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리도 더는 설명하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 서류를 금요일 전까지 모두 정리하여 제출하라고 하자, 사무실은 과연 우는 소리로 가득 찼다.양예슬은 얼굴을 찡그리며 신유리에게 물었다.“유리 언니, 서 대표님이 비서부에 무슨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걸까요? 예전에는 일주일이었는데 지금은 4일이네요.” 그러자 신유리가 말했다. “요즘 회사에서 몇 가지 협력에 대해 논의하고 있어서 좀 바쁜 건 사실이에요.”사실이니 양예슬도 할말이 없어 한숨만 쉬었다.“서 대표님이 보너스를 주시는 걸 봐서라도 열심히 야근해야죠.” 신유리는 서준혁이 요구했던 서류 두 개를 그의 이메일로 보낸 다음, 카톡으로 그에게 알려줬다. 점심시간이 되자, 곽정희는 같이 밥 먹기 위해 신유리를 찾아왔다. 그녀는 훨씬 효율이 있었다. 식사 중에도 노트북을 챙겨 제출된 이력서를 선별했다. 화인 그룹의 직원 대우가 아주 좋기 때문에 매년 많은 졸업생이 화인에 들어오고 싶어 한다. 신유리의 휴대폰도 울렸다. 전화를 들어보니, 정재준의 생일에 찍은 사진들을 서로 전송해 주고 있었다. 대부분 우서진이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의 사진 찍는 스킬은 최악이었다. 찍힌 사진들을 보면 눈을 뜨고 봐줄 수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단톡방에는 각종 욕설이 난무했다.“유리야.”한창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곽정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고개를 들었다.“왜?”곽정희는 눈을 깜빡이고는 자신의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봐, 내 말이 맞지? 송지음이 정규직으로 전환했어. 쥴리 언니가 직접 파일을 달라고 하잖아” 그녀는 쥴리가 막 보낸 메시지를 신유리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쥴리가 그녀에게 오후에 송지음의 파일을 찾아놓으라는 것이었다. 신유리는 슬쩍 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쥴리는 까다롭기고 유명한데, 만약 서준혁이 말하지 않았다면 쥴리는 송지음의 일에 적극적으로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유리는
신유리는 송지음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녀의 인턴 기간도 거의 끝나가니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쥴리가 이미 파일 다 옮겨가지 않았어?”“자료는 아직 비서부에 있어. 부서는 옮기지 않았으니까.”서준혁이 말했다. 신유리의 미간이 흔들렸다. 송지음은 원래 화인 그룹의 비서부에 있었다. 나중에 서준혁에 의해 대표 사무실로 오게 된 것이다. 화인 그룹의 비서부와 대표 사무실 비서부는 두 부서로 나뉘어 있다. 신유리는 송지음에 대한 서준혁의 애정을 생각하면 진작에 옮겨 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송지음의 인턴 보고서를 자신이 작성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눈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자신의 감정을 가렸다. 송지음이 부서를 옮겼는지 안 옮겼는지는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고, 자기 몫의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신유리가 서준혁의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송지음은 즐거워하며 말했다.“오늘 내가 저녁 살게요.”그녀가 나오자, 송지음은 눈을 깜빡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유리 언니도 같이 가는 거죠? 제가 처음 입사했을 때 언니가 저 항상 데리고 다녔잖아요.”신유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아니야, 너희들끼리 놀아.”“하지만 언니...”송지음은 그녀를 가로막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기 왜 모두한테 저녁 사는지 몰라요? 나 정규직으로 전환했어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잘난척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말하고는 신유리의 팔짱을 끼며 친한척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밝은 말투로 말했다.“준혁 오빠도 저한테 가장 빨리 정규직으로 전환된 인턴이라고 했어요. 유리 언니보다도 빠르다고.” 송지음은 말끝마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걸 강조했다. 그녀가 어느 방면의 정규직 전환을 말하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축하해.”신유리가 말했다. 송지음은 원래 신유리 앞에서 제대로 자랑하고 싶었는데, 그녀의 한마디에 뭔가 김이 빠지는 느낌이어서 그닥 기쁘지 않았다.그녀는 답답해
쥴리는 송지음이 자신을 두어 번 부른 뒤에야 생각을 멈췄다. 그녀는 다시 송지음을 쳐다봤을 때 갑자기 지루한 느낌이 들어 샐러드 하나를 주문하고 앉아서 휴대폰을 보았다. 한편 신유리는 샤브샤브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젊은 인턴들의 모습을 따라 하며 머리를 묶고 소매를 걷어붙였다.양예슬은 사람들에게 더 주문하라고 얘기하고 있었다.“뭘 그리 어려워들 해요. 유리 언니가 쏜다는 데 많이 먹어야죠?” 비록 신유리가 회사에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양예슬은 그녀와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신유리가 사실 매우 심플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양예슬이 신유리에게 물었다.“유리 언니,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난 다 괜찮아요.” 신유리가 대답했다. 그들은 한참 동안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인턴들은 서로를 밀며 신유리에게 걸어왔다.신유리의 옆에 앉은 양예슬이 그 상황을 보고 물었다.“청아 씨, 유리 언니랑 할 얘기 있어요? 내가 자리 비켜줄까요?”“아니요.”맨 앞으로 밀려난 오청아는 얼굴이 붉어진 채 신유리를 쳐다보며 말했다.“유리 언니, 그동안 잘 보살펴 주신 것에 감사드리기 위해 제가 한 잔 따를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그녀의 말에 신유리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들은 사실 정규직 전환 여부에 대해 물어보러 온 것이라는 걸.그녀는 멈칫하다 입을 열었다.“일만 열심히 잘하면 돼요.” 역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 오청아는 더 물어보기가 미안해서 몇 마디 다른 얘기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신유리는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해서 젓가락질을 몇 번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예 혼자 자리를 옮겨 룸의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이신은 수시로 업무 진행 상황을 보내왔다. 신유리가 막 파일 하나를 클릭하자마자 외할아버지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가 오늘 밤 병원에 가지 않아, 외할아버지는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되었다.신유리는 휴대폰을 들고 룸에서 나와 좀 조용한 곳에서 전
