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없어!왜 달지?왜 단맛이 나는 걸까? 소금인 줄 알고 설탕을 넣은 것인가?주형인은 주방으로 가 양념통을 보았다. 설탕과 소금과 MSG가 양념통에 나란히 담겨 있었다. 분명히 소금인 줄 알고 설탕을 잘못 넣은 것이다.결혼 전에는 주형인은 집에서 어머니가 밥을 해주었고 결혼 후에는 하예진이 밥을 해주어서 음식을 만들어 먹은 적이 없었다. 처음 요리를 하는 그의 음식은 정말 삼키기가 어려웠다.밥솥을 보니 하예진이 이미 물을 맞춰놓아 밥은 먹을 수는 있었다.하지만 흰 쌀밥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회사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와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한다는 것에 주형인은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성큼성큼 방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하예진은 침대 머리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주형인은 화가 더욱더 치밀어 올랐다.그는 하예진의 앞에 다가가 휴대폰을 내쳐 떨어트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 땅바닥에 박았다. 그러고는 발로 하예진을 마구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들이 잠에서 깰까 봐 큰 소리로 욕을 하지는 않았다.갑자기 습격당한 하예진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땅바닥으로 내쳐졌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주형인을 노려보았다.주형인은 남자인 데다가 먼저 공격까지 했으니 하예진은 비집고 들어갈 틈을 먼저 찾아야 했다.주형인에게 맞은 하예진의 얼굴이 빨갛게 부어올랐지만 하예진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다. 예전에 회사 동료가 그녀에게 말하길 부부가 싸울 때 이기든 지든 무조건 반격을 하라고 했었다. 남자들이 여자를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하면 안 되었다.만약 여자가 잘못을 인정한다면 계속 폭력을 가할 것이다.가정폭력은 한번 시작하면 영원히 끝이 없다.주형인이 주먹이 다가올 때 하예진은 죽을힘을 다하여 그 주먹을 잡아내고 그의 팔을 있는 힘껏 꽉 물었다. 주형인의 비명이 방안에 울려 퍼졌다. 주형인은 다른 손으로 하예진의 머리카락을 더욱더 세게 잡아끌었고 하예진은 더욱더 세게 그의 팔을 물었다.
하예진은 칼을 든 채 주형인의 뒤를 쫓아갔다.주형인은 하예진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결혼한 뒤 그녀는 늘 조용하고 소심했다. 최근 한동안 주형인이 계속 하예진에게 욕설을 퍼부어도, 아주 심한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대들며 그와 싸웠다.이번에 그가 손을 대자 하예진은 무슨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같이 싸우려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칼까지 들었다.주형인은 집 밖으로 뛰쳐나온 뒤에도 계속 밖으로 도망쳤다.하예진도 멈추지 않고 칼을 들고 그 뒤를 쫓아갔다.부부 두 사람은 서로 쫓고 쫓기며 단지 아래로 내려왔다.그 소란에 온 단지 사람을 놀라게 했다.하예진은 칼을 든 채 주형인을 족히 다섯 블록을 쫓아갓다. 하예진은 지쳐서 더 이상 뛰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길가에 앉아 숨을 헐떡였다.주형인도 지쳤다.그는 하예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주저앉았다.그러다 자신의 부모님과 누나가 쫓아왔을 때, 부모님과 누나를 마주한 주형인은 서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주형인의 부모는 두 뺨이 잔뜩 부어 처참하기 그지없는 귀한 아들의 얼굴을 보자 분통을 터트렸다. 주서인은 아예 소매를 걷어붙이며 화를 벌컥 냈다. "그 망할 년이 감히 내 동생을 때리다니, 맞아 죽고 싶어 작정을 했네."주형인의 어머니는 속상함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라 하예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뭐 원수라도 된다니? 왜 우리 애를 이렇게까지 때려?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부모가 없어서 가르쳐 줄 사람이 없는 애라 막돼먹어서 결혼하면 안 된다고. 그런데도 네가 고집을 피웠잖아.""남자 녀석이라는 것이 여자 하나 못 이기니? 평소에 우리 앞에서 교육 시키겠다고 큰소리를 칠 땐 언제고, 지금 이게 무슨 꼴이니?"주형인의 어머니인 김은희는 당시 온 가족이 하예진 더러 일찍 시집 오라고 어르고 달랬던 것은 죄 까먹은 듯했다. 당시 하예진의 수입이 아주 높았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이제는 하예진을 업신여기고 있었다.주경진도 따라서 욕설을 뱉었다. "아들을 이 나이까지 키우면서 나도 아까워
