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야?” 태민은 다시 한번 수아를 불렀다.“왜요?” “방금 부동상에게 연락해서 집을 구하고 있었던 거야?”수아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태민이 계속 물을까 봐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뭘 그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선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태민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난 네 남자친구잖아, 그러니 널 관심하는 것도 당연하지.”“내 남자친구예요 아니면 내 아빠예요? 잔소리가 왜 그렇게 많아요?”“내가 너무 잔소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말 줄일게.”태민은 수아가 자신 때문에 불쾌할까 봐 무척 조심스러웠다.그가 더 이상 집을 구하는 일에 대해 추궁하지 않자, 수아는 은근히 한숨을 돌리며 말투도 누그러졌다.“이거 줘요.”그녀는 손을 내밀었다.“어?”“손에 있는 그 밀크티 말이에요, 저한테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에요?”“어, 맞아! 깜박할 뻔했네...”태민은 웃으며 말했다....또 실험실에서 일주일을 보내자, 정은은 두 조의 데이터를 완성했다.마침내 진도를 따라잡은 셈이었다.토요일, 정은은 자신에게 휴가를 주었다.“정은 씨, 오랜만이에요. 이미 날 잊은 거예요?”수민은 페라리 오픈카를 몰고 그녀의 곁에 멈추었다.창가에 손을 얹고 선글라스를 벗으니 예쁘고 고운 눈이 나타났다.바람은 수민의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불었고, 검은색 점프슈트에 개성 있는 허리띠를 하니 시크하면서도 멋있어 보였다.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며 안전벨트를 맸다.“내가 어떻게 감히 널 잊어버리겠어? 누굴 잊어도 우리 여왕님을 잊어서는 안 되지.”수민은 하얗고 여린 정은의 얼굴을 비볐다.“이주 동안 보지 못했는데, 꿀을 먹은 거야? 말을 어쩜 이렇게 잘할까?”“꿀을 먹을 필요가 없어. 나 원래 달콤해.”“네, 네! 네가 제일 달콤하네요. 자, 이 여왕님이 맛있는 거 사줄게!”“그래!”“정은아, 넌 너무 얌전한 거 아니니? 내가 남자라면 바로 너와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거야!”‘그럼 강도겸 그 찌질
그때 술에 취한 얘기를 꺼내자, 수민은 어색하게 코를 만졌다.“다 우리 엄마 탓이야. 굳이 그 무슨 연회에 가라고 하신 거 있지? 가 보니까 맞선 파티였던 거야.”젊은이들은 마치 물건처럼 사람들의 지적을 받았고, 마음에 들면 번호를 교환했다.백지영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걱정이 많아서 탓이었다.집안이 좋지 않으면 틀림없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도 다 겪어봐서 하는 말이다, 돈이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결국 불행해질 것이다.수민은 이런 말만 들으면 짜증이 났다.지난번에 돌아간 후, 그녀는 백지영과 약속을 했다. 재벌 집안 도련님을 찾아도 되지만 사람은 자기가 골라야 한다고.이 조건으로 백지영은 앞으로 더 이상 수민에게 소개팅이나 맞선 파티를 주선할 수 없었다.정은이 물었다.“너 혼자 선택한다고?”“그래, 어차피 집안 형편이 그리 나쁘지만 않으면 우리 엄마는 다 받아들일 수 있거든. 그럼 그냥 J시의 재벌 집 도련님들 중에서 고르면 되지!”“진심이야?”정은은 눈을 깜빡였다.수민은 연하남을 좋아했다. 재벌 집안의 남자들은 연하도 적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잘 듣고, 그녀를 달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녀를 받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출신이 우월하면 자연히 일반인보다 오만할 것이다. 모두들 재벌 집안의 도련님 아가씨였으니 그들은 절대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수민을 달래려 하지 않을 것이다.수민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당연히 골라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엄마 또 잔소리를 할걸. 하지만 난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협력 파트너를 고르는 거야.”“파트너?”“그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집안에서 일찍 결혼하라는 강요를 당하기 일수거든. 집안의 안배를 원하지 않은 이상, 서로 협력을 하는 거지.”“어떻게 협력할 건데?”“사람들 앞에서는 연기를 하고, 사람들 뒤에서는 각자들끼리 노는 거지!”이렇게 하면 집안사람들도 안심할 수 있고, 매일 잔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엄호를 빌어 밖에서 자유자재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을 나섰다.