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미가 다시 사진을 집어 들려 하자, 이은화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사진들 보지 마. 눈만 버려.”“저 곧 서른이에요. 봐도 괜찮아요. 하지만 솜사탕이랑 사탕 엿은 다 먹고 볼게요. 혹시 토할 수도 있으니까.”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엄마, 저 방금 힐끗 봤는데, 사진이 이렇게 선명하게 찍힌 걸 보니 이윤정이 일부러 그런 것 같아요. 창문을 열어두고 누군가 몰래 찍도록 한 거죠. 아마도 엄마가 자기 뒤를 캘 거라는 걸 예상하고 일부러 선명하게 찍히게 만든 거 아닐까요?”이윤미는 이은화의 반응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진짜 바람피우는 사람들은 죄다 꽁꽁 숨기잖아요. 이윤정은 일부러 들키려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복수하고 싶으니까. 만약 몰래 했다면 엄마는 절대 알 수 없었을 거예요.”이은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의든 아니든, 이런 짓을 벌였으니 용서할 수 없어. 네 아버지는 아직도 이윤정을 잊지 못하시는 것 같구나.”이은화는 분노에 차 말했다.“나는 이윤정이 이런 사람이 될 줄 몰랐어. 스무 해 넘게 아끼고 사랑했는데... 예전엔 이윤정이 내 친딸이 아니란 걸 모르고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어. 물론, 나랑 닮은 구석이 별로 없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키웠는데 늘 기대에 못 미쳐서 나는 내가 물려준 유전자가 문제라고만 생각했어. 우리 집안 여자들은 다 영리하고 능력이 뛰어나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가짜였던 거야.”이은화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했다.“처음부터 내쫓아야 했어. 우리 집에 둬선 안 됐어. 엄마가 잘못했어.”이윤미가 조용히 말했다.“엄마가 그렇게 하신 것도 이해해요. 어쨌든 20년 넘게 키우셨잖아요. 하루아침에 모녀의 정이 사라질 수는 없죠.”“윤미야, 엄마가 그동안 너한테 겉으로 잘해주지 못했어. 엄마 많이 원망했니?”이윤미는 솜사탕을 반쯤 먹다 말고 입가에 묻은 설탕을 손등으로 쓱 닦았다. 이은화는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
이윤정과 정군호의 일 이후로, 이은화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예전에는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칠십 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고 오십 대 중반이라 해도 손색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마치 팔십이 넘은 노인처럼 보였다.이윤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부모의 결혼 생활에 대해 함부로 입을 뗄 수 없었다.“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어. 맞아, 나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긴 했지만 바람을 피운 적은 없어. 그건 다 과거의 일이야.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기 마련이잖아? 네 아버지도 이씨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 곁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해. 이씨 가문에 들어온 후,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과거를 들추지 않았어. 그런데 감히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이윤미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엄마, 엄마 마음속에 있는 그분, 분명 엄청난 분이겠죠?”“정말 뛰어난 사람이야. 네 아버지보다 백 배는 뛰어나. 엄마가 며칠 후에 먼 여행을 떠나는데, 만나러 간다던 옛 친구가 바로 엄마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람이야.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데, 아직도 날 기억할지 모르겠어. 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남아 있는 감정으로 보면 그 남자는 이은화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큰언니만 있을 테니까.하지만 남아 있는 증오로 본다면 이은화가 어떤 모습이 되어도 그는 기억할 것이다. 그를 살아 있게 만든 것은 이은화에 대한 깊은 증오심이었으니까.“똑똑.”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가주님, 큰 사모님이 돌아오셨습니다.”서재 밖에서 집사가 말하자 이은화는 딸에게 말했다.“윤미야, 너는 먼저 나가거라. 아직 밥 안 먹었다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먹고 와. 엄마가 부르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고.”“엄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몸 상하면 안 돼요.”이윤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
