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진은 칼을 든 채 주형인의 뒤를 쫓아갔다.주형인은 하예진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결혼한 뒤 그녀는 늘 조용하고 소심했다. 최근 한동안 주형인이 계속 하예진에게 욕설을 퍼부어도, 아주 심한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대들며 그와 싸웠다.이번에 그가 손을 대자 하예진은 무슨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같이 싸우려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칼까지 들었다.주형인은 집 밖으로 뛰쳐나온 뒤에도 계속 밖으로 도망쳤다.하예진도 멈추지 않고 칼을 들고 그 뒤를 쫓아갔다.부부 두 사람은 서로 쫓고 쫓기며 단지 아래로 내려왔다.그 소란에 온 단지 사람을 놀라게 했다.하예진은 칼을 든 채 주형인을 족히 다섯 블록을 쫓아갓다. 하예진은 지쳐서 더 이상 뛰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길가에 앉아 숨을 헐떡였다.주형인도 지쳤다.그는 하예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그러다 자신의 부모님과 누나가 쫓아왔을 때, 부모님과 누나를 마주한 주형인은 서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주형인의 부모는 두 뺨이 잔뜩 부어 처참하기 그지없는 귀한 아들의 얼굴을 보자 분통을 터트렸다. 주서인은 아예 소매를 걷어붙이며 화를 벌컥 냈다. "그 망할 년이 감히 내 동생을 때리다니, 맞아 죽고 싶어 작정을 했네."주형인의 어머니는 속상함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라 하예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뭐 원수라도 된다니? 왜 우리 애를 이렇게까지 때려?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부모가 없어서 가르쳐 줄 사람이 없는 애라 막돼먹어서 결혼하면 안 된다고. 그런데도 네가 고집을 피웠잖아.""남자 녀석이라는 것이 여자 하나 못 이기니? 평소에 우리 앞에서 교육 시키겠다고 큰소리를 칠 땐 언제고, 지금 이게 무슨 꼴이니?"주형인의 어머니인 김은희는 당시 온 가족이 하예진 더러 일찍 시집 오라고 어르고 달랬던 것은 죄 까먹은 듯했다. 당시 하예진의 수입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이제는 하예진을 업신여기고 있었다.주경진도 따라서 욕설을 뱉었다. "아들을 이 나이까지 키우면서 나도 아까워
하예진은 냉소를 흘렸다. "계속 더치페이를 하겠다면서요. 전 그저 저 사람 말대로 한 거예요. 자기가 화가 났으면 날 때려도 된다는 거예요? 자기 아들이 저 꼴이 됐다고 속상해하면서, 내가 당신들 아들에게 맞아서 무슨 꼴이 됐는지는 안 보여요?""당신 아들은 부모가 낳아주고 키워줬겠죠. 그럼 저는 뭐 부모가 없어요? 예, 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설령 내가 부모가 없는 애라고 해도, 당신들이 함부로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하나씩 덤빌래요, 아니면 같이 덤빌래요? 어디 한번 해 봐요. 저 오늘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랑 이혼하고 싶으면 그냥 말로 해. 주먹이나 휘두르지 말고.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야! 어디 날 더 괴롭히고 때리기만 해도,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혼자 죽지 않을 거야!""주형인, 내가 전부터 말했지. 감히 날 때릴 거면 그 자리에서 날 때려죽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잘 생각하지마, 그 틈에 널 다져버릴 거니까!"하예진은 독기 어린 눈으로 시댁 식구들을 노려봤다.그들이 감히 덤벼든다면 하예진은 그들과 함께 죽을 작정이었다.주 씨 집안사람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미친년, 못돼먹은 년,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주경진은 하예진에게 욕설을 퍼부은 뒤 아들에게 말했다. "형인아, 가자. 엄마아빠랑 집으로 가자."주형인도 오늘은 하예진에게 놀랐다.하예진을 알게 된 뒤로 벌써 12년이 되었는데,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독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사납던 하예진의 모습을 떠올리면 주형인은 아직도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이내 주형인은 가족들과 떠나며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며칠 간의 휴가를 신청했다.며칠간은 집에서 푹 쉬어야 할 것 같았다.일가족 네 명은 주서인이 몰고 온 차에 탔고, 다들 차에 타자 주서인이 입을 열었다."형인아, 너 하예진이과 이혼하고 우빈이를 데리고 와. 우빈이를 절대로 주지 마. 어디 그러고도 저렇게 나오나 두고 보자고."주형인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부모님에게 물었다. "내
