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아, 나 이제 임신해서 출산하려면 아직 8, 9개월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정남 씨 때문에 돼지가 될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복 받은 줄 알아.”그러자 심효진이 말했다.“언젠가 너한테 그 말을 똑같이 할 때가 오길 바란다.”하예정이 우빈의 손을 잡고 돌아오자 우빈은 심효진을 이모라고 부른 뒤 혼자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심효진은 손을 뻗어 우빈이의 작은 얼굴을 쓰다듬었다.“임신하면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도 많고 자유롭지가 않아. 그래도 우빈이처럼 귀여운 아기를 낳을 수 있다면 그만한 보람이 있을 것 같아.”“혹시 이모 배 속에 남동생이 있어요?” 우빈은 천진난만하게 물었다.그 말을 들은 심효진과 하예정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심효진이 우빈에게 말했다.“우빈아, 이모 배 속에 있는 아기 여동생 아니야?”그녀는 딸을 원했다.우빈은 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전 몰라요.”조금 전엔 아이가 본능적으로 한 말이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들인지 딸인지 몰라.”하예정은 심효진이 딸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웃으며 말했다.“딸일 수도 있고, 모연정 씨처럼 쌍둥이일 수도 있지.”“모연정 씨 부럽다. 나도 한 번에 아들딸 다 낳고 싶은데 아쉽게도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더니 아기집이 하나만 있다더라.”하예정이 말했다.“그럼 하나씩 낳으면 되겠네. 은서윤 씨도 모연정 씨보다 조금 늦게 출산했어. 원래는 은서윤 씨 아기가 모연정 씨 아기보다 더 컸는데, 모연정 씨가 쌍둥이를 임신하면서 아이가 일찍 태어난 거야. 그래서 은서윤 씨 아들이 모연정 씨 아기들보다 어려졌어.”“은서윤 씨도 아이를 낳았어? 아들이야?”심효진은 모연정이 출산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하예정은 그렇다고 대답했다.정겨울도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전이진은 정겨울이 A시로 돌아와 예씨 가문 넷째 사모님의 신분으로 예진 리조트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전태윤에게 며칠 휴가를 내고 정겨울에게 여운초의 눈 치료를 부탁하고 싶다며
“이제 준비하러 돌아가는 거야?” 심효진은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다가 친구에게 물었다.하예정이 답했다.“일단 우빈이 먼저 데려다주려고. 오늘 수업 끝나고 우빈이가 나 보고 싶다고 해서 강일구 씨가 데려온 거거든.”저녁에 남편과 함께 자선 행사에 가야 하는데 우빈이를 데리고 가기가 여의찮았다.“그럼 가, 난 여기서 가게나 볼게. 오랜만에 여기 앉아 있는데 원숭이 같은 자식들이 내 생각 했으려나 모르겠네.”심효진은 학생들을 보고 원숭이라고 말했다.“너 여기 남아서 가게 보고 있을 거면 소 대표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아?”심효진이 말했다. “말 안 해도 알 텐데 뭘. 게다가 밖에 경호원들 줄 서 있는 거 봐. 내가 말 안 해도 저 사람들이 하지 않겠어? 가게 보는 건 말리지 않을 거야. 앉아서 돈만 받잖아.”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넌 여기 있어. 난 우빈이 데려다줘야겠어.”“잘 가.”하예정은 조카를 데리고 서점 밖으로 나왔다.심효진은 절친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먹을 아이스크림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실망한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날이 이렇게 더운데 예정이는 왜 냉동실에 아이스크림도 안 넣어놨어.”심효진은 소씨 가문에서 아이스크림이 너무 차갑다고 허락하지 않기에 먹지를 못한다.그녀의 엄마조차 차가운 건 너무 많이 먹으면 안 좋다며 아이스크림을 적게 먹으라고 했고, 아예 안 먹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더운 여름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했던 그녀를 엄마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냉장고를 뒤져보니 과일과 채소만 있고 음료수 한 병조차 없었다.심효진은 잔뜩 실망해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가게에 뭔가 갈증을 해소할 만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그녀는 꾸물거리며 부엌에서 다시 프런트에 앉으려 했으나, 무슨 생각인지 다시 나와서 밖으로 걸어갔다.경호원들은 그녀가 나오자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날도 덥고 햇볕도 뜨거운데 여기 서 있지 말고 그늘진 곳을
