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우희가 저지른 일들을 전부 알고 나서 소현준 혹은 소홍범이 소우연에게 사과라도 하라고 임진숙을 보낸 건가?소우연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했다.똑같이 임진숙 뱃속에서 나온 딸인데 왜 소우희만 귀한 목숨이고 소우연은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인 걸까?‘아니지. 소씨 가문 사람들도 나쁘지만 이 소설을 쓴 사람이 더욱 나빠. 대체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소우희와 이민수 같은 주인공을 써낼 수 있는 걸까?’소우연은 그저 이 소설 속 별볼일 없는 작은 역할이지만 자신이 전생에 당했던 수모와 불공평한 대우만 생각하면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지만 그 감정만큼은 진실된 것이다.소우연은 자신이 소설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고 슬펐다.“그럼 혜주 그자를 사 오시겠습니까?”진규의 물음에 이육진은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다.“그자를 데려오고 싶으냐?”“말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올 필요가 있겠습니까?”혜주가 정말 밖에서 뭔가를 소문내고 다닌다고 해도 소씨 가문 사람들과 소우희에 관한 안 좋은 얘기들일 것이고 소우연에 대한 할 말은 없을 것이다.“부인 말이 맞네.”소우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육진은 손을 흔들며 진규에게 이만 가보라고 했다.한편, 이육진이 매번 웃으면서 소우연을 ‘연이’, ‘왕비’, 그리고 ‘부인’이라고 부를 때마다 소우연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이러다가 정말 이육진의 다정함에 푹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한편, 관아에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 한 명이 거간꾼에게 물었다.“혹시 값싸고 일도 잘하지만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 노비가 있느냐?”소녀의 말에 거간꾼이 실실 웃으면서 대답했다.“아유, 기가 막히게 그런 노비가 딱 하나 있습니다. 아씨가 얘기한 요구에 딱 들어맞는 아이입니다.”“그래? 어디 한번 나한테 보여주거라.”“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말을 하던 거간꾼은 돌아서서 일꾼에게 손을 흔들었고 이내 혜주가 끌려왔다.“살아있는
눈이 휘둥그레진 혜주는 재빨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속으로 새로운 주인을 잘 모시겠다고 웅얼거렸다.그 모습에 소녀가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뭐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까. 대호한테 약을 달이라고 했어. 나중에 약을 마시고 이걸 혓바닥에 대고 있거라.”소녀는 약통 하나를 꺼내 혜주에게 건넸다.“꼭 나아야 한다.”혜주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선한 주인을 만났으니 혜주도 최대한 빨리 나아서 주인을 잘 모실 거라고 다짐했다.약통을 받은 혜주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이건 만안당에서 팔고 있는 고약 아닌가?’떨리는 손으로 약통을 들고 있던 혜주는 마음이 너무 씁쓸하고 서러웠다.소홍범이 그녀의 혓바닥을 자르고 그녀를 팔아버리겠다는 말에 혜주는 살려달라고 애원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기절한 것이다.극심한 고통에 눈을 떴을 때, 혜주는 이미 혓바닥이 잘린 채 관아에 갇혀 있었다.혜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녀가 화장대 앞으로 다가가 얼굴 화장을 지웠다.화장을 지운 소녀의 얼굴을 본 혜주는 화들짝 놀랐다. 소녀는 소우연과 전혀 닮지 않았으며 되레 평서왕 왕비와 얼추 비슷한 느낌이었다.숨을 크게 들이마신 혜주는 소녀의 화장 실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렇게 자신 앞에서 거리낌 없이 대놓고 화장을 지우는 것도 신기했다.‘하긴, 난 이제 벙어리가 됐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조금 전, 소녀는 혜주에게 글을 익히라고 했다. 하지만 소녀가 관아에서 혜주를 사올 때 분명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노비가 필요하다고 했는데…벙어리인 혜주가 글도 읽을 줄 모르면 비밀을 더욱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 혹시 새 주인의 비밀이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건가?“아령아…”밖에서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화려하게 치장한 부인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혜주가 의아한 표정을 짓던
”예, 소녀… 왕야를 배웅하겠습니다.”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으며 문 앞까지 걸어갔다. 아령은 난간에 기대어 이종대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몸을 돌리는 순간, 방 안에 이지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세자 저하께서는 언제 들어오셨습니까?”아령은 눈웃음을 머금고 그에게 다가갔다.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순간 망설여졌다.그러나 이지윤은 그녀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거침없이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네가 정겹게 저 자를 배웅할 때부터.”“제가 언제 정겹게 배웅했단 말입니까?”“나조차 질투가 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헛소리 마세요. 그저 연기한 것뿐입니다.”“그럼 지금도 연기를 하는 것이냐?”그는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순간, 아령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소녀는 이미 세자 저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저를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아령아, 울지 마. 울지 마. 다 믿으마.”“됐습니다.”아령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저하께서 찾으시던 사람을 사 왔습니다. 방금 전 저하의 부왕께서도 물으셨습니다.”