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정은의 일로 소진헌과 이미숙은 직접 J시에 찾아갔지만, 돌아온 후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러나 주덕순은 자신이 들은 소문도 사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정은이 연애를 하기 위해 공부를 포기한 게 뻔하지. 듣자 하니 그 남자의 조건이 아주 좋다고 들었는데. 재벌이라고 했나?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고 그 남자에게 매달린 거구나.’소진헌과 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정은은 오히려 무척 평온했다.“아니요. 이미 헤어졌거든요.”“그 재벌들의 안목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도 그저 널 가지고 논 거겠지. 너도 참, 그렇게 똑똑한 아이가 뜻밖에도 그런 말을 믿다니. 재벌 집안에 시집갈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주덕순은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내가 보기엔 말이야, 이 아가씨 명성이 가장 중요하지. 두 사람 그렇게 오랫동안 사귀었는데, 그 남자는 너한테 보상이라도 좀 주지 않았어?”‘드라마에서 보면, 돈 많은 늙은이들은 정말 통이 크던데. 이별 통보를 한 다음, 바로 여자에게 수억 원을 입금해 줬잖아. 이렇게 보면 정은이도 손해를 본 건 아니네...’하지만 주덕순은 질투하기 시작했다.‘남자와 몇 년 같이 잤다고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니, 그럼 정은이도 이제 부자라는 거잖아? 이건 너무 불공평한데? 정은이는 무슨 절세미인도 아니고, 무슨 근거로 이렇게 쉽게 돈을 벌 수가 있는 거지? 이러다 셋째가 먼저 벼락부자로 되는 거 아니야?’정은은 눈을 들어 예리한 눈빛으로 주덕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제가 무슨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데요?”“그냥 뭐 돈이라든가, 비싼 주얼리라든가...”“그만하세요!”소진헌은 식탁을 두드리며 벌떡 일어섰다.“둘째 형수님, 비록 우리는 한 가족이지만, 그래도 말 좀 가려서 하세요!”주덕순도 따라서 일어섰다.“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나도 단지 조카딸에게 관심을 가졌을 뿐인데, 그것도 안 되는 거야?”“이게 관심이라고요?”“어머, 지금 그게 무슨 뜻이니?”이
진말숙은 소진헌의 뒷모습을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불효자식이! 넌 그 불여우에게 홀려서 이제 감히 부모님을 거역하다니! 내가 한마디 하면, 넌 열 마디를 받아치는구나! 그래, 멀리 꺼져라, 불여우와 불여우가 낳은 어린 여우를 데리고 가! 영원히 우리를 찾아오지 말고!”이미숙이 공공연하게 자신을 반항하자, 진말숙은 체면을 잃은 것만 같았다.이 순간, 그녀는 이 며느리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했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까지도 함께 원망했다.‘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저런 여자를 찾다니! 이제 장가를 갔다고 어머니가 눈에 보이지도 않은 모양이야! 불효자식 같으니라고!’...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진헌은 침묵을 지켰다. 이미숙은 가볍게 그의 손을 잡았다.소진헌은 이미숙을 향해 웃으며 자신이 괜찮다고 말했다.그동안 소진헌은 이미 진말숙이 다른 사람 편드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이렇게 불쾌하게 헤어지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예전에는 참을 수 있으면 될수록 참았지만, 정은과 관련된 일이었으니, 평소에 성격이 좋기로 소문난 소진헌도 그들의 그러한 비방을 용납할 수 없었다.집에 도착하자, 이미숙은 밥을 하려고 했고, 정은은 그녀를 막았다.“엄마, 제가 할게요.”“네가?”예전에 집에 있을 때, 정은은 열 손가락에 물 한 방울조차 묻히지 않았는데, 밥도 소진헌이 앞에 갖다 놓지 않으면 절대로 먹지 않았다.“네, 오늘은 제 솜씨 좀 맛보세요.”“주방이나 태우지 마.” 기분이 그리 좋지 않던 소진헌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정은은 은근히 화가 났다.“제가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세요?!”부부 두 사람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한 시간 후, 식탁에 가득 차린 요리를 보고, 소진헌과 이미숙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당황해졌다.제육볶음, 소꼬리탕, 잡채, 갈비찜, 닭볶음탕, 생선구이, 야채 볶음 두 개, 그리고 두부찌개가 있었다.이미숙은 침을 삼키며 물었다.“이, 이거 다 네가 한 거야?”정은은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
