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경은 구서준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구서준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왜 다시 돌아온 거지? 염라대왕 같으니라고.’이렇게 사람을 놀리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건데. 제 아내 곁을 떠나기가 그렇게 싫은 건가? 구서준은 잔뜩 구겨진 얼굴을 애써 숨기며 억지로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삼촌.” “임서아를 닮았군.”부소경이 담담한 표정으로 끔찍한 말을 했다. “뭐라고? 조금 전 신발을 들고 초라하게 여길 떠났던 임서아 말이야? 어떻게 그런 여자랑 나를 비교할 수가 있어?”구서준은 억울해서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켕기는 게 가득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저기... 삼촌! 난 딱히 작은엄마를 보러 온 게 아니야.”“나도 마찬가지야.”부소경은 절대로 구서준과 서준명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한 행동이 아니었다. 전부 어제 구서준이 그에게 보여주었던 사진과 영상들 때문이었다. 그 안의 신세희는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를 6년이나 찾아다녔고 지금은 같은 침대에서 잠들건만 한 번도 그녀의 이런 달콤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신세희는 그 어여쁜 미소를 별 볼 일 없이 하찮은 두 여자에게 지어 보이고 있었다. 문득 부소경은 그 두 사람이 매우 궁금했다. 자신이 떠난다면 두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세희를 찾아올 터였다. 그러나 구서준과 서준명을 마주치는 건 그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딱히 그들을 오해한 것도 아니었다. 둘은 이 회사의 대표가 아니던가?그러나 아무 생각이 없는 부소경과는 달리 서준명과 구서준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건축회사의 떳떳한 대표라는 이들은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허둥지둥했다. 다행히 그들은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마침 그들의 앞에는 엄선희와 민정아가 있었다. 민정아와 더 가까이 있었던 서준명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구서준이 먼저 선수를 쳤다. 민정아의 손을 덥석 잡은 구서준이 당당하게 말했다.“삼촌은 모르겠지만 사실 난 정아 씨를 꽤 오랫
엄선희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얌전하게 말했다. “그럼요, 서 대표님.” 이윽고 엄선희가 신세희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세희 씨, 부 대표님, 안녕히 계세요.”남자에 눈이 먼 배신자 같으니라고, 신세희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신세희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름 서준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서씨 집안 어르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서준명의 인품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는 함부로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녀 사이의 감정에 대해서는 조의찬이나 구서준보다도 믿음직스러웠다.만약 정말로 엄선희가 서준명과 결혼한다면 그것도 나름 해피엔딩일 것이다. 신세희는 웃음을 머금으며 밖으로 나가는 네 사람을 쳐다보았다. “단짝 친구들?” 부소경이 무심하게 물었다. “단짝 친구라기보다는 일하면서 친해진 사람들이에요. 모두 나를 많이 아껴주고 있어요. 특히 민정아 씨는 나를 아주 잘 챙겨줘요.”한때 민정아가 그녀를 괴롭혔던 일들은 묻어두기로 했다. 굳이 밝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민정아는 속에 꿍꿍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주 덤벙거리고, 솔직하고, 지금은 꽤 불쌍한 사람이었다. 부소경은 별다른 질문 없이 수긍했다. “당신 친구도 많지 않은데, 언제 집에 한번 초대하지.”고개를 번쩍 든 신세희가 부소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기 귀를 의심했으나 부소경의 표정은 더없이 담담했다.신세희는 말을 더듬으며 다시 확인했다.“고작 그것 때문에요?” 부소경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점심에 회의가 있어서 이젠 가봐야 해.”“......” 블라인드 너머로 부소경의 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신세희는 그제야 두 사람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정직한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 중 자음의 순서대로 먼저 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정아씨, 이만 돌아와, 그이는...” 그녀는 아직 누군가에게 자기 남편을 소개하기가 민망했다. 잠깐 뜸을 들인
민정아에게도 콧대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니면서 잘난 척하는 꼴이 우스우면서도 증오스럽더랬지. 월급으로 연명하는 평범한 회사원들은 감히 그녀에게 대항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그녀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서준처럼 돈이 많은 부잣집 도련님은 민정아 같은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집안의 메이드보다도 못한 여자였기에 구서준이나 서준명은 그녀를 매우 싫어하고 업신여기고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자신을 낮추다 못해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고요하지만 고집스러운 저항을 눈여겨보던 구서준은 문득 모두에게 배척받던 시절의 신세희를 떠올리게 되었다. 신세희는 늘 당당하고 무덤덤했지만 지금의 민정아는 달랐다. 그녀는 마치 놀란 햄스터처럼 불안해했다. ‘이건 너무 괴롭히고 싶잖아?’ 민정아는 구서준의 흥미를 돋게 했다.회사 여직원들과는 얽히고 싶지 않았던 그였지만 불현듯 그녀의 살짝 거친 입술을 맛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서울에서 제 잘난 멋에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미녀들은 수도 없이 봐왔다. 그래서 이렇게 자존감도 낮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햄스터 같은 모습에 마음이 동한 것이다. 