심효진은 텃세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경호원들은 그녀가 진심으로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것이며, 소정남이 알게 된다고 해도 뭐라 하지 않을 걸 잘 알았다.진표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심효진이 말한 편의점으로 갔다.심효진은 진표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후 가게로 돌아가 기다렸고, 곧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이윽고 진표가 돌아왔지만 그는 빈손으로 가게에 들어와서 심효진에게 돈을 돌려주었다.“아이스크림은요?”심효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설마 아저씨네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는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겨울에도 그곳엔 아이스크림이 있었다.“사서 다들 나눠 먹고 있어요. 거스름돈 돌려드리는 겁니다. 아이스크림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진표는 심효진에게 돈을 건네며 아이스크림을 사줘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더운 날 먹는 아이스크림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심효진은 돈을 건네받으며 물었다.“한 사람씩 다 있어요?”“네, 다 있습니다.”사모님이 사주는 것인 만큼 그는 동료들 몫도 다 챙겼고, 설령 자신의 돈으로 산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 것까지 전부 샀을 것이었다.심효진은 누구나 다 있는데 왜 자기 것은 없냐며 묻고 싶었다.“감사합니다, 사모님.”진표는 다시 한번 심효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심효진은 마음속으로는 서운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더운데 더위 먹지 말고 서늘한 곳에 있어요. 저 어차피 어디 안 가니까 지키고 있을 필요 없어요.”대답을 마친 진표는 나가서 여전히 서점 근처를 지키고 있었다.심효진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왜 내걸 하나 살 생각은 안 했어. 누구나 하나씩 먹는다고 했잖아. 나도 사람이라고.”그러면서 밋밋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산부라는 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네가 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오고 아이스크림을 못 먹고 있어. 너 낳으면 많이 먹어서 지금 못 먹었던 걸 보충해야지.
우빈은 곧바로 다시 운초 이모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그제야 여운초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다소 당황한 듯 손을 뻗어 우빈이를 쓰다듬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우빈이 왔구나. 엄마랑 같이 왔어?”하예진은 가끔 꽃필 무렵에 와서 꽃 화분 몇 개를 사서 돌아가곤 했다.돌볼 시간이 없어서인지 하예진이 키우는 꽃은 늘 죽기 일쑤였고, 죽으면 다시 화분을 몇 개 더 사러 오는데, 그 과정에서 여운초에게 꽃 키우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이모랑 같이 왔어요. 운초 이모는 나랑 이모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내가 아까 한번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해줬어요.”여운초가 사과했다.“우빈아, 미안해. 이모가 생각할 게 있었는데 너무 깊게 몰입했나 봐. 너와 이모의 발걸음 소리를 못 들었어.”여운초는 하예정을 바라보았다. “예정 씨, 왔어요? 오늘은 웬일로 여길 다 왔어요?”“저녁에 태윤 씨랑 함께 자선 파티에 참석해야 해서 오후에 가게 문 닫고 집 가서 준비 좀 하려고요. 마침 오늘 오전에 우빈이가 저랑 있다가 데려다주는 길에 들렸어요.”하예정은 의자 두 개를 직접 옮겨 하나는 조카에게 건넸다.자리에 앉은 후 여운초에게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집안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여운초는 사촌 남매들을 해고했다. 그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릴 때 마침 전이진이 자리에 있었던 덕분에 그들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고, 오히려 여운초에게 2백만 원 배상까지 했었다. 그 뒤로 가게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진 않았지만 여기서 멈출 그들이 아니었다.여운초의 두 고모는 계속해서 갖은 방법으로 여운초를 괴롭혔고 최씨 가문과 김씨 가문의 형제들을 여씨 가문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온갖 술책을 다 쓰고 있었다.“그 사람들은 날 협박하지 못해요.”이렇게 말하는 여운초의 생각은 확고했다. 그녀가 물러나기 전까지 그들은 절대 회사로 돌아와 출근할 수 없었다.“천우가 시험을 잘 못 볼까 봐서 걱정이에요.”내일 여천우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하예정은
