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30분, 정은은 실험실에 도착했다.다른 사람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때 휴식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발자국 소리와 함께 재석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시선이 마주치자, 두 사람 모두 멍해졌다.재석은 자신이 어제 황급히 도망친 것을 생각하니 표정이 좀 부자연스러웠다.정은은 무심코 본 그 장면과 자는 척한 자신을 회상하며 마찬가지로 어색함을 느꼈다.“좋은 아침.”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얼른 자신의 실험대로 가서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심지어 가져온 도시락을 냉장고에 넣는 것을 잊어버렸다.“마침 탕비실에 가려던 참인데, 내가 냉장고에 넣어 줄게.”“고마워요, 선배님.”점심시간, 정은은 실험실을 떠났다.강의동을 나서자마자 그녀는 현빈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남자는 셔츠를 입었는데, 옷깃이 약간 열려 있는 데다가 양복 바지까지 더하니 나른할 뿐만 아니라 또 도도해 보였다.“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어요?” “나도 금방 도착했어.”“성 교수님에게 무슨 일 있는 거예요?”남자는 서류 하나를 꺼내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이건 성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낸 기말고사에 시험지야. 교수님은 게으르셔서 쓰고 싶지 않으니 나더러 문제를 푼 다음, 참고 답안까지 하나 더 내라고 하셨어. 그럼 대학원 학생들에게 채점하라고 맡길 수 있으니까.”성달수는 일을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고, 전부 현빈에게 떠넘겼다.그러나 이것은 가장 지나친 일이 아니었다. “난 문제도 다 풀었고, 참고 답안까지 냈는데 글쎄 안심할 수 없다며 네가 대신 검사를 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한 게 틀릴 수도 있다면서!”이 문제들은 모두 지난번에 정은이 낸 것이었다.성달수는 이렇게 말했다.“정은이 자신이 낸 문제를 검사하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나 정말 똑똑하다니깐!’현빈이 물었다.“그럼 교수님이 스스로 검사해 보시면 되잖아요?”성달수는 잠시 생각했다.
정은과 현빈은 돌 탁자 앞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여자애는 표정이 엄숙했고, 남자는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현빈의 입가에 나타난 미소를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먼 거리를 두고도 남자가 여자를 꼬시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했다.재석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다음 순간, 그는 핸드폰을 꺼내 진욱에게 전화했다.[어, 재석아, 무슨 일이야?]“밀크티 마실래?”[어?]진욱은 핸드폰을 바라보더니 확실히 재석의 번호인 것을 확인했다.[무슨 일인데? 갑자기 무슨 밀크티야?]“마실 거야? 내가 살게.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봐.”진욱은 즉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조 교수님이 밀크티를 사겠다는데, 안 마시는 사람 손 들어! 좋아, 없군. 우리 모두 마실 거야.]“그래. 내가 사올게.”[아니... 그냥 배달시키면 되잖아, 아주 편리한데. 왜 직접 가서 사려는 거니?]“마침 밖에 있어서. 무슨 밀크티 마실 건데?”[어느 가게에 갈 거야?]재석은 아무 밀크티 가게의 이름을 하나 말했다.[난 스페셜 오레오 밀크티 마실래. 우유 추가하고 타로볼 넣어줘. 설탕과 얼음은 싫어. 참, 치즈 좀 많이 넣어달라고 해줘, 고마워. 미진아...]재석은 이마를 짚었다.“이거 너무 복잡해서 기억할 수가 없어.”진욱은 눈이 휘둥그레졌다.‘장난해! 재석이 넌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기억력을 갖고 있잖아! 평소에 그렇게 복잡한 실험 데이터도 한 번 보면 머릿속에 기억할 수 있는데, 이게 복잡하다니?’“이거 정은이에게 보내. 나 방금 아래층에서 정은이 봤으니 우리 같이 사러 가면 되니까.”[알았어! 이거 좋네! 내가 바로 정은이에게 보낼게...]통화를 마친 후, 진욱은 머리를 숙이고 재빨리 타자를 했다.“됐어! 발송!”그리고 음성 문자를 보냈다.“그럼 우리 정은이가 고생 좀 해줘.”순간, 진욱은 멈칫했다.‘이건 아니지! 재석이 밀크티를 사러 갔으니, 재석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 더 편리하지 않
