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야,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임진숙은 황급히 소우희의 입을 막으며 말을 이어갔다.“그자는 이제 네 서방이야. 두 사람은 운명 공동체가 됐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서로 존경하고 존중해야 해.”“운명 공동체… 허허…”예전에 소우연을 회남왕 저택에 시집 보낼 때에도 가족들은 똑같은 말로 소우연을 설득했다.소우희는 평춘왕 저택에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설마 지금까지 그녀에게 보여준 사랑과 관심이 전부 가짜란 말인가?소우희는 가치가 없어지니 헌신짝처럼 내버려진 자신의 신세가 소우연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우희야, 참아야 돼. 그래도 넌 지금 평춘 왕비잖아. 안주인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돼. 그게 여자의 삶이고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살아왔어.”임진숙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막내 딸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임진숙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 고통을 대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어머니,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까?”소우희가 임진숙을 보며 묻자 임진숙이 대답했다.“없어. 얼른 아이를 낳아야 너도 기댈 구석이 생기는 거야. 이러다가 나이가 많은 평춘왕이 어느 날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소우희는 결국 후처일 뿐이다. 더군다나 평춘왕은 소우희를 임신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며 매번 합방을 하고 나면 소우희에게 피임 탕약을 먹였다.생각할수록 서러워진 소우희는 친정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결정했다.하지만 이튿날, 소우희의 바람과 달리 평춘왕은 소우희를 데리러 직접 진원 장군 저택에 찾아왔다.이번에는 사위답게 선물까지 들고 왔지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소홍범은 서재에 들어가 평춘왕을 만나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임진숙 혼자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평춘왕을 보자마자 소우희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어머니가 저를 하도 그리워하셔서 친정에 며칠만 더 있다가 돌아가도 되겠습니까?”그 말에
소홍범의 말에 임진숙은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우리 우희가 평서왕세자에게 시집가는 건 이미 확실하게 정해진 일이었는데 소우연 그 계집애가 훼방을 놓는 바람에…”“그 아이가 무슨 훼방을 놓았단 말이오? 우희에게 혼인을 하사한 사람은 덕빈마마인데 대체 소우연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소우희가 평춘왕과 결혼하게 된 건, 덕빈이 소우희 대신 소우연이 회남왕의 왕비가 된 일에 대한 보복이다!소우희 한 사람만 희생하고 소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덕빈은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봐야 한다.이런저런 일들이 생각나자 머리가 아픈 소홍범은 대충 몇 마디 당부하고는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이날.조정을 나선 이육진은 저택으로 돌아갔다. 소우연이 약을 발라주자마자 이육진은 바로 지팡이를 짚고 걷기 연습에 돌입했다.이때, 간석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소씨 부인이 찾아왔다고 말을 전했고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소우연에게 물었다.“만나고 싶으냐?”“만날 이유가 없습니다.”소씨 가문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기분만 나빠졌다.“가서 그자에게 전해라. 난 이미 오래전에 소씨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이제 더 이상 왕래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확실하게 얘기하거라.”눈치를 살피던 간석은 왕비의 맺고 끊음이 참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왕비는 왕야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보면 소우희 대신 왕야와 혼인을 치른 일로 소씨 가문 사람들을 많이 원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휴… 왕야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텐데…’방을 나서기 전, 간석은 몰래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다가 이육진과 눈이 딱 마주쳤고 결국 불쌍하게 이육진을 쳐다보던 눈빛도 들키게 되었다.화들짝 놀란 간석은 바로 정신을 번쩍 차렸다.‘왕야가 어떤 분인데 내가 감히 불쌍하게 여기고 있는 거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한편, 이런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던 소우연은 간석이 방을 떠나자마자 이육진에게 물었다.“왕야, 혹
“소우연에게 전하거라. 걔가 의술을 익혔고 그 약들까지 전부 걔가 조제했다는 사실을 소씨 가문 사람들 전부가 알았다고. 예전에 서럽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서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직접 보내기까지 했다고. 가족의 정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다면 소씨 가문에 한 번 다녀가라고 똑똑히 전하거라.”“그건…”“혈연은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그런 양심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냐? 난 애초에 그 아이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말을 마친 임진숙은 나인과 함께 돌아서서 떠났다.간석은 마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임진숙의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정신을 번쩍 차린 채 손에 들고 있는 선물을 힐끗 쳐다보았다.‘소씨 가문에서 저번에 보상으로 꽤 큰돈을 들였을 텐데 아직도 선물을 준비할 돈이 있나 보네?’본채로 돌아온 간석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한 뒤,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넸지만 소우연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뒤늦은 가족애는 필요 없어.”곁에 서있던 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연이 네 말이 맞아.”대신 선물을 받은 이육진이 열어보니 안에는 화차 한 통이 들어 있었다.“말리화차네요.”씁쓸하게 웃던 소우연은 눈물을 살짝 보이기도 했다.“전에 소우희 덕분에 말리화차를 몇 번 마신 적이 있는데 마실 때마다 얼굴이 퉁퉁 부었습니다. 그런데 선물로 저에게 말리화차를 주시네요.”잠시 머뭇거리던 소우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말리화차는 소우희가 가장 좋아하는 화차입니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럼 연이 너는 어떤 차를 좋아하는 것이냐?”“전 국화차를 좋아합니다. 체내의 열을 내려주거든요.”“이 서방님이 잘 기억하고 있겠다.”이육진이 다정하게 말하자 소우연은 그런 이육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서방님’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았다.한편, 곁에 서있던 간석은 바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왕야는 왕비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야!’이육진은
