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이 지나도 서준혁은 답장이 없었다.신유리는 데스크에 인사를 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가기 전에 멀리서 왕부장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는데 신유리를 보고 멈칫했다. “신 비서,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요?”왕부장은 못 챙긴 물건이 있어 다시 물건 가지러 돌아온 것이다. 신유리는 떠나기 애매했다.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화양에 있어요.” 왕부장은 신유리가 서준혁의 업무지시로 남아있는 줄 알았다. “다시 가봐야 해서 신 비서도 같이 갈래요?”왕부장과 마주쳤는데도 가지 않으면 보기 좋지 않아 왕부장과 함께 화양으로 떠났다.화양은 거리가 멀지 않아 20분 만에 도착했다. 왕부장은 가는 길 내내 신유리와 지사에 관련된 일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유리한테서 서준혁의 의도를 알아채려는 모양이다.“대표님이 시한에 계시니 지사의 일은 잘 처리될 거예요. 부장님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본디 차가웠지만 무표정일 때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왕부장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책임자가 마중 나와 공손하게 왕 부장과 말했다. “문 대표님이 도착하셔서 서 대표님께서 안에서 모시고 계십니다.”문대표는 문선경이었다. 오늘 여기서 만나게 될 줄 몰랐다.왕부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신유리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려는 듯 말한다. “사실 문 대표님과 내가 오랜 벗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게실 문이 열렸다. 주현은 문선경의 손을 잡고 안에서 나왔고 서준혁은 그 뒤를 따랐다.왕부장은 마른 손을 비비며 다가가 문선경에게 인사를 했다. 문선경은 한번 쓱 보고 예의상 인사를 받아줬다.신유리는 왕부장 뒤에 있어 문선경이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문선경은 시선을 거두고 주현을 보면서 당부한다. “내가 요 며칠 목포로 내려가는데 서 대표 번거롭게 하면 안 돼.”그리고 서준혁을 보면서 웃으면서 말한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신세 질게요. 재계약 건은 와서 빨리 답장하죠.”서준혁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낮게 대답한다. “저
서준혁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곁에 오래 있은 신유리는 서준혁의 기분이 나쁘다고 느꼈다. 기분 나쁜 이유를 몰라 대꾸를 하지 않았다.하지만 서준혁은 이런 반응을 원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냉랭하게 물었다. “신 비서, 출근시간에 플러팅 하는 게 맞는 일이야?”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뚫어지게 봤다. 그가 감추지 못한 혐오를 똑똑히 보았다.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해명했다. “마침 친구를 만난 것뿐이야.”“친구도 참 많아, 벌써 몇 명째야?”서준혁이 말한 친구와 신유리의 친구는 다른 의미였다. 신유리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자신만 욕 보이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이신까지 끌어들여 욕 보이는 건 참을 수 없었다.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신유리가 서준혁한테 싸늘하게 말한다. “왜 그렇게밖에 생각 못 해? 난 친구도 있으면 안 되는 거야?”서준혁은 얼굴을 굳히면서 싸늘하게 서유리를 바라본다.평소에도 위압감을 풍겼는데 얼굴이 어두워지자 그 기세가 더 강렬했다.신유리는 그의 시선 때문에 손이 떨리고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주현이 문서를 들고 오는 것을 발견해 가만히 있었다.“대표님, 지사에서 미팅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왜 아직 여기 계세요?”신유리는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보지만 그는 시선을 거두고 걸어갔다.주현은 문서를 챙기고 뒤따라 간다. 두 걸음 걸은 후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대표님 따르기 싫으면 그만 따라요.”신유리는 주현의 말속에 뼈가 있다고 느꼈지만 주현은 할 말만 하고 떠났다.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간 피곤이 몰려왔다.방금 서준혁은 신유리와 같이 미팅하러 간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서준혁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그 사람이 당신 상사에요?” 이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이신도 아무 이유 없이 서준혁에게 비웃음을 당한 일이 떠올랐다.“미안해요, 나 때문에 그쪽도 욕보이게 됐네요.”서준혁의 말이 지나쳐 이신이 화를 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이신은 신유리를 지그시 바라본다. “내가
