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순은 마음속으로 몰래 웃으며 눈빛은 소진헌이 가져온 과일 바구니에 떨어졌다.“동서도 체리를 산 거야? 형님이 산 것보다 훨씬 작은 것 같은데?”이미숙은 활짝 웃으며 말투가 온화했다.“저희 집이 어떻게 형님댁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주덕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네! 누가 형님댁보다 잘 살 수 있겠어.”정은은 입술을 구부리며 무심한 척 말했다. “둘째 큰어머니는 무슨 과일을 사셨어요?”주덕순은 웃음이 굳어졌다.정은은 눈치채지 못한 듯, 마침 자신의 옆에 있는 그 과일 바구니를 뒤졌다.“어디 보자, 사과, 배, 귤...”비싼 과일은 하나도 없었다.“역시 둘째 큰어머니시네요. 모두들 자주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사셨다니.”주덕순은 귀에 거슬리다고 생각했지만, 또 정은의 말에서 트집을 잡지 못했다.“그래, 난 식구들이 좋아하는 과일을 좀 샀어...”말하자면 주덕순은 가정 형편이 나름 괜찮았다. 부모님은 모두 전기 시설 관리직이었고, 아버지는 또 나름 중요한 직위를 맡았다. 주덕순은 집안의 외동딸이었으니, 어릴 때부터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그야말로 엄청 편안한 삶을 누렸다.그러나 그녀는 속이 좁고 따지기 좋아해서 결코 대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가족들을 대할 때 더욱 그랬다.“가족을 챙기는 데는 둘째 큰어머니밖에 없네요.”“에헴.”박나영은 가볍게 기침을 했다.“말만 하지 말고 얼른 과일 먹어.”“네, 감사합니다, 큰어머니.” 정은은 대범하게 체리를 하나 입에 넣었다.“정말 엄청 달아요.”그러나 주덕순은 오히려 풀이 죽었다. 그녀는 어색해하며 자신의 남편을 바라보았고, 소진호가 자신을 위로하길 바랐다.그러나 소진호는 주덕순에게 눈빛 하나 주지 않았다.“엄마, 조금 더 먹어. 바삭바삭하고 엄청 달아!” 시율은 옆에서 재촉했다. ‘빨리 먹지 않으면 남들이 다 먹을지도 몰라.’“넌 먹을 줄만 알지? 너와 네 아버지는 날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소진호와 시율은 어이가 없었다....점심 12시가 되자,
“그럼요.”“아가씨, 정말 고마워!” 박나영은 받아서 한쪽에 놓은 다음, 이따가 뜯어보려고 했다.소수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금팔찌인데,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게에 가져가서 바꿀 수 있어요.”주덕순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아가씨도 정말 통이 크네. 금팔찌를 선물하다니...”소수정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무척 득의양양했지만, 일부러 겸손한 척했다.“에이, 큰 오빠 댁이 얼마나 잘 사는데, 제가 산 금팔찌가 뭐라고요.”“그런데 왜 형님에게만 주는 거야? 나와 네 셋째 올케언니는?” 주덕순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아가씨는 이제 은행 책임자가 됐으니 평소에 큰 고객들을 상대할 텐데. 이런 도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소수정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둘째 올케언니도 갖고 싶으신 거예요?”주덕순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금팔찌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안 그래 동서?”말하면서 그녀는 이미숙을 끌어들였고, 주덕순과 소수정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이미숙은 말을 하지 않았다.“동서, 말 좀 해봐?”이 결정적인 순간에 소진헌이 입을 열었다.“우리 집사람은 주얼리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평소에 제가 사줘도 끼는 것을 본 적이 없거든요.”주덕순은 입을 삐죽거렸다.‘누가 촌놈이라고 하지 않을까 봐. 뭐? 금팔찌가 싫어? 개뿔!’“동서는 싫지만 난 좋은데!” 주덕순은 뻔뻔스럽게 말했다.“아가씨, 우리를 차별하는 건 아니겠지?”“그래요, 그럼 둘째 올케언니도 다음에 한턱 내요. 식구들 모두 초대한다면, 선물도 자연히 손에 들어오겠죠.”주덕순은 얼굴이 어두워졌다.‘우리는 별장도 없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집에 초대할 수가 있겠어.’“집이 작다고 생각되시면, 레스토랑에 가서 먹어도 돼요.” 소수정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 주덕순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바로 말했다.‘지금 장난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레스토랑에 간다고? 심지어 수준이 있는 레스토랑에 가야 하잖아.