“당신 말고 또 누가 이런 막돼먹은 짓을 할 수가 있겠어요?” 이미숙은 화가 많이 났다.그녀는 남에게 욕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막돼먹다’라는 단어도 이미숙이 생각하는 가장 심한 욕이었다.그러나 류춘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허리를 짚으며 냉소를 지었다.“내가 막돼먹어? 이 정도 가지고? 넌 더 막돼먹은 것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래!”“그럼 인정한 거네요? 당신이 그런 거 맞죠?” 이미숙은 눈을 부릅떴다.류춘미는 이미숙의 시선을 피했다.“너 말 조심해, 내가 뭘 인정했다는 거야? 증거는? 증거 있냐고? 그리고 설령 이게 내가 한 짓이라고 해도 뭐가 어때서? 능력 있으면 경찰 불러서 날 감옥에 집어넣든가. 고작 꽃 하나 망쳤다고 경찰들이 출동할 것 같아? 내가 바보인 줄 아냐고?”이미숙은 류춘미 때문에 화가 나서 숨조차 쉬지 못했다.소진헌은 재빨리 다가가서 이미숙을 뒤로 감쌌다.“류 씨, 지금 너무한 거 아니야! 그 등꽃이 당신을 방해하지도 않았는데. 다 같은 이웃들끼리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어?”정은은 한바퀴 둘러보았다. 정원에는 등꽃 꽃잎이 가득 널려 있었고, 벽과 가까운 화분대는 아예 파괴되었는데, 지금 아직도 공중에 걸려 있었다.정원은 그야말로 범죄 현장에 비견될 정도로 너저분했다.“당신이 방해하지 않았다고 하면 방해하지 않은 거야?” 류춘미는 소진헌이 나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매를 걷어붙이며 싸울 준비를 했다.“당신의 꽃이 내 밭의 햇빛을 가렸으니, 내가 심은 채소들이 다 죽었잖아. 게다가 벌레까지 생기게 만들었는데도 계속 발뺌할 거야?”“또 이 화분대들도 그래.”류춘미는 땅을 가리켰다.“모서리가 있는 데다가 또 우리 집 창문을 마주하고 있어서 우리의 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아직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고?”소진헌은 화가 나서 되려 웃음이 나왔다.“일단 우리 두 집 사이의 공터는 공용이라서 채소를 심는 자체가 규정을 위반한 짓이야. 당신은 채소에 벌레가 생겼다고 하는데,
류춘미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소진헌은 계속해서 말했다.“참, 내가 방금 이 대걸레로 변기 청소를 했는데, 미처 씻지 못했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우리 집 화장실은 더럽지 않으니까. 류 씨도 신경 쓸 필요 없어.”‘괜찮긴 개뿔!’“아! 아빠...”정은이 말을 이어받았다.“어제 먹다 남은 음식들을 변기에 부었는데, 비록 물을 내렸지만. 여전히 기름이 가득한 것 같아요. 아주머니, 설마 몸에서 쉰내 나는 거 아니에요?”소진헌과 정은은 너 한 마디 나 한 마디 주고 받으면서, 화제는 갈수록 메스껍고 징그러워졌다. 류춘미는 원래 득의양양했지만, 이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너, 너...” 그녀는 코로 냄새를 맡았는데, 마치 자신에게서 정말 정은이 말한 그 쉰내가 나는 것 같았다.“당신들 딱 기다려!”이 한마디를 남긴 다음, 류춘미는 아주 빨리 도망갔다.‘샤워! 지금 당장 샤워해야 돼!’그 순간, 정은은 자신이 ‘대걸레의 여신’이라고 느꼈다!정은의 행동에 대해, 이미숙은 비록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그리 찬성하지 않았다.“여자애가 걸핏하면 대걸레를 들고 다니면 안 돼. 보기 싫어.”“그 아주머니가 너무 얄미워서 그래요...”정은은 바닥에 널린 등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소진헌은 이미 묵묵히 현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날씨가 좋아지면, 화분대를 다시 박고 정원 안쪽으로 옮겨야겠다.”그는 이런 마찰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큰일이 아니었으니까.오늘 같은 억울함은 자신에게 있어 별거 아니었지만, 이미숙이 다시 한번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정은은 잠시 침묵했다.“아빠,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류춘미가 오늘 정원을 망친 이상, 앞으로 더욱 심한 짓을 할 수 있었다.그녀 자신이 말했듯이, 단지 꽃을 망친 데다가 증거조차 없었으니, 경찰서에 잡혀갈 리가 없었다.소진헌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으면 뭘 또 어쩌겠어? 수십 년간 알고 지낸 이웃이니, 난 류 씨가 어떤 사람인지 그 누구보다
