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97화

Author: 십일
“한 번 보세요, 제가 계산한 거 맞나요?”

미진은 자세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는 것 같아.”

진욱은 경험이 많아 한눈에 이상한 점을 보아냈다.

“이 두 곳은 여전히 틀리잖아.”

“7번째 줄의 두 데이터가 모두 계산이 잘못되었어요. 50과 71이 아니라 50.2와... 70.88일 거예요.”

정은은 지나갈 때, 그 장편의 수치를 보았고, 한눈에 7번째 노드에서 두 수치가 모두 틀렸다는 것을 보아냈다.

평소에 네 사람은 실험실에서 줄곧 정은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해왔다.

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비록 미진처럼 우호적이고 진욱처럼 마음이 너그럽다 하더라도, 그들은 정은과 그런 천연적인 거리감을 두었다, 이것은 밥 몇 끼 같이 먹는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학력, 지위, 나이, 그리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가져오는 장벽이었다.

그들은 태민과 수아를 대할 때, 분명히 정은을 대할 때와 많이 다를 것이다.

이때 정은의 말을 듣고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심을 드러냈다.

수아는 아예 입을 삐죽거렸다.

진욱은 그들 중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속산 능력이 가장 강했다. 그조차도 알아볼 수 없는 문제인데, 정은이 한눈에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니?

‘장난해?’

미진은 정은이 관심을 얻기 위해 고의로 이렇게 말한 것일까 봐 먼저 입을 열었다.

“정은아, 이 몇 조의 데이터는 줄곧 태민이 계산하고 있었는데, 1판도 이미 나왔고, 우리도 모두 대조한 적이 있어. 넌 지금 노드의 원시 데이터에 문제가 있다고 하다니, 그... 그럴 리가 없을 거야.”

진욱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재석도 모두 검산한 적이 있어서 문제가 없어.”

“허-”

수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좀 조용히 있으면 안 돼? 모르면 말하지 말고, 왜 자꾸 남의 일에 끼어들려 하는 건데? 정말 웃겨!”

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믿지 못하겠으면 한 번 검사해 보세요.”

“검사는 무슨?”

수아는 직접 그녀의 말을 끊었다.

“우리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98화

    진욱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정은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사람은 주제를 잘 알아야 해, 알아? 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뜻밖에도 물리팀의 실험 데이터에 이래라저래라 간섭을 하다니, 사람들 웃겨 죽을지도 모르겠네...”바로 이때, 줄곧 컴퓨터 앞을 지키면서 열심히 타자를 하던 태민이 갑자기 흥분해하며 말했다.“방금 다시 한번 계산했는데, 정은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요.”수아는 갑자기 말문이 막히더니 소리가 뚝 그쳤다.미진과 진욱도 깜짝 놀랐다.“50과 71이 아니라, 50.2와 70.88까지 정확해야 했어요! 바로 이 정도의 편차로 7번째 노드 뒤의 모든 수치에 이상이 생겼던 거예요.”과학 연구는 바로 이렇다. 한 치의 실수라도 그 결과에 엄청난 차이가 생길 수 있었다.진욱은 즉시 스크린 앞에 다가갔다. 이번에 그는 어디도 놓치지 않고 수정한 후의 50.2와 70.88에 따라 속산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의 모든 수치가 자동적으로 수정되었다.그는 두 눈에서 빛이 났다.“이번에 맞았네, 보아하니 확실히 7번째 노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미진도 계산해보니 확실히 맞았다. 이 순간, 그녀는 정은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놀라움, 경악, 그리고 미안함.‘아까 난 정은을 위해 나서지 않았는데...’태민은 이미 호칭을 바꾸었다.“우리 정은아, 이번에 다 네 덕분이야! 이 데이터 때문에 내가 3일 동안 잠을 자지 못했어. 네가 제때에 잘못된 점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우리 팀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정은은 아주 평온했다. 방금 수아가 자신을 욕할 때부터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운이 좋아서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에요. 제가 아니더라도 전 교수님의 속산 능력이라면, 곧 잘못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그녀도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진과 태민이 보기에는 털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섬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수아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니, 정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99화

