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는 정신이 그다지 좋지 않아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신유리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원장은 뒤에서 신유리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어르신이 깨어나신 후부터 쭉 유리 씨를 불렀어요."신유리는 외할아버지의 이불을 끌어 올리고 당부했다."푹 쉬세요. 무슨 일이든 우리 내일 얘기해요, 외할아버지.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노인의 눈가가 촉촉해지며 신유리를 잡고는 입가를 힘껏 움직였다."우리 유리, 불쌍해서 어쩐담. "외할아버지는 아주 느리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렷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신유리는 머뭇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외할아버지의 손에는 아직도 주사가 꽂혀있었는데, 그래도 손을 내밀어 신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힘이 없어 허공에 손을 떨구고 말았다.밤 11시, 병원 복도는 매우 조용했다.신유리는 복도 밖에서 잠시 서 있다가 병동을 나왔다.바깥의 건조하고 뜨거운 저녁 바람을 느끼면서, 그녀는 비로소 마음속에 맺혔던 그 숨결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임시로 간병인을 구하지 못해서 원장한테도 부탁할 수 없는지라 신유리는 직접 간호에 나섰다.다음 날 아침, 원장이 병원 간병인을 데리고 온 뒤에야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돌아가기 전에 그녀는 또 의사 사무실에 가서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다만 외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은 데다 장기 손상까지 겹쳐 의사들의 의견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환자의 신체 기초 자체가 좋지 않고 호흡기 질환도 있어요. 이번에는 감정적으로 흥분을 일으켜 혈압 상승한 것으로 보입니다."의사는 재차 그녀에게 강조했다."환자의 기분 상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해요.""이번에는 다행히 고비를 넘겼지만, 다음에는 뇌졸중이 올 수도 있어요."신유리는 표정이 심각해져 고개를 끄덕였다.사무실을 나선 신유리는 핸드폰을 꺼내서 양예슬에게 오전 반차 신청을 부탁하려고 메시지를 작성하려 하였다. 외할아버지 상태가 위독해져 옆에서 간
신유리는 멈칫하더니 이내 사무실에 들어갔다.양예슬이 부르기 전에 서준혁은 이미 신유리를 돌아보았다.그의 어두컴컴한 눈동자는 신유리를 한참 쳐다본 후, 코웃음을 치면서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이제야 왔어?”신유리는 약간 눈을 내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그녀의 말투는 담백하고 태도도 성실하지만, 서준혁은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다.그는 찬웃음을 지으면서 냉담한 눈빛에는 약간의 경멸이 담아 있었다. "신 비서는 항상 급한 일이 많네요? 지난번엔 어머니고, 이번엔 아버님이신가?"신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을 잇지 못하자 잠자코 있다가 화제를 돌렸다."회장님 언제 오세요?"서준혁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식이 참 빠르네. "서준혁은 아무리 신유리를 비꼬우며 괴롭혀도 결국 서창범을 만날 땐 여전히 그녀를 데리고 갔다.서창범은 신유리의 출신에 대해 불평이 많았지만, 그녀의 능력만은 인정한다.또한 신유리는 당시 서준혁의 부모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서창범과 하정숙의 신상에 대해 많이 조사했었다.하여 서창범이 올 때마다 서준혁은 그녀에게 접대를 맡겼다.송지음도 나서고 싶지만, 하정숙이 그녀에 대한 태도를 감안해서 이럴 때일수록 분수를 차리고 가만히 있었다.게다가 서준혁도 신신당부했었다.송지음은 눈을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서창범은 50대가 넘었는데, 성안 그룹의 회장으로서 몸에 밴 위압감은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창범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서준혁을 보며 말했다."춘성 지사에 간다더니 왜 이리 오래 걸린 게냐? ""합정에 들렀다 왔습니다. "서준혁은 아무런 감정 기복도 없이 대답했다."장도금 때문에?""네. "서창범은 몇 마디 묻고 나서 바로 대표 사무실로 갔다.신유리는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들며 춘성의 현황을 간단하고도 직접적으로 회장님께 보고했다.서준혁과 서창범의 관계는 늘 안 좋았는데 성안 그룹과 화인