말하면서 정은은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그럼 먼저 갈게요.”현빈은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그래. 또 보자.”“네. 가요, 선배님. 그 밀크티 가게는 마침 우리 아파트 근처에 있어요. 이 길을 건너면 바로 도착할 거예요.”‘지난번에 심현빈 씨와 얘기할 때 갔었는데.’...“밀크티 왔어요!”미진, 진욱과 태민은 이 말을 듣고 얼른 달려왔다.“조 교수 고마워, 수고했어, 정은아!”“바쁜 두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니, 정말 미안해요!”진욱은 빨대를 꽂고 홀짝였다.“캬, 맛있네.”미진이 물었다.“그렇게 맛있어?”태민은 자신과 수아의 것을 가지고 웃으며 재석과 정은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수아 앞으로 달려갔다.“수아야, 이거 네 거야.”“아.”정은이 뜻밖에도 재석과 함께 밀크티를 사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마음이 내려앉더니 입맛이 사라졌다.하필 태민은 옆에서 계속 수아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수아야, 너 왜 안 마셔?”“이따 크림이 녹으면 맛이 없을 거야.”“자, 내가 빨대 꽂아줄게.”수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정말 짜증 나네요! 계속 중얼중얼거리다니! 제발 부탁하는데, 말 좀 줄이면 안 돼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자리를 떴다.태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입도 마시지 않은 수아의 밀크티를 보았다.“아까 물어볼 땐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는데.”‘왜 사왔는데 오히려 한쪽에 던진 거지? 이건 낭비 아닌가?’아마도 태민은 영원히 수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두 사람의 차이였다. 이런 차이는 학력과 사상에서 생기는 게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자란 환경, 가정의 교육방식이 가져다준 천연적인 차이였다.수아가 거절하지 않은 것은 밀크티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밀크티를 산 사람이 재석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다.그녀는 신선한 공기 좀 마시려고 복도에 나왔다.마침 핸드폰이 울렸고 수아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 수아야, 지난번에 집 좀 구해달라고 했잖아, 내가 이
“수아야?” 태민은 다시 한번 수아를 불렀다.“왜요?” “방금 부동상에게 연락해서 집을 구하고 있었던 거야?”수아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태민이 계속 물을까 봐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뭘 그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선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태민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난 네 남자친구잖아, 그러니 널 관심하는 것도 당연하지.”“내 남자친구예요 아니면 내 아빠예요? 잔소리가 왜 그렇게 많아요?”“내가 너무 잔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말 줄일게.”태민은 수아가 자신 때문에 불쾌할까 봐 무척 조심스러웠다.그가 더 이상 집을 구하는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자, 수아는 은근히 한숨을 돌리며 말투도 누그러졌다.“이거 줘요.”그녀는 손을 내밀었다.“어?”“손에 있는 그 밀크티 말이에요, 저한테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에요?”“어, 맞아! 깜박할 뻔했네...”태민은 웃으며 말했다....또 실험실에서 일주일을 보내자, 정은은 두 조의 데이터를 완성했다.마침내 진도를 따라잡은 셈이었다.토요일, 정은은 자신에게 휴가를 주었다.“정은 씨, 오랜만이에요. 이미 날 잊은 거예요?”수민은 페라리 오픈카를 몰고 그녀의 곁에 멈추었다.창가에 손을 얹고 선글라스를 벗으니 예쁘고 고운 눈이 나타났다.바람은 수민의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불었고, 검은색 점프슈트에 개성 있는 허리띠를 하니 시크하면서도 멋있어 보였다.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며 안전벨트를 맸다.“내가 어떻게 감히 널 잊어버리겠어? 누굴 잊어도 우리 여왕님을 잊어서는 안 되지.”수민은 하얗고 여린 정은의 얼굴을 비볐다.“이주 동안 보지 못했는데, 꿀을 먹은 거야? 말을 어쩜 이렇게 잘할까?”“꿀을 먹을 필요가 없어. 나 원래 달콤해.”“네, 네! 네가 제일 달콤하네요. 자, 이 여왕님이 맛있는 거 사줄게!”“그래!”“정은아, 넌 너무 얌전한 거 아니니? 내가 남자라면 바로 너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거야!”‘그럼 강도겸 그 찌질
그때 술에 취한 얘기를 꺼내자, 수민은 어색하게 코를 만졌다.“다 우리 엄마 탓이야. 굳이 그 무슨 연회에 가라고 하신 거 있지? 가 보니까 맞선 파티였던 거야.”젊은이들은 마치 물건처럼 사람들의 지적을 받았고, 마음에 들면 번호를 교환했다.백지영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걱정이 많아서 탓이었다.집안이 좋지 않으면 틀림없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도 다 겪어봐서 하는 말이다, 돈이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결국 불행해질 것이다.수민은 이런 말만 들으면 짜증이 났다.지난번에 돌아간 후, 그녀는 백지영과 약속을 했다. 재벌 집안 도련님을 찾아도 되지만 사람은 자기가 골라야 한다고.이 조건으로 백지영은 앞으로 더 이상 수민에게 소개팅이나 맞선 파티를 주선할 수 없었다.정은이 물었다.“너 혼자 선택한다고?”“그래, 어차피 집안 형편이 그리 나쁘지만 않으면 우리 엄마는 다 받아들일 수 있거든. 