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소경아, 내 얼굴을 봐서라도 제발 서아 한번만 살려줘.”“저는 많이 봐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부소경이 담담하게 물었다.“어르신이 아니었으면 임서아는 6년 전에 죽은 목숨이었겠죠. 그 여자가 6년 전에 누구의 아이를 임신하고 어떻게 아이를 지웠는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내 아이라며 나를 기만한 거, 이 모든 잘못을 어르신께서 막아주셨기에 임서아가 여태 살아 있는 겁니다.”서씨 어르신은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또 있죠. 6년 뒤에 내 아내를 다시 찾았을 때, 임서아는 내 아내에게 어떻게 했죠? 어르신 얼굴을 봐서 여태 봐준 겁니다. 안 그랬으면 백번도 넘게 죽였을 거예요.”담담한 목소리였지만 협상은 없을 거라는 그의 잔혹하고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서씨 어르신은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소경아! 서아가 잘못을 많이 저질렀지만 그 애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그러니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까?”부소경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임서아 일가족이 정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어르신께서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 겁니다.”부소경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신세희가 그의 손을 잡았다.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흔들었다.단호한 표정이었다.부소경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가 계속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신세희는 평생 서씨 어르신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어르신이 그녀에게 한 폭언과 상처는 영원히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싫었다.부소경은 아내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이때, 수화기 너머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경아, 나 신세희랑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안됩니다!”부소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어르신 때문에 아내가 다시 상처 입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이때 신세희가 자진해서 나섰다.“소경 씨, 전화 바꿔줘요. 도대체 무슨 얘기
신세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그녀는 억지로 분노를 참으며 또박또박 물었다.“내가 남자를 꼬시고 다녔다는 증거 있어요? 두 눈으로 확인했나요?”“부소경도 네가 유혹했잖아? 조의찬도 그렇고. 서시언도 있었지? 가성섬에는 반호영이 있겠구나. 서아랑 썸을 타던 사람이 네가 가성섬에 도착하고 이틀도 되지 않아 너한테 홀랑 넘어갔다면서? 서아 남자친구 될 사람을 네가 빼앗은 게 아니면 뭐야?”“네! 맞아요! 전부 사실이네요!”신세희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네! 내가 여기저기 남자를 홀리고 다녔어요!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잖아요! 어떻게 어르신 손녀랑 비교하겠어요? 임서아 씨야 말로 서 씨 가문에서 애지중지 키운 공주님 아닙니까? 저는 아무것도 없는 전과자에 불과하고요! 다른 여자의 남자를 빼앗는 거, 전과자랑 꽤 어울리지 않나요? 나랑 지금 이런 얘기하는 게 시간낭비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말을 마친 신세희는 바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잠깐!”서씨 어르신이 다급히 외쳤다.“더 하실 말씀 있으시면 빨리 하세요!”“신세희, 넌 소경이랑 평생 함께하고 싶지 않아?”노인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당연한 소리를!”신세희가 욕설을 퍼부었다.“평생 가장 사랑하는 남자가 소경 씨예요. 그러니 우리 가족 떨어뜨려 놓으려 하지 마세요. 그게 누구든 죽여버릴 테니까! 어르신도 포함입니다!”“좋다!”서씨 어르신이 손뼉을 쳤다.“말 한번 잘했다!”어르신이 말을 이었다.“그렇게 소경이를 사랑하면 소경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겠구나. 너도 말했다시피 옥살이를 할 때 유일하게 널 보살펴준 사람이 네 시어머니라면서? 그러니 너희 두 사람도 꽤 사이가 좋았겠구나.”신세희가 짜증스럽게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본론만 얘기하라니까요?”“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가성섬의 비밀이 네 시어머니, 그리고 네 남편과 연관되어 있다는 얘기야. 이 비밀로 서아 일가를 무사히 남성에 돌려보낸다는 조건을 교환하려고 했는데 소경이가 한사코 싫다고