소진헌은 놀라움을 느꼈다.“왜 이곳에 온 거야?”정은이 말을 하려던 참에, 주택 판매를 담당하는 직원이 웃는 얼굴을 하며 걸어왔다.“집을 보고 싶으신 건가요? 저희는 주택 구조가 아주 다양해서, 고객님의 여러 가지 수요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어요.”정은이 말했다.“일단 환경 좀 보고 싶은데요.”“이쪽이 바로 저희 주택단지의 모형입니다. 이곳에서 저희 아파트 주위의 환경 배치가 매우 합리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죠. 마트, 학교, 병원이 있으니, 아주 편리합니다.”정은은 그 모형을 힐끗 바라보았다.“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요.”“그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층수가 높기 때문에 건물 사이의 간격이 비교적 좁을 거예요.”“별장 구역이 있다고 들었는데?”레이크 다이아는 총 두 가지 유형의 주택이 있었다. 하나는 일반 분양 주택이었는데, 바로 정은이 지금 보고 있는 모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채로 된 작은 별장이었다.작다고 하는 이유는 그 별장이 2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 층의 면적이 그리 크지 않지만, 앞뒤에 각각 정원이 하나씩 갖추어져 있었다.대문은 아주 넓었고, 한식 건축 스타일이라 식구가 적은 가족들이 지내기에 아주 적합했다.‘큰 별장’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전문적으로 식구가 적은 가정을 위해 디자인했으니, 거주 공간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이 썰렁해 보이지 않게 했다. 독창적인 한식 디자인까지 더해져 레이크 다이아는 L시의 가장 핫한 주택단지로 되었다.정은은 오기 전에 미리 조사를 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레이크 별장을 보고 싶어요.”소진헌은 꽃을 심기를 좋아해서, 집에 꼭 큰 정원이 있어야 했다.이미숙은 야외에서 책을 보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용한 뒷마당이 있어야 하고, 제일 좋기는 정자가 있어야 했다. 그럼 그녀도 쉬는 시간에 차를 마시며 쉴 수 있었다.직원은 정은이 별장을 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놀랐다. 게다가 정은은 별장 지역의 이름
정은은 많은 고급 주택이 고객의 자산을 확인한 후에야 주택을 볼 수 있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 VIP고객이 되려면 어떤 요구가 있는 거죠?”“우선 L시에 주택을 구매 자격이 있어야 하죠.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에요. 둘째, 계좌 유동 자금은 반드시 20억 이상에 달하거나, 블랙카드를 소지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자산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부동산을 제시할 수도 있고요.”현금이든 예금이든 블랙 카드든 정은은 없는 게 없었다.어느 것을 선택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소진헌은 이미 정은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밖으로 끌고 갔다.“왜 갈수록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20억의 유동자금이 있어야 한다니,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이미숙은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소설도 감히 그렇게 쓰지 못하는데, 넌 그걸 대놓고 묻다니. 그동안 큰 도시에서 공부를 했다고 담력이 꽤 커졌구나.”그리고 미안해하며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말했다.“미안해요, 우리 딸이 장난이 좀 심해서, 괜히 시간만 낭비하게 했네요.”이번에 그 직원은 더 이상 연기조차 하지 않았고 바로 눈을 부라렸다.“어디서 온 촌놈들이에요? 별장을 살 돈도 없는데 여기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정신이 나간 거예요?”이미숙은 멈칫했고, 소진헌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따질 수가 없어 그저 사과만 했다.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자, 그 직원은 더욱 신이 나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그 꼴로 별장을 사려고요? 아마 아파트의 화장실 하나조차 살 수 없을걸요! 살다 살다 이런 사람이 다 있다니, 정말 재수 없어!”‘평소에 출근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오늘 난 또 드디어 큰 고기 하나 낚은 줄 알았네. 그런데 그저 돈이 없는 거지라니! 어이없어.’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우리가 잘못한 건 맞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어쨌든 우리도 손님인데...” “듣기 싫으면 들어오지 말았어야죠. 뭐, 손님인데?
