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어디야? 내가 그동안 전화를 그렇게 했는데 왜 하나도 받지 않은 거야?! 이제 네 친엄마까지 무시하는 거야?]서영숙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호통을 쳤다.도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출장 때문에 바빠서 전화 받을 시간이 없었어요.”[지금 당장 돌아와!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앞으로 날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마!]서영숙이 엄숙하게 말하자, 도겸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로 본가로 달려갔다.현관에 도착하자마자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도겸은 멈칫하더니 집으로 들어갔다.“어머니, 저 왔어요.”서영숙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도겸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넌 왜 그렇게 사람 보는 눈도 없는 거야?! 서연희 그 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여자의 가족들도 얼마나 건방지게 구는지. 특히 서연희의 엄마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촌놈과 다름없어!”“야비하고 천박해서 생각하기만 해도 징그럽다고! 난 서연희가 악독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넌 기어코 그 여자를 원하다니. 심지어 임신까지 시켰어! 이제 그 여자가 유산했는데, 모든 죄를 우리에게...”“잠깐만요.” 도겸은 서영숙의 말을 끊었다.“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서연희가 유산을 했다고요?”“그래, 너 몰랐어?!”설령 서영숙이 자신의 아들이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도겸도 은근히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그 아이는 원래 이 세상에 오지 말았어야 했어. 없어진 것도 다행이지.’서영숙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오늘 서연희의 엄마가 모임이 열린 호텔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는데, 지금 아마 온 J시에 퍼졌을 거야. 만약 네 아버지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강구염의 그 차가운 얼굴을 떠올리자, 서영숙은 참지 못하고 몸서리를 쳤다.부부로 30여 년을 함께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남편이 두려웠다.“어차피 난 더 이상 서연희와 관련된 사람들을 보고 싶지 않아. 네가 저지른
“기다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면 되잖아. 누군 네가 보고 싶은 줄 알아?” 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이런 태도로 남에게 부탁하는 거야?”동건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참자, 내가 참자. 이 여자는 태권도를 배워서 괜히 화나게 한다면 손해를 보는 건 나 자신일 뿐이야.’“화내지 마.”동건은 바로 미소를 지었다.“급한 일이라고 말했는데, 네가 천천히 나오니까 나도 마음이 좀 급했을 뿐이야.”“용건이나 말해.” 수민은 동건의 차를 힐끗 쳐다보았다.“그 뭐지... 담배 있어?”“왜?”“하나 줘.”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차 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수민은 받지 않고 오히려 팔을 안고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래.” 동건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협력 상대를 찾은 게 아니라 아주 조상님을 모시고 있구나.”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수민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동건은 처음으로 여자에게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담배를 이렇게 예쁘게 피우는 사람도 처음 봤다.“말해봐, 무슨 일이야?” 수민은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자, 점차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우리 엄마가 내가 너와 연애하고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꼭 널 데리고 집에 오라잖아. 방금 나한테 전화했는데, 널 데리고 가지 않으면 날 집에서 쫓아내겠다고 했어. 그때 우리 서로를 돕고 각자 노는 것은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기억하지?”“응.”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난 이미 너를 도와 네 어머니를 대처했으니, 이제 네가 나를 도와줄 차례야.”“그래.” 수민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냥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거잖아?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정말이야?”동건은 그다지 믿지 않았다.“하지만 아주 작은 요구가 있어.”“이거 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일단 네 요구부터 말해 봐.”“네 차 말이야, 며칠 빌려줘.” 수민은 한 손으로 담배를 피우며 다른 한 손으로 보닛을 두드렸다.탕탕, 엄청 큰 소리가 들려왔다.동건은
