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는데, 이번에는 더 조심하게 걸었다.모두들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정은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진욱은 직접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자, 정은아, 내 팔 빌려 줄게. 근육이 튼튼하니까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거야.”오직 수아만이 정은의 허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식사할 때, 태민은 수아가 거의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가 어디 불편한 줄 알았다.“오늘 왜 이렇게 입맛이 없는 거야? 또 위가 아픈 거야?”수아는 늘 하루 세 끼를 제때에 먹지 않았기에 태민은 잔소리하는 것에 익숙해졌다.“오늘 음식들은 아주 담백하니까 위에 부담이 없을 거야. 이건 네가 가장 좋아하는...”“잔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수아는 태민의 손을 뿌리쳤다.“저는 단지 먹고 싶지 않을 뿐인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내가 먹든 안 먹든 당신과 무슨 상관인 거죠?”요리를 집어주던 태민은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말했다.“나도 잔소리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네가 아플까 봐 걱정돼서 그래...”모두들 그 두 사람을 상관하지 않고 모두 자기 것만 먹었다.상관하기 싫은 게 아니라 벌써 익숙해진 것이었다.어차피 태민만 행복하면 되니 그들은 남으로서 말참견을 할 필요가 없었다.잘못하면 또 남에게 미움을 살 수도 있었기에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힘들게 남의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재석은 담담하게 태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모든 주의력이 수아에게 있어 재석의 눈빛을 전혀 주의하지 못했다.정은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남의 일에 흥미가 없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음식에 집중했다.‘역시 최고급 레스토랑이야. 정말 맛있어.’...이날이 지난 후, 정은은 재석의 실험실과 철저히 작별했다.며칠 한가하게 지내다가 주말 오후에 정은은 갑자기 소진헌의 전화를 받았다.[정은아,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궁금하지 않아?]“그럼요.” 정은은 대충 알아맞혔지만 그래도 계속 궁금한 척
류춘미처럼 무지막지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손해를 그냥 보고 넘길 수 있겠는가?그녀는 그날 바로 부동산으로 달려가 소란을 피웠다.하지만 부동산 책임자는 냉정하게, 그 젊은이가 이미 3일 전에 사직하고 떠났다고 전했다.‘범인’을 찾지 못한 류춘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부동산 앞에서 행패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매일같이 부동산에 찾아가 소란을 피우고, 나중에는 친척과 친구들까지 데리고 와 시위까지 벌였다.일이 점점 커지자 결국 부동산 점장도 어쩔 수 없이 그 젊은이의 주소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류춘미는 그 주소를 손에 쥐고, 이를 악물며 그 젊은이를 찾아갔다.하지만 막상 젊은이를 마주했을 때, 그는 전혀 찔리는 기색도 없었다.오히려 그는 당당한 얼굴로 류춘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어차피 그 집은 이미 저한테 파셨잖아요. 저도 돈을 지불했고요. 이제 집문서에는 제 이름이 적혀 있으니, 이렇게 소란을 피워도 아무 소용 없어요.”그 말에 류춘미는 더 이상 이성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집 앞에 주저앉아 매일같이 울고 불며 난리를 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젊은이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류춘미가 소란을 피우는 모습을 보더니, 마치 흉내라도 내듯 바닥에 누워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결국 이웃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경찰에 신고하게 되었다. 민폐라는 이유로 말이다.두 사람 다 경찰서로 끌려갔다.조사를 거쳐, 류춘미의 집은 확실히 남에게 팔았고, 계약도 체결했으며 돈까지 받았다. 그렇게 집도 성공적으로 명의를 변경했다.그녀가 계속 원망을 해봤자 지금 이 집은 그 젊은이의 것이었다.“그래요! 이 아줌마가 급하게 집을 바꾸려고 한 것 같아서 제가 제 돈으로 그 헌집을 산 거예요. 그런데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죠? 누가 그 집이 철거될 줄 알았겠어요? 저는 미래를 볼 능력이 없잖아요. 아줌마가 운이 나빴다고 말할 수밖에 없죠. 그냥 집에 가서 씻고 주무세요. 계속 소란을 피워도 저는 이 집을 돌려줄 수 없으니까요.”“만약