    이건 마치 목사가 사냥꾼에게 사냥을 어떻게 하는지 가르치는 것만 같았다...‘누가 믿겠어!’정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수아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수아 선배님의 가르침, 정말 고마워요. 저야 당연히 연구사업이 엄밀하고 진실성을 추구하며 실무적이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죠. 이는 과학연구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의견을 청취하고 합리한 건의를 채납할 수 있는 도량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수아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죠?”“오늘 같은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누가 수정의견을 제기하든, 의견이 무엇이든 검증을 거친 후에 다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지, 개인의 느낌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건 아니죠.”정은의 말투는 마치 객관적인 사실을 진술하는 것처럼 평온했다.그러나 수아에게 있어, 그것은 바늘처럼 날카롭게 그녀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교훈이 아니었지만 교훈처럼 들려왔다.수라의 얼굴은 순식간에 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또 바쁜 하루였다. 정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운 다음, 베개를 안고 잠들었다.같은 밤, 어떤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느라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지만, 또 어떤 사람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소란스러운 음악 소리, 현란하고 눈부신 불빛, 섹시하고 젊은 여자들이 무도장에서 마음껏 춤을 추고 있었다. 고동건도 이 열정 때문에 저절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그리고 손에 와인잔을 쥐며, 붉은 와인은 그의 동작에 따라 흔들렸다.동건은 가끔 무도장 속의 그 젊은 여인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사냥감을 고르고 있는 표범과 같았다.“뭘 봐요? 카드놀이 한다고 했잖아요? 왜요, 많이 져서 놀기 싫어요?”선우는 술을 들고 왔는데, 동건이 혼자 숨어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나른하게 비웃었다.동건은 눈썹을 찌푸렸다.“무슨 소리야, 난 지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어. 오늘 밤은 운이 좋네. 그 여자들 모두 내 타입이야, 이건 카드놀이보다 훨씬 재미있지 않니?”무도장에서 검은색 탱크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00화

    남자는 짜증이 났고, 무척 초조해했다. 도겸은 시간을 보았는데, 이제 겨우 9시였다. 그러나 집에서 이미 전화를 4~5통 걸었고, 그중 3개는 도겸의 어머니, 나머지 하나는 서연희였다.연희는 도겸이 받지 않을 줄 알고 한 통 건 다음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눈치가 있었다.그런데도 도겸은 귀찮았다. 특히 최근 별장에 남이 하나 더 생겼다는 생각에 더욱 귀찮아졌다.선우는 시간을 보았다.“아직 이른데, 벌써 가려고요?”도겸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우는 그가 비록 술에 취하지 않았지만, 온몸의 포악한 기운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선우도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우리 기사가 아래층에 있으니까 내가 형 데려다 주라고 할게요.”“고마워.”“나한테 고맙긴요?” 선우는 술잔을 내려놓았다.“도겸이 형, 내가 데려다 줄게요.”도겸는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너희들끼리 놀아.”동건은 멀리 떠나는 도겸을 보며 가볍게 웃더니 감탄했다. 그러나 그는 고소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도겸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서연희는 정말 대단한데? 이렇게 능력이 있는 여자였어?”“말 좀 작작 해요. 도겸이 형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은데...”“나 같아도 괴롭겠다. 수박을 잃어버리고 참깨를 줍다가, 참깨에 이빨까지 낀 셈이잖아. 소정은이 서비대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아마도 사랑을 단념하고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걸.”“그때 우리가 내기를 했잖아. 소정은이 언제까지 삐질지. 그런데 소정은은 삐진 게 아니라 정말 마음을 굳게 먹고 도겸과 헤어지려 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쯧쯧...”동건은 그동안 도겸과 정은이 티격태격하고 다투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그들 둘이 정말 헤어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결국, 정은은 너무나도 잘 참았던 것이다. 6년을 버텼으니, 틀림없이 도겸과 결혼하기 위해 계속 참을 것이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솔직히 동건은 정은과 같은 여자를 별로 좋아하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01화