주형인은 가족들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질책하지 않자 입을 열었다. "하예진은 애를 낳고 난 뒤에 몸매가 점점 더 뚱뚱해져서 마음이 점점 더 식어갔어. 제인은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데다 젊고 예쁘기까지 하잖아. 난 제인이야말로 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해."김은희가 따금하게 한마디 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건 네 지위와 수입이야. 네가 만약 예전처럼 평범한 직원이었다면 누가 널 마음에 들어 하겠니?""하예진은 비록 독한 데다 널 이 꼴로 만들었지만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너랑 결혼한 그동안 널 아주 잘 챙겨주고 집안 살림도 아주 잘해놨었지. 그 애는 고생을 해 본 애라 살림도 잘하고, 집안도 잘 꾸려. 네가 밖에서 지금 만나는 그 여자는 보니까 예진이보다 못한 것 같더구나."김은희는 비록 아들을 편애하고 있지만 하예진에 대한 평가는 나름 중립적이었다."아내는 조신한 사람으로 찾아야 해. 네가 밖에서 노는 거? 엄마는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그 여자랑 결혼하려는 거면 반드시 신중해야 해. 그러다 너 나중에 후회해."조강지처를 버리고 애인을 아내로 들였다가 생각만큼 잘 지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김은희는 사실 아들의 지금 상황에 대해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행복을 잃고 대가를 치르기를 바라지 않았다.하지만 주서인은 달랐다. "하예진이 뭐가 좋다는 거야? 형인이를 이렇게 때려놓은 것만 봐도 우리 집은 저런 며느리 못 받아주지. 형인아, 나는 네가 제인 씨랑 지내는 거 지지해. 같이 살만한지 아닌지는 살아봐야 하는 거지, 보기만 한다고 어떻게 알아?""그때 하예진도 보기에는 예의 있고 교양 있어 보였는데, 형인이를 이 꼴이 되도록 때린 것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칼을 들고 쫓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어?"주경진과 김은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형인아, 요 며칠 너 집에 돌아가지도 말고 돈도 보내주지 마. 절대로 져주지 말고, 꼭 걔가 먼저 너한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더는 이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돌아
"부탁할게."심효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부탁은 무슨. 전에는 계속 네가 문을 닫아서 너한테 많이 미안했었는데, 이제 다시 갚아줄 수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편해."하예정도 친구와 더 체면을 차리지 않고, 새로 산 옷을 들고 심효진에게 인사했다. 서점을 나온 그녀는 옷 가방을 조수석에 놓은 뒤 전태윤에게 말했다. "당신 먼저 집으로 가요. 저 스쿠터 타고 시장 가서 장 좀 보고 올게요. 당신 만약 밥 할 줄 알면, 밥 좀 안쳐줘요. 할 줄 모르면 제가 집에 가서 할게요."전태윤은 그녀의 스쿠터를 보며 물었다. "당신 새 차는?""아침에 늦게 나와서 길이 막힐까 봐, 이거 탔어요."하예정은 헬멧을 쓴 뒤 인사했다. "저 갈게요."전태윤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하예정은 스쿠터를 타고 떠났다.전태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하예정은 가끔 일 처리가 불같아서 그의 진중함과는 조금 모순이었다.그러다 다시 조수석에 놓인 옷을 본 전태윤은 가져와 안을 뒤적거렸다. 남자의 옷인 걸 발견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대체 어느 남자에게 사준 거란 말인가?사이즈를 보자 그는 자신의 사이즈와 같은 사이즈라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죄다 검은색이니, 설마 자신에게 사준 걸까?그렇게 생각하자 전태윤은 방금 전 불쾌했던 기분을 완전히 잊어버렸다.가게에서 나온 심효진을 본 전태윤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뒤 시동을 걸었다.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진우가 가게에 왔다.자신의 사촌 동생을 본 심효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사촌 동생의 턱에 자란 수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진우야, 못 본 사이에 왜 털보가 되었어? 이 수염도 깎을 때가 됐네. 젊은 나이에 수염 기르지 마, 늙어 보여.""요즘 되게 바쁘고 많이 힘드니? 어째 초췌한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하려는 건 좋은데, 그래도 적당히 해. 건강이야말로 청춘의 근본이야. 그러니까 건강 조심해.""나 괜찮아
말을 마친 심효진은 조금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사촌동생을 보며 물었다. "진우야, 그건 왜 물어?"당연히 하예정에게 마음이 있어 이혼하기만 기다린다고 말을 할 수 없었던 김진우는 핑계를 대며 말했다. "난 그저 예정 누나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별 뜻은 없어. 예정 누나도 대단한 사람인데 만약 남편이 누나를 마음에 들어ㄴ 하지 않으면 일찍 이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혼하고 진짜 누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과 결혼하면 분명 잘 지낼 거니까.""하긴, 예정이는 아주 좋은 애잖아. 그래서 난 전태윤 씨가 예정이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어. 어쩌면 예정이보다 전태윤 씨가 먼저 마음이 움직일지도 몰라."