“뭐라고 대답했느냐?”“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 왔다고 했더니,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그렇다면 문제될 건 없겠구나.”아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세자 저하, 소우희의 여종을… 왜 구하신 겁니까?”이지윤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 여인은 타고난 봉명이라 하지 않느냐? 그 자의 모든 비밀을 알거나, 나를 위해 쓸 수 있다면, 누가 감히 우리 평춘왕부를 무능하다 하겠느냐?”아령은 몇 번이나 퉤퉤 하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영명하시고, 큰 뜻과 포부를 품으신 분이십니다.”“아령아, 만약 내가 그 뜻을 이루게 된다면,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겠다.”“하지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그녀의 눈빛이 순간
“소첩이 어찌 감히 왕야를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소우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그의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결국 조용히 삼켜버렸다.“네가 단속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이 얼마나 따분하겠느냐?”소우연은 이육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진심일까?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따스하게 구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이토록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될까?가슴이 두근거렸다.아니, 두근거린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했다.심장이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마구 뛰었고,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응?”이육진이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소우연은 얼굴이 붉어진 채 조용히 답했다.“소첩은 그저 왕야를 잘 모시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감히 그 이상의 선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그래, 그래.”이육진은 피식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정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3월 말.이육진은 조정의 일을 마친 뒤,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그 안에는 탐스럽게 익은 붉은 앵두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소우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벌써 앵두가 익을 시기가 되었나요?”“그래. 새빨갛게 잘 익었더군. 맛도 달콤하니 네가 참 좋아할 것 같았다.”“소첩… 좋아합니다.”이육진은 손수 짠 대나무 바구니를 정연에게 건네며 말했다.“씻어서 왕비께 드려라. 남은 것은 너희도 나누어 먹도록 하여라.”정연은 앵두를 내려다보았다.투명한 이슬이 맺힌 듯한 붉은 열매가 한눈에도 신선했다.아, 아니. 왕야께서 직접 골라 오신 앵두이니 틀림없이 달콤할 것이다.“왕야, 감사합니다. 또한 왕비님의 은혜에도 감사드립니다.”이육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앵두는 오래 두면 금방 상해버린다.어차피 썩히느니, 하인들도 함께 나누어 먹는 게 낫지 않은가.잠시 후, 정연이 손질한 앵두를 다시 들고 돌아왔다.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린 그녀가 물러나자, 이육진이 소
“소첩…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소우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육진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그는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 그리도 조심했거늘… 연아, 너에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누가 입을 맞춘다고 죽기라도 한단 말인가?“방금 그 맛, 정말 달더구나. 아주 달콤했어. 그러니, 한 번 더 이렇게 나에게 먹여주면 안 되겠느냐?”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안에 감춰진 간절한 마음은 너무나도 분명했다.이육진은 알고 있었다.그가 평생을 걸고 원하는 것은 황좌도, 권력도 아니었다.바로 이 여인의 마음이었다.그녀가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소우연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앵두 한 알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가자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리고 촉촉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이육진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가면을 벗어 던진 얼굴이 그녀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여전히 미세한 흉터가 남아 있었지만, 그 깊고 선명한 눈매, 곧은 콧대, 단정한 얼굴선… 그의 얼굴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소우연은 알고 있었다.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그의 얼굴은 예전의 모습으로 거의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그가 그녀의 입가에 걸린 앵두를 살짝 물었다.톡!터지는 과즙과 함께 달콤한 향이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정말 달구나.”소우연도 속삭이듯 말했다.“네, 정말 달아요.”이육진은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앵두가 아무리 달아도…”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다 덧붙였다.“부인의 입술보다는 못하겠지.”소우연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정말이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하지만… 그들은 부부였다.그가 이렇게 달콤한 말을 건네며 자신을 기쁘게 해주려 노력하는 것이 왠지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입하가 되었다.초여름이
