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연은 여전히 청아하고 우아한 모습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 속에서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에게 열렬히 빠져 있던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이전처럼 뜨겁거나, 애절하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민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연아, 네 마음속에 아직도 내가 있느냐?”그는 품에 안고 있던 배꽃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이민수는 언제나 그녀 앞에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설령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그녀보다 한층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소우연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세자 저하께서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제가 이곳에 왜 오겠습니까?”그러면서 일부러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세자 저하를 뵙고자, 일부러 정연과 진우까지 따돌리고 왔는데, 그런 저에게 세자 저하는 고작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까?”이민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자꾸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예전 같았으면, 그가 손을 뻗기만 해도 그녀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하지만 지금은?그녀는 차갑게 ‘남녀가 서로 가깝게 접촉해서는 안 된다’ 라며 거리를 두었다.이민수는 더욱 불안해졌다.그러나 소우연은 더욱 서운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왜 피하냐고 물으십니까?”그녀는 한층 더 감정이 북받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사랑했던 세자 저하는 고결하고 품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어찌 저와 이리 함부로 몸을 닿게 하려 하십니까?”그러고는 슬픔에 젖은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세자 저하께서 제게 여전히 마음이 있으시다면, 제가 회남왕과의 혼인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아니라면, 제가 어찌 감히 세자 저하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그녀의 물기 어린 눈망울이 애절하게 흔들렸다.이민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연아, 네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그의
“정연과 진우가 곧 돌아올 것입니다. 세자 저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소우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민수를 향해 가볍게 예를 표했다.그녀의 동작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부드럽고 우아했다.그 모습이 이민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제는 더 이상 자신에게 헌신하지 않는 그녀가, 예전처럼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지 않는 그녀가, 오히려 더 눈부시게 보였다.“연아…”그는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혹여 이육진에게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반드시 내게 알려야 한다. 내가 널 지켜 줄 것이다.”소우연은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리고, 요즘 경성에서는 네 의술이 어의 못지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더구나. 혹시… 이육진의 다리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보지 못했습니다.”그가 왜 갑자기 이육진의 다리를 언급하는 것일까.“그런데, 평안맥을 보러 온다는 이태의는 본디 덕빈의 사람이 아닌가? 그가 자주 회남왕부를 드나든다면, 혹 이육진의 다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닐까?”이태의는 애초에 황제와 덕빈이 보낸 사람이었다.그가 회남왕부를 찾는 이유는 단순했다.소우연이 임신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이육진의 다리는 이미 회복되었다.그 사실이 조만간 알려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소우연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단지 평안맥을 보기 위해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이민수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모든 일에는 신중해야 한다. 내가 더 강해져야만 너를 지킬 수 있어. 연아, 넌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이민수가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결국 그가 원하는 것은 황위였다.그가 황제가 된다면, 소우연을 다시 자신의 곁에 둘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소우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세자 저하께서 염려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기회가 되면 직접 확인해 보아라.”“알겠습니다.”소우연은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몸을 돌려 문을 향해