심효진은 친구가 점점 더 잘 지내기를 바랐다.그런 누나를 보는 김진우는 마음이 아파왔다.사촌 누나가 자신의 엄마에게 이야기를 할까 봐 그는 하예정을 짝사랑한다고 심효진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김진우가 하예정보다 어린것은 차치하더라도 하예정이 기혼이라는 것만 해도 문제였다.설령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의 어머니는 하예정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충분한 확신이 있기 전까지, 김지우는 조심스레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했다.노을이 점차 저물며 밤의 장맥이 조용히 세상을 뒤덮었다. 어두운 밤은 그렇게 조용히 찾아왔다.발렌시아 아파트.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 하예정 덕에 이따금씩 향긋한 냄새가 풍겨져 전태윤은 저도 주방 입구 쪽으로 와 섰다.전태윤은 원래 도와주려 했었지만, 기왕 대접을 하겠다고 했으니 자신이 전부 하겠다는 하예정의 말에 그는 도와주지 못한 채 한가로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TV를 봐도 재미가 없었다. 차라리 아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나았다.하예정의 그 현모양처 같은 모습을 보자 전태윤의 눈빛은 짙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다만 그는 스스로도 이런 변화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하예정에게는 장점이 참 많다는 생각뿐이었다."예정아."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전
전태윤은 조금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내 둘째가 하예정의 공예품을 홍보하면 돈을 버는 것은 하예정이고, 하예정은 지금 또 자신의 아내이니 모든 이득은 다 집안사람이 봤다는 생각을 하자, 전태윤은 우울했던 기분이 크게 나아졌다.하예정은 음식을 다 한 뒤 음식을 예쁘게 담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를 이어갔다.기분이 좋은 전태윤은 몹시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하예정의 요리 실력은 몹시 뛰어나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태윤은 자신에게 먹을 복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다 씻은 뒤 하예정은 소파에서 옷이 담긴 봉투를 가져왔다. 그런 뒤 안에 있는 옷을 꺼내 전태윤에게 건넸다. "태윤 씨, 이거 맞는지 한 번 입어 봐요.""저에게 그렇게 큰 도움을 줬는데 식사 대접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새 옷 몇 개 좀 샀어요. 여기 넥타이도 두 개 있어요. 다 당신이 좋아하는 검은색으로 샀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옷이라는 걸 진작에 알아챘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며 옷을 받아 사이즈를 보며 물었다.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할머니에게 물었죠."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안 입어 봐요?""괜찮아, 딱 맞을 거야."하예정이 고른 것은 다 그가 좋아하는 색이었다."다음에 내 선물 고를 때 뭘 사야 할지 모르겠으면 나한테 물어봐."할머니에게 그만 물었으면 했다. 할머니가 알게 되면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아무도 몰랐다."당신은 일하느라 바쁠 텐데, 계속 방해하기가 미안했어요."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확실히 아주 바빴고, 확실히 아주 사소한 일을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태윤 씨, 아직 시간도 이른데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래요? 그러고 보면 여기로 이사한 지 꽤 됐는데 아직 단지 구경도 못해봤어요."전태윤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알겠다고 했다.그는 발렌시아 아파트에 대해 잘 몰랐다.당시 그를 도와 이 집을 구매한 것도 다 그의 집사 덕이었다.그러니까 이것은 부부 둘
단지 안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이 대부분이었지만 간간이 젊은 부부가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 모습도 보였다.하예정 부부는 다정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어깨만 나란히 한 채 누구도 손을 뻗지 않았다.하지만 선남선녀인 탓일까, 두 부부를 돌아보는 사람은 꽤 많았다.끝내, 하예정은 단지 내의 놀이터에서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여기 앉아요. 아이들 구경하게요."하예정은 아이를 몹시 좋아해, 조카인 주우빈도 몹시 예뻐했다.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를 따라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우빈이도 있었다면 분명 신나게 놀았을 거예요."전태윤은 응하고 대답했다.