“나정 언니...” 영지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왜 날 보는 거야? 넌 자신을 체크하는 절차를 알고 있는 거야?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네가 그 책임을 질 거야?”“저, 저도 절차를 대충 알고 있어요. 전에 배운 적이 있어요. 만약 자산을 체크한 후, 이 아가씨의 블랙카드에 문제가 없다면, 저도 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요”“허, 일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빨리도 배웠네. 그러나 이것만 기억해. 우리는 눈치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의 고객님이고, 누가 집을 살 수 있는지를 모두 잘 파악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영지는 입술을 오므렸다.“고마워요, 나정 언니. 그러나 저는 신인이니, 아직 고객님과 거래를 성사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현재 인턴 단계에 처해있기에, 많이 보고 많이 연습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도 괜찮아요.”말이 끝나자, 영지는 정은을 바라보았다.“고객님, 규정된 절차에 따라, 저희는 고객님의 카드를 체크할 거예요. 만약 문제가 없다면 바로 별장을 보러 가실 수 있어요.”그리고 영지는 또 소진헌과 이미숙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아주머니, 이쪽에 앉아서 차 한 잔 마셔요. 카드 체크가 곧 끝날 거예요.”소진헌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아가씨도 참.”그는 지금 몹시 당황해 하고 있었다.‘정은이가 진짜 이 집을 사려고? 이따가 자산을 검사하면 거짓말이 들통날 텐데. 아까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우릴 비웃으면 비웃었지, 굳이 이런 내기를 할 필요가 없잖아.’이미숙은 소진헌보다 냉정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그녀는 앉아서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지만, 찻잔을 든 손이 계속 떨렸다.“고객님, 이쪽으로 오세요.”“그래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자와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풉, 능청스럽게 굴긴. 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을지 두고 봐요! 정말 뻔뻔스럽네요...”...10분 후,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나왔다.“어때? 그 카드 가짜지?” 왕나정
그래서 영지가 어떻게 소개하든, 정은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영지는 이미 자신의 흥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그럼, 어떻게 지불하실 건가요?”“전액으로 지불할게요.”소진헌은 딸이 정말 별장을 살 줄은 몰랐다. 게다가 돈까지 다 준비되었다니! 그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소리를 내기도 전에 허리에서 통증이 전해왔다. 이미숙이 그를 꼬집었던 것이다.“정은이 뭘 하든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돼.”소진헌은 다시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영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은행카드를 받은 다음, 또 허둥지둥 일련의 계약서를 준비했다.“고객님, 정말 잘 생각해 보셨어요? 문제가 없으시다면 제가 지금 카드로 결제해 드릴게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영지는 자신이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절차대로 모든 수속을 밟은 다음, 마지막에 정은이 주택 매매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사무실 쪽에서도 5억 원이 이미 입금되었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그 순간, 영지는 실감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이 놓였다.‘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출근한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벌써 집 한 채를 팔았다니?! 그것도 별장을! 5억이라니, 운이 너무도 좋잖아!’영지는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그러나 왕나정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자, 그녀는 바로 웃음을 참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참지 못하고 몰래 웃기 시작했다.수백 만원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으니, 영지는 기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1초 전까지만 해도 날뛰며 그들을 비웃던 왕나정은 지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두 눈을 부릅떴다.“영지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아, 나정 언니. 저는 방금 이 고객님의 카드가 확실히 블랙 카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방금 VIP 응접실에서 저는 이미 고객님과 함께 별장을 선정했고, 가격을 협상했는데, 이렇게 나온 것도 단지 계약서를 사인하기 위해서였어요.”왕나정은 입술이 떨렸다. “정, 정말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았고, 지구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자전하고 있는데!’