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작은 이모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나날이 흐려지더니 결국 사고로 세상을 떠났어... 그렇게 가문의 모든 짐을 내가 지게 됐지.”이윤미는 어머니가 큰이모와 작은이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어머니 자매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걸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어머니의 표정이 이토록 복잡한 걸 보면 큰이모와 작은이모의 죽음이 어머니의 손에 의해 벌어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하지만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기에 굳이 묻지 않았다.묻는다 한들 어머니가 대답해 줄 리 없었다.오히려 화를 내며 친딸인 자신조차 믿지 않는다며 꾸짖을 것이다.“엄마, 큰이모랑 작은이모 사진 있어요?”이윤미는 엿사탕을 천천히 씹으며 자연스레 물었다.“엄마가 예전에 하예진은 큰이모랑 많이 닮았다고 하셨잖아요. 근데 전 큰이모 사진을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닮았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외손녀가 외할머니를 닮으면 얼마나 닮을 수 있겠나 깊었어요.”이은화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예전엔 사진이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다 망가져서 결국 버렸어. 지금은 내 손에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하예진은 큰이모를 좀 더 닮았어. 하예진은 아무래도 어머니를 많이 빼닮은 것 같아. 그 애 엄마도 어릴 때 큰언니랑 많이 닮았었거든. 경혜는 아버지를 닮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어. 경혜를 보면 옛날 언니 모습이 떠오르더라. 말투며 행동, 심지어 목소리까지도 말이야.”잠시 말을 멈춘 이은화는 창밖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만약 큰언니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이경혜가 앉아 있었겠지. 그랬다면 우리 이씨 그룹도 전성기를 유지했을 거야. 난 큰언니나 이경혜만큼 뛰어나지 못해.”이은화는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작은조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두 딸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그 아이들도 뛰어나긴 하지만, 얼마나 능력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그때, 이은화는 돌
이윤미가 다시 사진을 집어 들려 하자, 이은화가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사진들 보지 마. 눈만 버려.”“저 곧 서른이에요. 봐도 괜찮아요. 하지만 솜사탕이랑 사탕 엿은 다 먹고 볼게요. 혹시 토할 수도 있으니까.”이은화는 말문이 막혔다.“엄마, 저 방금 힐끗 봤는데, 사진이 이렇게 선명하게 찍힌 걸 보니 이윤정이 일부러 그런 것 같아요. 창문을 열어두고 누군가 몰래 찍도록 한 거죠. 아마도 엄마가 자기 뒤를 캘 거라는 걸 예상하고 일부러 선명하게 찍히게 만든 거 아닐까요?”이윤미는 이은화의 반응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진짜 바람피우는 사람들은 죄다 꽁꽁 숨기잖아요. 이윤정은 일부러 들키려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복수하고 싶으니까. 만약 몰래 했다면 엄마는 절대 알 수 없었을 거예요.”이은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의든 아니든, 이런 짓을 벌였으니 용서할 수 없어. 네 아버지는 아직도 이윤정을 잊지 못하시는 것 같구나.”이은화는 분노에 차 말했다.“나는 이윤정이 이런 사람이 될 줄 몰랐어. 스무 해 넘게 아끼고 사랑했는데... 예전엔 이윤정이 내 친딸이 아니란 걸 모르고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어. 물론, 나랑 닮은 구석이 별로 없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키웠는데 늘 기대에 못 미쳐서 나는 내가 물려준 유전자가 문제라고만 생각했어. 우리 집안 여자들은 다 영리하고 능력이 뛰어나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가짜였던 거야.”이은화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했다.“처음부터 내쫓아야 했어. 우리 집에 둬선 안 됐어. 엄마가 잘못했어.”이윤미가 조용히 말했다.“엄마가 그렇게 하신 것도 이해해요. 어쨌든 20년 넘게 키우셨잖아요. 하루아침에 모녀의 정이 사라질 수는 없죠.”“윤미야, 엄마가 그동안 너한테 겉으로 잘해주지 못했어. 엄마 많이 원망했니?”이윤미는 솜사탕을 반쯤 먹다 말고 입가에 묻은 설탕을 손등으로 쓱 닦았다. 이은화는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