이육진은 진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진규가 간석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태감, 왕비마마께서 계속 왕야의 다리를 치료하고 계셨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그야 온 왕부가 다 아는 사실 아니었느냐?”간석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곧 무언가 떠오른 듯,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아니, 잠깐… 온 경성 사람들이 다 알지! 왕비마마께서 왕야의 다리를 치료하고 계시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태의원에서도 손을 못 쓴 병이었는데… 설마, 설마 왕비마마께서 정말로 효과를 보신 것이야?”진규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이제야 알아차리셨군요.”간석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자신이 제일 중요한 소식을 제일 늦게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아니, 이 정도로 큰일을 왜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그때, 이육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손을 책상 위에 짚고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나도 오늘에서야 알았다. 이제 지팡이 없이도 두세 걸음은 걸을 수 있게 되었지.”그는 그렇게 말하며 직접 책상 주위를 걸어 보였다.진규와 간석은 즉시 무릎을 꿇고 깊이 절을 올렸다.“왕야, 축하드립니다.” “왕야, 천만다행입니다!” 그러나 이육진은 손을 들어 그들의 환호를 막았다.“이 일은 아직 부인도 모른다. 그러니 너희 모두 그 입을 단단히 다물어야 할 것이다.”“예, 왕야!”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이육진은 다시 휠체어에 앉았다.진규가 다가와 직접 밀어주었다.“왕야, 왕비마마를 만나러 가시겠습니까?”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간석이 곁에서 덧붙였다.“왕비마마께서는 아직 이락원에서 왕야의 약을 만들고 계십니다.”그 말을 들은 이육진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그녀라면 분명 그러고 있을 터였다.그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평춘왕부.입하가 지난 뒤로, 평춘왕 이종대는 병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그의 곁을 지키던 두 문객이 몇 차례 그를 찾아왔지만, 세자 이지윤
왕부에 이 두 남녀가 발을 들인 순간, 이종대에게 체면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모든 것이 허망할 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너는 왜… 왜 나에게 이러는 것이냐?”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이지윤을 바라보았다.오랜 시간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그의 유일한 아들이, 왜 이토록 잔혹하게 자신을 대하는가.이지윤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그 모습을 본 소우희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혹여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단호하게 끼어들었다.“그만 묻거라. 네가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인지, 세자가 너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다.”“그래?”이종대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너무나도 지쳐 있었다.그의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시 침상으로 쓰러졌다.그는 무력하게 중얼거렸다.“정말… 그런 것이냐?”이번만큼은, 이지윤이 침묵하지 않았다.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예, 맞습니다.”“왜?”이종대는 떨리는 손으로 침구를 움켜쥐었다.“왜…!”이지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버님께서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제 어머니를 죽이셨죠. 아버님이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 어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겠습니까?”이종대는 차가운 시선으로 아들을 노려보았다.“그 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애초에 그 년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더냐! 그렇다면, 어미가 왜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으냐?”이지윤은 비웃듯 고개를 저었다.“아버지께서 먼저 어머니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끝도 없이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죠. 아버지께서 먼저 불을 질러 놓고, 왜 어머니는 불을 피우면 안 된단 말입니까?”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왜 딸 열한 명을 두고도, 아들은 저 하나뿐인지 아십니까?”이종대의 눈동자가 커졌다.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무, 무슨 뜻이냐?”이지윤의 입술이 냉소적으로 휘어졌다.“아버지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네, 네가 지금
