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이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이 옷 덮고 자.”바닷가에서 바닷바람을 맞을 필요가 없어 하예정은 거절하지 않고 그의 외투를 덮었다.전태윤은 혹시라도 그녀가 자는데 방해될까 봐 음악까지 꺼버렸다.그는 묵묵히 운전에 몰두했고 그녀는 단잠에 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이 발렌시아 아파트에 도착했다.경호원들이 아직도 아파트 밑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도련님이 밤새 그들의 시선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숙희 아주머니가 사모님의 반려동물과 함께 돌아온 걸 보고 경호원들은 도련님이 사모님과 함께 드라이브 갔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마음이 급했지만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할까 봐 누구 하나 감히 도련님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전태윤이 운전하여 돌아온 걸 본 경호원들은 혹시라도 사모님에게 들킬까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특히 강일구가 가장 빨리 도망쳤는데 잔디밭에 숨어들 기세였다. 사모님이 그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절대 들켜선 안 되었다.전태윤은 경호원들의 반응을 못 본 척했다. 하예정이 생각이 없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맨날 집 밑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들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것이다.그는 차를 주차한 후 안전벨트를 풀며 하예정을 불렀다.“예정아, 집 다 왔어.”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그가 불러도 듣지 못하고 곤히 자고 있었다. 아무래도 맥주 두 병을 마신 탓인 것 같다.전태윤이 그녀를 살짝 흔들었는데도 몸을 움직이기만 할 뿐 깰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맥주 두 병에 이렇게 곯아떨어진다고? 앞으로는 술 자주 못 마시게 해야겠어.”전태윤은 조수석 쪽으로 걸어가 차 문을 열고 그녀의 안전벨트를 푼 후 품에 끌어안았다.뿔뿔이 흩어졌지만 멀리 가지 않은 경호원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비볐다.자신이 목격한 게 사실이라는 걸 안 경호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피했다.‘그냥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도련님이랑 사모님 사이가 엄청 좋네.’전태윤은 하예정을 안고 집으로 올라갔다. 현관
전태윤은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는 하예정의 방 안에서 마치 도둑처럼 살금살금 걸어 다니며 이리저리 뒤졌다. 그런데 그녀가 숨길 수 있는 곳은 전부 다 찾아봤지만 계약서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대체 어디에 숨긴 거야?’전태윤은 화장대 앞에 서서 화장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조금 전 어느 구석을 뒤지지 않았는지 돌이켜 보았다. 모든 서랍을 다 뒤진 후 그의 시선이 상 위에 머물렀다. 상 위에는 금비녀를 그린 종이 한 장이 놓여있었다. 전태윤이 그 종이를 들었다.‘그림 엄청 잘 그리네? 그나저나 금비녀는 왜 그렸지?’전태윤은 하예정이 왜 금비녀를 그렸는지 그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종이를 뒤집은 순간 종이에 적힌 내용은 다름 아닌 그가 찾던 계약서였다.그녀가 계약서 뒷면에 그림을 그렸을 줄이야. 이러니 곳곳을 다 뒤져도 찾질 못했지.그는 자리에 앉아 곤히 잠든 하예정을 한참 동안 보다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지어졌다.“하예정, 넌 평생 나 전태윤의 아내로 살아야 해!”만약 할머니가 이 자리에 계셨다면 그는 분명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아내를 쫓아다니지 않겠다던 사람이 지금 몰래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말이다.전태윤은 하예정의 계약서를 훔친 후 기쁜 마음으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화장실에 숨어서 라이터로 계약서 두 부를 몽땅 태워버렸다. 재가 되어버린 계약서는 변기 물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하예정이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평생 그 계약서를 찾지 못할 것이다....하예진이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자정이 훌쩍 넘었다.‘아직 샤워도 못 했는데.’원래는 아들을 재운 후 샤워하려고 했었는데 아들을 재우다가 그만 함께 잠이 들고 말았다. 아들과 한잠 자고 나서야 아직 씻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현관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안으로 잠그지 않은 걸 보니 주형인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이리 늦었는데도 안 와? 일부러 피하는 거야?”하예진