“왕야…”씻고 나온 소우연은 책을 들고 멍하니 앉아있던 이육진을 보게 되었다. 손에는 책을 들고 있지만 신경은 다른 곳에 팔린 것 같았다.‘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고 있는 거지?’이육진이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자 소우연은 빠르게 다가가 은은한 향기가 나는 손으로 이육진이 들고 있던 책을 거꾸로 돌렸다.“왕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책을 거꾸로 들고 있는 것도 모르다니.이육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다 씻은 것이냐?”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연에게 목욕물을 새로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조금 있다가 해도 된다.”이육진의 말에 소우연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왕야께서 조금 전에 씻고 싶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조금 전에는 안마하느라 땀에 흠뻑 젖은 소우연을 보고 함께 씻고 싶었던 것이지만 이제는…“안 씻어도 될 것 같다.”말을 하던 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지팡이를 가져왔다. 그가 휠체어에서 일어나자 소우연은 본능적으로 부축하려고 했다.하지만 소우연이 부축하기도 전에 이육진은 스스로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소우연 앞에 서있었다.이육진은 키도 크고 몸매도 건장했다.소우연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육진 어깨에도 닿지 않았다.“조심하십시오, 왕야.”소우연이 웃으면서 얘기하자 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휘청거리며 힘겹게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지팡이를 짚고 있는 두 팔에 힘줄이 튀어나올 만큼 걷기 연습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소우연은 이육진과 함께 몇십 분 정도 걷기 연습에 집중했고 어느새 이육진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우연은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다시 일어서서 걸으려면 침술과 안마 외에 고통을 참고 재활 치료를 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왕야, 조금만 쉬었다가 하십시오.”소우연이 손수건을 들고 까치발을 들자 흠칫하던 이육진은 이내 소우연이 이마의 땀을 닦을 수 있게 허리를 살짝 숙였다.“한순간에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 달 사이에 왕
그렇다면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우희가 저지른 일들을 전부 알고 나서 소현준 혹은 소홍범이 소우연에게 사과라도 하라고 임진숙을 보낸 건가?소우연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했다.똑같이 임진숙 뱃속에서 나온 딸인데 왜 소우희만 귀한 목숨이고 소우연은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인 걸까?‘아니지. 소씨 가문 사람들도 나쁘지만 이 소설을 쓴 사람이 더욱 나빠. 대체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소우희와 이민수 같은 주인공을 써낼 수 있는 걸까?’소우연은 그저 이 소설 속 별볼일 없는 작은 역할이지만 자신이 전생에 당했던 수모와 불공평한 대우만 생각하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지만 그 감정만큼은 진실된 것이다.소우연은 자신이 소설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고 슬펐다.“그럼 혜주 그자를 사 오시겠습니까?”진규의 물음에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다.“그자를 데려오고 싶으냐?”“말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올 필요가 있겠습니까?”혜주가 정말 밖에서 뭔가를 소문내고 다닌다고 해도 소씨 가문 사람들과 소우희에 관한 안 좋은 얘기들일 것이고 소우연에 대한 할 말은 없을 것이다.“부인 말이 맞네.”소우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육진은 손을 흔들며 진규에게 이만 가보라고 했다.한편, 이육진이 매번 웃으면서 소우연을 ‘연이’, ‘왕비’, 그리고 ‘부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소우연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이러다가 정말 이육진의 다정함에 푹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한편, 관아에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 한 명이 거간꾼에게 물었다.“혹시 값싸고 일도 잘하지만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 노비가 있느냐?”소녀의 말에 거간꾼이 실실 웃으면서 대답했다.“아유, 기가 막히게 그런 노비가 딱 하나 있습니다. 아씨가 얘기한 요구에 딱 들어맞는 아이입니다.”“그래? 어디 한번 나한테 보여주거라.”“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말을 하던 거간꾼은 돌아서서 일꾼에게 손을 흔들었고 이내 혜주가 끌려왔다.“살아있는