그럼 그냥 J시의 재벌 집 도련님들 중에서 고르면 되지!”“진심이야?”정은은 눈을 깜빡였다.수민은 연하남을 좋아했다. 재벌 집안의 남자들은 연하도 적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잘 듣고, 그녀를 달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녀를 받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출신이 우월하면 자연히 일반인보다 오만할 것이다. 모두들 재벌 집안의 도련님 아가씨였으니 그들은 절대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수민을 달래려 하지 않을 것이다.수민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골라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엄마 또 잔소리를 할걸. 하지만 난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협력 파트너를 고르는 거야.”“파트너?”“그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집안에서 일찍 결혼하라는 강요를 당하기 일수거든. 집안의 안배를 원하지 않은 이상, 서로 협력을 하는 거지.”“어떻게 협력할 건데?”“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를 하고, 사람들 뒤에서는 각자들끼리 노는 거지!”이렇게 하면 집안사람들도 안심할 수 있고, 매일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엄호를 빌어 밖에서 자유자재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을 나섰다.“오빠, 인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그 늙은이들이 오빠를 둘러싸고 있으니까 꼭 팬들이 아이돌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잖아요.”“아이돌?”“그러니까 연예인이요.”재석은 담담하게 웃었다.“이익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야. 연예인은 무슨.”수민은 냄새를 맡았다.“오빠 술 마셨어요? 운전하고 온 거예요?”“술 좀 마셨지만 차는 안 갖고 왔어.”“잘됐네요, 그럼 차에 타요. 내가 오빠와 정은이 데려다줄게요.”수민의 차는 골목 앞에 세워졌고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정은과 재석은 차에서 내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달은 휘영청 밝았고 별이 보이지 않았으며 밤바람은 무척 부드러웠다.조용한 골목에서 가끔씩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재석은 실수로 쓰레기 봉투를 밟았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그는 걸을 때 좀 비틀거렸다.“괜찮아요?“미안, 오늘 저녁에 술 좀 많이 마셨어.”술기운 때문에 정은이 불편할까 봐 재석은 일부러 두 사람의 거리를 벌리기도 했다.미안하다는 말이 재석의 입에서 나오자, 정은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 말에 진심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전에 도겸도 늘 술을 마셨고 툭하면 취했지만, 그는 종래로 정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사람과 사람은 정말 다르구나.’전에 정은은 남자들이 모두 도겸, 선우, 동건처럼 퇴근하면 술집에 가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아니면 소진헌처럼 성격이 부드럽고 착실한 일반인이라든가.그러다 그녀는 재석을 만났다.그는 뭇별들에 둘러싸인 달이었고, 도도한 존재였지만 오만하거나 까칠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하고 차분했다.자신을 단속하는 것과 자신을 방임하는 것, 성공과 오만은 결코 필연적인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재석은 방종하고 구속받지 않은 삶을 살 자격이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엄밀하고 자제했다.정은은 의혹을 느꼈다.“교수님들도 접대가 필요한 거예요?”“사회에 처해 있으니, 우리도 인정이 오고 가는 것을 중시하
정은은 처음으로 한 사람을 동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이런 복잡한 감정이 바로 강자를 숭배하는 마음이란 것을 몰랐다....수민은 두 사람을 집으로 데려다준 뒤, 다시 술집으로 찾아갔다.가는 길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술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려 할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펑!뒤에서 마세라티 한 대가 나타났는데, 마침 그녀의 차를 들이받았다.수민은 화가 났다.문을 세게 닫으며 직접 상대방의 차 앞으로 달려갔다.“야, 넌 운전할 줄도 모르는 거야?!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몰라?! 이런 곳에서 그렇게 빨리 운전하는 것도 모자라 길까지 보지 않다니? 난 아직 안으로 주차하지도 않았는데, 넌 눈이 없는 거야 뭐야?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내 차와 충돌할 수가 있는 거냐고?!”마세라티 운전석의 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웃으며 내려왔다.