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77화

Author: 주 한잔
“하지만 혜주는 지금 말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적어도 살아 있지 않습니까.”

소우희도 겉으로는 감정을 담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지윤은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에 마마께서는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후, 다시 이민수를 찾아갈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는 시험하는 듯한 어조였다.

소우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흔들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민수를 잘 아는 그녀였다.

평서왕이 절대 그가 '더럽혀진' 여인을 받아들이게 놔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이제 제 삶은 저하의 것입니다.”

“오직 저의 것이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천생 봉명’을 타고난 그녀가 자신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기다려 온 기회였다.

그는 드디어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래요, 저하는 제 전부입니다.”

이지윤은 그녀를 깊이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마마도 알겠습니까? 제가 왜 그토록 마마를 마음에 두고 있었음에도,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의 신분이 다르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치 감정을 추슬러야 하는 사람처럼 숨을 고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마마의 마음속에 아직 이민수가 남아 있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마마에게 깊이 빠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진실을 담고 있는 듯 감정이 실려 있었고, 그조차도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소우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깊은 감정에 휩싸였다.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는 과거,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이민수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차갑게 그녀를 외면했고, 그 결과 그녀는 완전히 망가졌다.

결혼 첫날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더럽힌 것은 이민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Related chapters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78화

    “예, 이번엔 다릅니다. 평소보다 훨씬 화려한 옷차림에, 하녀와 하인, 호위 무사까지 대동하고 왔습니다.”“누가 봐도 철저히 준비해 온 것이 분명합니다.”정연이 차분한 목소리로 보고했다.소우연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오늘은 또 무슨 속셈으로 온 것인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구나.”소우연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리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왕비마마, 만수무강하십시오!”그녀는 가볍게 손을 들어 답례하며 시선을 돌렸다.그 순간, 그녀의 시야 한쪽에 서 있는 소우희가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입가에 애매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자신감에 찬 듯한 표정, 살짝 치켜뜬 눈썹.누가 보아도 도발적인 태도였다.소우연은 미묘한 눈빛을 띠며 정연에게 몇 마디 지시한 후,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정연은 그 말을 듣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조용히 소우희 앞으로 다가갔다.“왕비마마, 안으로 드시지요.”회남왕비가 직접 허락한 일이니, 감히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다만, 오늘은 초칠.의진의 시간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날이었다.밖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수많은 백성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소우희는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태연하게 미소를 띠며 줄을 우회했다.그리고 하녀 한 명만 데리고 조용히 정연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왕비마마, 평춘왕비께서 오셨습니다.”정연이 조용히 알리자, 소우연이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담담한 시선으로 소우희를 바라보았다.“정말 기이한 일이구나.”“오랜만이다.”소우연의 시선이 그녀의 옷차림을 스윽 훑었다.확실히 정연의 말대로, 평소보다 훨씬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옷차림이었다.“요즘… 제법 편하게 지내는 듯 하구나.”소우희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다 언니 덕분이지.”그녀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눈빛에는 은근한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이젠 그런 호칭은 사용하지 않는 게 어때?”소우연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그 오랜 세월 동안 ‘언니’라고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79화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소우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소우연은 이육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왕야, 왕야 생각엔… 소우희와 이민수가 다시 엮일 가능성이 있을까요?”이육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연아…”그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렇게까지 전 약혼자를 신경 쓰는 것인가.’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그저 묵묵히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너는 왜 그렇게 그들이 다시 이어지는 것을 신경 쓰는 것이냐?”소우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절대 그렇게 되선 안 됩니다.”“아직도 사람들이 이민수를 감시하고 있습니까?”이육진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무엇을 알고 싶은 것이냐?”“단 하나, 소우희와 이민수가 아직도 몰래 만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그것뿐이냐?”“예. 그것뿐입니다.”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겠는가?이 둘은 결국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었다.만약 둘이 손을 잡는다면, 반전의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이육진은 그녀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과거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 여겼다.그 생각이 들자, 왠지 모를 답답함이 밀려왔다.마음이 묘하게 무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하게 조여 왔다.“왕야, 괜찮으십니까?”소우연은 이육진이 가슴을 문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맥을 짚었다.맥박은 일정하고 안정적이었다.“괜찮다. 잠시 가슴이 답답했을 뿐이다.”이육진은 가볍게 웃어 보였지만, 소우연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방금 정말 놀랐습니다.”그녀가 긴장하며 말했다.이육진은 그녀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내 곁에 이렇게 뛰어난 의원이 있는데, 내가 어찌 쉽게 쓰러지겠느냐?”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오늘따라 유독 햇빛이 따스했다.다시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이 사람은, 내게 있어서 햇빛과도 같은 존재로구나.’그녀가 곁에 있어 주는 한, 아무리 어둠이 드리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80화