이 한마디에 이민수는 즉시 자신감을 되찾았다.“그래, 그래. 이육진은 그저 불구에 불과하지.”소우연이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쪽에 서야 할지는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그가 황위를 차지해야만 그녀에게 미래와 행복을 줄 수 있다.상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습니다. 다만, 오늘 아씨께서 너무 쉽게 빠져나온 것이 수상하긴 합니다.”“이육진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그의 사람이 근처에 있었겠지.”“혹여 회남왕께서 아씨를 의심하시면 어찌하시겠습니까?”어찌하겠냐고?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이민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손에 힘을 주어 소매를 휙 털었다.“운명은 정해진 법이지. 그 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그 아이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그는 단호하게 말했다.“가자.”“예, 세자 저하.”상평은 즉시 응하며 방으로 들어가, 배꽃을 품에 안았다.그는 오랜 세월 이민수를 모셔왔다.주군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해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처음엔 이민수가 두 달 동안 직접 배꽃을 돌보는 모습을 보고, 그가 소우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지금 보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소우연이 어떤 위험에 처하든,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소우연이 만안당으로 돌아왔을 때, 정연과 진우 역시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진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왕비마마, 그 자가 혹시 무례를 범하진 않았습니까?”소우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결국 나를 이용하려는 속셈일 뿐이더구나.”그뿐만이 아니었다.그는 이육진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도록 약을 먹이려 했다.정연이 혀를 찼다.“왕비마마도 참, 그런 사람을 만나면서도 저를 데려가지 않으시다니요!”“네가 왕부의 사람이라는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너를 데려가면 그가 의심하지 않겠느냐?”진우가 입을 열었다.“그래도 왕비마마께서 무슨 일이 생기시면 어찌합니까? 저는 바로 옆 건물에서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나를 가족이라 여긴 적이 없었어. 그러니, 그들이 내 오라버니일 리 없지...”소우연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정연은 순간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왕비마마, 용서하십시오. 제가 경솔했습니다.”왕비는 워낙 부드럽고 자애로운 성품이다 보니, 자칫하다가는 자신이 노비라는 사실조차 잊곤 했다. 그렇게 정연은 오늘도 그녀 앞에서 말실수를 할 뻔했다.그러나, 소우연은 그런 정연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다. 왕부에서의 생활이 덜 지루했던 것은, 네가 나와 말동무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야.”정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왕비마마, 과분한 말씀입니다.”그녀가 왕비를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육진의 뜻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육진은 이토록 소우연을 아끼고 사랑하는데도, 왜인지 소우연은 때때로 외로워 보였다.소우연은 마차의 창문을 닫으며 덧붙였다.“적어도 너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한 적 없었지.”그녀는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요즘 소가가 한동안 잠잠했지만, 오라버니들이 돌아오면, 다시 신경 쓸 일들이 많아질 거야.”정연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왕비마마, 정말로 소가와 화해할 생각이 없으십니까?”소우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왕부에서 나눈 대화는 이육진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컸다.그래서 더욱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럴 일은 없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정연은 다시 물었다.“노비가 감히 여쭙니다. 왕비마마께서 혹여나 친정의 힘을 등에 업으신다면, 더욱 든든하지 않으시겠습니까?”소우연은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네가 나라면 믿을 수 있겠느냐? 과거에 나를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 넣었던 사람들이, 앞으로는 나를 지켜 줄 거라고?”정연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비마마께서는 왕야의 총애를 받고 계시니, 언젠가는 소가도 왕비마마께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소우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그들이
이종대가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소우희는 단단히 찡그린 눈썹을 풀지 못했다.“춘화야, 세자 저하께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두고 계신 걸까?”춘화는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답했다.“왕비마마, 소녀는… 잘 모르겠습니다.”“모른다? 모른다? 너는 벙어리가 아니지 않느냐? 어떻게 매번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하느냐!”소우희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춘화는 급히 무릎을 꿇었다.“왕비마마, 소녀가 경솔했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세요!”그녀가 바닥에 엎드려 빌었지만, 소우희의 속은 더욱 뒤틀렸다.소우연이 대신 시집을 간 그날 이후, 그녀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모든 것이 꼬였다…아무리 노력해도 잘 풀리는 일이 없었다.지금처럼… 이렇게 바닥까지 떨어지는 날이 올거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소우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춘화를 스쳐 지나갔다.“뭘 멍하니 있느냐! 어서 짐을 싸라!”“예, 왕비마마.”본채.이종대는 축 처진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흐릿한 목소리로 외쳤다.“물… 물 좀…”소우희는 문을 벌컥 열며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다.