“무슨 일입니까?”이지윤이 조용히 물었다.소우희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민수에 대한 감정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평춘왕부에 시집오던 날.소우연이 이종대에게 은근한 말투로 그녀와 이민수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흘렸다.그리고, 이민수는 그녀가 잘 지내길 바란다며 천금의 예물을 이종대에게 보냈다.“이 아이를 잘 대해 주세요.”그 말 한마디에, 그녀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종대의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그 결과. 결혼한 지 이틀 만에, 그녀는 이종대와 그의 문객 두 명을 동시에 시중들어야 했다.지금 다시 떠올려도 몸서리쳐질 만큼 혐오스러웠다.이제, 그녀를 그토록 괴롭히던 이종대는 곧 죽을 목숨이나 다름없었다.그녀는 이지윤을 바라보았다.“저를… 싫어하지 않으시겠습니까?”이지윤은 그녀의 이마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소우희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정말입니까?”“정말입니다.”“그렇다면 저희…”“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아직 그 늙은이가 살아 있지 않습니까.”소우희는 실망했다.그녀가 유혹했고, 그는 분명히 그 유혹에 넘어왔다.하지만 아직 마지막 선을 넘지는 않았다.그 역시 개의치 않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지만…그가 자신을 도와 이종대라는 짐승을 없애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께서는 혹시 아십니까?”“제가 태어났을 때, 온 하늘에 노을빛이 가득했고,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내려왔다고 합니다.”“들어본 적이 있습니다.”“그리고…”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그때 한 도사가 저를 보고 봉명을 타고난 운명이라 했습니다. 그 도사는 다름 아닌 지난 세대의 흠천감 감정이었지요.”“감정?”이지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예, 감정이었습니다. 이건 저희 아버지와 조모께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요. 그래서
“이제보니 소우희의 외출 목적이 소현우와 소한준 두 사람을 경성으로 데리고 오려는 거였네.”소우연이 담담하게 말하자 진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이때, 정자에 앉아있던 이육진이 말했다.“소우희 그 여자는 경성의 천재 소녀가 아니라 완전 멍청이였어.”“예전에 덕빈 마마께서 소우희의 어여쁘고 천재적인 모습을 보고 폐하께 왕야와 소우희를 위해 혼인을 하사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소우연이 피식 웃으면서 하는 말에 이육진은 그녀를 조용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대꾸했다.“그러고보니 소우희 그자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 아니구나. 그자가 아니었으면 나와 연이 너의 인연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것이지 않느냐?”이육진은 그동안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계속 찾아다니고 있었지만 올해가 되어서야 단서를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특히 용강한은 전에 이육진에게 소우희 대신 시집온 아내에게 잘해주라고 하면서 어쩌면 소우연이 그의 고달픈 운명을 바꿔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그때 당시 이육진은 용강한에게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점을 봐 달라고 했고 용강한은 그런 이육진에게 급할 것 없다고, 인연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만 얘기했다.이육진은 용강한의 말투와 태도가 사기꾼처럼 느껴졌다.그러다가 혼사를 치른 뒤, 소우연의 몸에서 생명의 은인과 똑같은 약초향이 나자 이육진은 그제야 용강한은 사기꾼이 아니라 실력이 뛰어난 점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한편, 소우연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나와의 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고?’그 말은 마치 이육진이 두 사람이 언젠가 함께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내 지운 소우연은 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왕야 말씀이 맞습니다.”모든 일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존재한다. 소우연이 잘못된 선택을 하나라도 했더라면 오늘 이런 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뒤로하고 이육진 이 남자만 봤을 때 이육진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며
소현우는 아버지의 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대 당시 최전방에서 적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후방을 책임지던 회남왕이 습격을 당한 탓에 지원군들이 제때에 나타나지 못했다.결국 삼천 명이 넘었던 병사들은 몇백 명 밖에 남지 않았고 불행 중 다행으로 전쟁에서 살아남긴 했지만 큰 부상을 입은 소현우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부하는 곧바로 소현우를 조청강에 위치한 그의 외갓집으로 데려갔지만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처했다.그러다가 겨우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본 사람이 소우희였다. 기억을 되돌려보면 소우희가 매일 소현우 곁을 지켰고 하인을 시켜 약을 달이고 직접 소현우에게 먹여 주기까지 했다.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외출하느라 바빴다.자세하게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소우연은 매일 소우희에게 소현우가 아직도 고열을 앓고 있는지, 상처에서 진물이 흐르지는 않는지 확인하라고 얘기한 것 같았다.“이제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겁니까?”의자에 앉아있던 소현준이 소현우를 빤히 쳐다보면서 담담하게 물었다.소현우는 소우희에게 의심이 생긴 게 확실하다.소홍번도 소현우를 보며 말했다.“진실이 무엇인지 너도 이제 다 알았을 거야. 의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너를 살려주었겠느냐?”안색이 확 굳어진 소현우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홍범의 말에 대꾸를 했다.“아버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우리 소씨 가문은 소우연에게 미안한 게 많아. 하지만 근래에 네 어머니와 현준이가 회남왕에 찾아가 소우연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그 아이가 그렇게 냉정하단 말입니까?”