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휘둥그레진 혜주는 재빨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속으로 새로운 주인을 잘 모시겠다고 웅얼거렸다.그 모습에 소녀가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뭐라고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들으니까. 대호한테 약을 달이라고 했어. 나중에 약을 마시고 이걸 혓바닥에 대고 있거라.”소녀는 약통 하나를 꺼내 혜주에게 건넸다.“꼭 나아야 한다.”혜주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선한 주인을 만났으니 혜주도 최대한 빨리 나아서 주인을 잘 모실 거라고 다짐했다.약통을 받은 혜주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이건 만안당에서 팔고 있는 고약 아닌가?’떨리는 손으로 약통을 들고 있던 혜주는 마음이 너무 씁쓸하고 서러웠다.소홍범이 그녀의 혓바닥을 자르고 그녀를 팔아버리겠다는 말에 혜주는 살려달라고 애원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기절한 것이다.극심한 고통에 눈을 떴을 때, 혜주는 이미 혓바닥이 잘린 채 관아에 갇혀 있었다.혜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녀가 화장대 앞으로 다가가 얼굴 화장을 지웠다.화장을 지운 소녀의 얼굴을 본 혜주는 화들짝 놀랐다. 소녀는 소우연과 전혀 닮지 않았으며 되레 평서왕 왕비와 얼추 비슷한 느낌이었다.숨을 크게 들이마신 혜주는 소녀의 화장 실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렇게 자신 앞에서 거리낌 없이 대놓고 화장을 지우는 것도 신기했다.‘하긴, 난 이제 벙어리가 됐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조금 전, 소녀는 혜주에게 글을 익히라고 했다. 하지만 소녀가 관아에서 혜주를 사올 때 분명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노비가 필요하다고 했는데…벙어리인 혜주가 글도 읽을 줄 모르면 비밀을 더욱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 혹시 새 주인의 비밀이 얼굴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건가?“아령아…”밖에서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녀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화려하게 치장한 부인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혜주가 의아한 표정을 짓던
”예, 소녀… 왕야를 배웅하겠습니다.”두 사람은 말을 주고받으며 문 앞까지 걸어갔다. 아령은 난간에 기대어 이종대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몸을 돌리는 순간, 방 안에 이지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세자 저하께서는 언제 들어오셨습니까?”아령은 눈웃음을 머금고 그에게 다가갔다.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순간 망설여졌다.그러나 이지윤은 그녀를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거침없이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네가 정겹게 저 자를 배웅할 때부터.”“제가 언제 정겹게 배웅했단 말입니까?”“나조차 질투가 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헛소리 마세요. 그저 연기한 것뿐입니다.”“그럼 지금도 연기를 하는 것이냐?”그는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순간, 아령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소녀는 이미 세자 저하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저하께서는 저를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아령아, 울지 마. 울지 마. 다 믿으마.”“됐습니다.”아령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저하께서 찾으시던 사람을 사 왔습니다. 방금 전 저하의 부왕께서도 물으셨습니다.”“뭐라고 대답했느냐?”“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 왔다고 했더니,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그렇다면 문제될 건 없겠구나.”아령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세자 저하, 소우희의 여종을… 왜 구하신 겁니까?”이지윤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 여인은 타고난 봉명이라 하지 않느냐? 그 자의 모든 비밀을 알거나, 나를 위해 쓸 수 있다면, 누가 감히 우리 평춘왕부를 무능하다 하겠느냐?”아령은 몇 번이나 퉤퉤 하고 침을 뱉으며 말했다.“터무니없는 말씀이십니다! 세자 저하께서는 영명하시고, 큰 뜻과 포부를 품으신 분이십니다.”“아령아, 만약 내가 그 뜻을 이루게 된다면,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겠다.”“하지만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그녀의 눈빛이 순간
“소첩이 어찌 감히 왕야를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소우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그의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결국 조용히 삼켜버렸다.“네가 단속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이 얼마나 따분하겠느냐?”소우연은 이육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진심일까?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따스하게 구는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이 이토록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될까?가슴이 두근거렸다.아니, 두근거린다고 표현하기엔 부족했다.심장이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마구 뛰었고, 금방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응?”이육진이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며 다시 물었다.소우연은 얼굴이 붉어진 채 조용히 답했다.“소첩은 그저 왕야를 잘 모시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감히 그 이상의 선을 넘을 수는 없습니다.”“그래, 그래.”이육진은 피식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정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3월 말.이육진은 조정의 일을 마친 뒤,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그 안에는 탐스럽게 익은 붉은 앵두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소우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벌써 앵두가 익을 시기가 되었나요?”“그래. 새빨갛게 잘 익었더군. 맛도 달콤하니 네가 참 좋아할 것 같았다.”“소첩… 좋아합니다.”이육진은 손수 짠 대나무 바구니를 정연에게 건네며 말했다.“씻어서 왕비께 드려라. 남은 것은 너희도 나누어 먹도록 하여라.”정연은 앵두를 내려다보았다.투명한 이슬이 맺힌 듯한 붉은 열매가 한눈에도 신선했다.아, 아니. 왕야께서 직접 골라 오신 앵두이니 틀림없이 달콤할 것이다.“왕야, 감사합니다. 또한 왕비님의 은혜에도 감사드립니다.”이육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앵두는 오래 두면 금방 상해버린다.어차피 썩히느니, 하인들도 함께 나누어 먹는 게 낫지 않은가.잠시 후, 정연이 손질한 앵두를 다시 들고 돌아왔다.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올린 그녀가 물러나자, 이육진이 소