이윤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조윤을 바라보며 알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조윤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사진? 누구의 사진일까?’“형수님, 빨리 들어가세요. 어머니가 기다리시겠어요.”이윤미는 조용히 재촉하며 자리를 떴다.조윤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부딪쳐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무서워도 자신을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조윤은 조용히 서재로 들어갔다.들어서자 바닥에 사진들이 흩어져 있었고 위엄 있는 시어머니는 책상에 앉아 손에 사탕 엿을 들고 조용히 먹고 있었다.조윤은 순간 당황했다. 위엄 넘치는 시어머니가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사탕 엿을 먹고 있다니. 아마도 작은 시누이가 사다 준 것이 분명했다.이은화는 며느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마지막 사탕을 다 먹고 나서 태연하게 말했다.“바닥에 있는 사진들 모두 주워.”“네, 어머님.”큰며느리는 서둘러 다가가 들고 있던 가방을 의자에 놓고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사진을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진을 줍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고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조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분노가 치솟았다.사진 속 인물은 남편 정일범과 작은 시누이 이윤정이었다. 아니, 이제는 작은 시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여자였다. 이미 시어머니에게 쫓겨난 몸이니 그냥 막된 여자일 뿐이었다.“어머님!”조윤은 화가 치밀어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들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어머님, 일범 씨랑 저 막된 여자를 보세요. 둘이...”조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남편이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과거, 남편이 외도했을 때, 시어머니에게 들켜 크게 혼난 후 관계를 정리했다고 믿었다.조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아이들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외도쯤은 참을 수 있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이씨 가문 큰며느리 자리를 절대 다른
무엇보다 시부모님은 이윤정을 지나치게 아끼고 사랑했고 심지어 이윤미보다 훨씬 더 잘해주었다.이씨 가문에 시집와서 큰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시어머니가 이윤정을 그토록 아꼈으니 조윤은 마음속으로 불편해도 겉으로는 그에게 잘 보여야 했다.“됐어.”이은화는 며느리의 말을 끊어 버렸다.“이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예전에 이윤정을 너무 아꼈어.”이 큰 저택에서는 모두가 이은화의 눈치를 보며 행동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먼저 이은화의 잘못이었다.조윤은 조용히 말했다.“어머님은 윤정이가 가짜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아끼신 거잖아요. 저도 엄마가 된 사람이고 딸이 하나뿐이라,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이은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아이들은 학교까지 잘 바래다줬어?”그녀는 손주들을 무척 아꼈다.사실, 이윤미가 처음 돌아왔을 때는 손녀를 키울 생각도 했었다. 처음엔 그녀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이씨 가문에서는 가주에게 딸이 없으면 손녀를 돌봐야했다. 가주 자리를 다른 친척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였다.“네, 다 잘 도착했어요.”“아이들 성적은 어때?”조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 중간 정도예요.”이은화는 며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조윤은 깜짝 놀라 서둘러 덧붙였다.“아이들 성적은 뛰어나진 않지만 머리는 똑똑해요. 절대 멍청한 애들이 아니에요.”이은화는 한숨을 쉬었다.“아들이 바람피웠으니, 난 네 편에 있기로 했다. 네가 뭘 하든, 어떻게 화내든, 난 네 편이야.”그녀는 다시 아들의 외도 이야기를 꺼냈다.손주들이 여러 명 있지만 모두 성적이 썩 좋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키우려 했던 장손녀조차 마찬가지였다.아마도 역대 가주들이 딸을 낳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아들도 후손이고 손녀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아들들은 딸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했고 손녀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맙습니다, 어머님.”시어머니의 지지를
“네 큰오빠한테 따지러 찾아가야지. 개도 못 고치는 버릇이라잖아.”조윤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이윤미에게 대답했다.화가 난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순식간에 거실을 지나 본채를 벗어났다.이윤미는 곧장 밖에서 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조윤이 정말로 큰오빠 찾으러 나간 것이다.이윤미는 음식을 위층으로 가져가 어머니께 드린 후, 핑계를 대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조윤을 따라간 이유는 그녀가 화가 나서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걱정해서가 아니었다.만약 큰오빠와 이윤정이 손을 잡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라면 형수가 손해를 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그때, 방윤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가씨, 어디 가세요?”