그러자 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하예정의 시선을 느낀 전태윤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아 경계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잘생겨서요, 눈요기하려고 몇 번 더 보는 중이에요."전태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태윤 씨는 잘생긴 데다, 능력도 뛰어나니 아주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겠죠. 앞으로 아이를 낳으면 분명 똑똑하고 영리할 거예요.""나에게 아이를 낳아주려고?"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께서는 계속 증손녀 좀 생기게 당신을 덮치라고는 하세요."그 말에 전태윤은 조용히 엉덩이를 옮겨 하예정과의 거리를 슬쩍 벌렸다.전태윤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하예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도 태윤 씨가 저에게 마음 없는 거 알아요. 사실, 저도 지금은 태윤 씨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에요.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인데 제가 정말로 당신을 덮치면 그건 부부 사이의 감정의 교류라기보다는 오히려 제가 당신을 산 것 같잖아요. 돈만 안 줬을 뿐이지."그 말을 들은 전태윤은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저희 둘에게 아이는 없을 거예요. 할머니 보고는 혁진 씨를 재촉하라고 하죠."두 사람에게 아이는 없는 걸까?그 말을 들은 전태윤은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반박할 수가 없어 그저 입술만 꾹 다
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확실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주변의 젊은 부부들은 하나같이 신혼이라 깨가 쏟아지고 길을 걸어도 손깍지를 꼭 잡고 걸었다. 게다가 아이가 있는 부부들은 아이를 주제로 이야기할 거리는 훨씬 더 많았다.그들과 달리, 쏟을 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도 없으니, 대화를 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말문이 턱 막힌 듯한 전태윤을 보자 하예정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전태윤도 잡아당겼다. "자, 이만 돌아가요. 괜히 제가 언제든지 당신 덮치려 하는 것처럼 불편하게 있지 말고요.""예정아, 너 여자애야!""여자애가 뭐 어때서요? 그런 말 한다고 문제 생기는 것도 아니고."하예정은 전태윤을 끌며 걸음을 옮겼다. 다만 괜히 돌아가서 손만 수백 번 씻을까 봐, 손은 건드리지 않은 채 옷자락만 잡고 걸었다."며칠 전의 실시간 검색어 봤어요? 그 전씨 가문 도련님과 성씨 가문 아가씨 이야기 말이에요. 성씨 가문 아가씨가 그 도련님을 좋아해서 공개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구애한 거예요.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열심히 구애를 하고, 여자도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구애를 하는 건 다 진심 어린 사랑을 찾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요.""전 성씨 가문 아가씨가 좀 마음에 들어요, 간접적으로 저에게 도움도 됐고요. 비록 그분은 저를 모르지만 전 그녀가 사랑을 쟁취하고 전씨 가문 도련님에게 시집갈 수 있기를 묵묵히 응원하고 있어요. 지금 그 도련님에게 구애하느라 고생하고 있으니 나중에 구애에 성공하게 되면 그때는 반대로 그 도련님이 그 아가씨를 아주 예뻐해 줬으면 해요."성소현이 간접적으로 "불효막심한 손녀" 검색어를 눌러버려, 실시간 검색어가 하예정 자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줄여 준 탓에 하예정은 성소현에게 조금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게다가 성소현의 과감히 사랑하고 과감히 내려놓는 성격에 하예정은 이미 그녀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자기 아내가 하는 말을 들은 전태윤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우리 가게에는 유아용 교재가 없어서요. 다른 문구 방에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하예정의 서점은 중학교 앞에 위치해 주 고객층이 중학생이었고 유치원용 책은 들여놓지 않았다.“아, 그렇군요. 그럼 잠시 후 다른 문구 방에 가봐야겠어요.”젊은 여자는 책값을 지불하고 책을 들고 나가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가게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예정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아마도 전태윤과 함께 행사에 참석했을 때 스치듯 본 적이 있을지 몰랐지만 깊이 알지는 못해 기억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잠시 후 태윤 씨한테 물어봐야겠다. 어떤 가문일까? 장남은 결혼했고 작은아들은 중학생이고 막내딸은 유치원이라니...’젊은 여자는 스물한두 살쯤으로 보였고 남편도 젊을 가능성이 컸다. 하예정은 임신 전 상류층 모임에 자주 참석했지만 어느 집안 자제가 그렇게 일찍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녀가 아는 젊은 여자들은 대체로 그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방금 본 여자가 속한 가문은 아직 명문으로 자리 잡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여자의 차는 근처에 주차된 흰색 BMW7 시리즈였다. 