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희의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소우연에게 이미 새 사람이 생겼고 상대가 회남왕이라는 것과 둘 사이에 자식이 생기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뜻이었다. 회남왕에게 후사가 생긴다면, 그 황위는 평서왕부와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잔뜩 피곤해 보였던 이민수가 순간 멈칫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고, 눈에는 잠시나마 음침한 기운이 스쳤다. 회남왕의 얼굴이 망가지고 불구가 된 이후로, 그녀가 느끼건대 평서왕부는 그 자리를 반드시 차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힌듯했다. 덕빈이 혼인을 주선하여 그녀를 회남왕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했을 때, 이민수와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소우연을 대신 보내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보았었다. 소우연이 이민수를 깊이 흠모하고 있으니, 조금만 바람을 불어넣으면 그녀는 틀림없이 혼례를 거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된다면, 회남왕이 진원장군의 둘째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소문이 다시 한번 온 경성을 떠들썩하게 할 것이며, 단기간 내에 황제가 회남왕에게 혼인을 주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회남왕에게 왕비가 없으니, 황태손이 생길 일도 없어 평서왕부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출가 전까지 결사적으로 혼례를 거부하며, 심지어 이민수를 향한 충심을 표하며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던, 꽃가마를 올라 소씨 가문을 나서면 즉시 도망치겠다던, 절대 가족은 연루시키지 않겠다고... 하지만 결과는?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흉측한 몰골의 회남왕과 함께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스스로를 깎아내릴 필요 없다. 네 운명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니라.” 한참 머뭇거리던 이민수가 말했다. “나는 절대 너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곧 혼례 할 텐데, 괜히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그는 조금 불쾌해 보였다. 하지만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의 말에 소우희는 그제야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민수는 소녀의 손을 움켜쥐고 가슴 앞쪽으로 끌어당긴 후,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처음엔 가볍게 맛보았으나, 이내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소우희는 처음에 거부하다가 다시 받아들인 듯하다 어쩔 수없이 강요당하는 듯하더니 애교 섞인 투정을 늘어놓았다.“정말로 저와 혼인하실 건가요?” “물론이지. 우리는 곧 혼약을 맺게 될 것이다.”“저도 오라버니를 좋아합니다. 이생은 오직 세자 오라버니만 사랑할 겁니다. 그러니 절대 저를 저버리시면 안 됩니다.”“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맹세하겠다.”그녀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올랐었다. 도사는 이를 두고 천하를 다스릴 운명을 가진 여인이라 했었다.착한 심성에 의술도 뛰어나고 천명을 타고난 그녀를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옷은 이미 바닥에 흩어졌고, 사락사락 스치는 소음 속에 남녀의 숨결이 뒤엉켰다.소우연은 왕부로 돌아오자마자 진우에게 약재를 이락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온 마음을 다해 약고를 조제하는 데 몰두했다.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정연이 다가와서야 소우연은 고개를 들었다.“왕비마마, 저녁상은 이미 준비되었사옵니다.”“왕야도 모시거라.”그녀는 하마터면 또 시간을 잊을 뻔했다.이육진이 말하기를, 이왕 연극을 하려면 완벽히 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로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지내며, 덕빈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예, 그리하겠나이다.” 정연이 대답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소우연은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이육진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자, 진규가 이육진을 태운 휠체어를 잡고 문밖에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연은 소우연을 바라보며 왕야께서 자신에게 소리 내지 말라고 지시했음을 나타내는 표정을 지었다. 소우연은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왕야의 만복을 기원하나이다.”이육진이 목을 가다듬자, 진규는 휠체어를 밀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왕비는 앞으로 예를 갖출 필요