“젠장!” 수민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있는 손을 뿌리치며 얼른 똑바로 섰다.‘담배꽁초를 버려서 다행이야.’정은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다물 수 있었다.“그, 수민아. 네 가방...”그녀는 정말 가방을 주러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런 장면을 볼 줄이야?수민은 뜻밖에도 한 남자와 어깨동무를 하며 엄청 친밀해 보였다.‘그런데 이 남자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낯이 익지?’두 사람이 돌아서는 순간, 정은은 더욱 놀랐다. ‘고동건?! 그래서... 이 사람이 바로 수민이 말한 협력 상대인가?’수민은 앞으로 다가가서 정은의 손에 있는 가방을 받았다.“고마워, 정은아! 한밤중에 나와서 가방을 가져다주다니, 이제 빨리 돌아가. 너무 늦었으니 안전하지 않아. 난 여기서 네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게. 도착하면 베란다에서 손 흔들어. 그럼 나도 안심하고 갈 수 있어.”“응.”정은은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보기엔 만만하고 단순하지만, 실제로는 다 자신의 속셈이 있었다.그래서 정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친구로서 가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존중이었다.수민은 약속한 대로 정말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정은이 베란다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고 떠났다.“아니... 내 차를 몰고 갔으니 날 태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동건이 쫓아갔다.“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태워주라는 거야?”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냥 택시 타.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수민은 진심으로 제안했다.말하는 동시에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고,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센 순간, 차는 화살처럼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갔다.남자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조수민, 너 차 다 수리됐잖아?! 왜 내 차를 빌리는 건데?! 좀 살살해, 새로 산 거라서 긁히게 하지 말고. 나도 아깝단 말이야.”그러나 동건이 고통을 참으며 빌려준 차는 다음날 도심에 나타났다. 그는 수민이
이튿날 정은은 아침 일찍 조깅을 하러 나갔다.한가해진 후, 그녀는 다시 조깅하기 시작했다. 매번 조깅을 마치면 온몸에 땀을 흘렸는데, 집에 가서 샤워를 하면 하루 종일 무척 정신이 맑았다.“좋은 아침이에요, 선배님.”“응.”재석은 이미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은을 보자, 그는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가자, 내가 같이 달려줄게.”“실험실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새 과제는 전 교수가 책임지고 있어서. 난 요즘 그다지 바쁘지 않아.”“그럼 전 교수님도 수고가 많으시네요.”정은이 농담을 했다.“원망을 하고 싶어도 할 건 해야지.”그는 정색했다.만약 진욱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아예 미쳐버릴 것이다.두 사람은 공원을 따라 두 바퀴 돌았는데, 정은은 점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재석은 이 상황을 보고 입을 열었다.“호흡을 조절하고, 달리는 리듬에 주의를 돌려. 날 따라해 봐. 숨 들이쉬고, 내뱉어.”정은은 따라했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다.“많이 좋아졌어요!”“계속 달릴 거야?”“오늘은 충분해요.”“좋아.”모처럼 만난 두 사람은 아침을 먹은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투고된 논문에 답장은 없었어?”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에요.”“그것도 정상이야. 외국의 학과 잡지의 원고 심사 절차는 국내와 달리 아주 복잡해. 권위 있는 잡지라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거고.”논문을 언급하자, 정은도 기세를 몰아 고마움을 표시했다.“선배님, 실험실을 빌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난 이 세 편의 논문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임대료를 준다면, 선배님은 절대로 받지 않겠죠? 물론 이렇게 보답하는 것도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요.”“하지만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으면, 또 마음속으로 늘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래서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인데, 선배님에게 밥 사주는 건 어때요?”재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누군가 한턱 내는 건 정말 좋은 일이지.”“그럼 뭐 먹을래요? 내가...” 정은