소홍범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소현준을 쳐다보았고 소현준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그럼…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소현우의 머릿속에 소우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우연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어 한다고 했다.도대체 어떤 게 진짜이고 어떤 게 거짓일까? 소현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라버니, 일단 진정하십시오. 소우연은 지금 회남왕비입니다. 다른 사람과 눈도 못 마주치던 예전의 소우연이 아니란 말입니다.”소우희는 눈물을 닦으면서 겨우 말을 이어갔고 그 모습에 소한준은 너무 안쓰러우면서 한편으로는 소우연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아무리 그래도 우린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가족인데 소우연이 너에게 그런 몹쓸 짓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소우연은 지금 저뿐만 아니라 소씨 가문 모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보십시오. 소우연은 얼굴도 비추지 않을 겁니다.”소우희가 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씨 가문의 나머지 사람들은 속이기 쉽지 않지만 소한준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가장 예뻐하고 아껴줬으며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었기에 이번에도 무조건 그녀의 편에 설 거라고 확신했다.‘난 봉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복덩이야. 절대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한편, 소한준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소우희를 쳐다보자 소우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제가 지금까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저와 둘째 오라버니, 그리고 어머니까지 소우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갔는데 소우연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라버니, 솔직히 전 소우연이 제 모든 걸 빼앗아가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소우연의 행동을 보면 저희 소씨 가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깊어 보입니다. 만에 하나, 소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트리겠다는 소우연의 말이 그냥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어떡합니까?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는 제 입에서 소우연이야말로 의술을 할 줄 아는 딸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셨기 때문에 소우연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제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목숨 걸고 금주까지 와서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께 이 사실을 전해드리는 겁니다!”“다들 미쳤구나!”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말하다가 너무도 가여운 소우희를 쳐다보았다. 두 눈은 너무
소현우와 소한준이 서로를 힐끔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소한준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소우희를 쳐다보며 말했다.“우희야, 네가 고생이 많다. 걱정하지 말아라. 큰형과 난 언제든 네 편이다.”소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걱정하지 말 거라. 내일 내가 일단 아침 일찍 경성으로 출발하마! 우희 넌 한준이와 함께 천천히 뒤따라오거라. 절대 낙심해서는 안 된다!”소우연은 아마도 소우희를 도와서 약을 제조할 때 의술을 조금 익혔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가문을 망가트리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회남왕은 왜 갑자기 자비를 베풀어 소우연을 살려둔 걸까?예전에 소현우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소우희는 잠시도 앉아있지 못하고 곁에서 소현우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와 반대로 소우연은 매일 밖으로 싸돌아 다니느라 바빴다.친 오라버니가 위독하다는데 전혀 신경도 안 쓴 소우연만 생각하면 소현우는 너무 실망스웠다.“고마워요, 큰 오라버니.”소우희가 가까스로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소현우가 곁에 있던 혜주에게 말했다.“넌 일단 우희가 푹 쉴 수 있게 모시고 나가거라.”그제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혜주는 소우희를 부축한 채 방을 나섰다.두 사람이 나가자 소한준이 씩씩거리면서 언성을 높였다.“소우연 걔는 미친 게 분명해요. 회남왕에게 시집을 갔다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단 말입니다.”“네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용없어. 이 일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소우연은 결국 소씨 가문 사람이야. 일단 돌아가서 상황을 제대로 알아보고 우희의 억울함을 풀어줘야지.”“아버지와 둘째 형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소우연의 말만 듣고 그럴 수 있는 겁니까?”“우희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소우연이 할머니로 우희를 협박했다고. 우희에게 의술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소우연이라고 인정하라고. 심지어 본인이 소씨 가문 복덩이로 인정하라고도 했다 하지 않았느냐? 소우연 걔가 참…”한편, 방을 나선 소우희와 혜주는 멀리