[너 논문 쓰느라 바쁘다며? 우리가 오면 괜히 네 일만 방해하는 거 아니야?]“그럴 리가요. 저 이미 논문을 다 썼는데, 잡지사에 투고까지 했어요. 요즘 많이 심심해요.”[하지만 삼복날에 전국 각지에서 고온 경보가 떴으니, 이때 여행을 하는 것은 너무...]옆에 있던 이미숙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네 아빠 말 듣지 마. 지금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 있으니까.]소진헌은 가볍게 기침을 했다.[내가 언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지금 바로 기차표를 예약해 줄게요.”전화를 끊고 그녀는 얼른 두 사람을 위해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했다....소진헌과 이미숙은 딸이 보낸 문자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내일의 기차였다.두 사람은 곧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 계집애도 참. 시간이 너무 빠듯하잖아. 그리고 몇 시간밖에 안 걸리는데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하다니. 괜히 돈만 낭비하고 있어...”소진헌은 정리하면서 중얼거렸다.이미숙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정은이는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보고 싶은 거예요. 몇 시간밖에 안 걸린다고요? 일반 좌석은 오래 앉으면 허리가 얼마나 아픈데, 그게 편하겠어요? 정은이는 우리를 걱정해서 비싼 표를 끊어준 거예요. 딸이 스스로 돈을 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예약했는데, 당신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줄 때 그냥 받아요.”소진헌은 혀를 내둘렀다.“이것 좀 봐, 내가 한 마디 했다고 열 마디를 받아치네.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정은이가 돈을 좀 적게 썼으면 해서 그런 거잖아...”“그럼 당신 혼자 일반 좌석에 가요.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살림이 가난해도 여행을 할 땐 돈을 실컷 써야죠. 평소에 절약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먼 길을 떠날 때까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이왕 놀러 간 이상 당연히 즐겁고 편안하게 놀아야 하지 않겠어요?”“그래, 우리 마누라 말이 맞네!”소진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숙의 말을 이어받았다.짐을 쌀 때,
재석은 재빨리 두 사람의 나이와 생김새에서 그들의 신분을 추측해냈다.그리고 웃으며 앞으로 다가가서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조재석이라고, 정은이의 이웃이에요.”정은도 정신을 차리며 즉시 재석을 소개했다.“아빠, 엄마, 이분이 바로 저에게 실험실을 빌려준 조 교수님이에요.”소진헌은 그제야 반응했다.“교수님이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시네요.”이미숙도 살짝 의아해하며 얼른 미소를 지었다.“그동안 저희 정은이를 잘 보살펴 주셔서 고마워요.”“아저씨, 아주머니, 별말씀을요. 그냥 제 이름을 부르시면 됩니다.”‘이름을 부르라고? 그럼 정은이와 동급이 되는 거잖아?’“어? 이건...”소진헌은 재석의 손에 있는 크라프트지 표지에 주의를 기울였다. 책 같기도 하고 또 서류 같기도 했다.“이것은 옆의 연성대학교 물리학과 진 교수님에게 빌린 '탁상달력필기'예요.”소진헌이 알아듣지 못할까 봐 재석은 계속 해석했다.“이 ‘탁상달력필기’는 연성대학교 물리학부의 전통이에요. 교수님들은 매년 가장 우수한 학생들에게 현재 연구하고 있는 인기과제에 근거하여 수시로 필기를 정리하게 했거든요. 간단한 필기지만, 보통 이 학생들은 인기 과제와 미래 세계적인 연구 추세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을 했어요.”“매년 한 학생이 이 필기를 이어받았죠. 일반적으로 4년을 주기로 했으니, 그 사람이 졸업한 후에는 다음 학생에게 맡기는 거죠. 진 교수님은 역대 학생들이 적은 필기를 연도에 따라 간단하게 제본하셨어요. 마치 평소에 쓰는 ‘탁상달력’처럼요. 그래서 우리도 이것을 ‘탁상달력필기’라고 부르고 있어요.”재석은 전문 용어를 최대한 줄이고 직설적이게 설명하려 했지만, 소진헌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왜냐하면 그의 표정이 좀 멍해졌기 때문이다.마치 어리둥절해진 것 같았다.“죄송해요, 제가 너무 복잡하게 설명했죠?”이때 이미숙은 고개를 돌려 소진헌을 바라보았다.“당신이 늘 입에 달고 다니던 그 교수님의 이름도 성이 진 씨 아니었어요? 무슨 범이라
