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연은 그가 멍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는, 다시 한번 몸을 기울였다.얕았던 입맞춤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의 귓가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속삭였다.“왕야,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결코 왕야를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사람들은 말한다.‘온화한 여인의 품이 곧 영웅의 무덤이라.’그가 지금 그 말을 절감하고 있었다.그토록 마음을 다해 원하는 여인이 이렇게 유혹하듯 다가오는데, 어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달콤한 독처럼 그의 정신을 마비시켰다.그녀의 간절한 눈빛이,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다.진짜와 가짜를 따지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결국 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너를 믿으마.”소우연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왕야께서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잠깐만, 방금 내가 뭐에 홀려서 무슨 대답을 한 거지?’‘단지 그녀가 먼저 입맞춤을 했다는 이유로, 정신이 흐려져 이렇게 위험한 일을 허락해 버린 건가?’“연아, 잠깐…”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을 꺼내려 했다.그러나 소우연이 다시금 그의 입술을 덮었다.그녀는 그가 앉아 있는 틈을 노려 살짝 허리를 숙였고, 자연스럽게 그를 조종하듯 다루었다.‘이럴 수가…’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야, 그런데…”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조용히 물었다.“왕야께서는 정말로 자신의 얼굴이 보기 흉하다고 생각하십니까?”이육진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그는 그 말을 여러 번 스스로에게도 물었다.과거 자신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지금은?그는 여전히 자신감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소우연은 그의 마음을 아는 듯 부드럽게 속삭였다.“왕야, 저는 왕야의 얼굴을 고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야의 다리 역시, 언젠가 반드시 치료할 자신이 있습니다.”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머지않아, 왕야께
이육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소우연은 그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그는 항상 이랬다.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도, 그 속에 담긴 감정과 생각을 쉽게 내비치지 않았다.만약 예전이라면,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태자로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를 짓밟고 내던진 자들이 있었다.그날 이후, 그는 단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배신자에게 자비란 없다.”그 무엇도, 그 누구도 다시는 자신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도록...평서왕 이남진.그리고 세자 이민수.그 두 사람은 그때의 사건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그는 그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불구가 된 그를, 그들은 마치 보잘것없는 돌멩이처럼 취급했다.회남왕부가 아무리 도발해도, 평서왕부는 단 한 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황제의 보호 아래, 철저하게 신중하게 움직였다.그래서 지금까지 손을 쓸 수 없었다.그러나, 이제는 다르다.그는 다시 일어섰다.얼굴도, 다리도 모두 회복되었다.이제 이남진과 이민수가 가만히 있을까?분명, 움직일 것이다.그 순간이 바로, 그들을 무너뜨릴 기회였다.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연아, 나는 지금껏 너를 욕심낸 적이 없었다.”소우연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왕야,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그는 그녀를 깊이 바라보았다.“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절대 내 곁을 떠나지 말거라.”소우연은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육진.‘살아 있는 지옥의 군주’라 불리는 전장의 신. 그가 이렇게 말하다니.그의 요구가 이토록 단순하다니.그녀는 다시금 깨달았다.이번 생은… 복수와 이육진의 곁에 머무는 것 외에는 달리 바랄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소우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왕야께서 저를 마다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단, 그가 자신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 그땐 떠나리라 다짐하였다.그러나…“나는 너를 절대 내치지 않을 것이다.”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가족을 찾지 못했다면, 지금은 어디에서 머물고 있느냐?”이민수의 차가운 목소리가 마차 안에 울렸다.소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소첩…”그녀는 머뭇거리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눈가에 금세 눈물이 맺혔지만,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듯했다.이민수는 옆에 있던 상평을 흘깃 바라보았다.상평은 마른기침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이 앞에 계신 분은 평서왕부의 세자 저하시오. 만약 원하신다면, 우선 세자 저하를 따라 평서왕부로 가는 것이 어떠하오?”그의 말이 끝나자, 소녀는 감격한 듯 머리를 조아렸다.“세자 저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그러나 상평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됐소, 됐소. 우선 마차에 오르시오.”소란을 지켜보던 백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세자가 저렇게 한양에서 길 잃은 여인을 거두는 걸 보니, 혹시 첩으로 들이려는 것 아닐까?”“그럴 수도 있지. 세자 저하도 나이가 있는데, 아직도 혼인을 못 했잖아.”“어쩌면 앞으로 세자빈이 될 수도 있겠군.”그들의 수군거림이 들리자, 마차에 오르던 그 여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세자빈? 첩? 그런 사소한 것을 노리는 게 아니야.’그녀의 목적은 훨씬 더 컸다.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이민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닮았다. 어머니와 너무나 닮았다.’그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분명 이랬다.그러나 현재 그의 어머니는 오랜 세월 궁에서 칩거하며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더 이상 세상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이름이 무엇이냐?”그의 질문에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소첩은 연아… 아니, 소첩의 이름은 ‘아령’이라 합니다.”“아령…”그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성은 무엇이냐?”그녀는 그가 의심하고 있음을 깨닫고 곧장 대답했다.“소첩의 성은 이, 이름은 아령입니다.”이민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잠