그러자 하예정은 따뜻한 물을 석 잔 부어 하나는 조카에게 건네고, 두 잔은 들고 와서 여운초의 손에 한 잔 쥐여주었다.두 사람은 따뜻한 물을 들이켰다.“운초 씨, 물어봐요. 나한테 궁금한 게 뭐에요?”“전이진 씨가 요 며칠 꼭 실종된 사람처럼 안 보이는데 혹시 출장 갔어요?”하예정은 전이진의 행방을 묻는 여운초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전이진은 정겨울에게 여운초의 눈을 낫게 해달라고 간청하러 A 시에 갔고, 여운초가 실망할까 봐 정겨울에게 여운초의 눈을 낫게 해준다고 약속할 때까지 여운초에게 말하지 않았다.여씨 가문의 작은 고모도 여운초의 눈을 치료하기 위해 신의 사제를 찾아다녔지만, 전이진처럼 인맥이 넓지 않았던 그녀는 정겨울이 A 시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빠르게 접하지 못했다.신의 사제는 여운초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전이진은 여운초가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정겨울의 긍정적인 대답을 얻지 못한다면 여운초는 얼마나 실망할까.말도 안 하고 사람이 사라지니 여운초는 당연히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조금 전에도 전이진이 어디로 갔을지 짐작하다가 넋을 잃은 탓에 하예정이 들어오는 소리도 못 들었던 것이다.하예정에게 질문을 던진 후 여운초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평소엔 하도 들러붙어 짜증 나고 무시하고 싶었는데, 이틀 동안 안 보인다고 어디 갔는지 묻고 있네요.”전이진이 싫은 게 아니라, 앞이 안 보이는 자신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괜한 걸림돌이 되기 싫어 다가오는 전이진을 거부하는 것이었다.“이진 씨가 얘기 안 했어요?”하예정이 묻자 여운초는 고개를 저었다.“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이틀 동안 나타나지도 않고, 전화도 안 하고, 출장이라도 간 건가요?”“네, 일이 있어서 관성을 떠났어요. 며칠 후면 올 거예요.”전이진이 여운초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예정도 숨기는 쪽을 택하고 여운초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았다.전이진에게 돌아와 여운초에게 감동을 선사할 기회를 남겨주는
하예정은 한동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여운초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전태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유는 집안 배경 때문이었고, 여운초는 본인의 신체적 건강 문제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하예정은 그녀를 위로했다.“운초 씨. 눈 나을 수 있어요. 이진 씨가 눈 치료할 수 있도록 최고의 의사를 데려올 거예요.”전이진은 지금 A 시에 갔고, 그쪽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여운초는 곧바로 우울한 기색을 떨쳐내고 평소대로 미소를 지으며 하예정에게 말했다.“예정 씨 이런 얘기는 그만 해요, 우리. 이진 씨가 조금 더 오래 출장 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한동안 떨어져 있는 셈이고, 서로 냉정하게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도 포기할지도 몰라요.”전이진이 싫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도 여운초는 내키지 않았다.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이 훌륭한 전씨 가문 도련님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보다 더 좋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하예정이 말했다.“이진 씨가 진심이 아니고서는 운초 씨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이모, 우리 언제 가요?”갑자기 우빈이 끼어들었다.어린아이는 장난감도 없고 놀 거리가 없는 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우빈도 마찬가지였다.운초 이모 가게에 있는 꽃들은 전부 다 감상을 마쳤다.잠시 가만히 앉아있던 우빈은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여운초가 웃으며 말했다.“우빈아, 운초 이모 가게 재미없어?”“재미없어요.”우빈은 솔직하게 말했다.하예정도 웃으며 말했다.“장난감 안 가지고 나와서 오래 못 있네요. 운초 씨, 그럼 일 봐요. 전 이만 가볼게요.”“그래요.”여운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모와 조카를 배웅하려고 했다.“운초 씨, 배웅할 필요 없어요. 가게에 들어가 있어요. 우리 가요.”“운초 이모 안녕.”우빈이는 여운초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알아서 차 뒷좌석에 올라앉아 안전벨트를 묶었다.여운초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하예정은 우빈이를 언니 집에 돌려보내고 언니가 세 들어 사는
우빈이를 안고 집으로 들어온 노동명은 문을 닫은 다음 웃으며 아이의 질문에 답했다.“동명 삼촌은 사장이라 출근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아무도 삼촌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월급 깎일 일도 없어.”짧게 대꾸하던 우빈이 이윽고 다시 물었다.“우리 이모부도 사장인데 왜 우리 이모부는 매일 출근해요?”“... 이모부 회사가 동명 삼촌 회사보다 규모가 좀 더 커서 할 일이 더 많아. 그래서 매일 출근하는 거지.”우빈이는 곧이곧대로 믿었고, 노동명은 아이를 내려놓았다.궁금한 게 많은 꼬맹이들의 질문에 정신 차리지 않으면 말문이 막히기 십상이었다.“예진아.”꽃다발을 들고 하예진에게 다가온 노동명은 깊은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하예진을 바라보며 꽃다발을 건넸다.“노 대표님, 저는 꽃 안 좋아하니까 다음부터는 안 주시면 안 될까요?”하예진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 번 거절했는데 노동명은 그래도 꽃을 선물했다.