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과 서준혁이 가까이 앉은 탓에 주현의 향수 냄새가 서준혁의 코끝에서 맴돌았다. 주현은 무릎으로 서준혁을 터치하면서 낮게 말한다. “내가 당신 비서보다 더 괜찮을 수 있어요.”주현을 바라보는 서준혁의 눈빛에 더 이상의 흥미가 없었다. “나는 문 대표님과 일 얘기를 하러 온 것이지 그분의 따님과 자러 온 게 아닙니다.”주현은 잠시 굳었다가 서준혁의 옷소매를 잡았다. “엄마는 준혁 씨를 탓하지 않을거예요. 엄마도 준혁 씨 맘에 들어 하세요.”서준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선다. 신유리가 테이블에 놓고 간 약을 들어서 본다. “이러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잠시 뜸을 드리고 다시 말한다. “더군다나 집에 사람도 있어서.”서준혁을 바라보는 주현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그의 손에 들린 위약으로 눈길을 돌린다. “여비서가 사다 준거에요?”“당신과 상관없을 텐데요.”신유리는 샤워를 마치고 잠이 들었다. 시한은 날씨도 적당하고 낮에 이리저리 구경했어서 오늘 밤엔 푹 잘 수 있었다.새벽이 되자 침대 옆에 놓인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전화를 받자 서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심한 밤에 목소리가 더 낮게 깔렸다. “올라와.”신유리는 핸드폰을 쥐고 목이 잠긴 채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주현이 아직 방에 있을 텐데 서준혁은 올라오라고 한다.그는 대답 대신 전화를 끊었다. 신유리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올라갔다.방문은 열려있었지만 신유리는 뜸을 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방에는 누구도 없었다.신유리가 나가려 하자 발코니 문이 열리면서 잠옷을 입은 서준혁이 보였다.그는 키도 크고 다리도 길었다. 잠옷은 무심하게 걸쳐져 있었고 허리에는 벨트가 매여져 있었다.통화할 때 신유리에게 눈길 한번 슥 주고 목소리를 낮춰 상대방과 굿나잇 인사를 했다.신유리는 옆에서 목석처럼 서있었다. 서준혁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도저히 알지 못했다.드디어 서준혁이 통화를 마쳤다. 굿나잇 인사만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신유리는 태연하게 설명했다. “주현 씨, 이건 화인 그룹의 규정입니다.”주현은 코웃음을 치며 옆에 있는 서준혁을 바라봤다. “준혁 씨, 정말 회사 규정이에요?”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주현을 보고, 그다음 신유리를 보면서 대답했다. “오후에 주현 씨랑 함께 어제 찜해놓은 가방을 사러 가죠.”주현은 기분이 나쁜지 입을 삐죽였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에요?”서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시선을 신유리한테 두면서 말한다. “심심하면 신유리 시켜서 같이 쇼핑해요.”고민할 틈도 없이 거절했다. “왜 신유리랑 쇼핑해요?”말속에 담긴 불쾌함이 그대로 느껴져 신유리는 몸을 굳었다. 서준혁을 바라보지만 그는 낯빛 한번 변하지 않았다. “그럼 좋으실 대로.”주현은 남고 싶었지만 서준혁의 거절의 의사가 확실해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주현이 나간 후 서준혁은 서유리를 보고 냉담하게 말했다. “자료 다 가져와.”사실 자료를 다 정리했지만 출발할 때 주현이 다른 자료를 얻는 바람에 모든 자료가 뒤엉켜 있었다. 한참을 찾은 뒤에야 원하는 자료를 꺼내 서준혁에게 건넸다. 그는 기다리다 짜증이 나 책상을 두드리며 질책했다. “업무능력이 벌써 이 정도로 떨어진 거야?”미팅에 참석하는 인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신유리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서준혁 옆으로 착석했다.지사의 책임자인 왕부장이 마른 손을 비비며 서준혁을 난처하게 바라본다. “서 대표님, 상대방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저희 일 처리가 어렵습니다.”서준혁은 아무 감정이 없이 책상만 톡톡 두드린다. “제가 전에 요청했던 구체적인 데이터와 마케팅 사례들은 왜 아직도 전달받지 못했죠?”왕부장은 난색을 표하며 해명하려 했으나 정작 해명할 핑곗거리도 찾지 못했다.서준혁의 얼굴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화내기 일보 직전이다. 신유리는 곁에서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되도록이면 서준혁과 터치를 하지 않았다.서준혁이 화를 내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긴장해서 신유리의 팔을 쳤다.서준혁은 신유리의 곁에서 자료를 보고 있었는