하예진은 냉소를 흘렸다. "계속 더치페이를 하겠다면서요. 전 그저 저 사람 말대로 한 거예요. 자기가 화가 났으면 날 때려도 된다는 거예요? 자기 아들이 저 꼴이 됐다고 속상해하면서, 내가 당신들 아들에게 맞아서 무슨 꼴이 됐는지는 안 보여요?""당신 아들은 부모가 낳아주고 키워줬겠죠. 그럼 저는 뭐 부모가 없어요? 예, 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설령 내가 부모가 없는 애라고 해도, 당신들이 함부로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하나씩 덤빌래요, 아니면 같이 덤빌래요? 어디 한번 해 봐요. 저 오늘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랑 이혼하고 싶으면 그냥 말로 해. 주먹이나 휘두르지 말고.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야! 어디 날 더 괴롭히고 때리기만 해도,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혼자 죽지 않을 거야!""주형인, 내가 전부터 말했지. 감히 날 때릴 거면 그 자리에서 날 때려죽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잘 생각하지마, 그 틈에 널 다져버릴 거니까!"하예진은 독기 어린 눈으로 시댁 식구들을 노려봤다.그들이 감히 덤벼든다면 하예진은 그들과 함께 죽을 작정이었다.주 씨 집안사람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미친년, 못돼먹은 년,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주경진은 하예진에게 욕설을 퍼부은 뒤 아들에게 말했다. "형인아, 가자. 엄마아빠랑 집으로 가자."주형인도 오늘은 하예진에게 놀랐다.하예진을 알게 된 뒤로 벌써 12년이 되었는데,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독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사납던 하예진의 모습을 떠올리면 주형인은 아직도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이내 주형인은 가족들과 떠나며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며칠 간의 휴가를 신청했다.며칠간은 집에서 푹 쉬어야 할 것 같았다.일가족 네 명은 주서인이 몰고 온 차에 탔고, 다들 차에 타자 주서인이 입을 열었다."형인아, 너 하예진이과 이혼하고 우빈이를 데리고 와. 우빈이를 절대로 주지 마. 어디 그러고도 저렇게 나오나 두고 보자고."주형인은 입가의 피를 닦으며 부모님에게 물었다. "내
주형인은 가족들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질책하지 않자 입을 열었다. "하예진은 애를 낳고 난 뒤에 몸매가 점점 더 뚱뚱해져서 마음이 점점 더 식어갔어. 제인은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데다 젊고 예쁘기까지 하잖아. 난 제인이야말로 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해."김은희가 따금하게 한마디 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건 네 지위와 수입이야. 네가 만약 예전처럼 평범한 직원이었다면 누가 널 마음에 들어 하겠니?""하예진은 비록 독한 데다 널 이 꼴로 만들었지만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너랑 결혼한 그동안 널 아주 잘 챙겨주고 집안 살림도 아주 잘해놨었지. 그 애는 고생을 해 본 애라 살림도 잘하고, 집안도 잘 꾸려. 네가 밖에서 지금 만나는 그 여자는 보니까 예진이보다 못한 것 같더구나."김은희는 비록 아들을 편애하고 있지만 하예진에 대한 평가는 나름 중립적이었다."아내는 조신한 사람으로 찾아야 해. 네가 밖에서 노는 거? 엄마는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그 여자랑 결혼하려는 거면 반드시 신중해야 해. 그러다 너 나중에 후회해."조강지처를 버리고 애인을 아내로 들였다가 생각만큼 잘 지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김은희는 사실 아들의 지금 상황에 대해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행복을 잃고 대가를 치르기를 바라지 않았다.하지만 주서인은 달랐다. "하예진이 뭐가 좋다는 거야? 형인이를 이렇게 때려놓은 것만 봐도 우리 집은 저런 며느리 못 받아주지. 형인아, 나는 네가 제인 씨랑 지내는 거 지지해. 같이 살만한지 아닌지는 살아봐야 하는 거지, 보기만 한다고 어떻게 알아?""그때 하예진도 보기에는 예의 있고 교양 있어 보였는데, 형인이를 이 꼴이 되도록 때린 것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칼을 들고 쫓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어?"주경진과 김은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형인아, 요 며칠 너 집에 돌아가지도 말고 돈도 보내주지 마. 절대로 져주지 말고, 꼭 걔가 먼저 너한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더는 이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돌아