민정아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그런 감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건 그저 일시적인 호기심뿐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반대편으로 홱 돌린 민정아는 잔뜩 긴장하며 얼굴을 붉혔다.“안 돼요, 구 대표님. 더 이상 대표님께 그런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 제게 이러지 마세요. 전 지금 부모님께 쫓겨나서 마땅히 머물 곳조차도 없어요. 대표님이 저를 책임지지 않으실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덜컥 임신이라도 해버린다면 제 처지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죄송합니다. 저는...” 민정아는 자기가 진정으로 궁금했던 질문을 꾹꾹 눌러 삼켰다.‘만약 그렇다면, 저와 결혼할 생각은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저는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하지만 그녀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사
그건 마치 언니가 동생을 귀여워하는 모습 같았다. 민정아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그녀가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민정연은 그녀를 살살 구슬려 마치 자기가 부잣집 아가씨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건 모두 그녀를 자만에 빠지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민정아는 그저 필요할 때 이용하고 버려버리는 패에 불과했던 것이다.역시나 그녀는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회사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다. 거만한 그녀의 태도에 질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기피하고 혐오했다.반면, 엄선희는 착하고 대인관계도 좋았다. 동료들도 그녀를 좋아했고 상사도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니 서준명이 내미는 기회도 바로 잡을 수 있지 않았는가? 엄선희도 나중에는 신세희처럼 부잣집 사모님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민정아의 자존감이 또 한 번 하락하는 순간이었다.제 잘난 멋에 살던 여자가 기가 죽어 몸을 잔뜩 웅크리는 데는 3주라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다행히 민정아는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민정아가 어색해하는 걸 눈치챈 신세희가 말을 걸어왔다.“뭐 어때? 데이트하러 간 사람은 빼고, 우리끼리 구내식당에서 밥이나 먹지 뭐.”민정아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으응, 사... 사모님.”“신세희라고 불러줘.” “응, 세희 씨.”민정아가 웃으며 말했다. 신세희는 민정아도 자기처럼 사랑받으면 한없이 밝아지는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다. 두 사람은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며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진작부터 신세희에게 아부하며 잘 보이려고 애를 썼던 리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바로 그들을 따라갔다.엘리베이터에 오른 리나는 굳이 신세희를 찾아와 커피를 건넸던 계미림을 마주치게 되었다. 잠깐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신세희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진 두 사람이었기에 대화는 또 쉽게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사모님이 민정아 씨를 용서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우리도 몇 번 아부하고, 눈앞에 자주 나타난다면 성공할
그녀의 행동에 민망해진 두 사람은 어쩔 줄 몰랐다. 조용히 밥을 먹던 동료들이 두 사람에게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나 당사자인 신세희는 퍽 담담했다.계미림의 향수 냄새가 이렇게 지독했다는 걸 미처 몰랐었다. 코가 민감한 신세희는 자극적인 냄새를 잘 맡지 못했다. “사모님, 저희에게는 반성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생각이신가요?” 계미림이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는 저희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요. 제가 커피까지 챙겨서 사모님을 찾아갔었는데,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신세희는 더욱 몸을 물렸다. 이에 계미림은 기가 잔뜩 죽었다.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신발 밑창으로 사모님의 뺨을 때리려고 했던 민정아 씨도 용서하고 친하게 지내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왜 저는 안 되는데요? 옛말에 웃는 얼굴에는 침을 뱉지 않는다고...”“잠시 실례할게요.” 신세희가 그녀의 간절한 호소를 싹둑 잘라내며 민정아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지독한 향수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있다. 그녀의 행동에 계미림은 눈시울까지 붉혔지만 차마 신세희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그 대단하신 임서아조차도 신세희 앞에선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던가. 그러니 계미림도 몸을 한껏 낮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붉어진 눈시울을 보고도 신세희는 매우 담담했다. “계미림씨, 나한테 이러지 마세요. 민정아 씨는 내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이내 잘못을 깨닫고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어요. 그것도 내 정체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요. 하지만 당신은 다르잖아요. 만약 내가 부소경 씨 아내가 아니라면 당신이 굳이 커피까지 들고 날 찾아와서 내게 잘 보이려고 애썼을까요?” 계미림과 리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세희가 고요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사람 부인이든 아니든, 난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을 괴롭히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난 그저 평범한 디자이너일 뿐이고 조용히 이곳에서 일만 하고 싶어요.