차 앞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가 가까이 다가가자 두 남자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그녀의 경호원과 운전기사인 듯했다.“출발하죠.”여자는 차에 올라 운전사에게 지시했다. 차가 멀리 떠난 후, 그녀는 가게 쪽을 돌아보았다. 하예정이 더 이상 자신을 보지 못할 거리라고 판단한 순간, 여자는 얼굴을 만지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 젊은 여자는 바로 여씨 가문의 둘째 딸, 여운별이었다. 그녀는 현재 용태호의 스폰녀로 지내고 있었지만 사교계에서는 용씨 가문 사모님을 사칭하며 활동 중이었다. 이는 용태호가 모든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마련한 조치였다.여운별은 용태호가 준 인피가면 덕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임무는 하예정에게 접근해 친구가 된 후 용정이라는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엄마, 윤하가 아직 소 대표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은 거 맞죠? 제가 대신 받아주고 싶네요. 소씨네 식구들 성격이 다들 시원시원해서 우리 윤하한테 잘 맞는 거 같아요. 윤하도 덜렁덜렁 거리는게 저 집안과 바이브가 맞아요.”윤하 어머니는 혁진에게 말했다. “네 동생 일생의 큰 일이야. 우리가 잘 체크해주고 나머지는 윤하한테 맡겨야지. 지훈한테 시집가는 사람도 윤하도 한평생 같이 살 사람도 윤하 자신이니까 걔가 좋아야 되지. 그리고 윤하 다음은 너랑 혁주야. 너희 둘도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엄마, 저 쌀 씻으러 갈게요.” 윤하 어머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혼 잔소리를 했고 혁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 혁진을 보고 어머니는 몇 마디 나무랐다.연성의 겨울은 눈 내린 광경을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관성은 아직도 최고 기온이 25도나 되는 여름이어서 길거리에는 반팔티를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하예정은 서점에서 남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관성 호텔에 가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공예품을 만들지 않았다. 온라인 쇼핑몰도 전에 그녀를 도왔던 아기엄마한테 양도했다.지금은 서점에서 일하고 있고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면 조금 바빠질 뿐, 다른 시간에는 아주 한가해서 옆 가게 탐방도 자주 하곤 했다. 비록 경호원들이 뒤따르지는 않지만 행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심효진은 소설을 좋아해서 그녀가 서점을 지키고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앉아 소설을 읽곤 했다.하예정은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고전 작품 한 권을 골라 읽었지만 자꾸만 하품이 나와 결국 읽기를 포기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를 지나 책장 앞에 다가가 먼지털이로 책우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사실 먼지가 별로 없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할 일을 찾아야 했다.그때, 밖으로부터 또깍또깍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처음 보는 젊은 부인이 서점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에르메스 백을 들고 있었고
혁진은 거실에서 지훈이 부모님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지훈이 아버지는 성격이 아주 호탕한 분이셨다. 혁진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두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지훈이 마침 아침밥을 들고나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을 기세였다.지훈이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다.이 양반이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까먹은 거 아니야?여기는 윤하네 집, 예비 사돈댁이라고. 혁진은 예비 며느리 친오빠고, 두 사람이 형제를 맺으면 나중에 아들더러 어떻게 처신하라는 거야. 아주 그냥 엉망진창이네.“아버지, 어머니, 윤하 씨 어머님께서 아침을 준비해 주셨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저희는 이미 먹었어요.”지훈은 부모님을 주방으로 불렀다. “점심은 여기서 먹어요. 조금 있다가 윤하 씨랑 제가 장 봐 올게요.”지훈이 어머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나도 나가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싶어. 지훈이 아버지, 당신도 같이 가요. 짐도 들어줄 겸.”