지금의 정은은 무척 태연했다.금방 헤어졌을 때처럼 걸핏하면 도겸을 떠올리며 쉽게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다.시간은 좋은 약이었다.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치유할 수 있었으니까.지금의 정은은 벌써 감정을 내려놓았다.그리고 한때 이 남자가 자신에게 준 상처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희석되어 결국 잊혀졌다.“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정은이 물었다.“앉아서 얘기하면 안 돼?”“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남은 거죠?”“정은아...”“강 대표님,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세요. 우린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도겸은 좌절감을 느꼈다.그리고 그는 재석을 바라보았다. 눈치가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자리를 비켜줬을 것이다.그러나 재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가 눈짓을 해도 모르는 척했다.도겸이 전에 미친 짓을 너무 많이 했기에 정은은 그와 단둘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별일 없으면 우리 먼저 갈게요.” 그녀는 재석을 바라보고 재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우리? 그럼 난 뭐야?” 도겸은 이를 악물며 눈은 점점 붉어졌다.포악한 기색이 용솟음쳤지만 그는 곧 이런 감정을 억눌렀다.도겸은 말투를 누그러뜨리더니 정은의 두 눈을 주시했다.“내가 온 것은 너에게 그날 너의 '축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야.”‘아빠가 된 날 축하한다고? 허...’정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너...”“날 용서하지 않는다면, 난 평생 아빠가 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내 아이의 엄마는 반드시 너여야만 하니까.”정은과 재석은 모두 말문이 막혔다.‘이게 말이야 방귀야?! 진짜 징그러워서 못 들어주겠네!’“그냥 병원에 가보세요.”도겸은 영문을 몰랐다.“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일찍 치료해야죠.”말을 마치자, 정은은 재석에게 빨리 가자고 눈짓했다.그녀는 1초도 도겸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빌딩 안에 들어서서야 정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 선배님, 그
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에이, 손님이 주방에 들어오면 안 되죠!”“손님이 돕고 싶다고 해서.”재석이 도와주니 음식을 준비하는 속도가 많이 빨라졌다.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 정은은 농어를 물에서 건져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물기를 닦은 다음 표면에 식용유를 발라 생선의 신선함을 유지했다.재석은 할 일이 없어서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도와줘?”“위에 찜통 좀 꺼내줄래요?”“응.”그는 키가 커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었지만, 찜통이 걸린 위치가 마침 정은의 머리 위에 있어서 꺼내기가 좀 불편했다.재석이 그것을 꺼내려면 정은의 뒤에 서야 했다.손을 뻗으면 마치 여자를 품에 안은 것 같았다.다행히 눈 깜짝할 사이에 찜통을 꺼냈기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이리 줘요.” 정은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재석은 찜통을 건네주었다.그 순간,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남자는 숨이 멎었다.정은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찜통을 솥에 올려놓고는 생선을 찌기 시작했다.“에헴! 더 도와줄 거 없어?” 재석은 손을 거두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정은은 탁자 위의 그릇을 바라보았다.“음... 식재료는 이미 다 준비되었고, 모든 양념도 다 만들었으니 선배님 먼저 나가요.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면 되니까.”낡은 아파트인 데다가 또 평수가 작기 때문에 주방이 많이 좁았다. 남자가 떠나자, 공간은 순식간에 넓어졌다.정은의 착각인지, 그녀는 주방이 많이 시원해진 것 같았다.20분 후, 정은은 가스를 끄고 앞치마를 벗으며 음식을 상에 올렸다.재석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이미 그릇과 젓가락을 차려놓았다.“주방에 국이 하나 더 있지? 내가 가져올게.” 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재석은 이미 주방으로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버섯 전골이 주방에 놓여 있었다.정은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더니 다시 머리를 돌려 냉장고를 훑어보았다. 생각하다 그녀는 일어나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녀는 남자의 평온한 눈빛과 부딪쳤다.정
“앉아서 말해, 너무 정식적으로 나오니까 나도 좀 어색해서 그래.”정은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난 네가 만든 요리를 좋아하니까, 이번 식사가 가장 좋은 답례야.”말하면서 그는 국그릇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이어 치킨 하나를 집었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치킨은 바삭하고 즙이 있어 무척 맛있었다.“밖에서 이렇게 맛있는 치킨을 먹으려면 쉽지가 않거든.”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남은 치킨을 모두 선배님에게 맡길까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환하게 웃었다.“그럼 더 좋고.”식사를 마치자, 시간은 벌써 오후 2시가 되었다.함께 주방을 정리한 다음 두 사람은 외출했다.재석은 실험실에 가야 했고 정은은 도서관에 가려 했으니 마침 동행할 수 있었다.갈림길에 이르자, 재석은 왼쪽으로 걸어갔다. 도서관은 오른쪽에 있었지만 정은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실험실의 방향으로 걸어갔다.