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음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하정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정오에 하정숙을 만났을 때부터, 하정숙은 줄곧 그녀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원래는 하정숙의 하대가 냉담하는 걸로 끝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비난할 줄 몰랐다.하지만 신유리가 아직 남아 있어 송지음은 그녀 앞에서 더더욱 체면을 깎이고 싶지 않았다.송지음은 애써 입꼬리를 위로 잡아당기며 웃음을 짜내려고 애썼다."저는 그냥 사모님을 돕고 싶었을 뿐이에요."하정숙은 송지음의 불쌍한 표정을 못 본 것처럼 보잘것없는 물건을 대하듯이 풍자가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보았다.송지음은 하정숙의 주시에 버티기에 힘들었으나 그래도 등을 꼿꼿이 세워 계속 견지했다. 계속 유지하던 미소도 거의 한계를 달아, 송지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작은 소리로 하정숙을 불렀다."어머님…. ""어머님? " 하정숙은 송지음의 부르던 호칭을 반복하면서 그녀의 손에 들고 있었던 문서를 빼앗으며 냉정하게 말했다."역시 가문이 별로인 사람은 분수가 참 없구나! "하정숙의 말투에는 무시가 넘쳐나 평소 표정 관리에 능숙한 송지음마저 충격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신유리는 자신과 별로 상관이 없어서 별 반응이 없었다.그녀는 검사 결과를 들고 곧바로 의사를 찾아 나섰다.의사 선생님도 결과를 보면서 회복이 잘되고 있다며 그녀에게 주의 사항을 많이 당부했다.병실에 돌아오니, 연우진이 마침 외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신유리는 이미 적응되었다. 최근 며칠 동안 병원에 가면 연우진은 꼭 거기에 있었다.그는 평소 학문을 부지런히 닦은 덕분에 외할아버지와 즐겁게 얘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신유리가 들어오자 연우진이 물었다."외할아버지가 많이 좋아지신것 같아. ""응." 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되물었다."언제 왔어?”"나도 방금 왔어.""오늘 밤 정재준의 생일이라던데, 너한테도 메시지 보냈는데 답장 안 했다며? 그래서 와본 거야."생각해 보니, 정재준이 며칠 전 자신을 생일파
그녀는 성격이 활발하고 우서진과 함께이니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신유리는 한쪽에 서서 할 일이 없자 스스로 가서 이미 꿰어놓은 꼬치 몇 개를 집어 판 위에 올려놓았다.신유리는 바베큐를 별로 먹지 않고 요리도 거의 안 해봐서 불 조절을 잘하지 못한다. 그녀는 탄 냄새가 나서야 음식이 다 타버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침 물건을 가지러 왔다가 냄새를 맡은 우서진이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냄새지?" 신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탄 음식을 접시에 담아 버리려고 했지만, 눈치 빠른 우서진이 이를 바로 발견했다.그는 약간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유리 씨, 똥손이에요?” 접시를 든 신유리의 손이 살짝 멈칫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서진 얼굴의 혐오스러운 기색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후에 신유리에게 당한걸 아직 되돌려주지 못했으니 이런 기회를 자연스레 놓치지 않을 것이다.그는 접시 위의 탄 음식을 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그 현모양처 이미지는 준혁이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아니면 우진이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그는 그녀의 모습이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그는 또 마침 신유리의 앞을 막고 서있었다. 신유라는 접시를 들고 무표정인 얼굴로 낮은 소리로 말했다."우서진 씨, 당신 진짜 사람 짜증 나게 한다고 말했던 사람 없어요?" 그녀는 눈썹조차 움직이지 않고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그녀의 말에 우서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내가 그동안 당신한테 너무 예의를 갖췄죠?” 갑자기 높아진 언성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정재준은 서준혁과 함께 그들이 이전에 참여했던 화인 그룹의 협업 프로젝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우서진과 신유리를 쳐다보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서진 씨는 왜 유리 씨한테 유독 저럴까?” 그는 말을 마치고 서준혁과 우서진이 친한 친구라는 것이 생각나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서준혁
“빨리 와서 도와줘, 지음 씨가 다쳤어!”바깥의 어수선한 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신유리는 순간적으로 차가워진 서준혁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바로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유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바깥을 바라보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나갔으니 자기 하나쯤은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날씨가 흐리고 시선도 흐릿해져서 그녀가 나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방 안은 순식간에 비기 시작했고, 몇 사람만 남아있었다. 신유리는 두리번 보았으나 다들 모르는 사람이었다. 때마침 이신에게서 문자가 왔다. 신유리가 이신의 문자에 답장하자마자 밖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왔다. 방안은 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얼굴에 붙은 송지음의 모습이 마치 연약한 작은 백합꽃 같았다. 송지음은 서준혁에게 기대어 여러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걸었다. 신유리는 그녀가 발이 다친 줄 알고, 이 많은 사람들을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조금 비켜주었다.송지음은 부축받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애써 웃음을 지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제가 걱정을 끼쳐드렸어요. 저는 괜찮아요.”정재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진짜 괜찮아요? 아니면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는 걱정이 되었다. 오늘 그가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책임을 질 수 없을 것 같았다.우서진도 말했다.“비 오는 데, 혹시 상처에 세균이라도 감염되면 어떡해. 준혁아 네가 데리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의 말투는 이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자신의 관심을 확실히 표현했다. 신유리는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병원 갈래?”서준혁의 목소리였다. 그는 송지음의 손바닥 상처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마치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송지