하정숙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매우 거칠었다. 신유리는 표정이 살짝 굳어졌지만 하정숙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입술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하정숙은 그녀가 가만있는 것을 보고 더욱 비꼬며 비아냥거렸다. "내가 오래전부터 말했지? 준혁이가 너 같은 여자와 결혼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이씨 가문 사람이랑 사랑에 빠졌다고 하니 이 참에 너가 준혁이 곁을 떠나 우리 체면이라도 세우는 편이 낫겠다.”신유리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정숙을 바라보았다. 갈색 눈동자는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그 말은 송지음에게 하셔야죠.”하정숙이 개의치 않은 듯 싸늘한 비웃음을 지으며 무언가를 말 하려는 순간, 서준혁이 서재에서 나왔다.이어 서준혁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그에게 상기시켰다. "주말에 임 아가씨랑 저녁 식사하는 거 잊지 마렴."서준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전 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하정숙은 말했다. "너의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거야."서준혁은 서씨 저택 대문을 나설 때까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신유리는 그에게 풍기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서준혁은 지금 확실히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녀는 이 상태로 서준혁과 함께 있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자신이 운전을 하기 위해 서준혁보다 두 발 앞서서 걸어갔지만 차문에 다다르자 서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운전할게.”신유리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하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감정적으로 운전하는 건 좋지 않을텐데."하지만 서준혁의 차가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보고 싶지 않아?”신유리는 방금 하정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서준혁도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니 신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서준혁에게 키를 건네주고 조수석에 탔다.신유리의 이 차는 고가의 외제차가 아니라 그저 몇 백만 원짜리의 이동 수단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 차를 부드럽게
서준혁은 감정이 거의 없는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잠시 후 목젖이 약간 움직이더니 말했다. “그렇지 않아.”송지음의 표정은 알게 모르게 굳어졌다. 그럼에도 서준혁은 여전히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서준혁이 적당한 선에서만 그녀를 좋아할 뿐, 많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매우 억울한 표정으로 잠시 서준혁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말했다. "그럼 나도 한번 믿어줘. 나도 나쁘지 않다고."서준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봐."송지음은 차에서 내렸고, 뒤를 돌자마자 환한 미소가 서서히 사라져갔다.신유리는 그곳에서 1시 30분까지 바쁘게 일하다가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졸린 나머지 바로 잠들었다.하지만 그녀가 대접한 요리는 꽤 효과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회사에 도착하자 그녀가 가장 늦게 출근한 사람이었다.양예슬은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인사하며 바로 파일을 하나 건넸다. "유리 언니, 여기 보고된 자료가 예전에 주셨던 주간 보고 자료와 달라요."신유리가 물었다. "오늘 다들 왜 이렇게 열심히 해?"“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잖아요.” 양예슬은 힘차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주셨는데,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사무실 사람들 모두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고, 신유리가 갑자기 이곳으로 전근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봤다.하지만 어젯밤 그녀의 요리를 먹은 뒤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적어도 그녀를 만나면 인사를 하곤 했다.신유리는 과거에 최대한 빨리 승진하기 위해 거의 전적으로 업무에만 집중했고, 동료들 간의 관계에는 매우 무관심했다.나중에 서준혁과 함께한 뒤로는 주변에 동료도 몇 명 안 됐고, 직위에 때문에 친해지고자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화인에서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하지만 지금 사무실에서는 양예슬의 환대 덕분에 잘 어울리고 있었다.그래서 어젯밤에 자신이 직접 만든 요리로 초대를 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
신유리는 서준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서준혁은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무표정으로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하는 대로 해." 그의 말투는 매우 차분했고,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하지만 신유리는 서준혁의 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 실적대로 송지음을 내보낸다면, 서준혁도 그녀를 가만 두지 않을 것 같았다.신유리는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그녀는 말을 마친 후 돌아서 사무실을 나갔다.송지음은 아직 밖에 있었고 신유리를 보아도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이제 자신이 정직원이 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조심하지 않았다.신유리가 그녀 옆을 지나가다 잠시 멈춰 서서 옆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정규직 신청서를 제출하는 걸 잊지 마. 