소진헌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재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서야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그가 떠나고 나자, 정은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놓느라 바빴다.이미숙과 소진헌은 오랜만에 딸의 거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방 두 개에 거실 하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집이었다.배치와 인테리어는 오래된 느낌이 강했지만, 안에 있는 가구들은 모두 새것이었다. 소파, 서랍장, 전자 기구들까지, 부족한 게 없어 보였다.낡아서 개선할 수 없는 흠집들은 아기자기한 장식품들로 가려져 있었다. 흠이 있었지만, 그 흠마저도 나름대로 정성껏 숨긴 흔적이 역력했다.전체적으로 보면 꽤나 정교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원래 정은의 부모는 낡은 계단을 올라올 때부터 딸의 거주 환경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와 보니,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미숙은 그런 딸의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정은이 직접 세낸 집을 이렇게 아늑하고 정성스럽게 꾸며놓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딸이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점에 대견함을 느꼈다.인생은 대충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생활에 대한 태도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딸이 몸소 보여주는 것 같았다.이미숙이 소진헌과 막 결혼했을 당시, 소진헌의 월급은 겨우 60만 원에 불과했다.그중 40만 원은 부모님께 용돈으로 드려야 했으니, 젊은 부부에게 남겨진 돈은 20만 원뿐이었다.정은이 태어난 후, 살림살이는 더 빠듯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숙은 반달에 한 번씩 꼭 꽃을 샀다.형편이 괜찮을 때는 꽃집에서 비싼 꽃을 샀고, 월말이 되어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주말에 등산을 가며 들꽃을 따다 꽃병에 꽂았다.정은은 어릴 적부터 이미숙이 참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심지어 가끔씩 보여주는 ‘대범함’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그러나 과거
소진헌이 물었다.“당신이 무슨 경찰이야? 게다가 정은이도 당연히 그 교수님의 개인 사정에 대해 잘 모르겠지. 다음에 직접 조 교수에게 물어보자.”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야죠.”“아니... 진심이야?” 소진헌은 놀랐다.이미숙은 눈을 부라렸다.“정은아, 설탕 있어?”“네, 가져올게요.” 말하면서 정은이 일어섰다.딸이 떠나자, 이미숙은 그제야 소진헌에게 말했다.“정은이 평소에 혼자 지내는 데다가, 이 조 교수님과 이웃이잖아요. 두 사람의 관계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고. 그러니 좀 분명하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어요?”“하긴, 역시 우리 마누라가 똑똑하네, 헤헤...”이미숙은 그를 노려보았다.“저리 좀 가요. 이따가 정은이가 나오면 어떡하려고요?”“에헴!” 소진헌은 바로 똑바로 앉았다.“그럼 조심해야지!”방은 이미 다 정리되었고, 정은은 심지어 부모님을 위해 새로운 침대를 바꾸기도 했다.침대 시트와 이불 커버도 모두 새로 산 것이라,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린 다음 침대에 깔았다.“엄마, 아빠, 일단 낮잠 좀 주무세요. 이따가 두 분 데리고 나가서 구경할게요. J시에 몇 번이나 오셨는데, 두 분 데리고 놀 기회가 없었잖아요. 이번에 다 보충할게요.”소진헌과 이미숙은 J시에 온 적이 있었다.정은이 대학 다니는 동안, 그들은 그녀를 보러 세 번 찾아왔다.처음은 신입생으로 입학할 때 정은과 같이 등록하러 왔었다.두 번째는 정은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여름방학할 때 한 번 왔었다.강도겸을 한 번 보고 싶어서.그들이 온 지 3일이나 되었지만, 이틀 동안 줄곧 정은이 그들과 함께 했다. 도겸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나타나더니 황급히 식사를 한 후에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로 떠났다.세 번째는 정은의 졸업식이었다.두 사람은 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목격하며 무척 기뻤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그녀가 뜻밖에도 스스로 대학원으로 진입하는 것
