지금은 결혼하고 싶어졌다.나는 석지훈과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나는 문득 연애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있고 그 사람과 같은 마음이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 계획을 세워 보자.”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이어졌다.석지훈은 나를 잠시 안아 주고는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었고 나는 검은 원피스로 갈아입고 손목의 흰 붕대 위에 검은 스카프를 둘렀다.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우리는 장례 행렬을 따라 순조롭게 산에 올라 석씨 가문의 묘원에 도착했다.이곳에는 묘비가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다. 석지훈은 내 귓가에 대고 설명해주었다.“석씨 가문 선조들이 모두 여기에 묻혀 있어.”나는 응수하고는 석지훈의 옆에 공손히 섰다.관에 못을 박을 때 석씨 가문의 안주인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듯 울었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석지훈의 바짓단을 잡고 안 된다고 애원했다. 석지훈은 허리를 굽혀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담담하게 말했다.“고인은 이미 떠나셨어요.”바닥에 무릎 꿇고 오열하던 이 안주인은 사실 대체품으로 이정희의 여동생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아마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인을 진짜 남편으로 여기게 된 것 같았다.석지훈이 말했듯이 그녀는 석지훈을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모든 것을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계획했다.그녀의 삶에는 남편과 석씨 가문밖에 없었다. 비록 그것들이 그녀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을지라도.석지훈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 그녀는 많이 진정되었다. 석나은이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자 그녀의 시선이 문득 나에게로 향했다.그 눈빛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음험함이 서려 있었다.나는 문득 그녀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내가 그녀의 아들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건가?...장례식이 끝나자 석지훈은 나를 동성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향한 곳은 내 아파트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석지훈은 섬세하게도 방금 내 손목이 젖지 않게 일부러 감싸줬다.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밥 먹자고요.”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네가 밥할 줄 알아?”“당연하죠.”내가 대답했다.“그럼 예전에 내 별장에 있을 때는 왜 내가 해주는 밥을 기다렸지?”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뭔가 생각난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꼭 작은 고양이처럼 불쌍하게 나만 쳐다보면서 밥 달라고 기다렸잖아.”그때는 고현성 때문에 상처받아서 요리하기 싫었고 무의식적으로 내가 요리를 못 한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모든 과거를 내려놓고 나니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직접 요리하고 싶고 그의 칭찬을 받고 싶어졌다.요리 안 했던 진짜 이유는 말할 수 없어서 좀 궁색한 변명을 했다.“그건 내가 게을러서 그랬던 거죠. 설마 나 걱정돼서 요리해 준 거였어요?”석지훈은 나를 흘끗 보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네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길래 일부러 태웅한테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네가 내가 밥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안 해주면 너 진짜 굶을 작정이었나 싶었지.”나는 웃으며 말했다.“불쌍하게 여겨줘서 정말 고마웠네요.”석지훈은 내 손을 놓고 곧장 일어섰다.나는 욕조에서 허둥지둥 기어 나왔고 석지훈은 내게 깨끗한 목욕가운을 입혀 주었다.나는 여러 가지 요리를 푸짐하게 했고 석지훈도 꽤 많이 먹었다. 다 먹고 나서 그는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나에게 쉬라고 했다.그는 원래 말하면 하는 사람이라 나는 주방을 그에게 맡기고 침실로 돌아왔다. 손목 상처를 조심하며 씻고 침대에 누웠을 때, 오랜만에 윤다은에게서 문자가 왔다.[수아 언니, 어떤 남자가 영화 보자고 하는데요.]나는 생각하다가 물었다.[거절할 거야?]윤다은이 고정재에 대한 마음을 접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그녀가 고정재와는 인연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윤다은 스스로도 타이밍이 좋지 않았고
그날 밤 석지훈은 별장에서 자지 않고 윤승민이 가져온 헬리콥터를 타고 한밤중에 동성을 떠났다.떠나기 전에 내가 물었다.“어디 가요?”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핀란드.”또 핀란드에 간다고...나는 망설이며 물었다.“언제 돌아와요?”“월말에.”그런데 지금은 12월 초였다.매번 며칠 함께 있지도 못하고 그는 떠났다.나는 입술을 깨물며 아쉬운 듯 그를 바라봤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헬리콥터 옆에 서 있던 그는 윤승민이 보는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팔을 벌렸다.내가 영문을 몰라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리 와. 안아보자.”다른 사람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석지훈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나는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그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집에서 기다리고 무슨 일 있으면 승민이한테 연락해.”나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조심해서 다녀오세요.”“그래. 무슨 선물 받고 싶어?”석지훈이 선물을 묻다니... 처음이었다.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오빠요.”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어?”“오빠가 빨리 돌아오는 게 내겐 선물이에요.”그 말을 들은 석지훈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알았어.”나는 하늘에서 한 바퀴 돌고 떠나는 헬리콥터를 계속 바라봤다. 이때 윤승민이 갑자기 내 옆에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연수아 씨, 저는 석 대표님의 저런 모습은 처음 봐요.”나는 웃으며 물었다.“내가 알던 그 사람과도 달라요! 윤 비서님, 오빠는 저랑 진심으로 만나고 있어요.”윤승민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은 진심이세요.”윤승민과 나는 잔디밭에서 한참 동안 감상에 젖어 있다가 그와 함께 산에서 내려와 동성 시내로 돌아왔다.아파트로 돌아온 나는 한약을 마시고 나서 강해온에게 문자를 보냈다.[집사님 건강은 어때요?]강해온은 곧바로 답장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보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답니