"부탁할게."심효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부탁은 무슨. 전에는 계속 네가 문을 닫아서 너한테 많이 미안했었는데, 이제 다시 갚아줄 수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편해."하예정도 친구와 더 체면을 차리지 않고, 새로 산 옷을 들고 심효진에게 인사했다. 서점을 나온 그녀는 옷 가방을 조수석에 놓은 뒤 전태윤에게 말했다. "당신 먼저 집으로 가요. 저 스쿠터 타고 시장 가서 장 좀 보고 올게요. 당신 만약 밥 할 줄 알면, 밥 좀 안쳐줘요. 할 줄 모르면 제가 집에 가서 할게요."전태윤은 그녀의 스쿠터를 보며 물었다. "당신 새 차는?""아침에 늦게 나와서 길이 막힐까 봐, 이거 탔어요."하예정은 헬멧을 쓴 뒤 인사했다. "저 갈게요."전태윤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하예정은 스쿠터를 타고 떠났다.전태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하예정은 가끔 일 처리가 불같아서 그의 진중함과는 조금 모순이었다.그러다 다시 조수석에 놓인 옷을 본 전태윤은 가져와 안을 뒤적거렸다. 남자의 옷인 걸 발견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대체 어느 남자에게 사준 거란 말인가?사이즈를 보자 그는 자신의 사이즈와 같은 사이즈라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죄다 검은색이니, 설마 자신에게 사준 걸까?그렇게 생각하자 전태윤은 방금 전 불쾌했던 기분을 완전히 잊어버렸다.가게에서 나온 심효진을 본 전태윤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뒤 시동을 걸었다.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진우가 가게에 왔다.자신의 사촌 동생을 본 심효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사촌 동생의 턱에 자란 수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진우야, 못 본 사이에 왜 털보가 되었어? 이 수염도 깎을 때가 됐네. 젊은 나이에 수염 기르지 마, 늙어 보여.""요즘 되게 바쁘고 많이 힘드니? 어째 초췌한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 젊은 사람이 열심히 하려는 건 좋은데, 그래도 적당히 해. 건강이야말로 청춘의 근본이야. 그러니까 건강 조심해.""나 괜찮아
말을 마친 심효진은 조금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사촌동생을 보며 물었다. "진우야, 그건 왜 물어?"당연히 하예정에게 마음이 있어 이혼하기만 기다린다고 말을 할 수 없었던 김진우는 핑계를 대며 말했다. "난 그저 예정 누나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별 뜻은 없어. 예정 누나도 대단한 사람인데 만약 남편이 누나를 마음에 들어ㄴ 하지 않으면 일찍 이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혼하고 진짜 누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과 결혼하면 분명 잘 지낼 거니까.""하긴, 예정이는 아주 좋은 애잖아. 그래서 난 전태윤 씨가 예정이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어. 어쩌면 예정이보다 전태윤 씨가 먼저 마음이 움직일지도 몰라."심효진은 친구가 점점 더 잘 지내기를 바랐다.그런 누나를 보는 김진우는 마음이 아파왔다.사촌 누나가 자신의 엄마에게 이야기를 할까 봐 그는 하예정을 짝사랑한다고 심효진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김진우가 하예정보다 어린것은 차치하더라도 하예정이 기혼이라는 것만 해도 문제였다.설령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의 어머니는 하예정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충분한 확신이 있기 전까지, 김지우는 조심스레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했다.노을이 점차 저물며 밤의 장맥이 조용히 세상을 뒤덮었다. 어두운 밤은 그렇게 조용히 찾아왔다.발렌시아 아파트.주방에서 바삐 돌아치는 하예정 덕에 이따금씩 향긋한 냄새가 풍겨져 전태윤은 저도 주방 입구 쪽으로 와 섰다.전태윤은 원래 도와주려 했었지만, 기왕 대접을 하겠다고 했으니 자신이 전부 하겠다는 하예정의 말에 그는 도와주지 못한 채 한가로이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TV를 봐도 재미가 없었다. 차라리 아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나았다.하예정의 그 현모양처 같은 모습을 보자 전태윤의 눈빛은 짙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다만 그는 스스로도 이런 변화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하예정에게는 장점이 참 많다는 생각뿐이었다."예정아."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전
