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이 지나도 서준혁은 답장이 없었다.신유리는 데스크에 인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가기 전에 멀리서 왕부장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는데 신유리를 보고 멈칫했다. “신 비서,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왕부장은 못 챙긴 물건이 있어 다시 물건 가지러 돌아온 것이다. 신유리는 떠나기 애매했다.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화양에 있어요.” 왕부장은 신유리가 서준혁의 업무지시로 남아있는 줄 알았다. “다시 가봐야 해서 신 비서도 같이 갈래요?”왕부장과 마주쳤는데도 가지 않으면 보기 좋지 않아 왕부장과 함께 화양으로 떠났다.화양은 거리가 멀지 않아 20분 만에 도착했다. 왕부장은 가는 길 내내 신유리와 지사에 관련된 일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유리한테서 서준혁의 의도를 알아채려는 모양이다.“대표님이 시한에 계시니 지사의 일은 잘 처리될 거예요. 부장님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본디 차가웠지만 무표정일 때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왕부장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책임자가 마중 나와 공손하게 왕 부장과 말했다. “문 대표님이 도착하셔서 서 대표님께서 안에서 모시고 계십니다.”문대표는 문선경이었다.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왕부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유리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려는 듯 말한다. “사실 문 대표님과 내가 오랜 벗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주현은 문선경의 손을 잡고 안에서 나왔고 서준혁은 그 뒤를 따랐다.왕부장은 마른 손을 비비며 다가가 문선경에게 인사를 했다. 문선경은 한번 쓱 보고 예의상 인사를 받아줬다.신유리는 왕부장 뒤에 있어 문선경이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문선경은 시선을 거두고 주현을 보면서 당부한다. “내가 요 며칠 목포로 내려가는데 서 대표 번거롭게 하면 안 돼.”그리고 서준혁을 보면서 웃으면서 말한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신세 질게요. 재계약 건은 와서 빨리 답장하죠.”서준혁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낮게 대답한다. “저
서준혁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곁에 오래 있은 신유리는 서준혁의 기분이 나쁘다고 느꼈다. 기분 나쁜 이유를 몰라 대꾸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서준혁은 이런 반응을 원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냉랭하게 물었다. “신 비서, 출근시간에 플러팅 하는 게 맞는 일이야?”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뚫어지게 봤다. 그가 감추지 못한 혐오를 똑똑히 보았다.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해명했다. “마침 친구를 만난 것뿐이야.”“친구도 참 많아, 벌써 몇 명째야?”서준혁이 말한 친구와 신유리의 친구는 다른 의미였다. 신유리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자신만 욕 보이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이신까지 끌어들여 욕 보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신유리가 서준혁한테 싸늘하게 말한다. “왜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해? 난 친구도 있으면 안 되는 거야?”서준혁은 얼굴을 굳히면서 싸늘하게 서유리를 바라본다.평소에도 위압감을 풍겼는데 얼굴이 어두워지자 그 기세가 더 강렬했다.신유리는 그의 시선 때문에 손이 떨리고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주현이 문서를 들고 오는 것을 발견해 가만히 있었다.“대표님, 지사에서 미팅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왜 아직 여기 계세요?”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보지만 그는 시선을 거두고 걸어갔다.주현은 문서를 챙기고 뒤따라 간다. 두 걸음 걸은 후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대표님 따르기 싫으면 그만 따라요.”신유리는 주현의 말속에 뼈가 있다고 느꼈지만 주현은 할 말만 하고 떠났다.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간 피곤이 몰려왔다.방금 서준혁은 신유리와 같이 미팅하러 간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서준혁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그 사람이 당신 상사에요?” 이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이신도 아무 이유 없이 서준혁에게 비웃음을 당한 일이 떠올랐다.“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쪽도 욕보이게 됐네요.”서준혁의 말이 지나쳐 이신이 화를 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이신은 신유리를 지그시 바라본다. “내가
잘 닫히지 않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신유리의 몸에 걸쳐진 얇은 가운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멈칫하던 그녀는 그제야 서준혁의 말뜻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서준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출근 시간에 이렇게 온 걸 보면 몰라?”이건 점심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차가워 보이는 서준혁이지만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읽을 수는 없었다.하지만 서준혁은 점심에 그녀를 버리고 주현과 함께 손님을 만나러 갔다.입술을 깨물던 신유리가 입을 열었다.“당신한테 주현 씨면 되는 줄 알았는데?”그녀의 말에 서준혁의 눈썹이 희한한 곡선을 그렸다.“주현은 정화의 직원이 아니야.”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신유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그녀는 지금 너의 비서잖아?”서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신경 쓰여?”그의 차가운 말투는 불어오는 바람과 어우러져 신유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일자리도 뺏겼는데 그녀더러 뭘 하란 말인가?신경 쓰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창문을 닫으니 바람이 사라졌다. 신유리는 몸을 미처 돌리지 않았는데 뒤에서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신경 쓰인다고 해도 신유리, 너는 나한테 이럴 자격 없어.”창문 고리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보았다.“늦은 저녁에 직원의 방에 나타난 대표님은 이럴 자격 있고?”그녀는 서준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그녀의 긴 속눈썹은 유난히 냉담해 보였다.신유리는 선 채로 앉아 있는 서준혁을 내려다보았다.서준혁은 신유리의 이런 위압적인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움직였고 신유리를 단번에 창가로 밀어붙였다.그리고 몸을 약