조민수는 이번 협력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했다.“수아야, 반년 전쯤 나와 고현성이 상의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어. 그 결과로 네가 고현성을 미워하게 된 거고. 이건 내가 고현성에게 미안해. 난 고현성과 적으로 지내고 싶지 않지만, 정말 네가 나의 도움을 원한다면 충분히 고민한 뒤에 알려줘. 난 네 편에 설 거야.”조민수가 말한 일은 예전에 오혜원을 위해 나를 치료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나에게 사실을 숨기고 고현성이 유서정과 결혼하는 것을 도왔던 일이다.그 일은 이미 지나갔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나는 더 이상 과거의 일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이미 복잡하게 얽혀서 풀 수 없는 문제였다.조민수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니 나도 더 이상 그를 내 편으르 끌어드릴 방법이 없었다. 대신 담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담현우는 슬픈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내더니 난감해하며 설명했다.[미안해요. 내가 담씨 가문의 후계자인 건 맞지만 지금은 우리 큰누나가 담씨 가문을 관리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누나는 석지훈을 좋아해서 수아 씨를 돕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현아한테 한번 부탁해 봐요. 우리 누나는 항상 현아를 두려워하거든요.]‘담현우의 큰누나? 그리고 그 누나가 담현아를 두려워한다고?’그제야 나는 며칠 전 만났던 담유미가 떠올랐다.‘담유미가 석지훈을 좋아한다고? 그래서 나를 계속 방해했던 거야?’담씨 가문과의 협력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 끝에 담현아아게 메시지를 보냈다.[지금 어디야?]담현아에게서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아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자 나는 고현성과의 과거가 떠올랐다. 나도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나는 고현성과 적대적인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것은 단지 나의 바람일 뿐이었고 지금 내가 가장 두려운 사람은 고현성이었다. 그는 절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마음이 복잡해진 나는 핸드폰을 들어 석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빠
나는 석지훈에게서 전화를 받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저녁이 될 무렵 담현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지금 운성에 있어요.]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운성에는 무슨 일로?]담현아에게서 답장이 왔다.[여기서 열리는 만화 전시회에 초대받아서 왔어요. 아마 내일 동성으로 돌아갈 거예요.]나는 꽤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결국 담현아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로 했다.별일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낸 순간 담현아에게서 영상 통화가 결려왔다.통화를 연결하니 담현아는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핑크색으로 염색한 채 굵은 웨이브로 스타일링 되어 있었다. 담현아의 정교한 얼굴 덕분에 정말 만화에서 튀어나온 소녀 같아 보였다.담현아가 예전에 기모노를 입었던 모습과 나시를 입고 시크한 스타일을 소화했던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 그녀는 어떤 스타일이든 완벽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 지금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었다.나는 진심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정말 예쁘다.”담현아는 웃으며 말했다.“친구가 억지로 끌고 와서 만화 전시회에 참여하게 됐어요. 조금 있다가 고정재의 개인 음악회가 있다고 해서 표를 사서 가볼 생각이에요. 아침 일찍 동성으로 돌아가려고요.”나는 웃으며 물었다.“너 고정재를 싫어하지 않았어?”담현아는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맞아요. 난 고정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질한 일을 엄청 심각하게 만들고 사고 방식도 너무 구식이라 고리타분해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지만 고정재는 고정재고 고정재의 피아노 연주는 감상할 가치가 있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고정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야. 고정재의 연주는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담현아는 나의 말에 동의했다. 이때 담현아의 옆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열정적으로 인사했다.“너희 먼저 가. 나는 친구랑 몇 마디만 더 하고 갈게.”다시 나를 바라본 담현아가 물었다.“그래서 무슨 일이에요?”나는 무의식적으로 부인했다.“별일 아니야.”“수아
