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수민은 자신의 어깨에 걸쳐있는 손을 뿌리치며 얼른 똑바로 섰다.‘담배꽁초를 버려서 다행이야.’정은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다물 수 있었다.“그, 수민아. 네 가방...”그녀는 정말 가방을 주러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런 장면을 볼 줄이야?수민은 뜻밖에도 한 남자와 어깨동무를 하며 엄청 친밀해 보였다.‘그런데 이 남자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낯이 익지?’두 사람이 돌아서는 순간, 정은은 더욱 놀랐다. ‘고동건?! 그래서... 이 사람이 바로 수민이 말한 협력 상대인가?’수민은 앞으로 다가가서 정은의 손에 있는 가방을 받았다.“고마워, 정은아! 한밤중에 나와서 가방을 가져다주다니, 이제 빨리 돌아가. 너무 늦었으니 안전하지 않아. 난 여기서 네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게. 도착하면 베란다에서 손 흔들어. 그럼 나도 안심하고 갈 수 있어.”“응.”정은은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수민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보기엔 만만하고 단순하지만, 실제로는 다 자신의 속셈이 있었다.그래서 정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친구로서 가끔 침묵을 지키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존중이었다.수민은 약속한 대로 정말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정은이 베란다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서야 안심하고 떠났다.“아니... 내 차를 몰고 갔으니 날 태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동건이 쫓아갔다.“방향이 다른데 어떻게 태워주라는 거야?”동건은 말을 하지 않았다.“그냥 택시 타.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수민은 진심으로 제안했다.말하는 동시에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았고,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센 순간, 차는 화살처럼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갔다.남자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조수민, 너 차 다 수리됐잖아?! 왜 내 차를 빌리는 건데?! 좀 살살해, 새로 산 거라서 긁히게 하지 말고. 나도 아깝단 말이야.”그러나 동건이 고통을 참으며 빌려준 차는 다음날 도심에 나타났다. 그는 수민이
이튿날 정은은 아침 일찍 조깅을 하러 나갔다.한가해진 후, 그녀는 다시 조깅하기 시작했다. 매번 조깅을 마치면 온몸에 땀을 흘렸는데, 집에 가서 샤워를 하면 하루 종일 무척 정신이 맑았다.“좋은 아침이에요, 선배님.”“응.”재석은 이미 달리기를 마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은을 보자, 그는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가자, 내가 같이 달려줄게.”“실험실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새 과제는 전 교수가 책임지고 있어서. 난 요즘 그다지 바쁘지 않아.”“그럼 전 교수님도 수고가 많으시네요.”정은이 농담을 했다.“원망을 하고 싶어도 할 건 해야지.”그는 정색했다.만약 진욱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아예 미쳐버릴 것이다.두 사람은 공원을 따라 두 바퀴 돌았는데, 정은은 점점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재석은 이 상황을 보고 입을 열었다.“호흡을 조절하고, 달리는 리듬에 주의를 돌려. 날 따라해 봐. 숨 들이쉬고, 내뱉어.”정은은 따라했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다.“많이 좋아졌어요!”“계속 달릴 거야?”“오늘은 충분해요.”“좋아.”모처럼 만난 두 사람은 아침을 먹은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투고된 논문에 답장은 없었어?”정은은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에요.”“그것도 정상이야. 외국의 학과 잡지의 원고 심사 절차는 국내와 달리 아주 복잡해. 권위 있는 잡지라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거고.”논문을 언급하자, 정은도 기세를 몰아 고마움을 표시했다.“선배님, 실험실을 빌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 않았다면 난 이 세 편의 논문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임대료를 준다면, 선배님은 절대로 받지 않겠죠? 물론 이렇게 보답하는 것도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요.”“하지만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으면, 또 마음속으로 늘 미안한 느낌이 들어서요. 그래서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내린 결정인데, 선배님에게 밥 사주는 건 어때요?”재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누군가 한턱 내는 건 정말 좋은 일이지.”“그럼 뭐 먹을래요? 내가...” 정은