노동명은 그녀가 꽃다발을 받지 않자 꽃병을 찾아 꽃다발을 꽂으며 말했다.“빈손으로 오기 그러니까 꽃다발을 들고 오는 거지.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동명 삼촌, 왜 우리 엄마한테는 꽃 주고 저한테는 안 줘요? 나도 꽃 좋아하는데.”꼬맹이가 옆에서 끼어들었다.“우빈아.”하예진이 아들의 이름을 부르자 노동명이 웃으며 말했다.“동명 삼촌이 깜박했네. 다음부턴 우리 우빈이 꽃도 사 올게.”우빈이는 알 듯 말 듯 한 시선으로 노동명과 엄마를 번갈아 보았다.아빠는 동명 삼촌이 자신에게서 엄마를 빼앗으려 한다며, 동명 삼촌에게 엄마를 빼앗기면 이제부터 우빈이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가 될 거라고 했지만 우빈이는 아빠의 말을 믿지 않았다.동명 삼촌이 이렇게 잘해주는데 어떻게 엄마를 빼앗아 간단 말인가.동명 삼촌은 자신과 엄마의 가족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뿐, 엄마를 빼앗아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심지어 아빠는 동명 삼촌이 엄마를 찾으러 오면 아빠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그
한예진은 윤미라와 나눈 대화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노동명에게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노동명은 결국 윤미라 입에서 그 얘기를 듣게 되었다. 윤미라가 하예진에게 보증금을 빼 이사를 하라고 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하예진에게 주우빈을 데리고 관성을 떠나라고 한 사실을 안 노동명은 화가 치밀어 윤미라와 크게 싸웠다. 윤미라와 노동명 모두 분노에 휩싸였다. 어쨌든 두 모자는 그 누구도 물러서지도, 단념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하예진은 노동명을 힐끔 쳐다보더니 할 일을 마저 하며 말했다. “제 탓 아니에요. 전 그렇게 많은 걸 희생하지 않을 거예요.”노동명이 피식 웃어버렸다. 그는 바로 그런 하예진이 좋았다. 휴대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 주우빈은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우빈은 하예진의 휴대폰 연락처 속 제일 위에 하예정의 전화번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예정이 곧 전화를 받았다. “언니, 무슨 일이야?”하예정은 하예진이 전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모, 저예요. 우빈이.”앳된 조카의 목소리에 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 “우빈이구나. 우빈이가 혼자 이모에게 전화한 거야?”“네. 제가 엄마 휴대폰을 가지고 몰래 방에 들어와서 이모에게 전화했어요.”“우빈이 이모에게 할 얘기가 뭐예요?”어린아이가 방에 몰래 숨어서 전화하다니. 하예정은 조카가 점점 더 기특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장에서 사부를 따라 무술을 배우더니 주우빈의 담력이 점점 커졌다. 어린 나이에 똑부러지게 말을 잘해 점점 더 사랑스러워졌다. “이모, 아저씨가 또 왔어요.”“동명 씨 매일 가던 거 아니었어?”하예정이 알기론 노동명은 매일 하예진을 만나러 갔다. 주우빈 대답했다. “매일 오긴 하지만 아빠가 그러는데 아저씨는 우빈이에게서 엄마를 뺏으려고 오는 거래요. 아빠가 아저씨가 오시기만 하면 전화하랬어요.”주우빈의 말을 들으며 하예정은 속으로 주형인을 욕했다. 주형인은 하예진과 이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현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지금 그들 부
“할머니, 어디 가시려고요?”소정남은 전씨 할머니가 나가려는 것을 보면서 묻고 있었다.전씨 할머니가 대답하셨다.“너무 오래 나가 놀았는데 산기슭에 있는 옛 친구들을 찾아가 이야기도 나누고 카드놀이도 해야지.”전씨 할머니는 귀부인티를 내지 않고 산기슭에 있는 노동자들의 부모님들과 잘 어울려 다니셨다.그 할머니들도 전씨 할머니와 이런저런 소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이야기들 나누렴. 난 나가야겠어. 좀 이따가 밥 먹을 때 날 부를 필요 없어. 사람을 시켜 산기슭에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해. 옛친구들과 함께 먹게. 어묵 같은 거 있으면 더 좋고.”“할머니,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 음식은 적게 드세요.”전씨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 알았어. 안 먹을게.”“제가 할머니께 드시지 말라고 하면 할머니께서는 저를 욕하시더니 왜 예정이가 드시지 말라고 하면 바로 수긍하세요?”전태윤이 일부러 투덜거렸다.그는 전씨 할머니가 손자며느리가 생겼다고 손자를 안중에 두지도 않으신다고 불평했다.전씨 할머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떠나셨다.할머니는 하예정을 유난히 좋아하셨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듯했다.그러나 손자는 너무 많아서 그다지 소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떠들썩한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저녁 6시가 넘으니 날이 금세 어두워졌다.전씨 가문의 세 사모님은 여운초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하러 집을 나섰다.전이진은 리조트 입구까지 배웅하며 끊임없이 명해은에게 당부했다.“엄마, 우리 운초 씨를 잘 돌봐주세요. 남들이 괴롭힘당하게 하지 말고요.”“알았어. 누가 감히 우리 며느리를 건드리면 내가 가장 먼저 그녀를 용서할 수 없을 거야!”명해은은 전이진의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있었다.전이진은 또다시 들이밀었다.“아니면 제가 따라갈래요.”“네 아버지랑 다 집에 있는데 네가 따라가서 뭐 하게?”명해은은 운전 기사에게 차를 몰아라고 지시했고 창문을 눌러 아들에게 고개를 내밀어 말을 건넸다.“날도 어두워지고