“우리 여보밖에 없어.”“그만하고 좀 자요.”“어.”일찍 자는 것은 정말 정확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튿날 정은이 그들을 데리고 경복궁에 갔기 때문이다.날씨는 무척 맑았다.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 햇빛은 아직 심하게 내리쬐지 않았다.소진헌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기세가 웅장하다는 것밖에 느끼지 못했다.이미숙은 오히려 좀 멍해졌다.“왜 그래요, 엄마?” 정은은 그녀가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그곳이 바로 창덕궁이지?”“네.”“조선 왕조 도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있고, 응봉에서 뻗어나온 산줄기에 자리잡은 그 궁궐?”“맞아요.” 정은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엄마, 이번에 미리 공부라도 하신 거예요?”이미숙은 인생을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었다.어디 놀라가도 미리 계획하지 않았고, 어디를 가든지 앉아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번에 미리 준비를 했다니?정은도 많이 놀랐다.이미숙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약간의 의혹을 느낄 뿐이었다.사실 그녀는 여기에 오기 전에 아무런 계획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전에 창덕궁에 관한 자료도 찾지 않았다.그러나 이 정보들은 이미숙이 그곳을 본 순간,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것일까?’소진헌은 처음에는 자신감이 넘쳤지만, 경복궁을 다 관람한 뒤 힘이 빠졌다.“안 되겠어, 너무 피곤하고 더우니까 좀 쉬었다가 가자.”이미숙은 그를 비웃었다.“누가 어제 큰소리를 떵떵 쳤죠? 그런데 이제 경복궁 하나 봤다고 벌써 힘이 든 거예요?”소진헌은 당당했다.“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래. 오래 걸어서 이렇게 숨을 헐떡이고 있잖아. 그 젊은이들 좀 봐. 얼마 가지도 못하고 바로 떠나다니! 나보다 훨씬 못하군.”밖에는 확실히 많은 젊은이들이 고개를 돌려 떠나기 시작했다.이미숙은 어이가 없었다.‘그래, 말로 그이를 이길 수가 없지.’정은은 부모님의 말다툼을 보면
정은이 이렇게 놀란 것도 당연했다.우선 평소 이 시간에 재석은 실험실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다른 곳에 나타날 리가 전혀 없었다.둘째, 그와 소진헌은 뜻밖에도 장기를 두고 있었고, 손에는 '탁상달력필기'가 놓여 있었다.두 사람은 매우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무척 화기애애했다.“정은아, 돌아왔어?”인기척을 듣고 소진헌은 즉시 현관을 바라보았다.재석도 고개를 돌렸는데, 정은과 시선을 마주했다.그 순간, 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내가 여기에 있는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선배님이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정은은 반응하며 슬리퍼를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갔다.재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진헌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오전에 내가 네 엄마와 외출할 때 계단에서 조 교수를 만났거든. 그래서 집으로 초대했어.”그러나 얘기를 나누자마자, 소진헌은 자신이 어떤 화제를 언급하든 재석이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심지어 화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후에 물리와 관련된 일을 말하니, 그것은 재석의 본업이었기에, 두세 마디로 소진헌은 철저히 탄복했다.“나도 이제 늙었구나, 지금은 젊은이들의 세상이야!”재석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천만에요, 아저씨야말로 진정한 실력자시죠.”그도 인사치레를 하는 게 아니었다.소진헌은 엄청난 지식을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고방식이 뛰어났다. 이는 그가 대학교를 다닐 때 착실하게 공부한 덕분이었다.재석도 이 점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정말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소진헌이 현재 물리 분야의 최신 연구 방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그 외에도 소진헌은 관련 분야의 일부 최신 연구 성과를 말해낼 수 있었다.이것은 일반 대학생이 아니었다. 장시간, 주기적으로 논문을 읽어야만 이런 실력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평소에 논문을 읽는 습관이 있으시죠?”“매일 수업 준비를 마치면 심심풀이 삼아 한두 편 정도 보곤 했지.”“방금 언급하신 플라스틱 표적의 중성미자에서 내부 양자 구