“아, 난 또 누구라고. 이런 일 가지고 왜 화를 내고 그래?”동건은 히죽거리며 수민 앞으로 걸어갔다.“허, 너였구나, 우리 고동건 도련님.”그녀는 일부러 동건을 비아냥거렸다.동건은 페라리의 상황을 체크했다.‘어... 확실히 좀 심각하네.’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에이, 큰 문제가 아니네. 방금 속도가 좀 빠른 데다가 주의하지 않아서 널 들이받은 것일 뿐이야.”“날 들이받았다고?” 수민은 눈을 부라렸다.“말 좀 똑바로 해.”“에헴! 네 차를 들이받았어, 됐지?”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내 책임이라 치자. 보험회사에게 전화해서 네 차를 수리하라고 할게.”“네 책임이라 치자고? 이거 원래 네 책임이잖아! 네가 보험회사에게 연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내가 한동안 차를 몰지 못하게 됐잖아...”“우리 조수민 아가씨의 차고에 차가 많을 텐데? 웃기고 있네!”수민은 동건과 말하기 귀찮아서 차 키를 던졌다.“난 아직 다른 일 있으니까 너한테 맡길게.”말을 마치고 바로 술집에 들어가려고 했다.바로 이때, 한 여자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동건의 얼굴을 향해 따귀 한 대 때렸다.찰싹
여자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동건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가 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사랑의 고통? 허, 내가 어떻게 그런 고통을 받겠어!’여자가 떠나자마자 술집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한 젊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하얗고 긴 다리에 곱슬머리를 뒤로 한 그녀는 정교한 화장을 하고 있어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동건 도련님...”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다가왔다. 남자가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동건은 즉시 몸을 피했다.긴 팔을 뻗더니 오히려 수민의 허리를 안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옆에서 한창 재밌게 지켜보던 수민은 깜짝 놀랐다.동건은 고개를 들어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미안, 넌 너무 늦게 왔어.”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원망에 찬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투덜대며 가버렸다.“방금 날 이용한 거야?” 수민은 두 팔을 안고 냉소를 지었다.“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동건은 원래 손을 떼려고 했지만, 수민이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그러고 싶지 않았다.“싫어, 네가 뭘 어쩔 건데?”수민은 화가 나서 되려 웃었다.“나랑 놀자 이거야? 그래.”동건은 수민의 사악한 웃음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여자는 그의 팔을 잡고 한바퀴 돌렸다.“아! 아파, 아프다고!” 남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앞으로 계속 이럴 거야?”“아니, 내가 잘못했어! 빨리 놔줘, 내 팔이 부러질 것 같단 말이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쫄긴...”말을 마치고 수민은 바로 힘을 풀었다. 그러나 동건을 놓아주는 대신 오히려 그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놓았다.동건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민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제 이 손 좀 치워 줄래? 고마워.”남자는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정말 화가 나네. 내 손을 원래의 위치에 올려놓은 다음 다시 치우라고 하다니? 받는 대로 되갚는 스타일이군.’ 마치 부모님이 넘어진 아이에게 제자리에서 얼른 일어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동건은 어린이
밖에 나오자, 세 사람은 모두 술을 마셨기에 각자의 전화로 대리운전을 불렀다.기다리는 사이에 선우는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라이터를 찾지 못했다.동건에게 달라고 할 때, 그는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뒷좌석에 있으니까 혼자 가지러 가.”선우는 차 문을 열고 라이터를 찾았다.“아, 여깄었네...”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라이터를 동건에게 돌려주었다.방금 뒷좌석에서 본 숄을 떠올리며 선우는 입가를 실룩거렸다.“형 이제 차에서 그런 짓 하는 것을 좋아하는 거야?”동건은 영문을 몰랐다.“그런 짓? 무슨 말을 하는 거야?”“모르는 척할 거예요? 뒤에 숄이 있잖아요? 그건 여자만 입는 거 아니에요? 그것도 노란색. 솔직히 말해요, 어느 여자가 남긴 거예요?”동건은 어이가 없었다.“헛소리 하지 마.”“어머, 인정 안 하는 거 좀 봐요, 이건 형 답지가 않은데.”“인정하긴 개뿔! 그거 정은 씨 어머니의 숄이야. 내일 돌려주려고 했다고. 