방윤림은 이윤미가 외출한 것을 알고 전화를 걸어 목적지를 물었다.“형수님이 불륜 현장을 잡으러 갔어요. 혹시 손해 볼까 봐 따라가서 도와주려고요.”방윤림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구경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구경도 하고 형수님도 도와야죠.”“이렇게 재미있는 일이라면 저도 참여하고 싶네요.”“방 비서님은 가만히 계세요. 어머니의 비서가 근처에 있어요.”방윤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선배가 있다니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다치지 마세요.”“걱정하지 마세요. 저 싸움 꽤 잘해요.”방윤림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진짜 고수를 만나보지 못했죠?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한 방에 쓰러질 수도 있어요.”“운전 중이라서, 그만 끊을게요.”싸움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 들통나자 이윤미는 운전 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었다.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명지 빌리지에 도착했다.조윤은 도착하자마자 잠시 멈춰 서서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화가 난 채로 나왔기에 남편이 산 집이 몇 동 몇 층인지 묻지 않았던 것이다.명지 빌리지는 꽤 넓은 아파트 단지였기에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웅웅웅.”조윤이 길을 헤매던 중, 휴대폰이 울렸고 가방에서 꺼내 보니 낯선
조윤은 아무 말 없이 바로 이윤정의 뺨을 후려쳤다.퍽!선명한 손자국과 함께 이윤정의 입가에서 피가 맺혔다.하지만 조윤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가방을 휘둘러 이윤정을 계속 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더러운 년! 감히 내 남편을 유혹해? 염치없는 년, 더러운 년!”이윤정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둘은 뒤엉켜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다.두 여자의 시끄러운 싸움에 일요일 저녁 집에 있던 옆집 사람들도 소란을 듣고 하나둘씩 나왔다.하지만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말리지 못했다.조윤이 이윤정의 얇은 잠옷을 찢어버리면서 고함을 지르자 사람들은 이제가 눈치를 챘다.“이 더러운 년! 내 남편을 유혹해? 찢어 버릴 거야!”아내가 내연녀를 잡으러 온 상황임이 명확해지자 구경꾼들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야?”샤워를 마친 정일범이 소란을 듣고 뛰쳐나왔고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 두 여자가 서로 머리채를 잡고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뛰어들어 이윤정의 위에 있는 아내를 발로 차버렸다.방심하던 조윤은 남편에게 발로 차여 바닥에 나뒹굴었고 등에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이윤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윤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당겼고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조윤의 양쪽 볼이 얼얼해지더니 눈앞이 아득해졌다.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남편이 내연녀를 도왔다는 사실이었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조윤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이윤정의 이마를 머리로 들이받았다.이윤정이 비명을 지르며 움찔하자 조윤은 다시 그녀 위에 올라타 두 손으로 목을 꽉 움켜쥐었다.그녀의 손아귀에서 이윤정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정일범이 다시 아내를 발로 찼다.하지만 조윤은 손을 놓지 않았고 남편의 발길질을 버티며 더욱 세게 이윤정의 목을 조였다.“놔! 죽이려는 거야?”정일범이 소리치며 아내를 붙잡고 잡아당겼다.이윤정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정일범은 필사적으로 아내의 손을 끌어당겼고 그제야
앞으로 정일범이 누구와 함께 있든, 조윤과는 상관없었다.이씨 가문의 큰며느리 자리도 이제 누구에게 가든,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단 하나. 살아남는 것이었다.“큰오빠,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이윤미는 정일범을 차갑게 꾸짖었다.“형수님을 거의 죽일 뻔했잖아!”“오빠가 그 여자랑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집에서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이윤미는 허리를 숙여 조윤의 가방을 집어 들어 안에 있는 사진 한 뭉치를 꺼내 정일범에게 던졌다.그러고는 조윤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형수님, 우리 돌아가요.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짐승들은 어머니께 맡기죠.”“윤미야...”바닥에서 사진을 집어 든 정일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고개를 들어보니, 동생은 이미 조윤을 데리고 떠났고 이곳에 더 이상 오래 머물러선 안 될 것 같았다.정일범은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허둥지둥 뛰쳐나왔다.