처음엔 진영매도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아이고... 또 오타네... 이걸 또 지우고 다시... 에구구...’속도도 느리고, 자꾸 엉뚱한 단어가 입력돼서 정말 진땀을 뺐다.하지만 어느 날, 자판 옆에 있는 마이크 버튼을 눌러봤고, ‘음성 입력' 기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게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어머, 말만 하면 글자가 나오네? 이거 진짜 신기하네...’그 뒤로 점점 익숙해지면서 진영매는 ‘두부 단톡방’을 직접 관리하게 되었고, 주문 확인도 척척 해냈다.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택배 보관소를 운영하는 이웃 아주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언니도 공동구매 한번 해보는 거 어때요? 요즘 동네 맘카페나 톡방에서 다 그걸로 부수입을 벌어요.”“공동구매요?”“네, 단톡방에 링크만 올리면 되는데, 그 링크로 누가 주문하면 언니한테 수수료가 떨어져요. 요즘 그런 플랫폼이 많아요.”그 말에 진영매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작은 물건 몇 개부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무작정 링크만 던져놓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다.직접 샀다. 직접 써봤다. 직접 먹어봤다.그리고 진심 담긴 후기를 함께 적어 올렸다.[이건 제가 직접 삶아봤는데, 식감도 쫄깃하고 가격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신 분만 구매하시고, 안 맞을 것 같으면 굳이 안 사셔도 돼요.]‘괜히 민폐 되기 싫으니까...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지.’그런데 이렇게 정성껏 올린 글이 톡방 안에서 반응이 꽤 좋았다.처음엔 몇 개, 그러다 열 개, 스무 개... 요즘은 많을 땐 하루에 백 개 넘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하루 수익만 몇만 원 되는 날이 생기자, 남봉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진짜? 당신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그렇게 번 거야?”그는 아침마다 두유를 끓이고, 비지 짜고, 순두부 포장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세 군데씩 배달을 돌곤 했다.‘점심엔 다시 나가 광장에 작은 천막을 치고 두부 요리 판매, 해 질 무렵에야 집에
어느새 정은이 실험실에서 지낸 지 거의 2주가 되었다. 이번 집중 실험은 처음 계획대로라면 이틀 정도 일찍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불꽃 열정 모드로 돌입했다.“정은 언니! 우리 이참에 2차 실험안도 다 밀어붙여요! 타이밍 완벽하잖아요! 이왕 하는 김에 끝까지 가보자고요!”진일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했다.‘어차피 난 어제도 오늘도 실험실에서 잘 운명인데...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거기서 거기지 뭐.’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민지 편. 민지가 하자고 하면, 그냥 했다. 이유는... 말 안 해도 알지 뭐.정은은 그런 셋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자.”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 더 실험실에 갇혀 살며 2차 실험안까지 초안 작업을 마무리했다.민지의 슬로건은 이랬다.“오세요! 같이 말아봐요! 끝없는 연구의 늪!”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정리한 날.“정은 언니! 헤헤. 저요... 연차 쓸게요! 푹 쉬어야겠어요!”‘뭐야, 이 모든 열정의 뿌리는 결국... 편하게 놀기 위한 전주곡이었어?’정은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승인.”오후엔 서준이 조용히 다가왔다.“누나...”“혹시 너도 연차 쓰려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둘이 같이...? 이건 무슨 흐름이지?’그렇다면 정은은 결단을 내렸다.“그냥 모두 이틀씩 쉬자. 다들 수고했으니까.”‘일도 일이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래야 오래 가지.’특히, 실험복을 벗지도 않고 앉아 있는 진일을 보며 정은은 단호히 말했다.“진일 선배는 특히 금지! 쉬는 날에 실험실 들어오면, 바로 벌금이에요!”진일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벌금...? 아니, 요즘은 연차 쓰라고 협박하는... 그런 시대인가...?”정은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일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그럼... 집에 좀 다녀올게. 이맘때쯤이면 우리 집은 옥수수 수확 시즌이라... 도와야 하거든, 헤헤.