“물은 무슨 놈의 물? 네가 빨리 죽어야 내가 속이 시원하지!”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했다.병약한 남자의 퀭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한때 살집이 있었던 그의 몸은 이제 뼈만 남아 있었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보기에도 비참했다.“악독한 여자… 차라리… 나를 죽여라.”이종대는 눈빛 속에 증오와 절망을 담은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죽이라고? 웃기지 마라. 네 목숨은 네가 알아서 끊어야지!”“물 좀… 제발…”그는 희미한 기대를 품고, 뒤에 따라온 춘화를 바라보았다.춘화는 소우희의 눈치를 살피며 물을 건네려 했다.그러나 소우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조금만 줘라. 방 안에 온통 오줌 냄새가 진동하는데, 이놈이 너무 많이 마시면 더 지독해지지 않겠느냐?”그녀는 혐오스러운 듯 코를 막으며 손을 털었다.‘이 자식이 빨리 죽어야 내가 다른 처소로 옮기지…’소우희는 질린 표정으로 방을 나섰
멍하니 서있던 소우연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반응한 채 이육진에게 물었다.“용 감정께서 또 왕야께 점괘를 봐 드린 겁니까?”말을 하던 소우연은 진규의 손에서 휠체어를 넘겨받고는 이육진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이육진은 그런 소우연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자가 올해 점괘를 가장 많이 보았다고 하더구나. 이제 5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자는 벌써 날 위해 점괘를 세 번이나 보았다.”흠천감은 이 소설 속에서 신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들이 본 점괘는 거의 착오가 없었다.소우연은 마음이 불안해서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다.그러다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소우연과 이육진 단둘이 남게 되자 소우연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용 감정께서 왕야를 위해 다른 점괘를 봐 드린 적이 있거나 혹은 소우희나 이민수 두 사람을 위해 점괘를 본 적도 있습니까?”침대 위에 앉은 이육진은 호기심 가득한 소우연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의 점괘도 본 적이 있다. 용 감정은 두 사람의 운명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더구나.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고 말을 했어.”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는 건 언제든 정상적인 궤도로 다시 돌아올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더 얘기하신 건 없으십니까?”“있지.”이육진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연이 네가 내 운명을 바꿔 놓았다고 하더구나.”“네? 제가 왕야의 운명을 바꿨다고요?”“그래. 그리고 네 스스로의 운명도 바꿨다고 했어.”용강한이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이육진은 용강한의 말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래의 운명대로라면 소우연은 혼인을 하자마자 큰 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 화가 스스로 풀렸다고 한다.화가 풀렸으니 망정이지, 용강한이 암암리에 제시한 말에 따르면 소우연은 혼인을 함과 동시에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용강한 그 영악한 자가 점괘를 잘못 본 게 확
”지금 막 진규를 보내 자네를 모셔오라고 하던 참이었소.”이육진의 말에 용강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조금 전에 취선루에서 밥을 먹고 낮잠을 청하려고 하다가 왕비님이 날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소.”이육진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저자가 용하긴 용하네.’한편, 소우연은 말없이 백의를 입은 용강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고 마침 상대방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두 사람은 그렇게 눈이 딱 마주쳤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용강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대감님 참 용하시네요.”소우연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말하자 용강한은 여유롭게 대답했다.“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떨어트렸는데 그 김에 점괘를 대충 봤습니다.”소우연은 용강한의 대답에 말문이 턱 막혔다.‘대충 본 점괘로 이렇게 정확하게 맞춘다고?’“그럼 대청으로 가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소.”이육진이 휠체어를 끌고 대청으로 가려던 그때, 용강한이 말했다.“왕야는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오.”“그게 무슨 말이오?”이육진이 한층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용강한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용강한은 전혀 겁을 먹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소우연을 쳐다보았다.그 모습에 소우연은 이내 이육진을 쳐다보며 물었다.“왕야, 제가 따로 얘기를 나눠봐도 되겠습니까?”소우연은 용강한에게 물어보고 싶은 의혹들이 많았다. 소설 원작에 의하면 남녀 주인공과 겨뤄볼 만한 사람은 이육진뿐이지만 하늘의 뜻을 읽을 수 있는 건 흠천감이다!“그리 하여라.”이육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우연의 부탁이라면 그는 뭐든 들어줄 수 있었다.이육진은 그렇게 휠체어를 끌고 떠났고 진규와 간석도 이내 이육진의 뒤를 따랐다.홀로 남은 정연은 소우연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왕비님, 그럼 소인은…?”“너도 이만 물러가거라.”“네, 알겠습니다.”그렇게 용강한과 소우연만 남게 되었다. 용강한은 소우연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그제야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왕비님, 가시죠.