이윤정과 정군호의 일 이후로, 이은화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예전에는 철저한 자기 관리 덕분에 칠십 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였고 오십 대 중반이라 해도 손색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마치 팔십이 넘은 노인처럼 보였다.이윤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부모의 결혼 생활에 대해 함부로 입을 뗄 수 없었다.“네 아버지는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어. 맞아, 나는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긴 했지만 바람을 피운 적은 없어. 그건 다 과거의 일이야.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기 마련이잖아? 네 아버지도 이씨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 곁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어.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과거일 뿐이라고 생각해. 이씨 가문에 들어온 후,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과거를 들추지 않았어. 그런데 감히 내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하는 거야.”이윤미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엄마, 엄마 마음속에 있는 그분, 분명 엄청난 분이겠죠?”“정말 뛰어난 사람이야. 네 아버지보다 백 배는 뛰어나. 엄마가 며칠 후에 먼 여행을 떠나는데, 만나러 간다던 옛 친구가 바로 엄마 마음속에 있는 그 사람이야.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데, 아직도 날 기억할지 모르겠어. 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남아 있는 감정으로 보면 그 남자는 이은화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큰언니만 있을 테니까.하지만 남아 있는 증오로 본다면 이은화가 어떤 모습이 되어도 그는 기억할 것이다. 그를 살아 있게 만든 것은 이은화에 대한 깊은 증오심이었으니까.“똑똑.”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가주님, 큰 사모님이 돌아오셨습니다.”서재 밖에서 집사가 말하자 이은화는 딸에게 말했다.“윤미야, 너는 먼저 나가거라. 아직 밥 안 먹었다면 아래층에 내려가서 먹고 와. 엄마가 부르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고.”“엄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몸 상하면 안 돼요.”이윤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머니를 바라
이윤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조윤을 바라보며 알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조윤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졌다.‘사진? 누구의 사진일까?’“형수님, 빨리 들어가세요. 어머니가 기다리시겠어요.”이윤미는 조용히 재촉하며 자리를 떴다.조윤은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부딪쳐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무서워도 자신을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조윤은 조용히 서재로 들어갔다.들어서자 바닥에 사진들이 흩어져 있었고 위엄 있는 시어머니는 책상에 앉아 손에 사탕 엿을 들고 조용히 먹고 있었다.조윤은 순간 당황했다. 위엄 넘치는 시어머니가 아이들이나 좋아하는 사탕 엿을 먹고 있다니. 아마도 작은 시누이가 사다 준 것이 분명했다.이은화는 며느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마지막 사탕을 다 먹고 나서 태연하게 말했다.“바닥에 있는 사진들 모두 주워.”“네, 어머님.”큰며느리는 서둘러 다가가 들고 있던 가방을 의자에 놓고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사진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사진을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진을 줍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고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조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분노가 치솟았다.사진 속 인물은 남편 정일범과 작은 시누이 이윤정이었다. 아니, 이제는 작은 시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여자였다. 이미 시어머니에게 쫓겨난 몸이니 그냥 막된 여자일 뿐이었다.“어머님!”조윤은 화가 치밀어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들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어머님, 일범 씨랑 저 막된 여자를 보세요. 둘이...”조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남편이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다.과거, 남편이 외도했을 때, 시어머니에게 들켜 크게 혼난 후 관계를 정리했다고 믿었다.조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아이들에게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외도쯤은 참을 수 있었다.무엇보다도 그녀는 이씨 가문 큰며느리 자리를 절대 다른