하예진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서현주가 전화를 받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바로 통화 화면에서 녹음 버튼을 눌렀다.제부의 친구가 그녀를 도와 주형인의 외도 증거를 모아주면서 그녀에게 그 증거들은 주형인이 정신적으로 외도했다는 증거일 뿐이지, 실질적인 관계가 있었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고 했다.지금 이 순간 쓰레기 같은 남녀가 함께 있다고 짐작하여 하예진은 일단 녹음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당신은 누구죠?”그녀가 침묵하는 사이 서현주는 더없이 우쭐거렸다. 하예진은 대본대로 이어나갔다.주형인이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온갖 난리를 피운다면 주형인이 귀찮아서 아들의 양육권도 버리고 그녀와 이혼할 것이다. 그런데 울지도 않고 난리도 피우지 않는다면 주형인은 그녀가 이혼하길 바란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더 질질 끌 것이다.“저는 형인 씨의 비서 서현주라고 합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서현주가 뻔히 알면서도 물었다.“내가 누구냐고? 형인 씨 와이프다! 형인 씨 어디 갔어? 당신들 지금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당장 형인 씨한테 전화 바꿔!”하예진이 포효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녀의 분노에 서현주는 자신이 승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현주는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하여 말했다.“얘기했잖아요. 형인 씨 지금 샤워 중이라 빨리 못 나와요. 오늘 저녁에 술자리가 있다고 형인 씨가 얘기 안 했나요? 전 비서인데 당연히 함께해야죠. 우리 다 술을 마신 바람에 운전할 수 없어서 호텔 방 하나 잡았거든요. 이따가 술이 깨면 다시 가려고 했는데 사모님이 이 늦은 밤에 전화할 줄은 정말 몰랐어요.”서현주의 말이 참 아니꼽게 들렸다.“대리운전이 그렇게나 많은데 아무 대리운전이나 불러서 오면 되잖아. 굳이 호텔에 있어야 해? 두 사람 나 몰래 무슨 짓 했어? 말해! 당장 말하라고! 남편이 밤늦게 안 들어왔는데 전화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전화하면 네가 어쩔 건데? 그건 형인 씨 와이프인 나의 자유야. 너 같은 외부인이랑 무슨 상관인데?”
서현주는 하예진이 아들을 챙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시간에 아들 혼자 집에 두고 불륜 현장을 잡으러 호텔에 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예정이한테 전화할까?’하예진이 망설였다.‘이 시간에 자는 사람 깨워도 괜찮나?’잠깐 머뭇거리던 하예진은 주형인이 외도했다는 증거를 잡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결국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맥주 두 병 마시고 깊이 잠든 하예정은 전태윤이 방까지 안고 올라왔다는 것도 몰랐다. 하예진이 걸어온 전화벨 소리를 듣고 나서야 겨우 잠에서 깼다. 휴대전화를 꺼낸 그녀는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누구세요?”“예정아, 나 언니야.”“언니, 무슨 일이야?”겨우 정신을 차린 하예정은 그제야 언니가 형부에게 이혼 얘기를 꺼낸다는 일을 떠올렸다. 부부가 또 싸운 줄로 오해한 그녀는 잠도 채 깨지 못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언니, 왜 그래? 혹시 주형인이 또 언니 때렸어?”“그 사람 아직 집에 안 들어왔어. 저녁에 술 약속 있어서 늦게 들어온다고 했거든. 그런데 새벽 한 시가 거의 되는데도 안 와서 전화하니까 글쎄 서현주가 받는 거야. 두 사람 지금 같이 있어.”“언니 잡으러 가려고?”역시 친자매라 그런지 하예정은 언니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챘다.“도둑을 잡으려면 훔친 물건을 잡으라고 했어. 불륜 현장을 제대로 잡아야 나도 떳떳하지.”“그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알아. 서현주가 어찌나 시건방을 떠는지 호텔 주소까지 보내더라고. 예정아, 나 혼자 가면 돼. 너 우리 집 와서 우빈이 좀 봐줄 수 있어? 내가 나간 다음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울까 봐 그래.”“언니, 나랑 같이 가자.”“괜찮아.”“언니, 거긴 두 사람이고 언니 혼자 가서 난리 치면 당할 게 뻔해. 호텔 주소 나한테도 보내, 같이 가자. 내가 언니보다 드세서 충분히 그 두 사람 이길 수 있어.”그러자 하예진이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예정아, 언니를 믿어. 언니 할 수 있어. 일단 끊을게. 난 나갈