우서진은 대놓고 조롱하는 눈으로 신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는 장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좋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준혁이 아직 안에 있는데 좀 자제할 수 없어?” 신유리는 이전에 우서진에게 오해를 받았을 때,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러는 것도 귀찮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담담하게 우서진을 쳐다보고는 장현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저한테 코트 가져다 달라고 하셨죠?” 장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그는 우서진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정재준과 친분이 있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서진이 신유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두 사람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장현의 집안도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도 자연히 우서진과 껄끄러운 사이가 되기가 싫었다. 그는 신유리를 보며 말했다.“내가 가져다 달라고 하면 갖다줘? 온몸이 흙투성이면서, 내 옷에도 묻힌 거 아니야?”신유리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더럽다고 생각하시면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어요.” 장현은 그녀가 말대꾸를 할 줄 몰랐다. 그는 잠시 멈칫하다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우서진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다.그는 차가운 눈으로 신유리를 보며 말했다.“이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무슨 낯으로 돌아다녀,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어디에서 온 동냥꾼인 줄 알겠어.” 신유리의 옷에 묻은 흙들은 다 송지음을 부축하다 묻힌 것이다. 사실 그렇게 많이 묻은 것도 아니었다. 하필 오늘 그녀가 입은 옷이 옅은 색이라서 유난히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신유리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들과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고 했다.그러나 장현은 오히려 자신이 그녀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여 그녀의 팔을 붙잡고 날카롭게 말했다.“내가 가라고 했어?”신유리도 차가운 표정으로 막 말을 하려는데, 당구실 안에서 송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준혁 오빠, 아파.”신유리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자, 그녀의
송지음은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 그녀는 머리를 서준혁의 어깨에 기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사실이면 유리 언니랑 연우진 씨는 천생연분이야.” 서준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가 대충 응하자, 송지음의 입꼬리는 다시 올라갔다. 신유리는 구석에 앉아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신에게 자료를 보내달라고 했다.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자료라도 천천히 정리하려고 생각했다. 빗줄기도 잦아드는 추세고 연우진의 외투를 입고 있어서 신유리는 그리 춥지 않았다. 발소리가 들리자, 신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서준혁이 휴대폰을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냉담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월요일 조회할 때 모든 자료를 볼 겁니다.” 그쪽에서 또 몇 마디 하자 서준혁의 얼굴은 더욱 차가워졌다. 신유리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미 시선을 거두고 계속해서 이신이 보내준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서준혁이 전화를 끊을 때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서준혁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바로 그걸 감지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가 걸치고 있는 외투에 시선을 두었다. 깊은 생각이 담긴 눈동자였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유리는 서준혁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시선을 돌려 계속해서 공기처럼 조용히 있었다. 서준혁도 인차 다시 당구실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신유리 혼자 남았다. 파티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밖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연우진도 당구실에서 나왔다. 연우진이 신유리에게 물었다.“졸려?”“너 피곤하면 내가 운전할게.”신유리가 말했다.그녀가 말하자마자 정재준이 다가와서 난처한 듯 연우진에게 물었다.“우진 씨, 장현이 차가 문제가 생겨서 그러는데 우진 씨가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 연우진이 이 중에서 그나마 성격이 제일 좋기
