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음은 신유리를 대할 때 얼굴에 드러난 악의를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신유리가 잘되는 것도, 고고한 자태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신유리를 진흙 속에 짓밟아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송지음은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신유리를 노려보았지만 신유리는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지음의 독기 가득한 눈빛과 비교하면 신유리는 훨씬 평온해 보였다. 많은 일들은 말로 승부를 가리려 해도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하물며 송지음은 지금 마치 미친개와 같았다. 이런 사람과 말싸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다만 송지음이 그녀에게 큰 악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신유리는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미세한 행동조차도 송지음에게는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였다. 송지음은 그녀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며 더욱 의기양양하게 말했다.“나는 기회를 줬고, 어떻게 할지는 너한테 달렸어.”말을 마치고 일어나려 하자 신유리는 담담하게 그녀를 불렀다.“송지음.”송지음은 돌아보았다. 신유리의 여전히 침착한 얼로 회의를 기록할 때 사용했던 펜을 손에 들고 천천히 돌렸다.비록 그녀는 분명 송지음과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무언가 더 위엄이 느껴졌다.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네가 전에 내 곁에 있을 때 마음이 전혀 일에 있지 않았나 보네. 협상할 때는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잘 처리하는 것이 좋아.”신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말했지만 송지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모든 일을 처리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송지음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마침 그때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장수영과 오혁은 입구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유리 씨, 아직 안 끝났어요? 같이 점심 먹기로 했잖아요.”송지음은 장수영을 힐끗 보더니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친구가 왔으니 먼저 갈게요. 버닝 스타의 일은 세형
송지음은 서준혁을 바라보면서 말투를 부드럽게 바꿨다. 신유리를 대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약간 촉촉해진 눈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빠,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 바로 근처에 좋은 커피집이 있어요.”이석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송지음을 한 번 흘겼다. 그는 송지음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고 서로 친하지도 않았다. 송지음은 서준혁의 비서로 임명되면서 몇 가지 문제를 일으켰고 대부분 이석민이 마무리했었다. 비록 모두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들이었지만 그런 일이 계속되면 짜증이 났다.송지음은 여전히 서준혁을 바라보며 자신이 화인 그룹을 언급하면 서준혁이 반드시 승낙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기대에 부풀었지만 서준혁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송지음은 당황해하며 설명했다. “하지만 화인 그룹 쪽에서는...”서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송지음을 흘긋 살폈다. 그의 시선은 무관심해 보였다.송지음은 떨리는 마음으로 서준혁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당황해하며 서준혁과 이석민을 번갈아 봤다.그녀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지막으로 서준혁을 바라보며 손바닥을 꽉 쥐더니 겨우 긴장한 마음을 안정시키며 말했다. “화인 그룹의 일 외에 홍란의 일도 있잖아요. 오빠, 홍란을 이기고 싶지 않아? 듣기로 오빠가 이번 기획안을 위해 줄곧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하던데, 내가 도와줄게.”송지음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1층 회의실은 최근 금융 회의로 북적였고 서준혁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송지음의 목소리는 원래 조용했지만 말하다 보니 점점 커졌다. 서준혁에게만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서준혁을 도울 수 있다고 강조하는 듯 보였다. 서준혁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송지음의 목소리가 귀가에 계속 들려와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이석민이 적시에 말했다. “송 비서님, 회의가 곧 시작될 예정이니 대표님께서 쉬시도록 그만 가주시겠습니까?”송지음은 난처해하며 그 자리에 서서 말했다.
