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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8화

Author: 십일
“형부와 앉아서 언니의 마음과 불만을 이야기하는 게 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어?”

“봐봐, 바로 이 태도야.”

이미윤은 가볍게 혀를 찼다.

“모든 문제가 네 앞에 있으면 간단해지기라도 한 듯처럼 말하네. 마치 세상에 너만 똑똑하고, 너만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우리 남편한테 직접 말할 수 있었으면, 이렇게 널 찾아왔겠어?!”

이미윤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이미숙은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부부야. 부부끼리는 서로 대화하고,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 그런데 그이는 날 아내로 여기지도 않잖아!”

이미윤은 이를 악물며 말했고, 그 분노가 그대로 전해졌다.

이미숙은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언니 요구는 들어줄 수 없어.”

“뭐라고?!”

“설마 너, 아직도 우리 그이를 잊지 못한 거야?!”

이미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첫째, 언니의 요구는 타당하지 않으니 내가 왜 들어줘야 하지? 둘째, 우리 셋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

“네 말대로 하라는 건, 앞으로 형부와 말 한 마디도 하지 말라는 거잖아? 그냥 남처럼 지내라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언니와 이런 약속을 할 의무가 없어. 마찬가지로, 언니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도 없고.”

“그런 넌 아직도 우리 그이를 잊지 못했다는 소리잖아!”

이미숙은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생각조차 없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대화하면 그저 힘이 들 뿐이었다.

이미숙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이미윤이 뒤에서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안 무섭냐? 내가 너랑 우리 그이의 과거를 네 남편한테 말할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알고도 지금처럼 널 대할 것 같아?”

이미숙은 돌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말해. 난 전혀 상관없어.”

“너... 너 안 무서워?”

“무서울 이유가 없지. 그이는 이미 다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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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은 정말 조개를 주웠다.무슨 조개인지 모르지만, 보랏빛에 주황색이 섞여 있어서 정말 예뻤다.그녀는 기뻐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리 와서 봐요!”마치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재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정은의 곁으로 다가갔다.정은이 손바닥을 펼치자, 조개 하나가 드러났다.“예쁘죠?”재석은 정은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그럼... 신발 벗고 같이 놀아볼래요?”남자는 순간 놀란 듯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다음에.”정은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봐, 정은이도 다음에 나와 같이 바다에 올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두 사람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이 때때로 정은의 종아리까지 차올랐다.재석은 해변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선배님, 계속 걸어가면... 끝은 어디일까요?”정은은 뒤로 걸으며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돌려 물었다.여유롭고 편안한 자세였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해변의 끝은 모래사장이고, 모래사장의 끝은 바다겠지.”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난 또 선배님이 정색하면서, ‘해안선은 해양과 육지의 경계선이고, 대조평균고조면을 기준으로 정의돼. 조석이나 풍랑에 따라 달라지는 고정되지 않은 선이 아니라, 띠처럼 형성되는 공간적 개념이지. 물리적으로 접근하면 말이지...’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요.”그녀는 재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진짜 베테랑 학자처럼 그럴듯한 모습을 보였다.재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미 답을 다 생각해놓고, 나한테 왜 묻는 거야? 그래도 듣고 싶다면 물리학적으로도 설명해줄 수 있어.”정은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몇 가닥이 뺨을 스쳤다.“아니에요. 난 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2화

    무엇보다 생명과학 분야는 오미선의 대표적인 인맥 기반이었다.누구나 정은이라는 젊은 후배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그것도 다 같은 전공에서 이어져온 인연 덕분이었다.우수한 학생을 싫어할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비록 정은이 직속 제자는 아니더라도, 생명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유망주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그다음은 물리학 분야였다.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재석의 신뢰와 명성만으로도 정은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이 친구는 소정은이라고,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예요...”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소개했다.말하는 도중, 자연스레 두 사람의 관계가 언급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난 재석이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거 처음 보네. 오늘 제대로 구경을 좀 하는구나, 하하하!”재석은 차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전에 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거든요. 정은이랑은 사실 선후배 사이고요. 그게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나요?”“아니! 전혀. 네가 좋다면야 뭐든 좋은 거지.”재석은 어이가 없었다.수지는 기회를 엿보며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재석의 소개도, 옹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조롱거리 같았다.국제 영화제에 자비로 입장해 레드카펫에 슬쩍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플래시가 아무리 번쩍여도, 그것은 수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오전의 네트워킹 세션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다.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버스를 타고 한 어촌 마을로 이동했다.이곳은 M시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어촌’으로 불린다.10여 년간의 보호 및 개발 정책을 통해 전통 어업 기반에서 관광 및 체험형 마을로 점진적인 전환에 성공했지만, 가능한 한 어촌 고유의 생활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이처럼 수준 높은 포럼이 열릴 때면, 지역 지자체에서는 인문학적 탐방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곤 한다.일종의 힐링이자, 참가자들에게 새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1화