전태윤은 조금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내 둘째가 하예정의 공예품을 홍보하면 돈을 버는 것은 하예정이고, 하예정은 지금 또 자신의 아내이니 모든 이득은 다 집안사람이 봤다는 생각을 하자, 전태윤은 우울했던 기분이 크게 나아졌다.하예정은 음식을 다 한 뒤 음식을 예쁘게 담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를 이어갔다.기분이 좋은 전태윤은 몹시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하예정의 요리 실력은 몹시 뛰어나 칭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태윤은 자신에게 먹을 복이 참 많다고 생각했다.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다 씻은 뒤 하예정은 소파에서 옷이 담긴 봉투를 가져왔다. 그런 뒤 안에 있는 옷을 꺼내 전태윤에게 건넸다. "태윤 씨, 이거 맞는지 한 번 입어 봐요.""저에게 그렇게 큰 도움을 줬는데 식사 대접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새 옷 몇 개 좀 샀어요. 여기 넥타이도 두 개 있어요. 다 당신이 좋아하는 검은색으로 샀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옷이라는 걸 진작에 알아챘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하며 옷을 받아 사이즈를 보며 물었다.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할머니에게 물었죠."전태윤은 할 말을 잃었다."안 입어 봐요?""괜찮아, 딱 맞을 거야."하예정이 고른 것은 다 그가 좋아하는 색이었다."다음에 내 선물 고를 때 뭘 사야 할지 모르겠으면 나한테 물어봐."할머니에게 그만 물었으면 했다. 할머니가 알게 되면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아무도 몰랐다."당신은 일하느라 바쁠 텐데, 계속 방해하기가 미안했어요."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는 확실히 아주 바빴고, 확실히 아주 사소한 일을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태윤 씨, 아직 시간도 이른데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래요? 그러고 보면 여기로 이사한 지 꽤 됐는데 아직 단지 구경도 못해봤어요."전태윤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내 알겠다고 했다.그는 발렌시아 아파트에 대해 잘 몰랐다.당시 그를 도와 이 집을 구매한 것도 다 그의 집사 덕이었다.그러니까 이것은 부부 둘
단지 안에는 산책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이 대부분이었지만 간간이 젊은 부부가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 모습도 보였다.하예정 부부는 다정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어깨만 나란히 한 채 누구도 손을 뻗지 않았다.하지만 선남선녀인 탓일까, 두 부부를 돌아보는 사람은 꽤 많았다.끝내, 하예정은 단지 내의 놀이터에서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여기 앉아요. 아이들 구경하게요."하예정은 아이를 몹시 좋아해, 조카인 주우빈도 몹시 예뻐했다.전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를 따라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우빈이도 있었다면 분명 신나게 놀았을 거예요."전태윤은 응하고 대답했다.그러자 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하예정의 시선을 느낀 전태윤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아 경계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잘생겨서요, 눈요기하려고 몇 번 더 보는 중이에요."전태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태윤 씨는 잘생긴 데다, 능력도 뛰어나니 아주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겠죠. 앞으로 아이를 낳으면 분명 똑똑하고 영리할 거예요.""나에게 아이를 낳아주려고?"하예정은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께서는 계속 증손녀 좀 생기게 당신을 덮치라고는 하세요."그 말에 전태윤은 조용히 엉덩이를 옮겨 하예정과의 거리를 슬쩍 벌렸다.전태윤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하예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도 태윤 씨가 저에게 마음 없는 거 알아요. 사실, 저도 지금은 태윤 씨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에요.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인데 제가 정말로 당신을 덮치면 그건 부부 사이의 감정의 교류라기보다는 오히려 제가 당신을 산 것 같잖아요. 돈만 안 줬을 뿐이지."그 말을 들은 전태윤은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저희 둘에게 아이는 없을 거예요. 할머니 보고는 혁진 씨를 재촉하라고 하죠."두 사람에게 아이는 없는 걸까?그 말을 들은 전태윤은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 말을 반박할 수가 없어 그저 입술만 꾹 다