남편의 의견을 물어보는 듯했지만 사실상 답정너였다. 집에 두고 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장 보고 돌아올 땐 이미 혁진이랑 형제를 맺었을지도 모른다.“그래요.”지훈이 아버지는 흔쾌히 대답했다.윤하 어머니는 주방에서 나오며 민망한 듯 말했다. “두 분께서 오시는 줄을 몰라서 제대로 준비 못 했어요. 점심에는 뭘 드시고 싶으세요? 말만 하세요, 제가 다 할 수 있어요. 가족이라 생각하고 편히 말씀하세요. 내외할 것 없어요.”지훈이 어머니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저희 안 그래요. 이제는 가족이나 마찬가진데요. 저희는 뭐든 잘 먹어요. 아무거나 다 돼요.”“사돈, 윤하는 정말 훌륭한 아가씨예요. 저희 지훈이랑은 비교가 안 돼요. 지훈이 때문에 저희 두 사람 속 많이 태웠어요.”지훈이 어머니는 실수도 사돈이라고 불렀지만 윤하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과찬이세요. 저희 윤하도 속 썩일 때가 많았어요. 지훈이야말로 성숙하고 성격도 온화하고 너그럽고 유망한 청년이죠. 저희 윤하보다 훨씬 나은 걸
원래부터 지훈을 마음에 들어 하던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특별한 사정을 알고 나서 더욱 자신의 사윗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윤하와 결혼을 하게 되면 지훈은 그녀를 더욱 소중히 아낄 것이 분명했기에 윤하 어머니는 딸이 멀리 관성에 시집가서 마음고생할 거라는 걱정이 사라졌다.윤하와 어머니는 주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지훈이 부모님을 대접할 아침을 준비했다.지훈도 주방으로 들어와 일손을 도왔다.“지훈 씨, 안 도와줘도 돼요. 가서 부모님이랑 얘기 나눠요.”윤하는 지훈을 밀어냈다.“부모님이 저더러 도와주라고 해서 들어왔는데 저를 또 저쪽으로 보내시면 어떻해요?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해요? 아차! 아버님이랑 큰형님이 안 보이시는데 아직 주무시나요? 아니면 도장에 일찍 나가셨어요?”지훈은 그 두 사람이 보이지 않자 물어보았다. 아까는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두 사람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공항에 갔어. 이쯤 되면 아마 비행기에 올랐을 거야.”윤하 어머니가 대답했다.지훈은 별생각 없었다. 고백도 했고 부모님도 인사하러 오셨고 지금은 그저 윤하의 답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사실 지훈도 내심 많이 긴장됐다.그도 윤하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옷도 사주고 고백 후에 도망치지도 않았기에 희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윤하가 명확히 대답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거절할 수도 있기에 두려웠다.윤하가 설령 거절한다고 해도 지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가 선택한 사람이라면 평생 그 한 사람한테만 마음을 줄 그런 사람이었다. “어머님, 준비 많이 하시지 마세요. 두 분 간단히 요기하면 돼요. 제가 이따가 두 분 호텔로 모셔다드릴 거예요. 거기서 식사하시면 돼요.”“귀한 손님들이 멀리서 오셨는데 점심은 내가 대접해야지. 외식할까 아니면 집에서 먹을까?”윤하 어머니는 물었다.“집에서 먹으면 윤하랑 혁진이는 오늘 도장 나가지 말고 장 좀 봐줘
윤하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윤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 불감증?”“지훈 씨가 질병이 있는데 불감증이래요. 근데 나한테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이건 치료가 잘되지 않는 병이고요. 운명인가 보죠 뭐.”“오래 살고 볼 일이네. 이런 병은 또 처음 들어봤어. 그럼 네가 지훈이 한테 시집가면 걔가 변심할 걱정도 없고 바람피울 걱정도 없는 거잖아.”윤하는 대답했다. “뭐 그런 셈이죠. 지훈 씨가 그러는데 다른 여자들이랑 있을 때에는 진짜 아무 반응이 없대요. 부모님이 사정을 알고 나서 계속 선을 보게 했는데 지훈 씨가 안 나갔어요. 또 부모님이 젊은 여자들 사진도 많이 보여줬대요. 혹시나 병이 좀 나아질지 해서요. 그런데 아무 효과가 없는 거죠.”윤하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모두 엄마에게 털어놨다.“지훈 씨 부모님이 마음이 급하셔서 지훈 씨가 어떤 여성분에게 눈길을 한 번 더 줬다 하면 혹시나 그 분한테 반응이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할 정도라고 하더라고요.”윤하 어머니는 들을수록 의아했다. “그럼 걔는 어떻게 너한테만은 다르다고 확신하는 거야? 너희 둘이 무슨 일 있었어?”윤하 어머니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윤하야, 지훈이가 너한테 진심이든 아니든 결혼하기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해. 여자는 자신을 아껴야지. 내가 책이랑 동영상에서 많이 봤는데 어떤 여자애들이 결혼하기 전에 임신하는 바람에 시댁에서 업신여겨 예물을 적게 주거나 아예 안 주는 집안도 있대. 이런 집에 시집가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 거야.”“엄마가 옛날 사람이라서 요즘 젊은이의 사상을 못 따라는 게 아니라 딸 가진 엄마로서 내 딸이 시댁에서 업신여김을 당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러니 절대 결혼 전에 사고 치지 마. 약혼했다고 해도 안돼. 혼인 신고를 해야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거야. 그때가 되면 결혼식을 올리든 안 올리든 엄마도 관여하지 않을 거야.”윤하 어머니는 윤하가 충동적인 행동을 할까 봐 걱정했다. 윤하는 나이도 어리고 연애 경험이 적은 것에 비해 지훈은 비록 여자
