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담담하게 입술을 구부렸다.“괜찮아, 그럴 필요 없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침묵에 잠겼다.이때 수민 쪽이 무척 시끄러워졌다.[정은아, 먼저 끊을게. 집안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우리 엄마가 지금 여기저기서 날 찾고 있어.]“그래.”전화를 끊은 후, 정은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는데, 또 연이어 몇 개의 문자가 들어왔다.심현빈이었다.다국적 기소장, 접수 영수증이 있었는데, 그는 또 현재의 진도에 관한 설명을 했고, 나머지는 정은 본인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이었다.다국적 기소는 일반기소 수속보다 더 복잡하고 시간도 더 많이 걸렸기에, 이렇게 빨리 추진될 수 있다니, 솔직히 정은도 많이 놀랐다.그녀는 파일을 받아 온라인으로 사인을 한 뒤, 다시 현빈에게 보냈다.그쪽은 바로 문자를 읽더니 곧이어 또 농담을 하며 답장했다.[날 그렇게 믿는 거야? 널 배신할 수도 있는데?][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요.]현빈은 마음이 움직이더니 갑자기 웃었다.정은의 말에 설렜기에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재빨리 타자를 했다.[단지 사인해야 할 서류일 뿐이야. 기소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까 안심해.]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현변의 설명에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서명해야 할 서류들도 모두 자세히 보고 또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사인한 것이다.게다가 현빈이 정말 무슨 수작을 부리고 싶다면, 이렇게 복잡하고 저질한 수단을 쓰지 않을 것이다.2초 후,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새해 복 많이 받아. 내년에 내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정은은 핸드폰을 침대에 엎었다. 그녀는 산타클로스가 아니었으니, 현빈의 소원은 그녀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정은아, 네 아빠가 만두를 만들었으니 빨리 와서 먹어.”아래층에서 이미숙의 함성이 들려오자, 정은 즉시 일어나 경쾌하게 대답했다.“가요.”저녁, 정은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따끈따끈한 만두를 먹으면서 부모님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재밌는 예능을 보니, 그야말로 천국이
맞은편에서도 역시 축복을 보냈고, 소녀의 부드럽고 고요한 목소리에는 미소가 섞인 것 같았다.재석은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기원하는 정은의 모습이 떠올랐다.‘불꽃놀이가 피어난 순간, 정은의 모습을 비추는 그 장면은 정말 예쁠 텐데.’...이튿날 아침, 정은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11시까지 일어나면 된다.태양이 중천에 뜨자, 햇빛이 커튼 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그녀는 졸린 두 눈을 떴고. 창밖의 나뭇가지가 흔들거리며 커튼에 그림자를 남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해가 벌써 떴어?!’정은은 얼른 하품을 하고 일어서며 커튼을 쫙 열었다.햇빛이 먼 산에 쌓인 하얀 눈을 비추더니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소진헌과 이미숙은 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햇볕을 쬐고 있었다.소진헌은 귀가 밝았는데, 창문을 여는 소리를 듣자 바로 정은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선생님이라 줄곧 시간관념이 있어서 정은이 늦잠을 자는 습관에 대해서 그리 찬성하지 않았다.그는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네 엄마가 나쁜 습관만 길들였어. 이 시간까지 자고,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위에 병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의 몸을 하나도 중시하지 않아. 늙으면 다...”이미숙은 귤 한 조각을 소진헌의 입에 쑤셔 넣었다.“늦잠 자는 거 가지고 언제까지 잔소리할 거예요? 정은이는 이미 졸업했으니 더 이상 당신의 학생이 아니라고요. 새해에 늦잠 자면 뭐가 어때서요?”말하면서 그녀는 창가에 서 있는 정은을 바라보았다.“네 아빠는 융통성이 없으니까 그런 잔소리 듣지 마. 식탁 위에 아침밥 있으니 좀 데우면 바로 먹을 수 있어.”정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에 아침을 다 먹은 정은도 정원에 가서 차를 마시며 햇볕을 쬐었다.“아빠, 이게 무슨 차예요? 냄새가 구수하네요.”정은은 찻잔 냄새를 맡았다. 담백하고 그윽한 차는 싱겁지도 느끼하지도 않았다. 입을 다시니 또 은근히
