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과 현빈은 돌 탁자 앞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여자애는 표정이 엄숙했고, 남자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현빈의 입가에 나타난 미소를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먼 거리를 두고도 남자가 여자를 꼬시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했다.재석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다음 순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진욱에게 전화했다.[어, 재석아, 무슨 일이야?]“밀크티 마실래?”[어?]진욱은 핸드폰을 바라보더니 확실히 재석의 번호인 것을 확인했다.[무슨 일인데? 갑자기 무슨 밀크티야?]“마실 거야? 내가 살게.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봐.”진욱은 즉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조 교수님이 밀크티를 사겠다는데, 안 마시는 사람 손 들어! 좋아, 없군. 우리 모두 마실 거야.]“그래. 내가 사올게.”[아니... 그냥 배달시키면 되잖아, 아주 편리한데. 왜 직접 가서 사려는 거니?]“마침 밖에 있어서. 무슨 밀크티 마실 건데?”[어느 가게에 갈 거야?]재석은 아무 밀크티 가게의 이름을 하나 말했다.[난 스페셜 오레오 밀크티 마실래. 우유 추가하고 타로볼 넣어줘. 설탕과 얼음은 싫어. 참, 치즈 좀 많이 넣어달라고 해줘, 고마워. 미진아...]재석은 이마를 짚었다.“이거 너무 복잡해서 기억할 수가 없어.”진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장난해! 재석이 넌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기억력을 갖고 있잖아! 평소에 그렇게 복잡한 실험 데이터도 한 번 보면 머릿속에 기억할 수 있는데, 이게 복잡하다니?’“이거 정은이에게 보내. 나 방금 아래층에서 정은이 봤으니 우리 같이 사러 가면 되니까.”[알았어! 이거 좋네! 내가 바로 정은이에게 보낼게...]통화를 마친 후, 진욱은 머리를 숙이고 재빨리 타자를 했다.“됐어! 발송!”그리고 음성 문자를 보냈다.“그럼 우리 정은이가 고생 좀 해줘.”순간, 진욱은 멈칫했다.‘이건 아니지! 재석이 밀크티를 사러 갔으니, 재석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 더 편리하지 않
말하면서 정은은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그럼 먼저 갈게요.”현빈은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그래. 또 보자.”“네. 가요, 선배님. 그 밀크티 가게는 마침 우리 아파트 근처에 있어요. 이 길을 건너면 바로 도착할 거예요.”‘지난번에 심현빈 씨와 얘기할 때 갔었는데.’...“밀크티 왔어요!”미진, 진욱과 태민은 이 말을 듣고 얼른 달려왔다.“조 교수 고마워, 수고했어, 정은아!”“바쁜 두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니, 정말 미안해요!”진욱은 빨대를 꽂고 홀짝였다.“캬, 맛있네.”미진이 물었다.“그렇게 맛있어?”태민은 자신과 수아의 것을 가지고 웃으며 재석과 정은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수아 앞으로 달려갔다.“수아야, 이거 네 거야.”“아.”정은이 뜻밖에도 재석과 함께 밀크티를 사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마음이 내려앉더니 입맛이 사라졌다.하필 태민은 옆에서 계속 수아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수아야, 너 왜 안 마셔?”“이따 크림이 녹으면 맛이 없을 거야.”“자, 내가 빨대 꽂아줄게.”수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정말 짜증 나네요! 계속 중얼중얼거리다니! 제발 부탁하는데, 말 좀 줄이면 안 돼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자리를 떴다.태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입도 마시지 않은 수아의 밀크티를 보았다.“아까 물어볼 땐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는데.”‘왜 사왔는데 오히려 한쪽에 던진 거지? 이건 낭비 아닌가?’아마도 태민은 영원히 수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두 사람의 차이였다. 이런 차이는 학력과 사상에서 생기는 게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자란 환경, 가정의 교육방식이 가져다준 천연적인 차이였다.수아가 거절하지 않은 것은 밀크티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밀크티를 산 사람이 재석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그녀는 신선한 공기 좀 마시려고 복도에 나왔다.마침 핸드폰이 울렸고 수아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 수아야, 지난번에 집 좀 구해달라고 했잖아, 내가 이