    도겸은 그제야 연희가 전혀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난 이 여자가 청순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바보처럼 속고 당할 줄이야. 심지어 그런 여자 때문에 정은이를 잃어버렸어... 만약 서연희만 아니었다면, 나와 정은이는 이렇게 남남처럼 지낼 리가 없잖아?’여기까지 생각하면, 도겸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고, 연희가 있는 곳이라면 아예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그는 이미 연속 며칠간 회사에서 잤다. 연희는 감히 전화를 걸지 못했기에 서영숙을 통해 끊임없이 도겸을 재촉했다.도겸은 어머니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별장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서연희, 넌 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별장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되었다.문을 열자, 연희는 문 앞에 서서 도겸의 외투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도겸은 몸을 옆으로 피하며 뚜벅뚜벅 거실로 걸어갔다.연희는 텅 빈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고, 섭섭함에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는 오늘 옅은 색의 느슨한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가슴 앞에 드리우니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다.그러나 도겸은 오히려 그런 연희를 직접 무시하며 서영숙을 향해 걸어갔다.“어머니께서 돌아오라고 하셔서 이렇게 돌아온 거예요.”말을 마치자 바로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거기 서지 못해.”도겸은 멈칫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엄청 피곤해서 좀 쉬고 싶어요.”서영숙은 눈썹을 찌푸리며 도겸의 아무렇지 않은 말투에 불만을 느꼈다.“따라와, 할 말 있으니까.”그녀의 태도가 강경했기에 도겸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결국 따라갔다.두 사람은 서재에 들어갔다. 도겸은 앉아서 자신을 위해 물 한 잔을 따르며 천천히 마셨고, 서영숙의 어두운 표정을 외면했다.“연희 뱃속의 아이가 네 것인데, 넌 신경을 좀 쓸 수 없니?”서영숙은 눈을 부라렸다. 사실 그녀도 아들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완벽한 외모는 모든 사람들을 현혹시켰지만, 도겸은 지극히 무정하고 냉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02화

    정은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깨어났다.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들어보니, 누군가 자신의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누구세요?” 정은은 경계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오늘 밤 재석은 실험실에 남아 야근을 했기에, 만약 정말 강도라도 만났다면 정은은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노크 소리가 잠시 멈췄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정은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도겸은 계속 두드렸다.“대답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정은아, 나야...”도겸은 쓴웃음을 지었다.‘어쩜 고집이 이렇게 센 건지.’“무슨 일이야?”정은은 도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들어가서 너랑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그래. 나 절대로 너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을 거야. 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문을 열고 있어도 되는데...”“우리 사이에 더 이상 할 말은 없어.”정은은 도겸의 말을 끊으며 문을 전혀 열고 싶지 않았다.후에 도겸이 어떻게 애원하든 정은은 그저 못 들은 척했다.그러나 오늘 유난히 인내심이 있었던 도겸은 정은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계속 문을 두드렸다.잠시 후, 정은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밖에서 아직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핸드폰을 들었다.“여보세요, 경찰서죠? 지금 누가 계속 제 집에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그렇게 도겸은 경찰에게 끌려갔다.‘드디어 조용해졌군.’정은은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한 다음, 옷을 챙기고 실험실로 출발했다.앞으로 며칠 동안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실험실에서 밤을 보낼 작정이었다.한 편으로는 도겸이 계속 문을 두드릴까 봐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확실히 진도를 따라가야 했다.정은은 9월 개학하기 전에 이 논문을 완성해야 했다.‘일석이조인 셈이지.’그런데 뜻밖에도 정은이 피하고 싶은 사람은 그녀가 아파트에서 나온 순간 골목에서 뛰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03화