지금은 겨울방학 기간이라 대부분 학생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고, 학교는 무척 한산했다.경비원은 정은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며 위아래로 그녀를 훑어보았다.“아가씨, 지금 방학이라 선생님을 보러 돌아온 거야?”고3은 과외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는 여전히 수업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경호원은 뒤로 한 손을 흔들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얼른 들어가라. 소란 피우지 말고. 그리고 3학년 학생들의 수업을 절대로 방해하면 안 돼.”정은은 속으로 생각했다.‘역시 침묵하길 다행이야.’그녀는 선생님을 방문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강의동으로 가지 않고 운동장을 두 바퀴 돌아다녔다. 막 떠나려고 할 때, 학교의 전시대를 지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보았다.아래에는 작은 글자로 된 소개가 있었다.[소정은: 20XX년, L시 이과수석으로 서비대학교 생물학부에 입학.]바람이 불자, 정은은 고개를 한쪽으로 돌렸다.땅 위의 낙엽은 작은 회오리바람을 일었고, 원래 밝고 화창한 날씨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두워졌다.정은이 팔을 들어 바람을 막고 떠나려던 참에 갑자기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소 선생님!”눈을 들어 보니 정말 소진헌이었다.어제 텔레비전을 볼 때, 소진헌은 오늘 학교에 와서 고3학생들에게 시험지를 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이렇게 두 사람은 학교에서 마주쳤다.“소 선생님,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집에 볼일이 많이 않나요?”인사하는 사람은 소진헌과 나이가 비슷한 여자 선생님이었다.정은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선생님도 그들과 같은 주택 단지에서 살지만, 다른 건물에 있었다.그리고 그 여자 선생님도 물리를 가르쳤는데, 소진헌과 같은 학년을 맡았다. 당시 소진헌은 우수학생을 책임졌고, 그녀는 일반 학생을 가르쳤다.그래서 정은은 그녀의 수업을 들은 적이 없지만, 그녀의 딸 장소연과 같은 반 친구였다.“주 선생님.” 소진헌은 웃으며 인사했다.“다행히 별로 바쁘지 않네요.”“왜요? 정
소진헌의 안색은 무척 어두워졌다.“주 선생님, 우리 정은은 엄청 휼륭한 아이예요. 오늘 한 그런 말들은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다신 그런 소문을 퍼뜨리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것들 모두 허튼소리이기 때문이죠! 심지어 모함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이것은 선생님으로서 가져야 할 품격이 아니에요.”말이 끝나자 소진헌은 성큼성큼 떠났고, 뒷모습만 봐도 그의 엄청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주윤설은 눈을 부라렸다.“허, 딸이 그런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데도 말하지 못하게 하다니? 뭐? 훌륭한 아이? 개뿔! 학교 망신이나 주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더러운 여자 주제에...”그 당시의 소진헌은 무척 득의양양했다. 과목마다 1등을 하는 동시에 경기에 나가서 상을 무수히 많이 받은 딸은 전 학년, 심지어 전교에서도 모두 유명했다. 회의를 할 때마다 소진헌은 그런 정은을 칭찬했고, 자랑스럽게 웃었다.‘그래서? 서비대에 붙으면 또 뭐가 어때서? 결국 부자들 장난감으로 됐잖아! 퉤!’정은은 주윤설의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전시대 뒤로 숨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그런 비방과 욕설에 직면할 때 어떤 표정을 할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아끼면서도 정직한 선생님이었다!만약 소진헌이 자신도 이곳에 있고 또한 이런 말을 들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슬퍼할까?그래서 정은은 숨을 수밖에 없었다....소진헌은 시험지와 참고답안을 고3을 책임지는 선생님에게 넘겨준 다음 바로 떠났다. 학교 문 앞까지 걸어가자,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정은아? 네가 왜 여기에 있어?”“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 근처까지 왔어요.”“그래, 이제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네 엄마 말 듣지 말고 우리 얼른 집에 돌아가자.”“네.” 정은은 소진헌의 자전거 뒷좌석에 앉았다.“하나 둘 셋.”소진헌이 힘을 주며 페달을 세게 밟자, 자전거가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아빠, 미안해요...”“응? 갑자기 무슨 사과야?”“그동안 아빠와 엄마를 보러 오지 않아서..