무엇보다 시부모님은 이윤정을 지나치게 아끼고 사랑했고 심지어 이윤미보다 훨씬 더 잘해주었다.이씨 가문에 시집와서 큰며느리가 된다는 것은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시어머니가 이윤정을 그토록 아꼈으니 조윤은 마음속으로 불편해도 겉으로는 그에게 잘 보여야 했다.“됐어.”이은화는 며느리의 말을 끊어 버렸다.“이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다. 내가 예전에 이윤정을 너무 아꼈어.”이 큰 저택에서는 모두가 이은화의 눈치를 보며 행동했다. 잘못이 있다면 그건 먼저 이은화의 잘못이었다.조윤은 조용히 말했다.“어머님은 윤정이가 가짜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아끼신 거잖아요. 저도 엄마가 된 사람이고 딸이 하나뿐이라,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요.”이은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아이들은 학교까지 잘 바래다줬어?”그녀는 손주들을 무척 아꼈다.사실, 이윤미가 처음 돌아왔을 때는 손녀를 키울 생각도 했었다. 처음엔 그녀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이씨 가문에서는 가주에게 딸이 없으면 손녀를 돌봐야했다. 가주 자리를 다른 친척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였다.“네, 다 잘 도착했어요.”“아이들 성적은 어때?”조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 중간 정도예요.”이은화는 며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조윤은 깜짝 놀라 서둘러 덧붙였다.“아이들 성적은 뛰어나진 않지만 머리는 똑똑해요. 절대 멍청한 애들이 아니에요.”이은화는 한숨을 쉬었다.“아들이 바람피웠으니, 난 네 편에 있기로 했다. 네가 뭘 하든, 어떻게 화내든, 난 네 편이야.”그녀는 다시 아들의 외도 이야기를 꺼냈다.손주들이 여러 명 있지만 모두 성적이 썩 좋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키우려 했던 장손녀조차 마찬가지였다.아마도 역대 가주들이 딸을 낳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아들도 후손이고 손녀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아들들은 딸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했고 손녀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맙습니다, 어머님.”시어머니의 지지를
“네 큰오빠한테 따지러 찾아가야지. 개도 못 고치는 버릇이라잖아.”조윤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이윤미에게 대답했다.화가 난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순식간에 거실을 지나 본채를 벗어났다.이윤미는 곧장 밖에서 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조윤이 정말로 큰오빠 찾으러 나간 것이다.이윤미는 음식을 위층으로 가져가 어머니께 드린 후, 핑계를 대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조윤을 따라간 이유는 그녀가 화가 나서 무슨 짓을 저지를까 봐 걱정해서가 아니었다.만약 큰오빠와 이윤정이 손을 잡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라면 형수가 손해를 볼 게 뻔했기 때문이다.그때, 방윤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가씨, 어디 가세요?”방윤림은 이윤미가 외출한 것을 알고 전화를 걸어 목적지를 물었다.“형수님이 불륜 현장을 잡으러 갔어요. 혹시 손해 볼까 봐 따라가서 도와주려고요.”방윤림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구경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구경도 하고 형수님도 도와야죠.”“이렇게 재미있는 일이라면 저도 참여하고 싶네요.”“방 비서님은 가만히 계세요. 어머니의 비서가 근처에 있어요.”방윤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선배가 있다니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다치지 마세요.”“걱정하지 마세요. 저 싸움 꽤 잘해요.”방윤림은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진짜 고수를 만나보지 못했죠? 그런 사람을 만나면 한 방에 쓰러질 수도 있어요.”“운전 중이라서, 그만 끊을게요.”싸움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것이 들통나자 이윤미는 운전 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었다.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명지 빌리지에 도착했다.조윤은 도착하자마자 잠시 멈춰 서서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화가 난 채로 나왔기에 남편이 산 집이 몇 동 몇 층인지 묻지 않았던 것이다.명지 빌리지는 꽤 넓은 아파트 단지였기에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웅웅웅.”조윤이 길을 헤매던 중, 휴대폰이 울렸고 가방에서 꺼내 보니 낯선
조윤은 아무 말 없이 바로 이윤정의 뺨을 후려쳤다.퍽!선명한 손자국과 함께 이윤정의 입가에서 피가 맺혔다.하지만 조윤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가방을 휘둘러 이윤정을 계속 때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더러운 년! 감히 내 남편을 유혹해? 염치없는 년, 더러운 년!”이윤정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둘은 뒤엉켜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다.두 여자의 시끄러운 싸움에 일요일 저녁 집에 있던 옆집 사람들도 소란을 듣고 하나둘씩 나왔다.하지만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말리지 못했다.조윤이 이윤정의 얇은 잠옷을 찢어버리면서 고함을 지르자 사람들은 이제가 눈치를 챘다.“이 더러운 년! 내 남편을 유혹해? 찢어 버릴 거야!”아내가 내연녀를 잡으러 온 상황임이 명확해지자 구경꾼들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야?”