선우는 또 다른 한쪽을 바라보더니 참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도겸은 한 잔 한 잔 이어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고 공도 치지 않았으며 여자가 다가오면 더욱 멀리 피했다.다른 사람들은 혀를 찼다.“우리 도겸이 형 지금 정말 침울해진 것 같아.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프네!”“꺼져, 오글거려 죽겠네! 말 좀 똑바로 할 수 없어? 우리 도겸이는 사랑을 위해 이렇게 된 것이니, 이건 일편단심이라고!”“그래도 여자는 다 똑같지 않아? 돈만 있으면 어떤 여자를 살 수 없겠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선우는 그들이 갈수록 말을 심하게 하는 것을 듣고 즉시 호통을 쳤다.“이제 그만 좀 해. 그딴 말 좀 적게 하고. 너희들은 뭐 이런 상황이 없을 줄 알아!”그들 중에는 심지어 ‘소정은'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선우는 가슴이 떨렸다.그것은 절대로 도겸 앞에서 언급하면 안 되는 이름이었고, 도겸은 듣자마자 미쳐버릴 수도 있었다. 그때 가서 소란을 피우면 정말 수습하기 어려웠다.동건은 연속 몇 판 지자, 카드를 던졌다.“재미없네. 너 무슨 속임수 썼지? 어떻게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거야?”“형은 운이 나쁜 데다가 머리도 좋지 않잖아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야! 전선우, 너 많이 컸다?”선우는 입을 삐죽거렸다.“칭찬으로 들을게요.”동건은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안 놀아.”그가 가자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사람들도 자연히 흩어졌다.선우는 카드놀이를 놀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자 술을 마실 흥미도 없었다. 무대 아래는 분위기가 막 뜨거워졌기에, 춤을 춰도 재미가 없어 아예 소파 구석에 틀어박혀 핸드폰을 보았다.그렇게 선우는 현빈이 올린 사진을 보았다.“모임? 누구랑 가족 모임에 참가한 거야?” 선우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그는 사진을 클릭하며 맛있는 것이 참 많다고 감탄하려 하다가, 갑자기 사
현빈은 미소가 굳어졌다.계속 사진을 뒤지니, 다음 사진이 바로 그가 방금 찍은 음식 사진이었다.그는 마음이 움직여 SNS를 클릭해 이 사진을 올렸다.[가족 모임.]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렀고, 일부 사람들은 댓글을 달며 소란을 피웠다.[집잔치야?][현빈이 형 또 새 애인 생겼어!][모처럼 SNS에 사진을 올렸는데, 드디어 금융 뉴스가 아니네.][우리 형님 몰래 큰일을 해냈네요][이야, 전에 같이 솔로로 지내기로 했는데, 어떻게 여자 친구 데리고 부모님을 만나러 간 거야?][쯧쯧, 이런 사진을 올리다니, 이제 결혼하려는 거야?]현빈은 사진을 클릭하며 쳐다보다가 갑자기 멈칫했다.그는 저도 모르게 사진을 확대한 뒤, 사진의 오른쪽 구석에서 정은의 반쪽 얼굴을 발견했다.비록 턱과 입술밖에 안 보이지만, 현빈의 친구들은 저마다 홈즈로 변신하여 이 실마리를 발견했다.현빈은 눈살을 찌푸리며 설명하려 했고, 생각하다 또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아무튼 모두들 농담이었으니, 만약 특별히 해석한다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았다.이때, 현빈은 갑자기 문자 한 통을 받았다.대학 동창인데 지난번에 그 샤브샤브 가게 사장님이었다.[축하한다, 친구야.][다음에 샤브샤브 먹으러 오면 무료야!]‘됐어, 답장하기 귀찮아.’...밤의 장막이 내리자, 등불이 켜졌다.전선우는 모이자며 동건과 도겸을 불렀다.동건은 처음에 퇴근한 수민을 데리러 가야 한다며 거절했다.그러나 5분 후에 동건은 다시 전화를 했다.[지금 시간 생겼어. 곧 도착할 거야.]선우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에요?”[아, 수민이가 임시로 야근을 해야 한다고 했거든.]그리고 잠시 후 다시 덧붙였다.[오늘 밤을 새워야 한데.]선우는 갑자기 어이가 없었다.‘수민, 수민, 그놈의 수민...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은? 진짜 여친도 아닌데.’“형 진짜 조수민에게 반한 거 아니지?”맞은편은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곧 버럭 했다.[꺼져! 내가 그
현빈이 말했다.“이렇게 푸짐한 밥상에, 정은이는 또 이원이 처음이니 같이 사진 한 장 찍을까요?”이 제안에 두 노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아직 손녀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이춘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확실히 기념할 만한 일이지.”“현빈아, 너 좀 잘 찍어. 나중에 프린트해서 앨범에 넣을 거야.”현빈은 미소를 지었다.“저 말고 이모님에게 찍어달라고 해야죠.”“허허, 나 좀 봐, 너도 들어와야 한단 걸 깜빡했네...”현빈은 가정부를 불었다.정은은 얌전하게 봉수진의 곁에 서서 웃으며 그녀의 팔을 껴안았고, 옆에는 현빈이 서 있었으며, 가장 왼쪽에는 이춘재였다.“준비되셨나요?” 가정부가 물었다.봉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찰칵.셔터를 누르면서 이 순간이 고정되었다.두 노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정은은 방긋 웃고 있었으며, 현빈도 담담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가정부는 잘 못 찍었을까 봐 몇 장 더 찍었다.두 노인은 사진을 보고 나서 아주 만족스러웠다.가정부는 핸드폰을 현빈한테 돌려줬다.봉수진은 사진을 꼭 프린트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안심하세요. 저도 다 기억하고 있어요.”봉수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현빈은 사진을 보며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이모님의 월급을 좀 올려도 될 것 같은데.’그리고 핸드폰으로 탁자 위의 음식을 몇 장 찍어서야 앉아서 밥을 먹었다....식사를 마친 후, 정은은 봉수진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다.이춘재는 수십 년 된 이웃과 산책을 하러 나갔다.멀리서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래, 찾았어! L시에서, 이미 결혼을 했더군...”“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아, 소설을 쓰는 작가야. 미스터리 소설... 참, 꼭 을 읽어봐. 내 딸이 쓴 거야... 들어봤다고? 그럼 잘 됐네! 꼭 봐야 돼!”“오늘 온 그 아이는 내 손녀인데 서비대학교의 대학원생이야. 학술 때문에 바빠서 아직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았어...”“하하... 그래, 하늘이