상대방이 말이 없자 이신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연우진 알아요?”신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거두며 말한다. “제 친군데요.”손을 내밀어 이신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신유리에요.”이신은 그녀와 악수를 하고 맞은켠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연우진한테서 들었는데 그쪽이 아트 디렉 일을 하고 싶다고요?”“네, 관심 있어요.” 신유리는 대담하게 말했다. “한번 시도해 보고 싶어요.”이신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어 매우 수려했다. 웨이터한테 손가락을 튕겨 펜과 종이를 달라고 했다. 종이 위에 숫자를 끄적대고 신유리에게 줬다. “요즘 괜찮은 전시회가 있는데 가봐요.”이신의 글은 생긴것 처럼 날카롭지만 더없이 깔끔했다.신유리는 종이에 쓰인 숫자를 보고 물었다. “당신 전화번호에요?”“평소 카톡을 잘 보지 않아서요.” 말을 마친 이신은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담담하게 물었다. “시한에는 며칠 있어요?”“저도 잘 몰라요.”“그럼 전시회 보고 연락 줘요.” 이신은 다음 일정이 있어 일어났고 신유리도 덩달아 일어났다.일어날 때 테이블 모서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넘어지려는데 그가 팔을 잡아 부축해 줬다. 그의 몸에서 깨끗하고 상쾌한 페인트 섞인 냄새가 났다. 신유리는 덕분에 똑바로 설수 있었다.멋쩍음을 감추려 태연하게 바라보지만 말투에서는 어색함이 묻어났다. “고마워요.”“이곳 가구들이 민족 특색이 있어서 발에 걸려 넘어지기 쉬워요.” 이신은 무표정으로 신유리 어깨에서 손을 뗐다.신유리가 말하려는 순간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서준혁이 걸어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서준혁은 자료를 챙겨서 고객 미팅 하러 간다고 말했다.자기 말만 하고 끊어 신유리는 반응할 시간조차 없었다.이신이 아직 자리를 뜨지 않아 미안하게 말을 건넸다. “다음번엔 제가 사죠. 번거로운 걸음 해 줘서 고마워요.”이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오늘 신유리를 보러 온 것도 까다로운 고객을 피하려고 온 것이다.이신이 나가자 신유리도 뒤따라 나갔다.서준혁과
이신은 전시회를 보는 사람이 신유리일 거라고 예상 못 했다. “아트 디렉에 이렇게 관심 있는 줄 몰랐네요.”신유리는 웃으며 말한다. “우연히 와 봤어요.”“마침 내가 책임진 전시회에 오다니.” 이신은 신유리 등귀에 걸려있는 작품을 가리키며 말한다. “오늘 오픈 1일차인데 첫 번째 관객이시네요. 이 그림 위치를 바꾸려고 폐관해요.”신유리는 이신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지만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서 뭘 더 바꾸죠?”“빛이요, 다양한 빛이 작품에 주는 감정들이 다 다르거든요.”“사물에도 감정이 있어요?” 신유리는 이 말만 계속 중얼거렸다. 이신의 관점이 매우 흥미로웠지만 작업을 방해하기 싫어 나가려는데 그가 불러 세웠다.“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 난 여기만 바꾸면 되니까.”신유리는 전시회를 한 번 더 돌아봤다. 이신이 위치를 바꾼 작품을 보고 아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굉장히 미묘했다.전시회에서 나갈 때즘 이미 7시가 넘었다. 시간이 늦어 날이 어둑어둑해졌다.핸드폰을 봤지만 서준혁은 연락이 없었다. 아마 어디 갔는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신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속눈썹을 부르르 떨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면서 감정을 추슬렀다.“어디서 지내요? 데려다줄게요.” 딴 생각을 할 때 이신의 목소리가 들렸다.신유리는 이신에게 폐가 될까 봐 택시 타고 가면 된다고 말했다.“이곳은 택시 잡기 힘들어요.”이신은 기어코 신유리를 호텔까지 데려다줬다. 신유리는 밥 한번 먹자고 했지만 이신이 다음 일정이 있어 나중으로 미뤘다.차에서 내리자 주현이 다른 차에서 내리는 것을 목격했다. 물론 서준혁이 주현의 뒤를 따랐다.주현은 여기서 신유리를 마주칠지 몰랐다. “신 비서님 간도 크시지, 대표님 앞에서 땡땡이도 치고.”서준혁이 신유리의 곁을 지날 때 차갑게 스쳐보고 그대로 지나갔다.신유리는 차 옆에서 오래도록 서있었다. 이신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안하다고 했다.이신은 운전대를 잡고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