그런데 무슨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 야동 좀 그만 봐!”선우는 깜짝 놀랐다.“정은 누나 어머니요? 그 분의 물건이 왜 형의 차에 있는 거죠?”한쪽에 있던 도겸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동건은 방금 입을 열려고 했는데, 선우와 도겸이 모두 궁금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헤헤 웃으며 갑자기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글쎄, 그건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선우는 계속 추궁했다.“무슨 이유인데요?”“아니, 왜 질문이 이렇게 많아? 너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당연히 상관이 있죠! 난 이미 오랫동안 정은 누나의 소식을 듣지 못했거든요. 지난번에 다리가 부러져 이주 넘게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정은 누나가 병문안 하러 왔었거든요. 날 그렇게 걱정하고 있으니 나도 당연히 누나를 관심해야 하지 않겠어요?”“뭐? 정은 씨가 병문안을 갔었다고?” 동건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하며 곁눈질로 줄곧 도겸을 주시하고 있었다.그는 몸을 살짝 기울이더니, 눈썹을 치켜
동건은 얼마 전에 도겸의 회사에 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서연희의 어머니와 양아치 같은 남동생을 떠올렸다.“아이가 없어졌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으면...”서영숙은 아마 울다 기절할지도 모른다동건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곧 그가 부른 대리도 도착했다.“저기요! 대표님! 잠시만요!”동건이 뒷좌석 차 문을 열고 앉으려 할 때, 레스토랑 지배인이 그를 불렀다.“무슨 일이에요?”“방금 저희가 룸을 청소할 때 이 숄을 발견했습니다. 그 위에 브로치가 하나 있는데, 아마도 여성분이 빠뜨린 것 같습니다...”정은네 일가는 이미 떠났기에, 지배인은 그들과 함께 밥을 먹은 동건을 보자마자 즉시 그를 불렀다.“이리 줘요, 내가 돌려주면 되니까.’“네, 감사합니다.”동근은 숄을 뒷좌석에 놓고는 내일 사람 시켜 정은에게 돌려주려 했다.“가요, 선생님.”“네.”도중에 선우에게 전화가 왔다.[형! 왜 아직도 안 온 거예요? 지금이 몇 시인데. 우리 지금 형 하나만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요 며칠 너무 신나게 놀다가 몸이 약해진 거예요?]선우가 있는 곳은 좀 시끄러웠는데, 클럽이 아니면 술집이었다.“꺼져, 이 미친 자식아! 말도 참 더럽게 하네! 딱 기다려, 곧 도착할 테니까!”동건은 주소를 물어본 다음 직접 대리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슬라이드 바에서.선우가 나와서 동건과 어깨동무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왜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예요? 어느 여자의 품에 있다 온 건 아니겠죠?”“꺼져, 정상적인 식사를 했을 뿐이니 함부로 말하지 마.”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내가 믿을 것 같아요?”“난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니 이상한 루머 좀 퍼뜨리지 마세요.”“가짜 여자친구잖아요?” 선우는 히죽거리며 말했다.동건은 멈칫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누가 그래?”“수민 누나가요.”“언제?”선우는 잠시 생각했다.“지난 주말이었을 걸요? 테니스를 치러 갔는데, 한 남자와 아주 다정하게 옆방에서 공을 치고 있더라고요...”남자는 수민의
이미숙은 이렇게 말했다.“뭘 먹을지 모르겠으면 제일 비싼 레스토랑으로 정해. 가격은 모든 것을 대표할 순 없지만 적어도 성의를 표시할 수 있으니까.’그래서 동건은 레스토랑의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또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이미숙은 감사 인사를 해야 했으니 틀림없이 식사 자리를 비싼 곳으로 정할 것이다.금요일, 저녁.동건은 10분 앞당겨 도착했는데, 정은네 일가는 그보다 더 일찍 도착할 줄이야. 그들은 이미 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원래 정은은 수민까지 불렀지만, 그녀는 너무 바빠서 이미 연속 이틀동안 야근을 했기에 정말 시간이 없었다.“정말 안 올 거야? 고동건 씨도 있는데.”수민은 눈을 부라리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서? 그 남자가 있으면 내가 가야 하는 건가?]“두 사람 지금 사귀고 있잖아. 다 먹으면 동건 씨는 또 네 기사가 되어 널 집에 데려다줄 수 있고.”[쳇, 누가 데려다 달라고 했어? 나한테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는 가짜 커플이잖아. 넌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지금 자꾸 비아냥거릴 거야...]룸 안에서.동건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두 분도 참, 저도 간단하게 도와드렸을 뿐인데, 이렇게 특별히 밥을 사주시다니!”“당연히 그래야지.”소진헌은 웃으며 그와 악수했다.‘네가 나석천 편집장님을 정은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지금의 『7일담』이 있게 된 거야.”