“수아야?” 태민은 다시 한번 수아를 불렀다.“왜요?” “방금 부동상에게 연락해서 집을 구하고 있었던 거야?”수아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태민이 계속 물을까 봐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뭘 그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선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태민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난 네 남자친구잖아, 그러니 널 관심하는 것도 당연하지.”“내 남자친구예요 아니면 내 아빠예요? 잔소리가 왜 그렇게 많아요?”“내가 너무 잔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말 줄일게.”태민은 수아가 자신 때문에 불쾌할까 봐 무척 조심스러웠다.그가 더 이상 집을 구하는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자, 수아는 은근히 한숨을 돌리며 말투도 누그러졌다.“이거 줘요.”그녀는 손을 내밀었다.“어?”“손에 있는 그 밀크티 말이에요, 저한테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에요?”“어, 맞아! 깜박할 뻔했네...”태민은 웃으며 말했다....또 실험실에서 일주일을 보내자, 정은은 두 조의 데이터를 완성했다.마침내 진도를 따라잡은 셈이었다.토요일, 정은은 자신에게 휴가를 주었다.“정은 씨, 오랜만이에요. 이미 날 잊은 거예요?”수민은 페라리 오픈카를 몰고 그녀의 곁에 멈추었다.창가에 손을 얹고 선글라스를 벗으니 예쁘고 고운 눈이 나타났다.바람은 수민의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불었고, 검은색 점프슈트에 개성 있는 허리띠를 하니 시크하면서도 멋있어 보였다.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며 안전벨트를 맸다.“내가 어떻게 감히 널 잊어버리겠어? 누굴 잊어도 우리 여왕님을 잊어서는 안 되지.”수민은 하얗고 여린 정은의 얼굴을 비볐다.“이주 동안 보지 못했는데, 꿀을 먹은 거야? 말을 어쩜 이렇게 잘할까?”“꿀을 먹을 필요가 없어. 나 원래 달콤해.”“네, 네! 네가 제일 달콤하네요. 자, 이 여왕님이 맛있는 거 사줄게!”“그래!”“정은아, 넌 너무 얌전한 거 아니니? 내가 남자라면 바로 너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거야!”‘그럼 강도겸 그 찌질
그때 술에 취한 얘기를 꺼내자, 수민은 어색하게 코를 만졌다.“다 우리 엄마 탓이야. 굳이 그 무슨 연회에 가라고 하신 거 있지? 가 보니까 맞선 파티였던 거야.”젊은이들은 마치 물건처럼 사람들의 지적을 받았고, 마음에 들면 번호를 교환했다.백지영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걱정이 많아서 탓이었다.집안이 좋지 않으면 틀림없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도 다 겪어봐서 하는 말이다, 돈이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결국 불행해질 것이다.수민은 이런 말만 들으면 짜증이 났다.지난번에 돌아간 후, 그녀는 백지영과 약속을 했다. 재벌 집안 도련님을 찾아도 되지만 사람은 자기가 골라야 한다고.이 조건으로 백지영은 앞으로 더 이상 수민에게 소개팅이나 맞선 파티를 주선할 수 없었다.정은이 물었다.“너 혼자 선택한다고?”“그래, 어차피 집안 형편이 그리 나쁘지만 않으면 우리 엄마는 다 받아들일 수 있거든. 그럼 그냥 J시의 재벌 집 도련님들 중에서 고르면 되지!”“진심이야?”정은은 눈을 깜빡였다.수민은 연하남을 좋아했다. 재벌 집안의 남자들은 연하도 적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잘 듣고, 그녀를 달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녀를 받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출신이 우월하면 자연히 일반인보다 오만할 것이다. 모두들 재벌 집안의 도련님 아가씨였으니 그들은 절대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수민을 달래려 하지 않을 것이다.수민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골라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엄마 또 잔소리를 할걸. 하지만 난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협력 파트너를 고르는 거야.”“파트너?”“그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집안에서 일찍 결혼하라는 강요를 당하기 일수거든. 집안의 안배를 원하지 않은 이상, 서로 협력을 하는 거지.”“어떻게 협력할 건데?”“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를 하고, 사람들 뒤에서는 각자들끼리 노는 거지!”이렇게 하면 집안사람들도 안심할 수 있고, 매일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엄호를 빌어 밖에서 자유자재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을 나섰다.“오빠, 인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그 늙은이들이 오빠를 둘러싸고 있으니까 꼭 팬들이 아이돌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잖아요.”“아이돌?”“그러니까 연예인이요.”재석은 담담하게 웃었다.“이익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야. 연예인은 무슨.”수민은 냄새를 맡았다.“오빠 술 마셨어요? 운전하고 온 거예요?”“술 좀 마셨지만 차는 안 갖고 왔어.”“잘됐네요, 그럼 차에 타요. 내가 오빠와 정은이 데려다줄게요.”