이윤미는 기절한 이윤정을 남겨둔 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정일범 역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떠났다.심지어 방문조차 닫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주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결국, 이웃 중 한 명이 나서서 이윤정을 위해 방문을 닫아 주며 드라마는 끝났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하지만 다음 날, 사람들은 전날 밤에 불륜 현장에서 들킨 내연녀가 16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 높이에서 떨어져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기에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머리가 깨지고 바닥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이 현장을 본 이윤정의 어머니와 두 오빠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사람들은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들이 조윤의 전화를 받고 이윤정이 망신스러운 짓을 했다는 걸 알고 밤새도록 고향에서 달려왔다고 했다.밤늦게 도착한 모자는 번갈아 가며 그녀를 심하게 꾸짖었다.불륜남의 아내한테 뚜들겨 맞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한 것이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고, 어머니와 오빠들에게까
이은화는 이윤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다.이틀 후면 퇴원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정군호는 마치 부모를 잃은 사람처럼 온몸이 축 처져 있었다. 눈은 붉게 부어 있었고 오랜 시간 울었던 흔적이 역력했다.어제 그의 곁에 함께 있어 준 사람은 막내아들이었다.정일호는 한때 여동생이었던 이윤정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명지 빌리지로 달려가 그녀의 친오빠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이은화는 그런 부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깊은 눈빛 속에 어떤 감정이 스며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가주의 시선이 닿자 부자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극도로 긴장했다.정군호는 막내아들에게 눈짓으로 이 무거운 침묵을 깨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러나 정일호는 선뜻 나설 수 없었고 그는 오히려 아버지가 먼저 말하기를 바랐다.눈빛으로 주고받은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지다, 결국 정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는 어머니를 위해 조용히 의자를 가져와 뒤에 놓고는 나직이 말했다.“엄마, 앉으세요.”이은화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정일호는 서둘러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어머니에게 건네고는 곧장 과일을 씻으려 했다.“과일은 괜찮다. 그냥 네 아버지랑 할 얘기하고 곧 회사로 돌아가야 해.”이은화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과일을 씻으려던 막내아들을 불러 세웠다.“그럼 아버지랑 이야기하고 계세요.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정일호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섰다.아들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엄격했고 집이든 회사든 단 한마디로 결정을 내리는 법이었기에 그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반면 아버지는 온화한 사람이었고 아이들을 아꼈다. 무슨 부탁이든 가능한 한 들어주려 했고 때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어머니를 설득하다가 크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그렇게 형제들은 자연스레 아버지와 더 친해지게 되었다.하지만 여동생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정일호의 마음속에서 이윤정은 언제까
이은화는 이윤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다.이틀 후면 퇴원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정군호는 마치 부모를 잃은 사람처럼 온몸이 축 처져 있었다. 눈은 붉게 부어 있었고 오랜 시간 울었던 흔적이 역력했다.어제 그의 곁에 함께 있어 준 사람은 막내아들이었다.정일호는 한때 여동생이었던 이윤정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명지 빌리지로 달려가 그녀의 친오빠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이은화는 그런 부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깊은 눈빛 속에 어떤 감정이 스며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가주의 시선이 닿자 부자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극도로 긴장했다.정군호는 막내아들에게 눈짓으로 이 무거운 침묵을 깨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러나 정일호는 선뜻 나설 수 없었고 그는 오히려 아버지가 먼저 말하기를 바랐다.