하예정은 얘기하면서 열쇠 꾸러미에서 열쇠 하나를 뺀 후 전태윤에게 건넸다.“이건 언니 집 키예요.”전태윤의 두 눈이 반짝였다. 주형인이 술자리에 참석한다는 걸 전태윤은 알고 있었다. 그는 소정남에게 주형인이 외도한 증거를 모으라고 했다. 증거를 찾은 소정남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람까지 붙여서 몰래 주형인의 뒤를 밟고 있었다.하여 주형인이 회사만 나서면 소정남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저녁에 전태윤과 하예정이 같이 있을 때 소정남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주형인과 서현주가 실질적인 관계를 갖도록 부추긴 후 주형인이 가정을 배신했다는 증거를 잡을 계획이었다.그러면 하예진이 이혼 얘기를 꺼냈을 때 도덕적으로도 우세를 차지하게 된다.지금 주형인과 서현주가 같이 있다면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발전한 걸까? 아니면 전태윤이 부추긴 결과일까?전태윤도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 똑같았다.“어느 호텔에 있는지 알아?”“언니가 안 알려줘요. 오지 말래요.”하예정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언니는 오히려 동생을 밀어내고 스스로 해결하려 했다.“내 친구한테 전화해서 알아보라고 할게.”“이 늦은 시간에...”“괜찮아. 다음날에 내가 밥 한 끼 사주면 돼.”소정남에게 휴가 하루를 더 주면 그만이다.“예정아, 아직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네 차 키도 줘. 내가 아주머니 깨워서 우빈이 챙기러 처형 집에 가라고 할게. 넌 나랑 같이 처형 찾으러 가자.”전태윤의 당부에 하예정은 차 키를 그에게 건넸다. 차 키를 건네받은 전태윤은 숙희 아주머니의 방문을 노크하며 소정남에게 전화를 걸었다.저녁형 인간인 소정남은 늦게 자고 아침 늦게 깨났다. 재미있는 볼거리가 있을 때만 일찍 회사에 나오지, 안 그러면 전태윤보다도 늦게 출근했다.전태윤이 전화했을 때 소정남은 여전히 정신이 활기에 차 있었다.“주형인 지금 어디 있어?”전태윤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성씨 그룹 계열사인 호가 호텔에 있
전태윤은 문을 잠근 후 하예정을 잡고 걸어가며 말했다.“내 친구가 알아봤는데 네 형부 지금 호가 호텔에 있대. 거긴 성씨 그룹 산하의 호텔이야. 내가 전씨 그룹에 출근해서 아는데 두 그룹이 라이벌 관계야. 혹시라도 성씨 그룹에서 내 얼굴을 알아볼까 봐 검게 칠했어. 이러면 못 알아볼 거야.”하예정은 그가 그린 모반을 힐끔거렸다. 이 급한 와중에 그 생각까지 하다니, 참으로 세심한 사람이었다. 전씨 그룹에 출근하는 사람은 역시 달랐다.하예정은 이젠 할머니의 말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할머니가 그녀 앞에서 전태윤의 칭찬을 늘어놓을 때 전태윤이 아주 세심한 남자라고 했었다. 물론 그가 다정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세심한 모습을 보여준다.“그럼 갔다 와서 비누로 씻어요.”문구 서점을 운영하는 하예정은 피부에 묻은 펜을 지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전태윤은 갔다 와서 하예정더러 깨끗하게 씻어달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다시 삼켜버렸다.이런 상황에 할머니와 소정남이 옆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그 입은 장식으로 달아놓은 거야? 제 앞의 말도 못 해?”“전 대표, 용기 있게 얘기해!”하예정 부부와 숙희 아주머니는 각자 할 일을 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서현주는 하예진과 통화를 마친 후 욕실 문을 두드렸다.주형인이 문을 열자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한참이 지나서야 욕실에서 나왔다. 주형인이 서현주를 안고 나왔는데 그녀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이 욕실에서 무엇을 했는지 다 알 것이다.침대에 누운 서현주는 주형인의 품에 안긴 채 갑자기 말했다.“형인 씨, 까먹을 뻔했네요. 아까 형인 씨 와이프가 전화 와서 내가 받았는데 당장 집으로 오래요. 설마 우리 관계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그녀의 말에 주형인이 그녀를 밀어내며 벌떡 일어나 앉더니 두 눈을 부릅뜨고 조급하게 말했다.“그걸 왜 인제야 얘기해?”그의 태도에 기분이 언짢아진 서현주가 속상한 척했다.“아까 얘기하려고 욕실 문 두드