“오빠, 인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그 늙은이들이 오빠를 둘러싸고 있으니까 꼭 팬들이 아이돌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잖아요.”“아이돌?”“그러니까 연예인이요.”재석은 담담하게 웃었다.“이익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야. 연예인은 무슨.”수민은 냄새를 맡았다.“오빠 술 마셨어요? 운전하고 온 거예요?”“술 좀 마셨지만 차는 안 갖고 왔어.”“잘됐네요, 그럼 차에 타요. 내가 오빠와 정은이 데려다줄게요.”수민의 차는 골목 앞에 세워졌고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정은과 재석은 차에서 내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달은 휘영청 밝았고 별이 보이지 않았으며 밤바람은 무척 부드러웠다.조용한 골목에서 가끔씩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재석은 실수로 쓰레기 봉투를 밟았다. 술을 마셨기 때문에 그는 걸을 때 좀 비틀거렸다.“괜찮아요?“미안, 오늘 저녁에 술 좀 많이 마셨어.”술기운 때문에 정은이 불편할까 봐 재석은 일부러 두 사람의 거리를 벌리기도 했다.미안하다는 말이 재석의 입에서 나오자, 정은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 말에 진심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전에 도겸도 늘 술을 마셨고 툭하면 취했지만, 그는 종래로 정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서 사람과 사람은 정말 다르구나.’전에 정은은 남자들이 모두 도겸, 선우, 동건처럼 퇴근하면 술집에 가서 즐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아니면 소진헌처럼 성격이 부드럽고 착실한 일반인이라든가.그러다 그녀는 재석을 만났다.그는 뭇별들에 둘러싸인 달이었고, 도도한 존재였지만 오만하거나 까칠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하고 차분했다.자신을 단속하는 것과 자신을 방임하는 것, 성공과 오만은 결코 필연적인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재석은 방종하고 구속받지 않은 삶을 살 자격이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엄밀하고 자제했다.정은은 의혹을 느꼈다.“교수님들도 접대가 필요한 거예요?”“사회에 처해 있으니, 우리도 인정이 오고 가는 것을 중시하
정은은 처음으로 한 사람을 동경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이런 복잡한 감정이 바로 강자를 숭배하는 마음이란 것을 몰랐다....수민은 두 사람을 집으로 데려다준 뒤, 다시 술집으로 찾아갔다.가는 길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술집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려 할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펑!뒤에서 마세라티 한 대가 나타났는데, 마침 그녀의 차를 들이받았다.수민은 화가 났다.문을 세게 닫으며 직접 상대방의 차 앞으로 달려갔다.“야, 넌 운전할 줄도 모르는 거야?! 브레이크를 밟을 줄 몰라?! 이런 곳에서 그렇게 빨리 운전하는 것도 모자라 길까지 보지 않다니? 난 아직 안으로 주차하지도 않았는데, 넌 눈이 없는 거야 뭐야?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내 차와 충돌할 수가 있는 거냐고?!”마세라티 운전석의 문이 열리자, 한 남자가 웃으며 내려왔다.“아, 난 또 누구라고. 이런 일 가지고 왜 화를 내고 그래?”동건은 히죽거리며 수민 앞으로 걸어갔다.“허, 너였구나, 우리 고동건 도련님.”그녀는 일부러 동건을 비아냥거렸다.동건은 페라리의 상황을 체크했다.‘어... 확실히 좀 심각하네.’그러나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에이, 큰 문제가 아니네. 방금 속도가 좀 빠른 데다가 주의하지 않아서 널 들이받은 것일 뿐이야.”“날 들이받았다고?” 수민은 눈을 부라렸다.“말 좀 똑바로 해.”“에헴! 네 차를 들이받았어, 됐지?”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내 책임이라 치자. 보험회사에게 전화해서 네 차를 수리하라고 할게.”“네 책임이라 치자고? 이거 원래 네 책임이잖아! 네가 보험회사에게 연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내가 한동안 차를 몰지 못하게 됐잖아...”“우리 조수민 아가씨의 차고에 차가 많을 텐데? 웃기고 있네!”수민은 동건과 말하기 귀찮아서 차 키를 던졌다.“난 아직 다른 일 있으니까 너한테 맡길게.”말을 마치고 바로 술집에 들어가려고 했다.바로 이때, 한 여자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동건의 얼굴을 향해 따귀 한 대 때렸다.찰싹