“나도 열심히 일하고, 좋은 사람이 될 거야. 아무에게도 부끄럽지 않도록.”민정아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다. 사실 그녀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특히 민정연에게 모진 소리를 들을 때면 더욱 그러했다. 민정아는 이런 모습을 당당함과 거만함으로 보기 좋게 포장했었다. 그러나 자기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친 그녀에게 남은 건 볼품 없는 열등감뿐이었다. 신세희는 그런 민정아를 위로했다. “괜찮아. 앞으로 다 잘될 거야.”민정아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그날 오후부터 한동안 평화로운 회사 생활이 이어졌다. 임서아는 더는 회사로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도 굳이 임서아의 소식을 알아보지 않았다. 회사에서 개망신을 당한 임서아가 절대 가만히 있진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딱히 두렵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대항할 방법은 많고도 많았다. 신세희는 임서아가 굳이 그녀를 찾지 않더라도 절대 임씨 집안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가장 급한 건 고향에 다녀오는 일이었다. 며칠 사이 대놓고 신세희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었고 리나나 계미림처럼 아부를 하는 사람도 없었으니 회사 분위기는 아주 좋아졌다. 부소경은 일주일 연속 퇴근하는 신세희의 회사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과거 차 안에서 기다렸을 때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지금은 대놓고 밖에서 기다리니 자연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일찍 퇴근하는 길에, 차에 기댄 채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 부소경을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다가가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부 대표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사모님을 데리러 오신 건가요?” “대표님...” 하여 신세희의 두 친구는 그녀를 놀려 대기 바빴다. “모범 남편 등장. 저 듬직한 모습 좀 봐, 약속 시간은 아주 칼같이 지키죠?” “남성의 거물, 알고 보니 세상 참한 남편으로 밝혀져... 이러면 남의 집 남편들은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나요?” 두 사람은 퍽 죽이 잘 맞았다. 부소경과 거리가
“무서워?” 부소경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 그걸 말이라고! 날씨처럼 변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겁먹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사람 마음을 녹여버릴 듯이 따뜻했다가도 이내 차갑게 돌아서는 사람이 아니던가.문득 억울해진 그녀가 애써 공포심을 억누르며 부소경에게 도리를 따졌다. “시도 때도 없이 변하는 당신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F그룹 대표의 아내라는 걸 공식 계정에 먼저 밝힌 건 당신이잖아요. 그런데도 난 당신 아내로서 아무 권리도 누리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요?” “요 며칠 근무 환경이 좋아지니까 말재주도 늘었군.” 부소경은 신세희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신세희는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지 몰랐다. 차는 여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기에 신세희는 조바심이 났다. 그가 자신을 이상한 데로 끌고가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유리는 어찌한단 말인가? 설마 아이의 얼굴도 못 보고 이렇게 끌려가는 건가?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군다고? 신세희는 부소경의 팔을 잡으며 사정했다.“그럼 마지막으로 유리 얼굴 한 번만 보고 가면 안 돼요?” “......” 그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마에 핏줄이 선명하게 돋아 있었다. 딱 봐도 분노가 어마어마하게 쌓인 상태였다. 우연히 앞쪽을 바라보던 부소경은 엄선우가 죽을힘을 다해 웃음을 참는 걸 발견했다.“엄선우.” 부소경이 여상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엄선우는 그제야 고분고분해졌다. “대표님, 저를 죽이는 건 상관없지만 일단은 두 분을 목적지까지 모셔도 될까요?”“......” 신세희는 자신이 벽에 대고 말하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게 그녀는 목적지를 향하는 내내 평온한 부소경을 마주하며 불안에 떨어야 했다.그녀는 당장이라도 못 배워 먹은 사람처럼 부소경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한가득 퍼붓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는 욕이 별로 없었다. 여태까지 누군가에게 심한 욕을 한 적이 없었던 신세희는 이왕
부부의 모습을 지켜보던 직원이 황홀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두 분은 하늘이 점지해 주신 인연이 분명해.”신세희의 얼굴은 금세 사과처럼 붉어졌다.부소경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은 채 고즈넉한 정원을 지나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간판을 본 신세희는 그제야 이곳이 고급 드레스샵, ‘샤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샤란은 남성에서 알아주는 유명한 명품 드레스샵이었다. 금방 대학에 입학했을 때, 신세희는 여전히 임씨네 집에 얹혀살았더랬다. 그때 그들의 귀한 딸인 임서아의 성인식을 준비하면서 그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 딸 성인식에 샤란 드레스를 입혔을 텐데. 우리 집안 자산과 직위로는 어림도 없더라고. 한 벌이라도 그쪽에 제작을 맡길 수 있었더라면 명문가에 시집가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거야.”그제야 신세희는 샤란 브랜드를 걸치는 게 남성 귀부인의 상징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그의 손을 잡은 채 정원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하나같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든 드레스에는 각자의 스토리가 담겨 있었고, 드레스는 모두 전문 디자이너가 손수 바느질한 것들이었다. 신세희는 그 화려한 모습에 그만 아연해졌다. 부소경이 그녀를 이끌었지만 신세희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래.” 덤덤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부소경 앞에서 신세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날 이곳에 데려오려고 유리 유치원에 가지 않은 거였어요?” “그럼, 뭐겠어?”부소경이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신세희가 다시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아이를 데려올 수도 있었잖아요.”“당신은 성인이니 한 끼를 안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만, 유리는 달라. 제때 밥을 먹여야 할 거 아냐.”“......”잠시 뒤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먼저 밥부터 먹고 오면 되죠.” “그럼 사이즈가 안 맞잖아.”부소경의 말에 신세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샤란은 1센티의 오차도 용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