서현주가 주형인의 가슴팍에 기댄 채 간사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인 씨, 미안해요. 그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급한 일일까 봐 받은 거예요.”“괜찮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잖아, 우리 사이 언젠가는 그 사람한테 얘기하려고 했어.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이참에 집에 가서 다 밝힐 거야.”주형인은 서현주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서현주에게 빼앗겼고 하예진에게는 그 어떤 정도 남질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모님과 아들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참았던 것이었다. 안 그러면 하예진을 진작 내쫓고도 남았다.“형인 씨, 두 사람 이혼하면 와이프가 형인 씨 재산을 나눠 가져요?”서현주는 하예진이 주형인의 재산 절반을 가져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하예진을 일전 한 푼 없이 빈털터리로 내쫓고 싶었다.하예진이 직장을 떠난 지 오래된 데다가 아이도 고작 두 살 남짓이라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기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예진의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된다. 어쩌면 하예진이 아이를 업고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주형인이 싸늘하게 웃었다.“걔가 갖고 싶다면 내가 줘야 해?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걔가 이 집안에 일전 한 푼이라도 보태줬어? 집도 결혼 전에 내가 대출해서 샀고 결혼 후에도 나 혼자 대출금을 갚았어. 이 집 절대 못 나눠줘. 아, 이 집 인테리어 비용 조금 냈네. 아무튼 난 인테리어 비용 돌려줄 돈이 없으니까 타일이라도 뜯어가라지, 뭐. 그리고 적금은...”그가 사장 자리에 앉은 것도 2년밖에 되질 않았다. 수입이 예전보다 몇 배는 늘었지만 지출도 그만큼 많은 데다가 서현주에게 비싼 선물까지 자주 해주다 보니 얼마 모으지 못했다. 적금이라 해봤자 고작 4천만 원도 되나마나 했다.그런데 부수입이 훨씬 더 많았다. 회사에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늘 현금으로 받은 후 아버지의 주민등록증으로 은행에 가서 카드 한 장을 만들어 그 카드에 돈을 넣었다. 카드
주형인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이자 서현주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다행히 그래도 잔머리는 있네.’그와 결혼하면 무조건 행복을 누리면서 살 거라는 생각에 서현주는 마음이 놓였다. 물론 완전히 경계심을 늦춘 건 아니었다. 나중에 결혼한 후 월급은 그녀가 관리하고 집문서에도 그녀 이름을 넣겠다고 약속했으니 반드시 그대로 이행하게 할 것이다. 아무튼 하예진보다 훨씬 누리면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예진한테 일전 한 푼 안 주고 빈털터리로 내보내려면 사실 엄청 쉬워.”“어떻게요?”주형인의 명의로 된 적금이 얼마 되진 않지만 나눠주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면 무조건 시도해볼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서현주가 그 돈으로 더 누릴 수 있으니까.“재산을 가질 건지, 우빈이 양육권을 가질 건지 둘 중에서 택하라고 하면 돼. 그러면 무조건 우빈이를 선택하고 재산 분할은 포기할 거야.”그의 말에 서현주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형인 씨 아들의 양육권을 포기할 수 있어요? 우빈이는 주씨 가문의 유일한 손자잖아요. 형인 씨가 포기한다고 해도 형인 씨 부모님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주형인이 말했다.“우빈이는 내 아들이야. 절대 포기 못 해.”서현주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해요!”주형인이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했다.“만약... 네가 아들을 가진다면 우리 부모님도 우빈이를 예진한테 보내라고 하실 거야.”두 사람은 인제야 관계를 했고 게다가 서현주는 이따가 피임약을 사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 말인즉슨 아직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현재 그에게는 아들 주우빈 뿐이었고 남존여비 사상이 남아있었다. 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주우빈의 양육권을 하예진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주우빈은 영특하고 귀여운 아이인데 그와 서현주의 아이는 어떨지 누가 알겠는가? 주형인은 아직 그 도박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서현주가 나중에 딸을 낳을 수도 있기에 주우빈의 양육권은 반드시 그가 가져야 했다.“내가 딸 낳으면 미워할 거예요?