수민의 차는 골목 앞에 세워졌고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정은과 재석은 차에서 내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달은 휘영청 밝았고 별이 보이지 않았으며 밤바람은 무척 부드러웠다.조용한 골목에서 가끔씩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재석은 실수로 쓰레기 봉투를 밟았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그는 걸을 때 좀 비틀거렸다.“괜찮아요?“미안, 오늘 저녁에 술 좀 많이 마셨어.”술기운 때문에 정은이 불편할까 봐 재석은 일부러 두 사람의 거리를 벌리기도 했다.미안하다는 말이 재석의 입에서 나오자, 정은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 말에 진심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전에 도겸도 늘 술을 마셨고 툭하면 취했지만, 그는 종래로 정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사람과 사람은 정말 다르구나.’전에 정은은 남자들이 모두 도겸, 선우, 동건처럼 퇴근하면 술집에 가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아니면 소진헌처럼 성격이 부드럽고 착실한 일반인이라든가.그러다 그녀는 재석을 만났다.그는 뭇별들에 둘러싸인 달이었고, 도도한 존재였지만 오만하거나 까칠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하고 차분했다.자신을 단속하는 것과 자신을 방임하는 것, 성공과 오만은 결코 필연적인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재석은 방종하고 구속받지 않은 삶을 살 자격이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엄밀하고 자제했다.정은은 의혹을 느꼈다.“교수님들도 접대가 필요한 거예요?”“사회에 처해 있으니, 우리도 인정이 오고 가는 것을 중시하
정은은 처음으로 한 사람을 동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이런 복잡한 감정이 바로 강자를 숭배하는 마음이란 것을 몰랐다....수민은 두 사람을 집으로 데려다준 뒤, 다시 술집으로 찾아갔다.가는 길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술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려 할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펑!뒤에서 마세라티 한 대가 나타났는데, 마침 그녀의 차를 들이받았다.수민은 화가 났다.문을 세게 닫으며 직접 상대방의 차 앞으로 달려갔다.“야, 넌 운전할 줄도 모르는 거야?!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몰라?! 이런 곳에서 그렇게 빨리 운전하는 것도 모자라 길까지 보지 않다니? 난 아직 안으로 주차하지도 않았는데, 넌 눈이 없는 거야 뭐야?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내 차와 충돌할 수가 있는 거냐고?!”마세라티 운전석의 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웃으며 내려왔다.“아, 난 또 누구라고. 이런 일 가지고 왜 화를 내고 그래?”동건은 히죽거리며 수민 앞으로 걸어갔다.“허, 너였구나, 우리 고동건 도련님.”그녀는 일부러 동건을 비아냥거렸다.동건은 페라리의 상황을 체크했다.‘어... 확실히 좀 심각하네.’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에이, 큰 문제가 아니네. 방금 속도가 좀 빠른 데다가 주의하지 않아서 널 들이받은 것일 뿐이야.”“날 들이받았다고?” 수민은 눈을 부라렸다.“말 좀 똑바로 해.”“에헴! 네 차를 들이받았어, 됐지?”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내 책임이라 치자. 보험회사에게 전화해서 네 차를 수리하라고 할게.”“네 책임이라 치자고? 이거 원래 네 책임이잖아! 네가 보험회사에게 연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내가 한동안 차를 몰지 못하게 됐잖아...”“우리 조수민 아가씨의 차고에 차가 많을 텐데? 웃기고 있네!”수민은 동건과 말하기 귀찮아서 차 키를 던졌다.“난 아직 다른 일 있으니까 너한테 맡길게.”말을 마치고 바로 술집에 들어가려고 했다.바로 이때, 한 여자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동건의 얼굴을 향해 따귀 한 대 때렸다.찰싹
여자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동건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가 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사랑의 고통? 허, 내가 어떻게 그런 고통을 받겠어!’여자가 떠나자마자 술집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한 젊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하얗고 긴 다리에 곱슬머리를 뒤로 한 그녀는 정교한 화장을 하고 있어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동건 도련님...”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다가왔다. 남자가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동건은 즉시 몸을 피했다.긴 팔을 뻗더니 오히려 수민의 허리를 안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옆에서 한창 재밌게 지켜보던 수민은 깜짝 놀랐다.