“소첩…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소우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육진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그는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럴 리가. 그리도 조심했거늘… 연아, 너에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누가 입을 맞춘다고 죽기라도 한단 말인가?“방금 그 맛, 정말 달더구나. 아주 달콤했어. 그러니, 한 번 더 이렇게 나에게 먹여주면 안 되겠느냐?”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안에 감춰진 간절한 마음은 너무나도 분명했다.이육진은 알고 있었다.그가 평생을 걸고 원하는 것은 황좌도, 권력도 아니었다.바로 이 여인의 마음이었다.그녀가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소우연은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앵두 한 알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가져가자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리고 촉촉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이육진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가면을 벗어 던진 얼굴이 그녀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여전히 미세한 흉터가 남아 있었지만, 그 깊고 선명한 눈매, 곧은 콧대, 단정한 얼굴선… 그의 얼굴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소우연은 알고 있었다.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그의 얼굴은 예전의 모습으로 거의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그가 그녀의 입가에 걸린 앵두를 살짝 물었다.톡!터지는 과즙과 함께 달콤한 향이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정말 달구나.”소우연도 속삭이듯 말했다.“네, 정말 달아요.”이육진은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앵두가 아무리 달아도…”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다 덧붙였다.“부인의 입술보다는 못하겠지.”소우연은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정말이지, 너무나도 부끄러웠다.하지만… 그들은 부부였다.그가 이렇게 달콤한 말을 건네며 자신을 기쁘게 해주려 노력하는 것이 왠지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시간은 흐르고… 어느새 입하가 되었다.초여름이
이육진은 진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진규가 간석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태감, 왕비마마께서 계속 왕야의 다리를 치료하고 계셨다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그야 온 왕부가 다 아는 사실 아니었느냐?”간석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곧 무언가 떠오른 듯,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아니, 잠깐… 온 경성 사람들이 다 알지! 왕비마마께서 왕야의 다리를 치료하고 계시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태의원에서도 손을 못 쓴 병이었는데… 설마, 설마 왕비마마께서 정말로 효과를 보신 것이야?”진규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이제야 알아차리셨군요.”간석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자신이 제일 중요한 소식을 제일 늦게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아니, 이 정도로 큰일을 왜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그때, 이육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손을 책상 위에 짚고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나도 오늘에서야 알았다. 이제 지팡이 없이도 두세 걸음은 걸을 수 있게 되었지.”그는 그렇게 말하며 직접 책상 주위를 걸어 보였다.진규와 간석은 즉시 무릎을 꿇고 깊이 절을 올렸다.“왕야, 축하드립니다.” “왕야, 천만다행입니다!” 그러나 이육진은 손을 들어 그들의 환호를 막았다.“이 일은 아직 부인도 모른다. 그러니 너희 모두 그 입을 단단히 다물어야 할 것이다.”“예, 왕야!”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이육진은 다시 휠체어에 앉았다.진규가 다가와 직접 밀어주었다.“왕야, 왕비마마를 만나러 가시겠습니까?”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간석이 곁에서 덧붙였다.“왕비마마께서는 아직 이락원에서 왕야의 약을 만들고 계십니다.”그 말을 들은 이육진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그녀라면 분명 그러고 있을 터였다.그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평춘왕부.입하가 지난 뒤로, 평춘왕 이종대는 병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그의 곁을 지키던 두 문객이 몇 차례 그를 찾아왔지만, 세자 이지윤