샤워를 마친 정일범이 소란을 듣고 뛰쳐나왔고 난장판이 된 거실 한가운데 두 여자가 서로 머리채를 잡고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뛰어들어 이윤정의 위에 있는 아내를 발로 차버렸다.방심하던 조윤은 남편에게 발로 차여 바닥에 나뒹굴었고 등에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이윤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윤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당겼고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세게 내려쳤다.조윤의 양쪽 볼이 얼얼해지더니 눈앞이 아득해졌다.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남편이 내연녀를 도왔다는 사실이었다.분노가 치밀어 오른 조윤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이윤정의 이마를 머리로 들이받았다.이윤정이 비명을 지르며 움찔하자 조윤은 다시 그녀 위에 올라타 두 손으로 목을 꽉 움켜쥐었다.그녀의 손아귀에서 이윤정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고 정일범이 다시 아내를 발로 찼다.하지만 조윤은 손을 놓지 않았고 남편의 발길질을 버티며 더욱 세게 이윤정의 목을 조였다.“놔! 죽이려는 거야?”정일범이 소리치며 아내를 붙잡고 잡아당겼다.이윤정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정일범은 필사적으로 아내의 손을 끌어당겼고 그제야
앞으로 정일범이 누구와 함께 있든, 조윤과는 상관없었다.이씨 가문의 큰며느리 자리도 이제 누구에게 가든,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단 하나. 살아남는 것이었다.“큰오빠,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이윤미는 정일범을 차갑게 꾸짖었다.“형수님을 거의 죽일 뻔했잖아!”“오빠가 그 여자랑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집에서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이윤미는 허리를 숙여 조윤의 가방을 집어 들어 안에 있는 사진 한 뭉치를 꺼내 정일범에게 던졌다.그러고는 조윤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형수님, 우리 돌아가요.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짐승들은 어머니께 맡기죠.”“윤미야...”바닥에서 사진을 집어 든 정일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고개를 들어보니, 동생은 이미 조윤을 데리고 떠났고 이곳에 더 이상 오래 머물러선 안 될 것 같았다.정일범은 황급히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허둥지둥 뛰쳐나왔다.이윤미는 기절한 이윤정을 남겨둔 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정일범 역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떠났다.심지어 방문조차 닫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주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결국, 이웃 중 한 명이 나서서 이윤정을 위해 방문을 닫아 주며 드라마는 끝났고, 구경하던 사람들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하지만 다음 날, 사람들은 전날 밤에 불륜 현장에서 들킨 내연녀가 16층에서 뛰어내렸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그 높이에서 떨어져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기에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머리가 깨지고 바닥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이 현장을 본 이윤정의 어머니와 두 오빠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사람들은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들이 조윤의 전화를 받고 이윤정이 망신스러운 짓을 했다는 걸 알고 밤새도록 고향에서 달려왔다고 했다.밤늦게 도착한 모자는 번갈아 가며 그녀를 심하게 꾸짖었다.불륜남의 아내한테 뚜들겨 맞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한 것이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고, 어머니와 오빠들에게까
“엄마의 건강도 점점 더 나빠지셔. 매달 의사의 진료를 받으셔야 하고, 주사 맞고 약도 드셔야 하기에 돈이 많이 들어.”정지훈은 뻔뻔스럽게 그들이 이곳에 온 진정한 의도를 이윤미에게 말했다.“맞아, 나와 형은 수입이 높지 않고 또 가족도 부양해야 해. 예전에는 집안의 모든 지출을 아빠가 내셨어, 네가 돈을 벌고 나서 너도 돈을 좀 가져왔었지. 지금은 아빠가...엄마는 수입이 없으시고 너는 또 우리 집을 떠났어.”.“나와 형이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기도 어려운데 엄마를 부양할 돈이 어디 있겠어? 엄마는 주사를 맞고 약도 드셔야 해.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우리도 부담하기 힘들어.”이윤미는 김현미를 바라보았다.김현미는 이윤미의 눈길을 피하며 그녀를 마주 보지 못했다.이윤미에게 돈을 요구하러 온 것은 두 아들의 뜻이었다.사실 김현미는 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윤미가 그들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릴 때 이윤미가 그들의 집으로 온 후 잘 대해주지 않았었다. 예전에 이윤미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미워도 돈을 벌면 생활비를 조금 주었다.