    먼저 손을 놓은 사람은 분명히 도겸이었다. 그러나 정은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곧 그 그늘에서 벗어날 때, 도겸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끌고 가려 하다니?‘이건 너무 웃기지 않아?’“강도겸, 앞으로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 난 널 증오하고 싶지 않거든.”정은의 단호한 말투와 무정한 눈빛은 마치 칼처럼 도겸의 자신감을 쿡쿡 찔렀다.“정은아... 이러지 마... 응?”그러나 정은은 그저 담담하게 도겸을 바라보기만 했다.“난 이미 모든 문제를 해결했어. 우리 어머니도 이미 동의했단 말이야. 이제 네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우리는 즉시 혼인신고를 할 수 있어!”“난 싫어.”그리고 도겸도 단지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었다.“정은아...”“난 바빠서 먼저 갈게.”말을 마치고 정은은 도겸을 넘어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도겸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으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나갔지만, 도겸은 혼을 잃은 것 같았다. 마치 전 세상이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멍하니 이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얼마가 지났는지, 도겸은 뻣뻣하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정은이 떠난 방향을 보고 중얼거렸다.“나에게 정말 기회가 없는 거야?”...연희는 그날 밤 도겸과 서영숙이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랐다. 처음에 그녀는 편하게 이 집에서 지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남자의 냉담한 태도를 마주칠 때마다 연희는 자신이 수시로 쫓겨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불안한 감정은 금새 사라졌다.서영숙은 연희가 강씨 가문의 공신이라고 위로하면서, 두 이모님에게 그녀를 잘 챙겨주며 절대로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심지어 거액을 들여 연희에게 임산부 보양식까지 많이 사주었다.게다가 도겸도 연희가 이 별장에서 지내는 것을 묵인한 것 같았는데, 전처럼 배척하고 싫어하지 않았다.그 후 별장의 가정부들도 이를 눈치채며 연희에 대한 태도가 뒤바뀌었다.어떤 가정부는 이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04화

    실험실에서.조미진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전 교수는 속산이 빠르니까 빨리 이 데이터 좀 계산해줄래? 정말 급해서 그래!”전진욱도 한창 바쁠 때였다.“컴퓨터로 계산해. 나 지금 시간이 없거든...”“에이, 이 데이터 엄청 중요하니까 좀 봐봐. 몇 분밖에 안 걸려!”진욱은 맞은편 실험대에 있는 정은을 가리켰다.“그럼 정은이에게 부탁해. 정은이의 속산 실력도 엄청 강하거든.”지난번에 데이터를 수정할 때, 모두들 정은의 실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이수아만이 정은이 황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무슨 일인데요 미진 언니? 제가 도와드릴까요?” 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미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것 좀 봐줘...”2분 후, 정은이 입을 열었다.“다 됐어요. 이미 메일로 보내드렸어요.”미진은 깜짝 놀랐다.‘이렇게 빨리 완성했다고?!’진욱도 놀라서 하던 일을 그만두며 미진에게 그 데이터를 달라고 말했다.“나도 좀 보자...”미진은 어이가 없었다.“방금 계산해달라고 했는데, 바쁘다며 거절했잖아? 지금 계산을 다 마쳤는데 또다시 계산을 하려 하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이니!”진욱은 미진의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계산에 전념했다.손태민도 이 상황을 보고 즉시 시간을 재었다.“다 됐어. 얼마나 걸렸는데?”“2분 5초요.”그러고 정은도 겨우 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진욱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정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너 속산을 배운 적 있지?!”“주산법도 속산에 속하나요?”“언제 배웠는데?”“다섯 살? 아니다, 여섯 살인가? 죄송해요,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잊어버렸어요.” 정은은 궁색함 때문에 머리를 긁적였다.진욱은 침을 삼켰다.“그 이후로 배운 적이 없는 거야?”“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정은은 영문을 몰랐다.‘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다더니, 이게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태민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205화

    미진이 물었다.“누가 이길 것 같아?”진욱이 대답했다.“지금 상황으로 보면, 태민이가 우세를 차지하고 있어.”미진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진욱의 관점에 찬성했다.5분이 지나자, 정은은 네 번째 문제를 계산한 다음 마지막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태민은 네 번째 문제에서 잠깐 막혔기 때문에 좀 뒤떨어졌다.정은은 역전을 이루었지만 우세는 그리 뚜렷하지 않았다.6분이 됐을 때, 두 사람 모두 마지막 문제에 막혔다....6분 50초, 정은은 답안을 쓴 다음 계산을 끝냈다.태민도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다 됐어요!”그러나 아쉽게도 정은보다 10초나 느렸다.그는 가볍게 숨을 쉬더니 땀을 닦으며 웃었다.“괜찮아요. 속도 말고 정확도를 봐야 하잖아요. 저는 자신 있어요.”그 결과, 정은은 전부 맞았고, 태민은 한 문제 틀렸다.태민은 깜짝 놀랐다.‘와, 내가 졌다니, 말도 안 돼!’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정은아, 넌 속산이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정말 어렸을 때 잠깐밖에 안 배운 거 맞아?”진욱도 묵묵히 지켜보며 속으로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정은은 능력이 강한 것 외에 마음 역시 차분했다. 관건적인 순간, 그녀는 침착하고 태연하게 맞설 수 있었다.이것만 봐도 태민은 질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웃으며 농담을 했다.“태민아, 이제 패배를 인정하는 거야?”태민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실력이 있는 자가 왕이죠. 제가 졌어요.”‘전 교수님은 실험실의 선배이자 속산의 강자였으니 그렇다 쳐도, 정은이는 이제 막 대학원에 합격한 새내기잖아. 그런데 내가 뜻밖에도 그런 정은이에게 졌다니?’태민은 자신이 질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미진은 위로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시합인 이상, 승패가 있는 게 정상이지. 다음에 다시 노력해 봐. 그러나 밥은 꼭 오늘 사야 돼.”마지막 말이 중점이었다.“그럼요, 당연히 약속을 지켜야죠! 오늘 밤 제가 밥 살게요! 그나저나 정은아, 넌 마지막 문제를 어떻게 계산해