현빈은 정은에게 문을 열라고 표시했다.정은은 손을 들어 손잡이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그는 줄곧 현빈의 품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은 여전히 정은의 상상을 초월했다.청아한 디퓨저 냄새가 전해져 왔는데, 정은이 좋아하는 박하향으로 신선하고 쾌적했다.방 배치는 전체적으로 연한 색깔이었다.벽은 베이지색이었고, 나무로 된 바닥에는 부드러운 긴 털 카펫이 깔려 있었다.밟으면 편하고 가뿐했다.아마도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벽쪽에 특별히 책장을 몇 개 더 추가했다. 책장 앞의 창문 옆에 의자 하나까지 있었다.부드러운 햇빛이 큰 창문을 비추며 책장에 떨어졌고, 생각만 해도 편안했다.뿐만 아니라 방에는 작은 탁자, 정교하고 나른한 작은 소파, 심지어 작은 다탁까지 있었다.커튼을 열면 바깥은 독립된 베란다였다. 멀리 바라보면 하늘, 산, 숲, 풀밭이 있어 마음이 탁 트이고 기분이 상쾌했다.“마음에 들어?”정은은 현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엄청 마음에 들어요.”말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지금의 모든 것이 너무 환상적이네요. 마치...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이야기처럼, 신데렐라는 공주가 되어 그녀만의 성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정은은 말투가 가벼웠고, 표정이 평온했다.그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지만, 결코 빠져들지 않았다.현빈은 고개를 돌려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는 신데렐라가 아니야.”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가 계속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신데렐라는 영원히 연약하잖아. 왕자가 자신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고. 넌 아니야. 넌 자신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고, 주동적으로 어려움을 파헤치며 자신을 구할 거야.”현빈은 미소를 지었다.“너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겨울 왕국의 여왕 엘사야. 용감하고 지혜롭지.”정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오빠가 날 이렇게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는데요? 눈에 콩깍지라도 씐 거예요?”남자는 웃음을
“좋아요. 방금 들어왔을 때 힐끗 보았을 뿐, 아직 자세히 보지 못했거든요.”봉수진은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불편했기에, 정은은 원래 그녀를 모시고 정원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잘됐다 생각하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하늘은 흐렸고, 햇빛은 구름 뒤에 숨어 있다가 가끔 가느다란 빛을 비추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겨울의 J시에서 푸른 식물을 보기 어렵고, 대개 앙상한 가지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원의 화원은 예외였다.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다양한 꽃과 식물들이 계절과 상관없이 만발했고, 겨울에 가장 선명한 색채를 이루고 있었다. 봉수진은 특별한 취미가 없어 그저 꽃과 식물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원래 이런 일에도 흥미가 없었지만, 이춘재가 봉수진이 점차 침울해진 모습을 보고는 주의를 좀 돌리라고 권한 것이었다. 처음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봉수진은 장갑을 끼고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작은 화원의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정은도 꽃가지를 다듬고 새 흙으로 덮어주는 것을 도왔다. 봉수진은 힐끗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능숙한 손놀림에 감탄했다. 식물의 습성을 잘 알고 있어, 어떤 식물은 물을 많이 주고, 어떤 식물은 적게 주어야 하는지, 어떤 식물은 아예 물을 주면 안 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딱 봐도 평소에 화초를 다듬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우리 정은이는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화초 가꾸는 솜씨도 대단하구나.” 봉수진은 웃으며 말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화초를 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할머니께서 너무 잘 가꾸셔서 저는 그저 거들었을 뿐이에요.”정은은 발밑에 자란 말리꽃을 바라보았다. 작은 떨기로 자라난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더 무성하게 자랄 것이었다.봉수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넌 듣기 좋은 말로 나를 달래는구나.”“아니에요, 진짜예요. 이 장미도 정말 예쁘잖아요. 그런데 모양이 조금 이상한데, 마치 배추 같아요.”