정은은 순간 멈칫했다.“조 교수님? 그분이 여길 다녀가셨어?”“네, 두 시쯤 오셨던 것 같아요. 한참이나 언니를 기다리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한 시간 넘게 앉아 계시다가 10분 전에 그냥 가셨어요.”‘10분 전...?’정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언니, 조 교수님...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으신 것 같지 않아요? 혹시 다른 실험실에 새로운 과제라도 시작한 걸까요? 지난번 과제 마무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새로운 시작이라니... 진짜 무서워요, 그 열정...”정은은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그런 생각이 들어?”“그게... 오늘 조 교수님 상태가 좀 이상했어요. 뭐랄까... 눈 밑 다크서클이 거의 좀비 수준...? 적어도 이틀은 연달아 밤을 새우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표정도 되게 딱딱하고... 그냥 누가 봐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그런... 음... 미간 주름으로 모기를 잡을 수 있을 정도...?”‘그랬구나.’정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뭐, 늘 바쁘시잖아.”정은은 애써 담담하게 넘기려 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복잡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민지는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근데 진짜... 이상하게 느껴졌단 말이지...’‘그냥 피곤해 보인 게 아니라, 뭔가... 속이 무너진 느낌?’...한편, 재석은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몰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그리고 차를 멈춰 세우자,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정은이는 오늘 차를 가져갔었네.’‘그럼... 차를 가져갔으면서, 왜 장은혁 차를 타고 왔지?’입술이 아주 얇게 다물어졌다.표정 하나 없이, 그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 건 사람은 진욱이었다.[나, 어제 분명히 퇴근 전에 분석 리포트를 너한테 넘겼었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없어졌어. 어디 간 거지?] 재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기본적인 실수는 애초에 그
은혁은 뭔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낯설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리는 느낌. ‘이런 게 설렘인가...?’“은혁 씨, 고마워요.”멀리서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넨 정은은 조용히 걸어가며 귀걸이를 착용했다. “정... 정은 씨!”그 순간, 정은이 멈춰 서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네? 무슨 일 있어요?”은혁은 당황해서 말이 꼬였다.“저, 그게...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식사 한번...” “아니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시간 되실 때... 제가 꼭 한번 대접하고 싶어서...”정은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식사요...? 왜요?”“그게...”은혁은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잽싸게 핑계를 떠올렸다.“아! 제 사촌 여동생이요, 예전에 정은 씨가 보내준 시험 대비 정리자료를 되게 잘 봤다고...”“꼭 밥 한번 사드리라고... 신신당부해서요! 감사 인사 겸해서요!”정은은 시선을 실험실 방향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죄송해요. 오늘은 당장 들어가서 실험해야 해요... 그리고 요즘은 계속 이 안에서 지내느라, 언제 시간이 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은혁이 다시 입을 열려 하자, 정은은 살짝 웃으며 말을 끊었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정은은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해 실험실로 들어갔다.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혁. 문 옆에 붙어 있는 간판을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무한 실험실?”차로 돌아온 은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무한 실험실... 설립, 소정은, 연구 성과...]‘정은 씨... 서비대 대학원을 나왔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다고?’논문 게재 수, 영향력 지수, 직접 설립한 실험실, 정부 과제 주도...은혁은 화면을 스크롤 하며, 점점 입꼬리가 올라갔다.‘이 정도면... 그냥 똑똑한 수준이 아니네. 완전 대단하잖아...’그렇게 넋을 놓고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 갑작스러운 경적이 들렸다. 빵!까맣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