여자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동건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가 한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사랑의 고통? 허, 내가 어떻게 그런 고통을 받겠어!’여자가 떠나자마자 술집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한 젊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하얗고 긴 다리에 곱슬머리를 뒤로 한 그녀는 정교한 화장을 하고 있어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동건 도련님...”그녀는 애교를 부리며 다가왔다. 남자가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동건은 즉시 몸을 피했다.긴 팔을 뻗더니 오히려 수민의 허리를 안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옆에서 한창 재밌게 지켜보던 수민은 깜짝 놀랐다.동건은 고개를 들어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미안, 넌 너무 늦게 왔어.”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원망에 찬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투덜대며 가버렸다.“방금 날 이용한 거야?” 수민은 두 팔을 안고 냉소를 지었다.“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해?!”동건은 원래 손을 떼려고 했지만, 수민이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그러고 싶지 않았다.“싫어, 네가 뭘 어쩔 건데?”수민은 화가 나서 되려 웃었다.“나랑 놀자 이거야? 그래.”동건은 수민의 사악한 웃음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여자는 그의 팔을 잡고 한바퀴 돌렸다.“아! 아파, 아프다고!” 남자의 비명소리가 울렸다.“앞으로 계속 이럴 거야?”“아니, 내가 잘못했어! 빨리 놔줘, 내 팔이 부러질 것 같단 말이야!”수민은 눈을 부라렸다.“쫄긴...”말을 마치고 수민은 바로 힘을 풀었다. 그러나 동건을 놓아주는 대신 오히려 그의 손을 자신의 허리에 놓았다.동건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민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제 이 손 좀 치워 줄래? 고마워.”남자는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정말 화가 나네. 내 손을 원래의 위치에 올려놓은 다음 다시 치우라고 하다니? 받는 대로 되갚는 스타일이군.’ 마치 부모님이 넘어진 아이에게 제자리에서 얼른 일어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동건은 어린이
‘그래도 난 그 진씨 가문의 자식보다 훨씬 낫지.’수민은 자신감 넘치며 허세를 떨고 있는 동건을 바라보더니 눈빛이 좀 이상했다.“정말 나와 합작하고 싶어?”“물론이지. 그 눈빛은 또 뭐야? 누굴 무시하는 거야?”수민은 동건을 위아래로 여러 번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고씨 가문은 J시의 8대 호족 중 하나로, 진씨 가문보다 훨씬 훌륭했다.‘방금 여자가 자신의 뺨을 때려도 반격하지 않았어. 정서가 안정되고 나름 매너가 있는 셈이지. 비록 바람둥이인 데다가 스캔들도 많지만, 난 진짜 연애하고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게다가... 바람둥이라면 나도 마찬가지야! 잘됐네! 서로 간섭할 필요가 없어! 클럽에서 부딪치면 같이 놀 수 있을지도 몰라.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남자가 깔끔하게 여자와 헤어진다는 거지.’‘좀 찌질하긴 하지만 이렇게 보면 절대로 집적대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앞으로 우리 갈라져도 나한테 매달릴까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어.’수민은 보면 볼수록 두 사람 아주 잘 맞다고 생각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동건이 마음에 들었다.“그래, 그럼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할까?”동건은 가볍게 흥얼거렸다.“흥,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수민은 흐뭇하게 웃었다.“뭐해? 얼른 들어가지 않고.” 그녀는 동건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아!” 동건은 비틀거렸다.‘이 여자는 왜 툭하면 손을 쓰는 거야? 조금도 부드럽지가 않아.’...손자가 없어진 일로 서영숙은 이틀 동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딱 그 이틀뿐이었다.서연희를 챙겨줄 필요가 없고, 심지어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서영숙은 마음속으로 무척 기뻤다.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모임에 나가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냈다.이날, 다른 집안의 부인이 티파티를 준비했다.품질이 아주 좋은 차와 정교하고 맛있는 과자가 탁자에 놓여 있었다. 