동건은 고개를 들어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미안, 넌 너무 늦게 왔어.”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원망에 찬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투덜대며 가버렸다.“방금 날 이용한 거야?” 수민은 두 팔을 안고 냉소를 지었다.“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동건은 원래 손을 떼려고 했지만, 수민이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그러고 싶지 않았다.“싫어, 네가 뭘 어쩔 건데?”수민은 화가 나서 되려 웃었다.“나랑 놀자 이거야? 그래.”동건은 수민의 사악한 웃음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여자는 그의 팔을 잡고 한바퀴 돌렸다.“아! 아파, 아프다고!” 남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앞으로 계속 이럴 거야?”“아니, 내가 잘못했어! 빨리 놔줘, 내 팔이 부러질 것 같단 말이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쫄긴...”말을 마치고 수민은 바로 힘을 풀었다. 그러나 동건을 놓아주는 대신 오히려 그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놓았다.동건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민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제 이 손 좀 치워 줄래? 고마워.”남자는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정말 화가 나네. 내 손을 원래의 위치에 올려놓은 다음 다시 치우라고 하다니? 받는 대로 되갚는 스타일이군.’ 마치 부모님이 넘어진 아이에게 제자리에서 얼른 일어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동건은 어린이
‘그래도 난 그 진씨 가문의 자식보다 훨씬 낫지.’수민은 자신감 넘치며 허세를 떨고 있는 동건을 바라보더니 눈빛이 좀 이상했다.“정말 나와 합작하고 싶어?”“물론이지. 그 눈빛은 또 뭐야? 누굴 무시하는 거야?”수민은 동건을 위아래로 여러 번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고씨 가문은 J시의 8대 호족 중 하나로, 진씨 가문보다 훨씬 훌륭했다.‘방금 여자가 자신의 뺨을 때려도 반격하지 않았어. 정서가 안정되고 나름 매너가 있는 셈이지. 비록 바람둥이인 데다가 스캔들도 많지만, 난 진짜 연애하고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게다가... 바람둥이라면 나도 마찬가지야! 잘됐네! 서로 간섭할 필요가 없어! 클럽에서 부딪치면 같이 놀 수 있을지도 몰라.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남자가 깔끔하게 여자와 헤어진다는 거지.’‘좀 찌질하긴 하지만 이렇게 보면 절대로 집적대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앞으로 우리 갈라져도 나한테 매달릴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수민은 보면 볼수록 두 사람 아주 잘 맞다고 생각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동건이 마음에 들었다.“그래, 그럼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할까?”동건은 가볍게 흥얼거렸다.“흥,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수민은 흐뭇하게 웃었다.“뭐해? 얼른 들어가지 않고.” 그녀는 동건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아!” 동건은 비틀거렸다.‘이 여자는 왜 툭하면 손을 쓰는 거야? 조금도 부드럽지가 않아.’...손자가 없어진 일로 서영숙은 이틀 동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딱 그 이틀뿐이었다.서연희를 챙겨줄 필요가 없고, 심지어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서영숙은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모임에 나가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이날, 다른 집안의 부인이 티파티를 준비했다.품질이 아주 좋은 차와 정교하고 맛있는 과자가 탁자에 놓여 있었다. 서영숙은 샤넬이 새로 출시한 기성복을 입은 채로 부드럽고 편안한 가죽 소파에 앉아 음악을 즐기면서 다른 부인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송지혜가 말했다. “가서 말해 봐. 내가 처분을 받으면, 너도 졸업할 수가 없을 거야!”“누가 못 갈 줄 알아요?”“강서정, 너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때 넌 어떻게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더라?”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송지혜는 가볍게 웃었다.“너 원래 시험에서 떨어졌잖아. 만약 내가 널 봐주지 않았다면, 넌 네가 오늘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그래, 가서 고발해. 나도 널 막지 않을게. 죽으면 같이 죽자고. 내가 학교에서 해임을 당하면, 부정한 수단과 뇌물을 주고 들어온 학생들도 같이 쫓겨나겠지.”서정은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정말 악독한 분이시군요!”