잘 닫히지 않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신유리의 몸에 걸쳐진 얇은 가운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멈칫하던 그녀는 그제야 서준혁의 말뜻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지만, 서준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출근 시간에 이렇게 온 걸 보면 몰라?”이건 점심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차가워 보이는 서준혁이지만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읽을 수는 없었다.하지만 서준혁은 점심에 그녀를 버리고 주현과 함께 손님을 만나러 갔다.입술을 깨물던 신유리가 입을 열었다.“당신한테 주현 씨면 되는 줄 알았는데?”그녀의 말에 서준혁의 눈썹이 희한한 곡선을 그렸다.“주현은 정화의 직원이 아니야.”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신유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그녀는 지금 너의 비서잖아?”서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유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신경 쓰여?”그의 차가운 말투는 불어오는 바람과 어우러져 신유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일자리도 뺏겼는데 그녀더러 뭘 하란 말인가?신경 쓰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창문을 닫으니 바람이 사라졌다. 신유리는 몸을 미처 돌리지 않았는데 뒤에서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신경 쓰인다고 해도 신유리, 너는 나한테 이럴 자격 없어.”창문 고리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서준혁을 보았다.“늦은 저녁에 직원의 방에 나타난 대표님은 이럴 자격 있고?”그녀는 서준혁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그녀의 긴 속눈썹은 유난히 냉담해 보였다.신유리는 선 채로 앉아 있는 서준혁을 내려다보았다.서준혁은 신유리의 이런 위압적인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움직였고 신유리를 단번에 창가로 밀어붙였다.그리고 몸을 약
신유리는 서류를 챙겼다.주현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신 비서님, 회의 전에 가급적이면 메이크업 좀 하는 게 어때요? 화인을 대표하는 얼굴이 그 모양이면 되겠어요?”차에서 쪽잠을 잔 신유리라 머리가 훨씬 맑아진 상태였다.“별걱정 다하시네요.”서준혁은 어제 그녀가 화인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기에 그녀는 화인의 이미지를 걱정할 자격도 없었다.주현은 요즘 서준혁과 함께 다니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신유리에 이미 익숙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신유리가 지금 그녀에 맞서려 하고 있다.“뭐라도 된 것처럼 건방지네요? 어제는 무단결근에 오늘은 졸기까지 하다니요. 아주 훌륭한 비서네요.”주현은 훌륭하다는 단어에 힘주며 말했다.그녀의 말에 심기가 불편했던 신유리가 뭐라 말하려는데 서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주현 씨.”경고를 의미하는 서준혁의 말투에 주현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를 따라 회의실에 들어서자, 그에게서 평소와 다른 낯섦이 더욱 짙어졌다.메인 자리에 앉은 그는 왕대리를 보며 말했다.“오늘 준비 잘했길 바라요.”왕대리가 서류를 건넸다.“전 계획안과 대표님이 요구했던 것들입니다.”서준혁과 멀리 떨어져 앉은 왕대리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신유리에게 건넸고 그녀가 다시 서준혁에게 전달했다.앞으로 뻗어 마중 나온 서준혁의 손에 차가운 신유리의 손이 맞닿았다.따뜻한 서준혁의 온기에 신유리는 급히 손을 거두었다.회의 내용은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상대의 악의적인 경쟁에 대안을 마련하는 내용이었다.신유리는 옆에서 노트하며 한편으로는 서준혁을 위해 각종 필요한 예시와 수치들을 보여주었다.일에 관해서 유난히 확실한 것을 지향하는 서준혁이다.신유리도 그런 그를 알고 있었다.오늘은 그날과는 달리 순리롭게 진행되었다.회의가 막바지로 향하던 그때, 왕대리가 갑자기 물었다.“대표님, 오 주임의 자리가 비었는데 새로 채용할까요? 아니면 본부에서 사람을 보내주시나요?”오 주임이 숨어있던 간첩이었고 화사의 일부 자료를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던 신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알 것 같아.”그녀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입술에 혈색이 없었고 서준혁을 바라보는 눈빛도 전차 평온해졌다.신유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 내가 오바했어.”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서준혁은 아무 말도 없었다.잠시 후, 그는 다시 고개를 들며 물었다.“내가 데려다줘?”다른 스케줄이 있었지만 신유리가 다쳤으니, 호텔로 돌아가 쉴 수밖에 없었다.