당시 정은의 일로 소진헌과 이미숙은 직접 J시에 찾아갔지만, 돌아온 후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주덕순은 자신이 들은 소문도 사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정은이 연애를 하기 위해 공부를 포기한 게 뻔하지. 듣자 하니 그 남자의 조건이 아주 좋다고 들었는데. 재벌이라고 했나?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고 그 남자에게 매달린 거구나.’소진헌과 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정은은 오히려 무척 평온했다.“아니요. 이미 헤어졌거든요.”“그 재벌들의 안목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도 그저 널 가지고 논 거겠지. 너도 참, 그렇게 똑똑한 아이가 뜻밖에도 그런 말을 믿다니. 재벌 집안에 시집갈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주덕순은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내가 보기엔 말이야, 이 아가씨 명성이 가장 중요하지. 두 사람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었는데, 그 남자는 너한테 보상이라도 좀 주지 않았어?”‘드라마에서 보면, 돈 많은 늙은이들은 정말 통이 크던데. 이별 통보를 한 다음, 바로 여자에게 수억 원을 입금해 줬잖아. 이렇게 보면 정은이도 손해를 본 건 아니네...’하지만 주덕순은 질투하기 시작했다.‘남자와 몇 년 같이 잤다고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니, 그럼 정은이도 이제 부자라는 거잖아? 이건 너무 불공평한데? 정은이는 무슨 절세미인도 아니고, 무슨 근거로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가 있는 거지? 이러다 셋째가 먼저 벼락부자로 되는 거 아니야?’정은은 눈을 들어 예리한 눈빛으로 주덕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제가 무슨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요?”“그냥 뭐 돈이라든가, 비싼 주얼리라든가...”“그만하세요!”소진헌은 식탁을 두드리며 벌떡 일어섰다.“둘째 형수님, 비록 우리는 한 가족이지만, 그래도 말 좀 가려서 하세요!”주덕순도 따라서 일어섰다.“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나도 단지 조카딸에게 관심을 가졌을 뿐인데, 그것도 안 되는 거야?”“이게 관심이라고요?”“어머, 지금 그게 무슨 뜻이니?”이
진말숙은 소진헌의 뒷모습을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불효자식이! 넌 그 불여우에게 홀려서 이제 감히 부모님을 거역하다니! 내가 한마디 하면, 넌 열 마디를 받아치는구나! 그래, 멀리 꺼져라, 불여우와 불여우가 낳은 어린 여우를 데리고 가! 영원히 우리를 찾아오지 말고!”이미숙이 공공연하게 자신을 반항하자, 진말숙은 체면을 잃은 것만 같았다.이 순간, 그녀는 이 며느리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했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도 함께 원망했다.‘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저런 여자를 찾다니! 이제 장가를 갔다고 어머니가 눈에 보이지도 않은 모양이야! 불효자식 같으니라고!’...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진헌은 침묵을 지켰다. 이미숙은 가볍게 그의 손을 잡았다.소진헌은 이미숙을 향해 웃으며 자신이 괜찮다고 말했다.그동안 소진헌은 이미 진말숙이 다른 사람 편드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이렇게 불쾌하게 헤어지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예전에는 참을 수 있으면 될수록 참았지만, 정은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평소에 성격이 좋기로 소문난 소진헌도 그들의 그러한 비방을 용납할 수 없었다.집에 도착하자, 이미숙은 밥을 하려고 했고, 정은은 그녀를 막았다.“엄마, 제가 할게요.”“네가?”예전에 집에 있을 때, 정은은 열 손가락에 물 한 방울조차 묻히지 않았는데, 밥도 소진헌이 앞에 갖다 놓지 않으면 절대로 먹지 않았다.“네, 오늘은 제 솜씨 좀 맛보세요.”“주방이나 태우지 마.” 기분이 그리 좋지 않던 소진헌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정은은 은근히 화가 났다.“제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부부 두 사람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한 시간 후, 식탁에 가득 차린 요리를 보고, 소진헌과 이미숙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당황해졌다.제육볶음, 소꼬리탕, 잡채, 갈비찜, 닭볶음탕, 생선구이, 야채 볶음 두 개, 그리고 두부찌개가 있었다.이미숙은 침을 삼키며 물었다.“이, 이거 다 네가 한 거야?”정은은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