이미숙도 옆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동건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젊었다.소진헌은 훤칠하지만 우아한 기질을 선보이고 있었다. 옷이든 하는 말이든 모두 지식인만이 가지고 있는 기질을 내뿜었다.이미숙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파란 원피스에 긴 머리를 걷어올린 채로 소진헌의 곁에 서 있으니 침착하면서도 도도했다.그녀가 서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곧 음식이 올라왔다.소진헌은 좋은 술 한 병을 가지고 왔다. 가득 따른 후, 그는 먼저 마시며 동건을 바라보았다.“작은 은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재석은 잠시 멈칫했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뭐?!” 소진헌은 갑자기 흥분해졌다.“정말이야? 고백은 했어? 왜 아직도 사귀지 않은 거야?”잇단 질문에 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이럴 줄 알았으면 대답하지 말걸 그랬어.’네 사람은 집 앞에서 헤어졌다.재석은 왼쪽으로 향하며 문을 열고 들어갔고, 정은네 일가족은 명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이미숙은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오늘 덕분에 잘 먹었어.”“에이,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오늘 아주머니의 사인을 받았잖아요.”이 말 한마디에 이미숙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정은은 샤워하러 갔다.평소처럼 머리를 묶고 머리가 젖지 않도록 샤워모자를 썼다.그러나 손을 뒤로 뻗은 순간, 딱딱한 집게핀을 만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가 이미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정은은 고개를 힘껏 흔들었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음, 정말 대단한 수법이야. 그런데 왜 나만 못하는 거지? 말도 안돼, 이건 너무 말이 안 되잖아! 짜증나!’이미숙과 소진헌은 씻은 다음 이미 방으로 돌아가 누워있었다. 부부는 불을 켜고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나석천이 이때 문자를 보내왔다.[이 작가님, 축하드립니다!][『7일담』은 오늘 판매량이 또 최고치를 기록했고, 이미 몇 개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이 책의 영화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을 받고 싶다고 했어요.][30분 전에 출판사의 전화를 받았는데, 첫 번째로 인쇄한 책은 이미 품절되었고, 공장은 밤새 인쇄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작가님의 다른 배당금도 이미 도착했고요. 잠시 후에 계좌로 넣어드릴게요.][원래 전화로 말하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이미 주무셨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렇게 문자를 보냈어요. 내일 전화로 말할 수도 있지만, 정말 너무 흥분해서요.]이미숙은 문자를 보고 나서 자신의 남편을 꽉 껴안았다.소진헌은 갑작스런 포옹에 흠칫 놀랐다.
“자.”정은은 목을 움직이더니 또 고개를 저었다. ‘어, 정말 안 떨어지네. 꽤 단단하게 묶었나 봐.’“어머!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빨리 배웠네요. 나보다 더 잘 하는 것 같아요!” 사장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재석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정은은 설명하려 했다.“제 남자친구 아닌...”그러나 사장님은 그녀에게 말을 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예전에는 시집간 여자들이 머리를 걷어올렸어요. 시집간 후, 금슬이 좋다면 남편이 직접 부인을 위해 머리를 묶어주었고요. 이게 다 의미가 있는 거예요. 우리 고향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빗겨주며 백년해로하고 영원히 한마음을 맺는다는 뜻이 있어요.”“안타깝게도 지금 이 남자들은 머리를 묶어주긴커녕 빗으로 간단하게 빗겨주는 것도 귀찮다고 하니 정말 게으름뱅이와 다름이 없다니깐요. 하지만 아가씨 남자친구는 정말 대단해요.”사장님은 재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빨리 배울 뿐만 아니라 인내심이 있어서 직접 아가씨를 위해 머리를 말아올렸잖아요.”“이 사람은 제 남자...”“아가씨, 이 총각 꼭 소중히 여겨야 돼요. 요즘은 좋은 남자가 그리 많지 않거든요.정은은 속이 답답해졌다.‘내 말을 끝까지 들어줄 순 없는 거야?’두 사람은 노점을 떠나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재석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제 할 줄 아는 거야?”“뭘요?”“머리카락을 걷어올리는 거.”정은은 말을 하지 않았다.‘난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배우라는 거야?!’재석이 말했다.“내가 다시 한번 가르쳐줄까?”“아니요!” 정은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굳이 안 걷어올려도 되니까 그냥 마음대로 묶으면 되지.’“날 못 믿겠어?”정은은 쓴웃음을 지었다.“나 자신을 믿지 않아서 그래요.”재석은 말문이 막혔다.어차피 봐도 제대로 배울 수 없으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더 나았다.두 사람은 걷다가 멈추었고, 거리를 나갈 때에야 이미숙, 소진헌과 합류했다.“엄마...”“어? 이 집게핀은...”이미숙은 바로 정은의 걷어올린