    이육진은 소우연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몇 걸음 내디뎠다.그는 다시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아?”그가 부드럽게 불렀다.“연아?”두 번이나 불렀건만, 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이육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아니, 연아…”그는 급한 마음에 성큼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왜 그러느냐? 혹시, 내가 그동안 너에게 이 사실을 숨긴 것이 서운한 것이냐? 미안하다. 나는 그저 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지,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그러나 소우연은 그의 허리를 꼭 감싸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왕야, 저는 서운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너무 기뻐서요.”기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이육진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어내고, 붉어진 그녀의 눈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정말로 눈물을 머금은 채, 감격 어린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이육진은 입을 떼려다 멈추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왕야, 다시 한 번 걸어보시겠어요?”그녀가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는 다시 몇 걸음 내디뎠다.소우연의 시선은 그의 다리에 집중되었다.그녀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이육진의 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소우연은 다급히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왕야, 저는 충분히 보았습니다. 왕야께서… 정말 다시 일어나셨군요”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그의 얼굴은 이미 절반가량 흉터가 아문 상태였다.그리고 그의 다리 또한 곧 완전히 회복될 터였다.그렇다면, 앞으로의 싸움에서 이민수를 쉽게 이길 수 있지 않을까?그녀의 눈이 뜨거워졌다.이것이 바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이육진은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연아, 혹시 나에게 숨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81화

    소우연의 시선이 벽장으로 향했다.그곳에는 햇살을 받으며 윤기나는 털빛을 자랑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고양이가 왜 여기에…”그 순간, 나뭇가지 위에서 인기척 없이 숨어 있던 진규가 조용히 뛰어내렸다.소우연은 순간적으로 놀라 뒷걸음질쳤다.“그러고 보니, 가끔 진규가 안 보일 때가 있었죠… 이렇게 원하는 순간 어디서든 모습을 감추고 있었군요.”그녀의 말에 주변의 모든 시선이 진규에게 향했다.진규는 조용히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민수 세자 저하께서 기르던 고양이와 아주 닮았습니다.”“이민수의 고양이라고?”이육진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 고양이를 살폈다.“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이지?”그때였다.대문 앞에서 하인이 다급히 뛰어와 아뢰었다.“왕야, 평서왕세자께서 방문하셨습니다.”이육진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군. 들이거라.”그는 소우연을 곁눈질했다.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아냈다.그리고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왕야, 어찌하여 저를 그렇게 바라보십니까?”이육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평서왕세자가 왔다는구나.”그러나 소우연은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그가 오든 말든, 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그녀는 단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덧붙였다.“왕야, 제가 물러나는 것이 좋겠습니까?”“그럴 필요 없다.”이육진이 태연하게 말했다.그리고 낮게 덧붙였다.“다만, 네가 내 곁에 조금 더 가까이 있어 주었으면 좋겠구나.”소우연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속삭였다.“왕야께서는 혹시 이민수에게 저희 부부가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신 겁니까?”이육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소우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그녀 또한 증명하고 싶었다.이제 더 이상 이민수라는 사람에게 미련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잠시 후, 이민수가 하인의 안내를 받아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82화