“당신 말고 또 누가 이런 막돼먹은 짓을 할 수가 있겠어요?” 이미숙은 화가 많이 났다.그녀는 남에게 욕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막돼먹다’라는 단어도 이미숙이 생각하는 가장 심한 욕이었다.그러나 류춘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허리를 짚으며 냉소를 지었다.“내가 막돼먹어? 이 정도 가지고? 넌 더 막돼먹은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래!”“그럼 인정한 거네요? 당신이 그런 거 맞죠?” 이미숙은 눈을 부릅떴다.류춘미는 이미숙의 시선을 피했다.“너 말 조심해, 내가 뭘 인정했다는 거야? 증거는? 증거 있냐고? 그리고 설령 이게 내가 한 짓이라고 해도 뭐가 어때서? 능력 있으면 경찰 불러서 날 감옥에 집어넣든가. 고작 꽃 하나 망쳤다고 경찰들이 출동할 것 같아? 내가 바보인 줄 아냐고?”이미숙은 류춘미 때문에 화가 나서 숨조차 쉬지 못했다.소진헌은 재빨리 다가가서 이미숙을 뒤로 감쌌다.“류 씨, 지금 너무한 거 아니야! 그 등꽃이 당신을 방해하지도 않았는데. 다 같은 이웃들끼리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어?”정은은 한바퀴 둘러보았다. 정원에는 등꽃 꽃잎이 가득 널려 있었고, 벽과 가까운 화분대는 아예 파괴되었는데, 지금 아직도 공중에 걸려 있었다.정원은 그야말로 범죄 현장에 비견될 정도로 너저분했다.“당신이 방해하지 않았다고 하면 방해하지 않은 거야?” 류춘미는 소진헌이 나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매를 걷어붙이며 싸울 준비를 했다.“당신의 꽃이 내 밭의 햇빛을 가렸으니, 내가 심은 채소들이 다 죽었잖아. 게다가 벌레까지 생기게 만들었는데도 계속 발뺌할 거야?”“또 이 화분대들도 그래.”류춘미는 땅을 가리켰다.“모서리가 있는 데다가 또 우리 집 창문을 마주하고 있어서 우리의 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아직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고?”소진헌은 화가 나서 되려 웃음이 나왔다.“일단 우리 두 집 사이의 공터는 공용이라서 채소를 심는 자체가 규정을 위반한 짓이야. 당신은 채소에 벌레가 생겼다고 하는데,
류춘미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소진헌은 계속해서 말했다.“참, 내가 방금 이 대걸레로 변기 청소를 했는데, 미처 씻지 못했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우리 집 화장실은 더럽지 않으니까. 류 씨도 신경 쓸 필요 없어.”‘괜찮긴 개뿔!’“아! 아빠...”정은이 말을 이어받았다.“어제 먹다 남은 음식들을 변기에 부었는데, 비록 물을 내렸지만. 여전히 기름이 가득한 것 같아요. 아주머니, 설마 몸에서 쉰내 나는 거 아니에요?”소진헌과 정은은 너 한 마디 나 한 마디 주고 받으면서, 화제는 갈수록 메스껍고 징그러워졌다. 류춘미는 원래 득의양양했지만, 이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너, 너...” 그녀는 코로 냄새를 맡았는데, 마치 자신에게서 정말 정은이 말한 그 쉰내가 나는 것 같았다.“당신들 딱 기다려!”이 한마디를 남긴 다음, 류춘미는 아주 빨리 도망갔다.‘샤워! 지금 당장 샤워해야 돼!’그 순간, 정은은 자신이 ‘대걸레의 여신’이라고 느꼈다!정은의 행동에 대해, 이미숙은 비록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그리 찬성하지 않았다.“여자애가 걸핏하면 대걸레를 들고 다니면 안 돼. 보기 싫어.”“그 아주머니가 너무 얄미워서 그래요...”정은은 바닥에 널린 등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소진헌은 이미 묵묵히 현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날씨가 좋아지면, 화분대를 다시 박고 정원 안쪽으로 옮겨야겠다.”그는 이런 마찰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큰일이 아니었으니까.오늘 같은 억울함은 자신에게 있어 별거 아니었지만, 이미숙이 다시 한번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정은은 잠시 침묵했다.“아빠,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류춘미가 오늘 정원을 망친 이상, 앞으로 더욱 심한 짓을 할 수 있었다.그녀 자신이 말했듯이, 단지 꽃을 망친 데다가 증거조차 없었으니, 경찰서에 잡혀갈 리가 없었다.소진헌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으면 뭘 또 어쩌겠어? 수십 년간 알고 지낸 이웃이니, 난 류 씨가 어떤 사람인지 그 누구보다