“저는…….” 소우연은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맞습니다. 저 또한 믿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자신 역시 이렇게 잘 살아 있지 않은가?이육진 또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우연은 몸을 살짝 숙이며 말을 이었다.“저는 왕야야말로 진명천자라 믿습니다.”진명천자!이육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은 참으로 담대하였다. 만약 자신이 용모가 망가지지 않았고, 불구도 아니라면, 그녀의 말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왕야…….” 소우연은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말은…… 왕야야말로 저의 진명천자이십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확신에 차 있었다. “그대의…… 진명천자라.” “네.”이육진은 낮게 중얼거렸다. 왕부에 시집온 소우연이지만 그녀에게서 한 번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녀는 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방금 그녀가 자신을 진명천자라 칭하였다. 혹여 그녀가 후궁의 자리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육진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저 살아남은 것만으로는 부족했다.이육진은 본래 이 이야기 속의 악역이었다. 그가 아무리 싸움을 피하려 해도, 서사가 그를 부추길 것이다.어차피 싸워야 한다면!그녀는 그와 함께 싸우고, 함께 운명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때 문밖에서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연과 무빈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저녁상을 방으로 들이는 바람에 둘의 대화도 끝이 났다.저녁 식사 후. 이육진은 검은색 긴 예복을 입은 채, 침상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소우연은 찻잔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왕야, 서호용정차를 준비하였사옵니다.” 이육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왕비는 서호용정을 좋아하시오?” 소우연은 단지 그와 대화를 시작하고자 한 것이었다. “네, 왕야께서는 좋아하시옵
그는 왕야가 아닌가? 무슨 일로 그녀의 의견을 물으시는 것인가?“며칠 후면 그들이 혼약을 맺을 예정인데 왕비는 그들의 혼인을 바라느냐?” 그의 말투는 마치 일상적인 대화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들이 누구인지 소우연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민수와 소우희, 그 두 사람의 혼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두 사람을 생각만 하기도 역겨웠다.만약 그들이 혼인한다면, 원작의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소우연은 고개를 들어 이육진을 바라보았다. “왕야, 저는 그들이 혼인하기를 바라지 않사옵니다.”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왕야께서 그들의 혼인을 막으실 수 있사옵니까?”탁탁탁……이육진의 손에서 떨어진 검은 바둑알들이 바둑판을 어지럽히고 말았다.“왕야…….”소우연은 깜짝 놀랐다. 혹시 자신이 실언을 한 것인가? 아니면 이육진이 그녀가 아직도 이민수를 흠모하여 그들의 혼인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예를 갖추려 했다. “왕비는 예를 갖출 필요 없소.”그는 여전히 평온했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는 약간의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소우연은 전해져 오는 고통에 가볍게 신음했다. 이를 느낀 이육진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왕비의 뜻을 따르도록 하겠다.” 무엇 때문인지, 소우연은 이육진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는 반쯤 굽혔던 무릎을 다시 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왕야께 감사드리옵니다.” “난 이미 예를 갖출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그가 그렇게 말할수록, 그녀의 태도는 더더욱 공손하게 느껴졌다. 이육진은 씁쓸했다.그렇게도 이민수를 흠모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왜 자신에게는 충성하는 태도를 보이는가? 그녀의 진심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소우연은 바둑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야와 다시 한 판 두겠나이다.”좋았던 국면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육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
“음.”남자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몇 마디 더 한다면 금방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들킬 것 같았다. 한참 후, 부드러운 손이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이육진은 강인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왜 그러십니까?”소우연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며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뼈마디가 또렷하고 비정상적으로 창백한 손이었지만 그 위로 도드라진 푸른 힘줄은 오리혀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몸의 흉터는 됐다.”“하지만 전에도 약을 바르지 않으셨습니까? 치료하는 김에 함께 치료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 이육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왕비는 그 흉터들이 싫은 것이냐?” 질문을 하고 나니 스스로도 참 어이없었다. 어느 누가 흉측한 흉터를 좋아하겠는가? 그는 그녀의 답은 기다리지 않고 손을 놓으며 말했다. “왕비의 뜻을 따르도록 하지.” “혹시 제가 불쾌하게 했사옵니까?” 소우연은 이육진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의 표정은 묘하게 뒤틀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괜한 생각은 하지 말거라.” “예.” 소우연이 계속해서 그의 옷을 벗기려 했으나, 이육진은 이불을 단단히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처음엔 그녀도 이유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지만, 머릿속에 문득 지난번 목욕 시중을 들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가 욕조에 빠졌을 때 손에 잡힌 물건이…… 설마, 반응한 것인가? 그녀는 남녀가 혼례 후 주공지례를 행한다는 것에 대해 정확한 개념이 없었다. 그저 남녀가 함께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정도였다.몸에 걸친 것들을 모두 벗겨지고, 여자는 남자의 품에 안기며, 그 순간부터 진정한 여인이 된다고들 했다...그러나 주공지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왜 얼굴을 붉히는 것이냐?” 그녀의 동작이 더뎌지고 옷을 한참이나 벗기고도 아직 벗기지 못한 것을 보고 이육진이 물었다. 여자는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