신유리는 입구에서 잠시 서서, 방안에 대화 소리가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문을 밀고 들어갔다.찻잔 테두리에 쏟아진 물 자국이 한눈에 안겨 왔는데 서창범이 방금 화를 낼 때 그랬을 것이다.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다가 눈을 내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회장님, 최근 석 달간 화인 그룹 시장 데이터입니다. "서창범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무표정으로 차분하게 물었다."이번에 시한에 가보니까 어떠냐?”신유리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대답했다."괜찮던데요?""시한 쪽에 사람이 부족하다며?"서창범이 말을 하는 동안 시선은 쭉 신유리한테 있었다.신유리는 당황한 나머지 눈썹마저 떨렸다.그녀는 줄곧 서창범이 하정숙보다 친화력이 더 좋다고 생각해 왔다.처음에도 서준혁이 그녀를 집에 데려온 것에 대해 말로만 크게 반대하고 그 후 모든 일에서 늘 침묵을 지켰다.그때 서준혁이 신유리를 기어코 회사에 들여보내겠다고 했을 때도 하정숙의 격한 반대에도 서창범은 그냥 경쟁 계약만 체결시키게 하고는 다른 말은 없었다.당시 신유리는 20대 초반이어서, 서창범이 둘 관계를 인정한 줄 알고 기뻐하면서 계약서를 체결했었다.지금 다시 보니, 처음부터 서창범은 신유리가 집안에 못 들이게끔 일찌감치 계획을 세웠던 것 같았다.장사꾼이 이익을 제일 순위로 둔다고 하는데, 서창범이 그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신유리는 서준혁이 키워 온 사람이다. 하여 서창범은 그녀가 떠날 때 서씨 가문의 그 어떤 물건을 못 가져가게끔 퇴로를 다 막아버리려고 했다.서창범의 태도가 이러하니 서준혁은 말할 것도 없다.신유리는 가슴이 저려 통증이 밀려왔다.그녀는 눈을 들어 옆에 앉아 있는 서준혁을 바라보았다. 서준혁도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데도 무시하고 시선을 피했다.서준혁은 서창범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아버지, 성안과 원정의 땅 싸움에서 이길 자신 있어요? ""네가 어쩌다 성안 걱정을 다 하네?"서준혁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차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서창범도 차를 마시려고 찻잔을 들으
연우진은 걱정스러운 듯 신유리를 바라보며,"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알려줘. "신유리는 애써 표정 관리하며 말했다."여기 하루 종일 있다가 저녁도 안 먹었지? 내가 밥 살게."연우진과는 외할아버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그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더 이상 묻지 않고 주동적으로 화제를 바꾸었다."너 서준혁이랑은 잘 지내? ""응, 걔는 친화력이 좋아.""하하하, 서준혁이 친화력이 좋다고 칭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 하나뿐일걸?"연우진은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서준혁의 성격을 떠올리면서 덧붙였다."너희 둘 성격이 비슷해서 그랬을 거야."신유리는 자신이 서준혁과 비슷한 점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연우진이 임의로 말거리를 찾는 거라고 여겨 대충 몇 마디 호응해 줬다.병원 근처에는 좋은 식당이 별로 없었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사람이 많은데, 주로 환자나 환자 가족들뿐이었다.그들은 아예 차를 몰고 부근의 한 상권으로 갔다.신유리는 사실 입맛이 별로 없어서 연우진에게 떠밀었다."뭘 먹고 싶어?"연우진은 그녀를 쳐다보며,"죽을 먹자, 담백하게. "하지만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연우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그는 계면쩍게 신유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신유리는 식당 직원의 안내에 따라 독방으로 들어간 후에야 자신의 휴대전화를 꺼냈다.오후에 외할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줄곧 무음 상태로 하고 가방에 넣어두었다.다시 꺼내보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두 통이 띠였다.모두 양예슬인데, 신유리에게 어디 있냐고 물었다.신유리가 양예슬에게 다시 전화를 걸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아직도 회사에서 야근하고 있는지 목소리는 매우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여보세요, 유리 언니, 왜요?”"오후에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오후에요?"양예슬은 멍해지다가 생각났다."아, 맞다, 유리 언니, 오후에 대표님이 오셔서 언니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급한 일로 언니를 찾고 있는 줄 알아서 전화해 본 거예요."서준혁이