담현아가 과연 누구와 결혼하고 싶어 할지 궁금했다.마치 많은 사람들이 석지훈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나는 담현아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 기대되기까지 했다.나는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고마워, 현아야.”담현아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더니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우리는 친구고 언니는 아직 나한테 스포츠카도 사줘야 하잖아요.”담현아가 스포츠카 얘기를 꺼내자 나는 예전에 담현아를 위해 석지훈에게 물어보겠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일은 석지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며칠 동안 미뤘다가 완전히 잊고 있었다.만약 담현아가 방금 말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나는 다시 담현아에게 말했다.“며칠 안에 차 가져다줄게.”“고마워요, 수아 언니.”담현아는 바쁜 일이 있다며 몇 마디만 더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담현아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사실 담유미가 그렇게 큰돈이 걸린 도박까지 즐길 정도라면 담현아가 돈이 부족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담현아는 늘 스스로 가난하다고 말했다.나는 의문이 들어 윤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윤승민은 내가 담현아라는 이름을 꺼내자 설명했다.“담현아 아가씨라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담현아 아가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요.”나는 궁금해서 물었다.“뭘 알고 있는데요? 말해주세요.”“동성에서 석씨 가문과 장기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곳은 오직 담씨 가문 뿐입니다. 이유가 궁금하세요?”윤승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설명을 이어갔다.“석 대표님께서 석씨 가문으로 돌아오신 해부터 매년 영재반을 개설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천재 아이들을 찾아와 선발했는데 그중 담현아 아가씨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발된 아이였습니다. 게다가 담현아 아가씨는 당시 영재반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고 10세도 채 되지 않았었습니다.”석씨 가문에서 영재반을 운영했다니 정말 놀라웠다. 석씨 가문의 기술력이 이렇게 강력하고 업계의 모든
내가 윤승민에게 담현아가 왜 담씨 가문에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지 물었더니 윤승민은 이렇게 대답했다.“담현아 아가씨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입니다.”나는 존경심을 가득 품은 채 전화를 끊었다. 침대에 혼자 누워있으니 갑자기 석지훈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겨우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앞으로 한 달을 어떻게 견딜지 막막했다.이번 석지훈의 부재를 통해 내가 그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항상 석지훈의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침대에서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시차를 계산해 보니 석지훈이 있는 곳은 새벽 3시쯤이었다.결국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들어 석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런데 계속 신호음만 들릴 뿐 석지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실망하며 전화를 끊은 뒤 통화 기록을 아래로 넘겼다. 그러다 한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나의 친어머니.’내가 그녀에 대해 궁금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그녀가 내 친어머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나의 친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를 국내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으로 보내버렸다.나는 친어머니와의 통화 기록을 삭제한 뒤 비서에게 연락해 지금 석씨 가문 부모님의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때를 기다렸다가 내가 직접 석지훈의 부모님을 데리러 가기로 했다.맞다, 바로 운성시로 갈 것이다. 비에 젖어 음울한 그 도시로 말이다.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은 온통 석지훈의 모습으로 가득했고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그렇게 그리움으로 마음이 무거워질 때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황급히 화면을 확인했더니 전화를 건 사람은 연시혁이었다.나는 창밖의 별들을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 연시혁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도저히 그 여자를 찾을 수 없어.”연시혁이 찾고 있는 그
석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에 빠졌다. 나는 내가 그를 방해한 것 같아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그럼 이만 끊을게요.”그런데 갑자기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윤아야.”나는 의아해서 물었다.“네?”석지훈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핀란드에 놀러 오고 싶어?”석지훈은 내가 그와 떨어지기 싫어한다는 걸 눈치채고 이렇게 물은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가도 돼요? 내가 가면 방해되는 거 아니에요?”석지훈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잠시 후에 윤 비서가 널 공항까지 직접 데려다줄 거야.”이 말을 끝으로 석지훈이 전화를 끊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 욕실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실로 돌아가 큰 캐리어를 꺼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화장품이며 스킨케어 제품 같은 것도 전부 챙겼다.핀란드의 추운 날씨가 떠올라 두꺼운 패딩도 몇 벌 넣었더니 캐리어는 금세 가득 찼다. 나는 캐리어를 다 챙긴 뒤 가방을 골랐다. 여기저기 살펴보다가 결국 분홍색 실퍼 체인이 달린 루이비통의 숄더백을 선택했다.지금 시간은 대략 아침 8시였다. 핀란드 공항까지 가는 데 4시간이 걸리니 출발 시간을 포함하면 도착하면 새벽 2시쯤 될 것이다. 핀란드 시간으로는 밤 9시쯤이다.나는 윤승민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계산을 해봤다. 오늘 석지훈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속에서 설렘이 멈추지 않았다.내가 석지훈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나는 이제 석지훈과 단 1분 1초도 떨어지기 싫었고 그와의 모든 만남이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마치 첫사랑처럼 두근두근 떨렸다.윤승민은 금세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내가 아래로 내려가자 윤승민은 이미 예약해 둔 비행기 티켓을 내게 건넸다.내가 티켓을 받아 들자 윤승민이 물었다.“여권 챙기셨어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가져왔어요.”윤승민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긴급 비자를 대신 처리하려고 했는데 이미 비자가 있으시더군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