이날 저녁은 별일 없이 지나갔다.돌아오는 날은 일요일이었다.휴식날인데 우빈이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우빈이는 일어난 후 곧장 하예정이 자는 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렸다. 전태윤이 안에서 방문을 열어주었다.“이모부, 이모 일어났어요? 들어가서 이모랑 같이 놀래요.”전태윤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꼬맹이와 화내지 말자고 스스로 가슴을 달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우빈아,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지? 평소에 어린이집 가야 하는 날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더니 쉬는 날만 되면 아주 일찍 일어나더라.”우빈이가 입을 뾰족이 내밀면서 말했다.“이모부, 나는 한 번 깨어나면 더는 못 자요. 나랑 놀아 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심심해요. 이모 찾아와서 노는 수밖에 없어요.”현재 우빈이는 시 중심에 자리 잡은 전태윤의 개인 별장에서 지내고 있다. 서원 리조트에 있을 때는 그나마 함께 놀아 주는 어린이들이 있었기에 이모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전태윤은 하는 수 없이 두 팔로 우빈이를 부쩍 들어 품에 안으면서 말했다.“이모는 아직도 자고 있어. 이모부가 우빈이랑 같이 놀아 줄게. 뭐 놀까?”“밖에 나가서 놀고 싶어요.”“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면 좋지 않을까?”우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싫어요. 혼자 놀면 재미가 없어요. 이모부는 장난감도 안 놀 거잖아요.”전태윤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알았어. 이모부랑 같이 아침 조깅하러 나갈까? 이모부가 가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올 테니 얌전하게 기다려야 해?”그는 우빈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려놓으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신신당부했다.“침실에 들어가서 이모를 깨우면 안 돼. 알았지? 이모부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우빈이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전태윤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서 먼저 운동복 바지부터 바꿔 입고 우빈이가 그사이에 침실에 들어가서 하예정을 깨울까 봐 걱정되어 웃옷을 입으면서 밖으로 나왔다.우빈이가 조용하게 제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야 전태윤은 안도의
윤미라는 아들 노동명이 무서웠다.“알았어. 꾸준히 재활 치료할 거야. 네가 돌아올 때면 내가 2~3m나 걸을 수 있을지도 몰라. 참, 언제 돌아올 거야?”하예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대답했다.“설까지 있을 계획에요. 설날이 되면 제가 돌아갈게요.”“그렇게 오래 있겠다고? 우빈이는 어쩌려고?”“예정이가 돌봐주기 때문에 괜찮아요. 제가 보고 싶을 때마다 주말에 시간을 내서 우빈이 보러 가주세요. 시간이 없으면 제부한테 부탁해서 우빈이를 저한테 데려오라고 하는 수밖에 없고요.”하예진은 점점 더 바빠질 것이다.당분간 아들 우빈과 함께할 시간이 적을 것이다.“우빈이가 태어날 때부터 예정이가 곁에서 보살펴서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설도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요.”“사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그래!”노동명이 한 마디 내뱉었다.우빈이는 핑계일 뿐, 사실 노동명이 그녀가 그리웠다.시간이 그토록 오래 걸리면 노동명은 자신이 하예진이 무척 보고싶을 것으로 예상했다.전화도 하고 영상통화도 할 수 있지만 그리움의 고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우빈은 어려서부터 녀석을 키워준 하예정이 있어서 하예진이 곁에 없다고 해도 바로 적응할 수 있지만 노동명은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요즘 그는 매일 하예진을 보는 것에 익숙했다.“예진아,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내가 혼자 널 보러 가도 돼? 걱정하지 마. 우리 집에 개인 비행기가 있어서 내가 그 비행기를 타고 경호원들과 함께 가면 돼. 경호원들이 날 돌봐줄 거야. 네가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거고. 널 보러 갈 뿐이야. 너랑 밥 먹고 얘기도 하면서 말이야. 내가 주말마다 널 보러 갔다가 월요일에 돌아올게. 나도 출근해야 하니까.”하예진은 마음이 따듯해졌다.“그럼 주말에 우빈이도 데리고 오세요.”“난 너와 단둘이 주말을 보내고 싶은데 우빈이 녀석도 데리고 가야 해?”하예진은 얼굴이 빨개졌고 이내 웃으면서 대답했다.“동명 씨가 혼자 온 걸 알게 되면 우빈이가 삐질걸