반면 신유리는 서준혁이 진심으로 그녀를 데려다주려는 것이었다면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거라 여겼다.그래서 신유리는 다친 손을 움직이며 느릿하게 말했다.“아니, 차를 부르면 돼.”서준혁이 뭐라 말하려는데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고 시선을 내려 확인하던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자리를 떠났다.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걸음이 느렸다. 모퉁이를 돌면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그녀는 거기에서 걸음을 멈췄다.여기는 비지니스 파크였고 오가는 차들은 모두 자가용이었다.급할 것이 없었던 신유리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오가는 차량을 지켜보았다.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 같다.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탓에 서준혁이 예전처럼 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하지만 결국 사람은 변한다.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5시가 되었고 막 쉬려는데 이연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요즘 이연지는 너무 빈번하게 그녀를 찾았다. 신유리는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그녀도 마침 이연지에게 사실인지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하지만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이연지의 목소리가 아닌 거칠고 심술 궂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이연지의 딸이야?”남자는 예의가 없었다.신유리의 얼굴도 일그러졌다.“당신은 누구죠?”“난 이연지의 남자야. 네 엄마가 나한테 2,000만 원을 빚졌어. 네가 대신 갚아!”휴대폰을 잡은 그녀의 손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전화 바꿔요.”남자는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돈만 축내는 걸 데리고 병원에 갔
신유리는 한참 후에야 이신의 뜻을 알아듣고 눈썹을 치켜세웠다.“난 안 될 것 같은데?”“왜?”이신은 허리를 곧게 세우며 되물었다.“전시 기획을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신유리는 고개를 떨구고 붕대를 감은 팔을 보며 대답했다.“다쳐서 도울 수 없어.”그녀가 해명했지만, 그는 도리어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일손이 부족하단 게 아니고 배우라는 거야. 게다가 하루 이틀에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신유리는 고개를 저었다.“민폐일 것 같아.”“네가 민폐를 끼치면 얼마나 끼친다고 그래?”이신의 말에 살짝 흔들리는 신유리였다. 그녀도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늘 그녀는 연차를 내서 오후에 다른 일이 없었다.그녀는 이신을 따라 그의 작업실로 향했다.작업실에 들어서니 몇 명의 젊은이들이 무언가에 대해 다투고 있었다. 그들은 이신의 등장에 즉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딱이며 인사했다.이신은 고개를 돌리고 신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편한 데 앉아.”신유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방안은 잡동사니로 쌓여있었고 구석에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었다. 앉을 수 있을 곳이라곤 찾을 수 없었다.신유리를 본 젊은이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중에 안경을 쓴 여자가 신유리를 뚫어지고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형수님을 어떻게 이런 누추한 곳으로 모시나요?”“그러게.”체크 셔츠를 입은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이신은 그들을 노려보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도리어 테이블 위의 설계 도안을 보며 물었다.“방금 뭐 한 거야?”일에 대해 묻자, 젊은이들의 태도가 급변했고 안경 쓴 여자가 대답했다.“전에 설계는 미관상에서나 실용성에서도 대리석 테두리가 더 낫다고 생각해요.”그러자 셔츠 남이 반박했다.“실용성이란 뜻을 모르는 것 같은데 대리석이 얼만 줄 알아?”옆에 서서 그들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던 신유리는 흥미를 느꼈다. 그녀의 몸이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점점 흥분하던 셔츠남은 하마터면 신유리를 다치게 할 뻔했다.“잠깐!”이신이 갑자