기한이 지나면 나도 기다리지 않을 거니까."송지음의 표정은 약간 굳어 있었다. 이미 쥴리가 그녀에게 정규직 신청을 비서실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말한 적 있었다.그녀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유리 언니. 내일 넘겨드릴게요." 신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나갔다. 그녀는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병원에 가야 했다.화연의 업무강도가 높아서, 비서실로 돌아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근하지도 않고 야근을 하고 있었다.양예슬은 그녀가 오후에 병원에 간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리 언니, 응급 상황인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 빨리 가보세요."신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던 중 생각난 것이 있어 양예슬에게 말했다. "너무 늦게까지 야근하지 마세요. 다들 나중에 커피라도 주문하세요 비용은 제가 계산할게요.""유리 언니, 왜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양예슬은 다소 화난 말투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회사를 나섰을 때는 이미 조금 늦었기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외할아버지는 식사 중이었다. 그의 상태는 매우 호전되었고
송지음의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옆에 있던 인턴들은 또렷이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신유리만이 침착함을 유지하고 말했다. "다른 일 없으면 그냥 가."송지음은 피식 웃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 거예요."신유리는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송지음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신유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걸음을 떼기도 전에 뒤에서 인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 님, 송지음이 왜 비서실 정규직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저 사람 윗층 부서 사람 아닌가요?”“아직 부서 이동이 안되었어요.” 신유리가 차분하게 말했다."그렇군요." 인턴들은 떨떠름해했다. 지금 화인에서 송지음이 서 대표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나?여러 인턴들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양예슬은 솔직하게 말했다. "뭐가 고민이예요, 송지음의 능력과 성과가 서류로 다 나타날텐데. 화인이 외모만 보고 사람을 채용하는 게 아니잖아요."여러 인턴들이 안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신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밖에 있던 송지음은 오히려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그러나 그녀는 이내 다시 안심했다. 신유리가 누구를 자르든, 그녀를 자를 수는 없을 것이다.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한편 사무실에서 신유리는 인턴 몇 명에게 퇴사를 권한 뒤 컴퓨터를 바라보며 두통이 난 듯 눈가를 만졌다.비서실의 인턴 5명은 모두 업무 능력이 뛰어났고 처음에는 계속 남게 할 계획이었다.그런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남겨둬야 할 송지음이 있었다. 양예슬 진지한 표정의 신유리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신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생각 중이었어요.""그런데." 대신 양예슬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송지음이 왜 아직 여기 있어요? 다섯 자리밖에 없잖아요, 걔까지 합치면..."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 신유리가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숙이며 말
신유리는 그동안 일이 바빴고, 연우진도 해외에서 막 돌아와 둘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신유리도 웃었다. "요즘 많이 바쁜 거 같네?""집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개 있어서." 연우진은 조금 힘없이 말했지만, 재빨리 신유리에게 물었다. "너는 어때, 최근 많이 힘들었어?"그는 신유리의 외할아버지가 아직 병원에 계시기에 신유리가 회사와 병원을 모두 오갔어야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괜찮아요." 신유리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고 잠시 말을 멈추다 말했다. "계속 바쁘지는 않을 거 같아."그녀는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고 한 달 안에 처리될 것이다.연우진은 신유리가 화인을 떠날 생각이 있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신유리에게 물었다. "결정했어?"“응.”연우진은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축하 자리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만 둘 결심을 하는 것도 대단한 거야."연우진은 그 뒤로 신유리에게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최근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신유리에게 말해줬다.“우리 어머니 생신 때 시간 있어?” 말을 하던 그는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신유리는 연씨 집안 아주머니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잠시 고민했다. "내가 거기 가는 게 맞는 걸까?"연우진은 말했다. "널 엄청 좋아하셔. 그리고 이신도 아마 올 거 같아. 너희 둘 사이좋지 않나? 걔랑 있으면 되겠다.”“뭐?” 신유리가 물었다. “걔네 식구는 안 온데?”신유리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연우진은 잠시 침묵했다. "이신 어머니가 해외에 계시거든." 신유리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리는 연우진과의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그런데 집에 가보니 집 앞에 관리인 두 명이 서 있었다.“유리 아가씨, 안녕하세요. 저희는 주택 관리인입니다.” 앞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연락을 드렸는데 연락이 안되셔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죄송해요.”신유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