잠시 후, 정은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자신이 더 이상 실험실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정은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도망치듯 도서관에 들어갔다....이튿날, 정은은 실험실에 찾아갔다.물론 빈 손이 아니라 직접 만든 간식을 챙겼다.미진 그들은 도시락통에 담긴 정교한 케이크를 보며 분분히 감탄했다.“정은아, 이거 네가 만든 거야? 너무 예뻐.”“먹기가 좀 아까운데.”“이건 키티, 이건 제리... 어머! 범블비도 있다니? 손재주가 너무 좋은 거 아니니?”태민도 와서 구경했는데, 수아가 좋아하는 스텔라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정은아, 이거 나 줘도 돼?”“네, 가져가세요.”미진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수아에게 주려고?”“네.” 태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이미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으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맛있네, 하나도 질리지 않아.”그는 평소에 단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았지만, 지금 오히려 이 케이크를 단숨에 다 먹었다.“그동안 선배님들의 보살핌과
정은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는데, 이번에는 더 조심하게 걸었다.모두들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정은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진욱은 직접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자, 정은아, 내 팔 빌려 줄게. 근육이 튼튼하니까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거야.”오직 수아만이 정은의 허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식사할 때, 태민은 수아가 거의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가 어디 불편한 줄 알았다.“오늘 왜 이렇게 입맛이 없는 거야? 또 위가 아픈 거야?”수아는 늘 하루 세 끼를 제때에 먹지 않았기에 태민은 잔소리하는 것에 익숙해졌다.“오늘 음식들은 아주 담백하니까 위에 부담이 없을 거야. 이건 네가 가장 좋아하는...”“잔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수아는 태민의 손을 뿌리쳤다.“저는 단지 먹고 싶지 않을 뿐인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내가 먹든 안 먹든 당신과 무슨 상관인 거죠?”요리를 집어주던 태민은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말했다.“나도 잔소리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네가 아플까 봐 걱정돼서 그래...”모두들 그 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모두 자기 것만 먹었다.상관하기 싫은 게 아니라 벌써 익숙해진 것이었다.어차피 태민만 행복하면 되니 그들은 남으로서 말참견을 할 필요가 없었다.잘못하면 또 남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었기에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힘들게 남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재석은 담담하게 태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모든 주의력이 수아에게 있어 재석의 눈빛을 전혀 주의하지 못했다.정은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남의 일에 흥미가 없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음식에 집중했다.‘역시 최고급 레스토랑이야. 정말 맛있어.’...이날이 지난 후, 정은은 재석의 실험실과 철저히 작별했다.며칠 한가하게 지내다가 주말 오후에 정은은 갑자기 소진헌의 전화를 받았다.[정은아,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궁금하지 않아?]“그럼요.” 정은은 대충 알아맞혔지만 그래도 계속 궁금한 척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안녕하세요.”정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은혁은 일행과의 대화를 뚝 끊고 곧장 정은 앞까지 다가왔다.“머리하러 왔어요?”“네.”“그... 저번에 식사 한번 하자고 했던 거 기억하죠? 혹시 오늘은 시간 괜찮으세요?”정은은 짧게 대답했다.“친구랑 같이 왔어요. 죄송해요.”그 순간 수민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하이! 은혁 도련님?”“수민이?! 혹시 정은 씨랑 같이 왔어?”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바로 그 친구.”“와! 그럼 다 아는 사이네! 머리 끝나고 다 같이 밥 어때? 내가 쏠게!”수민은 눈을 살짝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근데 나 들러리 아니야? 밥 사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잖아.”은혁은 순간 말이 막혀 멋쩍게 웃었다.“그, 그게... 다 친구잖아. 다 같이 보면 좋은 거지 뭐... 하하...”그 말이 끝나자 수민은 슬쩍 정은 쪽을 힐끔 바라봤다.‘갈까? 아니면 거절할까?’정은은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그걸 본 수민은 곧장 말투를 바꿨다.“나 아직 염색 더 남았거든. 게다가 이미 예약해 둔 식당도 있어서 미안. 다음에 보자!”은혁은 서둘러 말했다.“아, 괜찮아! 나 기다릴 수 있어. 같이 식당 가면 되잖아!”그러자 수민이 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저었다.“노노!! 오늘은 걸스 나잇. 남자는 입장 금지, 알겠어?”“그렇구나...”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그럼... 다음에 따로 할게.”수민은 환하게 웃었다.“그래, 다음에 봐.”여기까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혁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그는 정은이 옆 소파에 툭 앉은 거였다.“정은 씨... 옆에 좀 앉아도 괜찮죠?”“네.”그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날 제가 데려다드린 곳, 정은 씨 실험실이었죠?” “맞아요.”“저 사실 대학 시절 전공이 재료공학이었어요. 생명과학과는 다르지만, 교차하는 영역도 좀 있죠. 논문 읽다 보면 은근 연결되더라고요.” ‘어...? 이 사람