    ‘이민수가 원래 이렇게 동물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나?’소우연은 이민수가 품에 안은 배꽃을 바라보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그가 방금 한 말도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한낱 고양이가 사람 말을 이해할 리가 없는데, 대체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일까?’그녀의 시선이 이민수의 품속에서 가만히 웅크린 배꽃으로 향했다.과거, 그녀가 처음 발견했을 때는 손바닥만 한 새끼 고양이였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정성껏 키울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이육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세자가 동물에게 이토록 깊은 애정을 가질 줄은 몰랐다. 고양이를 이처럼 아끼는 줄 알았으면 미리 한 마리를 보내줄 걸 그랬구나.”이민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사실, 저도 한때 배꽃의 소중함을 잊을 뻔했지요. 다행히 늦기 전에 깨달았습니다.”“…하!”소우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이제야 알았다.그가 하는 말이 단순히 고양이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그는 분명 ‘물건을 빗대어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이었다.그러나 그가 정말로 ‘깨달은’ 것이 있기나 한 걸까?이민수는 본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감정도 쉽게 내던지는 사람이었다.그런 남자가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소우연은 속으로 비웃었다.‘정말 깨달았다면, 내가 죽었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돌아보았겠지.’이민수를 마주한 지금, 그녀는 이전 생에서 그가 자신에게 직접 건넸던 그 ‘약’을 거의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가 원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는 걸 제거하는 것이었다.그녀는 스스로 다짐했다.‘이런 사소한 감정에 흔들릴 내가 아니야.’이육진은 이민수의 말을 곱씹듯 되뇌었다.“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느냐?”그는 시선을 들며 이민수를 바라보았다.“어찌하여 난 그 말이 고양이에게 하는 말 같지가 않구나?”이민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요. 진심으로 애정을 쏟은 적이 있다면, 그 존재를 잃게 될까 두려워지기 마련입니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83화

    “왕야, 저는 그저 거짓으로 동의했을 뿐입니다.”“부디 믿어 주세요… 단 한 번도 왕야의 자손을 끊을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다.”이육진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이미 알고 있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이미 이민수가 섣달그믐날 소우연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다만, 피임약을 건넸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소우연은 순간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생각해 보면,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육진의 사람이었다.그녀가 어디를 가고, 누구를 만나는지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연아, 배꽃을 데려오고 싶으냐?”그가 무심한 듯 물었다.소우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지금 제가 더 궁금한 것은… 이민수는 분명 소우희를 좋아했었잖아요? 그렇게 사랑했던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는데, 왜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 걸까요?”“저는 그 점이 가장 궁금합니다…”그녀의 시선이 멀어졌다.“그리고, 왜 이제 와서 배꽃을 이토록 정성껏 키웠을까요? 평소엔 신경도 쓰지 않던 고양이였는데.”이육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그야 너 때문이지.”소우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저 때문이라고요?”“그래. 이민수가 오늘 했던 말들, 하나하나가 다 너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자는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어.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리고 네가 돌아오는 길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하…!”소우연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와서 그런 말들을 한다고?“연아, 너는… 혹시 저 자의 곁으로 가고 싶은 것이냐?”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나 그 스스로도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을 후회했다.그녀가 혹여나 ‘가고 싶다’고 대답하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까?그녀가 떠나겠다고 한다면, 그는 막을 수 있을까?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감각에 그는 속으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그러나 소우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갔다.“왕야, 저는 왕야의 사람입니다. 제가 갈 곳이 어디겠습니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84화