입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통증과 더불어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겼다. 신유리는 자신의 입가가 찢어진 것을 느꼈다.서준혁이 손에서 힘을 빼자 신유리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고개를 돌릴 때 몸에 걸친 잠옷이 헐렁해져 쇄골과 하얀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서준혁은 고개를 숙여 신유리를 바라보다 비아냥거리듯 입꼬리를 올리고 아까와 같은 느긋한 말투로 물었다. “왜, 너한테 제대로 된 신분을 주지 않아서 그래?”신유리의 대답을 듣기 전에 서준혁은 손에 힘을 풀었다. 소파에 앉아 무표정으로 물어본다. “내가 언제 네가 내 여자친구라고 했어? 신유리 넌 자신을 너무 높게 보는 거 같아.”서준혁의 말은 신유리가 느낀 모든 일들이 자신만의 망상이고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업자득이라고 느껴진다.기계적인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자 서준혁은 핸드폰을 보고 전화를 받았다.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신유리는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송지음의 애교 섞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서준혁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대답했다. 신유리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서준혁이 송지음에게 말하는 말투는 아까 냉기가 가득했던 말투와 전혀 달랐다.신유리는 그제야 알았다. 송지음이든 주현이든 서준혁은 모두 따뜻하고 젠틀하게 대할 수 있었지만 신유리만 예외였다.그녀는 멍하니 서있다가 서준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를 보았다.마침 서준혁도 이쪽을 보면서 말한다. “걔 없어, 몰라.”신유리는 서준혁이 송지음과 통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방에서 통화하는 서준혁을 방해할 수 없어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갔다.시한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 저녁의 쌀쌀함을 느낄수 있었다.갑자기 요양원 원장님의 전화가 왔다. 신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원장님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신유리 씨, 혹시 시간 되면 내일 요양원으로 와 줬으면 좋겠네요.”신유리는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외할아버지한테 무슨 일 있어요?”“이선생님이 요즘 이상해요. 담당 간호사가 이선생님이 요즘 은행에 자주 가시
십분이 지나도 서준혁은 답장이 없었다.신유리는 데스크에 인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가기 전에 멀리서 왕부장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는데 신유리를 보고 멈칫했다. “신 비서,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왕부장은 못 챙긴 물건이 있어 다시 물건 가지러 돌아온 것이다. 신유리는 떠나기 애매했다.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화양에 있어요.” 왕부장은 신유리가 서준혁의 업무지시로 남아있는 줄 알았다. “다시 가봐야 해서 신 비서도 같이 갈래요?”왕부장과 마주쳤는데도 가지 않으면 보기 좋지 않아 왕부장과 함께 화양으로 떠났다.화양은 거리가 멀지 않아 20분 만에 도착했다. 왕부장은 가는 길 내내 신유리와 지사에 관련된 일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유리한테서 서준혁의 의도를 알아채려는 모양이다.“대표님이 시한에 계시니 지사의 일은 잘 처리될 거예요. 부장님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본디 차가웠지만 무표정일 때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왕부장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책임자가 마중 나와 공손하게 왕 부장과 말했다. “문 대표님이 도착하셔서 서 대표님께서 안에서 모시고 계십니다.”문대표는 문선경이었다.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왕부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유리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려는 듯 말한다. “사실 문 대표님과 내가 오랜 벗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주현은 문선경의 손을 잡고 안에서 나왔고 서준혁은 그 뒤를 따랐다.왕부장은 마른 손을 비비며 다가가 문선경에게 인사를 했다. 문선경은 한번 쓱 보고 예의상 인사를 받아줬다.신유리는 왕부장 뒤에 있어 문선경이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문선경은 시선을 거두고 주현을 보면서 당부한다. “내가 요 며칠 목포로 내려가는데 서 대표 번거롭게 하면 안 돼.”그리고 서준혁을 보면서 웃으면서 말한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신세 질게요. 재계약 건은 와서 빨리 답장하죠.”서준혁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낮게 대답한다. “저