“엄마, 저는 밖에서 낳은 딸이 없어요. 만약 밖에서 낳은 딸이 있다면 그 딸을 이씨 가문에서 인정하나요?”“네가 낳은 친자식이라면 당연히 인정하지. 네가 임신하고 아기를 낳을 때 가족 모두가 동행한다면, 그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의 사람들도 인정할 거야.”이윤미가 대답했다.“그러면 제가 왜 시집을 가야죠? 시집가지 않으면 그 쓰레기들이 재산을 가져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이은화는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딸의 이상한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었다.정군호의 배신 때문인지, 기분이 나쁜 탓인지 모른다.이윤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완벽한 대책을 세워도 빈틈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좋은 방법은 제 딸이 아빠를 두지 않으면 좋잖아요. 제가 결혼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으면 합법적인 부부로 되지 못하니 당연히 부부의 공동 재산이 될 리가 없을 테고 그 남자도 재산을 분할 받고 싶어도 못 받을 거고요.”이은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다시 이윤미를 설득했다.“윤미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로 생각해. 엄마는 네가 외롭지 않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좋겠어.”“제가 딸을 낳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 텐데 어떻게 외롭다니요? 가주 자리에 앉으면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바빠서 매일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바쁠 텐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저는 좋아하는 남자가 없어요. 그런데 또 딸을 낳아 가주 자리를 물려주려면 예진 리조트의 넷째 사모님을 따라 배우면 되잖아요.”“이윤정은 어떻게 됐어?”이윤미의 생각에 놀란 이은화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그녀는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여전히 비교적 보수적이었다.“우리 별장 앞에서 밤새 울부짖었어요. 오늘 아침에 윤정이가 형수님 몇 분한테 괴롭힘을 당했는데 또 괴롭힐까 봐 도망쳤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요. 우리 오빠들이 윤정에게 준 돈과 카드도 전부 형수님들이 빼앗아 갔어요. 엄마가 옷 외에 다른 물건은 전부 가져갈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형수님들도 엄마의 말씀을
이윤미는 더는 정군호를 쳐다보지 않고 이은화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이윤미는 보온 도시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어주면서 말했다.“만두 두 개도 포장해 가져왔어요.”이은화는 앉아서 이윤미가 가져온 흰죽과 반찬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너니까 나에게 진짜로 흰죽과 반찬을 가져오는구나.”정일범 형제와 이윤정이라면 흰죽과 반찬들이 이은화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은화의 요구대로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엄마, 따뜻할 때 얼른 드세요.”이윤미는 양부모 집에서 자라면서 학대받았을 때 흰죽 한 그릇도 먹지 못했다.어렸을 때, 흰 죽 한 그릇도 그녀에게 사치였다.삶의 고달픔을 일찍 알아버린 이윤미는 커서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도 함부로 쓰지 않고 여전히 절약하며 살았다.이는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성격으로 지갑이 두꺼워졌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이은화는 묵묵히 죽을 먹으며 수십 년 전 그날 새벽의 이은숙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던 기억을 떠올렸다.이은화는 자신의 맏언니와 여동생을 죽이고 가주 자리에 앉았지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엄마, 아버지께서...”이윤미가 조용히 물었다.그녀는 정군호가 얻어맞은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마 이은화에게 칼에 찔렸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어젯밤 정군호가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이은화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정군호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윤미 또한 정말로 묻지 않았다.어쨌든 이은화는 정군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테니까.이은화의 수단으로 분석해 보면 그녀는 정군호를 단번에 죽이지 않고 천천히 괴롭힐 것이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죽지는 않아. 단지 내시가 되었을 뿐이야. 감염되지 않고 상처가 다 나으면 퇴원할 수 있대. 네 아버지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은 없을 거야. 앞으로 미녀를 보게 되면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을걸.”이윤미는 잠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몰랐다.“윤미야.”이윤미는 이은화를 바라보았다.이은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엄마