지훈은 그저 그들에게 손주를 안겨주는 도구로 몰락할지도 모른다.“고구마가 이렇게나 많아요? 그럼 군고구마 만들어 먹어요. 밖에서 사면 한 개에 삼천 원 정도 하잖아요, 너무 비싸요.”윤하는 역시나 고구마를 보고 기뻐했다.윤하는 차 문이 열려있는 쪽으로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보고는 혀를 내둘렀다.”이게 전부 다 고구마예요?”고구마인지 곤약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도 물건들을 나르기 시작했다.곧 혁진이 도와주러 나왔다.그렇게 세 젊은이는 몇 번을 왕복해서 겨우 차 안에 가득했던 농산품들을 거실로 옮겨갔다. 값비싼 삼과 제비집도 그중 어느 안에 들어있었다.지훈은 부모님이 정말로 농산품만 갖고 온 줄 알았다.소씨 집안에서 가지고 온 선물들을 윤하 어머니께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번 방문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었다.지훈이 부모님이 방문한 탓에 윤하와 혁진은 도장으로 가지 않고 집에서 접대를 도왔다. 소씨 가주 내외가 아침을 못 드신 걸 알고 윤하 어머니는 윤하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 준비를 했다.윤하는 그 틈을 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아버지랑 큰오빠는 이렇게 일찍 도장으로 나갔어요? 두 사람한테 전화했었는데 둘 다 안 받던데요.”윤하 어머니는 밖을 한번 힐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아버지랑 혁주가 관성에 갔어. 지훈이 집안에 대해 좀 알아보려고. 근데 지훈이 부모님이 여기로 오실 줄 누가 알았겠니?”“저 아직도 고민 중인데 둘이서 벌써 관성에 갔다고요?”“그러니까 네가 고민이 끝나기 전에 미리 알아보는거지. 네가 시집살이 안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시름 놓고 너희 둘을 미뤄줄 거 아니야.”윤하 어머니는 계속해서 말했다. “지훈이 부모님을 보니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 두 분이 너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소씨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처음 집에 인사 온다고 농산품들을 가지고 온 것 봐. 다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우리한테 맞춰주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너를 중요시한다는 거야. 그
사실 지훈도 부모님 몰래 일을 꾸몄으나 두 분이 보통 눈치가 빠른 사람이 아니라서 지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을 했다.집 문 앞에서 지켜보던 윤하 어머니는 딸과 함께 들어오는 두 사람의 얼굴이 지훈이랑 아주 비슷한 걸 보고 누군지 바로 알아챘다.그러고는 얼른 문을 활짝 열었다.지훈 어머니는 윤하 어머니를 보자마자 하마터면 사돈이라고 부를뻔했지만 너무 이른 감이 있어 당황하실까 봐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되려 삼켰다.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이 오실 줄은 생각 못 했다.아들과 남편이 방금전에 관성으로 출발했는데 두 분이 집에 찾아오시니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관성에서 두 사람에 대해 알아볼 때 마주치거나 들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정씨 집안 식구들은 지훈이 마음에 들었다. 지훈이 집안 사람들까지 인품이 좋으신 분이라면 멀기는 멀어도 윤하를 소씨 집안으로 시집 보낼 의향이 있었다.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바로 지훈의 질병이었다. 어젯밤, 두 형제는 지훈에게 이게 관해 물어보지 않았고 윤하도 가족들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윤하가 지훈을 대하는 태도에서 아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윤하 어머니는 짐작했다.전에 질병이 있었다가 이제는 다 완치됐을 가능성도 있었다.두 집안 어르신이 만나고 나서 윤하 어머니는 지훈의 부모님 두 분 다 성격이 좋으시고 친근하신 걸 느꼈다.사돈 될 분들한테 부담이 될까 봐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왔다. 행여나 너무 부유해 보여 정씨 집안에서 윤하를 시집 안 보내겠다고 하면 아들이 손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정씨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두 가문이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정씨 집안이 손해 보는 셈이었다. 지훈은 이제 중년이 다 된 아저씨이고 윤하는 아직 꽃다운 어린 아가씨이기 때문이다.지훈의 부모님은 소씨 집안 가주라는 기세 없이 자세를 낮추어 얘기했다.윤하 어머니와 혁진은 두 분을 대접하고 있고 윤하는 지훈을 도와 짐 나르러 갔