나중에 진실이 드러나고 이윤미는 자신이 어릴 때 학대당한 이유를 알게 된 후 그들 가족에 대한 정이 사라졌다.남은 것은 원망과 미움뿐이었다.이윤미가 이씨 가문에 돌아간 후 김현미는 그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윤미가 점점 강해지고 이은화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윤미의 강세는 이윤정의 약세를 예시한다.그렇게 된다면 이윤정은 이씨 가문에서의 삶이 점점 힘들어진다.이윤정이 다시는 가주 자리에 앉을 기회도 없을 것이다.이 일을 알게 된 김현미는 마음속으로 이윤미를 원망하고 미워했으며 그녀가 자신의 딸을 열세에 몰리게 했다고 생각했다.오늘날 이윤정이 사고로 추락해 죽은 것도 그들과 관련이 있었다. 만약 그들이 이윤정을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흥분해서 실수로 추락해 죽지 않았을 것이다.두 아들은 이윤정이 죽었고 그들의 희망도 사라졌기에 이윤미에게 어떻게든 돈을 달라고 해야
이윤미는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다 먹지 못하면 포장하곤 하였다. 그녀는 누군가 비웃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농촌에서 자란 이윤미는 김현미의 집에서 잘 살지 못했기에 낭비하는 것을 싫어했다.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런 그녀가 당연하게만 느껴졌다.십몇 분 후.이윤미는 차를 운전해 이 씨 그룹에 돌아왔다. 회사 입구에 도착하자 몇몇 사람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그들은 바로 김현미와 그녀의 아들들이었다.그녀가 외출한 걸 몰랐던 그들은 한참 동안 회사 입구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고개를 돌려본 정지훈은 차에 탄 사람이 이윤미인 것을 보고 김현미에게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이윤미인 것을 확인한 김현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이윤미는 차를 멈춰 세웠다.그녀의 구역이었기에 이윤미는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그들이 이 씨 그룹 구역에서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이윤미는 그들이 가까이 다가서자 차창을 내리고 차가운 말투로 김현미에게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윤미야.”이윤미는 김현미가 간신히 짜낸 웃음이 우는 것보다 더 흉해 보였다.친딸이 어젯밤에 죽었는데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윤미는 차분하게 말했다.“웃기 싫으면 웃지 마세요. 당신 딸이 어젯밤에 죽었는데 지금 웃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아요. 비록 윤정이는 당신 곁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당신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요. 매번 당신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집에 있는 모든 좋은 물건을 윤정이에게 보내줬으면서요.”“윤정이에게 감정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죠. 딸이 죽었으니, 엄마로서 슬픈 것은 당연한 거예요,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어요.”수척해 보이는 김현미는 마치 열 살은 더 늙어 보였고 눈도 벌겋게 부어있었다.이윤미의 말처럼 친딸이 죽었는데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윤미야...”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양모는 울먹이며 말했다.“지난날...미안했어.”이윤미는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지난 일은 이미 지나갔어요, 다시 말하고 싶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윤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도 난 사업으로 예진 씨와 한 판 붙고 싶어요. 예진 씨도 제대로 배워야 할 거예요.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고, 언제든 판이 바뀔 수 있는 게 사업이에요. 아직 독하게 마음먹지 못한 것 같네요.”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윤미 씨만큼 못 하는 거 인정해요. 현재로서는 내가 윤미 씨를 따라갈 수 없어요.”하예진은 과거 직장 생활을 몇 년 하다가, 결혼 후 한동안 전업주부로 지냈다. 그녀가 다시 시작한 커리어도 작은 사업일 뿐이었다.하예진은 이번에 큰이모의 덕으로 강성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몇몇 가문들이 뒤에서 도와준다 해도, 그녀 스스로 능력과 인내가 없으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었다.그리고, 하예진이 사업 판에 발을 들인 시간도 이윤미보다 훨씬 짧았고, 무엇보다 강성에서는 금방 시작한 단계에 불과했다.이윤미는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지금 예진 씨 계약을 가로채고, 고객을 빼앗기 딱 좋은 타이밍이 아니겠어요? 그럼, 예진 씨한테는 큰 타격일 텐데. 미안하지만, 예진 씨가 일주일 동안 공들였던 계약, 내가 오늘 방금 따냈어요.”하예진은 눈빛이 번쩍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나도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우리 큰이모가 한 달 동안 성사하지 못한 계약, 내가 따냈거든요. 솔직히 윤미 씨랑 나는 친척이고, 또 이렇게 잘 통하는데, 저보다 어른인 윤미 씨의 사업을 가로채는 게 좀 미안했었거든요.”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덧붙였다.“윤미 씨가 제 걸 빼앗고, 나도 윤미 씨 걸 빼앗았으니, 이제 우리 서로 주고받는 셈이네요. 그러면 이제 미안해할 것도 없네요.”이윤미는 하예진을 향해 엄지를 들어 올렸다.“좀 하네요.”하지만, 하예진은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솔직히, 내가 두씨 그룹 계약을 성사할 수 있었던 건, 결국 두씨 가문이 내 뒤에 있는 몇몇 대기업들을 봐서예요.”이윤미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그게 뭐가 중요해요. 결국 계약은 예진 씨