눈이 휘둥그레진 혜주는 재빨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속으로 새로운 주인을 잘 모시겠다고 웅얼거렸다.그 모습에 소녀가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뭐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까. 대호한테 약을 달이라고 했어. 나중에 약을 마시고 이걸 혓바닥에 대고 있거라.”소녀는 약통 하나를 꺼내 혜주에게 건넸다.“꼭 나아야 한다.”혜주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선한 주인을 만났으니 혜주도 최대한 빨리 나아서 주인을 잘 모실 거라고 다짐했다.약통을 받은 혜주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이건 만안당에서 팔고 있는 고약 아닌가?’떨리는 손으로 약통을 들고 있던 혜주는 마음이 너무 씁쓸하고 서러웠다.소홍범이 그녀의 혓바닥을 자르고 그녀를 팔아버리겠다는 말에 혜주는 살려달라고 애원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기절한 것이다.극심한 고통에 눈을 떴을 때, 혜주는 이미 혓바닥이 잘린 채 관아에 갇혀 있었다.혜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녀가 화장대 앞으로 다가가 얼굴 화장을 지웠다.화장을 지운 소녀의 얼굴을 본 혜주는 화들짝 놀랐다. 소녀는 소우연과 전혀 닮지 않았으며 되레 평서왕 왕비와 얼추 비슷한 느낌이었다.숨을 크게 들이마신 혜주는 소녀의 화장 실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렇게 자신 앞에서 거리낌 없이 대놓고 화장을 지우는 것도 신기했다.‘하긴, 난 이제 벙어리가 됐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조금 전, 소녀는 혜주에게 글을 익히라고 했다. 하지만 소녀가 관아에서 혜주를 사올 때 분명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노비가 필요하다고 했는데…벙어리인 혜주가 글도 읽을 줄 모르면 비밀을 더욱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 혹시 새 주인의 비밀이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건가?“아령아…”밖에서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화려하게 치장한 부인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혜주가 의아한 표정을 짓던
”예, 소녀… 왕야를 배웅하겠습니다.”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으며 문 앞까지 걸어갔다. 아령은 난간에 기대어 이종대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몸을 돌리는 순간, 방 안에 이지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세자 저하께서는 언제 들어오셨습니까?”아령은 눈웃음을 머금고 그에게 다가갔다.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순간 망설여졌다.그러나 이지윤은 그녀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거침없이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네가 정겹게 저 자를 배웅할 때부터.”“제가 언제 정겹게 배웅했단 말입니까?”“나조차 질투가 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헛소리 마세요. 그저 연기한 것뿐입니다.”“그럼 지금도 연기를 하는 것이냐?”그는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순간, 아령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소녀는 이미 세자 저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저를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아령아, 울지 마. 울지 마. 다 믿으마.”“됐습니다.”아령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저하께서 찾으시던 사람을 사 왔습니다. 방금 전 저하의 부왕께서도 물으셨습니다.”“뭐라고 대답했느냐?”“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 왔다고 했더니,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그렇다면 문제될 건 없겠구나.”아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세자 저하, 소우희의 여종을… 왜 구하신 겁니까?”이지윤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 여인은 타고난 봉명이라 하지 않느냐? 그 자의 모든 비밀을 알거나, 나를 위해 쓸 수 있다면, 누가 감히 우리 평춘왕부를 무능하다 하겠느냐?”아령은 몇 번이나 퉤퉤 하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영명하시고, 큰 뜻과 포부를 품으신 분이십니다.”“아령아, 만약 내가 그 뜻을 이루게 된다면,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겠다.”“하지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그녀의 눈빛이 순간
“소첩이 어찌 감히 왕야를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소우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그의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결국 조용히 삼켜버렸다.“네가 단속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이 얼마나 따분하겠느냐?”소우연은 이육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진심일까?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따스하게 구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이토록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될까?가슴이 두근거렸다.아니, 두근거린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했다.심장이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마구 뛰었고,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응?”이육진이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소우연은 얼굴이 붉어진 채 조용히 답했다.“소첩은 그저 왕야를 잘 모시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감히 그 이상의 선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그래, 그래.”이육진은 피식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정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3월 말.이육진은 조정의 일을 마친 뒤,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그 안에는 탐스럽게 익은 붉은 앵두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소우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벌써 앵두가 익을 시기가 되었나요?”“그래. 새빨갛게 잘 익었더군. 맛도 달콤하니 네가 참 좋아할 것 같았다.”“소첩… 좋아합니다.”이육진은 손수 짠 대나무 바구니를 정연에게 건네며 말했다.“씻어서 왕비께 드려라. 남은 것은 너희도 나누어 먹도록 하여라.”정연은 앵두를 내려다보았다.투명한 이슬이 맺힌 듯한 붉은 열매가 한눈에도 신선했다.아, 아니. 왕야께서 직접 골라 오신 앵두이니 틀림없이 달콤할 것이다.“왕야, 감사합니다. 또한 왕비님의 은혜에도 감사드립니다.”이육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앵두는 오래 두면 금방 상해버린다.어차피 썩히느니, 하인들도 함께 나누어 먹는 게 낫지 않은가.잠시 후, 정연이 손질한 앵두를 다시 들고 돌아왔다.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린 그녀가 물러나자, 이육진이 소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