서씨 어르신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지어졌다.반면 부소경은 멍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신세희가 이렇게 쉽게 어르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신세희가 말했다.“하지만 어르신! 만약 이 비밀이 하찮은 것이라면 혹은 어르신께서 거짓말을 하신 게 밝혀진다면 영원히 아끼는 외손녀를 만날 수 없을 겁니다!”서씨 어르신이 한결 편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나는 평생 신용을 지켜왔고 사회에서 위망도 두터워. 나 같은 사람은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주 중요한 비밀이라고 했으니 그건 사실이야. 그리고 이 비밀은 네 시어머니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소경이 엄마가 나한테 비밀로 해달라고 했었어. 급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평생 짊어지고 갔을 거야. 내가 아닌 네 시어머니, 소경이의 엄마를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소경이가 가성섬을 너무 쉽게 장악했으니 비밀을 알려주는 게 더 좋을 것 같구나.”“그래서 그 비밀이 뭐죠?”서씨 어르신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내 외손녀가 무사히 남성에 돌아오면 그때 얘기해 주마! 그리고 이 비밀이 소경이에게 중요한 비밀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더 이상 서아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해!”“하!”신세희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웃음을 멈춘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임서아는 당신 같은 외할아버지가 있어서 참 든든하겠어요. 그건 정말 부럽네요. 어르신, 나중에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으세요?”어르신이 물었다.“무슨 후회?”“오늘의 결정을 말이죠.”신세희가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지?”“별 뜻은 없어요. 그나저나 임서아가 정말 부럽네요. 나도 외할아버지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제 외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저는 엄마도 못 보고 자랐네요. 우리 외할머니가 엄마를 임신했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저는 평생 임서아처럼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겠죠. 그래서 부러워요.”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약속할게요! 그 비밀이 값진 거라면, 내 남편에게 중
“하하하, 하하하...”신유리는 부모님 사이에서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세 사람의 웃음소리에 옆 병실에 있던 조의찬이 깜짝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눈을 뜨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눈처럼 하얀 천장이었고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하얀 벽이었다. 게다가 그가 덮고 있는 이불마저 하얀색이었다.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갑자기 덮쳐왔고 그 순간 조의찬은 호흡이 멈춘 것만 같았다.호흡이 멈췄다고?그는 조용히 옆 병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의 아주 맑고 앳된 목소리였다.“아빠, 엄마, 우리 언제 집에 가요? 저... 유치원 친구들이 보고 싶단 말이에요. 벌써 3일이나 유치원에 못 갔어요, 아빠.”신유리가 부소경의 배를 베고 편안한 얼굴로 묻자 부소경이 온화한 말투로 대답했다.“음... 사실 여기도 유리 집이야. 유리 외증조할아버지랑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 친척들이 다 여기 계시잖아. 그러니까 여기도 유리 집이랑 마찬가지야.”그 말을 들은 순간 조의찬은 머리가 윙 했다.‘유리 할머니라면 내 외숙모잖아? 외숙모는 이미 죽었는데? 게다가 외숙모랑 외숙모의 부모, 그리고 언니까지 다 한 곳에 묻혀있잖아. 설마 나 지금 무덤 속에 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목숨 걸고 살린 조카딸도...’끝없는 아픔이 그의 마음을 덮쳤다.옆 병실의 대화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신유리는 마치 어른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더니 엄청 중요한 결정이라도 내린 듯 진지하게 말했다.“알았어요! 사실 친구들이 엄청 보고 싶은 건 아니에요. 아빠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고. 엄마 아빠랑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유리는 어디 있어도 행복해요. 평생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언젠가는 꼭 만날 거라고 생각해요.”딸의 서글픈 목소리에 부소경이 피식 웃었다. 평소 부소경이 웃는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특히 가성섬에 오고 나서 연속 이틀 어머니에 대한 그 어떤 소식도 찾지 못해 무척이나 초조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딸의 천진난