    소우연은 그가 멍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는, 다시 한번 몸을 기울였다.얕았던 입맞춤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의 귓가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속삭였다.“왕야,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결코 왕야를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사람들은 말한다.‘온화한 여인의 품이 곧 영웅의 무덤이라.’그가 지금 그 말을 절감하고 있었다.그토록 마음을 다해 원하는 여인이 이렇게 유혹하듯 다가오는데, 어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달콤한 독처럼 그의 정신을 마비시켰다.그녀의 간절한 눈빛이,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진짜와 가짜를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결국 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너를 믿으마.”소우연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왕야께서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잠깐만, 방금 내가 뭐에 홀려서 무슨 대답을 한 거지?’‘단지 그녀가 먼저 입맞춤을 했다는 이유로, 정신이 흐려져 이렇게 위험한 일을 허락해 버린 건가?’“연아, 잠깐…”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꺼내려 했다.그러나 소우연이 다시금 그의 입술을 덮었다.그녀는 그가 앉아 있는 틈을 노려 살짝 허리를 숙였고, 자연스럽게 그를 조종하듯 다루었다.‘이럴 수가…’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야, 그런데…”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조용히 물었다.“왕야께서는 정말로 자신의 얼굴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하십니까?”이육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그는 그 말을 여러 번 스스로에게도 물었다.과거 자신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지금은?그는 여전히 자신감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소우연은 그의 마음을 아는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왕야, 저는 왕야의 얼굴을 고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야의 다리 역시, 언젠가 반드시 치료할 자신이 있습니다.”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머지않아, 왕야께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185화

    이육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소우연은 그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그는 항상 이랬다.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도, 그 속에 담긴 감정과 생각을 쉽게 내비치지 않았다.만약 예전이라면,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태자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를 짓밟고 내던진 자들이 있었다.그날 이후, 그는 단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배신자에게 자비란 없다.”그 무엇도, 그 누구도 다시는 자신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도록...평서왕 이남진.그리고 세자 이민수.그 두 사람은 그때의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그는 그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불구가 된 그를, 그들은 마치 보잘것없는 돌멩이처럼 취급했다.회남왕부가 아무리 도발해도, 평서왕부는 단 한 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황제의 보호 아래, 철저하게 신중하게 움직였다.그래서 지금까지 손을 쓸 수 없었다.그러나, 이제는 다르다.그는 다시 일어섰다.얼굴도, 다리도 모두 회복되었다.이제 이남진과 이민수가 가만히 있을까?분명, 움직일 것이다.그 순간이 바로, 그들을 무너뜨릴 기회였다.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연아, 나는 지금껏 너를 욕심낸 적이 없었다.”소우연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왕야,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그는 그녀를 깊이 바라보았다.“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절대 내 곁을 떠나지 말거라.”소우연은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육진.‘살아 있는 지옥의 군주’라 불리는 전장의 신. 그가 이렇게 말하다니.그의 요구가 이토록 단순하다니.그녀는 다시금 깨달았다.이번 생은… 복수와 이육진의 곁에 머무는 것 외에는 달리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소우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왕야께서 저를 마다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단, 그가 자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 그땐 떠나리라 다짐하였다.그러나…“나는 너를 절대 내치지 않을 것이다.”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Latest chapter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15화

    겉으로 보기엔 온순하고 예의 바른 이지윤은 사실 그 누구보다 독한 사람이었다. 소우희를 도와 평춘왕을 저택에 감금한 것도 모자라 평춘왕에게 만성 독약까지 먹였는데 이런 사람이 어찌 마냥 단순하고 착하기만 하겠는가?“우희야, 그러지 말고 일단 이 오라버니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화가 잔뜩 난 소한준은 소우희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정신을 번쩍 차린 소우희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지금 아버지와 둘째 오라버니는 제 말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집에 돌아간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소우희는 소한준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그러다가 셋째 오라버니도 결국 아버지와 둘째 오라버니께서 한 말을 듣고 저를 안 믿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그럴 리가 있겠느냐?”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소우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에 든 손수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불안해 보였다.“하지만 소우연의 의술이 확실히 대단하긴 한 것 같더구나. 오늘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다들 소우연을 경성에서 가장 대단한 여성 의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소한준의 말에 소우희가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보십시오. 오라버니께서는 저택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환자를 치료해주는 소우연만 보고 바로 저를 의심하고 계시지 않습니까?”“아니다. 난 너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 다만…”다만 소우연이 정말 의술을 할 줄 알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쳐도 오라버니께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소우연은 지금까지 계속 저를 도와 약초를 말렸습니다. 그동안 제가 소우연에게 많은 의학 지식을 가르쳤고 그 덕분에 소우연은 의술을 조금 익히게 된 겁니다. 그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라버니…”말을 하던 소우희는 어느새 훌쩍거리더니 눈물을 왈칵 쏟았다.“오라버니도 이제 제가 진정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14화