한 명은 아무 일 없는 척했고, 또 다른 한 명은 못 들은 척을 하면서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약 바르기가 겨우 끝이 났다. 이육진은 이미 침상에 누워 있었다. 소우연은 촛불을 끄려 했지만, 이육진의 말에 행동을 멈췄다. “먼저 침상에 올라오거라.”소우연은 그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대로 침상에 올랐다. 그가 큰 손을 휘젓자, 방 안의 촛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침상에 누운 소우연은 이육진을 몰래 훔쳐보았다. 어둑한 방 안에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반듯이 누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소우연은 애써 원작 속 이육진에 관한 일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다.예를 들어, 혼례를 피하려다 붙잡힌 그녀가 팔다리가 부러진 채 소씨 가문의 문 앞에 버려지고 결국 혹한 속에서 얼어 죽었다.이육진은 유일한 반역자였는데, 왜 나중에는 아내를 맞이하지 않았던 것일까? 만약 그가 아내를 맞이했다면, 황위를 두고 다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들을 낳기만 한다면, 황제가 그 아들을 황태손으로 책봉했을 테니 말이다.그렇게 된다면 이육진은 태상황으로 여생을 편안히 보냈을 것이다. 그러면 이민수가 황제가 되고, 소우희가 황후가 되는 원작의 서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이육진이 그 '방면'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의서를 많이 읽는 그녀였지만 남성의 그 방면에 대해선 익숙하지 않았다. 더구나 직접 연구해 본 적도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녀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야…….”그녀의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는 어딘가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냐?”소우연은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바라보았으나, 쉬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남성의 체면과 직결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왕비…….” 이육진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난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니라.” 약속한 일?그녀가 그의 상처를 낫게 하면 그녀를 향해 웃어주겠다는 그 약속 말인가? 소우연은 이육진쪽으로 몸을 기울였다.“왕야께 감사를 드리옵니다.” 이육진은 거듭 침만 삼킬 뿐이었다.“그러지 않아도 된대도.” 너무 뜨겁게 달아오른 몸 상태에 그는 자꾸만 이불 귀퉁이를 들어 올리며 열을 식혔다.“왕비, 어서 쉬도록 하거라.” 그는 더 이상 그녀의 행동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이러다간 정말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소우연이 물었다. “왕야께서는 제가 싫으시옵니까?” 그러자 이육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맨 소녀라는 것을 안 뒤에는 그녀 말곤 다른 여인을 맞이할 생각조차 없을 정도였다.“왕야?”그가 왜 쓴웃음을 짓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혹 정말로 그 방면으로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를 남성적 매력이 가득했던 장군으로 그렸던 작가를 꾸짖었다. 한때 전장에서 무적의 장군으로 통하던 존귀한 황태자를 어찌 이토록 망가뜨린단 말인가?그렇게 비뚤어지고 뒤틀린 존재로 만들면서까지 남녀 주인공의 순결함을 돋보이게 하려던 걸까?그때 갑자기 남자의 억센 손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왕비는 진심으로 내가 좋으냐?” “전…… 그건....” 소우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진짜 이육진이 좋은 걸까?환생한 이후로 그녀에게는 더 이상 사랑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육진이 곁에 있었다.눈을 떠보니 그녀는 이 남자의 사람이 되어있었다.그와 자신만이 반역자였다. 이 세상은 여자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녀는 힘이 없는 존재였고 의지할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오직 이육진,그만이 유일하게 그들과 맞설 힘을 가지게 해주는 사람이었다!이육진은 그녀를 놓아주고 몸을 돌려 그녀를 등지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깊었다.다음 날 아침,
진우도 귀를 바짝 세우며 마차 밖의 동태를 살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은 상대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한 웬만한 대화는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장안 거리의 번잡한 길목을 몇 바퀴나 돌며 생각했다. 왕비마마께서는 도대체 어디를 가시려는 걸까?소우연은 다시 태어난 이후 이토록 마음이 어지러웠던 적은 없었다.만약 이육진이 정말로 자손을 볼 수 없다면, 황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원작의 서사로 회귀하지 않겠는가! 원작에서 이육진은 최후에 ‘척골지형’을 당한다. 그 잔인한 형벌을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마차를 멈추거라.”소우연은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장안 거리의 인파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복잡했다. 