신유리는 도착했다고 일깨웠다."도착했어.”서준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그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토록 연우진이 보고 싶었어?"그의 말투는 매우 담담하여 거의 아무런 기복도 없었다.신유리는 멈칫하더니,"우서진이 알려준 거야? "우서진 말고는 할 일 없이 이 소식을 서준혁에게 알려줄 사람이 없다."연우진이 많이 신경 쓰이나 봐?"지하 주차장의 불빛은 어두웠다. 차 안은 더더욱 그렇다.신유리는 야맹증을 앓고 있어 서준혁의 앉은 위치는 흐릿하게 보이고 그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서준혁은 가볍게 '쯧쯧' 하며 무심코 입을 열었다."신유리, 연우진 집안을 봐서는 깨끗하지 못한 여자는 인정 안 할 거야. "신유리는 한참 동안 어리둥절하다가 그가 말한 뜻을 알아챘다.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가슴에 맺힌 화가 한 차례 통증이 밀려왔다.신유리는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되찾으며 말했다."내가 그 깨끗하지 못한 여자야?"서준혁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그건 모르지, 그냥 그렇다고. "서준혁은 말하고 나서 차에서 내렸다.그의 뒷모습이 천천히 모퉁이로 사라지자, 쭉 지켜보던 신유리는 핸들을 잡은 손을 천천히 조였다.서준혁이 방금 한 말이 그녀의 마음에 깊숙이 박혔다.'내가 깨끗하지 못한 여자였구나!''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해 온 거야?''그러면 여태껏 날 갖고 논 거야?'신유리는 차에서 한참 진정하다가 차가워진 손발을 녹였다.서준혁은 늘 어떻게 하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정말 잘 알고 있었다.집에 돌아왔을 때, 신유리의 몸은 여전히 힘이 없어 나른했다.옷도 갈아입지 않고 하이힐을 걷어차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따뜻한 물이 머리 위로 흘러내리자, 그녀는 얼굴을 위로 내밀며 물줄기에 맞으면서 서있는 것이 마치 무언가를 씻어내려는 듯했다.그녀의 피부는 원래 하얗기 때문에 뜨거운 물에 맞으면 금방 분홍색이 떠오른다.분홍색이 달아오른 팔을 보면서 서준혁이 말한 깨끗하지 못하다
하지만 신유리는 여전히 송지음을 과소평가했다.점심시간, 그녀는 사무실 입구에 나타나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올라 울었던 흔적이 보였다.그녀는 신유리 앞에 나타나더니 심한 콧소리로 말했다."유리 언니, 미안해요, 점심때 제가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신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눈을 들어 송지음을 바라보자, 진심다워 보였다."다시는 안 그럴게요, 저는 그냥 나중에 실수라도 할까 봐 미리 회장님 취향을 알고 싶어했을 뿐이에요."그녀의 태도와 변명은 늘 완벽했다. 게다가 점심시간이라 대부분 직원이 사무실에 있어 신유리도 뭐라 하기 애매했다.신유리는 차라리 송지음을 데리고 바깥 베란다로 나갔다.베란다에서 송지음은 열심히 신유리의 말을 듣고 있었다.신유리의 마음속에는 별다른 파장이 없었다.무슨 얘기긴!오랜 시간을 들여 알아낸 서준혁 부모의 취향을 휴식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송지음은 그걸 쪽쪽 빨아먹고 있을 뿐이다.오히려 신유리는 홀가분했다.신유리는 마지막 한 가지를 말하고는 휴대전화를 보더니 돌아가려 했다."출근 시간이야. ""유리 언니."송지음은 수첩을 끌어안고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언니…. "그녀는 망설이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신유리는 잘 알고 있다. 송지음은 서준혁 부모의 취향을 어떻게 그토록 자세하게 알아냈는지 묻고 싶은 것이었다.자신을 깊게 들여다보려는 송지음의 시선에 신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대표님 알려준 게 아니야."송지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수첩을 들고 떠났다.신유리는 베란다에 잠시 서 있었다.베란다에 외벽 유리를 사이에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신유리의 눈동자는 아주 평온했다.서준혁 부모의 취향은 확실히 서준혁이 그녀에게 알려준 것이 아니다.예전의 서준혁은 화인의 일에 전념하느라 집안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았다.그땐 그녀는 어리석게도 자신이 그의 부모님께 잘 보이면 부모로서 아들을 도와줄 줄 알았다.두 분의 취향도 갖은 비난과 실