“혜주 얘는 왜 이래?”그제야 평소와 다른 혜주를 눈치챈 소현우가 묻자 소우희가 대답했다.“소우연이 절 협박했다는 사실을 혜주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우연이 일부러 이런 수를 쓴 겁니다. 사실을 전혀 모르시는 아버지께서 화를 버럭 내시더니 혜주에게 벌을 내리신 겁니다. 혜주의 혓바닥은 결국 소우연이 자른 겁니다.”“아버지가?”소현우와 소한준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소에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큰 벌을 내렸다는 건 그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하긴, 아버지께서 사실을 왜곡한 소우연의 말을 믿었으니까 당연히 화가 나셨을 것이다.“불과 몇 달 사이에 집에 이렇게 큰 변고가 생겼을 줄은 몰랐네.”소한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소현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소우연이 소우희 대신 회남왕에게 시집을 가고 이 때문에 황제가 평춘왕와 소우희 두사람의 혼사를 하사했을 때부터 소현우는 소씨 가문이 몰락하고 있다고 느꼈다.하지만 소우연까지 이렇게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이건 단순한 변고가 아닙니다! 소우연이 회남왕을 부추겨 덕빈 마마와 폐하게 평춘왕의 혼사를 하사해 달라고 한 게 분명해요. 소우연이 우리 우희를 철저하게 망가트리려고 한 겁니다.”소우희는 감동한 눈빛으로 소한준을 쳐다보았다.소씨 가문 사람들이 말로는 다들 소우희를 예뻐하고 아꼈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앞에 나서서 소우희를 지키는 사람은 소한준밖에 없었다.이런 생각에 소우희는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셋째 오라버니, 소우연이 절 원망하고 미워하는 건 괜찮은데 할머니의 병으로 장난치는 건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오라버니들도 경성을 떠나기 전에 소우연이 어떤 태도인지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이제 소우연 마음속에는 소씨 가문이 없습니다. 심지어 소씨 가문을 완전히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소현우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다급하게 제지하자 소우희가 훌쩍이며 말을 이어갔다.“오라버니, 제가 어렸을
예상에 없던 폭우 때문에 노정이 지체된 소현우와 소한준은 날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금주에 도착했다.여러 사람들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소우희는 뒷돈을 챙겨준 덕분에 성공적으로 금주 역참에 들어와 소현우와 소한준을 만나게 되었다.“우희야, 네가 금주엔 어쩐 일로 온 것이냐?”소현우는 자신과 소한준 앞에 무릎을 꿇은 소우희를 재빨리 부축하며 물었지만 소우희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소현우는 고개를 돌려 혜주에게 말했다.“얼른 우희를 일으키지 않고 뭐 하는것이냐?”혜주가 얼른 소우희를 부축했지만 소우희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혜주도 소우희를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거냐?”성격이 급한 소한준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 애절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때, 소우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큰 오라버니, 셋째 오라버니… 이제 저에겐 돌아갈 친정집이 없습니다.”“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할머니를 위해 조제할 진정향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약재를 소우연이 전부 싹쓸이했습니다. 제가 세자께 부탁을 해서 금주와 영주 약방을 다 돌아봤는데 결국 구하지 못했습니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 할머니를 보며 도무지 가만있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회남왕 저택에 찾아가 소우연에게 빌고 또 빌었는데 소우연이 글쎄… 글쎄…”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우희가 한참동안 훌쩍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어갔다.“예전에 소우연이 저를 도와 약재를 달였을 때 전 처방전을 조금도 숨김없이 다 보여줬었습니다. 그런데 소우연이 갑자기 돌변하여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소우희의 말에 소한준이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난 산적을 소탕하러 가기 전부터 네가 마음에 걸렸다!”소현우도 미간을 찌푸리며 소우희를 쳐다보았다.“일단 일어나서 얘기하거라!”소현우가 다시 한번 잡아당기자 소우희는 못 이기는 척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오라버니들, 소우연은 분명 진정향
마음속에 큰 파도가 출렁거렸지만 소우연은 최대한 태연한 모습ㅇ르 유지한 채 다정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전 왕야를 믿습니다.”이렇게 좋은 왕야와 함께 한다면 미래에 온통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하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의 미래가 막연하다고 했던 용강한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그리고 용강한이라는 사람이 너무 수상하기도 했다. 용강한은 소우연이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혹 용강한 그자가 너에게 겁을 주는 말이라도 한 것이냐?”이육진은 이제 용강한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용강한은 평소에 말수가 적지만 점괘를 보기 시작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아닙니다.”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소우연은 왠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의 손을 꼭 잡은 채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으며 용강한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한편, 금주 성문 부근에서.“왕비님, 소인이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소 장군님 일행은 오늘 내로 금주에 도착하여 역참에 묵을 예정이라고 합니다.”