“어머! 정말 정은이네. 난 내가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어!”류춘미는 옆집 이웃인데, 입이 싼 데다가 목소리까지 무척 컸다! 그녀의 남편도 인성 고등학교의 교사였고, 정은이네와 같은 해에 이 주택단지로 이사 왔다.정은이 나오자, 류춘미는 얼른 달려가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쯧쯧, 정말 대단하네! 큰 도시의 물이 참 좋긴 좋나 봐, 정은이 너도 많이 예뻐졌어!”정은은 말문이 막혔다.“이 옷차림 좀 봐, 이 몸매, 그리고 입은 옷이며 신발이며 너무 유행인데!”류춘미는 한바탕 칭찬한 다음, 목소리를 낮추고 정은을 향해 눈짓했다.“정은아, 네가 J시에서 엄청 잘 지낸다고 들었는데, 만약 좋은 사람 있으면 우리 둘째 여동생에게 좀 소개해 줄 수 없어?”정은은 약간 어리둥절했다.“좋은 사람이요?”“에헴! 그 돈 많은 사장이라든가, 재벌 집 도련님이라든가 말이야. 우리 둘째 여동생은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쁜데, 관건은 아주 젊거든. 올해 겨우 22살이야!”정은은 안색이 어두워졌고, 뒤로 물러서며 류춘미와 거리를 두었다.“아주머니,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는 남자를 꼬시기 위해 J시에 간 게 아니에요. 그런 일 잘 모르니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네요.”류춘미는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정은아, 이웃들끼리 뭘 숨기고 그러니? 너도 이제 돈을 번 이상, 우리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하지 않겠어?”정은은 화가 나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제가 뭔데요? 제가 뭔데 당신들을 가르쳐 줘야 하는 거죠? 아주머니, 저를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세요.”정은이 계속 거절하자, 류춘미는 미소를 거두었다.“어머, 돈을 벌자마자 그 기세가 아주 하늘을 찌를 것 같구나! 방금 농담을 좀 한 것 가지고, 어느 집 아가씨가 멀쩡한 직장을 놔두고 남자나 꼬시고 다니겠어...”“류 씨! 말 좀 조심해!”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진헌은 자전거를 버리고 앞으로 달려와 딸을 뒤에 감쌌다.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고, 눈에서 분노가 타
정은은 대걸레를 흔들며 계속 휘둘렀다.류춘미는 머리를 안고 피해 다녔고, 문 밖으로 뛰쳐가더니 뒤돌아서서 독설을 퍼붓었다.“절,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 빌어먹을 등꽃이 우리 집 정원까지 자랐으니, 내일 불로 다 태울 거야! 보기만 해도 짜증나네!”말이 끝나자 류춘미는 재빨리 도망을 쳤는데, 정은이 다시 대걸레를 들고 쫓아갔기 때문이다.“꺼져요! 이렇게 한 번 찾아올 때마다 전 대걸레를 들고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정은은 대걸레를 내려놓고 긴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자, 소진헌의 표정이 엄숙해진 것을 보고, 그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한참이 지나서야 정은은 오물거리며 입을 열었다.“아빠, 죄송해요. 저는...”“언제 그런 거 배웠어?”“네?”“그, 그거 말이야...”소진헌은 정은이 방금 대걸레를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정은은 할 말을 잃었다.“에헴! 여자아이는 그래도 좀 정숙하고 얌전해야지, 그런 무지막지한 행동을 배워서는 안 돼.”“아빠.” 정은은 다가가서 소진헌의 팔을 안았다.“방금 속이 다 시원하시죠?”“그래, 속이 다 후련하네.”“그 집 정원과 가까운 곳에 있는 등꽃들도 다 그 여자가 뽑은 거죠?”사실 두 집 사이에는 작은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류춘미는 허락도 없이 그곳에 채소를 심었고, 심지어 매일 똥을 비료 삼아 뿌렸다. 이미숙이 심은 등꽃은 덩굴이 겨우 정원 벽을 타고 올라갔을 뿐인데, 공터에 닿기도 전에 류춘미는 칼로 싹둑 잘라버렸다.소진헌은 쪼잔한 사람이 아니었고, 이미숙도 남과 다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동안 공터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류춘미는 오히려 그 공터가 자신의 땅인 양 당연하게 여겼다.“꽃가지가 밭의 햇빛을 막았다고 모두 뽑아버렸어.”소진헌은 한숨을 쉬었다.“네 엄마가 이 일로 무척 괴로워했지.”정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집에 없는 그동안 부모님이 이렇게 당하고 지낼 줄은 정말 몰랐다.“아빠, 그 사람들이 말한 일들은...”