눈빛으로 주고받은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지다, 결국 정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는 어머니를 위해 조용히 의자를 가져와 뒤에 놓고는 나직이 말했다.“엄마, 앉으세요.”이은화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정일호는 서둘러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어머니에게 건네고는 곧장 과일을 씻으려 했다.“과일은 괜찮다. 그냥 네 아버지랑 할 얘기하고 곧 회사로 돌아가야 해.”이은화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과일을 씻으려던 막내아들을 불러 세웠다.“그럼 아버지랑 이야기하고 계세요.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정일호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섰다.아들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엄격했고 집이든 회사든 단 한마디로 결정을 내리는 법이었기에 그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반면 아버지는 온화한 사람이었고 아이들을 아꼈다. 무슨 부탁이든 가능한 한 들어주려 했고 때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어머니를 설득하다가 크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그렇게 형제들은 자연스레 아버지와 더 친해지게 되었다.하지만 여동생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정일호의 마음속에서 이윤정은 언제까
앞으로 정일범이 누구와 함께 있든, 조윤과는 상관없었다.이씨 가문의 큰며느리 자리도 이제 누구에게 가든,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단 하나. 살아남는 것이었다.“큰오빠,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이윤미는 정일범을 차갑게 꾸짖었다.“형수님을 거의 죽일 뻔했잖아!”“오빠가 그 여자랑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집에서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이윤미는 허리를 숙여 조윤의 가방을 집어 들어 안에 있는 사진 한 뭉치를 꺼내 정일범에게 던졌다.그러고는 조윤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형수님, 우리 돌아가요.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짐승들은 어머니께 맡기죠.”“윤미야...”바닥에서 사진을 집어 든 정일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고개를 들어보니, 동생은 이미 조윤을 데리고 떠났고 이곳에 더 이상 오래 머물러선 안 될 것 같았다.정일범은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허둥지둥 뛰쳐나왔다.이윤미는 기절한 이윤정을 남겨둔 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정일범 역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떠났다.심지어 방문조차 닫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주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결국, 이웃 중 한 명이 나서서 이윤정을 위해 방문을 닫아 주며 드라마는 끝났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하지만 다음 날, 사람들은 전날 밤에 불륜 현장에서 들킨 내연녀가 16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 높이에서 떨어져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기에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머리가 깨지고 바닥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이 현장을 본 이윤정의 어머니와 두 오빠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사람들은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들이 조윤의 전화를 받고 이윤정이 망신스러운 짓을 했다는 걸 알고 밤새도록 고향에서 달려왔다고 했다.밤늦게 도착한 모자는 번갈아 가며 그녀를 심하게 꾸짖었다.불륜남의 아내한테 뚜들겨 맞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한 것이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고, 어머니와 오빠들에게까
조윤은 아무 말 없이 바로 이윤정의 뺨을 후려쳤다.퍽!선명한 손자국과 함께 이윤정의 입가에서 피가 맺혔다.하지만 조윤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가방을 휘둘러 이윤정을 계속 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더러운 년! 감히 내 남편을 유혹해? 염치없는 년, 더러운 년!”이윤정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둘은 뒤엉켜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다.두 여자의 시끄러운 싸움에 일요일 저녁 집에 있던 옆집 사람들도 소란을 듣고 하나둘씩 나왔다.하지만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말리지 못했다.조윤이 이윤정의 얇은 잠옷을 찢어버리면서 고함을 지르자 사람들은 이제가 눈치를 챘다.“이 더러운 년! 내 남편을 유혹해? 찢어 버릴 거야!”아내가 내연녀를 잡으러 온 상황임이 명확해지자 구경꾼들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야?”샤워를 마친 정일범이 소란을 듣고 뛰쳐나왔고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 두 여자가 서로 머리채를 잡고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뛰어들어 이윤정의 위에 있는 아내를 발로 차버렸다.