재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어떤 것도 할 자격이 없지.’그 틈을 타 정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좀 더 기다려야 해서요. 선배님 먼저 차 가져가세요.”“그래.”재석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그렇게 조용히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그 사람... 누구일까?’...정은은 길가에 조용히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5분쯤 지난 후, 골목 입구로 노란색 페라리가 굉음을 내며 등장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차주의 성격이 상상되는 차였다.운전석 창문이 슥 내려가더니, 조수민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휘파람을 불었다.“우리 공주님! 탑승하시죠!”정은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간다! 간다!”차에 올라 조수석에 앉은 정은은 안전벨트를 매며 슬쩍 물었다. “또 바꿨어? 차?”“아냐, 고동건 그놈 차야.”“오...”“뭐야 그 ‘오’는? 뭔가 의미심장했어.”수민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흘겨봤다.정은은 시크하게 말했다.“그냥 ‘오’ 한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운전이나 해. 묻는 순간부터 의미 없어져. 너도 알잖아.”“와... 너 요즘 말투 진짜, 우리 오빠랑 똑 닮았어. 점점 꼬인다, 꼬여.”정은은 잠시 말을 멈추다 살짝 고개를 돌렸다.‘재석 선배...?’하지만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 차 안엔 음악이 흘러나왔다. 마침 흘러나오던 노래를 들은 수민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겼다.[말 못 하는 그 말알게 해줘야 했는데그렇게 쉬운 몇 마디왜 난 못했을까...]‘무슨 가사야 이건?’그리고 이어진 곡...[기대하던 너의 붙잡음은 없고결국 넘겨준 그녀그럼 넌 뭐야 사랑한다면서도 기다리지 말라니 됐어, 넌 계속 그렇게 물러서더라...]수민은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자, 정은은 곧장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야야야, 운전 중이야. 진지하게 좀 몰아.”“앗, 네네, 죄송... 요즘 정신이 잠깐씩
“이제야 좀 낫네.”민지는 전화를 끊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걸렸다.‘이상하네...’예전 같으면 둘이 만나기로 한 날엔 늘 서준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밀크티며, 선호하는 과자까지 미리 챙겨놨었다.‘오늘은 어딘가 좀... 다르네.’그리고 서준이 도착하고 나서, 민지의 그 낌새는 더욱 확실해졌다.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서준을 바라봤다.“너 기분 안 좋아?”“아니...”“거짓말! 완전히 삐졌잖아. 누가 너 속상하게 했어?”서준은 잠시 말없이 민지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시선에 민지의 가슴이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뭐야, 왜 그렇게 봐...?”서준은 이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기분 안 나빠.”“아니거든? 엄청 나빠 보이거든?!”“안 나쁘다니까.”“거짓말! 완전 티 나! 눈, 코, 입, 눈썹, 머리카락, 속눈썹... 다 티 난다니까! 그리고 오늘은 밀크티도 안 사 왔잖아!”서준은 입을 삐죽 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다른 사람이랑 밥 먹고 왔는데... 밀크티까지 마시면 배 안 터지냐...”“어...?”“어어어어어????”민지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잠깐만, 너 오늘 오전에 나랑 진일 선배랑 밥 먹는 거 본 거야?!”“흥.”서준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민지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입꼬리를 얄밉게 올리며 말했다.“야, 내 말 좀 들어봐. 그게 말이야... 전일 선배가 고향 내려가기 전에 일부러 시간 비워서 밥 사준 거야. 그것도 선배 어머니가 챙겨준 거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해?”서준은 작게 투덜거렸다.“근데 넌 말도 안 했잖아.”목소리는 작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하,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 그냥 보고 싶었을 뿐인데.’민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투를 조금 낮췄다.“중요한 일도 아니고, 우리 일정이랑도 안 겹쳤고...”“그리고... 너도 안 물어봤잖아.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줄은 몰랐지.”그 말에 서준은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