말하는 사람은 둘째 큰어머니인 주덕순이었고, 전기 시설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다. 공무원이라 평소에 스트레스가 없어서 몸도 많이 뚱뚱했다.그녀는 오늘 초록색 스웨터를 입었고, 단발머리를 파마하여 마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부풀어 올랐다.“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거야?” 둘째 큰아버지 소진호는 아내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비만인 주덕순에 비해, 소진호는 몸매가 길쭉했다. 그는 베이지색 스웨터에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를 뒤로 빗어 윤기가 흐르도록 무스를 발랐다.50대 되가는 사람이었지만, 나이를 전혀 먹지 않았고, 심지어 은근히 청년처럼 활기가 차 넘쳤다.소씨 가문의 유전자는 꽤 괜찮았다. 소진헌 세 형제는 모두 준수하게 생겼다.주덕순은 남편에게 얻어맞아 입을 삐죽거렸다.“왜 그래요, 내가 함부로 말한 것도 아닌데. 정은은 확실히 몇 년 동안 우리와 함께 설을 쇠지 못했잖아요. 난 상관없지만, 도련님과 동서가 정은을 많이 그리워했을 텐데.”말이 끝나자, 주덕순은 또 열정적으로 다가와서 정은의 팔을 안았다.“정은아, 넌 어쩜 이렇게 예뻐진 거야? 큰 도시에 가서 그런지 정말 다르긴 다르구나! 우리와 기질이 엄청 다르잖아.”정은은 오늘 하얀 롱패딩을 입고 있었는데, 안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벗었다. 안에는 살구색 스웨터였고, 옅은 갈색의 니트 롱스커트에 카키색 장화를 신었다. 그리고 긴 머리를 풀어헤치며 오직 앞머리만 리본으로 고정했다.이렇게 보니, 정은은 영리하고 얌전해 보여서 마치 달콤한 크림과 같았다.주덕순이 그녀의 기질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소시율은 이 말을 듣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엄마,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좀 조용히 하면 안 돼?”주덕순은 그녀를 노려보았다.“맨날 핸드폰을 가지고 놀 줄만 아는 사람이 내가 말이 많다고 싫어해? 넌 정은이 좀 따라 배워.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꾸미는 거 잘 좀 보고 배워!”소시율은 오늘 짧고 타이트한 상의에 짧은 스커트, 그리고 스노우부츠를
세 며느리 중, 박나영은 현명하고 내조도 잘했으며, 주덕순은 입담이 좋아 어르신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오직 이미숙만은 어르신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다.시간이 흐르면서 소진헌 역시 점차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장가를 가더니 부모를 잊은 아들이 무슨 소용인가? 돈도 잘 벌고 곁에서 부모를 모시는 사장인 큰아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정은은 이미숙 옆에 앉았다. 어차피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니, 굳이 나서서 비위를 맞추고 싶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밥을 먹고 나서 떠나면 될 일이었다.“정은이, 이 가방 꽤 예쁘네. 브랜드지?” 큰어머니 박나영은 과일 쟁반을 내려놓더니 갑자기 정은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모든 시선들이 정은에게 떨어졌다.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덕순은 먼저 말했다.“어머, 이게 뭐라고 했더라? 루이 비통?”시율이 말했다.“모르면 입 좀 열지 마, 이건 에르메스야.”“뭐?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그 수천만 원짜리 가방이라고?!” 주덕순은 숨을 한 모금 들이켰다.그녀는 사치품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한가해서 매일 출근할 때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얼마 전에 인기 드라마인 에서, 주덕순은 여주인공이 메고 있는 그 가방이 무척 비싸다는 것을 알았다!정은의 에르메스는 전부 도겸의 별장에 남겨뒀는데, 이 가방은 그녀가 혼자 돈을 벌어서 산 것이었다.오늘 정은은 이 옷을 맞추려고 들고 나왔는데, 위에 로고가 없었지만 박나영이 단번에 알아볼 줄은 정말 몰랐다.박나영은 은근히 놀랐다.“그렇게 비싸?”비록 남편이 사장이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회사를 차렸지만, 박나영은 소진우를 따라 고생을 했기 때문에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명품 가방은 더더욱 메고 다니지 않았다.할머니는 이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정은을 힐끗 보았다. 할아버지도 시선을 돌렸다.정은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길가에서 이 가방이 예쁜 것 같아서 샀는데, 겨우 몇 만 원밖에 안 들
