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서원 리조트에는 손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모두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전씨 가문은 리조트에서 연회를 거의 진행하지 않았다. 연회를 열더라도 관성 호텔에서 진행했다.돌아가신 전씨 할아버지께서 아내를 위해 서원 리조트를 건축한 뒤로 전태윤의 부모가 결혼했을 때에만 서원 리조트에서 결혼식을 열었다.그 외 행사는 모두 관성 호텔에서 진행했다.곧 전태윤의 결혼식이 치러지자 전씨 할머니는 장손의 결혼식은 서원 리조트에서 진행해야 한다고 하셨다.오늘 관성 호텔은 영업하지 않았지만, 회사 직원들을 초대하여 관성 호텔에 가서 축하주를 마시게끔 했다.그가 결혼하는 것은 전씨 그룹 전체가 경사를 맞이하는 것과 다름없다.정윤하는 현장의 사람들과 안면이 없었기에 소지훈은 지인에게 부탁하여 정윤하를 돌봐달라고 했다. 물론, 정윤하가 소지훈이 소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되었다.소지훈은 미리 모두에게 그를 보면 소 대표라고 불러 달라고 당부했다.아무도 감히 소지훈의 당부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정윤하는 서원 리조트에 처음 온 것은 아니지만 다시금 서원 리조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정윤하는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을 필요 없었다. 소지훈이 전태윤을 따라 신부를 데리러 갈 때 그녀는 혼자 리조트를 거닐었다. 전태윤의 결혼식이었기에 서원 리조트도 결혼식 분위기로 아름답게 꾸며졌다.정윤하는 이 모든 것을 휴대전화로 찍어 놓았다.여기까지 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고 감탄했다.전태윤은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긴 웨딩카 행렬을 보더니 무척 놀라워했고 또 마냥 부럽기만 했다.그녀는 자라면서 수많은 결혼식에 참석해 봤지만, 처음으로 신부를 맞이하는 웨딩카가 100여 대나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연성에서는 신부를 맞이하는 웨딩카가 10대 정도 되면 꽤 많은 편에 속했다.역시 관성의 갑부는 남달랐다.이는 전씨 가문과 전태윤이 하예정에 대한 진지한 태도의 표현이었다.정윤하는 하예정이 소설 속 신데렐라 여주인공처럼 느껴졌다. 부모도 없
“고 대표님.”정윤하는 소지훈의 소개로 고현이 강성 고씨 그룹의 대표이지 고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 스캔들 남자 친구이기도 했다.전호영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정윤하도 무척 놀랐다.정윤하는 전호영이 게이일 줄은 생각도 못 했고 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이 전호영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지 않는 모습에 더욱 놀랐다.그러나 정말이지, 고 대표님은 정말 멋있다.하지만 전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의 신분과 지위로 놓고 보면 그가 만난 미남과 미녀가 정말 많을 텐데...아마도 고 대표님의 도도한 분위기가 전호영을 사로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정윤하는 고현을 위아래로 여러 번 훑어보며 마음속으로 전호영이 고현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다.“윤하 씨.”고현은 정윤하보다 나이가 많았고 또 여러 해 동안 업계에서 지내다 보니 사람 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정윤하가 고현을 훑어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현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해명하지 않았다.고현은 단지 고 대표의 신분으로 전태윤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왔을 뿐 전호영의 여자 친구 신분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지금 그녀가 대표하는 것은 고씨 가문이었다.게다가 고현은 여성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사실 정윤하만이 그녀를 그런 눈빛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전씨 가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모두 고현이 어떤 매력으로 전호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전호영이 수많은 여자를 제쳐두고 어찌 고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혼자세요?”“윤하 씨도 혼자 오셨군요.”정윤하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지훈 씨가 전 대표님 따라 신부를 맞이하러 갔어요. 저는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혼자 리조트를 구경하고 있었고요. 모두 낯선 사람들이라 어색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산책도 하니 너무 좋네요.”세상 물정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더라면 정윤하는 소지훈을 따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매우 값졌다.적어도 이렇게