“오빠?”신유리가 입을 떼려는데 갑자기 송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녀가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트렁크를 든 송지음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서준혁도 갑자기 나타난 송지음에 어안이 벙벙했다. 멈칫하던 서준혁은 신유리의 손을 놓고 송지음에게로 다가갔다.“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그게...”송지음은 신유리를 한번 흘기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우서진이 끼어들었다.“어제 내가 여기로 온다고 하니 자기도 온다며 따라온 거야.”그는 웃으며 덧붙였다.“어때? 여자 친구가 그 멀리에서 여기까지 와서 좋아 죽겠지?”서준혁은 대꾸하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송지음의 트렁크를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올라가서 쉬자.”송지음은 붉어진 눈망울로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멈칫하던 서준혁이 그녀를 타일렀다.“방으로 가서 자세하게 말해 줄게.”두 사람은 아주 애틋해 보였다. 마치 옆에 신유리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송지음이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인사를 한 후에야 그녀도 뒤늦게 반응했다.송지음에게 한없이 다정한 서준혁의 모습에 손목의 통증이 더해졌다.아마 방금전 서준혁의 품에 안겼을 때 무의식적으로 반항하며 그의 가슴을 밀친 것 때문인 것 같다.송지음도 왔으니, 신유리가 아는 서준혁이라면 송지음을 곁에 두려 할 것이다.하지만 점심시간에 서준혁은 그녀를 불렀다.“유리 언니.”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그녀를 자세히 보니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목에서 빛나는 목걸이는 그녀를 한결 성숙하게 만들었다.그녀의 모습을 보니 서준혁이 잘 해결한 것 같다.아무리 둘러보아도 서준혁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송지음에게 물었다.“준혁이는?”“통화하러 갔어요.”송지음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뭔가를 탐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신유리는 그녀와 화젯거리가 없었던지라 그저 휴대폰만 보고 있었다.하지만 송지음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녀가 신유리를 부르자 신유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할 말 있어?”“준혁 오빠
서준혁의 말을 들은 신유리는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이 서준혁에게로 향했다. 그는 마치 일상적인 말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신유리 씨는 아직 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제가 대신할게요.”왕 대리가 조심스레 서준혁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표정이 좋지 않던 서준혁의 얼굴이 더 굳었다.“그쪽은 아주 한가한가 봐?”서준혁이 왕 대리를 바라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긴장한 왕 대리가 손을 비비며 쭈뼛거렸다.사실 왕 대리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서류 정리야 직접 해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본사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쪽 직원이 직접 살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준혁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왕 대리가 속으로 다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때쯤, 신유리가 서류를 서준혁에게 내밀었다.“최근 3개월 치 시장 자료 여기 있어요.”서준혁의 고개가 신유리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의 눈에 아직 다 낫지 않은 그녀의 손목이 들어왔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것은 걱정이 아닌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이쪽 일이 꽤 적성에 맞나 봐?”“업무는 어디나 비슷하니까요.”그의 시선을 느낀 신유리가 얼른 손목을 거두며 나지막이 말했다.잠시 후,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실은 비교적 작은 편에 속했다. 신유리는 서류를 편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서준혁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회의 시작 2분 전, 송지음이 말을 꺼냈다.“유리 언니, 서류 저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오빠한테 넘겨줄게요.”서류가 워낙 방대하고 복잡했던 탓에 신유리도 어렵게 정리를 마친 상황이었다. 그러니 정리를 한 장본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서류를 다루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니, 정리 다 끝났으니까 내가 직접 할게.”신유리는 반사적으로 거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송지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포기할 줄 모르는 송지음은 계속해서 자신을 피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