전창빈은 할머니께 말씀드렸다.“할머니께서 조금 전에 저 보고 할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집에 방금 돌아오셨는데 물도 아직 한 모금 마시지 않으시고 바로 내려가셔서 카드놀이도 이야기도 나누시겠다고 하시다니.”하예정도 말했다.“할머니, 그 할머니들도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할머니께서도 오랜만에 돌아오셨는데 그 할머니들의 돈을 전부 따버리면 안 돼요.”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돈 내기하는 거 아니야. 카드놀이에서 지는 사람의 얼굴에 낙서하면서 노는 거지. 누가 얼굴에 가장 많이 그려지는지 지켜보면서 노는 거야.”현장의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노인네의 세계를 그들은 아직 잘 모른다.어르신들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재치다.곧, 소정남과 심효진 부부, 그리고 소정남 부모님도 함께 들어왔다.집안이 더 시끌벅적해졌다.전씨 할머니는 소정남의 아버지 소균혁을 보더니 물었다.“셋째야, 당신 집 맏이가 사돈집에 갔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안 왔어?”소정남의 아버지는 형제 중 셋째였다.전씨 할머니는 예전부터 줄곧 소균혁을 셋째라고 불렀다.“설전에야 돌아온다고 하셨어요.”소지훈은 정윤하에게 고백했고 정윤하도 소지훈에게도 약간의 관심이 가진 듯 했다.소지훈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정윤하는 수차례의 고민 끝에 결국 소지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며칠 만에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소균성 부부는 연성에서 너무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듯했다.하마터면 홀아비가 될 뻔한 아들이 드디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생겼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소균성 부부의 마음에 걸려 있던 큰 돌도 마침내 땅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하여 너무 기뻐서 관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비록 관성이 매우 춥고 가끔 눈이 온다고 해도 소균성 부부는 따뜻한 관성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차라리 정씨 가문에 틀어박혀 불을 쬐고 싶어 했다.세 식구가 정씨 가문 사람들이 정윤하와 소
“여보, 오늘 밤은 내가 선물한 보석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가.”“보석 반지만 이진 씨가 선물한 걸 착용하면 되잖아.”전이진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래, 그럼. 이것만은 우리 엄마에게 양보할게.”여운초는 웃긴다는 듯 그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었다.“참, 당신과 형수님께서 용씨 사모님도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한다고 하던데.”전이진은 문득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목소리와 몸매가 여운별과 닮은 그 젊은 사모님을 언급하자 여운초의 웃고 있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마침 잘 지켜볼 수 있게 됐네.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지켜보면 허점을 잡히기 마련이야.”“내가 시간 날 때 사람 시켜서 알아봤거든. 근데 그 사모님이 정말로 용씨 사모님이더라고. 남편이 정말로 용씨였어.”“응.”여운초는 용씨 사모님이 여운별이라고 의심은 하고 있지만, 증거는 없었다.만약 용씨 사모님과 여운별이 같은 사람이라면 분명 음모일 것이다. 만약 음모라면 배후에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 모든 상황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여운초는 10년 동안 어둠 속에서 살면서 인간성을 꿰뚫어 보게 되어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지금 여운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그녀의 친어머니마저도 그녀가 죽기를 원했기에 그녀는 정말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나와 여운별은 20년 동안 자매로 지내면서 많은 일이 있었거든. 남들이 모르는 여운별의 사소한 습관들도 난 전부 잘 알고 있어. 아마 여운별 본인도 모를 수도 있어. 내가 몇 번만 더 만나고 접촉해 보면 분명 허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용씨 사모님도 우리 앞에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만약 정말로 여운별이 가장한 거라면 이렇게 단기간에 여러 생활 습관은 고칠 수 없을 거야.”전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동일 인물이 옳든 아니든 용씨 사모님의 실체를 알기 전에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해.”“나도 알아. 아주버님과 형수님이 곧 돌아오실 거야.