“앞으로 더는 허튼 생각 하지 말아요. 저는 단 한 번도 동명 씨를 싫어한 적이 없어요. 제가 돼지처럼 뚱뚱하고 못생겼을 때도 동명 씨는 저를 싫어하지 않았던 것처럼요.”노동명은 급히 끼어들었다.“넌 못생기지 않았어. 전혀! 예전에 통통할 때도 못생긴 편은 아니었거든. 복스러워 보였어.”“못생긴 거 맞아요. 저는 거울만 봐도 뚱뚱한 제가 너무 싫었어요.”바보 같은 짓은 한 번만 하면 충분했다. 하예진은 다시는 예전처럼 폭식하지 않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살을 빼기 전에 하예진은 살이 너무 많이 쪄서 지방간뿐만 아니라 요산 수치도 높았다.체중 감량 후 요산뿐만 아니라 지방간 수치도 모두 많이 좋아졌다.“하예진아, 우빈한테 장난감도 사주고 옷도 사줬는데 나한테는 뭐 사준 거 없어?”노동명이 화제를 바꾸어 질투하기 시작했다.“동명 씨는 부족한 게 없잖아요. 우빈이는 아이라서 너무 빨리 커요. 해마다 새 옷을 사줘야 하지만 동명 씨는 이젠 다 큰 성인이라 작년의 옷을 올해에도 입을 수 있잖아요. 돌아가게 되면 강성의 특산 제품을 가져다드릴게요.”노동명은 서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우빈이는 크면 남의 집 남편으로 되어 우빈의 아내가 그를 걱정하고 보살피게 될걸. 결국, 내가 영원히 네 곁에 있을 텐데 나를 더 관심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도 새 옷 사줘. 네가 사준 옷이면 난 다 좋아.”하예진은 하예정에게 거의 선물을 주지 않았다.지난번 하예진은 재혼하고 싶지 않다며 노동명의 감정을 거절했다.그러나 지금, 하예진이 시집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연인이나 다름없다. 모두의 눈에는 두 사람이 연인으로 보였다.노동명도 자연스레 하예진의 남편 역할을 하고 있었다.노동명은 하예진의 여생을 함께하려고 한다.하예정이 끝까지 노동명에게 시집가지 않더라도, 그가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면서 지금처럼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고 남은 인생을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선물을 너무 받고 싶었다. 가격을 따지
이윤미가 말을 꺼냈다.“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헤어스타일을 바꿨을 뿐이에요. 사람들을 몰래 예진 씨를 따르라고 한 것은 감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뒤를 따라가서 예진 씨의 몸매를 익히게 하려고 그런 거예요. 앞으로 예진 씨가 변장하더라도 그녀의 몸매에 대한 인상으로 분장한 예진 씨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해요. 제가 예진 씨와 만날 때마다 예진 씨의 안전을 반드시 책임져야 하니까요.”“만약 그녀가 저를 만나러 오는 도중에 사고가 나면 하예정 일행은 아마 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리고 예진 씨가 강성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몰래 그녀를 도와주세요. 그저 우리 엄마와 그 늙은 남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도와주면 돼요.”이윤미가 말하는 늙은 남자는 정군호가 아닌 이은화의 특별 비서였다.방윤림은 예의 갖추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 밤이 점점 깊어지는데 얼른 돌아가세요.”이윤미는 한숨을 쉬었다.“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 집에는 따뜻함이 없어요. 서로 다투고 경쟁하고 눈치 보면서... 좋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방윤림은 말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랐다.주인의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일개 비서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이윤미는 곧 방윤림과 함께 떠났다.한 시간 후.하루 호텔로 돌아온 하예진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한 뒤 가발을 쓰고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이윤미가 선물한 인간 얼굴 가죽을 쓰기 아까웠다.그렇게 전업적인 도구는 가장 필요한 곳에 써야 낭비하지 않는다.하루 호텔은 전호영이 강성에서 소유하고 있는 호텔 본점이다. 하예진이 분장한 이유는 전호영에게 폐를 끼치게 하고 싶지 않을 뿐, 그를 경계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 가죽을 쓸 필요 없었다.하예정은 그녀가 묵고 있던 룸으로 돌아와 방문을 잠근 뒤에야 휴대전화를 꺼내 노동명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노동명이 전화를 받았다.“동명 씨,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주무세요?