이윤미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바로 하예진이었다.하예진은 마스크까지는 아니었지만,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모자를 벗어 가방에 집어넣었다.이윤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그래요.”하예진은 이윤미를 유심히 살폈다.“무슨 일 있어요?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요. 경쟁자가 사라졌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윤미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난 그저 가만히 있었어요. 내가 뭘 한 것도 아니고, 그녀가 내 손에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그리고, 기분이 좋아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잖아요.”“여기요.”이윤미의 말이 끝난 뒤, 하예진은 웨이터를 불러 커피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돌아가고,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한 입 맛 보더니 감탄하며 말했다.“여기 디저트 잘하네요. 너무 맛있는데요.”하예진의 말에 이윤미는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여기가 어디 호텔인데.”그리고 그녀는 또 물었다.“듣자 하니, 전씨 집안 도련님들이 모두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던데요?”하예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제가 잘 아는 건 저희 제부, 그리고 전이진이랑 전호영, 셋이 요리를 정말 잘해요.”“그리고,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호텔을 운영하니, 카페에서도 이렇게 맛있는 디저트가 나오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하예진은 살이 찔까 봐 걱정되어, 디저트를 한 입 먹고는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하지만, 이윤미는 하예진이 디저트를 좋아하는 것 같아 디저트 접시를 하예진 앞으로 밀었다.“맛있으면 더 먹어요.”하예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니에요. 맛만 보면 됐어요. 단 음식은 쉽게 살찌잖아요. 저 1년 동안 매일 뛰면서 운동 유지하고, 식단 조절에 일도 많이 하면서 겨우 다이어트에 성공했어요.”그녀는 다이어트에 성공한 이후, 요요가 오는 것이 두려워 철저하게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오고 있었다.“이제는 그 고생을
정일호가 그런 정군호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위로밖에 없었다. 사실, 정일호 역시 이윤정이 실족사인지, 친오빠에게 떠밀려 타살된 것인지 알고 싶었지만, 감히 조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이미 이은화가 그들한테 명확하게 뜻을 전달했기 때문이었다.“이윤정은 이미 죽었다. 이제부터 우리 집에서 그 애의 이름조차도 입 밖에 내지 마라.”정군호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아들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밖에 없었다.“퇴원하거든 네 별장으로 가지 않을 거다. 대저택으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다시 네 엄마를 화나게 하는 일도 없을 거야. 아비는 이미 70살도 넘었다.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너희들을 끝까지 지킬 거야.”“내가 있으면, 네 엄마가 화가 나더라도 나한테 화풀이할 테니, 너희들은 그나마 덜 괴로울 거야.”그리고, 정군호는 정일호에게 당부했다.“일호야, 너희 형제들도 조심해야 한다. 물론, 너희를 낳고 기른 엄마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이씨 가문보다 중요한 건 없어. 이씨 가문을 위해서라면, 너희 형제쯤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정군호의 말에 정일호는 침을 삼켰다. 이은화가 가문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가혹한 결정도 내릴 수 있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너희도 나와 윤정이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너희 힘으로 사업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이씨 가문을 벗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야.”정군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비 말을 명심하거라. 난 네 엄마와 50년을 함께 살았다.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뼛속까지 알고 있어.”“그리고 이윤미는 너희를 형제라고 생각도 하지 않아. 네 엄마가 움직이지 않아도, 언젠가 이윤미가 너희를 하나하나 쳐낼 거야. 그 애의 피에는 너희 엄마와 똑같이 냉혹함이 흐르고 있어.”정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빠, 저희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사업이 조금 어려워요? 저희도 여러 번 사업