화들짝 놀란 신유리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신세희와 부소경의 시선이 동시에 옆 병실로 향했다.어제 오후 의사가 조의찬이 오늘 아침에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두 사람은 바로 침대에서 내려 유리의 손을 잡고 옆 병실로 들어갔다. 조의찬이 병실 침대에 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는 것이었다.세 사람이 앞으로 다가와도 조의찬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부소경에게 말했다.“형, 나... 그냥 이렇게 죽었어? 아직 장가도 못 갔단 말이야. 나도 신세희 씨처럼 정 많고 의리 있는 여자랑 결혼하고 싶어. 그리고 난 아이도 없는데... 형네 가족은 영원히 함께하겠지만 난? 엉엉... 아직 다 살지 못했다고. 죽기 싫어!”그러자 부소경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네 형수한테 다른 마음을 품었다간 지금 당장 죽여버린다?”조의찬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형,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아직 안 죽었다고?”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슴 쪽에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으악... 아파, 너무 아파! 내 상처...”‘아프네? 왜 아프지? 그렇다면...’조의찬이 고개를 들고 놀란 토끼 눈으로 부소경과 신세희를 쳐다보았다.“나... 나 아직 살아있어? 여기... 여긴 무덤도 아니고 천당도 아니야. 그럼 여긴...”“병원이에요.”신세희가 이불을 정리하며 말했다.“어제부터 계속 혼수상태였어요. 물론 약물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요. 인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진짜 칼이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더라면 심장을 찌를 뻔했대요. 의찬 씨 정말 운이 좋았어요.”조의찬이 말했다.“정... 정말 신세희 씨예요?”“형수님이라고 불러!”“형수님이라고 불러요!”“형수님이라고 불러요!”세 식구가 이구동성으로 호통치자 조의찬이 바로 호칭을 바꾸었다.“형... 형수님.”신세희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의찬 씨, 이젠 나한테 신세 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유리 목숨을 구해줬잖아요. 만약 의찬 씨 아니었으면 우리 유리...”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신유리를
신유리가 조의찬을 보며 방긋 웃자 조의찬도 웃음으로 답했다.지금 이 순간처럼 마음이 편안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너무나도 편했고 또 너무도 따뜻했다. 돌덩이가 있는 것처럼 무거웠던 마음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그는 막대 사탕을 먹으며 말했다.“유리가 다치지 않고 건강한 걸 보니까 삼촌은 더 바랄 게 없어. 우리 유리 정말 귀여워 죽겠어. 삼촌한테 유리처럼 귀여운 조카가 더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신유리는 발끝을 들고 조의찬의 코끝을 비벼대더니 방긋 웃었다.“유리도 삼촌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유리를 지켜주는 사람이 많아지잖아요.”신유리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아이는 조의찬 삼촌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지만 어제 조의찬 삼촌이 아니었더라면 아빠와 엄마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비록 조의찬에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의 행동이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유리는 조의찬 같은 삼촌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신유리는 그냥 해 본 말이었지만 조의찬과 부소경, 그리고 신세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움찔했다. 사실 아이에게는 삼촌, 큰아버지 등 가족이 매우 많았다. 하지만...부소경은 엄숙한 표정으로 조의찬을 보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지금 좀 어때?”조의찬이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아프긴 한데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 의사 선생님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하셨잖아. 빠르면 요 며칠 퇴원할 수도 있겠어.”그러자 부소경이 말했다.“버틸 수 있으면 가성섬을 떠나 남성으로 가는 건 어때? 남성의 의료 수준이 가성섬보다 훨씬 낫거든.”조의찬이 진지하게 물었다.“형, 가성섬의 일은 어떻게 됐어?”“원래는 이렇게나 빨리 잡아두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속전속결로 해야겠어. 다 해결한 다음에 남성으로 가자.”부소경이 말했다.“고마워, 형.”조의찬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부소경을 보았다. 이번에 칼을 맞고 신유리의 목숨을 구하