아니다. 그들은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반드시 바꿀 것이다.그때, 멀리서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놈이 무엇을 하는 자이기에 감히 이리도 함부로 구는 것이냐?” 소우연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소우희와 혜주가 약재를 든 채 약국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그녀가 직접 진정향을 제조하려는 것인가? 그녀의 시선은 곧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얼굴에 수북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거대한 몸집은 소우희와 혜주를 압도하고도 남았으며 나이는 사십 대쯤 되어 보였다. “너는 대체 누구냐? 본왕이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그때 정연이 낮은 소리로 소우연에게 속삭였다. “평춘왕이옵니다.” 평춘왕 이종대? 소우연은 원작 속 이 인물을 떠올렸다. 그는 황실의 방계로, 방탕하고 음탕하기로 유명했다. 왕부에는 수많은 후궁과 첩들이 있었고 세 명의 왕비를 연이어 보낸 뒤로는 새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그러던 중, 우연히 소우희를 만났고 순간 그녀의 미모에 사로잡혀, 이후 끈질기게 소우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그러나 신중했던 이민수는 이를 당장 해결하려 하지 않았고 먼저 평춘왕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왕비가 말해보시오.”이육진은 손에 낀 청옥 반지를 굴리며 무심한 듯 말했다. 그는 방금 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소우연을 바라보던 그 경고의 눈빛, 그 모든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진규에게서 들었던 바에 의하면, 소우연이 친정에 갔던 날 이들의 태도가 심히 불손했다 하였으나, 그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가슴속 분노는 억누를 수 없이 타올랐다. 화로 속 은탄이 파직 파직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조용한 실내에서는 숨소리마저 크게 울려 퍼졌다.소우연은 담담히 미소 지었다.“왕야, 저는...”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육진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듯한 태도이기도 했다.“왕야께서는 제가 누구인지가 그리도 중요하십니까?”이육진의 차가운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왕비는 이미 내 마음을 사로잡았소. 그대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소.”그 말이 떨어지자, 소씨 가문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문밖에서 폭죽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예식 진행자가 소리 높이 외쳤다.소홍범은 이육진에게 예를 갖춘 후, 온 가족은 서둘러 평서왕부를 맞으러 나갔다. 이민수는 붉은빛 예복에 담비 털망토를 걸치고, 뒤에는 중매인과 예물을 운반하는 하인들이 있었다.수십 대에 걸친 화려한 예물 행렬은 매우 화려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혼약식 예물일 뿐. 진정한 혼례가 치러지는 날, 그가 준비할 채단과 예물은 경성 여인들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게다가 소씨 가문이 소우희를 위해 준비한 혼수 역시 십 리를 채울 정도로 화려했으니. 하지만 소우연은? 소우연은 한때 소씨 가문의 적녀였음에도 정작 혼인할 때 받은 것은 변방에 있는 두 채의 가게뿐이었다.그마저도 아직까지 임진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교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다.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만약 이민수와 소우희가 결국 혼인한다면, 내 운명을 바꾸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겠지.' “왕야……”소
이육진은 혹여나 소우연이 진원장군 댁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여, 진우 한 명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진규도 보내는 것인가? 소우연은 마차에 오르고 나서야 이 마차가 이육진의 전용 교자였음을 깨달았다. 보통 마차보다 크기가 두 배는 넉넉했다. 마차 문이 열리는 순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은색 가면을 쓰고 검은색 예복을 걸친 이육진이었다.마차 내부는 충분히 넓어서 그의 휠체어도 있었다.“왕야?”소우연은 그가 마차에 타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지난번 친정에 갈 때도,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우희의 혼약식에 가려는 것인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이육진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하는 수없이 자신의 손을 올렸다.“왕야께서도 소씨 가문을 방문하시려는 겁니까?”그러면서 그녀는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시선은 은색 가면을 쓴 남자에게 향했다.흉터들은 가려져 있었고 오직 깊고 서늘한 눈동자와 뚜렷한 턱선만이 드러나 있었다. 순간,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가 본래의 얼굴을 되찾으면, 분명 절세의 미남일 터였다. 이육진은 가볍게 “그래.” 하고 답했다. 정연이 마차에 올라 이육진에게 예를 갖춘 후, 진우가 마차를 몰아 진원장군부로 향했다. 진원장군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소우연은 직접 이육진의 휠체어를 밀며 열여섯 해를 살아온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하인들과 오라버니들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가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일 것이다.소홍범은 임진숙과 아들들을 대동하여 이육진을 맞이했다. 