그때 두 사람은 함께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은은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도겸은 원래 화가 치밀어 올랐다.재벌 집 도련님인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남을 기다리게 한 적은 있어도 남을 기다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소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계속 사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화는 뜻밖에도 이렇게 가라앉았다.촤악-철저히 가라앉았다.“그때 넌 너무 바빴지. 그 후에 데이트를 할 때도 거의 내가 먼저 도착한 후에 음식을 주문해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잖아. 가장 오래 기다렸을 때가... 오미선 교수님이 널 데리고 세미나에 참가한 그때인 것 같은데.”“주최 측이 임시로 진행을 고쳤기에 세미나가 두 시간 지연되어 끝났어. 네가 도착했을 때, 레스토랑은 이미 문을 닫았고.”정은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은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두 사람은 그때 처음으로 말다툼을 벌였다.그리고 도겸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또 한 번은 네가 오미선 교수님과 표본을 채집해야 한다며 바로 출장을 갔잖아, 나한테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난 바보처럼 학교로 달려가서 널 기다렸는데, 오전 내내 기다렸지만 널 보지 못했어...”도겸은 계속 말을 했지만 정은은 시종 침묵을 지켰다.“정은아, 그때의 일들 아직 기억하니?”“지나간 일은 벌써 잊은지 오래야.”도겸은 정은의 싸늘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 않고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괜찮아, 다 기억할 거야.”몸소 겪은 일을 어찌 그리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잊은 척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이었다.30분 후, 차는 교외의 한 영국식 정원에서 멈췄다.도겸은 손을 뻗었다.“내리자, 정은아.”정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남자도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눈앞의 정원을 바라보았다.“여기 기억나?”정은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력이 너무 좋았다.이 정원은 사실 와인 창고였다.한 모임의 카드 게임에 동건이 도겸에게 졌던 것이다.도겸은 친구들과
토요일,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쳤다.쏟아지는 겨울비에 J시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무더운 여름은 가고,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와 싸늘한 바람이 찾아왔다.정은은 두꺼운 패딩과 모자, 목도리로 자신을 꽁꽁 싸맸다.도겸은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렇게 추운 날, 그는 차를 골목 맞은편의 길가에 세워놓고 스스로 아파트 아래에 가서 기다렸다.지나가는 행인들은 저도 모르게 도겸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직 문을 바라보며 경건함이 경지에 이르렀다.재석은 실험실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그는 도겸을 보았다.물론 도겸도 재석을 보았다.눈이 마주치자, 두 남자의 눈빛은 모두 적의를 드러냈다.재석은 도겸에 대해 호감이 없었고, 심지어 현빈조차 도겸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 별장에 가서 책을 옮길 때, 도겸이 정은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재석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강 대표님은 아침에 금방 온 거예요, 아니면 어젯밤에 가지 않은 거예요?”도겸은 차갑게 웃었다.“교수님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자꾸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금방 왔든, 아니면 밤새 안 갔든,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도겸은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이가 내 데이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함께 외출할 거예요.”재석은 바로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은이 최근 실험실의 일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던 것을 떠올리니, 양자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재석은 생각을 멈추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정은이 이번 만남에 동의한 이상, 다 자신의 생각이 있겠죠.”‘데이트'는 바로 ‘만남’으로 되었다.누가 방금 교수님이 말을 잘 못한다고 무시했을까?“남자라면, 가난할 수도 있고 못생길 수도 있지만, 매너가 없어서는 절대로 안 돼요.”도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죠?”“여성을 존중하고, 그녀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낮에는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저녁에 좀 더 뛰어야지.”정은은 제자리에 서서 재석이 올라오길 기다렸고, 두 사람은 함께 올라갔다.“오늘 선배님이 도와준 덕분에 우리도 바로 쫓겨나지 않았어요.”그러나 재석은 오히려 손을 흔들었다.“우리 사이에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 5일이면 충분한 거야? 부족하면 내가 다시 학교에게 연락해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할게...”“이미 충분해요.”이번 문제는 시 소방국과 관련이 된 데다가 시정지시서까지 발부되었기에 정은 그들도 규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총장이 나서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조만간 이사를 가야 하는 이상, 굳이 재석을 난처하게 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선배님은 이미 날 여러 번 도왔어.’