부소경은 반호경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덤덤하게 말했다.“네가 길을 안내하는 게 좋겠어. 군주 저택은 나보다 네가 더 익숙할 테니까.”반호경이 그를 안내했다.“안으로 들어갑시다!”그 모습에 신세희는 순간 멍해졌다. 이런 상황에 반호경이 이렇게나 침착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신세희와 신유리 모두 꿈쩍도 하지 않자 반호경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왜? 어제랑 그저께 우리 집에 있을 땐 전혀 겁먹지 않더니 당신 남편이 군주 저택을 물샐틈없이 포위하니까 오히려 내가 두려워졌어?”신세희가 입술을 꽉 깨물고 뭔가 얘기하려는데 신유리가 먼저 가로챘다.“호경 아저씨.”신유리의 부름에 신세희와 부소경 모두 할 말을 잃었고 가장 놀란 건 반호경이었다.그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가 이내 감동 어린 눈빛으로 신유리를 보며 물었다.“유리야, 너... 너 방금 뭐라고 불렀어?”신유리는 반호경을 진지하게 쳐다보며 앙증맞은 목소리로 말했다.“호경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유리한테 잘해주잖아요, 말도 태워주고. 좋은 아저씨니까 앞으로는 나쁜 아저씨라 부르지 않을게요.”반호경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고개를 들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신유리에게 말했다.“우리 착한 유리, 나중에 기회 되면 아저씨가 또 말 태워줄게. 아저씨 눈엔 우리 유리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뻐.”신유리가 까르르 웃으며 물었다.“제가 두 번째로 예쁘면 첫 번째는 누구예요?”“첫 번째는 당연히 유리 엄마지!”반호경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아저씨 눈엔 유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예뻐. 유리 엄마의 미모를 따라올 자가 없어!”이 말은 신세희를 칭찬하는 동시에 신유리의 기분을 어르고 달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소경에게 던진 겁 없는 도전이기도 했다.신세희는 말문이 막혀버렸고 민망함에 고개를 돌려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부소경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반호경의 도전 따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반호경을 아
부소경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관여하지 않을게. 어쨌거나 너의 자유니까. 하지만 내 와이프랑 딸한테 조금이라도 해를 가한다면 목이 잘려 나갈 줄 알아. 반호경, 내가 왜 먼저 너의 집으로 가겠다고 길을 안내하라고 했는지 알아? 그저 단순히 내 와이프와 딸을 보살펴줬기 때문이야.”반호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기분이 말이 아니게 다운되었다.서울의 구씨 집안에 무기와 병력까지 빌려오면서 가성섬 전체가 충분한 준비를 마쳤지만 그 결과 아무런 쓸모가 없었고 오히려 부소경은 힘도 들이지 않고 군주 저택 전체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지금 이 순간 반호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소경은 마치 뒤통수에 눈이 달린 듯 싸늘하게 말했다.“길 안내하라고! 나한테 합당한 이유를 얘기한다면 널 죽이지 않을 수도 있어!”반호경이 말했다.“알았어! 길 안내해주면 되잖아!”반호경이 맨 앞에서 걸어갔고 부소경은 신세희와 신유리의 손을 잡고 마치 공원을 산책하듯 군주 저택 안을 유유히 걸어 다녔다.군주 저택 안을 거닐던 중 만나는 사람마다 부소경과 신세희, 그리고 공주님 신유리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그 모습에 반호경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잠시 후, 그들은 반호경이 지내는 동원에 도착했다. 그들을 거실로 안내한 반호경은 메인 자리에 앉았고 그 옆으로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얼핏 보면 정말로 반호경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가서 반호석 군주를 모셔와.”부소경이 맞은 편에 서 있는 용병에게 말했다.“네, 대표님!”용병은 몸에 총을 지닌 채 달려 나갔다.“용병들이 있어 참 든든하겠어.”반호경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부소경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하기만 했다.“용병들은 나의 자랑이야. 난 열몇 살에 해외에 나갔어. 해외에 있는 동안 다른 건 별다른 성과가 없어도 내가 공들인 용병들은 그야말로 실력이 손꼽힐 정도야. 작은 가성섬은 물론이고 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용맹하고 싸움에 능한 존재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