비록 그가 지금은 흉측한 얼굴에 불구가 되었어도 황제의 유일한 친자인 만큼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이육진이 상석에 앉고 소우연은 그의 우측에 자리했다. 모두가 혼약을 축하하는 가운데 이육진이 입을 열었다. “소 장군,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소.”소홍범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한참 후, 이육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소우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소우연, 너는… 알고 있느냐?”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소우연의 고운 눈썹이 찌푸러졌다.“무엇을 말이옵니까?”그녀는 그와 시선을 맞추고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그녀의 온기는 실로 매혹적이었다.“소녀 궁금하오니 말해 보시옵소서.”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그를 조용히 감싸안았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은 마치 그에게 용기를 주는 듯했다.이육진은 몇 번이고 말을 삼켰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모두가 내 얼굴을 두려워하는데, 너는 어찌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냐? 그토록 울며불며 나와의 혼인을 거부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어찌하여 변한 것이냐? 모든 것이 거짓이냐?”소우연은 입을 떼려다 멈칫했다.눈앞의 이 사내는 한때 황태자였고 전장을 누비던 무패의 전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도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들은 그저 소설 속 배경에 불과한 인물들, 누군가의 발판이 되어줄 뿐인데 말이다.“위엄이 넘치시는 왕야를 제가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사옵니까?”이육진의 심장이 단단히 죄어왔다.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이 며칠 사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경성을 뒤흔들고 배후를 처단하는 것만을 원하지 않았다.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이민수는 어쩔 셈인가? 너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고, 한때는 네 약혼자이기도 하였는데, 이리 쉽게 잊을 수 있단 말이냐?”“이미 잊었사옵니다. 여인은 남편을 하늘로 섬기는 법. 다른 이의 남편은 저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왕야께서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다시 태어난 그녀는 그저 소설 속 희생될 조연에 불과했다. 설령 이 모든 사실을 이육진에게 털어놓는다 해도 그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전생에,
“만약 내 상처가 낫지 않고 내 다리 또한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 해도 왕비는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인가?”그는 스스로가 지나치게 탐욕스러워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이라도 스치는 아주 미세한 후회나 거짓마저 놓칠까 두려우면서도 그는 조용히, 또 간절히 그녀를 응시했다. 몇 번의 숨결이 흐르고, 소우연은 여느 때처럼 잔잔한 미소를 띠며 그의 손을 조용히 감쌌다.“왕야께서는 제가 도망갈까 두려우신 것이옵니까?”그녀는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과거, 자신이 믿던 가족들에게 버려졌던 그날의 공포는 여전히 가슴 한편에 서려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육진이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비록 그녀는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언젠가 이육진마저 그녀를 버린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었다.하지만 소우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 생을 이육진에게 걸어보기로 했다.하늘이 그녀를 다시 살게 한 이유가 다시금 비극을 되풀이하라는 것은 아닐 테니까.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들은 서로의 짙은 외로움을 보았다.이육진의 손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소우연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왕야께서 저를 내치지 않는 한 저는 평생 왕야 곁에 있을 것이옵니다.” “절대 내치지 않을 것이다.”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고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그의 몸이 끝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와 온전히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일 터. 그럼에도… 그녀가 그의 곁에 남아준다면... “저 또한 그러하옵니다.”소우연은 그의 손을 끌어올려 자신의 볼에 살며시 가져갔다. 이육진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그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깊이 빠져 들것이다.오랜 시간이 흐른 뒤, 소우연은