고현은 입술을 오므리다가 입을 열었다.“내년 일은 내년에야 알겠지만, 계획은 종종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법이죠.”정윤하가 웃으며 말했다.“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죠. 계획된 일에도 예상치 못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으니 우리도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어요. 고 대표님, 같이 구경해도 괜찮을까요?”고현은 생각 끝에 정윤하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그녀는 직설적으로 말했다.“다들 제가 전호영 씨의 스캔들 남자 친구라고 생각해요. 윤하 씨는 소 대표님께서 초대하신 귀한 손님인데 저와 함께 걸어 다니면 윤하 씨에게도 다소 영향을 줄 수 있어요.”정윤하는 고현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저도 더는 강요하지 않을게요. 고 대표님, 참으로 의외네요.”“제가 전호영 씨와의 열애설을 인정한 것 같지 않죠?”정윤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고현도 보기 드문 웃음을 지었다.“호영 씨가 공개적으로 저에게 구애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와 호영 씨는 서로 묶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호영 씨가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서 저한테 구애했기에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요. 저도 이제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고 대표님... 호영 도련님 마음을 받아들인 거예요?”정윤하는 오지랖 넓게 물어보았다.고현이 피하지도, 화내지도 않고 현실을 직시한 태도를 보고 정윤하가 대담하게 물어본 것이다.고현은 정윤하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저도 제가 마음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요.”정윤하가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런 상황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예요.”“우리 생활은 우리 두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기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시선이 두렵지 않아요.”게다가 고현은 진짜 남자도 아니었다.전호영의 말을 빌려 쓰자면 고현이 20년 동안 남자로 가장해 살아왔다고 해도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맞아요. 두 사람만 행복하게 지내
고현은 고빈을 노려보며 경고했다.“그딴 생각을 하지 마. 저분은 소지훈 씨 여자야. 정윤하라고 하는데 연성의 정합 도장 사장님 딸이야.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혔고 지금은 정합 도장의 코치로 일하고 있어.”“시원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사람도 순수하고 바람기도 없는 분이셔. 이렇게 순수한 사람을 본지도 너무 오랜만이야.”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고현이 만나 본 사람들은 모두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어린아이들조차도 속셈이 꽤 있었다.아마 이 바닥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가면을 쓴 사람일지도 모른다.소지훈이 정윤하를 데리고 왔을 때 고빈이 현장에 없었기에 그는 정윤하가 소지훈의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누나의 말을 들은 고빈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소지훈 씨 여자였군. 정말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였어. 마음에 무척 들었는데. 소지훈 씨 몸에 병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여자를 가까이 할 수 없는 병이라고 들었는데. 여자한테도 마음이 없고 남자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하던데. 좋게 말하면 감정이 없는 병이라고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못 쓰는 거지.”고빈은 이 말을 고현 앞에서나 말 할 수 있었지 감히 밖에 나가서 말할 수 없었다.소지훈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누가 허구한 날 할 일 없이 소지훈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죽고 싶은 것도 아니고.고현은 또 동생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치료할 수 있는 병이야. 못 쓰는 거랑 다른 얘기지. 지훈 씨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여자를 만난다면 지훈 씨도 정상인과 다를 바 없어. 윤하 씨는 행운을 만난 거지. 평생 지훈 씨가 딴마음을 품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잖아.”“전 대표도 딴마음을 품지는 않을 거야.”고빈은 미래의 형부를 대신해 한마디 했다.고현이 말을 잇지 않았다.전호영의 조부 벌부터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 없었다. 전호영 나이 또래 형제들도 모두 젊은 미혼 남자들이었다. 미래에 마음이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미래의 세상은 그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정윤하 씨가 바로 지훈 씨를 치료할 수 있는