서영숙은 샤넬이 새로 출시한 기성복을 입은 채로 부드럽고 편안한 가죽 소파에 앉아 음악을 즐기면서 다른 부인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경비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빨리 이 사람들 좀 막아...”사람들이 몰려오자, 이순정은 즉시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서영숙 지금 어딨어? 나 지금 서영숙을 찾고 있으니까 당장 나오라고 해!”이순정과 아들 서철봉은 이틀전에 J시에 도착했다. 그들은 먼저 병원에 있는 연희를 보러 간 다음 병실에서 밤을 보냈다.이순정이 말했다.“호텔? 공짜로 호텔에서 지낼 수 있는 거야 뭐야? 이 병실은 크고 넓으니까 딱이네. 문제는 돈을 쓸 필요가 없잖아!”“하지만 침대가 하나밖에 없잖아, 엄마랑 철봉이는...”“에이, 우리 두 사람 같이 자면 되지.”점심을 다 먹은 철봉은 이를 쑤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평소에 나도 줄곧 엄마랑 같이 잤단 말이야. 에어컨 한 대만 켜면 되니까 돈을 엄청 절약할 수 있어.”설득할 수가 없자, 이순정과 철봉은 병실에서 묵었다.병원 규정에 따르면, VIP 병실에는 간호 침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환자의 가족은 확실히 이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병원 쪽에서도 뭐라 하지 않았다.어차피 돈은 도겸 쪽에서 내는 것이니, 연희는 원하는 대로 병원에 누워있을 수 있었다. 그럼 가족이 여기서 지내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이순정은 병원에서 이틀 보냈다. 이미 소독수 냄새에 습관이 되었지만, 도겸 쪽의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심지어 가정부조차 오지 않았다.“허, 숨어 있으면 될 줄 알아? 절대로 그렇게 할 순 없지!”“엄마,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철봉은 주먹을 휘두르며 기대를 하고 있었다.“우리를 만나러 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직접 찾아가면 되잖아!”그렇게 아침에 연희는 SNS를 통해 서영숙이 모임에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배경은 모 호텔의 룸이었는데, 전에 서영숙이 그녀를 데리고 한 번 간 적이 있었다.연희는 즉시 호텔 주소를 이순정에게 알려주었다.모자 두 사람은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달려왔다.서영숙은 원래 먼 곳에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듣자,
바깥의 소란을 듣고, 룸에서 모임을 즐기고 있던 사모님들은 전부 나와서 구경을 했다.한 여자가 서영숙의 머리채를 꽉 붙잡으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사모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이순정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더욱 신이 났다.“다들 좀 보세요. 이 여자의 아들이 내 딸을 가지고 놀았어요. 내 딸을 임신시켰는데,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며 바로 차버린 거예요! 내가 귀하게 키운 딸의 인생을 망쳐 놓고 뜻밖에도 우리를 피하고 다니다니! 지금 우리에게 돈이 없다고 무시하는 거야?”이순정은 말하면서 소매를 걷어붙였다.“다들 빨리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요. 강씨 가문이 얼마나 더러운지, 서영숙은 또 얼마나 악독한지를. 그리고 그 찌질한 아들은 책임감도 없는 남자일 뿐이에요!”철봉은 호텔 직원을 막으면서 자기 어머니의 말에 따라 핸드폰을 꺼내 서영숙을 찍기 시작했다.동시에 욕설을 퍼부었다.“정말 싸네요! 강씨 가문은 사람도 아니에요. 우리 누나를 임신시켰으면서 되려 책임을 지려 하지 않다니! 우리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없죠!”서영숙은 그제야 반응하더니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또 자신을 잡아당기고 있는 이순정을 피해야 했기에 무척 낭패했다.“찍지 마! 네 딸이 일부러 임신한 건데, 내 아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난 그 아이에게 충분히 잘해 주었어. 스스로 이상한 짓을 꾸미다 아이가 없어진 거라고! 계속 이렇게 억지를 부린다면, 나, 난 바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이순정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허리를 짚으며 냉소를 지었다.“신고해. 마침 나도 경찰에게 물어보고 싶군. 도대체 누가 옳고 그른지 한번 보자고! 난 시골 사람이라서 자존심 따위를 버릴 수 있는데, 재벌 집 사모님인 당신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서영숙은 멈칫했다.이 말은 그녀의 마음을 찌른 셈이었다.“경고하는데, 오늘 이 일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