그랬다. 전태윤도 하예정과 딸을 낳고 싶었다.특히 그가 매일 예지연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때마다 늘 딸이 갖고 싶었다.예준성의 그 보배 딸은 점점 더 귀여워지고 있었다. 옥같이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에 눈도 어찌나 동그란지 여기저기 눈동자를 굴려서 볼 때면 앞으로 분명 똑똑한 아이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예준성도 매일 SNS에 그의 보물단지 예지연의 사진을 몇 번이고 올린다.물론, 매일 예씨 가문의 대표 SNS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예준성은 소중한 딸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매우 아까워했다. 심지어 A시 사람들은 예씨 가문의 손자 세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다.예지연이 너무 어려서 어른들의 보호를 잘 받고 있었기에 언론에 아이의 정면 거의 찍히지 못했다.전태윤도 예준성의 SNS를 볼 수 있는 것도 하예정과 모연정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기 때문이지, 그와 예준성의 친분으로는 볼 수 없었다.그는 예준성이 전씨 가문이 딸을 낳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의 소중한 딸을 자랑한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때때로 예준성이 영상을 보내면 전태윤은 예준성이 보낸 영상을 반복해서 보곤 한다. 심지어 영상 속으로 들어가 예지연을 집으로 데려가 그의 딸로 삼고 싶은 충동까지 느끼고 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들은 할머니 일행이 돌아오면 모두 서원 리조트로 출발하려고 했다.어젯밤에 리조트로 돌아온 전이진 부부는 지금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다.여운초가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고 전이 진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가끔 여운초가 남편에게 물었다.“이진 씨, 이 드레스를 입으면 어때?”“좋은데. 당신은 어떤 옷을 입어도 너무 예쁘고 너무 어울려.”전이진이 웃으며 말했다.그는 일어나서 여운초의 등 뒤로 가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여보,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우리 엄마와 함께 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당신을 잘 보호할 수 있을 거야.”“처음으로 당신 아내의 신분으로 어머님을 따라
하예정은 무언가 떠오른 듯 전태윤에게 말했다. “태윤 씨, 우리도 리조트에 이틀 정도 지내러 갈까요? 주말에 출근도 안 하고 서점도 주말에는 문을 안 열잖아요.” 예전에는 서점만 운영할 때 주말에도 문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사업이 커지면서 서점은 그냥 하예정과 심효진의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돈을 더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애정으로 운영하는 곳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았다. 전태윤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는데 친구인 소정남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를 읽고 나서 그는 휴대폰을 하예정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그래, 우리도 리조트에 가서 주말을 보내자.” “어머님, 아버님, 할머니도 오늘 가시니까 소정남 씨와 효진이도 불러서 점심 같이 먹어요. 샤부샤부 어때요? 오랜만에 샤부샤부 먹고 싶어요.” 하예정이 자주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는 것에 전현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이의도 없이 받아들였다. 하예정이 자신의 어머니와 꽤 닮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한 것 같았다. 예전에 전씨 할머니가 일부러 하예정을 자신의 은인으로 만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덕분에 온 가족이 하예정에게 감사하게 되었고 전씨 할머니는 장남인 전태윤에게 하예정과 결혼하라고 했다. 전현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의 수법은 정말 대단해. 손자들도 어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다행히 전태윤과 하예정은 사이가 좋았으며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하예정을 아끼는 전태윤은 당연히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그는 소정남에게 답장을 보냈다. “예정아, 우리 아침 먹고 리조트로 가자. 소정남이랑 효진 씨도 리조트에서 만나자. 샤부샤부는 사람이 많아야 더 맛있잖아. 예준하 씨랑 소현 누나도 불러야겠다.” 전태윤이 제안했다. 하예정은 성소현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성소현은 사양했다. 그녀는 예준하와 A 시로 날아가 예진 리조트에서 며칠 지낼 예정이었다. 예준하를 계속 관