송지음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하정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정오에 하정숙을 만났을 때부터, 하정숙은 줄곧 그녀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원래는 하정숙의 하대가 냉담하는 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비난할 줄 몰랐다.하지만 신유리가 아직 남아 있어 송지음은 그녀 앞에서 더더욱 체면을 깎이고 싶지 않았다.송지음은 애써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기며 웃음을 짜내려고 애썼다."저는 그냥 사모님을 돕고 싶었을 뿐이에요."하정숙은 송지음의 불쌍한 표정을 못 본 것처럼 보잘것없는 물건을 대하듯이 풍자가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송지음은 하정숙의 주시에 버티기에 힘들었으나 그래도 등을 꼿꼿이 세워 계속 견지했다. 계속 유지하던 미소도 거의 한계를 달아, 송지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작은 소리로 하정숙을 불렀다."어머님…. ""어머님? " 하정숙은 송지음의 부르던 호칭을 반복하면서 그녀의 손에 들고 있었던 문서를 빼앗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역시 가문이 별로인 사람은 분수가 참 없구나! "하정숙의 말투에는 무시가 넘쳐나 평소 표정 관리에 능숙한 송지음마저 충격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신유리는 자신과 별로 상관이 없어서 별 반응이 없었다.그녀는 검사 결과를 들고 곧바로 의사를 찾아 나섰다.의사 선생님도 결과를 보면서 회복이 잘되고 있다며 그녀에게 주의 사항을 많이 당부했다.병실에 돌아오니, 연우진이 마침 외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신유리는 이미 적응되었다. 최근 며칠 동안 병원에 가면 연우진은 꼭 거기에 있었다.그는 평소 학문을 부지런히 닦은 덕분에 외할아버지와 즐겁게 얘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신유리가 들어오자 연우진이 물었다."외할아버지가 많이 좋아지신것 같아. ""응." 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되물었다."언제 왔어?”"나도 방금 왔어.""오늘 밤 정재준의 생일이라던데, 너한테도 메시지 보냈는데 답장 안 했다며? 그래서 와본 거야."생각해 보니, 정재준이 며칠 전 자신을 생일파
그녀는 성격이 활발하고 우서진과 함께이니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신유리는 한쪽에 서서 할 일이 없자 스스로 가서 이미 꿰어놓은 꼬치 몇 개를 집어 판 위에 올려놓았다.신유리는 바베큐를 별로 먹지 않고 요리도 거의 안 해봐서 불 조절을 잘하지 못한다. 그녀는 탄 냄새가 나서야 음식이 다 타버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침 물건을 가지러 왔다가 냄새를 맡은 우서진이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냄새지?" 신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탄 음식을 접시에 담아 버리려고 했지만, 눈치 빠른 우서진이 이를 바로 발견했다.그는 약간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유리 씨, 똥손이에요?” 접시를 든 신유리의 손이 살짝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서진 얼굴의 혐오스러운 기색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후에 신유리에게 당한걸 아직 되돌려주지 못했으니 이런 기회를 자연스레 놓치지 않을 것이다.그는 접시 위의 탄 음식을 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그 현모양처 이미지는 준혁이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아니면 우진이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모습이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그는 또 마침 신유리의 앞을 막고 서있었다. 신유라는 접시를 들고 무표정인 얼굴로 낮은 소리로 말했다."우서진 씨, 당신 진짜 사람 짜증 나게 한다고 말했던 사람 없어요?" 그녀는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그녀의 말에 우서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내가 그동안 당신한테 너무 예의를 갖췄죠?”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정재준은 서준혁과 함께 그들이 이전에 참여했던 화인 그룹의 협업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우서진과 신유리를 쳐다보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서진 씨는 왜 유리 씨한테 유독 저럴까?” 그는 말을 마치고 서준혁과 우서진이 친한 친구라는 것이 생각나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서준혁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