소진헌은 놀라움을 느꼈다.“왜 이곳에 온 거야?”정은이 말을 하려던 참에, 주택 판매를 담당하는 직원이 웃는 얼굴을 하며 걸어왔다.“집을 보고 싶으신 건가요? 저희는 주택 구조가 아주 다양해서, 고객님의 여러 가지 수요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요.”정은이 말했다.“일단 환경 좀 보고 싶은데요.”“이쪽이 바로 저희 주택단지의 모형입니다. 이곳에서 저희 아파트 주위의 환경 배치가 매우 합리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죠. 마트, 학교, 병원이 있으니, 아주 편리합니다.”정은은 그 모형을 힐끗 바라보았다.“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요.”“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층수가 높기 때문에 건물 사이의 간격이 비교적 좁을 거예요.”“별장 구역이 있다고 들었는데?”레이크 다이아는 총 두 가지 유형의 주택이 있었다. 하나는 일반 분양 주택이었는데, 바로 정은이 지금 보고 있는 모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채로 된 작은 별장이었다.작다고 하는 이유는 그 별장이 2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 층의 면적이 그리 크지 않지만, 앞뒤에 각각 정원이 하나씩 갖추어져 있었다.대문은 아주 넓었고, 한식 건축 스타일이라 식구가 적은 가족들이 지내기에 아주 적합했다.‘큰 별장’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전문적으로 식구가 적은 가정을 위해 디자인했으니, 거주 공간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이 썰렁해 보이지 않게 했다. 독창적인 한식 디자인까지 더해져 레이크 다이아는 L시의 가장 핫한 주택단지로 되었다.정은은 오기 전에 미리 조사를 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레이크 별장을 보고 싶어요.”소진헌은 꽃을 심기를 좋아해서, 집에 꼭 큰 정원이 있어야 했다.이미숙은 야외에서 책을 보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용한 뒷마당이 있어야 하고, 제일 좋기는 정자가 있어야 했다. 그럼 그녀도 쉬는 시간에 차를 마시며 쉴 수 있었다.직원은 정은이 별장을 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놀랐다. 게다가 정은은 별장 지역의 이름
정은은 많은 고급 주택이 고객의 자산을 확인한 후에야 주택을 볼 수 있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 VIP고객이 되려면 어떤 요구가 있는 거죠?”“우선 L시에 주택을 구매 자격이 있어야 하죠.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에요. 둘째, 계좌 유동 자금은 반드시 20억 이상에 달하거나, 블랙카드를 소지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자산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부동산을 제시할 수도 있고요.”현금이든 예금이든 블랙 카드든 정은은 없는 게 없었다.어느 것을 선택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소진헌은 이미 정은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밖으로 끌고 갔다.“왜 갈수록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20억의 유동자금이 있어야 한다니,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이미숙은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소설도 감히 그렇게 쓰지 못하는데, 넌 그걸 대놓고 묻다니. 그동안 큰 도시에서 공부를 했다고 담력이 꽤 커졌구나.”그리고 미안해하며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말했다.“미안해요, 우리 딸이 장난이 좀 심해서, 괜히 시간만 낭비하게 했네요.”이번에 그 직원은 더 이상 연기조차 하지 않았고 바로 눈을 부라렸다.“어디서 온 촌놈들이에요? 별장을 살 돈도 없는데 여기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정신이 나간 거예요?”이미숙은 멈칫했고, 소진헌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따질 수가 없어 그저 사과만 했다.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자, 그 직원은 더욱 신이 나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그 꼴로 별장을 사려고요? 아마 아파트의 화장실 하나조차 살 수 없을걸요! 살다 살다 이런 사람이 다 있다니, 정말 재수 없어!”‘평소에 출근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오늘 난 또 드디어 큰 고기 하나 낚은 줄 알았네. 그런데 그저 돈이 없는 거지라니! 어이없어.’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우리가 잘못한 건 맞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어쨌든 우리도 손님인데...” “듣기 싫으면 들어오지 말았어야죠. 뭐, 손님인데?