”맞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인연이 참 깊은 듯합니다.”소우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용강한이 소우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왕비님께서 저를 아직까지 기억하신다고 하니 저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아닙니다. 그 남자아이가 대감님이라고 하시니 저도…”오래간만에 소녀다운 모습을 보이던 소우연은 용강한을 쳐다보며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 듯 말했다.“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있는데 대감님께서 이를 풀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용강한은 소우연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했다.“왕비님께서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에 대해 묻고 싶으신 것이지요?”“네, 그렇습니다.”소우연은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리고 초조했다. 그녀는 회남왕 저택의 미래를 간절하게 알고 싶었지만 알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그 미래가 너무도 막연하고 아득하여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말을 하던 용강한은 소우연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왕비님께서는 무엇을 더 알고 싶으십니까?”용강한의 눈빛은 의미심장했다.담담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그는 순백의 구름과도 같았다.“저는…”소우연은 입을 뻥긋거리며 자신과 이육진이 앞으로 판을 뒤집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조금 전에 용강한은 미래가 막연하고 아득하다고 얘기를 했었다.‘만에 하나 용강한이 판을 뒤집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라고 대답하면 어떡하지? 그럼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이민수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힘을 쓰는 몇 년 동안 나와 이육진은 언젠가 죽을 걸 알면서 그자와 싸워야 한단 말인가?’이런 생각에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소우연은 대청 밖 파란 하늘에 둥둥 떠있는 흰 구름을 보며 어떻게든 차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강한이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왕비님, 혹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소우연은 간절하게 알고 싶다는 눈빛으로 용강한을 쳐다보았
“그 아이… 소씨 가문 전체를 증오하는 걸까.”소우연이 혼잣말처럼 중얼였다.햇살 한 줄기가 주먹만 한 감방 창을 뚫고 들어와, 소우연의 하얗고 고운 얼굴을 비췄다.그녀는 그 빛 아래서도 당당하고 우아했다.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품격과 위엄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반면 소우희는 지푸라기 위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었다.가려움이 피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고, 근육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꼴사납게 널브러진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간신히 기어 올라온 잔재 같았다.왜?왜 소우연만 이렇게 타고난 운명이 다른 걸까?이육진에게 시집간다 했을 때, 누구나 그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지금은 당당히 태자빈 자리에 앉아 있으니. 소우희는 미칠 것처럼 속이 뒤집혔다.분했다. 억울했다.온몸이 분노로 들끓었다.아직도 아령이 왜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았는지 알지 못했다.알았다 해도, 그걸 소우연 따위에게 말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죽는다 해도, 절대 이 여자 앞에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소우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됐어. 어차피 네 입에서 들을 얘기는 없을 테니까. 그럼 남은 시간, 실컷 고통을 누리도록 해.”“아아아아아아!!!”말은 알아들을 수 없어도, 무슨 말을 내뱉고 있을지 소우연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저주와 원망, 추악한 욕설…그녀에겐 이제 그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잠시 후, 감옥 복도 끝에서 이육진이 걸어왔다.“다 정리했다. 간수들에겐 유동식을 먹이도록 했고, 의원도 붙였어. 죽을 수 없게 만들었지.”“아아악! 아아아아아악!!!”소우희는 짐승처럼 비명을 질렀다.절식으로 빨리 죽고 싶었건만, 그들은 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이육진… 그 자는 진짜 악마였다.죽을 권리조차 빼앗다니 말이다…그녀의 절규와 광기 어린 울부짖음에도 소우연과 이육진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감옥을 떠났다.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누구든 좋아… 날 좀
대체 그놈 머릿속엔 뭐가 들었단 말인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함.짐승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움직이는 꼴이라니.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고자 취급하는 게지.이민수의 눈동자엔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 감정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아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군자는 열 번 복수해도 늦지 않습니다.’이민수는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난 마차에서 기다리겠다. 소우희를 만나고 나면 바로 나오거라.”아령이 물었다.“세자 저하는… 보지 않으실 겁니까?”그녀는 분명 이민수가 처음으로 마음 준 여인이었다.“아니.”소우연이든 소우희든.이제 소씨 가문의 피를 지닌 자라면 모두 증오스러웠다.“알겠습니다.”표정은 아쉬운 듯했지만, 속은 후련했다.애초에 그녀는 소우희를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감옥 안.