Latest chapter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8화

    명주는 잠시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들켰네요... 좋아요, 그럼 제가 0.1% 더 양보할게요. 이게 정말 마지막 양보입니다.”정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0.3이요. 저도 그게 최선이에요.”명주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정은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알맞게 비워진 컵.“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정말로 가려는 발걸음이었다.명주는 예상치 못한 정은의 단호한 태도에 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 잠깐만요! 가격이라는 게... 원래 대화하면서 맞춰가는 거잖아요!”정은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저는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잡담은 별로 안 좋아해요. 0.3이 괜찮으시다면 바로 계약서 쓰시고, 아니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이 분위기, 진짜다... 장난 아니네, 이 사람...’명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정은이 진짜 나갈 기세라는 걸 느끼자,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좋아요. 그렇게 하죠.”정은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계약 성사네요.”서류는 빠르게 정리됐다.두 사람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장비 납품 일정과 설치 세부 사항까지 깔끔하게 조율했다.완벽한 비즈니스 매듭이었다.서류를 챙겨 일어서려던 정은은 명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은 씨!”“혹시...사람들한테 ‘심리 꿰뚫는 거 잘한다’는 말, 자주 듣지 않아요?”명주는 씁쓸하게 웃었다.“사실, 장비를 오늘 꼭 팔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정은 씨는 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태도로 딱 버티시더라고요. 그걸 알아챘을 땐... 이미 계약이 끝나고 난 다음이었어요. 하하...” 정은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아뇨,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어요.”“거짓말.”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대신, 하나는 확실히 알아요.”“뭔데요?”정은은 돌아서며 미소를 흘렸다. “먼저 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7화

    ‘아니지. 정은 언니 원래 저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으앙, 괜히 비교돼!’“무슨 생각 그렇게 골똘히 해?”정은이 웃으며 말했다.“나도 사람이야, 쇳덩이는 아니란 뜻이지. 급하지도 않은 일정인데 밤새우는 게 뭐 그렇게 재밌겠어.” “맞아요! 근데 언니는...”“너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야.”민지는 안도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물었다.“그 ‘조금’이... 얼마나 조금인데요?”“음...”정은은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두 시간.”민지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하...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 바로 그때, 건너편 검사용 실험실 문이 열리며 서준이 샘플 봉투와 리포트를 들고나왔다.“서, 서준아... 언제 일어났어...?”민지는 거의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서준은 솔직하게 답했다.“6시. 왜?”민지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나만 8시까지 잤네. 이럴 거면 알람은 왜 맞췄냐고... 으악...!!!’그렇게 오전 내내, 민지는 그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집중력도 세 배로 끌어 올렸다.그리고 드디어 점심시간.민지는 실험대에서 털썩 내려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같이 집중 근무에 들어간 팀원이 많으니, 정은은 미리 모두의 하루 세 끼 도시락을 예약해 두었다. 밥 짓고 반찬 할 시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식자재가 가득한 냉장고를 털어 요리할 사람조차 없었으니 말이다.민지는 반찬을 한 입 먹고는 입안에서 퍼지는 고급스러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헐, 이거 SAMES 거다... 가격 꽤 나가는데...”남진일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와, 밥 진짜 맛있다. 이거 쌀도 좀 다르지 않아? 완전 길고 쫀쫀한데...?”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일은 밥을 세 그릇이나 비웠다. 물 한 잔 마시고는 말없이 실험실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그걸 멍하니 보고 있던 민지.‘왜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아...? 쉴 땐 좀 쉬라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6화