검은 복장을 차려입은 호위무사가 소우희에게 보고를 올렸고 소우희는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다가 곁에 있던 시녀 춘화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가서 혜주를 데려오거라.”벙어리가 된 혜주를 데리고 다니는 게 참 불편하고 성가신 일이지만 큰 오라버니와 셋째 오라버니의 믿음을 얻기 위해서 혜주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네.”밖으로 나간 춘화는 이내 혜주를 데리고 들어왔다. 낡은 마의를 입은 혜주는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소우희에게 인사를 올렸고 소우희는 그런 혜주를 재빨리 일으켰다.“얼른 일어나거라.”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하인들에게 말했다.“너희들은 이만 물러나거라.”하인들이 밖으로 나가자 소우희는 혜주를 안아주더니 혜주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혜주야, 너와 내가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일 줄
한편, 정연은 명심에게 왕비와 왕야를 위해 따듯한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얘기하고 있었다.“왕비님이 나오셨습니다.”소우연을 발견한 명심이 말했다.정연과 명심은 가까이 다가가다가 휘청거리는 소우연의 모습에 재빨리 달려가 부축했다.“왕비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화들짝 놀란 정연이 다급하게 물으며 대청마루를 힐끔 쳐다보았다.“난 괜찮다.”소우연이 대답했다.‘괜찮다고? 얼굴이 이렇게 하얗게 질렸는데 괜찮다니?’정연과 명심은 양쪽에서 소우연을 부축해서 걷다가 맞은편에서 휠체어를 타고 오던 이육진과 마주치게 되었다.핏기를 잃은 소우연의 모습에 이육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어찌된 일이냐?”겨우 진정한 소우연은 이육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별일 아닙니다. 배가 고파서 잠시 휘청거렸습니다.”이육진은 소우연의 핑계를 당연히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늦게 했기에 이 시간에 배가 고플 리가 없다.“그럼 얼른 가서 간식 좀 준비하거라.”“네, 알겠습니다.”정연과 명심이 소우연을 부축한 채 떠났다.이때, 대청에서 나온 용강한은 문턱 앞에 서서 담담한 눈빛으로 이육진을 쳐다보았다.“조금 전에 왕비가 뭘 물어본 것이오?”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가까이 다가가 묻자 용강한은 조금 전에 소우연이 했던 질문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다만 용강한과 소우연이 어렸을 때의 인연과 그가 소우연에게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소우연의 화들짝 놀란 반응에서 용강한은 그녀가 왜 도망치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그저 너무도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왕비는 왜 그렇게 겁을 먹고 놀란 걸까?용강한은 이육진을 보며 말했다.“왕야, 왕비님이 겉으로 보기엔 씩씩하지만 사실 마음이 여리고 상처가 많은 분이오. 그런 사람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네.”“나도 왕비가 또래 소녀들처럼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걱정 없는 것 같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드네.”이육진은 소우연이 떠난 방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용강한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인연이 참 깊은 듯합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용강한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왕비님께서 저를 아직까지 기억하신다고 하니 저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아닙니다. 그 남자아이가 대감님이라고 하시니 저도…”오래간만에 소녀다운 모습을 보이던 소우연은 용강한을 쳐다보며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 듯 말했다.“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있는데 대감님께서 이를 풀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용강한은 소우연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했다.“왕비님께서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것이지요?”“네, 그렇습니다.”소우연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고 초조했다. 그녀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를 간절하게 알고 싶었지만 알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그 미래가 너무도 막연하고 아득하여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말을 하던 용강한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왕비님께서는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십니까?”용강한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순백의 구름과도 같았다.“저는…”소우연은 입을 뻥긋거리며 자신과 이육진이 앞으로 판을 뒤집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에 용강한은 미래가 막연하고 아득하다고 얘기를 했었다.‘만에 하나 용강한이 판을 뒤집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라고 대답하면 어떡하지? 그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힘을 쓰는 몇 년 동안 나와 이육진은 언젠가 죽을 걸 알면서 그자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이런 생각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소우연은 대청 밖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는 흰 구름을 보며 어떻게든 차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강한이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왕비님, 혹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소우연은 간절하게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