두 사람이 동행하면 시간은 항상 빨리 지나갔다. 분명히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7층까지 올라갔다.“선배님, 잘 자요. 내일 봐요.” 정은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재석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내일 보자.”정은이 문을 닫고 나서야 그도 따라서 닫았다.서재에 들어간 재석은 컴퓨터 앞에 앉았고, 화면이 켜지자 진욱의 문자가 ‘분출’되었다.[너 어디 갔어? 왜 얘기하다가 문자를 씹는 건데?][설마 또 조깅하러 건 아니겠지?][아니... 너 오늘 밤 몇 번이나 내려갔잖아? 대체 왜 그래?][조 교수? 귀신에 빙의라도 된 거야?][헐! 정말 달리기를 하러 갔다니. 길가에 무슨 금덩어리라도 있는 줄 알겠다.][오늘 밤 정말 수상해. 밤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어도, 하룻밤에 몇 번이나 나가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정말 본 적이 없어.][너 혼자 좀 봐, 7시부터 10시까지 몇 번이나 내려간 거야?!][됐어... 데이터는 그냥 나 혼자 맞출게. 널 기다린 내가 바보지!]다급한 진욱은 마지막에 포기를 하며 묵묵히 일하러 갔다.재석은 방금 여자애가 혼자 복도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노란 등불이 몸에 떨어지자, 유난히 가냘파 보였다.‘
“아악!” 진호는 발을 안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그리고 뛰면서 꽥꽥거렸다.정은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정말 미안해. 방금 손이 좀 미끄러워서. 하지만 넌 낯가죽이 두꺼우니 이런 일로 다치진 않을 거야, 안 그래?”민지도 몸을 돌려 책상 하나를 안았다.그렇다, 그녀는 책상 하나를 맨손으로 들었다.뚱뚱해도 나름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힘이 센 것이었다.진호는 멍하니 민지를 바라보았다. “너, 너 뭐 하려는 거야?”“물건 옮기고 있잖아.”말을 마치면서 바로 진호를 향해 던졌다.진호는 아픈 발조차 돌보지 못하고 바로 옆으로 피했다. 다음 순간, 책상은 그가 방금 서 있던 곳에 떨어졌다.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이미 기절했을 것이다.“너, 너희들...”‘감히 물건을 던지다니? 어쩜 이렇게 비겁한 거야!’“미안, 좀 지나갈게.”줄곧 입을 열지 않던 서준은 재빨리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진호의 다른 한쪽의 발을 세게 밟았다.“아, 미안!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안경을 깜박했네. 나 방금 무슨 쓰레기를 밟은 거야?”민지는 정색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쓰레기는 회수할 수 있지만, 네가 밟은 그 물건은 쓰레기만도 못해. 회수해도 더러워서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너희들 정말 하나같이 사납군! 오늘 이 물건들 다 옮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청소부 불러서 전부 옮기라고 할 거야!”진호는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을 호되게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뒷모습은 당황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민지는 배를 안고 크게 웃었다.“야, 능력 있으면 가지 마! 돌아와, 나 아직 물건을 다 옮기지 못했단 말이야!”웃고 나니 기분은 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아직 5일 남은 줄 알았는데, 이제 하루도 안 남았다니.”서준도 안색이 어두웠다.“정말 괘씸해!”정은은 생각을 하더니 구석에 가서 어디론가에 전화를 했다.“선배님,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점심을 먹은 후, 청소부들이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이
말을 마치고, 정은은 학교로 들어갔다.도겸은 제자리에 서서 쓴웃음을 지었다.“나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너에게 있어 난 그렇게도 형편이 없는 건가...”정은은 먼저 수업하러 갔다.수업이 끝난 후, 그녀는 민지, 서준과 함께 실험실에 갔다.5일 후면 그들은 실험실을 학교에게 돌려줘야 했다.그들은 마감 기한 전에 제1단계의 실험 데이터를 완성하고 싶었다.그러나 세 사람이 실험실에 왔을 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청소부 몇 명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민지가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가 이 실험실에 들어오라고 했죠? 이건 저희의 물건인데, 어디로 옮기시려는 거예요?!”그들도 당초에 이 실험실을 장식하느라 엄청난 신경을 썼다.물건도 함께 사고, 청소도 함께 하고. 그들은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여겼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서 두말없이 물건을 옮기다니, 누가 가만히 있으려 하겠는가?아무튼 민지는 제대로 화가 났다.“내려놓으세요! 내려놓으라고요!”청소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영문을 몰랐다.그들도 억울했다.“학교에서 물건을 옮기라는 통지가 내려왔거든요.”정은은 그나마 냉정했다.“누가 통지를 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송지혜 교수님이요. 