고빈은 혼자 중얼거렸다.“누나는 이미 시집갈 준비를 한 거야? 누나가 시집가도 여전히 고씨 그룹을 경영할 수 있잖아. 우리 부모님도 우리 두 자식밖에 없기 때문에 재산도 우리 두 사람이 나누어서 가져야 할걸. 고씨 그룹의 절반은 누나 재산인데 난 현재 우리 두 사람의 직위가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어.”고현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도 오랫동안 힘들게 일했는데 좀 물러나서 쉬면 안 돼? 넌 남자잖아. 한 집안의 기둥답게 책임을 짊어져야지.”“회사를 이어받는 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누나도 상속권이 있어서 우리 두 사람한테 다 책임이 있어. 누나는 언제 시집가려고? 누나가 신혼 여행하러 갈 때와 나에게 조카를 낳아줄 때 내가 회사를 책임질게.”“아니다. 호영 씨가 책임져야 해. 누나를 데려갔으니 호영 씨가 고씨 그룹을 책임져야 해.”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빈은 또 누나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호영 씨는 너한테 빚진 거 없어. 핑계 대지 말고 엄마 아빠 곁으로 돌아가. 업계 큰 인물들과 말을 나누지 않아도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것도 좋아. 그리고 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는지나 좀 봐. 네 나이도 적지 않은데 장가갈 때도 됐잖아.”“난 오히려 정윤하 씨가 괜찮다고 생각하는데...”누나의 노려보는 눈빛에 고빈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고빈은 정윤하에게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스타일의 미녀를 만나보니 본능적으로 감상하고 싶었고 접근하고 싶을 뿐 다른 생각은 없었다.“너의 여성 지인들은 이미 너무 많아. 정윤하 씨가 없어도 돼. 물론 지훈 씨 폭격을 견딜 수 있다면 정윤하 씨를 접근해도 돼. 그러다가 일이라도 생기면 나한테 도움 청할 궁리하지 말고. 난 너 대신 수습해 주지 않을 거야. 지훈 씨가 널 죽이지 않는 한 난 절대로 나서지 않을 거니까.”“너무 지독한 거 아니야? 내 목숨을 위해서라도 정윤하 씨를 멀리해야겠군.”고빈의 여성 지인이 한 무더기라 굳이 정윤하와 가까이 지낼 필요는 없었다.소지훈의 여
“네. 돌아왔어요. 비가 그칠 때 형수님이 들어오셨거든요. 조금 전에 비가 한바탕 내렸는데 어르신들이 형수님이 평소에 국물을 좋아하셔서 시집가는 날 비가 왔대요.”고현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런 말도 있었나요? 저도 평소에 국물을 즐겨 마시는데.”‘나중에 내가 시집갈 때도 비가 올까?’“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제 생각에는 공교롭게도 비가 와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은 정상이니까요.”전호영은 웃으며 그 꽃다발을 고현에게 건넸다.“신부의 꽃다발을 제가 빼앗았어요. 신부 꽃다발을 뺏은 사람이 바로 다음 결혼할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게 진짜였으면 좋겠어요.”“이 꽃을 고현 씨에게 드릴게요. 우리 형 결혼식 덕분에 고현 씨도 복이 가득했으면 좋겠어요.”고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호영이 건넨 꽃다발을 받으면서 말했다.“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호영 씨가 게이로 보였을 텐데 호영 씨가 이 부케를 받아서 저한테 주면 우리 두 사람 동성 연애가 또 한참 동안 화제가 되겠네요.”“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어요. 고현 씨만 제가 정상적인 남자라는 것만 알면 되니까요.”고현이 바로 말을 이었다.“호영 씨가 정상인지 아닌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호영 씨도 지훈 씨처럼 그럴지 누가 알겠어요.”“제가 언제든지 협조해 드릴 수 있어요. 제가 정상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셔야 저와 남은 인생을 잘 살 수 있을 거 아니에요.”고현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말실수한 것이 틀림없다.다행히 전호영은 고현이 부끄러워 할까 봐 이 주제에 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왜 여기 혼자 있어요?”“남들과 어울리는 게 싫어서 리조트를 혼자 구경하다 보니 여기 앉아 있게 됐네요.”고씨 가문의 식구 네 명 모두 전씨 가문에 와서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고현은 그녀의 경호원을 데리고 있지 않았다. 전호영과 함께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잘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다.전씨 가문의 땅에서 전씨 가문은 모든 손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처음엔