소우희는 지푸라기 더미 위에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모기떼가 온몸을 물어뜯었고, 하룻밤 사이 그녀의 얼굴은 부어오른 자국으로 뒤덮였다.붉고, 시퍼렇고, 검붉게.부어오른 자국과 뒤틀린 상처들이 뒤엉켜 있었다.그 얼굴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소우연이 그녀 앞에 다가서자, 소우희의 눈동자가 잠시 멍해지더니 곧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채 흔들렸다.“내가 널 죽여주길 바라는 거야?”소우연의 목소리는 차가웠다.거지꼴로 누워 있는 소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온몸을 떨었다.이육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더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올라왔다.그는 감옥 책임자를 찾아 다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걱정 마. 넌 죽게 될 거야. 단지, 매일 매일 뼛속을 긁는 고통과 끝없는 가려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뿐이지.”“아아아악!!!”죽여줘… 제발, 죽여줘…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이 지옥보다 끔찍했다.분노도, 원한도, 혐오도…어떤 말로도 지금의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무언가를 저주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것조차 무력했다.몸은 아팠고, 그보다 더 끔찍하게 가려웠다.그녀는
“세자 저하, 그럼 전 몸을 편히 하기 위한 약을 좀 구해오겠습니다.”아령은 이민수에게 조심스럽게 인사한 뒤, 소범준에게 직접 마차를 몰게 했다.소범준은 그 말을 듣고 목이 콱 막힌 듯했다.겉으로는 약을 구하러 간다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이지윤의 아이를 가지려는 수작이었다.마차는 한참이나 골목을 빙빙 돌았다. 누군가의 눈을 피하려는 건지, 혹은 무언가를 감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차는 어느 약방 앞에 멈췄다.이후 아령은 소범준에게 평서왕부의 후문까지 말을 타고 함께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소범준은 툭 던지듯 말했다.“당신의 계략과 담대함은 웬만한 사내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그 말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더 큰 비중은 냉소였다.아령이라고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귀하게. 누구는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으리는 종으로 사는 삶이 만족스러우신가 보지만, 전 아닙니다. 전 어머니의 한을 꼭 풀어드려야 해요.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편히 살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쁜 자들이 잘사는 세상, 그게 공평한가요?”그녀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을 들고 소범준을 또렷이 바라봤다.“제가 나서지 않으면, 제가 저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어머니의 억울함은 끝내 땅속에서 잠들고 말아요.”소범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조용히 되물었다.“나으리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고 죽었다면, 복수하지 않으시겠어요?”여전히 침묵하는 그를 향해, 아령은 코웃음을 쳤다.“관리들은 마음껏 불을 지르면서 백성은 등불 하나 못 켜게 하는 세상, 그게 정의인가요? 여자인 제가 가진 건 이 얼굴과 몸뿐이에요. 이걸 무기로 쓰는 거죠.”말을 마친 그녀는 묵묵히 문을 두드렸다.곧 누군가 문을 열었고, 소범준은 이끌려 별당으로 들어가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그 사이 아령은 소매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혹시라도 이번에도 임신에 실패한다면, 다음 달은 더욱 조급해질 게 뻔했
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세자 저하는 아령의 유일한 사내입니다. 이 생에서 저는 오직 저하 한 사람만을 섬기겠어요. 제발… 저하께서도 제게 조금만 더 다정하실 수는 없나요?”아이 때문이라도, 이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아령은 그의 속내를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었다.“세자 저하의 상황을 바깥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세자 저하의 아이를 가진다면… 훗날 무슨 소문이 나더라도, 그 소문을 깨뜨릴 수 있는 증거가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찌 이 아이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그 순간 이민수는 문득 냉정을 되찾았다.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 정말이지… 영리하구나.’만약 좀 더 일찍 아령과 마음을 나눴더라면, 지금처럼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좋아. 약조하지. 너와 아이한테만큼은 잘 대해주마. 다만…”세자빈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아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전 세자 저하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됩니다. 이 아이의 정체도 지금 당장 밝히실 필요 없어요. 모든 게 안정된 후에 천천히 말씀하셔도 늦지 않지요.”“좋아.”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어루만졌다.하지만 이민수는 왠지 모를 의심이 들어 혜주에게 어의를 불러오라 명했다.그 순간 아령의 눈빛엔 잠시 경멸이 스쳤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진맥을 받았다.“축하드립니다, 세자 저하. 회임이 맞습니다.”어의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그간 사는 게 허무했던 이민수에게 드디어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생긴 것이다.아령의 말처럼, 언젠가 자신이 불능이라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그때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명분이 될 터였다.“좋다… 아주 좋아!”이민수는 크게 웃으며 상을 내렸다.그 시각, 뜰의 오동나무 위에 숨어 있던 소범준은 그 모든 대화를 또렷이 듣고 있었다.무공 수련자라 귀가 예민한 데다, 아령과 이민수의 목소리까지 컸으니 말이다.그는 속으로 몸서리쳤다.‘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거짓말도