    복도에서, 오미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재석은 팔에 걸쳐 있던 정은의 숄을 건네주며 말했다.“괜찮아?”정은은 재석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숄을 받으며 웃었다.“걱정 마요. 나 안 취했어요.”“그럼 다행이네.”“선배님, 오늘 오전에 고마웠어요.”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고맙다고? 내가 너에게 질문을 부탁한 거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지.”“질문은 어렵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도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날 불러줘서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거예요.”“내가 기회를 준 건 맞지만, 그걸 잡은 건 너야. 그러니까 나보다 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지.”정은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나 자신에게요?”“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면 돼. 정은아,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거야.”“네, 맞아요.”“이제 들어가. 오늘 일찍 쉬고, 내일 하루 더 남았으니까.”“네.”재석은 정은이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그녀가 문을 꼭 닫은 걸 확인하고서야 룸카드를 꺼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수지는 문구멍을 통해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재석이 정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준 차가운 태도가 겹쳐지자, 수지는 입술을 거의 깨물 뻔할 정도로 질투를 느꼈다.그때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수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잽싸게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손태민’이었다.그녀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침대에 내던졌다.“왜 또 쟤야? 정말 짜증나 죽겠네!”“하루 종일 연락을 하다니, 지치지도 않나 봐!”수지는 차갑게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계속 울리는 진동음을 그대로 두었다. 결국 화면은 꺼졌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는 눈을 감았다.그 전에,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래, 이제 실컷 울려봐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10화

    “하하... 그래! 당연하겠지!”“어머, 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군. 미선아,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정은이도 함께 앉아야지...”정은은 이런 학계의 비공식적인 자리엔 처음이었고,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유쾌한 농담, 어쩌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오가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연회가 이어지는 중, 오미선은 보기 드물게 먼저 잔을 들었다.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정은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정은도 그걸 알았기에, 몇 잔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술잔이 세 바퀴쯤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한 베테랑 교수가 정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둘은 전공 이야기에서 시작해, 꿈에 대한 이야기, 논문, 실험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대화를 깊이 이어갔다.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교수의 눈빛에는 감탄과 호의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하하하...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머리가 참 잘 돌아가네! 내 제자 중엔 왜 이런 애가 하나도 없는 거야? 아이고, 사람은 비교하면 안 된다더니, 진짜 열받네!”그러더니 오미선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오 교수, 이런 학생을 어디서 발굴한 거야? 왜 좋은 인재는 전부 너한테만 가는 거지?”“정말 우리에겐 숨통도 안 틔워주는구나.”오미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글쎄... 아마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는 모양이겠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이렇게 귀한 인재는 딱 보면 알겠더라고.”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교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내가 네 제자 데려갈 것도 아닌데, 누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옆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고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지난번엔 누가 자긴 눈도 안 좋고 나이도 많다고, 제가 2년간 아껴둔 와인을 억지로 가져가신 거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9화

    ‘나야말로 조 교수님과 한 팀인데, 이런 주목받는 기회가 소정은에게 돌아갔다니. 이거 명백한 편애 아니야!’오전 포럼이 끝나고, 점심은 호텔에서 단체로 식사를 한 뒤, 한 시간 휴식을 가진 후 다시 오후의 일정이 이어졌다.같은 절차지만, 발표자와 주제 분야는 모두 달랐다.정은은 펜을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작은 공책은 어느새 빼곡히 채워졌다.뒤로 갈수록 학문 연구의 놀라운 연결성과 상호작용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마치 하나의 음악회 같았다.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하모니, 플루트와 쟁의 울림, 가야금과 하프가 어우러진 선율처럼, 서로 다른 분야가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내는 듯했다.‘이것이 바로 융합 연구의 매력이구나. 지식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랄까...’정은은 그렇게 느꼈다.늘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해 왔던 정은에게, 천체물리학, 응용화학, 의생명과학 같은 낯선 분야와 갑작스레 마주한 그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아직은 정리하고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분명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기분이었다.오후 5시, 포럼이 마무리되었다.정은은 오미선과 함께 회의장을 나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오미선은 외투를 갈아입고 머리도 정성스레 손질했다.“정은아, 준비해. 이따 나랑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가자.”“네? 호텔에서 안 드시고요?”“예전의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야. 간만에 얼굴 좀 보려고.”정은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자리에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잖아. 선배님들에게 인사도 할 겸, 가자.”그 말은 곧, 정은에게 인맥을 넓혀줄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오미선이 그녀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단순한 식사 때문이 아니었다.“네, 알겠어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그래, 천천히 해, 서두르지 말고.” 오미선은 흐뭇하게 웃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정은은 재석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오미선이 들어서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8화