    복문 객줏집에서.창가에 서있던 소우희는 평서왕 저택 팻말이 걸려 있지도 않는 마차를 보자마자 주먹을 꽉 쥐었다.저 마차에 몇 번이나 탄 적이 있기에 저 안에 누가 있는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러다가 이민수에게 미인 한 명을 보내줬다는 이지윤의 말이 떠오르자 마음이 더욱 씁쓸했다.질투가 점점 차오르자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던 소우희는 이내 말을 타고 나타난 소한준을 보게 되었다.곁에 서있던 혜주가 소우희에게 손수건을 건넸고 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소우희가 말했다.“혜주야, 네가 이렇게 말도 못하게 되니 내 고민과 고충을 함께 대화로 풀어줄 사람도 없구나.”혜주가 입을 뻥긋거리며 손짓까지 했지만 안타깝게도 소우희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됐다. 셋째 오라버니가 돌아오셨구나. 역시 소우연 그자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복문 객줏집에는 옆방에 묵고 있는 손님 외에 이지윤이 소우희를 암암리에서 지켜주라고 보낸 호위무사 여섯 명도 있었다.이 호위무사들은 전적으로 소우희의 명령에 따랐다.이내 소한준의 발걸음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렸다.똑똑똑!“우희야, 문을 열어보거라.”소한준은 문을 두드리며 말했고 혜주는 이내 방문을 열어주었다.소한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방안에 들어섰다. 조금 전, 소우연을 만나러 가기 전에 평춘왕 저택에 먼저 찾아갔지만 안타깝게도 그 저택 문지기에 이어 평춘왕 세자마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그저 평춘왕이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당분간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는 말만 전해 듣게 되었다.“오라버니, 왜 그러시는 겁니까?”소우희가 가여운 표정으로 걱정하듯 묻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혜주를 쳐다보았다.“혜주야, 얼른 오라버니께 차 한 잔 따라 드리거라.”고개를 끄덕인 혜주가 재빨리 차를 따랐다.소한준과 소우희는 탁자 앞에 앉았고 이내 소한준은 오늘 소우연을 만난 사실을 소우희에게 얘기해주었다.조용하게 듣고 있던 소우희가 손에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소우연은 절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13화