지훈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윤하 씨는 언제든지 예뻐요. 긴장하지 말아요, 저희 부모님 그렇게 어려운 분들 아니세요.”“긴장 안 했거든요. 처음 뵈는 자리니까 잘 꾸미지 않더라도 예의는 갖춰야 하니까요. 제가 문 열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하는 지훈보다 먼저 뛰어가 문을 열었다.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문 앞에 서 있었다.윤하가 문을 열자 차에 앉아 계시던 분이 창문을 내리고 바로 차에서 내렸다.중년 여성분이셨는데 지훈과 많이 닮아서 누가 봐도 소지훈 어머니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윤하는 내심 지훈의 어머니의 미모에 감탄하고 있었다. 관리를 아주 잘하셔서 겉보기에는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같이 보일 정도였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면 전혀 모자같이 보이지 않았다.지훈 어머니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걸어오며 물었다. “아가씨가 윤하 씨구나. 사진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소지훈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어머님, 안녕하세요.”윤하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지훈도 윤하를 따라 인사 한마디 건넸다.지훈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윤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어보고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고 아들이랑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지훈 어머니는 첫눈에 바로 윤하가 마음에 들었다.자기 아들을 구해준 유일한 여자애라고 생각해서 사진을 볼 때부터 이미 마음에 들었고 흡족해하셨다.지훈이 아버지도 차에서 내렸다.“윤하 씨, 안녕하세요, 저는 지훈이 애비되는 사람입니다.”지훈이 아버지는 평소에는 근엄하고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로 말하시지만 그 순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윤하는 아버님께도 인사를 건네고 두 분을 집안으로 모셨다. “아버님, 어머님,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요, 밖이 추워요.”“좋아요.”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지훈의 아버지는 차 키를 아들에게 던져주고는 말했다.” 차 안에 있는 물건들 집으로 옮겨와.”“두 분 편히 오시면 돼요, 뭘 들고 오시지 마
지훈의 아버지는 시계를 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일찍 오긴 한 것 같아. 여름이면 이쯤 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을 텐데. 차에서 조금 기다리다가 노크하러 갈까?”지훈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먼저 아들한테 전화를 걸어 일어나라고 해야겠어요.”그는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윤하와 입술이 닿는 그 순간, 고막을 찌르는 전화벨 소리가 울려 지훈은 단꿈에서 깨어났다. 지훈은 키스의 여운에 입술을 문지르다 정신이 번쩍 들어 그제야 자신이 꿈꾸었음을 알았다. 윤하는 지훈의 고백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눈치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달콤한 꿈이 산산조각 나자 지훈은 순간 화가 났다.핸드폰을 집어 든 지훈은 발신인을 확인하지 않고 쌀쌀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 왜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거세요? 큰 일이 아니라면……”“아니면 어쩔 건데? 내가 누구냐고? 네 엄마야, 나 지금 윤하네 집 앞이야. 빨리 나와 문 열어. 아니면 내가 들어가서 혼쭐을 내줄 거니까.”지훈도 한 성깔 하는데 지훈의 어머니는 그보다도 한 수 위였다. 말 몇 마디로 바로 지훈을 수그러들게 했다.지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놀라서 물었다. “뭐라고요? 지금 집 앞이라고요? 아버지도 같이 있어요?”두 분이 오신다고는 했지만 진짜로 오실 줄 몰랐고 또 이렇게 일찍 올지도 몰랐다.“아버지도 옆에 계셔. 대문이 아직 안 열려있는 것을 보아하니 다들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보지? 아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 아니야?”지훈은 침대에서 굴러 내려오며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을, 이 추운 날씨에 이렇게 일찍 오신 거예요? 아버지가 오신다고 하시더니 진짜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직 이르다고 말했잖아요, 윤하 씨가 엄마아빠를 만나면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제가 내려가서 문 열어줄게요.”입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정작 부모님들이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지훈은 엄마에게 당부 몇 마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