간석이 전한 말을 듣자, 소우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왕야께서 뭐라고 하셨다고?”간석은 목을 가다듬고 공손히 말했다.“왕야께서 이리 전하셨습니다. 이민수의 마음은 넓디넓어, 세상의 모든 여인을 다 품으려 하지만, 왕야께서는 오직 왕비마마만을 마음에 두고 계신다 하셨습니다.”“……”소우연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이육진이 직접 이런 말을 했단 말인가?“그렇게 말씀하셨다고?”간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머금고 퇴장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정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소우연이 그녀를 바라보자, 정연은 급히 손수건을 들고 책상을 닦으며 시선을 피했다.그러면서 중얼거렸다.“왕야께서는 마마를 정말 아끼십니다.”소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그렇긴 한데… 뭔가 나를 완전히 믿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고.”“에이, 설마요. 왕야께서 이토록 마마를 귀하게 여기시지 않습니까.”정연이 못 믿겠다는 듯 말했다.“정말로 나를 믿으셨다면, 어찌 이민수가 사랑이 넘친다는 말을 일부러 나에게 전했겠느냐?”“……”“그 말인즉, 내가 혹여나 그에게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정연은 머뭇거리며 말했다.“그, 그야… 왕야께서 혹시라도 마마께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릴까 봐 그러신 게 아닐까요?”소우연이 곧바로 되물었다.“너도 내가 이민수에게 홀릴 거라 생각하느냐?”“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정연이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저는 마마께서 그런 분이 아니란 걸 잘 알지요. 다만, 그 세자 저하는 워낙 간사한 사람이라서…”소우연은 헛웃음을 지었다.“네가 그를 경계하는 것처럼, 나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왕야께서는 어찌 나를 못 믿으시는 걸까?”정연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왕야께서는 괜한 걱정을 하고 계신 듯합니다.”소우연은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분명 이육진에게 진심을 다해 보여주었다.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흔들릴까 봐 불안해
이육진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네 말이 모두 맞다.”그는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괜히 네 마음을 어지럽혔구나.”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후회가 서려 있었다.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한순간이라도 사라질까 두려웠다.그 감정은 마치 독처럼 퍼져나갔고, 강렬한 집착으로 변해갔다.아마도, 지난 네 해 동안 그는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한때 그를 사랑한다던 귀족 여인들은 그가 추락한 순간, 하나같이 등을 돌렸다.그들 눈에 그는 더 이상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그러나, 오직 그녀만은 달랐다.소우연.그녀가 자신과 혼인할 때, 분명 기쁘지는 않았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설령 그것이 연기라 해도, 그녀는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사년 전, 그녀는 그를 살렸다.사년 후, 그녀는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하늘이 보낸 구원자와 같았다.이 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의 얼굴만이 가득했다.그 눈가에 자리한 작은 미인점조차 선명히 떠올랐다.“왕야께서는 결코 저의 걱정거리가 아닙니다.”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왕야께서는 저의 빛이십니다.”그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내가 너의 빛?”“네. 왕야께서 곁에 계시면, 내일이 아름다울 것만 같습니다.”이육진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말이 왜 이리도 가슴 깊이 파고드는 것일까.소우연은 망설임 없이 덧붙였다.“왕야… 전에 말씀드렸던 꿈, 기억하시나요?”“기억하고 있다.”그는 그 꿈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어머니에게 물었다.만약 소우연이 혼인을 거부하고 도망쳤다면,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그때, 어머니는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차분히 대답했다.“내 아들을 능멸한 죄. 그 손발을 자르고 소씨 가문에 돌려보내, 그들이 직접 그 대가를 치르게 했겠지.”그는 그때 깨달았다.그녀의 꿈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이육진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좋지 않은
“네 말은 늘 틀리지 않구나.”이육진은 천천히 중얼거렸다.그가 사랑하는 여인, 그리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힘이 없다면, 어떻게 끝까지 지켜낼 수 있겠는가?그는 어렴풋이 느꼈다.소우연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더 깊숙이 품에 안았다.“두려워할 필요 없다. 내가 있으니 말이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어떤 일이 있어도, 난 반드시 널 지켜낼 것이다.”소우연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왕야.”그녀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맞설 것이다.그 길이 쉽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나아갈 것이다.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단 하나.소우희와 이민수가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그녀의 말 속에서, 이육진은 그녀가 그들에 대한 경계를 절대 풀지 않는다는 것을 읽어냈다.