정군호는 잠깐 고통과 절망한 표정으로 이은화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그는 정말 아팠다.정군호가 이은화를 보지 않아도 이은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그리고 일어나 다시 창가로 걸어가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이은화의 생각은 이미 멀리 떠났다.만약 그 사람이 이은화와 함께 있었더라면, 그녀를 돕고 그녀와 결혼했다면, 그녀의 인생은 분명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영원히 이은숙에게 충성했다.이은숙이 시집가서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이은화와 함께하지 않고 오히려 자취를 감췄다.이미 몇십 년이 흘러 이은화가 70세의 노인으로 되었는데, 그 사람은 아마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은화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다.따르릉...이은화의 핸드폰이 울렸다.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이윤미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이은화는 잠시 휴대전화를 쳐다보다가 전화를 받았다.“엄마.”이윤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을 건넸다.“엄마, 괜찮으세요?”그녀는 아버지의 부상이 어떤지 직접 묻지 않고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이은화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미 최악인데 뭐가 괜찮겠어? 너희도 어른이 되고 나도 할머니로 되었는데 네 아빠가 내연녀가 있다고 해도 난 이제 여의치 않아.”앞으로 정군호는 다시는 여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엄마, 오늘 밥 안 드셨을 텐데 드실 것 좀 갖다 드릴까요?”“필요 없어.”이은화는 거절하다가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그래, 너무 많이 가져오지는 말고. 흰죽에 반찬 조금만 갖다 줘.”이윤미가 대답했다.“엄마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돌보느라 힘드실 텐데 그렇게 간단하게 드시면 쉽게 배고파요. 쉽게 체력도 떨어져서 안 돼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을 건넸다.“네 큰이모가 세상을 떠나신 날 아침, 큰이모가 이렇게 드셨거든. 산해진미를 많이 먹었다면서 가끔 흰죽에 반찬을 곁들이면 특별한 맛이 난다고 하셨어.”“알았어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이윤미는 더는 아무
“괜찮아요. 누나는 일 보러 나갔어요. 우리 예진 누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면 안 돼요. 누나는 이미 온갖 피바람을 겪은 사람이거든요. 15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사람 잡아먹을 정도의 친척들을 상대하면서 열 살짜리 여동생을 잘 가르치면서 살아오셨어요. 삶의 고초를 겪은 사람의 의지는 엄청나게 강한 법이죠.”전호영은 이경혜가 왜 하예진을 선택하고 강성으로 보내 이윤미와 경쟁하게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놀라지 않았다니, 안심이 되네요.”전호영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제 퇴근해도 될까요? 참, 현이 씨에게 선물을 준비했어요.”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고현에게 건넸다.고현은 케이스를 받아 열어 보지도 않고 일어나서 그녀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더니 서랍을 열어 서랍 안에 넣었다.“열어 보지 않을래요?”“볼 필요 없어요. 호영 씨가 준 물건은 모두 최고이기 때문에 제가 한가할 때 천천히 열어보면서 호영 씨의 사랑을 느껴볼게요.”전호영은 고현을 보면서 오늘의 그녀가 좀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느꼈다. 고현은 전호영의 감정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전호영의 이 고된 사랑의 길에서 드디어 또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전호영은 너무 뿌듯했다.병원.어느 고급 병실에서 이은화가 창가에 서서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정군호였다. 정군호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고 표정도 고통스러웠다.그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뜨고 그러다가 창가에 서 있는 이은화를 보더니 또 재빨리 눈을 감았다.아무도 정군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다.그가 칼을 휘둘러 그런 일을 저지른 소식을 이은화가 억눌러 소문이 퍼지지 않게 했다.그의 체면을 살려준 셈이다.이은화는 정군호가 아들딸 앞에서 그의 유일한 존엄을 잃지는 않도록 했다.시간이 한참 흘러 이은화가 돌아앉아 자는 척하는 정군호를 보며 말을 건넸다.“당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알아.”그녀는 정군호가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진통제
고진호도 고현이 여자였기 때문에 며느리가 아닌 사위가 필요했고 따라서 재벌가 딸들에게 희망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전호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올라가서 엘리베이터를 막 빠져나오자마자 고현이 고객을 배웅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 뒤에는 단정하게 양복을 입은 젊은 여성 몇 명이 따르고 있었는데 아마도 고객의 비서일 것이다.전호영과 고객들은 서로를 잘 몰랐다.고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호영은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섰다.고현은 직접 고객을 아래층으로 배웅했다.남 비서가 전호영을 쳐다보자 전호영은 눈빛으로 고현을 따라가라고 신호를 보냈다.