“악독해?” 송지혜는 피식 웃었다. “너도 마찬가지야.”과제 가산점이 없으니 서정의 기말 성적은 정말 비참했다.세 과목이 F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타 전공 과목도 대부분 C를 받았다.이 성적은 남의 웃음거리로 될 게 뻔했다.‘신진호 저 앞잡이조차도 나보다 시험을 잘 봤잖아!’매번 서영숙이 기말 성적을 물어볼 때마다 서정은 우물쭈물 했고, 정말 숨길 수 없게 되자 사실대로 말했다.서영숙은 학력뿐만 아니라 성적까지 무척 중시했다.그녀의 딸은 이미 서비대학교에 합격했으니 이미 매우 우수했다. 그러니 시험 따위도 다 잘 볼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날 죽일 작정인 거야?!”서정은 매우 당황하여 아무 핑계를 댔다.“이번 기말 시험 정말 어려웠단 말이에요! 시험을 잘 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만 낮은 점수를 받은 게 아니라고요.”“소정은은?”서정은 말문이 막혔다.“말해!”“전부 A 받았어요.”서영숙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지예도 요즘 일이 잘 안 풀렸다.송지혜가 너무 까다로웠던 것이다.그녀 앞에서 이미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그래도 욕을 먹어야 했다.욕을 먹어도 울지 못했다.친이모였지만 지예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게다가 학술 성적까지 없어졌다.실험실이 정돈되었기에 지예도 진일의 논문을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하지
게다가 송지혜 명의로 된 실험실은 소방 점검 불합격으로 인해 시정서까지 받았다.물론 지금까지 아직 시정을 통과하지 못했다.그러니 그동안 그 어떤 학술적 산출도 없었다.이 때문에 정례 회의에서, 송지혜 팀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진호는 예전에 남을 비웃으며 언제든지 일어서서 사람을 물어뜯을 수 있는 들개와 같았지만, 지금은 여느 때보다 더 조용했다.서정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실험실이 정돈되었기에 그녀가 전에 힘들게 송지혜에게서 쟁취한 과제도 물거품이 되었다.송지혜에게 다른 과제를 안배해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엄청난 욕을 먹었다.“과제! 그놈의 과제! 나도 과제를 원한다고! 지금 실험실은 시정서를 받았으니 아무런 과제도 진행할 수 없잖아.”“그러니 내가 어떻게 과제를 얻어오겠어?! 게다가, 설령 나한테 과제가 있다 하더라도, 넌 그 진도를 따라갈 수 있다고 확신하니?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냐고?”“그럴 능력이 없으면 과제를 넘볼 생각하지 마. 사람은 자기 주제를 잘 알아야 해! 모든 대학원생이 학술을 하기에 적합한 것도 아니고.”“모든 사람이 성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자신이 학술 천재라고 생각하는 거야? 넌 네가 소정은보다 더 잘난 거야?!”끊임없이 쏟아지는 욕설, 송지혜는 서정의 얼굴에 침까지 튀겼다.다행히 서정은 빨리 피했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교수님, 애초에 저에게 사비로 기계를 사라고 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잖아요. 이것만 똑똑히 아셨으면 좋겠어요. 과제팀에 들어가는 이 일, 저는 교수님에게 부탁하는 것도, 상의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건 완전한 거래라고요.”“저는 돈을 내고, 교수님은 그 보답으로 저에게 과제를 주시는 거죠. 이건 우리 서로가 윈윈하는 거래잖아요. 지금 저는 돈을 냈지만 교수님은 오히려 약속을 어기셨죠. 장사를 이렇게 하시면 안 되죠.”서정은 더 이상 송지혜란 사람을 존중하지 않았다.그녀는 권세나 재물에 눈이 멀고 돈이나 탐내며 속이 좁은 학술 깡패로서, 학생들이 존경할
정은은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있어! 당연히 있지! 네가 대신 전해 줄래?”“좋아요!”정은은 또 몇 캔을 꺼내 민지의 차에 놓았다.“헤헤, 정은 언니 짱!”“너와 서준이도 짱인 것 같아.”말을 마치고 정은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끌고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민지는 정은의 말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하고, 기뻐하며 핸드폰을 꺼냈다.“어! 쮼! 너 지금 아파트에 있어? 내가 육포와 소고기 소스 보내줄게! 그래... 정은 언니가 준 거야.”맞은편의 서준이 대답했다. “그래, 이리 와.”[오케이! 20분 후에 도착할 거야.]“응.”전화를 끊고 서준은 가장 빠른 속도로 아래층으로 뛰어내려 가더니 외투를 입고 신발을 갈아 신었다.“할머니, 오늘 점심은 나가서 먹을게요. 저녁... 저녁에도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어디 가는 거야?”“아파트예요!”“어? 오늘은 여기 남아서 밥 먹기로 했잖아?”서준은 이미 문을 밀고 나갔는데, 이 말을 듣고 목청을 돋우며 대답했다.“다음에 먹을게요!”“얘도 참... 무슨 일인데 그리 성급한 거야...”...정은은 아래층에 멈춰 서서 잠시 쉬려고 했다.그리고 묵묵히 손에 든 상자를 보더니, 또 고개를 들어 7층을 바라보았다. ‘이따 한 번 더 내려올까?’이렇게 궁리하고 있을 때, 옆에는 이미 누군가가 정은의 크렁크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어?”정은은 멍해졌다.재석은 뒤에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하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안 올라오고 뭐해?”정은은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으며 쫓아갔다.“가요.”남자는 그렇게 큰 트렁크를 들고도 쉽게 7층까지 올라갔는데, 숨조차 헐떡이지 않았다.이런 여유로운 모습을 보며 정은을 정말 부러웠다.“고마워요, 선배님.”재석은 트렁크를 내려놓고 정은에게 문을 열라고 했다.“안으로 들어가자. 이거 무거워서 너 못들어.”정은은 빨리 열쇠를 꺼냈다.문이 열리자 그녀는 재석을 안으로 초대했다.남자는 익숙하게 슬리퍼를 갈아 신고 트렁크를 거실에