    정은은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으려 했다.하지만 뜻밖에도 재석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조금 전 말씀하신 견해를, 생물학과 물리학 간 융합 연구 사례를 들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정은은 순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심지어 오미선조차도 무대 위에 선 재석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연구 현장의 실천 사례를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기회였다.정은에게는 명백히, 자신의 연구 주제와 방향을 대중 앞에서 소개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셈이었다.이 자리는 많은 연구자들이 꿈꾸는 무대였고, 재석은 그 기회를 아무런 조건 없이 정은에게 넘겨준 것이다.문제는, 정은이 과연 그 기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정은은 눈빛이 복잡하게 변하더니, 저도 모르게 재석을 다시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녀는 재석의 눈빛에서 격려와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선배님은 날 믿기에 이런 기회를 준 거야. 그렇다면...’정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빛이 확고해졌다.‘선배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물론입니다. 제 연구 분야는 생물학적 데이터 기반의 모델링 및 그 응용입니다. 실험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특정 패턴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분석을 이어간 결과, 해당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실험실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이 바로 이 순간 빛을 발했다.정은은 수많은 실험 절차, 데이터 분석 결과, 수치 조정 과정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고, 덕분에 막힘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녀는 핵심을 조리 있게 정리하며, 실험 과정 전반을 논리적으로 풀어냈고, 군더더기 없이 명확한 결론으로 마무리했다.답변을 마칠 즈음, 정은은 정확하게 다음 발표 순서 시작 시간에 맞춰 사회자에게 침착하게 마이크를 넘기고 자리에 앉았다.잠시 정적이 흐른 뒤, 장내는 큰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심지어 가장 까다롭기로 알려진 도하빈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7화

    그 눈빛에는 부러움과 존경, 그리고 닮고 싶은 마음까지 담겨 있었다.‘언제 나도 그런 높이에 설 수 있을까? 실력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남들의 질투를 자아낼 자격.’정은은 한숨을 쉬었다.‘노력이 부족한 거지...’재석은 향후 10년간 자신이 집중할 연구 방향에 대해 발표했다.그는 ‘신개념 양자 얽힘’, ‘자유공간 채널에서의 양자광 간섭’, 그리고 ‘양자광 기반 3차원 영상화 기술’을 핵심 주제로 제시했다.남자는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며, 목소리가 낮고 듣기 좋았다. 내용도 전문성을 고루 돌보는 동시에 통속적이고 알기 쉬운 표현방식으로 기타 전문분야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다.지금의 재석은 스스로 후광을 띠고 있어, 사람을 탄복하게 하는 강대한 매력을 드러냈다.정은은 무대 아래에 앉아 미리 준비한 공책을 꺼냈다. 그녀는 들으면서 펜으로 필기를 했다.이 강연에 정신을 집중한 게 분명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마찬가지로 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수지는 무대 위의 양복차림을 한 재석을 보면서, 그가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이미 홀딱 반했다.남자의 그 잘생긴 얼굴을 보며, 수지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듣지 못했다.지식은 흐르는 물처럼 수지의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새어나갔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수지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미 자신이 아직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오직 이 순간에만 수지는 거리낌 없이 재석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를 생각하며, 자신의 가장 진실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매 강의가 끝나면, 30분의 질문을 주고받는 시간이 주어진다.또한 포럼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항상 다툴 수 있었기 때문이다.예컨대 지금처럼.의문을 제기한 이는 국민대학교에서 생명과학과 물리학의 융합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교수, 도하빈이었다.“말씀처럼 전문성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물리학 같은 전공 중심 학문만 의미 있고, 융합이나 다학제 연구는 쓸모 없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06화

    ‘나만 짝사랑한 게 아니었어. 나만 스트레스와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어.’‘수지도 나와 마찬가지였어! 이건 수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거잖아!’한 사람을 사랑해야만 늘 열등감을 느낄 수 있고, 상대방과 어울릴 수 있도록 더 강한 자신을 만들려 할 것이다.“좋아.”태민은 갑자기 수지의 손을 잡더니 정중하게 약속했다.“수지야, 네가 원하는 거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와줄게.”수지는 이 일이 이렇게 쉬울 줄 몰랐다.J시로 돌아온 이튿날, 재석은 수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M시 융합연구 포럼에 참가할 준비를 하라고 통지했다.수지는 태민이 재석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또 어떻게 그녀가 조미진을 넘어 성공적으로 이 기회를 얻게 됐는지 몰랐다. 어차피 그녀도 이런 일에 흥미가 없었으니까.‘앞으로 3일, 마침내 교수님과 함께 지낼 기회가 생겼어!’원래 수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험실에서 그녀는 재석과 함께 감정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그러니 굳이 재석을 따라 이곳에 올 필요도 없었다.그러나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반년 동안 재석은 의도적으로 수지를 멀리했던 것이다.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재석은 수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따로 남게 된다면, 재석은 자꾸 그런 자리를 피하려 했고, 항상 수지와 같은 곳에 있는 것을 거절할 이유와 구실이 있었다.수지는 당황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불안해졌다.‘이러다가 교수님은 나와 점점 멀어질 거야. 더 이상 쟁취하지 않으면 아마도 기회가 없을 거라고.’그래서, 이번에 수지는 반드시 와야 했다.수지는 재석과 정은이 떠나는 방향을 보면서 주먹을 은근히 움켜쥐었다.어떤 결심을 한 것처럼 눈빛에 결단이 번쩍였다....이튿날, 융합연구 포럼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장소는 바로 호텔 옆의 회의실이었다.아침 8시, 초대 손님들이 속속 입장했다.9시, 포럼이 마침내 시작되었다.사회자가 단상에 올라 간단한 환영 인사를 전한 뒤, 본격적인 주제 강연 순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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