하지만,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그는 결코 평서왕부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단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그 밤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다음 날, 소우연은 회남왕부를 나섰다.그녀는 이육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그리고 그녀 역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했다.그런데, 아직 장안거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차가 멈춰 섰다.소우연은 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무슨 일인가?”마부를 맡은 진우가 빠르게 대답했다.“왕비마마, 길에 들고양이가 한 마리 버티고 있어 길을 막았습니다.”소우연은 순간 멈칫했다.들고양이?그녀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정연이 마차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그녀는 바닥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향해 말했다.“왕비마마, 배꽃입니다.”소우연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이민수가 참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그녀는 마차에서 내렸다.진우가 황급히 내
“야옹… 야옹…”이민수의 품속에 안긴 배꽃이 가볍게 울었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다과 한 조각을 떼어 배꽃에게 내밀었다.그러나 배꽃은 냄새만 맡을 뿐, 입을 대지 않았다.이민수는 배꽃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게 중얼거렸다.“배꽃아, 힘을 내야지. 소우연이 가장 아꼈던 존재가 너였어.”그의 손길이 살며시 힘을 주었다.“그러니, 소우연이 그 남자의 아이를 가지지만 않는다면, 너는 여전히 소우연의 것이 될 수도 있어.”그의 눈은 창가에 고정되어 있었다.그는 만안당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세자 저하.”상평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이민수는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여기에 왜 있는 것이냐? 내가 직접 가서 불러오라고 하지 않았느냐?”상평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세자 저하, 너무 조급해 마십시오. 제가 직접 가면 회남왕비께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할 터. 그래서 작은 거지 아이를 보내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이민수는 손가락을 두드리며 생각했다.그럴듯한 방법이었다.“좋다. 그럼 결과를 보자.”상평은 만안당의 문을 가리켰다.“보십시오, 저하.”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거지 아이가 만안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다시 밖으로 나왔고, 그 뒤를 따라 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나왔다.소우연이었다.가벼운 백색의 옷을 입고, 그녀의 걸음은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했다.가녀린 옷자락이 바람에 살짝 휘날리며, 아침 햇살 아래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이민수는 무의식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예전에도 이렇게 아름다웠던가?’그의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과거의 기억이었다.장군부의 소씨 대가문의 첫째 영애, 늘 거칠고 소박한 옷차림으로 살던 그녀.그녀는 뒷마당에서 소우희를 위해 약재를 손질하곤 했었다.“아니지.”그는 자신에게 되뇌었다.그녀는 소우희를 위해 약재를 손질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고 있던 것이었다.그런데 왜 그때는 그녀
소우연은 여전히 청아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 속에서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에게 열렬히 빠져 있던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이전처럼 뜨겁거나, 애절하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민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연아, 네 마음속에 아직도 내가 있느냐?”그는 품에 안고 있던 배꽃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이민수는 언제나 그녀 앞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설령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그녀보다 한층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소우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세자 저하께서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제가 이곳에 왜 오겠습니까?”그러면서 일부러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세자 저하를 뵙고자, 일부러 정연과 진우까지 따돌리고 왔는데, 그런 저에게 세자 저하는 고작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까?”이민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자꾸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예전 같았으면, 그가 손을 뻗기만 해도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하지만 지금은?그녀는 차갑게 ‘남녀가 서로 가깝게 접촉해서는 안 된다’ 라며 거리를 두었다.이민수는 더욱 불안해졌다.그러나 소우연은 더욱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왜 피하냐고 물으십니까?”그녀는 한층 더 감정이 북받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사랑했던 세자 저하는 고결하고 품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어찌 저와 이리 함부로 몸을 닿게 하려 하십니까?”그러고는 슬픔에 젖은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세자 저하께서 제게 여전히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가 회남왕과의 혼인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아니라면, 제가 어찌 감히 세자 저하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그녀의 물기 어린 눈망울이 애절하게 흔들렸다.이민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아, 네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그의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