“골치 아픈 아이라고요? 왜요?” 이미숙을 이렇게 평가하는 것을 처음 들은 정은은 호기심이 자자했다.“네 엄마는 지금 얌전하고 책 보기 좋아하지만, 어렸을 때 나무에 올라가 새를 잡거나 강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어.”정은은 깜짝 놀랐다.“정말이에요?”“이곳의 복도에 총 68 세트의 가드레일이 있어. 원래는 없었는데, 나중에야 추가한 거야.”“저희 엄마 때문에요?”이춘재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네 엄마가 연못에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정은은 말을 잇지 못했다“어때? 상상 안 가지?”정은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상상할 수가 없네요.”“하하... 이따가 네 엄마 어렸을 때 사진 보여줄게. 다 증거로 남아 있어.”“지금 갈까요?”정은은 두 눈에 빛이 났다.이춘재는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심지어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전화를 받고 돌아온 현빈은 거실에 사람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1층을 낱낱이 뒤졌지만 아무런 수확이 없었고, 주방으로 걸어갔다.“할머니, 할아버지와 정은이는요?”“방금까지 거실에 있었는데?”“지금은 거기에 아무도 없어요.”봉수진이 말했다.“그럼 분명히 다른 데에 놀러 갔을 거야. 그냥 내버려둬. 참, 너도 오늘 야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회사로 돌아가.”“저 안 가요. 하나도 안 바쁘단 말이에요.”‘아니, 방금 집사가 그러던데. 회사 전화가 집에까지 걸려왔다고.’현빈이 다시 찾기도 전에 이춘재는 이미 사진첩을 든 채로 정은과 함께 위층에서 내려왔다.마침 봉수진도 요리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왔다.온 가족이 소파에 앉아 사진첩을 뒤적였다.“이건 네 엄마가 금방 태어났을 때야. 3kg넘는 하얗고 뚱뚱한 아기였지... 이것은 세 살 때 네 고모 할머니가 네 엄마에게 사준 생애 첫 하이힐이고... 이건...”두 노인은 딸을 아주 귀여워했는데, 이미숙이 태어날 때부터 실종될 때까지 수많은 사진을 남긴 뒤, 사진첩으로 만들어 기록했다.그
재석은 계속 입을 열었다. “이거... 옥수수 같은데요?”현빈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몇 번 먹어 봐서 딱 보면 알죠.”‘내가 언제 물어봤다고? 그냥 설명해 버리네. 정말 자기 자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재석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은이는 정말 세심하고 자상하죠. 모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니까요.”현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들 조 교수님이 과묵하다고 하던데, 말이 꽤 많으시네요?”“말 많고 적음은 상대에 따라 다르죠. 심 대표님도 평소에는 말수가 적은 편 아닌가요? 그런데 오늘은 꽤 말을 많이 하네요. 오고 가는 말이 있어야 예의 아니겠어요?”현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었다.“자, 이제 가요.” 정은은 남은 샌드위치를 냉장고에 넣고 찻잔까지 깨끗이 씻은 후 나왔다.고개를 들자 마침 재석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선배님, 오늘도 집에 있었어요?”“응.” 정은을 바라보는 재석의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심 대표님과 함께 외출하려고?”“네, 우리...”“얼른 가자.” 현빈은 자연스럽게 정은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골목에 차를 오랫동안 세우면 또 누가 뭐라고 할지도 모르잖아.”“아, 네! 선배님, 그럼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봐요.”재석은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귀에 거슬렸다.그는 속으로 피어오르는 의심을 애써 누르며 대답했다. “그래.”가는 길에 정은이 물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언제 돌아오셨어요?”현빈은 앞을 똑바로 보며 짧게 대답했다. “저번 주 금요일.”“잠깐 마트에 들러서 과일 좀 살게요.”“누구에게 줄 건데?”“당연히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께 드리는 거죠.”“그럴 필요 없어. 남도 아닌 가족인데, 뭘 사? 빈손으로 가도 괜찮아.”“그래도 처음 찾아뵙는 건데 그냥 가면 좀 실례인 것 같아서요.”“그게 두 분께 더 거리감을 줄 수도 있어. 내 말 들어.”“알겠어요.”이씨 가문 본가는 유서 깊은 곳으로 호수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정은은 멍해졌다.남자는 잘 재단된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몸에 꼭 맞는 핏이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하지만...