방심하던 조윤은 남편에게 발로 차여 바닥에 나뒹굴었고 등에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이윤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윤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당겼고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조윤의 양쪽 볼이 얼얼해지더니 눈앞이 아득해졌다.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남편이 내연녀를 도왔다는 사실이었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조윤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이윤정의 이마를 머리로 들이받았다.이윤정이 비명을 지르며 움찔하자 조윤은 다시 그녀 위에 올라타 두 손으로 목을 꽉 움켜쥐었다.그녀의 손아귀에서 이윤정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정일범이 다시 아내를 발로 찼다.하지만 조윤은 손을 놓지 않았고 남편의 발길질을 버티며 더욱 세게 이윤정의 목을 조였다.“놔! 죽이려는 거야?”정일범이 소리치며 아내를 붙잡고 잡아당겼다.이윤정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정일범은 필사적으로 아내의 손을 끌어당겼고 그제야
“네 큰오빠한테 따지러 찾아가야지. 개도 못 고치는 버릇이라잖아.”조윤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이윤미에게 대답했다.화가 난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순식간에 거실을 지나 본채를 벗어났다.이윤미는 곧장 밖에서 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조윤이 정말로 큰오빠 찾으러 나간 것이다.이윤미는 음식을 위층으로 가져가 어머니께 드린 후, 핑계를 대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조윤을 따라간 이유는 그녀가 화가 나서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걱정해서가 아니었다.만약 큰오빠와 이윤정이 손을 잡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라면 형수가 손해를 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그때, 방윤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가씨, 어디 가세요?”방윤림은 이윤미가 외출한 것을 알고 전화를 걸어 목적지를 물었다.“형수님이 불륜 현장을 잡으러 갔어요. 혹시 손해 볼까 봐 따라가서 도와주려고요.”방윤림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구경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구경도 하고 형수님도 도와야죠.”“이렇게 재미있는 일이라면 저도 참여하고 싶네요.”“방 비서님은 가만히 계세요. 어머니의 비서가 근처에 있어요.”방윤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선배가 있다니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다치지 마세요.”“걱정하지 마세요. 저 싸움 꽤 잘해요.”방윤림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진짜 고수를 만나보지 못했죠?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한 방에 쓰러질 수도 있어요.”“운전 중이라서, 그만 끊을게요.”싸움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 들통나자 이윤미는 운전 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었다.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명지 빌리지에 도착했다.조윤은 도착하자마자 잠시 멈춰 서서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화가 난 채로 나왔기에 남편이 산 집이 몇 동 몇 층인지 묻지 않았던 것이다.명지 빌리지는 꽤 넓은 아파트 단지였기에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웅웅웅.”조윤이 길을 헤매던 중, 휴대폰이 울렸고 가방에서 꺼내 보니 낯선
무엇보다 시부모님은 이윤정을 지나치게 아끼고 사랑했고 심지어 이윤미보다 훨씬 더 잘해주었다.이씨 가문에 시집와서 큰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시어머니가 이윤정을 그토록 아꼈으니 조윤은 마음속으로 불편해도 겉으로는 그에게 잘 보여야 했다.“됐어.”이은화는 며느리의 말을 끊어 버렸다.“이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예전에 이윤정을 너무 아꼈어.”이 큰 저택에서는 모두가 이은화의 눈치를 보며 행동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먼저 이은화의 잘못이었다.조윤은 조용히 말했다.“어머님은 윤정이가 가짜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아끼신 거잖아요. 저도 엄마가 된 사람이고 딸이 하나뿐이라,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이은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아이들은 학교까지 잘 바래다줬어?”그녀는 손주들을 무척 아꼈다.사실, 이윤미가 처음 돌아왔을 때는 손녀를 키울 생각도 했었다. 처음엔 그녀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이씨 가문에서는 가주에게 딸이 없으면 손녀를 돌봐야했다. 가주 자리를 다른 친척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였다.“네, 다 잘 도착했어요.”“아이들 성적은 어때?”조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 중간 정도예요.”이은화는 며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조윤은 깜짝 놀라 서둘러 덧붙였다.