그때 두 사람은 함께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정은은 자신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도겸은 원래 화가 치밀어 올랐다.재벌 집 도련님인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남을 기다리게 한 적은 있어도 남을 기다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소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계속 사과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화는 뜻밖에도 이렇게 가라앉았다.촤악-철저히 가라앉았다.“그때 넌 너무 바빴지. 그 후에 데이트를 할 때도 거의 내가 먼저 도착한 후에 음식을 주문해서 네가 오기를 기다렸잖아. 가장 오래 기다렸을 때가... 오미선 교수님이 널 데리고 세미나에 참가한 그때인 것 같은데.”“주최 측이 임시로 진행을 고쳤기에 세미나가 두 시간 지연되어 끝났어. 네가 도착했을 때, 레스토랑은 이미 문을 닫았고.”정은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은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두 사람은 그때 처음으로 말다툼을 벌였다.그리고 도겸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또 한 번은 네가 오미선 교수님과 표본을 채집해야 한다며 바로 출장을 갔잖아, 나한테 미리 알려주지도 않고.”“난 바보처럼 학교로 달려가서 널 기다렸는데, 오전 내내 기다렸지만 널 보지 못했어...”도겸은 계속 말을 했지만 정은은 시종 침묵을 지켰다.“정은아, 그때의 일들 아직 기억하니?”“지나간 일은 벌써 잊은지 오래야.”도겸은 정은의 싸늘한 태도에 상처를 받지 않고 오히려 웃기 시작했다.“괜찮아, 다 기억할 거야.”몸소 겪은 일을 어찌 그리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잊은 척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이었다.30분 후, 차는 교외의 한 영국식 정원에서 멈췄다.도겸은 손을 뻗었다.“내리자, 정은아.”정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남자도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눈앞의 정원을 바라보았다.“여기 기억나?”정은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억력이 너무 좋았다.이 정원은 사실 와인 창고였다.한 모임의 카드 게임에 동건이 도겸에게 졌던 것이다.도겸은 친구들과
토요일, 이틀 동안 내리던 비가 마침내 그쳤다.쏟아지는 겨울비에 J시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무더운 여름은 가고,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와 싸늘한 바람이 찾아왔다.정은은 두꺼운 패딩과 모자, 목도리로 자신을 꽁꽁 싸맸다.도겸은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렇게 추운 날, 그는 차를 골목 맞은편의 길가에 세워놓고 스스로 아파트 아래에 가서 기다렸다.지나가는 행인들은 저도 모르게 도겸을 힐끔 바라보았다.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직 문을 바라보며 경건함이 경지에 이르렀다.재석은 실험실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그는 도겸을 보았다.물론 도겸도 재석을 보았다.눈이 마주치자, 두 남자의 눈빛은 모두 적의를 드러냈다.재석은 도겸에 대해 호감이 없었고, 심지어 현빈조차 도겸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 별장에 가서 책을 옮길 때, 도겸이 정은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재석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강 대표님은 아침에 금방 온 거예요, 아니면 어젯밤에 가지 않은 거예요?”도겸은 차갑게 웃었다.“교수님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자꾸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금방 왔든, 아니면 밤새 안 갔든, 이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도겸은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정은이가 내 데이트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 함께 외출할 거예요.”재석은 바로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정은이 최근 실험실의 일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던 것을 떠올리니, 양자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재석은 생각을 멈추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정은이 이번 만남에 동의한 이상, 다 자신의 생각이 있겠죠.”‘데이트'는 바로 ‘만남’으로 되었다.누가 방금 교수님이 말을 잘 못한다고 무시했을까?“남자라면, 가난할 수도 있고 못생길 수도 있지만, 매너가 없어서는 절대로 안 돼요.”도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죠?”“여성을 존중하고, 그녀들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낮에는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저녁에 좀 더 뛰어야지.”정은은 제자리에 서서 재석이 올라오길 기다렸고, 두 사람은 함께 올라갔다.“오늘 선배님이 도와준 덕분에 우리도 바로 쫓겨나지 않았어요.”그러나 재석은 오히려 손을 흔들었다.“우리 사이에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 5일이면 충분한 거야? 