소우연은 태연한 듯 보였지만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서재가 있는 뜰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청색과 백색 차림의 두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심소균과 용강한? 그들이 방금 일부러 멈춰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하지만 이미 사라진 그들에, 소우연은 다시 발길을 돌려 서재에 들어섰다.“매화가 너무 아름다워 꽃병에 꽂아 왕야의 책상 위에 두려 하옵니다. 그러면 왕야께서 감상하시기에 좋을 듯하옵니다.” 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방금 용강한이 했던 ‘왕비는 그대의 복성이오.’란 말을 떠올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그의 시선이 그녀의 품에 있는 노란 매화로 향했다. “참으로 어여쁘게 피었구나.”“왕야께서는 늘 본채에 계셨으면서도 매화가 피어난 것을 보지 못하셨사옵니까?” 이육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멎쩍은 미소를 지었다.“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왕야께서는 꽃을 즐기지 않으십니까?”그녀는 꽃병을 이육진에게 건넸다. “나는 매화는 좋더구나.”“저도 역시 매화가 가장 좋습니다.” 그녀는 휠체어에 밀어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그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육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지나간 두 사람 중 흰옷은 흠천감 용강한이고 푸른 옷은 진국 공부 심소균이다.”소우연은 깜짝 놀랐다. 무빈과 정연은 그녀에게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는데 말이다.“왜 그러는 것이냐?”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자, 이육진이 살짝 몸을 돌렸다.“저들을 알고 있었느냐?” 소우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사옵니다.”그녀의 도움으로 이육진은 어느새 책상 앞까지 다가갔다.방 한켠, 온돌 위는 아직도 바둑판과 찻잔이 놓여 있어, 방금 전까지 셋이서 차를 마치며 바둑을 두면서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책상 위에는 며칠 전에 꺾어 온 매화가 이미 시들어있었다. 소우연은 새 꽃병으로 바꿨다. 그러다 문득 그곳에 놓인, 오래된 거울
정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이육진이 화상을 입은 이후, 왕부의 분위기는 한층 무거워졌다.적어도 더 이상 웃음소리는 감히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왕부에서 이유 없이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었다.소우연은 조용히 매화를 꺾었고 정연은 그 꽃들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연의 손은 더 이상 꽃을 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왕비 마마, 본채로 가서 꽃들을 정리하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어차피 본채는 매일 사람들이 청소하고 있으니 이참에 시든 매화도 새것으로 갈아 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소우연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본채로 향해 발을 옮겼다. 소우연은 문득 서재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마침 무빈과 눈이 마주쳤다. 무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다. “왕야께서는 진국공부의 심소균 장군과 매우 가까운 사이겠지?”방에 들어서자, 그녀는 손에 든 가위로 매화 가지를 정리했다. 꽃병을 가져와 꽃꽂이를 하려던 정연이 그녀의 말에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왕비 마마께서… 이를 알고 계신단 말인가?소우연은 태연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출정하셨을 때, 진국 공부의 공작 어르신과 함께하셨고, 심소균 역시 그때 참전하였으니, 그들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라는 사실을 경성에서 모른 이가 없단다.”사실 이야기 속에 이육진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이 언급된 바 있었다. 하여 진국공부와 심소균, 심장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정연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진국 공부의 심 장군과 소 장군, 모두 예전에 왕야와 함께 전장에 나섰기에 각별한 사이입니다.”소우연은 이들이 그녀와 이육진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했다.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의 운명은 이미 이육진과 하나로 묶여 있었다.그렇다면, 차라리 미리 준비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정연은 소우연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여러 해 동안 왕야께서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무빈은 그 웃음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소우연에게 곧바로 밝힐 수 없어 그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인 알아챌 길이 없사옵니다.”‘심장군께서는 평소에 활달한 성격이시나 왕야께서 사고를 당한 후로는 결코 왕부에서 이처럼 거리낌 없이 행동한 적이 없었는데...’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그녀는 이미 본채의 정자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찬바람이 옷깃을 스미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무빈은 그녀를 따라가며 정중히 권했다. “왕비마마, 차라리 본채로 돌아가 좀 더 따뜻한 곳에서 쉬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정연 역시 이에 동의하며 거들었다. 그러나, 소우연은 정원의 매화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매화가 아름답게 피었구나. 몇 가지를 꺾어 왕야의 서재로 가져가야겠다.”정연: “……”무빈: “……”항상 왕야를 생각하고 계시는 왕비의 모습에 두 사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럼, 제가 다시 모시러 오겠사옵니다.”정연이 소우연의 뒤를 따랐다. 정연은 왕비께서 혹여 사고를 당하기 전의 왕야를 은밀히 사모하신 적은 없으셨는지 묻고 싶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왕야를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그러나 왕비께는 본래 정인이 있었으나 강제로 대신 시집와야 했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왕비는 아주 현명한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왕야에게 시집온 이상, 왕야만을 바라보며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으니까.