“정말 매정하네요.”소우연은 담담하게 속삭이듯 말했다.전생에 소씨 일가가 자신에게 보였던 차가운 시선이 떠올랐다.그런데 오늘을 돌아보니…그들은 여전히 온갖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소우희를 다시 데려가 치료하고 있었다.결국 소씨 일가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단지… 그녀에게만 그토록 냉정했던 것이다.애석할 따름이었다.소우희는 분명한 죄인이었고, 설령 소씨 일가가 동정을 베푼다 해도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그런 몰골로 옥에 갇힌다면, 앞으로 버틸 날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연아,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나는 이육진도 아니고, 이지윤도 아니야.”이육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라도 소우연이 그 패륜들과 자신까지 함께 미워하게 될까 두려웠다.소우연은 잔잔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르십니다.”“정말이냐?”“네. 전 전하만은 믿고 있어요.”그녀의 믿음은 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번 생에서 복수 외에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육진이 시신을 수습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함이기도 했다.그를 위해 죽는다 해도, 그건 감히 감사의 마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소우희가 오늘 같은 결말을 맞이한 건, 어찌 보면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역사가 반복된다면 이번 생에서 추락하는 건 소우희였고, 그 대상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니었다.“전하… 내일 소우희를 한번 보고 싶어요.”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자.”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퍼지고 있었다.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달은 벌써 천천히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고요한 달빛이 뜰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한편.아령은 이민수의 상처를 정성껏 감싸고 있었다.그런데 무심결에 세게 닿았는지, 이민수는 화가 난 듯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아령은 복부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고통에 찬 얼굴로 이민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세자 저하, 소녀 아령은 죽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임 어의.”소우연의 목소리가 문 앞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임 어의는 깜짝 놀라며 급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태자빈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됐네. 편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임 어의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내심 긴장하면서도 소우연의 말투에 어딘가 안정감을 느꼈다.“태자 전하의 몸은 괜찮으신가? 자손을 얻는 데에 이상은 없겠지?”소우연은 조용하고 단정한 어조로 물었다.“전하께선 기력이 왕성하시고, 맥상도 아주 안정되어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왜 아직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걸까.”밤낮으로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이육진의 품에 안겨 숨이 넘어갈 정도였던 밤도 많았다.그런데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무지 알 수 없었다.자신의 몸 상태는 늘 살피고 있었다.맥으로 봐도 생식력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더 답답했다.임 어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소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보시게.”“태자빈 마마… 소신의 생각으로는 태자 전하께선 전혀 이상이 없으십니다.그리고 마마께서도 의원이시니, 본인의 상태는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결국… 이건 인연이 아직 닿지 않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소우연은 가볍게 눈썹을 찌푸렸다.“그래도 태자 전하는 훗날 황위를 이으실 분이야. 내가 태자빈인데 아이가 없으면, 사람들이 전하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임 어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덧붙였다.“실제로 부부가 모두 건강해도 너무 간절한 마음이 되려 긴장을 유발해서, 오히려 수태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소우연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그 말은 예전 의서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혹시 우리 둘 다 너무 마음을 졸인 걸까…’“다른 방법은 없을까?”임 어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길일을 택하신 뒤, 태자 전하께 며칠