전호영은 이미 고현의 사무실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 비서가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 없었다.고현의 사무실과 휴게실에 관해 전호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고현 일행이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후, 전호영은 스스로 고현의 사무실로 갔고 바로 문을 밀고 들어갔다.사무실에 들어선 전호영은 먼저 커피 한 잔을 타고 소파에 앉았다. 그때 고현이 돌아왔다.“어젯밤 일은 어떻게 됐어요?”고현은 그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예진 누나를 대신해서 죽은 경호원 가족들이 와서 뒷일을 처리했어요. 이씨 가문도 가족에게 보상을 해주고 보험회사에서도 가족들에게 보상해 줄 거예요. 이씨 가문의 모든 경호원은 거액 보험에 가입했거든요. 저도 이따가 예진 누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오후에 그 경호원의 가족들을 보러 가자고 해야겠어요. 그 경호원은 비록 이씨 가문의 희생 품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추어야 하는걸요.”현재, 그 차 사고는 잠시 의외 사고로 단정 지어졌다.이씨 가문의 음모라는 증거가 없어서 이씨 가문은 충분한 연기를 해야 만이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죽은 그 이씨 가문의 경호원은 스스로 재수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이은화의 마음이 그토록 모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하예진을 이씨 가문의 가족 연회에 처음 초대한 당일에 그녀를 죽이려고 했으니 말이다.하예진이 경계
다행히도 이 모든 악몽은 이미 끝났다.하예진은 이미 다시 일어서서 사업을 일으켰다.“호영 씨, 이만 가볼게요. 저도 나가서 일해야 하거든요. 회사를 설립하는 일을 아직 다 마치지 못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회사가 강성에 있어야 다른 회사와 협력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동명 형이 오시는 길일 텐데 더 기다리지 않으려고요?”전호영은 장난치고 싶었다.하예진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제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야 도착할 거에요. 동명 씨가 먼저 오면 저 대신 먼저 대접해 주세요. 호영 씨와 동명 씨가 더 친하잖아요.”“저도 좀 이따가 고씨 그룹에 갈 거예요.”“알겠어요. 그럼, 제가 빨리 돌아오죠. 미래의 아내가 더 중요한 법이죠. 호영 씨 둘째 형도 혼인신고 했다면서요. 호영 씨가 설을 쇠러 갈 때면 운초 씨는 아마 임신했을걸요. 힘내셔야겠는데요.”전호영은 그의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누나, 저도 필사적으로 힘을 내는 중이거든요. 우리 현이 씨는 둘째 형수님보다 따르기가 훨씬 어렵거든요.”여운초는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하얀 꽃처럼 부드럽고 연약해 보였다.여운초가 여씨 그룹을 단단히 장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전호영도 여운초가 계략과 수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끈질긴 열정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고 하잖아요.”하예진은 말을 마치고 일어나 전호영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의 사무실에서 나왔을 때, 하예진은 마침 이경혜의 전화를 받았다.이경혜와 하예진은 전화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하예진이 떠난 지 30분 만에 전호영은 일을 끝내고 호텔을 떠나 고씨 그룹으로 향했다.전호영은 이씨 가문의 뒷일을 고현에게도 알려주려고 했다.이번에 전호영은 꽃도, 보석도 사지 않았다. 고현은 비록 여자이지만, 어려서부터 남장을 하고 성격도 남성적이라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전호영은 그녀에게 손목시계를 하나 사줬다.고씨 그룹의 사람들은
“이 대표님께서도 크게 노하셨을 거예요. 정군호 씨는 잘 모르지만, 이윤정 씨는 그날 밤 쫓겨났어요. 한밤중에 정군호 씨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실려 갔다고 들었는데, 이 대표님은 아무도 병원에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정군호 씨의 상처에 관해 묻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대요.”전호영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하예진은 아직 다 마시지 못한 물잔을 들고 두 모금 더 마시더니 다시 잔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전호영을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어나갈 때까지 기다렸다.전호영이 말을 이었다.“사람을 보내 병원에 가서 알아보게 했어요.”“이모할아버지의 부상 상황은 어떻게 되셨대요? 이모할머니가 벌인 일이래요?”그러자 전호영이 대답했다.“이 대표님께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 정군호 씨가 스스로 그 부위를 자른 거래요.”전호영은 정군호가 벌인 일이 이은화의 핍박이라고 추측했다.정군호는 절대로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이은화가 아마도 정군호에게 두 가지 길을 준 것 같았다.정군호 배후의 정씨 집안은 여전히 이씨 가문에 의지하여 살아가야 했기에 정군호는 절대로 이혼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하지 않으면 정군호는 이은화를 안심시킬 수 없기에 칼을 휘둘러 스스로 그런 짓을 해야만 이은화를 안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하예진이가 깜빡이며 의아했다. 그녀는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다.전호영도 정군호의 부상에 대해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고 그냥 말 한마디만 내뱉었다.“정군호 씨는 죽지 않았어요. 정군호 씨의 부상은 알아보기 어려울 거예요. 이 대표님께서 엄밀하게 숨기고 있거든요. 남자들에게는 특히 데릴사위인 정군호 씨에게는 존엄 없는 짓이나 다름없으니까요.”하예진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데릴사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바로 재벌 가문으로 시집가는 여자들이 당하고 있는 일 아닌가요? 성별이 바뀌었을 뿐이죠.”전호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잠시 후, 전호영이 말했다.“누나, 우리 동명 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과거의 일은 지나