부족하면 내가 다시 학교에게 연락해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할게...”“이미 충분해요.”이번 문제는 시 소방국과 관련이 된 데다가 시정지시서까지 발부되었기에 정은 그들도 규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총장이 나서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조만간 이사를 가야 하는 이상, 굳이 재석을 난처하게 할 필요가 더 있겠는가?‘선배님은 이미 날 여러 번 도왔어.’두 사람이 동행하면 시간은 항상 빨리 지나갔다. 분명히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7층까지 올라갔다.“선배님, 잘 자요. 내일 봐요.” 정은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재석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내일 보자.”정은이 문을 닫고 나서야 그도 따라서 닫았다.서재에 들어간 재석은 컴퓨터 앞에 앉았고, 화면이 켜지자 진욱의 문자가 ‘분출’되었다.[너 어디 갔어? 왜 얘기하다가 문자를 씹는 건데?][설마 또 조깅하러 건 아니겠지?][아니... 너 오늘 밤 몇 번이나 내려갔잖아? 대체 왜 그래?][조 교수? 귀신에 빙의라도 된 거야?][헐! 정말 달리기를 하러 갔다니. 길가에 무슨 금덩어리라도 있는 줄 알겠다.][오늘 밤 정말 수상해. 밤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어도, 하룻밤에 몇 번이나 나가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정말 본 적이 없어.][너 혼자 좀 봐, 7시부터 10시까지 몇 번이나 내려간 거야?!][됐어... 데이터는 그냥 나 혼자 맞출게. 널 기다린 내가 바보지!]다급한 진욱은 마지막에 포기를 하며 묵묵히 일하러 갔다.재석은 방금 여자애가 혼자 복도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노란 등불이 몸에 떨어지자, 유난히 가냘파 보였다.‘
“아악!” 진호는 발을 안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그리고 뛰면서 꽥꽥거렸다.정은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정말 미안해. 방금 손이 좀 미끄러워서. 하지만 넌 낯가죽이 두꺼우니 이런 일로 다치진 않을 거야, 안 그래?”민지도 몸을 돌려 책상 하나를 안았다.그렇다, 그녀는 책상 하나를 맨손으로 들었다.뚱뚱해도 나름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힘이 센 것이었다.진호는 멍하니 민지를 바라보았다. “너, 너 뭐 하려는 거야?”“물건 옮기고 있잖아.”말을 마치면서 바로 진호를 향해 던졌다.진호는 아픈 발조차 돌보지 못하고 바로 옆으로 피했다. 다음 순간, 책상은 그가 방금 서 있던 곳에 떨어졌다.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이미 기절했을 것이다.“너, 너희들...”‘감히 물건을 던지다니? 어쩜 이렇게 비겁한 거야!’“미안, 좀 지나갈게.”줄곧 입을 열지 않던 서준은 재빨리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진호의 다른 한쪽의 발을 세게 밟았다.“아, 미안!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안경을 깜박했네. 나 방금 무슨 쓰레기를 밟은 거야?”민지는 정색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쓰레기는 회수할 수 있지만, 네가 밟은 그 물건은 쓰레기만도 못해. 회수해도 더러워서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너희들 정말 하나같이 사납군! 오늘 이 물건들 다 옮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청소부 불러서 전부 옮기라고 할 거야!”진호는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을 호되게 노려보더니 몸을 돌렸다.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뒷모습은 당황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민지는 배를 안고 크게 웃었다.“야, 능력 있으면 가지 마! 돌아와, 나 아직 물건을 다 옮기지 못했단 말이야!”웃고 나니 기분은 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아직 5일 남은 줄 알았는데, 이제 하루도 안 남았다니.”서준도 안색이 어두웠다.“정말 괘씸해!”정은은 생각을 하더니 구석에 가서 어디론가에 전화를 했다.“선배님,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점심을 먹은 후, 청소부들이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이
말을 마치고, 정은은 학교로 들어갔다.도겸은 제자리에 서서 쓴웃음을 지었다.“나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너에게 있어 난 그렇게도 형편이 없는 건가...”정은은 먼저 수업하러 갔다.수업이 끝난 후, 그녀는 민지, 서준과 함께 실험실에 갔다.5일 후면 그들은 실험실을 학교에게 돌려줘야 했다.그들은 마감 기한 전에 제1단계의 실험 데이터를 완성하고 싶었다.그러나 세 사람이 실험실에 왔을 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청소부 몇 명이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민지가 말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누가 이 실험실에 들어오라고 했죠? 이건 저희의 물건인데, 어디로 옮기시려는 거예요?!”그들도 당초에 이 실험실을 장식하느라 엄청난 신경을 썼다.물건도 함께 사고, 청소도 함께 하고. 그들은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여겼다.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서 두말없이 물건을 옮기다니, 누가 가만히 있으려 하겠는가?아무튼 민지는 제대로 화가 났다.“내려놓으세요! 내려놓으라고요!”