특히 봉수진은 요 며칠 별장에 있으면서, 눈도 좋아졌고 허리도 아프지 않았다.하루 종일 웃으며 뭘 먹어도 맛있었다.이춘재는 더욱 집안의 홈닥터와 운전기사, 경호원을 모두 불렀는데, 오래 지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이미숙은 소진헌이 익숙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그러나.“그럴 리가! 어머님은 나와 함께 꽃을 가꾸시며 채소까지 심으시고, 아버님은 나와 함께 바둑까지 두실 수 있잖아.”겨울방학이라 그는 할 일이 없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미숙은 대부분 서재에서 키보드를 두드렸으니, 이번에는 채소를 같이 심을 친구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바둑 친구까지 찾았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군.’“헤헤.”정은은 이틀 동안 지내다 사흘 만에 J시로 돌아왔다.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실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논문은 반드시 설 전에 완성해야 했다.소진헌은 온 천하의 부모님처럼, 딸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정은의 트렁크에 맛있는 것을 엄청 많이 챙겨줬는데, 모두 그가 직접 만든 소고기 소스와 육포였다.그리하여 정은은 홀가분하게 돌아왔지만, 떠날 때 짐이 많아졌다.민지는 이 소식을 듣고, 진작에 자신이 새로 산 BMW를 몰고 열차역에 와서 정은을 마중했다.그렇다, 민지도 차를 샀던 것이다.하정남은 원래 그녀에게 페라리를 사주려고 했는데, 차종까지 모두 결정했다.그는 차를 모르지만, 돈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비싸면 좋은 차였으니까.하지만 민지는 완곡하게 거절했다.“학생은 학생다워야죠,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면 안 돼요!”결국 민지는 혼자 매장으로 달려가 BMW를 뽑았고, 심지어 성가비를 가지고 있는 차종이었다.당시 서준이 그녀와 함께 가서 골랐다.카드를 긁고 민지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쮼, 나 살림 정말 잘 하지?”서준이 말을 하려고 할 때, 민지는 계속해서 말했다.“너도 좀 배워.”그래서 이 말이 중점이었다.서준은 침묵했다.“참, 너도 한 대 사지 그래? 아파트에서 실험실로 가려면 아주 멀잖아
‘뺏으라고?’현빈은 웃음이 나왔다.“그래도 뺏을 수가 있어야죠.”“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빼앗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거야?”“왜요? 이모를 뺏으려고요? 쳇. 우선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나서서 막으실 거예요.”심정훈은 이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 잠시 후, 예리한 눈빛으로 현빈을 바라보았다.“도대체 어떤 여자가 널 차버렸는데? 말해 봐?”현빈은 말을 하지 않았다.“아까 말 잘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침묵하는 거야?”“말해도 모르시잖아요.”심정훈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잔을 들었다.“자, 우리 부자끼리 모처럼 모였으니 한 잔 하자.”짠.잔이 맞부딪치자, 두 사람은 각자의 걱정거리를 삼켰다.달은 중천에 떠 있었고, 밤은 점점 깊어졌다.현빈은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오히려 심정훈은 술을 많이 마셨지만, 취기가 전혀 없었고 술을 따를 때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외모가 우월하고 기질이 출중한 두 남자가 함께 모여 울적하게 비싼 술을 마시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이쪽을 훑어보았다.현빈은 갑자기 술잔을 내려놓았다.“아버지, 어떤 방법으로 한 여자가 주동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요?”심정훈이 입을 열기도 전에 현빈은 또 손을 흔들었다.“됐어요, 아버지한테 물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네요. 아버지 자신도 해결하지 못했으니까.”‘역시 내 아들답네, 정곡만 골라서 찌르다니.’새벽 1시가 되어서야 부자는 술집을 떠났다.현빈은 이미 취했고, 심정훈은 나름 괜찮은 편이기 때문에 그를 호텔로 데려다줘야 했다.“딸꾹! 아버지, 왜 여기에 계세요?” 방에 들어서자마자 현빈은 잠에서 깨어나더니 갑자기 똑바로 섰다.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심정훈은 어이가 없었다.‘이 자식이 1분이라도 일찍 깨어났다면 혼자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일부러 날 부려먹은 거야?’현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아, 저를 데리고 호텔로 오신 거예요?”“하지만 저는 이제 여자 데리고 놀지 않으니