지금의 정은은 무척 태연했다.금방 헤어졌을 때처럼 걸핏하면 도겸을 떠올리며 쉽게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다.시간은 좋은 약이었다.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치유할 수 있었으니까.지금의 정은은 벌써 감정을 내려놓았다.그리고 한때 이 남자가 자신에게 준 상처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희석되어 결국 잊혀졌다.“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정은이 물었다.“앉아서 얘기하면 안 돼?”“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남은 거죠?”“정은아...”“강 대표님,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세요. 우린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도겸은 좌절감을 느꼈다.그리고 그는 재석을 바라보았다. 눈치가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자리를 비켜줬을 것이다.그러나 재석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가 눈짓을 해도 모르는 척했다.도겸이 전에 미친 짓을 너무 많이 했기에 정은은 그와 단둘이 지내고 싶지 않았다.“별일 없으면 우리 먼저 갈게요.” 그녀는 재석을 바라보고 재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우리? 그럼 난 뭐야?” 도겸은 이를 악물며 눈은 점점 붉어졌다.포악한 기색이 용솟음쳤지만 그는 곧 이런 감정을 억눌렀다.도겸은 말투를 누그러뜨리더니 정은의 두 눈을 주시했다.“내가 온 것은 너에게 그날 너의 '축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야.”‘아빠가 된 날 축하한다고? 허...’정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너...”“날 용서하지 않는다면, 난 평생 아빠가 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내 아이의 엄마는 반드시 너여야만 하니까.”정은과 재석은 모두 말문이 막혔다.‘이게 말이야 방귀야?! 진짜 징그러워서 못 들어주겠네!’“그냥 병원에 가보세요.”도겸은 영문을 몰랐다.“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일찍 치료해야죠.”말을 마치자, 정은은 재석에게 빨리 가자고 눈짓했다.그녀는 1초도 도겸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빌딩 안에 들어서서야 정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 선배님, 그
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에이, 손님이 주방에 들어오면 안 되죠!”“손님이 돕고 싶다고 해서.”재석이 도와주니 음식을 준비하는 속도가 많이 빨라졌다.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 정은은 농어를 물에서 건져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물기를 닦은 다음 표면에 식용유를 발라 생선의 신선함을 유지했다.재석은 할 일이 없어서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도와줘?”“위에 찜통 좀 꺼내줄래요?”“응.”그는 키가 커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었지만, 찜통이 걸린 위치가 마침 정은의 머리 위에 있어서 꺼내기가 좀 불편했다.재석이 그것을 꺼내려면 정은의 뒤에 서야 했다.손을 뻗으면 마치 여자를 품에 안은 것 같았다.다행히 눈 깜짝할 사이에 찜통을 꺼냈기에,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이리 줘요.” 정은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재석은 찜통을 건네주었다.그 순간,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남자는 숨이 멎었다.정은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찜통을 솥에 올려놓고는 생선을 찌기 시작했다.“에헴! 더 도와줄 거 없어?” 재석은 손을 거두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정은은 탁자 위의 그릇을 바라보았다.“음... 식재료는 이미 다 준비되었고, 모든 양념도 다 만들었으니 선배님 먼저 나가요.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면 되니까.”낡은 아파트인 데다가 또 평수가 작기 때문에 주방이 많이 좁았다. 남자가 떠나자, 공간은 순식간에 넓어졌다.정은의 착각인지, 그녀는 주방이 많이 시원해진 것 같았다.20분 후, 정은은 가스를 끄고 앞치마를 벗으며 음식을 상에 올렸다.재석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이미 그릇과 젓가락을 차려놓았다.“주방에 국이 하나 더 있지? 내가 가져올게.” 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재석은 이미 주방으로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버섯 전골이 주방에 놓여 있었다.정은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더니 다시 머리를 돌려 냉장고를 훑어보았다. 생각하다 그녀는 일어나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녀는 남자의 평온한 눈빛과 부딪쳤다.정