하예진이 위험에 처해 사고가 일어나야만 경호원들이 주동적으로 노동명에게 보고했다.“괜찮으면 됐어. 그럼 됐어. 너무 놀랐잖아. 예진아, 내가 이따가 강성으로 갈 건데 아마 오후 2시 전에 도착할 것 같아.”하예진이 대답했다.“전 괜찮아요.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노동명이 외출하는 것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에 하예진은 늘 그를 걱정했다.“내 두 눈으로 네가 멀쩡한 모습을 보고야 말겠어. 네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해야 내가 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저는 정말 괜찮아요. 경호원들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우린 다 괜찮아요. 동명 씨가 외출하기 불편하실 텐데 너무 멀리 오면 안 돼요.”노동명은 기어코 가겠다고 고집했다.“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 너무너무 보고 싶어. 네가 괜찮은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하예진은 반박하지 못했다.“그럼 조심히 오세요. 만약 몸이 불편하면 고집하지 마시고. 동명 씨, 우리는 각자가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아시겠죠?”노동명은 부드러운 어조로 나지막이 대답했다.“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몸이 불편하면 외출하지도 않아.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오후에 봐.”“네, 오후에 봐요.”하예진은 전화를 끊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노동명이 하예진에게 주고 있는 것은 전남편이 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어쩌면, 노동명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주형인도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 있었겠지만, 나중에 복잡한 일들이 많이 끼는 바람에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하예진이 지금 묵고 있는 호텔은 강성에 있는 전씨 가문의 사업 중 하나이며 전호영이 맡은 부분이다.하예진은 쉽게 전호영을 만날 수 있었다.그녀는 잠을 더 자려고 해도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약을 몇 알 먹은 하예진은 이내 두통이 사라지게 되었고 휴대전화를 들고 일어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더니 전호영의 사무
게다가 노동명은 하예진 모자한테 진심으로 잘해줬고 그는 우빈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겼다.그녀가 노동명을 거부하고 재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단지 재혼하면 다시 불 구덩이에 빠질까 봐 걱정됐고 또한 우빈이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노동명은 그녀를 도와 모든 장애물을 제거했다. 노씨 가문은 그녀를 받아들였고 그녀가 노동명과 결혼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빈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에 대한 걱정은 더더욱 필요가 없었다. 노동명은 친아빠인 주형인보다 우빈이를 더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만약 그녀가 다시 결혼한다면 노동명이 가장 적합한 후보일 것이다.“동명 오빠도 언니한테 피해 줄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언니한테 피해보다 행복을 주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언니가 좀 더 기다려줘. 동명 오빠가 곧 일어설 거라고 난 믿어.”“알아. 그래서 몇 년이 걸리더라도 그 사람을 기다릴 거야. 기다리는 동안 내 사업도 열심히 발전시키는 중이야.”지금의 그녀는 관성의 3대 재벌 가문의 투자, 후원 및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이익보다도 그 속에서 얻은 경험은 돈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언니 화이팅! 우리 언니가 최고야. 난 항상 언니가 자랑스러워.”하예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가 많이 힘낼게.”“언니, 수다 그만 떨고 얼른 잠 좀 자.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꼭 알려줘야 해. 안 알려주면 걱정만 할 테지만 알려 주면 적어도 우리가 해결 방법을 같이 생각하고 모두가 같이 부담하면 훨씬 더 편해지잖아.”“그래 알았어.”자매가 통화를 마친 후 하예진은 계속 자려고 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그녀는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뭐 좀 먹으러 나갈 준비를 했다.이 시간에 호텔 1층 뷔페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그녀는 밖으로 나가 아침 식사를 하기로 했다.아침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하예진은 여전히 머리가 아파서 캐리어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