하예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부부 사이에 한쪽이 바람을 피우면 금방 금이 생기게 되는 법이죠. 이혼을 안 했어도 서로 고된 삶을 살 테니,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아요. 저의 전남편도 바람을 피우고 저를 폭행하여 이혼했잖아요. 한번이 있으면 두 번, 세 번이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이 고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아요. 이혼하면 죽는 것도 아닌데.”이윤미가 말을 이었다.“우리 아버지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아버지는 자신이 이혼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아시거든요. 정씨 집안의 친척들도 우리 가문에서 아무런 이익도 보지 못할걸요. 어쩌면 전에 받은 혜택들도 전부 토해내야 할지도 몰라요. 어쨌든 요즘 우리 가문은 편안할 날이 없어요. 저는 왠지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이은화의 모진 마음으로는 정말 해낼 수 있을 것이다.하예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이경혜가 하예진을 강성으로 빨리 오게 한 것은 아마도 이씨 가문이 요즘 혼란스러워 이은화가 하예진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하예진이 그 틈을 타 사업을 일으킬 수 있고 옛날 사고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 있었다.이 기회를 잡아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민심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 것과 다름없다.하예진은 비록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고 강성에서도 사업이 없지만, 그녀의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서 있다. 그리고 하예진의 외할머니는 이씨 가문의 전임 가주였다. 이씨 가문의 친척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예진 씨, 비행기를 몇 시간 타고 방금 도착하셔서 힘드실 텐데 얼른 가서 쉬세요. 일이 있으면 그 번호로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하예진이 관심하며 물었다.“저랑 같이 안 갈실래요?”이윤미는 입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여기 좀 더 있고 싶어요. 마음도 추스를 겸 조용히 있고 싶거든요. 집으로 돌아가도 엉망진창이에요.”“그
수십 년이 지난 탓으로 법률조차도 이은화의 사형을 선고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이윤미는 적어도 그녀가 큰이모의 후손에게 주인 자리를 돌려줄 수 있었다.그녀는 이씨 가문을 떠나 자신의 회사로 돌아가 생활해도 좋다고 생각했다.이윤미는 이런 원한과 복수에 관한 일을 멀리하고 싶었고 그녀의 소소한 삶을 더 좋아했다.이은화가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이윤미는 이은화가 그 해에 정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 믿었다.단지 가주 자리의 권력을 탐내는 것뿐만이 아닌 사랑 때문에 벌인 짓일 수도 있다.이은화는 지금 70세이고 정군호와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며 아들딸도 네 명이나 낳았다.하지만 이은화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 능력이 뛰어난 남자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은숙의 특별 비서일 것이다.“제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요. 저는 제 행동으로 제가 우리 엄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게요.”하예진은 한참 동안 이윤미를 바라보며 웃었다.“윤미 씨의 진지한 얼굴은 정말 멋있고 아름다워요. 당신 엄마가 보신다면 눈에 거슬릴지도 모르지만요. 이씨 가문의 상황은 어때요? 윤미 씨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다가 이 대표님께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요 며칠 동안 윤미 씨 아버지는 모습조차 내놓지 않는다면서요.”하예진은 이은화와 정군호의 일을 알고 있었다.강성에서 이 불륜 사건은 빅뉴스였다.평소에 정군호랑 같이 다니던 늙은 남자들은 대부분 정군호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이은화가 정군호를 너무 엄하게 관리하여 그에게 자유로울 틈도 주지 않고 용돈도 적게 준다고 생각했다.아무리 사이좋은 부부 사이라도 오랜 시간 동안 작은 일에 얽매이게 되면 감정이 깨지기도 한다.여자들은 대부분 이은화의 편을 들었다. 이은화가 남편을 관리하는 것이 좀 엄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군호가 만약 이은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닌 이은화에게 이혼을 제기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정군호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우리 엄마가 예진 씨가 오신 것을 알게 되면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없는데. 조심하세요. 아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제가 다 알려드릴게요. 제가 모르는 일은 할 수 없지만요.”하예진은 웃음을 거두며 한참 동안 이윤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윤미 씨, 우리 만난 적 있잖아요. 저도 윤미 씨가 정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대표님 결국 윤미 씨와 피가 섞인 모녀지간인데, 저는 윤미 씨가 이 대표님과 맞서지 못한다고 생각해요.”이윤미의 웃음도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글쎄요. 우리 두 사람은 모녀 맞아요. 저를 저의 어머니와 같은 편에 서지 말라고 하면 제가 분명 스트레스도 받고 또 엄청나게 큰 용기도 필요하겠죠. 예진 씨가 저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예진 씨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마음이 너무 독하세요. 해본 말이 아니에요. 예진 씨가 여전히 저를 경계하면 저도 더는 묻지 않을게요. 그런데 여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맞서게 되면 저를 찾아오셔도 돼요.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 테니까.”“사실 저와 엄마는 모녀간의 정이 별로 없어요. 