    “죄송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면 가려움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고약은 드릴 수 있습니다.”소우연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가려움만 완화되고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네, 그렇습니다.”여인은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럼 평생 이 흉터를 달고 살아야 하겠네요.”소우연은 마음이 살짝 약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모험할 수는 없었다.이제 경성의 모든 사람들이 소우연이 의술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그녀가 여인의 화상 흉터를 낫게 해준다면 사람들은 소우연이 이육진의 얼굴도 낫게 해주지 않았을까 의심할 게 뻔하다.“저도 많이 안타깝습니다.”소우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중에 이육진이 입지를 확실하게 다지고 나면 소우연은 흉터를 치료할 수 있는 고약을 백성들에게 판매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여인 손에 있는 흉터도 쉽게 치료될 수 있다.“감사합니다, 왕비님.”울적한 표정으로 일어선 여인은 이내 돌아서서 떠났다.“다음 분을 모시거라.”정연에게 말을 하던 소우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흉터가 많이 간지러울 텐데 왜 가려움을 완화할 수 있는 고약을 달라고 하지 않는 거지?’한편, 고개를 끄덕인 정연은 여인을 밖으로 모신 뒤, 다음 환자를 불렀다.그 여인은 만안당을 나서자마자 몇 걸음 밖에 세워져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이와 동시에, 품에 안고 있는 들고양이를 어루만지던 이민수는 마차 안으로 들어온 여인을 보자마자 바로 물었다.“뭐라고 얘기하더냐?”갓을 벗은 아령은 이민수 곁에 앉아 화상을 입은 손을 보여주며 대답했다.“왕비님께서는 흉터를 지울 방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소우연과 많이 닮은 아령의 얼굴을 보며 이민수는 몇 번이나 넋을 잃었다.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이민수는 여전히 들고양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앞으로 이런 화장은 하지 말거라.”그 말에 아령은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소인이 화장을 하지 않으면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12화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요? 지금 모든 게 우리 소씨 가문 탓이라는 겁니까?”소한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우연을 쳐다보며 물었다.“아닙니까?”“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뱉을 수 있는 겁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한 모든 선택은 소씨 가문의 미래를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소우연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뻔뻔한 소한준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녀를 제외한 소씨 가문 사람들은 전부 수익자인데 그들이 어찌 소우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소우연은 말이 안 통하는 소한준과 더 이상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게 지금 무슨 표정입니까?”원망 가득한 소우연의 눈빛을 보며 소한준은 기분이 언짢았다. 눈이 퉁퉁 부은 소우희에게 소한준은 어떻게든 소우연을 데리고 가서 삼자 대면으로 오해를 풀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소우연은 지금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소한준은 어쩔 수 없이 한발짝 양보했다.“좋습니다. 다른 문제는 일단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저와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왕비께 할 말이 있거든요.”“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서 하십시오.”“아니…”소우연은 당황한 듯한 소한준을 냉랭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전 당신들과 조금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는데 설마 눈치를 못 채셨습니까?”소우연의 한 마디에 소한준은 입을 떡 벌린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너무도 익숙한 그녀의 얼굴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소우연의 눈빛과 태도 그리고 뱉은 말은 더할 나위 없이 낯설었다.이 여인이 정말 소우연이 맞단 말인가?“좋습니다. 아주 대단하시네요.”소한준은 불쾌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소우연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며 노려보더니 이내 돌아서서 만안당을 떠났다.한편,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정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소씨 가문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파렴치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자들은 단 한번도 왕비님을 진심으로 걱정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물론 왕야와 왕비가 천생연분이라고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11화

    소우연은 곁에서 박수를 치며 이육진을 응원했다.“왕야, 회복이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본채 앞마당에는 간석과 정연 그리고 나무 위에서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는 진규밖에 없었다. 나머지 하인들은 배나무 별채로 보내져 약재를 빻고 있었다.소우연의 응원에 간석과 정연도 한 마디씩 보태며 이육진에게 자신감을 북돋아주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지나자 소우연은 이육진에게 이제 그만 쉬라고 했고 이육진은 발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가까스로 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 부인 말에 따르겠네.”간석이 휠체어를 끌고 오자 이육진은 바로 휠체어에 앉았고 이내 본채로 돌아가 목욕을 했다.결국 소우연은 오늘도 직접 이육진을 위해 고약을 발라주었다.매일 이 시간이 되면 이육진은 소우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우연의 뒤통수를 가볍게 감싸 쥐고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어느새 숨이 거칠어진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얼굴이 빨개진 소우연은 너무 부끄러워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을 챙기러 갔다.이틀 뒤.만안당에 무보수로 백성들을 치료해주러 간 소우연은 그곳에서 소한준을 보게 되었다.“잠깐 나오십시오. 제가 왕비께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뒷짐을 지고 서있던 소한준이 명령하듯 말하자 소우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소 장군님께서 지금 저에게 명령하신 겁니까?”“너…”한없이 냉랭한 소우연의 태도에 소한준은 소우희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소우연은 소씨 가문을 원망하고 소씨 가문을 철저하게 망가트리겠다고 했던 말들 말이다.소한준은 소우희를 경성까지 안전하게 호송했지만 소우희는 겁이 나서 평춘왕 저택에 돌아가지 못하겠다고 했기에 두 남매는 어쩔 수 없이 객줏집에 묵었다.경성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며칠동안 매일 눈물을 흘린 소우희는 몸이 심각하게 말라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소한준은 마음속에 화가 치밀었다.그래서 소우연과 소우희 자매를 화해시키기 위해 이렇게 만안당까지 찾아온 것이다.“소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10화