이 실험실이 소방 점검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후속 시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옮길 수 있는 물건을 모두 옮기라고 하셨어요.”“또 그 빌어먹을 송 교수님이야!” 민지는 이를 갈았다.“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잠시도 기다릴 수 없이 기어코 우리를 쫓아내고 싶은 거야!”‘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밉살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이런 사람이 교수님으로 될 자격이 있는 건가?’청소부는 머리를 긁적였다.“미안해요, 학생들. 우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그냥 위에서 시킨대로 할 수밖에 없거든요.”정은은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곧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죠.”“그래
정은은 생각 끝에 동의했다.도겸이 사인할 거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도겸은 웃으며 핸드폰을 왕순자에게 돌려준 후, 유쾌한 발걸음으로 올라갔다.왕순자는 핸드폰을 받으며 감탄했다.“도련님께서 이렇게 웃으신 게 얼마만이야.”...새벽, 정은은 벨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평소 일어날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베갯머리에 놓인 핸드폰은 끝없이 윙윙거렸다.그녀는 눈을 억지로 뜨며 확인했는데, 전부 도겸이 보낸 문자라는 것을 발견했다.연달아 수십 통의 문자를 보낸 것도 모자라 온통 쓸데없는 말뿐이었다.[정은아, 자?][어젯밤에 네 꿈을 꿨어][아직도 자는 거야?][오늘 아침에 수업 있어?][서정이 수업시간표 확인했는데, 너희들 오전에 전공 수업이 하나 있더라.]이와 같은 쓸데없는 문자였다.정은은 차갑게 읽으며 이 모든 것을 확인하기가 귀찮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또 하나의 문자가 들어왔다.[정은아, 나 네가 좋아하는 떡 샀는데, 지금 네 집 아래층에 있어.][조급해하지 마, 계속 널 기다릴게]정은은 눈살을 찌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베란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먹을 것을 들고 아래층에 서 있었다.그녀는 어이가 없었다.남자는 뭔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눈이 마주치자 도겸은 입을 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이 탁 하고 창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정은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잤다.물론 편하게 자지 못했다.하지만 아침 이맘때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자체가 편했다.아침 7시, 그녀는 제시간에 일어나 세수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하게 아침밥을 먹은 다음에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도겸은 정은을 보자마자 눈빛이 밝아지더니 바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정은아, 이 떡과 만둣국은 네가 예전에 자주 갔던 그 가게에서 산 거야. 하지만 지금 좀 식었으니까 전자레인지로 데워야 할 것 같아.”“난 이미 집에서 먹었으니까 이건 너 혼자 먹어.”도겸은 이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래, 그럼
“하하하, 그건 아니지만 나름 경험이 있는 편이에요.”“한번 듣고 싶네요.”이세운은 도겸의 옆에 앉아 유유히 입을 열었다.“옛말에 ‘집에 여자가 있어야 집안이 잘 된다’라는 말이 있어요. 집에 있는 여자는 내조를 잘 해야 돼요. 우리를 도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고,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며 아이를 키우면 얼마나 좋아요.”“접대할 때는 젊은 여자들을 데리고 나가면 돼요. 술도 대신 막아줄 수 있고, 또 손님을 잘 모실 수 있으니까요. 끝나면 작은 돈을 써서 보내면 되고요.”“사모님은 의견이 없으신 거예요?”“집사람이 무슨 의견이 있겠어요? 매일 큰 별장에서 지내며, 명품 가방에 고급 화장품을 쓰잖아요. 그리고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심지어 나가서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불만을 느낄 리가 있을까요?”도겸이 물었다.“만약 어느 날 사모님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신다면...”“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여자는 돈 많은 남자에게 의지하면 점차 혼자 생존할 능력을 잃을 거예요.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날겠어요?” 이세운은 자신의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만약 날개가 있다면요? 정말 날아갔다면요?”이세운은 멍해졌다.‘이건...’그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떠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도겸은 일어서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이 대표님, 너무 자신 있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왜냐하면...”이세운은 영문을 몰랐다.“앞으로 뼈 저리게 후회할 수 있으니까.”말을 마치고 도겸은 골프카트에 올라탔다.“계속 즐기세요, 전 먼저 돌아갈게요.”“네?”...골프장을 떠난 도겸은 원래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귀신에 홀린 듯 서비대학교로 찾아갔다.이번에 그는 대문 앞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길 건너편에 멈춘 다음, 차창을 내리고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통해 도겸은 교문을 바라보았다. 대문은 여전히 6년 전 그대로였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정은을 처음 본 곳이 바로 여기였다.그녀를 본 순간, 도겸의 심