얼굴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살짝 움푹 패여 두 눈은 더욱 깊고 가늠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자아냈다.현빈은 살짝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뜨거운 온기가 잔을 타고 손바닥에 전해졌다.“난 차 가리지 않아. 고마워.”“먼저 좀 앉아 있어요. 안에 가서 물건 좀 챙겨야 해서야. 그리고 바로 출발해요.”“알았어.”현빈은 정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맑은 차를 응시했다.예전에 현빈은 농담으로 정은에게 몇 번이나 위층에서 차 한 잔을 대접해 줄 수 있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예외 없이 거절당했다.그런데 지금은 버젓이 집 안에 들어와 정은이 직접 끓인 차를 받아들고 있다니. 손 닿을 거리에서 건네받은 이 상황은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현빈이 수없이 바라왔던 장면이 현실이 되었지만, 그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이 아니라... 남매처럼 변했기 때문이었다.‘참 아이러니하네.’혀끝에 감도는 씁쓸함을 삼키며 현빈은 시선을 돌렸다.오늘은 영하 3도. 정은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핑크색 패딩에 카키색 캐시미어 니트와 울 스커트를 매치했다. 스커트 길이와 패딩 길이가 비슷해 전체적인 실루엣이 단정하면서도 발랄했다.거기에 롱부츠까지 신으니 젊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한층 더해졌다.작은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어제 충분히 쉰 덕분인지 혈색도 좋아 보였다.“다 됐어요, 오빠. 가요.”정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현빈의 심장을 파고들어갔다.간지럽고 짜릿했다.“오빠?”현빈은 정신이 번쩍 들더니 다소 급하게 소파에서 일어섰다.“응, 가자.”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먼저 현관으로 향했다.몸을 돌리는 순간,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옆에 늘어진 손은 서서히 주먹으로 쥐어졌다.현빈은 감정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정은은 그 뒤를 따르다가 식탁 위에
정은은 전화를 받으며 약간 멍해졌다.저쪽에서는 조용히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나를 ‘오빠’라고 불렀으면서, 이제 와서 만나기 망설여지는 거야? 아니면...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걸 받아들이기 싫은 거야? 그때 했던 말들은 전부 거짓이었어?]“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내려갈게요.” 정은은 단번에 대답했다.현빈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됐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저쪽에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야 현빈은 다시 입을 열었다.[할아버지랑 할머니가 L시에서 돌아오셨어. 네가 최근에 프로젝트를 끝냈으니 시간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너 데리고 본가에 가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셨어.]이춘재와 봉수진은 L시에 머물면서 점점 그곳에 정이 들었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일 딸을 볼 수 있는 데다 소진헌과 같은 자상하고 든든한 사위가 곁에서 돌봐주니 하루하루가 평온하고 만족스러웠다.그러다 이미숙은 출판사의 초청을 받아 G시에서 사인회를 열게 되었고, 이어서 S시로 날아가 독자와의 사인회에 참가해야 했다.물론 소진헌도 함께 가기로 했다. 출판사에서는 이미 이미숙 가족의 숙박, 식사, 항공권까지 전부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야말로 최상의 경험을 보장해 이미숙이 앞으로 더 많은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출판사는 이미숙을 행사에 초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두 어르신은 가고 싶어 하면서도 긴 여행에 노쇠한 몸이 무리일까 걱정했다. 결국 이민이 가장 먼저 반대했다.원래 이미숙은 혼자 G시로 가고 소진헌은 집에 남아 이춘재와 봉수진을 모시기로 했었다.소진헌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두 어르신은 그가 함께 가서 이미숙을 돌봐주길 원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엿보였다.소진헌은 꽤 흐뭇했다. 평생 강단에 서는 것 외에는 자신이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진 적이 없었기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결국 이미숙도 두 어르신의 뜻을 꺾지 못했고, 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