식당에 도착하자, 종업원은 네 사람을 데리고 직접 룸으로 향했다.그리고 음식을 주문한 다음 음식이 올라오길 기다렸다.민지가 강력히 추천한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 맛은 정말 좋았고, 재료도 정말 싱싱했지만 정말 매웠다.중간에 정은은 화장실에 다녀왔다.돌아올 때 팥빙수 하나가 올라왔다.재석이 설명했다. “이걸로 좀 풀어.”정은은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며 마음속으로 감탄했다.‘선배님은 정말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인 것 같아.’다 먹고 재석은 계산하러 갔다.샤브샤브 식당 옆에는 번화가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끌벅적했다.이미숙이 가고 싶어 하자 소진헌은 웃으며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했다.재석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정은은 그들 일가족이 다 떠나는 것은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고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이 나왔는데, 손에 종이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방금 네가 그 팥빙수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나 더 포장해달라고 했어. 돌아가서 얼른 먹어. 남기면 직접 버리고. 내일 먹으면 배탈이 나기 쉬워.”“좋아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두 분은?”그녀는 번화가를 가리켰다.“놀러 가셨어요.”“그럼 우리도 구경하러 할까?”“그래요!” 정은도 당연히 가고 싶었다.만약 재석을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진작에 이미숙, 소진헌과 함께 갔을 것이다.두 사람은 나란히 거리를 걸었고, 양쪽 길가에는 노점이 빽빽하게 차려져 있었는데, 파는 물건도 각양각색이었다.먹을 것과 입을 것과 그리고 노는 것까지 가득했다.액세서리 노점을 지나자, 정은은 멈추더니 한 회색 집게핀을 가리키며 물었다.“이거 얼마예요?”“그건 2,000원이에요.”“이건 어떻게 집어야 머리카락을 꽉 고정시킬 수 있는 거죠?”정은은 인터넷에서 산 집게핀을 써본 적이 있었다.그녀의 머리카락이 많고 굵어서인지, 걷어 올려도 제대로 고정시킬 수 없었다.정은은 방금 이 집게핀이 전에 인터넷에서 산 것보다 더 크고 재질도 더 견고한 것을 보고 가격
딩-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은이 안에서 나왔다.“선배님.”“어디 갔었어?”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감정은 확연히 달랐다.정은의 말투는 홀가분했고, 재석은 약간 조급해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심지어 걱정이 묻어났다.“방금 아래층에서 심 대표님을 만났거든요. 자, 선배님, 물 좀 마셔요.”정은은 봉지에서 물 한 병을 꺼내 재석에게 건네주었다.재석은 봉지 위의 로고를 힐끗 바라보았다. 맞은편 거리의 수입 마트였다. ‘정은이는 그렇게 멀리까지 갈 리가 없을 텐데, 그렇다면...’“심 대표가 산 거야?”“네. 심 대표님 대신 어르신 좀 챙겨드렸거든요. 그 사람은 건너편 마트에 가서 물을 샀고요. 두 어르신은 이 브랜드의 물만 마셔서요.”재석은 손을 내밀어 물을 받았다.정은은 사인회장을 들여다보았다.“어때요? 이미 끝났어요?”재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줄을 선 사람이 많아서 아마도 조금 더 걸릴 거야.”방금 전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했기에, 정은은 다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정은은 재석이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선배님, 들어가서 사인 받을 거예요?”“난 그냥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그래요!” 정은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낮은 소리로 웃었다.“선배님, 왜 웃어요?”“에헴!” 재석은 가볍게 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정색했다. “아무것도 아니야.”‘뭐지, 선배님은 지금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니!’사인회는 원래 오후 4시에 끝날 예정이었지만 결국 5시가 되어서야 끝났다.맨 뒤에서 줄을 선 재석과 정은은 책을 펼쳐 이미숙 앞에 놓았다.“사랑하는 엄마, 저에게 사인 좀 해주세요.”“감사합니다, 아주머니.”이미숙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예쁜 딸이 앞에 서 있었고, 옆에는 재석이 있었다.두 사람 모두 웃으며 눈빛에 기대를 드러냈다.그 순간, 이미숙은 마음이 황홀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서 있으니 정말.