재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현빈은 계속해서 말했다.“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셨다면서요? 오늘은 꽤 일찍 돌아오셨네요.”“들었다고요?” 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누구한테서 들었죠?”그는 오늘 수업이 있었는데, 마침 생명과학대학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그러나 강의실에 민지와 서준밖에 없었다.물어보니 정은이 휴가를 냈다는 것이었다.실험실은 확실히 매우 바빴다. 평소에 재석은 수업이 끝난 후,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바로 돌아갔기에, 이 시간에 집에 가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현빈은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정은에게서 들은 거겠죠.”재석은 쌀쌀하게 말했다.“그럼 정은이는 골목 어귀에서 주차하면 안 된다고 알려준 적이 없는 건가요?”“바로 가야죠.” 현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페달을 밟고 떠났다.잠시 후, 현빈은 갑자기 뭔가를 알아차렸다.방금 재석이 정은을 다정하게 ‘정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점점 멀어지는 차를 보며, 재석은 시선을 돌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다만 이를 악물고 있는 동시에 눈빛도 싸늘해졌다.7층에 도착하자, 그는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옆집의 문을 두드렸다.“정은아?”몇 초 후, 문이 열렸다.“네, 선배님.”재석은 위아래로 정은을 한번 훑어보았다.“괜찮아?”“네?” 정은은 멍해졌다.“오늘 교실에서 널 보지 못했는데, 네가 휴가를 냈다고 해서.”“네. 처리할 일이 좀 있었어요.”“실험실과 관련이 있는 일이야?”“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됐어?”정은은 담담하게 웃었다.“마지막 한 단계만 남았어요.”“내 도움이 필요해?”“아니요.”현빈의 말이 아주 옳았다. 도겸이 스스로 사인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강요할 수 없었다.재석은 눈빛이 반짝였다.“방금 요 앞에서 심현빈을 만났어.”“아, 심 대표님이 날 데려다줬어요.”“같이 간 거야?”“아니요.”정은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공교롭게
“썰렁해서 웃긴 거야.”‘참 긍정적인 사람이야.’현빈은 웃음을 거두며 갑자기 정색했다.“말해봐, 무슨 일이야? 굳이 강도겸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그렇게 말하는 건데요?”“네가 강도겸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어떻게 같이 앉아서 그 사람과 밥을 먹겠어? 부탁할 일이 있으면 몰라도. 무슨 일인지 나에게 말해줄래?”정은은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강도겸이 사인한 동의서를 받아야 수속을 마칠 수 있는 거야?”“네.”“아무나 찾아서 사인해 주면 안 돼?”정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에헴!” 현빈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농담이야.”“난 돈과 비준을 받는 일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나에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얘 사인 안 했어?”“네.”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무슨 조건을 말했는데?”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너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했겠지? 두 사람 다시 시작하자고.’‘이 사람이 테이블 밑에 숨어서 엿들은 거야?’“쳇! 뻔뻔스럽긴! 화해는 무슨, 자신의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라!”‘같은 부류의 사람이라서 이런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건가?’“난 마음속으로 뭘 중얼거리고 있어?”정은은 깜짝 놀랐다.“아, 내가요?”“분명히 있을 텐데!” 현빈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난 다 알고 있으니까 발뺌할 필요 없어.”정은은 말문이 막혔다.“맞네! 어차피 좋은 말은 아닐 거야! 몰래 날 욕한 거 아니겠지?”“에헴, 그건 아니에요...”“방금 그 땅이 어디에 있다고 했지?”“동쪽의 교외에요.”“위치는 좋네. 시내에서 멀지 않고 교통도 편리하고. 헤어질 때 강도겸이 준 거야?”정은은 입가를 실룩거렸다.“왜 질문이 그렇게 많아요?”“이건 정말 까다롭네. 강도겸을 억지로 강요해서 사인하게 할 수도 없고. 그러나 방법이 이거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야.”정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다른 방법이 있어요?”“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