신유리는 서류를 챙겼다.주현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신 비서님, 회의 전에 가급적이면 메이크업 좀 하는 게 어때요? 화인을 대표하는 얼굴이 그 모양이면 되겠어요?”차에서 쪽잠을 잔 신유리라 머리가 훨씬 맑아진 상태였다.“별걱정 다하시네요.”서준혁은 어제 그녀가 화인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기에 그녀는 화인의 이미지를 걱정할 자격도 없었다.주현은 요즘 서준혁과 함께 다니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신유리에 이미 익숙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신유리가 지금 그녀에 맞서려 하고 있다.“뭐라도 된 것처럼 건방지네요? 어제는 무단결근에 오늘은 졸기까지 하다니요. 아주 훌륭한 비서네요.”주현은 훌륭하다는 단어에 힘주며 말했다.그녀의 말에 심기가 불편했던 신유리가 뭐라 말하려는데 서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주현 씨.”경고를 의미하는 서준혁의 말투에 주현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를 따라 회의실에 들어서자,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낯섦이 더욱 짙어졌다.메인 자리에 앉은 그는 왕대리를 보며 말했다.“오늘 준비 잘했길 바라요.”왕대리가 서류를 건넸다.“전 계획안과 대표님이 요구했던 것들입니다.”서준혁과 멀리 떨어져 앉은 왕대리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신유리에게 건넸고 그녀가 다시 서준혁에게 전달했다.앞으로 뻗어 마중 나온 서준혁의 손에 차가운 신유리의 손이 맞닿았다.따뜻한 서준혁의 온기에 신유리는 급히 손을 거두었다.회의 내용은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상대의 악의적인 경쟁에 대안을 마련하는 내용이었다.신유리는 옆에서 노트하며 한편으로는 서준혁을 위해 각종 필요한 예시와 수치들을 보여주었다.일에 관해서 유난히 확실한 것을 지향하는 서준혁이다.신유리도 그런 그를 알고 있었다.오늘은 그날과는 달리 순리롭게 진행되었다.회의가 막바지로 향하던 그때, 왕대리가 갑자기 물었다.“대표님, 오 주임의 자리가 비었는데 새로 채용할까요? 아니면 본부에서 사람을 보내주시나요?”오 주임이 숨어있던 간첩이었고 화사의 일부 자료를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던 신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알 것 같아.”그녀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입술에 혈색이 없었고 서준혁을 바라보는 눈빛도 전차 평온해졌다.신유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 내가 오바했어.”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서준혁은 아무 말도 없었다.잠시 후, 그는 다시 고개를 들며 물었다.“내가 데려다줘?”다른 스케줄이 있었지만 신유리가 다쳤으니, 호텔로 돌아가 쉴 수밖에 없었다.반면 신유리는 서준혁이 진심으로 그녀를 데려다주려는 것이었다면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거라 여겼다.그래서 신유리는 다친 손을 움직이며 느릿하게 말했다.“아니, 차를 부르면 돼.”서준혁이 뭐라 말하려는데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고 시선을 내려 확인하던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자리를 떠났다.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걸음이 느렸다. 모퉁이를 돌면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그녀는 거기에서 걸음을 멈췄다.여기는 비지니스 파크였고 오가는 차들은 모두 자가용이었다.급할 것이 없었던 신유리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오가는 차량을 지켜보았다.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 같다.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탓에 서준혁이 예전처럼 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결국 사람은 변한다.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5시가 되었고 막 쉬려는데 이연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요즘 이연지는 너무 빈번하게 그녀를 찾았다. 신유리는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그녀도 마침 이연지에게 사실인지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하지만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이연지의 목소리가 아닌 거칠고 심술 궂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이연지의 딸이야?”남자는 예의가 없었다.신유리의 얼굴도 일그러졌다.“당신은 누구죠?”“난 이연지의 남자야. 네 엄마가 나한테 2,000만 원을 빚졌어. 네가 대신 갚아!”휴대폰을 잡은 그녀의 손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전화 바꿔요.”남자는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돈만 축내는 걸 데리고 병원에 갔
신유리는 한참 후에야 이신의 뜻을 알아듣고 눈썹을 치켜세웠다.“난 안 될 것 같은데?”“왜?”이신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되물었다.“전시 기획을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신유리는 고개를 떨구고 붕대를 감은 팔을 보며 대답했다.“다쳐서 도울 수 없어.”그녀가 해명했지만, 그는 도리어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일손이 부족하단 게 아니고 배우라는 거야. 게다가 하루 이틀에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신유리는 고개를 저었다.“민폐일 것 같아.”“네가 민폐를 끼치면 얼마나 끼친다고 그래?”이신의 말에 살짝 흔들리는 신유리였다. 그녀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늘 그녀는 연차를 내서 오후에 다른 일이 없었다.그녀는 이신을 따라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작업실에 들어서니 몇 명의 젊은이들이 무언가에 대해 다투고 있었다. 그들은 이신의 등장에 즉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딱이며 인사했다.이신은 고개를 돌리고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편한 데 앉아.”