”아니, 이 남자가 그렇게 대단해? 술집에 와서 술 마시는데 경호원까지 데려오다니?”“누가 알겠어.”...현빈은 일부러 경호원에게 가까이 서서 지키라고 했고, 주위는 마침내 조용해졌다.그는 또 술 한 잔 가득 채웠다.그러나 어젯밤처럼 들이키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며 담담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이때, 현빈은 멈칫하더니 눈빛은 멀지 않은 부스 위에 떨어졌다.‘쯧쯧!’심정훈은 누군가의 눈빛을 알아차리고 그곳을 바라보았는데, 뜻밖에도 아들과 눈을 마주칠 줄이야.분위기는 어색해졌다.부자는 동시에 눈을 뗐다.현빈은 생각을 하더니 술병을 들고 심정훈의 옆에 가서 털썩 앉았다.“아, 술 마시러 오셨어요?”심정훈은 담담하게 현빈을 보았다.“무슨 쓸데없는 말을 묻는 거야. 술집에 와서 술 안 마시면? 영화라도 보라고?”“그런데 넌 또 무슨 상황이야?”심정훈은 현빈을 살펴보더니, 내색하지 않고 그의 손에 있는 절반 비어 있는 술병을 보았다.“담배와 술을 끊었다고 하지 않았니?”반년 전, 현빈은 갑자기 술과 담배를 끊겠다고 했는데, 심정훈은 당시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뒤에 그가 정말 그렇게 한 것을 보고, 심정훈은 깜짝 놀랐다.‘그런데 얼마 만에 본색이 드러났지?’현빈은 씁쓸하게 웃었다.“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끊을 필요가 있을까요?”심정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의 말을 알아차렸다.“여자에게 차였어?”정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현빈은 말이 없었다.“허, 진짜 차였어? 재밌네.”“저만 그래요? 아버지도 마찬가지시잖아요.” 현빈은 피식 웃었다. ‘누가 빈정거리래?’심정훈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하룻밤 사이에 S시에서 달려오셨다니, 액셀에서 연기라도 나지 않았어요? 신호등은 몇 번이나 위반하셨죠? 운전면허증은 아직도 갖고 계신 거예요?”심정훈은 말문이 막혔다.“아버지도 참...”현빈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이렇게 필사적으로 무슨 일을 하실 줄
지금의 심정훈과 이미숙은 이미 과거의 죽마고우가 아니었다.그들은 각자 결혼을 하여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어렸을 때 우리 커서 뭘 해야 할지 소원을 빌었던 거 기억나?” 심정훈이 먼저 침묵을 깼다.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하죠. 형부는 천문을 좋아했으니, 졸업 후에 나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잖아요.”남자는 웃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함을 띠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자신이 정말 어리석고 멍청한 것 같아. 꿈은 꿈이 아니라 손에 닿을 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지. 그러나 난 결국 심씨 가문을 물려받았고, 부모님이 원하는 후계자가 되었어.”이미숙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난 뉴스를 본 적이 있어요. 심씨 가문은 지금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이미 20년 전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존재로 거듭났잖아요. 형부는 아주 큰 성공을 거뒀어요.”‘하지만 난 널 잃었어...’심정훈은 입을 벌렸으나 결국 그 말을 삼켰다.곧이어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발생한 일을 돌이켜 말했다.말하면서 저도 모르게 약간 넋이 나갔고, 자신이 결국 이미윤과 결혼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말할 때 은근히 망설였다.고개를 돌려 이미숙의 잔잔한 눈빛을 보자, 심정훈은 갑자기 물었다.“넌?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지? 그때 나와 아버님, 어머님은 모두 네가 외국에 버려졌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가장 외진 N국까지 찾아갔어. 그러나 전혀 네 소식이 없었고. 그런데 네가 뜻밖에도 L시에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이미숙은 심정훈을 오빠처럼 여겼기에, 그의 질문에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했다.그녀가 하룻밤 내내 강에서 떠다니다가 구조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미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심정훈은 여전히 마음이 조여들었다.이미숙은 그런 심정훈을 보며 웃었다.“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나는 지금 잘 지내고 있고요.”심정훈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겉으로 보기엔 심정훈은 가정이 원만하고, 우수하고 뛰어난 아들이 있고