    두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짚고 허리를 살짝 숙여 얼굴이 발그레해진 소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육진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짓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소우연 곁에 털썩 앉았다.소우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왕야의 다리는 이제 조금 회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리 무모한 행동을 하시는 겁니까? 이제 겨우 열댓 걸음밖에 못 걸으시는데 왕야는 무섭지도 않습니까?”“난 연이 네가 화내는 게 제일 무섭다.”말문이 턱 막힌 소우연은 이육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육진이 이런 남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한편, 소우연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육진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정말이에요. 제 말은 진심이에요.”4년 전, 이육진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소우연이었다. 그리고 4년 뒤, 소우연은 이육진의 다리도 치료해주었고 심지어 얼굴의 흉터도 점점 연해지고 있다.이육진은 소우연 덕분에 긍정적으로 살아갈 목표가 생겼다.어여쁜 소우연의 얼굴을 보며 이육진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는 소우연에게 단순한 고마운 감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그뿐만 아니라 소우연이 자신의 아내여서 너무 기쁜 나머지 꿈속에서도 환호를 지를 정도였다.소우연도 이육진을 몇 번이나 힐끔거렸다. 이육진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소우연은 너무 부끄러웠다.사실 소우연은 이제 남녀 사이의 감정에 대해 더 이상 기대를 품지 않았지만 이육진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꾸 마음이 설레었다.“정말이에요.”이육진이 다시 한번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자 소우연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조심스럽게 벗겼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서로의 숨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소우연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자세하게 훑어보았다.얼굴 흉터가 거의 다 사라졌으며 뚜렷한 이목구비에 카리스마가 넘쳤다.하지만 소우연을 쳐다볼 땐,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표정이었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09화

    결국 보다 못한 간석이 이육진에게 춘궁도 몇 권을 건넸고 이를 대충 펼쳐보다가 흥취를 전혀 느끼지 못한 이육진은 이를 곁에 툭 던지고는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았다.소우연과 부부의 낙을 행했을 때에도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거나 그 방면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게 아니라 본능이었다.소우연의 곁에 있으면 이육진은 어떻게 해야 그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았다.이육진이 이내 소우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이를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떠났다.한편, 멀리서 지켜보던 간석은 소우연이 이육진을 버리고 떠난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왕비님이 왕야를 버리고 혼자 떠난 건 처음이었다.“왕야…”한걸음에 달려온 간석은 재빨리 이육진의 휠체어를 끌고는 감히 아무 말도 묻지 못했다.그러다가 이육진을 힐끗 쳐다보았는데 상대방은 되레 웃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왕야의 얼굴에 웃음이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몰래 웃고 있는 표정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왕야, 왕비님께서 화나서 가신 것 같은데 왜 웃으시는 겁니까?”간석의 말에 이육진이 간석을 힐끗 흘겨보았다.소우연이 오늘 보여준 삐침이 얼마나 귀한 건지 이육진만 알고 있다.예전에 소우연은 이육진 앞에서 늘 깍듯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이었으며 그를 남편이 아닌 왕야만으로 생각하면서 그의 신분에 눌려 예를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에 소우연의 토라진 모습으로 보았을 때, 소우연은 마음속으로 이육진을 점점 더 신임하고 있는 듯했다.이육진은 생각만해도 너무 좋았다.한편, 기분이 좋아 보이는 왕야를 보며 간석도 어느새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왕야와 왕비님이 행복하고 즐거워야 노비들도 따라서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으니까.저녁 식사 때. 정연은 살짝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확실하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평소대로라면 왕야와 왕비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장기를 두어 판 두거나 일상적인 담소를 나눠야 하는데 오늘은 달랐다.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08화