청소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영문을 몰랐다.그들도 억울했다.“학교에서 물건을 옮기라는 통지가 내려왔거든요.”정은은 그나마 냉정했다.“누가 통지를 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송지혜 교수님이요. 이 실험실이 소방 점검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후속 시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옮길 수 있는 물건을 모두 옮기라고 하셨어요.”“또 그 빌어먹을 송 교수님이야!” 민지는 이를 갈았다.“아직 5일이나 남았는데, 잠시도 기다릴 수 없이 기어코 우리를 쫓아내고 싶은 거야!”‘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밉살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이런 사람이 교수님으로 될 자격이 있는 건가?’청소부는 머리를 긁적였다.“미안해요, 학생들. 우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요. 그냥 위에서 시킨대로 할 수밖에 없거든요.”정은은 그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곧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얼른 식사부터 하세요. 오후에 다시 이야기하죠.”“그래
정은은 생각 끝에 동의했다.도겸이 사인할 거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도겸은 웃으며 핸드폰을 왕순자에게 돌려준 후, 유쾌한 발걸음으로 올라갔다.왕순자는 핸드폰을 받으며 감탄했다.“도련님께서 이렇게 웃으신 게 얼마만이야.”...새벽, 정은은 벨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평소 일어날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베갯머리에 놓인 핸드폰은 끝없이 윙윙거렸다.그녀는 눈을 억지로 뜨며 확인했는데, 전부 도겸이 보낸 문자라는 것을 발견했다.연달아 수십 통의 문자를 보낸 것도 모자라 온통 쓸데없는 말뿐이었다.[정은아, 자?][어젯밤에 네 꿈을 꿨어][아직도 자는 거야?][오늘 아침에 수업 있어?][서정이 수업시간표 확인했는데, 너희들 오전에 전공 수업이 하나 있더라.]이와 같은 쓸데없는 문자였다.정은은 차갑게 읽으며 이 모든 것을 확인하기가 귀찮았다.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할 때, 또 하나의 문자가 들어왔다.[정은아, 나 네가 좋아하는 떡 샀는데, 지금 네 집 아래층에 있어.][조급해하지 마, 계속 널 기다릴게]정은은 눈살을 찌푸리고 침대에서 내려와 베란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겸은 먹을 것을 들고 아래층에 서 있었다.그녀는 어이가 없었다.남자는 뭔가를 눈치챈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눈이 마주치자 도겸은 입을 열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정은이 탁 하고 창문을 닫는 것을 보았다.정은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잤다.물론 편하게 자지 못했다.하지만 아침 이맘때 침대에 누워 있는 것 자체가 편했다.아침 7시, 그녀는 제시간에 일어나 세수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하게 아침밥을 먹은 다음에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도겸은 정은을 보자마자 눈빛이 밝아지더니 바로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정은아, 이 떡과 만둣국은 네가 예전에 자주 갔던 그 가게에서 산 거야. 하지만 지금 좀 식었으니까 전자레인지로 데워야 할 것 같아.”“난 이미 집에서 먹었으니까 이건 너 혼자 먹어.”도겸은 이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래, 그럼
“하하하, 그건 아니지만 나름 경험이 있는 편이에요.”“한번 듣고 싶네요.”이세운은 도겸의 옆에 앉아 유유히 입을 열었다.“옛말에 ‘집에 여자가 있어야 집안이 잘 된다’라는 말이 있어요. 집에 있는 여자는 내조를 잘 해야 돼요. 우리를 도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고,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며 아이를 키우면 얼마나 좋아요.”“접대할 때는 젊은 여자들을 데리고 나가면 돼요. 술도 대신 막아줄 수 있고, 또 손님을 잘 모실 수 있으니까요. 끝나면 작은 돈을 써서 보내면 되고요.”“사모님은 의견이 없으신 거예요?”“집사람이 무슨 의견이 있겠어요? 매일 큰 별장에서 지내며, 명품 가방에 고급 화장품을 쓰잖아요. 그리고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심지어 나가서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불만을 느낄 리가 있을까요?”도겸이 물었다.“만약 어느 날 사모님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신다면...”“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여자는 돈 많은 남자에게 의지하면 점차 혼자 생존할 능력을 잃을 거예요. 날개도 없는데 어떻게 날겠어요?” 이세운은 자신의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만약 날개가 있다면요? 정말 날아갔다면요?”이세운은 멍해졌다.‘이건...’그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떠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도겸은 일어서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이 대표님, 너무 자신 있게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왜냐하면...”이세운은 영문을 몰랐다.“앞으로 뼈 저리게 후회할 수 있으니까.”말을 마치고 도겸은 골프카트에 올라탔다.“계속 즐기세요, 전 먼저 돌아갈게요.”“네?”...골프장을 떠난 도겸은 원래 별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귀신에 홀린 듯 서비대학교로 찾아갔다.이번에 그는 대문 앞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길 건너편에 멈춘 다음, 차창을 내리고 묵묵히 담배를 피웠다.피어오르는 흰 연기를 통해 도겸은 교문을 바라보았다. 대문은 여전히 6년 전 그대로였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정은을 처음 본 곳이 바로 여기였다.그녀를 본 순간, 도겸의 심