“내일 임 어의를 다시 모시는 게 어떨까요?”소우연은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애교 섞인 말투엔 묘하게 은근한 뉘앙스도 감돌았다.이육진은 문득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그녀와의 내기에서 이기면, 그가 원하던 방식대로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기로 했던 것.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그때처럼 해 준다면 생각은 해 보지.”“그때처럼…?”소우연의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번졌다.처음만 해도, 이육진은 그렇게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요즘은 책에서 어디까지 배웠는지, 그녀를 애무하는 손길도 능숙했고.이젠 아예 그녀가 먼저 다가와 주길 바라고 있었다.“어떻느냐, 해 줄 수 있겠느냐?”이육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묻자, 소우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아기를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게요.”이튿날 정오 무렵, 소우연은 진우를 보내 임 어의를 모셔오게 했다.마침 이육진도 막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고, 임 어의는 이미 이당에 도착해 진맥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내가 직접 가겠다. 넌 안에서 기다리거라.”이육진은 마음이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매달 태의원에서 진맥을 받고 있었고, 늘 아무 이상 없다는 말뿐이었으니.그는 간석에게 일렀다.“요즘 부인이 겉으론 안심한 듯해도 속으론 아직 풀리지 않은 게 있는 듯하구나. 창고 열쇠를 주고, 부인이 마음에 드는 걸 직접 고르게 해 줘라.”“예, 전하. 곧 전하겠습니다.”그렇게 말하고 이육진은 이당으로 향했다.임 어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절했다.“태자 전하께 문안 올립니다.”이육진은 곧장 주석에 앉으며 말했다.“절은 됐다. 앉거라.”하지만 임 어의는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태자 앞에서 감히 앉는 것이 두려웠지만, 또 명을 어기는 건 더 무서웠다.결국 그는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진우의 전갈을 받았습니다. 태자빈 마마께서 진맥을 요청하셨다고 들어 이렇게 왔습니다.”“내 몸을 좀 봐주거라.”이육진은 곧장 본론으
이육진이 말했다.“진이준의 보고에 따르면, 아령이 이민수 쪽에 붙었다더구나. 혹시 네가 그 자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아령이 복수하러 온 건 아닐까?”“전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오후에 정연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이육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 손끝에도 물이 많아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젖게 만들었다.그 모습이 꼭 눈물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소우연은 피식 웃었다.그러자 이육진은 장난스럽게 그 물방울 위에 입을 맞췄다.“솔직히 난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이민수가 자기 통방을 보내 너한테 시비 걸게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테고. 게다가 그런 짓은 평서왕부에 해가 될 뿐이지. 지금 그 집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게 바로 불필요한 시선인데.”소우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령은 이민수 뜻으로 움직인 게 아닐 거예요. 어쩌면 그냥 자기 마음대로 왔을 수도 있죠.”그녀는 시선을 떨구고, 욕조에 떠 있는 꽃잎을 바라봤다.그중 한 장이 이상하게 물 위에 뜬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맴도는 듯 떠 있었다.손을 뻗어 치우려던 순간, 남자의 그것이 눈앞에 드러났다.“전하… 정말.”그녀는 볼을 불룩 부풀리며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목욕 때마다 일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얄밉게 느껴졌다.이육진은 기침을 한번 하며 말을 돌렸다.“오직 너와 함께할 때만…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행복하다는 걸 느껴.”그 말에 소우연은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그의 중심에 꽃잎을 덮어주며 눈을 바라봤다.“그런데 그 아이는… 멍청해 보이진 않았어요. 왜 굳이 사람 많은 만안당에서 절 찾아와 시비를 걸었을까요. 부군. 아령은 단순히 이민수가 아니라, 그냥… 저한테 적대심을 가진 것 같아요.”이육진은 고개를 갸웃했다.“하지만 소우희와 아령은 예전에 교류가 있었다 들었는데… 혹시… 소우희를 위해서?”소우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소우희 같은 성격에, 누가 그 애를 위해 나서겠어요. 게다가 예전에 아령이 혜주를
“그게 어쨌단 말이죠?”아령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소범준은 말문이 턱 막혔다.‘간도 배포도 하늘을 찌르는구나.’‘그게 어쨌다니?’‘이 일이 평서왕의 귀에 들어가면, 네 목이 꺾일 수도 있단 말이다.’‘그걸 모르고 이러는 거야?’“이 일에 대해선 단 한 글자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아내와 자식들만은… 돌려주시오.”아령은 더는 미소조차 허락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꿈 깨세요. 우린 이미 같은 배에 탔어요. 다시 돌아갈 길은 없죠. 정녕 가족의 안위를 원한다면, 내 명을 따라야 해요. 아셨습니까?”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처럼 내리꽂혔다.소범준은 마치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게 덫이었다.“만약 왕야나 세자 저하께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신다면, 그땐 어찌할 생각이오?”아령은 조용히 웃었다.“솔직히 말씀드리자면요, 세상 사람들의 문제는 제게 아무 상관없어요. 누구도 제 인생의 짐이 되어선 안 되죠.”소범준은 그제야 이 여인이 진짜 어떤 사람인지 실감했다.그렇다면 이지윤은?분명 둘은 연인처럼 보였고, 남다른 정이 오가는 줄 알았는데.하지만 아령은 묵묵히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남자는 칼 드는 속도만 늦출 뿐이죠.’그가 다른 이들과는 달라도, 결국은 그냥 잠깐 마음을 줬을 뿐이었다.희고 맑던 얼굴에 스친 그 음습한 그림자.소범준은 싸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이 여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의진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차 안.정연이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지만, 소우연은 손을 내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정연이 조심스레 말했다.“태자빈 마마, 어깨 좀 주물러드릴까요?”“응, 부탁하마.”오늘은 이상하게 피곤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진맥을 보느라 어깨가 뻐근했다.정연이 손끝으로 조심히 그녀의 어깨를 풀며 말을 꺼냈다.“오늘 그 아씨… 아령이라 했지요. 혹시 평서왕세자를 위해 나서신 건 아닐까요?”“흠, 글쎄.”소우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