정은은 약간 뻘쭘해졌다. 속마음이 간파당했지만 그렇게 난처한 편은 아니었다.처음 만난 사이이니, 경계를 하는 것도 아주 정상적이었다.‘두 분은 겪으신 일이 나보다 훨씬 많으니 내 마음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거야.’아니나 다를까,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두드렸다.“아가씨, 특히 너처럼 예쁜 아가씨는 언제나 경계심을 가져야 해. 미리 위험을 방지해야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어.”“네.”“제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L시에서 자랐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J시에 왔어요. 그러니 두 분은 아마 저를 보신 적이 없을 거예요.”“하긴.” 봉수진은 웃었다.그러나 왠지 모르게 정은은 봉수진의 미소에서 낙담과 실망을 느낄 수 있었다.이춘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예전에는 보지 못했지만,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이라 할 수 있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물을 사러 간 현빈이 돌아왔고, 두 노인에게 한 병씩 건네주었다. 그리고 남은 물을 담은 봉지를 정은에게 건네주었다.“몇 병 더 샀는데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드려. 오늘 아주머니 사인회이니 아저씨도 같이 오셨겠지?”“네, 맞아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받아.” 현빈은 봉지를 직접 그녀의 손에 넣었다.“고마워요.”“방금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기분이 꽤 좋으신 것 같은데?”들어오기 전에 현빈은 멀리서 이춘재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을 보았고, 평소에 가장 까다로운 할머니조차도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이 장면을 본 순간, 현빈은 갑자기 멍해졌다.‘두 분께서 이렇게 웃으시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작년에 외국에 두 노인을 방문할 때, 봉수진은 마침 입원을 했다. 이춘재는 매일 탄식하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현빈은 이주 정도 머물렀고, 이춘재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아예 없었다.이씨 가문의 산업이 모두 국내에 있었기에, 현빈도 두 노인에게 돌아오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막내딸이 실종된 이후로 이씨 가문은 모든 것이 변했다.이것도 바로 이춘재 부부가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과도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다.아직도 행방이 묘연해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모를 떠올리니, 현빈은 저도 모르게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만약 계속 찾을 수 없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아쉬움을 메우지 못할 것이다.“현빈아, 목이 좀 마르구나.” 노부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래요. 그럼 저 물 사러 갈게요...” 현빈은 정은을 바라보았다.“많이 바빠?”“괜찮아요.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죠?”“난 물 좀 사러 갈 테니까, 나 대신 두 분 좀 챙겨줘.”“내가 사러 갈까?” 어차피 정은도 내려와서 물을 사려 했다.현빈은 고개를 저었다.“우리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평소에 고정된 브랜드의 물만 마시거든. 이 근처에는 없고, 맞은편 거리에 있는 수입 마트에 가서 사야 해.”“그래요? 그럼 얼른 가서 사요. 난 여기서 두 분과 함께 얘기 나누고 있을 테니 안심해요.”“고마워.”현빈은 몸을 돌려 떠났다.할머니 봉수진은 정은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곁에 앉혔다.“아가씨, 우리 현빈이와 친구라고? 너희들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아...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도겸이 바로 그 ‘친구'였다.“그렇구나. 현빈이는 여성 친구가 거의 없는데, 네가 처음은 것 같구나!” 봉수진은 웃음을 지었다.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와, 심 대표는 정말 물 마시듯 여자친구를 바꾸었지.’“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곳은 너무 많이 변했어.”이춘재는 갑자기 감탄하기 시작했다.정은은 그의 말투에 묻은 그리움을 알아차리며, 최근 몇 년 J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춘재는 정은이 J시에 대해 술술 말하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물었다.“넌 이곳의 사람인가?”정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는 L시의 사람이에요. L시 아시죠? 남방의 구릉지대인데,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과 물도 있고...”정은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