신유리는 우서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차 안은 아주 어두웠다. 창밖을 내다보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우서진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좌석에 기대어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무언가 타이핑하고 있었고, 산만한 웃음도 두 번 정도 들렸다.그러고는 갑자기 눈을 치켜뜨고 건들거리며 서준혁에게 말했다.“준혁아 나 타임 광장에서 내려주면 돼. 일이 좀 있어서.”서준혁은 백미러로 그를 한 번 쳐다보며 물었다.“날 네 운전기사로 생각하는 거야?”“아니, 여자가 약속을 잡잖아.”우서진은 말하며 방금 자신과 약속을 잡은 여자의 음성메시지를 그에게 들려주었다.애교 넘치는 여자 목소리가 그의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서진 오빠, 언제 와?”우서진이 놀기 좋아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서준혁은 앞쪽 길목에 차를 세우고 담담한 목소리로 우서진에게 말했다.“방소천처럼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 저지르지 마.”우서진이 말했다.“내가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그는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찬바람이 빗줄기와 뒤섞여 순식간에 신유리의 얼굴에 흩날렸다. 그녀는 서준혁이 말하는 그 방소천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업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다. 얼마 전 그와 만났던 모델이 임신을 했는데, 죽자 살자 그에게 시집가려고 했다. 하지만 방소천은 그러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죽겠다며 건물에서 뛰어내리려 했고, 일이 이렇게 커지자, 방씨 집안에선 어쩔 수 없이 방소천을 그녀와 결혼시켰다. 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에 띈 차가움은 아주 잘 보였다. 그러나 곧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유리 언니.”송지음의 목소리에 신유리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지음의 표정을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보였다.송지음은 잠깐 멈칫하다 입을 열었다.“유리 언니, 언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고민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약간의
건물 관리인은 신유리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서준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윗집 수도관이 터져서 이 집을 점검해야 해요.”서준혁은 신유리를 쳐다보았다. 신유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말했다.“우리 집엔 문제가 없다니까요.”“저희는 안전을 생각해서 그래요.”관리인은 여전히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신유리는 내키지 않았다. 한밤중에 두세 명의 낯선 남자를 집에 들이는 건 조금 무서웠다.그녀가 다시 거절하려는데, 서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그래요.” 그는 말하고 바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도 함께 들어갈 기세였다.신유리는 그를 바라보니 한밤중에 깨어난 짜증이 밀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이 집을 누가 샀는지 잊은 거야?”서준혁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순간 신유리의 얼굴은 굳어졌고, 문틀을 잡고 있던 손이 꽉 쪼여졌다. 당시 이집은 서준혁이 편리를 위해 산 것이다. 그때 신유리는 화인그룹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녀가 버스로 출퇴근하니 서준혁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 이 집을 산것이다. 그리고 힘들게 그녀를 설득해 이 집에 들어오게 했다. 그때 그녀는 서준혁이 그저 매일 자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했다. 신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서준혁이 자신의 집에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 들어오자, 신유리는 갑자기 뭔가를 매우 분명하게 깨달았다. 지금 그녀의 집은 서준혁이 산 것이고, 그 뜻은 언제가 그가 이 집을 다시 뺏는다면 그녀는 지낼 곳도 없는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관리인은 안에서 잠시 검사하고 바로 나왔다.서준혁은 맨 마지막에 나왔다. 그는 신유리를 흘겨보며 의미심장한 태도로 말했다.“그래도 머리는 있네. 안전 의식이 있는 거 보면.” 신유리는 그를 쳐다보며 침묵하다 이내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돌아오긴 했는데 잠은 이미 다 달아났다. 그녀는 핸드폰을
외할아버지는 어리둥절 했다.“멀쩡한 직장을 왜 그만두고 싶어?” 신유리가 인화 그룹에 머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서준혁 때문이냐...” 외할아버지는 서준혁과 신유리의 일에 대해 지난번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미 대충 알았다. 그는 신유리를 쳐다보며 무슨 말을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아니에요.”신유리는 스스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그냥 몇 년 동안 계속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재미없어졌어요. 새로운 분야에서 도전해 보고 싶어요.” 외할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신유리는 대화 화제를 돌렸다.“의사가 조만간 퇴원 준비해도 된대요?” 외할아버지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쉬고는 회사 일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신유리는 저녁때까지 병원에 머물렀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신의 감사 문자를 받았다. 그녀가 막 답장을 하려는데, 갑자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그녀는 멈칫하다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신유리 씨 맞으시죠? 안녕하세요. 혜원 중개소입니다. 어젯밤에 주택 임대에 대해 문의하셨죠? 혹시 집을 임대 맡기고 싶으신 건가요, 아니면 임대하고 싶으신 건가요?” 신유리는 어젯밤 잠이 안 와서 부동산 어플을 훑어보다가 결국 계정까지 등록했다.그러자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저 집 구하려고요.” “그럼 어떤 기준이나 아니면 마음에 드시는 집 있으신가요?”“좀 싼 거요.”신유리가 대답했다.그녀는 속눈썹을 늘어뜨리고 책상 위의 무늬를 바라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언제 들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중개인도 와서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바로 말을 바꿨다.“그럼 카톡 추가할 수 있을 까요? 나중에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연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