고현은 전호영을 보며 물었다.“큰형의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강성으로 갈 거예요?”“고현 씨가 강성으로 가는데 저도 당연히 강성에 가야죠. 고현 씨가 저를 따라 관성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저도 고현 씨 따라서 거예요.”고현이 바로 말을 이었다.“정말 한가군요.”“대학 졸업 후 제가 큰형을 도와 그룹을 운영했거든요. 제가 입맛이 까다롭고 요리도 잘했기에 큰형이 저한테 요식업을 이어받으라고 권했어요. 관성 호텔 음식이 제 입맛에 안 맞으면 손님들의 입맛도 사로잡을 수 없다면서요.”“제가 전씨 그룹의 요식업을 운영한 지 거의 10년이 되었어요. 저도 제 자리에서 일을 잘하거든요. 제가 관성에 없다 해도 다른 호텔들도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요. 하물며 제가 호텔과 총지배인 그리고 몇몇 부사장님들을 관리하고 있기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제가 나서서 처리해요.”“제가 강성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제 사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저로서는 올해 안에 집에 쇨 수 있는지, 할머니께 쫓겨나지 않는지가 가장 중요해요.”고현은 전호영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올해 설날에 전씨 할머니에게 쫓겨날 것이라고 들었다.“할머니께서 정말 호영 씨를 쫓아내고 설을 쇠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전씨 할머니는 참 좋으신 분이라 아마도 호영 씨를 위협하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호영 씨 형제들 모두 효도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할머니 말을 잘 들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호영 씨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는 전씨 할머니께서 호영 씨 형제들의 인생 큰일을 이렇게 계획하시는 건 좀 횡포한 것 같아요. 결혼은 억지로 할 수 없는 건데 할머니가 호영 씨 형제들 대신 아내를 골라주시잖아요. 그 여인들은 호영 씨 형제분들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르는 여인들이잖아요.”“호영 씨 형제들이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할머니께 효도하려고 그 여인과 결혼하여 평생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시지도 않으시던가요?”전호영은 화를 내지 않았다.“할
전씨 할머니 손주들의 인생사에 관여하는 일에 관해 고현은 이해하지 못했다.전호영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설명해 준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공감하지 못했다.아마도 고현이 전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고 전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고현도 전호영 형제들의 부모가 아들의 혼사를 걱정하지 않고 전부 전씨 할머니께 맡기는 모습을 발견했다.전씨 할머니가 골라준 며느리의 생김새가 어떻든, 집안 배경이 어떻든 전씨 집안 형제들의 부모는 모두 그대로 받아들였다.부모로서 무책임해서인지는 몰라도 이 모든 일은 전씨 할머니가 나서서 손주들의 인생 대사를 도맡았다.“저희 할머니의 명성과 인맥은 관성에서 최고예요. 예전에 우리 전씨 그룹과 성씨 그룹이 서로 적수로 싸웠을 때 우리 할머니가 나서기만 하면 성씨 가문도 어느 정도 체면을 세워줬을 거예요.”전호영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할머니가 오래오래 사시고 우리 아홉 형제가 가정을 꾸리고 증손자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셨으면 좋겠어요.”“할머니께서는 늘 할아버지에 관해 말씀하시며 영감이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자손들은 할머니 손에 맡기게 된 셈이죠.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무책임하다며 욕해요. 자손들이 이렇게 많은데 영감이 혼자 다리를 뻗고 하늘나라로 행복을 누리러 가셨다면서요.”“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도 매우 좋아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자손들을 걱정하셨기에 할아버지가 저승에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할머니께서도 이 세상에서 손주들의 혼사에 대해 많이 신경 쓰고 계세요.”“서원 리조트도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만든 집이에요.”고현은 전호영의 손을 맞잡았다.전호영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언급할때 그의 얼굴에는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그 모습을 본 고현은 전호영 형제들이 할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매우 깊을 것으로 추측했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 되였지만 아직도 할아버지를 언급할 때마다 그들은 모두 슬퍼했다.가장 괴로운 사람은 전씨 할머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