“앉아서 말해, 너무 정식적으로 나오니까 나도 좀 어색해서 그래.”정은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난 네가 만든 요리를 좋아하니까, 이번 식사가 가장 좋은 답례야.”말하면서 그는 국그릇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부딪쳤다.이어 치킨 하나를 집었다.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치킨은 바삭하고 즙이 있어 무척 맛있었다.“밖에서 이렇게 맛있는 치킨을 먹으려면 쉽지가 않거든.”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남은 치킨을 모두 선배님에게 맡길까요?”재석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환하게 웃었다.“그럼 더 좋고.”식사를 마치자, 시간은 벌써 오후 2시가 되었다.함께 주방을 정리한 다음 두 사람은 외출했다.재석은 실험실에 가야 했고 정은은 도서관에 가려 했으니 마침 동행할 수 있었다.갈림길에 이르자, 재석은 왼쪽으로 걸어갔다. 도서관은 오른쪽에 있었지만 정은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실험실의 방향으로 걸어갔다.잠시 후, 정은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자신이 더 이상 실험실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정은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도망치듯 도서관에 들어갔다....이튿날, 정은은 실험실에 찾아갔다.물론 빈 손이 아니라 직접 만든 간식을 챙겼다.미진 그들은 도시락통에 담긴 정교한 케이크를 보며 분분히 감탄했다.“정은아, 이거 네가 만든 거야? 너무 예뻐.”“먹기가 좀 아까운데.”“이건 키티, 이건 제리... 어머! 범블비도 있다니? 손재주가 너무 좋은 거 아니니?”태민도 와서 구경했는데, 수아가 좋아하는 스텔라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정은아, 이거 나 줘도 돼?”“네, 가져가세요.”미진은 단번에 알아차렸다.“수아에게 주려고?”“네.” 태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이미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으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맛있네, 하나도 질리지 않아.”그는 평소에 단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았지만, 지금 오히려 이 케이크를 단숨에 다 먹었다.“그동안 선배님들의 보살핌과
정은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는데, 이번에는 더 조심하게 걸었다.모두들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정은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진욱은 직접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자, 정은아, 내 팔 빌려 줄게. 근육이 튼튼하니까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거야.”오직 수아만이 정은의 허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식사할 때, 태민은 수아가 거의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가 어디 불편한 줄 알았다.“오늘 왜 이렇게 입맛이 없는 거야? 또 위가 아픈 거야?”수아는 늘 하루 세 끼를 제때에 먹지 않았기에 태민은 잔소리하는 것에 익숙해졌다.“오늘 음식들은 아주 담백하니까 위에 부담이 없을 거야. 이건 네가 가장 좋아하는...”“잔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수아는 태민의 손을 뿌리쳤다.“저는 단지 먹고 싶지 않을 뿐인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내가 먹든 안 먹든 당신과 무슨 상관인 거죠?”요리를 집어주던 태민은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말했다.“나도 잔소리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네가 아플까 봐 걱정돼서 그래...”모두들 그 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모두 자기 것만 먹었다.상관하기 싫은 게 아니라 벌써 익숙해진 것이었다.어차피 태민만 행복하면 되니 그들은 남으로서 말참견을 할 필요가 없었다.잘못하면 또 남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었기에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힘들게 남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재석은 담담하게 태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모든 주의력이 수아에게 있어 재석의 눈빛을 전혀 주의하지 못했다.정은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남의 일에 흥미가 없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음식에 집중했다.‘역시 최고급 레스토랑이야. 정말 맛있어.’...이날이 지난 후, 정은은 재석의 실험실과 철저히 작별했다.며칠 한가하게 지내다가 주말 오후에 정은은 갑자기 소진헌의 전화를 받았다.[정은아,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궁금하지 않아?]“그럼요.” 정은은 대충 알아맞혔지만 그래도 계속 궁금한 척