심정훈은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내가 하면 돼요...”“뭘 사양하시고 그래요? 다 가족이잖아요.”심정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진헌은 이미 그의 그릇에 밥 두 숟가락 떠주었다.“여보, 제부 얼마나 세심한지 좀 봐요? 어쩐지 우리 미숙이 마음에 들었더라니.” 이미윤은 미소를 지었지만 남편을 바라보는 눈빛은 비웃음으로 가득했다.심정훈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으면서 전혀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이미윤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지만, 또 내색할 순 없어 끊임없이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쉬며 억지로 참았다....점심을 먹고 소진헌은 그릇과 젓가락을 치웠고 정은이 도왔다.이미숙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부녀가 설거지를 하자 자신은 식탁을 닦으며 과일을 깎았다.두 노인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현빈은 다 먹고 나서 볼일이 있다며 떠났기 때문에 지금은 심정훈과 이미윤 부부밖에 없었다.봉수진은 그제야 입을 열어 물었다.“정훈아, 네가 미숙이 집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당연히 제가 알려줬죠.” 이미윤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봉수진은 의아하게 그녀를 보았다.“어머니, 그게 무슨 눈빛이세요? 미숙이를 찾았으니, 정훈 씨는 형부로서 당연히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물며 그동안 미숙이를 찾기 위해 정훈 씨도 엄청 힘을 썼잖아요!”“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그렇지 않으면 제가 또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두 사람 예전의 관계? 지금 다시 만난 이상, 다시 옛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하고 의심을 해야 하나요?”이춘재와 봉수진의 안색이 동시에 변했다.심정훈의 눈빛은 순식간에 극도로 차가워졌다.“이미윤, 말 똑바로 해! 주의 좀 하라고!”“난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떠들지도 않았는데, 말을 똑바로 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정훈 오빠~ 이렇게 불려야 마음에 드는 거예요?”“정말 억지를 부리는군!”이미윤도 화가 나지 않았다. 이미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두 노인을
기억은 마치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소년과 소녀는 20대였고, 눈에는 서로밖에 없어, 누군가 먼저 고백을 하면 인연이 정해질 수 있었다.심정훈은 가슴이 두근거리더니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미숙이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내 정신 좀 봐... 이제 형부라고 불러야겠죠? 소개할게요. 내 남편 소진헌이에요.”‘형부’, ‘남편’이란 말에 심정훈은 숨이 멎었다.그러자 이미숙 옆에 있던 남자에게 시선이 떨어졌다.소진헌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열정적으로 심정훈을 자리에 앉혔는데, 또 그를 위해 깨끗한 그릇과 젓가락을 가져왔다.심정훈은 입가를 실룩거렸지만 결국 고맙다는 인사밖에 하지 못했다.소진헌의 요리 솜씨는 원래 괜찮았는데, 오늘 더욱 신경을 썼다.그러니 맛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아니나 다를까, 두 노인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식사하는 도중, 소진헌은 이미숙과 정은을 돌보았는데, 세심하게 아내를 도와 새우를 까주었고, 정은에게 집어준 음식도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였다.정은은 작은 산처럼 쌓인 그릇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말했다.“아빠, 저 아직 다 못 먹었어요.”“나한테도 집어주지 마요. 남으면 당신이 다 먹을 거예요?”“그럼.”소진헌은 웃으며 대답했다.평소에 이미숙이 음식을 남기면 전부 소진헌이 해치웠다.소진헌은 오히려 습관이 되어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지만, 남들은 그렇지 않았다.심정훈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이미윤은 비아냥거리며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지금 사랑을 과시하고 있는 거야?’현빈은 열심히 밥을 먹고 있었는데, 너무 진지해서 주위의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오히려 이춘재와 봉수진은 참지 못하고 눈을 마주쳤다.전에는 소진헌이 이미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바보 사위가 ‘괴롭힘’을 당하면서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소진헌이 이미숙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러나 소진헌은 여전히 허허 웃으며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정말 단순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