“아이들 성적은 뛰어나진 않지만 머리는 똑똑해요. 절대 멍청한 애들이 아니에요.”이은화는 한숨을 쉬었다.“아들이 바람피웠으니, 난 네 편에 있기로 했다. 네가 뭘 하든, 어떻게 화내든, 난 네 편이야.”그녀는 다시 아들의 외도 이야기를 꺼냈다.손주들이 여러 명 있지만 모두 성적이 썩 좋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키우려 했던 장손녀조차 마찬가지였다.아마도 역대 가주들이 딸을 낳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아들도 후손이고 손녀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아들들은 딸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했고 손녀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맙습니다, 어머님.”시어머니의 지지를
이윤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조윤을 바라보며 알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조윤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사진? 누구의 사진일까?’“형수님, 빨리 들어가세요. 어머니가 기다리시겠어요.”이윤미는 조용히 재촉하며 자리를 떴다.조윤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부딪쳐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무서워도 자신을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조윤은 조용히 서재로 들어갔다.들어서자 바닥에 사진들이 흩어져 있었고 위엄 있는 시어머니는 책상에 앉아 손에 사탕 엿을 들고 조용히 먹고 있었다.조윤은 순간 당황했다. 위엄 넘치는 시어머니가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사탕 엿을 먹고 있다니. 아마도 작은 시누이가 사다 준 것이 분명했다.이은화는 며느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마지막 사탕을 다 먹고 나서 태연하게 말했다.“바닥에 있는 사진들 모두 주워.”“네, 어머님.”큰며느리는 서둘러 다가가 들고 있던 가방을 의자에 놓고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사진을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진을 줍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고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조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분노가 치솟았다.사진 속 인물은 남편 정일범과 작은 시누이 이윤정이었다. 아니, 이제는 작은 시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여자였다. 이미 시어머니에게 쫓겨난 몸이니 그냥 막된 여자일 뿐이었다.“어머님!”조윤은 화가 치밀어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들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어머님, 일범 씨랑 저 막된 여자를 보세요. 둘이...”조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남편이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과거, 남편이 외도했을 때, 시어머니에게 들켜 크게 혼난 후 관계를 정리했다고 믿었다.조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아이들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외도쯤은 참을 수 있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이씨 가문 큰며느리 자리를 절대 다른
이윤정과 정군호의 일 이후로, 이은화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예전에는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칠십 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고 오십 대 중반이라 해도 손색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마치 팔십이 넘은 노인처럼 보였다.이윤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부모의 결혼 생활에 대해 함부로 입을 뗄 수 없었다.“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어. 맞아, 나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긴 했지만 바람을 피운 적은 없어. 그건 다 과거의 일이야.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기 마련이잖아? 네 아버지도 이씨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 곁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해. 이씨 가문에 들어온 후,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과거를 들추지 않았어. 그런데 감히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이윤미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엄마, 엄마 마음속에 있는 그분, 분명 엄청난 분이겠죠?”“정말 뛰어난 사람이야. 네 아버지보다 백 배는 뛰어나. 엄마가 며칠 후에 먼 여행을 떠나는데, 만나러 간다던 옛 친구가 바로 엄마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람이야.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데, 아직도 날 기억할지 모르겠어. 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남아 있는 감정으로 보면 그 남자는 이은화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큰언니만 있을 테니까.하지만 남아 있는 증오로 본다면 이은화가 어떤 모습이 되어도 그는 기억할 것이다. 그를 살아 있게 만든 것은 이은화에 대한 깊은 증오심이었으니까.“똑똑.”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가주님, 큰 사모님이 돌아오셨습니다.”서재 밖에서 집사가 말하자 이은화는 딸에게 말했다.“윤미야, 너는 먼저 나가거라. 아직 밥 안 먹었다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먹고 와. 엄마가 부르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고.”“엄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몸 상하면 안 돼요.”이윤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