전태윤은 그를 속인 거였다. 하예정은 주우빈에게 답장을 보냈다. [눈이 왔구나. 우빈이 운이 좋네, 갔는데 바로 눈이 와서 진짜 눈을 볼 수 있게 됐구나.] [눈사람도 만들 수 있네. 이모는 지금까지 눈사람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 [아침 맛있게 먹었어? 옷 많이 입고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너희 셋째 작은 아버지는 여행 갔는데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있어야 돌아올 거야. 네가 따라가면 유치원에 못 가잖아.] 다행히 전호영은 빨리 도망친 덕분에 주우빈에게 붙잡히지 않았다. 하예정의 답장을 받은 주우빈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하예정과 주우빈은 30분 동안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친 후, 전태윤은 중얼거렸다. “오늘에서야 우빈이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 알았네. 당신이랑 30분 동안이나 이야기하다니.” 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 “우빈이는 앞으로 수다쟁이가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따뜻한 남자가 될 거예요.” 따뜻한 남자에다 수다쟁이라니... “9시가 넘었네요. 부모님과 할머니도 일어나셨을 거예요. 우리도 얼른 서둘러야죠. 창빈 도련님은 오늘 원림성의 A 시로 가는 거예요?” 전태윤은 먼저 그녀의 옷을 가져오며 말했다. “월요일에 갈 거야. 이틀 정도는 집에서 할머니랑 시간을 보내려고.” 10여 분 후, 부부는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 거실 소파에는 전현림 혼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전씨 할머니와 장소민, 그리고 어제 형의 집에서 잔 전창빈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님.” 부부는 전현림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전현림은 부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일어났구나. 아침 식사 준비해 뒀어. 아직 따뜻할 거야. 먹으러 가.” “엄마랑 할머니는 어디 계세요?” 전태윤이 물었다. “창빈이는 아직 안 일어났어요?” “할머니가 엄마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창빈이도 같이 갔어.” “이렇게 추운 날씨에 할머니가 산책하러 나가시다니.” 전태윤이 말했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예진아, 늦었어. 얼른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야겠어. 내일 아침 같이 먹자.” 노동명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다. 하예진은 그의 얼굴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동명 씨, 잘 자요.” “잘자.” 하예진은 그를 밀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직접 휠체어를 조종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달콤한 미소였다. 그날 밤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지나갔다. 주말 아침, 출근할 필요도 없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평소 일찍 일어나던 전태윤도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다. 그는 침대에 늘어져 아내의 따뜻한 핫팩이 되어 주었다. 관성의 기온이 떨어져 정말 추웠지만 사실 기온은 아직 10도 정도였다. 낮에는 최대로 10도 중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관성 사람들은 너무 추웠다. 많은 사람들이 서둘러 인터넷으로 두꺼운 옷을 주문했다. 관성 사람들이 옷을 주문하면 판매자들은 재빨리 발송했다. 며칠 후 주문이 취소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관성의 추위는 찬 공기가 남하할 때 며칠 동안 추워지고 며칠이 지나면 다시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발송이 늦으면 날씨가 풀리고 나서 두꺼운 옷을 입을 필요가 없어지면서 주문을 취소하게 된다. 방에는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가장 추운 며칠 동안 전태윤은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그는 보일러를 켜면 하예정이 더워서 자신의 품에 안기지 않을까 봐 일부러 켜지 않았다. 그가 하예정이 자신의 품에 안기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건 절대 예정이에게 들키면 안 돼. 아니면 또 교활하다고 할 거야.’ ‘카톡!’ 하예정의 카톡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잠에서 깼지만 움직이기 싫어서 전태윤에게 말했다. “여보, 누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는지 좀 봐줘요. 너무 시끄러워요.” 전태윤이 말했다. “내 생각엔 우빈일 거야.” “우빈이는 엄마랑 있어서 이렇게 일찍 나한테 메시지를 보내지 않을 거예요. 아직 꿈나라에 있을지도 몰라요.”