    장마가 시작되자, 날씨는 마치 기분이라도 있는 듯 변덕을 부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살 좋던 하늘은 오늘 아침부터 부슬비로 젖어 있었다.재석은 우산을 챙기지 못한 채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옷이 이미 흠뻑 젖어 있었기에,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뜨거운 물로 몸을 데운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휑한 침대를 바라보며 손을 멈췄다.며칠 전, 침구를 몽땅 세탁기에 돌려버리고 새로운 걸 깔지 않은 채로 며칠 밤을 그냥 잤다.그는 말없이 장롱에서 깨끗한 시트를 꺼내어, 이불까지 정돈했다.‘그날 정은이가 그랬지... 아버님이 장조림이랑 김치까지 챙겨주셨다고. 가지러 오라고 했었는데...’그때, 재석은 머리를 말렸고, 내복을 갈아입은 후 맞은편 정은의 집 앞으로 향했다. “정은아, 안에 있어?”“정은아...?”대답은 없었다.재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였다.‘평소 같으면 실험실에서 돌아왔을 시간인데...’그 후로 두 시간. 재석은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신경은 늘 현관 쪽에 쏠려 있었다.작은 인기척만 나도 바로 고개를 들어 도어락을 확인하고, 고양이처럼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하지만 그 누구도, 정은은 아니었다.새벽 1시. 정은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오늘도 실험실에서 자려나...’재석은 조용히 불을 끄고 침실로 향했다.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뭐랄까... 괜히 허전하네.’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실험실로 출근했다.그날 저녁. 재석은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야간 러닝을 나섰다.8시부터 10시까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른다.그 사이, 정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재석은 또다시 시간을 더 보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기다리는 동안, 몇몇 이웃들과 마주쳤다.“조 교수님, 오늘도 러닝하세요?”“운동을 정말 꾸준히 하시네요. 올해에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5화

    정은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재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선배님, 아빠가 장조림을 잔뜩 가져왔어요. 선배님 것도 있는데, 언제 집에 계세요? 가져다드릴게요.]사진도 함께 첨부했다. 반찬 봉투, 가지런히 담긴 장조림, 그리고 열무김치 세 통.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근데 요즘은 계속 실험실에서 지내야 할 것 같아.]‘휴... 병원 간 건 아니구나.’정은은 마음을 놓고는,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공기 샘플 분석 결과 나왔어요.]그리고 곧바로 분석 리포트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하지만 이번엔 곧장 답장이 오지 않았다.정은은 씻고 오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었다. 10분 전 도착한 메시지.정은은 손에 수건을 쥔 채 그대로 메시지를 열었다.[경찰 측 보고서랑 거의 일치해. 환각이나 각성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어.]‘그래... 그래서 미제 처리된 거구나.’M시 경찰은 결국 사건을 입건하지 않았다. 재석이 수아를 바로 해고하지 않고 며칠을 기다린 건, 바로 이 수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만약 정식 수사가 들어갔다면, 이수아가 마주할 건 단순한 징계가 아니었겠지.’정은은 머리를 닦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잠깐 말씀드릴 게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정은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전화를 받았다.“그 약, 기존에 유통되던 제품이 아닌 것 같아요. 성분이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기기에서도 검출이 안 될 정도라면...”“제작한 사람도, 유통한 사람도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 인맥이나 자금력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선배님, 조심하셔야 해요.”[응. 알겠어.]말이 끝난 후, 찰나의 정적. 전화 속 숨소리만이 고요하게 들렸다.“선배님...”정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요즘... 아예 집에 안 들어가세요?”그는 몇 초간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응...]‘그냥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4화