수십 년 결혼생활 동안, 이은화는 세 아들보다 남편인 정군호를 더 치밀하게 관리했다. 그것은 이은화가 남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지, 정군호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 애가 죽은 건 그애 스스로 초래한 거야. 마음속에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 애가 나한테 복수하려고 또 당신 장남을 꼬셨어. 군호 씨가 보기에 이게 뭐인 것 같아? 스스로 생각 좀 해봐.”“당신 큰며느리가 지금 집에서 이혼한다고 난리 치고 있어. 이윤정, 그 애가 우리 가정을 파괴한 것도 모자라 당신 장남의 가정까지 망쳐놨어. 그 애는 죽어 마땅해. 그 애가 자살이든 타살이든,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우리 누군가 이씨 가문의 인맥을 이용해 이 일을 조사하려고 한다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야.”“누구든 내 허락 없이 이씨 가문의 세력을 이용하려는 자는, 가차 없이 벌받게 할 거야!”이은화는 단호하게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높이 들며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났다.정군호는 멀어져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공포와 분노로 가득 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쩔 수 없는 무기력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정군호는 이씨 집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은화의 앞에서 허리를 펼 수도,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아내의 기분이 좋아야만 정군호의 삶도 평온해질 수 있었다.분명, 두 사람에게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하지만 아내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냉랭해졌다. 언제나 남편인 정군호가 양보해야 했고, 그녀한테 맞춰야 했고, 그녀를 이해해야 했다.이은화가 병실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셋째 아들 정일호와 마주쳤다. 이은화의 표정은 어두웠고 정일호는 엄마가 걱정스러웠다.“엄마...”“그래, 일호야. 네 아빠가 퇴원하면 이제는 네 별장에서 지내도록 부탁해.”이은화는 정일호에게 당부하고 급히 떠났다.‘아빠를 더 이상 이씨 가문 대저택에 들이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정일호는 이은
“그건 단순한 우연이었어. 당신과 윤정이가 그렇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고. 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윤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윤미가 아무리 우리 곁에서 자라지 않았다고 하지만, 윤미야말로 우리의 딸이야. 우리의 피가 흐르고 있는 혈육이라고.”“어떻게 안 좋은 일이라고 하면 그저 온갖 누명을 윤미한테 다 뒤집어씌워? 당신이 그러고도 아빠라고 할 수 있어?”이은화의 말에 정군호는 말문이 막혔다.“...”한참 침묵 끝에, 정군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나와 윤정이가 그렇게 된 게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단 말이에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민 일이 아니라?”“그래. 우연이었어. 만약 어떤 음모가 있었다면, 그건 당신이 제일 아끼는 장남이 당신을 속인 거야. 당신 장남이 속였다는 거 믿을 수 있으면 계속 음모라고 생각해. 나도 말리지 않을 테니.”정군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장남이 자신을 배신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는 이윤미가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네 명의 자식 중에서도 유독 장남과 딸 이윤정을 가장 아꼈다. 그리고 장남과 정군호, 부자 둘 사이도 매우 좋았다.‘우리 장남이 나를 속였다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정군호는 장남이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여보, 나와 윤정이가 그렇게 된 게 단순하게 우연이었다면, 왜 윤정이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였어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하지만 않았어도 윤정이가 죽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이은화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친딸을 탓할 수 없으니, 이제는 아내인 나를 탓하기 시작하는 거야?”“뭐야, 당신이 그렇게도 아끼던 애첩이 죽어서 복수라도 하고 싶어? 지금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순간, 정군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그는 급히 손을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이은화는 냉정하게 말했다.“이윤정은 애초부터 내 딸이 아니었어. 우리 집안에서 자라며 원래대로라면 평생 겪어보지 못할 부귀영화