이윤미가 다시 사진을 집어 들려 하자, 이은화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사진들 보지 마. 눈만 버려.”“저 곧 서른이에요. 봐도 괜찮아요. 하지만 솜사탕이랑 사탕 엿은 다 먹고 볼게요. 혹시 토할 수도 있으니까.”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엄마, 저 방금 힐끗 봤는데, 사진이 이렇게 선명하게 찍힌 걸 보니 이윤정이 일부러 그런 것 같아요. 창문을 열어두고 누군가 몰래 찍도록 한 거죠. 아마도 엄마가 자기 뒤를 캘 거라는 걸 예상하고 일부러 선명하게 찍히게 만든 거 아닐까요?”이윤미는 이은화의 반응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진짜 바람피우는 사람들은 죄다 꽁꽁 숨기잖아요. 이윤정은 일부러 들키려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복수하고 싶으니까. 만약 몰래 했다면 엄마는 절대 알 수 없었을 거예요.”이은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의든 아니든, 이런 짓을 벌였으니 용서할 수 없어. 네 아버지는 아직도 이윤정을 잊지 못하시는 것 같구나.”이은화는 분노에 차 말했다.“나는 이윤정이 이런 사람이 될 줄 몰랐어. 스무 해 넘게 아끼고 사랑했는데... 예전엔 이윤정이 내 친딸이 아니란 걸 모르고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어. 물론, 나랑 닮은 구석이 별로 없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키웠는데 늘 기대에 못 미쳐서 나는 내가 물려준 유전자가 문제라고만 생각했어. 우리 집안 여자들은 다 영리하고 능력이 뛰어나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가짜였던 거야.”이은화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했다.“처음부터 내쫓아야 했어. 우리 집에 둬선 안 됐어. 엄마가 잘못했어.”이윤미가 조용히 말했다.“엄마가 그렇게 하신 것도 이해해요. 어쨌든 20년 넘게 키우셨잖아요. 하루아침에 모녀의 정이 사라질 수는 없죠.”“윤미야, 엄마가 그동안 너한테 겉으로 잘해주지 못했어. 엄마 많이 원망했니?”이윤미는 솜사탕을 반쯤 먹다 말고 입가에 묻은 설탕을 손등으로 쓱 닦았다. 이은화는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
“네 작은 이모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나날이 흐려지더니 결국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 그렇게 가문의 모든 짐을 내가 지게 됐지.”이윤미는 어머니가 큰이모와 작은이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어머니 자매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어머니의 표정이 이토록 복잡한 걸 보면 큰이모와 작은이모의 죽음이 어머니의 손에 의해 벌어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묻는다 한들 어머니가 대답해 줄 리 없었다.오히려 화를 내며 친딸인 자신조차 믿지 않는다며 꾸짖을 것이다.“엄마, 큰이모랑 작은이모 사진 있어요?”이윤미는 엿사탕을 천천히 씹으며 자연스레 물었다.“엄마가 예전에 하예진은 큰이모랑 많이 닮았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전 큰이모 사진을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외손녀가 외할머니를 닮으면 얼마나 닮을 수 있겠나 깊었어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예전엔 사진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다 망가져서 결국 버렸어. 지금은 내 손에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하예진은 큰이모를 좀 더 닮았어. 하예진은 아무래도 어머니를 많이 빼닮은 것 같아. 그 애 엄마도 어릴 때 큰언니랑 많이 닮았었거든. 경혜는 아버지를 닮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어. 경혜를 보면 옛날 언니 모습이 떠오르더라. 말투며 행동,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말이야.”잠시 말을 멈춘 이은화는 창밖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만약 큰언니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이경혜가 앉아 있었겠지. 그랬다면 우리 이씨 그룹도 전성기를 유지했을 거야. 난 큰언니나 이경혜만큼 뛰어나지 못해.”이은화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작은조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딸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그 아이들도 뛰어나긴 하지만, 얼마나 능력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그때, 이은화는 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