    5월 말, 이미숙은 원작 소설 영화 제작 발표회 참석차 J시에 왔다. 주말 일정이라 남편 소진헌도 함께였고, 겸사겸사 정은에게 나눠 줄 장조림 한가득과 직접 담근 김치 여섯 통도 챙겨왔다.“완전 유기농! 방부제 제로! 아, 조 교수 것도 좀 나눠줘. 혼자 다 먹지 말고.”말을 끝내기 무섭게, 소진헌은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바빴고, 떠날 땐 미련도 없었다.이번 일정은 주최 측에서 식사며 숙소까지 전부 제공했는데, 행사 장소가 이춘재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던 탓에 소진헌 부부는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그래도 짬을 내어, 오후 한나절을 이춘재, 봉수진 부부와 보내며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한 끼는 함께했다.이춘재와 봉수진은 딸이 바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사위는... 뭐, 그냥 딸을 따라다니느라 바쁜 걸로 치부하고 이해해 줬다. 어차피 며칠만 지나면 두 노인도 L시로 내려갈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당에 굳이 소진헌 부부를 집에 머물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정은은 아버지의 익숙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놓인 장조림 봉투를 내려다봤다.‘이걸 내가 다 먹을 순 없지.’정은은 장조림 반 정도를 덜어, 다른 봉투에 담았고, 김치도 세 통 넣었다. ‘재석 선배님 오면 같이 주자.’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시각, 그녀가 이미 논문 세 편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맞은편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정은은 혹시나 놓쳤나 싶어 직접 문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선배님, 집에 계세요?”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또 실험실에서 밤샘 중이겠지.’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요즘 정은도 실험실에서 자는 날이 부쩍 늘었고, 남진일은 아예 실험실을 제 집처럼 쓰고 있었다.민지는 심지어 진지하게 조언까지 했다.“진일 선배, 옷장 두 개 더 넣고, 정은 언니가 냄비랑 밥그릇만 좀 들고 오면 그냥 자기 집 완성인 거 알죠?”‘진짜 그렇게 될까 봐 무서울 정도라니까.’며칠 지나지 않아, 진일은 정말로 중고 옷장을 하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3화

    [진짜 안 따라 나오는 거야? 손태민, 너 나한테 진심이긴 해? 마음 있긴 해?!]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제야 태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디야?”[정문 앞 카페. 시간 줄게, 5분 안에 와.]“그래.”태민은 짧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태민이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통화한 지 15분이 지나 있었다.수아는 두 팔을 꼬며 차갑게 말했다.“뭐야, 이게? 5분이랬잖아. 내가 기다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미안...태민은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사과했다.그런 태민의 모습에 수아는 괜히 짜증이 났다. ‘조재석이랑 비교하면... 능력도, 집안도, 얼굴도, 도대체 뭐 하나 나은 게 없어.’하지만 그녀는 아직 태민이 필요했다. 그 생각에 억지로 화를 눌러가며, 입꼬리를 올려 웃는 척했다.“너... 교수님한테 한 번만 말해줄 수 있어? 이번 해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좀 부탁해 줘.” 그 말에, 태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예전엔 본 적 없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봤다.‘저 눈빛은... 뭐야...?’수아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딱 2초 만에 시선을 피했다.“도와줄 거야, 말 거야? 싫으면 됐어. 그냥 안 해도 돼.”예전 같았으면, 수아가 이렇게 말만 해도 태민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침묵이 조금 길었다.“그래...”드디어 태민이 대답했다. 수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곧이어 태민이 덧붙인 말이 그녀를 멈칫하게 했다.“근데, 조건이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 조 교수님이 너를 그렇게까지 내친 이유...”“그건... 지금 꼭 해야 하는 말이 아니잖아...”“나는 꼭 들어야겠어.”수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상하게 낯선 태민의 태도에 그녀는 자신이 제압당하는 느낌을 받았다.“손태민, 지금 뭐 하는 거야? 날 협박하는 거야?”“진짜 날 사랑하긴 해? 그 정도 일도 못 해줘?”그 비난과 몰아붙임 속에서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2화