저는 엄마의 곁에서 자라지 않았고 또 이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스무 살이 넘었거든요. 윤정이가 아직 이씨 가문에 남겨졌고 여전히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요. 제가 저의 엄마와 모녀간의 정이 별로 없다고 해도 우리 두 사람이 친 모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알아요.”“만약 당신들이 없다면 제 생각에는 제가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를 짊어지고 리더가 되어 우리 가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을 거예요.”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규정을 수정하고 싶었다.그렇게 딱딱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비록 대가가 좀 클 수도 있지만, 이씨 가문을 더 멀리, 더 잘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수정하고 싶었다.이윤미는 명함 한 장을 꺼내 하예진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은 제 다른 전화번호에요. 아는 사람이 적으니 무슨
“그럼 안전에 유의하시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저에게 전화하세요.”방윤림이 이윤미에게 당부했다.이윤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항상 방 비서에게 의지할 수는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암살을 당하더라도 이윤미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능력을 갖추었다.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면 이렇게 자라지 못하고 일찍이 양어머니의 학대를 받아 죽었을 것이다.방윤림과의 통화를 마친 이윤미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차를 몰았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하예진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하예진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누군가의 차가 오는 것을 보더니 창문을 조금 눌렀고 이윤미가 하예진의 차 옆에 주차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선글라스를 먼저 벗은 이윤미는 얼굴의 가죽을 벗어 던져 본모습을 드러냈고 차에서 내려 하예진과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하예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어떻게 저인 것을 알았어요? 두렵지 않아요?”“지금 이 시각에, 또 이렇게 외진 곳에 주변에 주택도 없는데 겁이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밤에 이런 곳으로 오지 못할걸요. 그리고 저기에 묘지도 있는데 이런 곳에 예진 씨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하예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윤미가 온 후에야 약속 장소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발견했다.하예진도 한참 후에야 차를 세울 곳을 찾아 이윤미가 오기를 기다렸다.지금 그녀들이 주차한 곳은 방윤림이 그녀들에게 준 주소에서 수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묘지에서 이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어요. 만약 제가 알았더라면 아마 혼자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귀신이 무서워서요.”이윤미도 웃었다.“귀신이 뭐가 무서워요? 사람이 더 무섭죠.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예진 씨 분장 기술도 꽤 좋네요. 제가 제 부하들을 하루 호텔 입구에 보내 예진 씨를 기다리게 했거든요. 여기로 오시는 길에 예진 씨를 몰래 보호하라고 지시했는데 예진 씨가 나오는 것을 못 봤다고 하더라고요.”
곧 하예진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에서 나왔다.하예진은 방윤림이 그녀에게 준 그 주소대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차를 몰았다.노동명이 전화했다.하예진은 차의 속도를 늦춘 다음 노동명의 전화를 받았다.“동명 씨, 저 지금 나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고 해요. 지금 운전 중이니 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알았어. 운전 조심하고.”“네.”하예진은 하예정과 달리 천천히 차를 몰았다.다행히 하예정이 시내에 살고 있어서 차를 빨리 몰지 못했다. 만약 차가 적은 외진 곳으로 가게 되면 하예정은 비행기를 운전하는 것처럼 매우 빨리 몰 것이다. 전태윤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지, 그가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 아마 하예정이 운전대조차 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차를 몰고 있는 하예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동명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하예진이 변장하고 남몰래 혼자 차를 몰고 이윤미를 만나러 간 것을 알면 노동명은 아마도 걱정되는 마음에 바로 비행기를 타고 올지도 모른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고 있어서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방윤림이 준 그 주소는 가까운 곳이 아닌 꽤 외진 곳에 있었기에 내비게이션에는 차로 한 시간 이상 가야 도착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하예진이 차를 몰고 호텔을 나서자 이윤미가 방윤림에게 물었다.“예진 씨 나오는 거 봤어요?”방윤림이 대답했다.“제가 종업원에게 부탁해서 쪽지를 보냈으니 바로 떠날 겁니다. 하예진 씨가 방금 관성에서 왔기 때문에 낯선 곳이고 차량도 없으니 택시를 탈 것 같습니다. 아가씨도 출발하시면 됩니다. 하예진 씨가 곧 약속 장소로 갈 겁니다.”방윤림은 하예진을 만난 적 있었는데 하예진이 대담하고 세심하다고 추측했다. 하예진이 강성으로 온 목적이 이씨 가문과 연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방윤림은 하예진이 이씨 가문 때문에 강성으로 왔으니, 이윤미가 만나자고 하면 반드시 만나러 갈 것으로 생각했다.“사람을 시켜 예진 씨를 은밀히 보호하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