신유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방안은 잡동사니로 쌓여있었고 구석에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었다. 앉을 수 있을 곳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신유리를 본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중에 안경을 쓴 여자가 신유리를 뚫어지고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형수님을 어떻게 이런 누추한 곳으로 모시나요?”“그러게.”체크 셔츠를 입은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이신은 그들을 노려보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도리어 테이블 위의 설계 도안을 보며 물었다.“방금 뭐 한 거야?”일에 대해 묻자, 젊은이들의 태도가 급변했고 안경 쓴 여자가 대답했다.“전에 설계는 미관상에서나 실용성에서도 대리석 테두리가 더 낫다고 생각해요.”그러자 셔츠 남이 반박했다.“실용성이란 뜻을 모르는 것 같은데 대리석이 얼만 줄 알아?”옆에 서서 그들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던 신유리는 흥미를 느꼈다. 그녀의 몸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점점 흥분하던 셔츠남은 하마터면 신유리를 다치게 할 뻔했다.“잠깐!”이신이 갑자
“오빠?”신유리가 입을 떼려는데 갑자기 송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트렁크를 든 송지음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서준혁도 갑자기 나타난 송지음에 어안이 벙벙했다. 멈칫하던 서준혁은 신유리의 손을 놓고 송지음에게로 다가갔다.“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그게...”송지음은 신유리를 한번 흘기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우서진이 끼어들었다.“어제 내가 여기로 온다고 하니 자기도 온다며 따라온 거야.”그는 웃으며 덧붙였다.“어때? 여자 친구가 그 멀리에서 여기까지 와서 좋아 죽겠지?”서준혁은 대꾸하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송지음의 트렁크를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올라가서 쉬자.”송지음은 붉어진 눈망울로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멈칫하던 서준혁이 그녀를 타일렀다.“방으로 가서 자세하게 말해 줄게.”두 사람은 아주 애틋해 보였다. 마치 옆에 신유리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송지음이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인사를 한 후에야 그녀도 뒤늦게 반응했다.송지음에게 한없이 다정한 서준혁의 모습에 손목의 통증이 더해졌다.아마 방금전 서준혁의 품에 안겼을 때 무의식적으로 반항하며 그의 가슴을 밀친 것 때문인 것 같다.송지음도 왔으니, 신유리가 아는 서준혁이라면 송지음을 곁에 두려 할 것이다.하지만 점심시간에 서준혁은 그녀를 불렀다.“유리 언니.”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를 자세히 보니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목에서 빛나는 목걸이는 그녀를 한결 성숙하게 만들었다.그녀의 모습을 보니 서준혁이 잘 해결한 것 같다.아무리 둘러보아도 서준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송지음에게 물었다.“준혁이는?”“통화하러 갔어요.”송지음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뭔가를 탐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그녀와 화젯거리가 없었던지라 그저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하지만 송지음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녀가 신유리를 부르자 신유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할 말 있어?”“준혁 오빠
서준혁의 말을 들은 신유리는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서준혁에게로 향했다. 그는 마치 일상적인 말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신유리 씨는 아직 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제가 대신할게요.”왕 대리가 조심스레 서준혁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표정이 좋지 않던 서준혁의 얼굴이 더 굳었다.“그쪽은 아주 한가한가 봐?”서준혁이 왕 대리를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긴장한 왕 대리가 손을 비비며 쭈뼛거렸다.사실 왕 대리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서류 정리야 직접 해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본사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쪽 직원이 직접 살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준혁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왕 대리가 속으로 다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때쯤, 신유리가 서류를 서준혁에게 내밀었다.“최근 3개월 치 시장 자료 여기 있어요.”서준혁의 고개가 신유리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의 눈에 아직 다 낫지 않은 그녀의 손목이 들어왔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것은 걱정이 아닌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이쪽 일이 꽤 적성에 맞나 봐?”“업무는 어디나 비슷하니까요.”그의 시선을 느낀 신유리가 얼른 손목을 거두며 나지막이 말했다.잠시 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실은 비교적 작은 편에 속했다. 신유리는 서류를 편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서준혁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회의 시작 2분 전, 송지음이 말을 꺼냈다.“유리 언니, 서류 저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오빠한테 넘겨줄게요.”서류가 워낙 방대하고 복잡했던 탓에 신유리도 어렵게 정리를 마친 상황이었다. 그러니 정리를 한 장본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서류를 다루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니, 정리 다 끝났으니까 내가 직접 할게.”신유리는 반사적으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송지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송지음은 계속해서 자신을 피력했다. “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