그 집안은 흡혈귀나 다름없었다.이윤미가 아니라 이윤정이야말로 이씨 가문의 친딸과 같은 존재이다. 이윤미에게 그런 짓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어려서부터 이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란 이윤정에게 그런 짓을 했으니 어찌 그런 굴욕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결국 그들은 이윤정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뜻밖의 추락사라고? 정일호는 절대 믿지 않았다.그는 이윤정이 친오빠에게 밀쳐 떨어졌다고 강하게 의심하고 있었다.병실에서 이은화는 막내아들이 따라준 미지근한 물을 두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인 후, 컵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을 바라보았다.“여보, 윤정이 죽었어. 알고 있지?”정군호는 초췌한 얼굴과 부은 눈을 감출 수 없었다. 거짓말할 수 없는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어젯밤에 알았어요. 셋째가 다녀왔다고 하더라고요. 윤정이는 머리가 깨져 그 자리에서 죽었다더군요. 의사가 도착해서는 응급처치도 없이 사망 선고를 내렸대요.”이미 사망한 상태였기에 응급처치는 무의미했다. 의사들은 현장에 도착해 검사를 마친 후, 이윤정의 사망을 선고했고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옮겼다.“여보, 윤정이는 절대 사고사가 아니에요. 친엄마와 친오빠가 윤정이를 밀어 떨어뜨렸다고 확신해요. 윤정이는 자살할 아이가 아니에요.”이은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정군호는 계속 말을 이었다.“여보, 윤정이와 20년 넘게 모녀로 지낸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윤정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주세요.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채로 남겨질 수는 없어요. 당신이 윤정이를 원망하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윤정이는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조차 한 적 없어요. 윤정이가 당신을 얼마나 공경했는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윤정이는 계략에 빠졌어요. 점점 몰리다가 결국 죽음에 이른 거예요.”정군호는 분노를 터뜨렸다.“윤미 때문이에요, 다 이윤미 때문이에요! 이윤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윤정이는 절망에 빠지지 않았을 거예요. 저와 윤정이를 계략에 빠뜨린 건 분명 이윤미예요. 친아버지인 나에게 애정도 없고 내가 윤정이를 귀하게
이은화는 이윤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았다.이틀 후면 퇴원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정군호는 마치 부모를 잃은 사람처럼 온몸이 축 처져 있었다. 눈은 붉게 부어 있었고 오랜 시간 울었던 흔적이 역력했다.어제 그의 곁에 함께 있어 준 사람은 막내아들이었다.정일호는 한때 여동생이었던 이윤정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명지 빌리지로 달려가 그녀의 친오빠들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이은화는 그런 부자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깊은 눈빛 속에 어떤 감정이 스며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가주의 시선이 닿자 부자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극도로 긴장했다.정군호는 막내아들에게 눈짓으로 이 무거운 침묵을 깨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러나 정일호는 선뜻 나설 수 없었고 그는 오히려 아버지가 먼저 말하기를 바랐다.눈빛으로 주고받은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지다, 결국 정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는 어머니를 위해 조용히 의자를 가져와 뒤에 놓고는 나직이 말했다.“엄마, 앉으세요.”이은화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정일호는 서둘러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어머니에게 건네고는 곧장 과일을 씻으려 했다.“과일은 괜찮다. 그냥 네 아버지랑 할 얘기하고 곧 회사로 돌아가야 해.”이은화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과일을 씻으려던 막내아들을 불러 세웠다.“그럼 아버지랑 이야기하고 계세요.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정일호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을 나섰다.아들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엄격했고 집이든 회사든 단 한마디로 결정을 내리는 법이었기에 그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반면 아버지는 온화한 사람이었고 아이들을 아꼈다. 무슨 부탁이든 가능한 한 들어주려 했고 때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어머니를 설득하다가 크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그렇게 형제들은 자연스레 아버지와 더 친해지게 되었다.하지만 여동생은 이제 세상을 떠났다.정일호의 마음속에서 이윤정은 언제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