시도 때도 없이 간식을 꺼내 그녀에게 먹여줬다. 영화가 끝날 즈음, 하예진은 그가 챙겨준 음식으로 배부르게 먹고는 그를 보고 말했다. “이제 됐네요. 야식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예요. 또 산책하면서 소화라도 좀 시켜야겠어요.” 노동명이 일어나자 하예진과 보디가드가 그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노동명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를 밀면서 호텔까지 걸어가. 산책하면서 소화 시키는 거지.” 하예진도 웃으며 말했다. “그러죠 뭐. 그런데 걸어가면 길을 못 찾을지도 몰라요. 길을 잘못 들면 우리 둘 다 강성의 길거리에서 하룻밤을 돌아다녀야 할 거예요. 저 원망하지 마요.” “그럴 리 없어.” 지금은 밤이 더욱 깊어졌다. 영화관을 나오니 거리의 떠들썩함은 사라지고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하예진은 노동명을 천천히 밀며 걸었다. 보디가드들은 두 사람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보호했다. 걷다 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명 씨, 눈이 오네요. 빨리 차 타고 호텔로 돌아가요.” 어느 정도 걷자 하예진은 더 이상 배가 부르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오니 길이 미끄러워 운전하기 어려울까 걱정되었다. “그래.” 노동명은 아무런 이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에게는 그녀의 말이 곧 정답이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이내 그들은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주우빈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강일구는 주우빈과 함께 있었다. 하예진이 돌아오자 강일구는 방으로 돌아갔다. “우빈이 자고 있어?” 노동명은 방에 들어와 주우빈을 보았다. 아이가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불을 살짝 덮어주며 말했다. “보일러 온도는 적당하면 돼, 너무 높일 필요 없어. 우빈이가 땀을 흘리고 있잖아.” 아이는 더우면 이불을 걷어차는 버릇이 있었다. 하예진은 온도를 조금 낮췄다. 노동명은 주우빈의 땀을 닦아주고 이불을 살짝 걷어내 더 덥지 않게 했다. 노동명의 행동을 보며 하예진의 눈에는 애틋함이 가득했다. 그는 주
노동명은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그녀의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한 번, 손바닥에 한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하예진은 다급하게 손을 뺐다. 그녀의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영화관 안은 어두웠고 아무도 그녀를 주시하지 않아 그녀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동명 씨, 진지하게 좀 굴어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노동명은 늘 거칠고 대범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쳤으며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그런 그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하면 그녀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마치 어린 소녀처럼 변했다. 하예정은 언니가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은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명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진지해질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예진아, 앞으로 네가 휴식을 원할 때, 쇼핑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서 바람을 좀 쐬고 싶다면 나에게 말만 해줘. 아무리 바빠도 내 손에 있는 일을 내려놓고 너와 함께 나갈 수 있어. 일도 중요하지만 너의 행복이 더 중요해. 나는 돈도 충분히 있어. 예전에 번 돈이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했어. 지금 일을 하는 건 그냥 시간을 보내고 약간의 용돈을 버는 정도야. 나에게는 너와 우빈의 행복이 가장 중요해.” 하예진은 그를 꾸짖듯 말했다. “동명 씨가 말하는 약간의 용돈은 다른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도 못 버는 금액이에요. 동명 씨, 일부러 자랑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하예진이 식당을 운영하며 매출이 좋아 월 순이익이 꽤 높다고 하더라도 그가 버는 돈에 비하면 그녀의 이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잇, 비교하니까 열 받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하며 온 힘을 다해야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다. 일반 직장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노동명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젊은 시절 고생하며 노력한 결과다. 노동명은 업계에서 십여 년을 뛰어다니며 오늘의 성과를 이루었다.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