    수아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곧장 재석 앞까지 걸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눈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조 교수님, 왜 절 해고하신 거예요?” “일주일 병가 낸 게 문제였어요? 아니면 프로젝트에서 뭐 잘못된 거라도 있었나요?”재석은 조용히 수아를 응시하다가, 문득 작게 웃었다.“이수아 선생님, 경찰이 못 밝혀낸다고 해서,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봐요? 자세히 얘기해줘요? 모두 들을 수 있게?”그 말에, 수아 마음속 마지막 희망 하나가 차갑게 꺼져버렸다.‘알고 있었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 말 안 하다가, 오늘...’그녀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멍해졌다. 그리고 속에 쌓여 있던 분노는 어디로 갔는지, 기운 빠진 사람처럼 그저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미진은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하지만 재석의 깊고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스치자, 그제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구나.’ 순간,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곱씹던 미진의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추측 하나가 떠올랐다.그리고 미진의 시선은, 동정에서 충격으로 바뀌었다.진욱은 이미 눈치챘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오직 태민만이 아직 그 정답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수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수아야...”“꺼져! 건들지 마!!”수아는 그대로 태민의 손을 뿌리치고, 실험실을 박차고 나갔다. 허둥지둥, 마치 도망치듯.‘왜... 왜 조미진랑 전진욱이... 그런 눈으로 날 본 거야...?’ ‘설마... 그 사람들도... 눈치챈 건가?’모든 사람에게서 밀려난 채, 홀로 남겨진 태민은 허공을 향한 두 손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왜, 다들 나만 빼고 알고 있는 거야...’재석은 말없이 돌아서며 실험대로 향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1화

    결국, 실험실에서 재석이 누군가를 내보내는 데는 한마디면 충분했다.하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 누군가가 이런 방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미진은 잠시 멍해졌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갑자기‘계약 종료’라는 통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수아가 병가 중이긴 한데... 설마 그 병이 심각해진 건가?’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수아 상태가 안 좋아진 건가요?”하지만 그렇다 해도 ‘계약 종료’는 너무 가혹했다. 재석은 단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사람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자세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재석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수아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는 태민이 인계할 거야. 오늘 중으로 인수인계 마무리해.” 이름이 불리는 순간, 태민은 마치 누가 뒤통수를 내리친 듯 멍해졌다. ‘뭐...? 내가?’그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귀도 막힌 것처럼 주위 소음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온 신경이 ‘수아가 잘렸다’는 그 사실에 꽂혀 있었다.그때, 옆에 앉아 있던 미진이 책상 아래로 태민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태민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멍하니 재석을 바라봤다. “교수님, 왜죠?”재석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또 그 눈빛이었다. 무표정하면서도 단호하고, 어떤 설명도 허락하지 않는.그리고 결국, 재석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회의실엔 놀람과 당혹, 멍한 표정들이 뒤섞인 채로 몇 초간 정적만 흘렀다.오전 내내 실험실 분위기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태민은 여러 번 핸드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수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만약 모른다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하지...?’재석은 끝내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태민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저런 결정을 내릴 정도라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30화

    그날 아침,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에서 깨자마자, 태민은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혹시 수아에게서 연락이 와 있진 않을까...부재중 전화, 메시지 알림은 있었지만...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오늘도 아니야.’실망감이 스르르 밀려왔다. 태민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씻고, 옷을 챙겨 입고, 평소처럼 집을 나섰다....막 실험실에 도착하자, 태민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떴다.수아에서 온 전화였다.“수아야?! 드디어... 너 왜 그동안 연락 안 했어? 나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나...”[손태민, 진짜 왜 이렇게 집착하냐?!]단 한 마디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태민의 정신이 멍해졌다.[계속 전화하고, 계속 메시지 보내는 게 그렇게 재밌어? 내가 안 받고, 안 보는 거면 알아서 눈치껏 그만해야지! 왜 자꾸 연락하는데?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 건데? 진짜 짜증 나!]“수아야...”태민은 당황해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그냥... 네가 너무 연락이 없으니까,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걱정?]전화기 너머로, 조소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뭘 어쨌다고 걱정을 해? 너 진짜... 왜 그렇게 남 일에 다 끼어들고 싶어 하는 거야? 다 간섭하고, 다 챙기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태민은 눈앞이 흐려졌다.‘난 그냥 좋아하니까... 그게 다였는데.’“난 그냥,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됐어, 잘하고 못하고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제발, 더 이상 전화도 하지 말고, 메시지도 보내지 마. 지금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뚝-태민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태민아? 앞 좀 보고 다녀!”실험실 입구. 미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태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쓰레기통을 걷어찰 뻔했다.“아, 죄송해요...”그는 황급히 쓰레기통을 세워놓고 어색하게 웃었다.“자, 가자.”미진이 그를 불렀다.“어디를요...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