서준혁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곁에 오래 있은 신유리는 서준혁의 기분이 나쁘다고 느꼈다. 기분 나쁜 이유를 몰라 대꾸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서준혁은 이런 반응을 원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냉랭하게 물었다. “신 비서, 출근시간에 플러팅 하는 게 맞는 일이야?”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뚫어지게 봤다. 그가 감추지 못한 혐오를 똑똑히 보았다.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해명했다. “마침 친구를 만난 것뿐이야.”“친구도 참 많아, 벌써 몇 명째야?”서준혁이 말한 친구와 신유리의 친구는 다른 의미였다. 신유리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자신만 욕 보이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이신까지 끌어들여 욕 보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신유리가 서준혁한테 싸늘하게 말한다. “왜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해? 난 친구도 있으면 안 되는 거야?”서준혁은 얼굴을 굳히면서 싸늘하게 서유리를 바라본다.평소에도 위압감을 풍겼는데 얼굴이 어두워지자 그 기세가 더 강렬했다.신유리는 그의 시선 때문에 손이 떨리고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주현이 문서를 들고 오는 것을 발견해 가만히 있었다.“대표님, 지사에서 미팅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왜 아직 여기 계세요?”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보지만 그는 시선을 거두고 걸어갔다.주현은 문서를 챙기고 뒤따라 간다. 두 걸음 걸은 후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대표님 따르기 싫으면 그만 따라요.”신유리는 주현의 말속에 뼈가 있다고 느꼈지만 주현은 할 말만 하고 떠났다.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간 피곤이 몰려왔다.방금 서준혁은 신유리와 같이 미팅하러 간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서준혁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그 사람이 당신 상사에요?” 이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이신도 아무 이유 없이 서준혁에게 비웃음을 당한 일이 떠올랐다.“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쪽도 욕보이게 됐네요.”서준혁의 말이 지나쳐 이신이 화를 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이신은 신유리를 지그시 바라본다. “내가
잘 닫히지 않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신유리의 몸에 걸쳐진 얇은 가운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멈칫하던 그녀는 그제야 서준혁의 말뜻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서준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출근 시간에 이렇게 온 걸 보면 몰라?”이건 점심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차가워 보이는 서준혁이지만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읽을 수는 없었다.하지만 서준혁은 점심에 그녀를 버리고 주현과 함께 손님을 만나러 갔다.입술을 깨물던 신유리가 입을 열었다.“당신한테 주현 씨면 되는 줄 알았는데?”그녀의 말에 서준혁의 눈썹이 희한한 곡선을 그렸다.“주현은 정화의 직원이 아니야.”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신유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그녀는 지금 너의 비서잖아?”서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신경 쓰여?”그의 차가운 말투는 불어오는 바람과 어우러져 신유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일자리도 뺏겼는데 그녀더러 뭘 하란 말인가?신경 쓰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창문을 닫으니 바람이 사라졌다. 신유리는 몸을 미처 돌리지 않았는데 뒤에서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신경 쓰인다고 해도 신유리, 너는 나한테 이럴 자격 없어.”창문 고리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보았다.“늦은 저녁에 직원의 방에 나타난 대표님은 이럴 자격 있고?”그녀는 서준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그녀의 긴 속눈썹은 유난히 냉담해 보였다.신유리는 선 채로 앉아 있는 서준혁을 내려다보았다.서준혁은 신유리의 이런 위압적인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움직였고 신유리를 단번에 창가로 밀어붙였다.그리고 몸을 약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