재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현빈은 계속해서 말했다.“많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셨다면서요? 오늘은 꽤 일찍 돌아오셨네요.”“들었다고요?” 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누구한테서 들었죠?”그는 오늘 수업이 있었는데, 마침 생명과학대학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그러나 강의실에 민지와 서준밖에 없었다.물어보니 정은이 휴가를 냈다는 것이었다.실험실은 확실히 매우 바빴다. 평소에 재석은 수업이 끝난 후,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바로 돌아갔기에, 이 시간에 집에 가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현빈은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정은에게서 들은 거겠죠.”재석은 쌀쌀하게 말했다.“그럼 정은이는 골목 어귀에서 주차하면 안 된다고 알려준 적이 없는 건가요?”“바로 가야죠.” 현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페달을 밟고 떠났다.잠시 후, 현빈은 갑자기 뭔가를 알아차렸다.방금 재석이 정은을 다정하게 ‘정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점점 멀어지는 차를 보며, 재석은 시선을 돌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다만 이를 악물고 있는 동시에 눈빛도 싸늘해졌다.7층에 도착하자, 그는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옆집의 문을 두드렸다.“정은아?”몇 초 후, 문이 열렸다.“네, 선배님.”재석은 위아래로 정은을 한번 훑어보았다.“괜찮아?”“네?” 정은은 멍해졌다.“오늘 교실에서 널 보지 못했는데, 네가 휴가를 냈다고 해서.”“네. 처리할 일이 좀 있었어요.”“실험실과 관련이 있는 일이야?”“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됐어?”정은은 담담하게 웃었다.“마지막 한 단계만 남았어요.”“내 도움이 필요해?”“아니요.”현빈의 말이 아주 옳았다. 도겸이 스스로 사인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강요할 수 없었다.재석은 눈빛이 반짝였다.“방금 요 앞에서 심현빈을 만났어.”“아, 심 대표님이 날 데려다줬어요.”“같이 간 거야?”“아니요.”정은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공교롭게
“썰렁해서 웃긴 거야.”‘참 긍정적인 사람이야.’현빈은 웃음을 거두며 갑자기 정색했다.“말해봐, 무슨 일이야? 굳이 강도겸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건가?”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왜 그렇게 말하는 건데요?”“네가 강도겸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어떻게 같이 앉아서 그 사람과 밥을 먹겠어? 부탁할 일이 있으면 몰라도. 무슨 일인지 나에게 말해줄래?”정은은 생각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서 지금 강도겸이 사인한 동의서를 받아야 수속을 마칠 수 있는 거야?”“네.”“아무나 찾아서 사인해 주면 안 돼?”정은은 고개를 돌려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에헴!” 현빈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농담이야.”“난 돈과 비준을 받는 일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큰 문제가 나에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얘 사인 안 했어?”“네.”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무슨 조건을 말했는데?”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너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했겠지? 두 사람 다시 시작하자고.’‘이 사람이 테이블 밑에 숨어서 엿들은 거야?’“쳇! 뻔뻔스럽긴! 화해는 무슨, 자신의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몰라!”‘같은 부류의 사람이라서 이런 정곡을 찌를 수 있는 건가?’“난 마음속으로 뭘 중얼거리고 있어?”정은은 깜짝 놀랐다.“아, 내가요?”“분명히 있을 텐데!” 현빈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난 다 알고 있으니까 발뺌할 필요 없어.”정은은 말문이 막혔다.“맞네! 어차피 좋은 말은 아닐 거야! 몰래 날 욕한 거 아니겠지?”“에헴, 그건 아니에요...”“방금 그 땅이 어디에 있다고 했지?”“동쪽의 교외에요.”“위치는 좋네. 시내에서 멀지 않고 교통도 편리하고. 헤어질 때 강도겸이 준 거야?”정은은 입가를 실룩거렸다.“왜 질문이 그렇게 많아요?”“이건 정말 까다롭네. 강도겸을 억지로 강요해서 사인하게 할 수도 없고. 그러나 방법이 이거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야.”정은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다른 방법이 있어요?”“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