    이육진은 볼에 바람을 살짝 넣은 소우연의 귀여운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내 몸은 아무 문제가 없는 거겠지?”소우연은 이육진의 물음에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그녀는 한동안 남성 의학에 대해 연구를 해보았는데 이육진의 진맥을 짚었을 때, 오랫동안의 금욕생활로 살짝 들떠 있는 상태로 보였다.하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대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얘기했다가 그녀에게 대신 해결해 달라고 하면 어떡할까 겁이 나기도 했다.두 사람은 진정한 합방 경험이 없지만 이육진은 너무도 당당하게 소우연에게 부끄러운 요구를 자주 했다.소우연은 그 요구들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졌다.한편, 날이 어두워지자 이육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우연의 손을 잡고 본채 안으로 들어갔다.소우연은 이육진의 기다란 다리와 건장한 몸매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었다.“왕야, 저택에 저희를 지켜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걱정하지 말 거라.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은 진작 없어졌다.”“그렇군요.”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던 소우연은 갑자기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정신을 번쩍 차렸다.“그럼 감시자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정자 계단 아래로 내려가던 소우연은 걸음을 갑자기 멈추었고 흠칫하던 이육진은 이내 가까이에 놓여있던 휠체어를 보며 다급하게 외쳤다.“아악! 내 다리…”소우연의 손을 놓은 이육진이 앞으로 다가가 휠체어에 앉자 소우연이 얼른 뒤따라갔다.“왕야, 저택 안에 있던 감시자가 언제부터 없어진 거예요?”“아, 그게…”우물쭈물하는 이육진의 모습에 소우연은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연아, 그러니까 나는…”“왕야께서는 어젯밤에도 저에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소우연은 화가 조금 났다.저택 안에 그들을 지켜보는 감시자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줄 알고 이육진의 제안에 협조하였고 자신의 몸을 만지게 허락하기도 했다. 그리고 심지어 주체할 수 없는 야릇한 신음소리까지 냈다.그런 과거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소우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럴 때마다 소우연은

  •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제207화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자들이 저에게 미안한 마음은 조금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소우희를 더욱 걱정하고 있습니다. 소우희에게 작은 벌조차 하나도 내리지 않았거든요.”“소우희가 너보다 먼저 소현우와 소한준을 만나러 갔으니 두 사람은 아마 너를 오해하게 될 것이다.”“왕야, 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그자들은 저를 소씨 가문의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 저를 소씨 가문 딸로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오해하든 전 상관없습니다.”이런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우연을 보며 이육진은 마음이 아팠다.그의 연이는 이제 소씨 가문에게 완전히 실망한 것이다!이때, 간석이 다가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했다.“왕야, 왕비님, 이 어의가 오셨습니다.”소우연은 재빨리 이육진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며 물었다.“벌써 온 것이냐?”며칠 전에 진맥을 했던 것 같은데 왜 벌써 왔지?“네, 왕비님. 이 어의께서 마당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소우연은 이육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간석에게 이 어의를 들게 하라고 말했다.이 어의는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행동거지가 차분했다.이육진과 소우연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 뒤 소우연을 위해 진맥을 진행했다.15분 뒤, 이 어의가 소우연을 쳐다보며 말했다.“왕비님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왕야, 소인이 왕야께도 진맥을 해드릴까요?”고개를 돌린 이 어의가 이육진에게 묻자 이육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필요 없다. 내 몸은 아주 튼튼하다.”이 어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몇 달 동안이나 소우연을 위해 진맥을 했지만 아직도 회임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태의원에 남은 이육진의 검사 기록에 의하면 이육진은 지금 회임이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왕비의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혼사를 치른지 몇 달이나 넘었는데 아직도 회임 소식이 없는 걸로 보아 이 어의는 이육진의 몸 상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이번에도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면 덕빈 마마가 크게 노할 수도 있을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