아이라도 낳게 된다면 왕비의 미래는 더욱 창창할 터, 어쩌면 머지않아 황태후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정연은 말없이 가위를 가지러 갔다.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서재 쪽 한 모퉁이가 희미하게 보였다.그녀는 무빈이 서재로 들자, 곧 어린 내시가 조용히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그때, 매화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소우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
‘그런데 왕비마마께서 과연 치료할 수 있겠는가?’ “내 얼굴에 난 상처… 자세히 보거라.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 같으냐?”그는 겉으로는 태연한 듯 보였으나, 내심 회복에 대한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소우연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무빈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얼굴은 전처럼 창백하지 않사옵니다. 며칠 동안 햇볕을 쬐셨기에 좀 더 건강해 보이는 것 같사옵니다.”“본왕이 묻는 것은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흉터가… 옅어졌느냐?”“저는… 그것이…”“거짓말은 하지 말거라!”그러자 무빈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소인 감히 거짓말은 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전에 왕야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사오니, 잘 알지 못하겠사옵니다.”잘 알지 못하겠다… ‘그건 아직 변화가 없다는 뜻이겠지.’이육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손을 가볍게 흔들어 무빈에게 퇴거를 명했다.“물러가거라.”“오래된 상처이오니 아무리 신묘한 의술을 지니셨다 하더라도 그리 빨리 나을 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너무 조급해하지 마옵소서..”무빈은 조심스레 이육진을 위로했다.차라리 왕야의 고통을 대신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그는 그저 내시일 뿐이니 얼굴이 흉해지든, 몸이 불편하든 큰 상관이 없었으니까.이육진이 아무런 말도 없자 무빈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예를 갖춘 뒤, 살며시 문을 닫았다.책상 위에는 무빈이 남겨둔 거울이 놓여 있었다.거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그는 거울을 집어 오랜 세월 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손끝이 심하게 떨렸다.머릿속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난 붉은 칼자국은 마치 거대한 지네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화상 자국은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어 마치 팔순 노인의 주름진 피부
“저는 그저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그럽니다.”소우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마치 한 송이 탐스러운 꽃처럼 곱게 피어났다.“필요 없느니라.”이육진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예.”소우연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어차피, 얼굴과 다리가 회복된다면, 그때는 자연스레 답이 나오겠지.’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이육진이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는 것이었다.“왕비는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그녀의 붉어진 얼굴에 이육진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우연의 손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손끝이 닿는 순간, 소우연은 불에 덴 듯이 화들짝 손을 홱 빼내고는 이불 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이육진은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누운 채, 그녀를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온몸을 이불 속에 꼭꼭 감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귀여웠다.“그러다 숨 막혀 쓰러질 것 같구나.” 그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휠체어에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빈을 불러 시중을 들게 했다.아침 식사 후.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약을 바르며 물었다. “요 며칠 피부가 가려우시거나 찢어지는 듯한 감각이 있으셨사옵니까?”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그렇더구나.”“그렇다면 제대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옵니다. 왕야의 피부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증거이니 걱정하지 마옵소서.”“참말로… 회복되고 있단 말이냐?”“그러하옵니다.” 이육진은 이 가려움이 햇빛에 오래 노출된 탓이라 여겼었다. 약을 바른 후, 이육진은 바로 서재로 향했다. “무빈아.”무빈은 급히 차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여기에 있사옵니다.”“거울을 가져오거라.”“거울 말이옵니까?”왕부에서 거울을 찾다니… 얼굴에 화상을 입은 뒤, 그는 왕부에 있던 모든 거울을 부수어버렸고 한 점도 남겨두지 않았다. “왕야, 지금은 거울이 없사옵니다. 즉시 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