류춘미처럼 무지막지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손해를 그냥 보고 넘길 수 있겠는가?그녀는 그날 바로 부동산으로 달려가 소란을 피웠다.하지만 부동산 책임자는 냉정하게, 그 젊은이가 이미 3일 전에 사직하고 떠났다고 전했다.‘범인’을 찾지 못한 류춘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부동산 앞에서 행패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매일같이 부동산에 찾아가 소란을 피우고, 나중에는 친척과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 시위까지 벌였다.일이 점점 커지자 결국 부동산 점장도 어쩔 수 없이 그 젊은이의 주소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류춘미는 그 주소를 손에 쥐고, 이를 악물며 그 젊은이를 찾아갔다.하지만 막상 젊은이를 마주했을 때, 그는 전혀 찔리는 기색도 없었다.오히려 그는 당당한 얼굴로 류춘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어차피 그 집은 이미 저한테 파셨잖아요. 저도 돈을 지불했고요. 이제 집문서에는 제 이름이 적혀 있으니, 이렇게 소란을 피워도 아무 소용 없어요.”그 말에 류춘미는 더 이상 이성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집 앞에 주저앉아 매일같이 울고 불며 난리를 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젊은이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류춘미가 소란을 피우는 모습을 보더니, 마치 흉내라도 내듯 바닥에 누워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결국 이웃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경찰에 신고하게 되었다. 민폐라는 이유로 말이다.두 사람 다 경찰서로 끌려갔다.조사를 거쳐, 류춘미의 집은 확실히 남에게 팔았고, 계약도 체결했으며 돈까지 받았다. 그렇게 집도 성공적으로 명의를 변경했다.그녀가 계속 원망을 해봤자 지금 이 집은 그 젊은이의 것이었다.“그래요! 이 아줌마가 급하게 집을 바꾸려고 한 것 같아서 제가 제 돈으로 그 헌집을 산 거예요. 그런데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죠? 누가 그 집이 철거될 줄 알았겠어요? 저는 미래를 볼 능력이 없잖아요. 아줌마가 운이 나빴다고 말할 수밖에 없죠. 그냥 집에 가서 씻고 주무세요. 계속 소란을 피워도 저는 이 집을 돌려줄 수 없으니까요.”“만약
[너 논문 쓰느라 바쁘다며? 우리가 오면 괜히 네 일만 방해하는 거 아니야?]“그럴 리가요. 저 이미 논문을 다 썼는데, 잡지사에 투고까지 했어요. 요즘 많이 심심해요.”[하지만 삼복날에 전국 각지에서 고온 경보가 떴으니, 이때 여행을 하는 것은 너무...]옆에 있던 이미숙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아빠 말 듣지 마. 지금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 있으니까.]소진헌은 가볍게 기침을 했다.[내가 언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지금 바로 기차표를 예약해 줄게요.”전화를 끊고 그녀는 얼른 두 사람을 위해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했다....소진헌과 이미숙은 딸이 보낸 문자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내일의 기차였다.두 사람은 곧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 계집애도 참. 시간이 너무 빠듯하잖아. 그리고 몇 시간밖에 안 걸리는데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하다니. 괜히 돈만 낭비하고 있어...”소진헌은 정리하면서 중얼거렸다.이미숙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정은이는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보고 싶은 거예요. 몇 시간밖에 안 걸린다고요? 일반 좌석은 오래 앉으면 허리가 얼마나 아픈데, 그게 편하겠어요? 정은이는 우리를 걱정해서 비싼 표를 끊어준 거예요. 딸이 스스로 돈을 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했는데, 당신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줄 때 그냥 받아요.”소진헌은 혀를 내둘렀다.“이것 좀 봐, 내가 한 마디 했다고 열 마디를 받아치네.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정은이가 돈을 좀 적게 썼으면 해서 그런 거잖아...”“그럼 당신 혼자 일반 좌석에 가요.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살림이 가난해도 여행을 할 땐 돈을 실컷 써야죠. 평소에 절약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먼 길을 떠날 때까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이왕 놀러 간 이상 당연히 즐겁고 편안하게 놀아야 하지 않겠어요?”“그래, 우리 마누라 말이 맞네!”소진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숙의 말을 이어받았다.짐을 쌀 때,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