왕부에 이 두 남녀가 발을 들인 순간, 이종대에게 체면 따위는 더 이상 없었다.모든 것이 허망할 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너는 왜… 왜 나에게 이러는 것이냐?”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이지윤을 바라보았다.오랜 시간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그의 유일한 아들이, 왜 이토록 잔혹하게 자신을 대하는가.이지윤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그 모습을 본 소우희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혹여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두려웠다.그래서, 단호하게 끼어들었다.“그만 묻거라. 네가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인지, 세자가 너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다.”“그래?”이종대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너무나도 지쳐 있었다.그의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시 침상으로 쓰러졌다.그는 무력하게 중얼거렸다.“정말… 그런 것이냐?”이번만큼은, 이지윤이 침묵하지 않았다.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예, 맞습니다.”“왜?”이종대는 떨리는 손으로 침구를 움켜쥐었다.“왜…!”이지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버님께서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제 어머니를 죽이셨죠. 아버님이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 어찌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겠습니까?”이종대는 차가운 시선으로 아들을 노려보았다.“그 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애초에 그 년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더냐! 그렇다면, 어미가 왜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으냐?”이지윤은 비웃듯 고개를 저었다.“아버지께서 먼저 어머니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끝도 없이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죠. 아버지께서 먼저 불을 질러 놓고, 왜 어머니는 불을 피우면 안 된단 말입니까?”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왜 딸 열한 명을 두고도, 아들은 저 하나뿐인지 아십니까?”이종대의 눈동자가 커졌다.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무, 무슨 뜻이냐?”이지윤의 입술이 냉소적으로 휘어졌다.“아버지의 핏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네, 네가 지금
“무슨 일입니까?”이지윤이 조용히 물었다.소우희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민수에 대한 감정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평춘왕부에 시집오던 날.소우연이 이종대에게 은근한 말투로 그녀와 이민수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흘렸다.그리고, 이민수는 그녀가 잘 지내길 바란다며 천금의 예물을 이종대에게 보냈다.“이 아이를 잘 대해 주세요.”그 말 한마디에, 그녀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종대의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그 결과. 결혼한 지 이틀 만에, 그녀는 이종대와 그의 문객 두 명을 동시에 시중들어야 했다.지금 다시 떠올려도 몸서리쳐질 만큼 혐오스러웠다.이제, 그녀를 그토록 괴롭히던 이종대는 곧 죽을 목숨이나 다름없었다.그녀는 이지윤을 바라보았다.“저를… 싫어하지 않으시겠습니까?”이지윤은 그녀의 이마 앞머리를 정리해 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소우희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정말입니까?”“정말입니다.”“그렇다면 저희…”“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아직 그 늙은이가 살아 있지 않습니까.”소우희는 실망했다.그녀가 유혹했고, 그는 분명히 그 유혹에 넘어왔다.하지만 아직 마지막 선을 넘지는 않았다.그 역시 개의치 않는 척하면서도, 결국은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지만…그가 자신을 도와 이종대라는 짐승을 없애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께서는 혹시 아십니까?”“제가 태어났을 때, 온 하늘에 노을빛이 가득했고,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내려왔다고 합니다.”“들어본 적이 있습니다.”“그리고…”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그때 한 도사가 저를 보고 봉명을 타고난 운명이라 했습니다. 그 도사는 다름 아닌 지난 세대의 흠천감 감정이었지요.”“감정?”이지윤이 미간을 찌푸렸다.“예, 감정이었습니다. 이건 저희 아버지와 조모께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요. 그래서
“하지만 혜주는 지금 말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괜찮습니다. 적어도 살아 있지 않습니까.”소우희도 겉으로는 감정을 담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지요.”잠시 침묵이 흘렀다.이지윤은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이번에 마마께서는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후, 다시 이민수를 찾아갈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그는 시험하는 듯한 어조였다.소우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이민수를 잘 아는 그녀였다.평서왕이 절대 그가 '더럽혀진' 여인을 받아들이게 놔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아니요. 이제 제 삶은 저하의 것입니다.”“오직 저의 것이요?”그의 눈빛이 반짝였다.‘천생 봉명’을 타고난 그녀가 자신을 따르겠다고 했다.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기다려 온 기회였다.그는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그래요, 저하는 제 전부입니다.”이지윤은 그녀를 깊이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마마도 알겠습니까? 제가 왜 그토록 마마를 마음에 두고 있었음에도,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그건… 모르겠습니다.”“저희의 신분이 다르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치 감정을 추슬러야 하는 사람처럼 숨을 고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마마의 마음속에 아직 이민수가 남아 있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마마에게 깊이 빠질 자신이 없었습니다.”그의 목소리는 진실을 담고 있는 듯 감정이 실려 있었고, 그조차도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소우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깊은 감정에 휩싸였다.과거를 떠올렸다.그녀는 과거,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이민수를 붙잡으려 했다.하지만, 그는 단호했다.차갑게 그녀를 외면했고, 그 결과 그녀는 완전히 망가졌다.결혼 첫날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더럽힌 것은 이민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