잠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조심해.”서준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비스듬히 뒤쪽으로 당겼다. 신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신기철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작은 계단 앞까지 다다랐고 바로 앞에 작은 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잘못 밟으면 넘어질 뻔했다.그 틈새를 바라보는 신유리의 얼굴에 냉기가 감돌았다. 신기철이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긴 계단에서 굳이 이쪽으로 데려온 것은 분명 의도적이었다.사람들은 오가면서 모두 이 틈새를 피했다. 신기철은 갑자기 신유리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약간 불안해졌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며 서준혁을 바라보더니 낮게 기침하고 말했다. “서 대표님, 정말 우연이군요. 유리를 데리러 왔습니다.”사실 그의 말은 다소 억지스러워 얼굴의 엄숙함마저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전에 서준혁을 자신의 사위라고 착각한 것은 단지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는 서준혁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그리고 신유리 때문에 서준혁에게 실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신기철은 분노가 가득 담긴 채 명령하듯 신유리에게 말했다.“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게 하지 마렴. 네가 만약 그 아이를 기어이 낳으려 한다면 난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신유리는 그 말을 들으며 눈에 비웃음이 차올랐다. 신기철의 이런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그녀를 어이없게 했다. 그는 10년 이나 그녀를 돌보지 않았으면서 그녀의 아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하다니?신유리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고 그녀는 정말 신기철의 파렴치함에 화가 났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비웃는 듯 신기철에게 반문했다. “당신은 나를 10년 넘게 방치했으면서, 이제 와서 내 아이의 할아버지가 되겠다고?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요?”신기철은 그녀의 반항적인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신유리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지만 서준혁은 재빨리 팔을 뻗어 신유리
하늘이 어둑해지자 송지음은 차에서 내렸고 차에는 아직도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남아있었다.신연은 다소 불쾌한 눈빛으로 티슈 박스에서 소독 티슈 한 장을 꺼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았다.모든 손가락을 닦은 후 그는 무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그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다시 차에 오르지 않고 롤스로이스 옆에 기대어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고 있었다. 100번째 수자를 세었을 때 핸드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신연은 전혀 의외가 아니라는 듯 몰라지 않고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여섯 시였다. 벨 소리가 세 번 울린 후 신연은 느릿느릿 전화를 받았고 전화 너머로 신기철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번 달 돈은 왜 아직 안 보냈어? 신연, 너 내가 너희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태씨 가문에 말하면, 태씨 가문의 아가씨께서 너 같은 잡종이랑 계속 만나려고 할 것 같아?”신연은 그의 욕설을 듣고도 눈빛에 일말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 겨우 신기철이 말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왜? 당신의 소중한 딸한테서 돈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나 같은 잡종에게 돈을 요구하는 거야?”신기철은 잠시 멈추더니, 더욱 거칠고 저속한 욕설을 퍼부었다. 신연은 차 문을 열고 핸드폰을 차 안에 던졌다. 그러고 나서 차 문을 잠그고 여전히 바깥에서 라이터를 가지고 놀았다. 이 라이터는 그가 금방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태지연이 준 것이다.신유리와 주언은 회의장을 떠난 후 그녀는 다시 주언에게 밀크티를 돌려주며 말했다. “임산부는 밀크티를 마시면 안 돼요, 그래도 고마워요.”주언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럼 내일 텀블러를 사 올까요?”“꼭 무언가를 사줄 필요는 없어요.”그녀는 주언이 텀블러를 안고 그녀를 데리러 오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날 밤 바쁜 업무로 주언과 함께 저녁을 먹지 못했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신의 전화를 받았다.신유리는 마침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너 정말 때맞
할아버지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고 신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급하지 않아요. 검사하러 가실 때 같이 갈게요.”“그냥 작은 검사일 뿐이니 괜찮아.”어르신은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경고하는 눈빛으로 서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 나를 덜 화나게 하는 게 최고지.”신유리는 할아버지가 말하는 기운이 넘치고 얼굴색도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쳐다보았다. 그의 어깨에는 아직도 물 자국이 선명했고 눈꼬리는 아래로 처져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신유리는 갑자기 오다 보니 주최 측에 휴가를 내지 않았다. 게다가 마무리 단계가 다가올수록 정리해야 할 내용이 많아져 할아버지에게 큰 문제가 없는 것을 보고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할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 했지만 신유리는 고개를 흔들며 회의장으로 돌아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고 마침 류 사부님이 옆에서 약을 먹을 시간을 일깨워주었다. 신유리는 저녁에 와서 함께 식사하겠다고 약속했다. 요 며칠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아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신유리는 짐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방에서 나오는 순간, 서준혁이 따라 나왔다. 그의 손에는 외투가 들려있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데려다줄게. 마침 홍연시와 미래의 일에 대해 할 말이 있어.”신유리는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며 거절하지 않았다. 서준혁은 옷을 갈아입고 신유리를 데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이석민 차를 운전했고 그들은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행인들은 모두 겨울옷을 입고 있었고 신유리는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말이 뭔데?”“어젯밤 진규성이 보낸 파일에 따르면 이신은 임시로 일부 디자인을 수정했어. 비용 예산이 다시 초과될 거야.”서준혁은 눈을 내리깐 채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명세서
송지음은 한세형의 옆에 서서 달달한 시럽 같은 목소리로 일부로 신유리에게 들려주려는 듯 높은 소리로 말했다.그걸 들은 한세형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가서 통보해, 아니면 유시오더러 통보하라고 하던지.”송지음은 한세형의 대답에 표정이 확 밝아지더니 신유리가 당황해하고 실망한 모습을 보려고 한껏 잘난 체 하며 신유리가 있는 방향을 슥 쳐다보았다.하지만 송지음이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신유리가 이미 자리를 떠난 버린 후였다.송지음이 한세형에게 묻는 그 순간부터 더는 이곳에 있기가 싫었던 신유리는 상황을 보아하니 한세형에게 더 볼일이 없을 것 같아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장수영은 송지음에 대한 불만이 들끓어 올랐고 입이 삐죽 나와서는 말했다.“장은광 씨 정말 너무 바보 같지 않아요? 저런 불여시 같은 여자랑 만나고. 그리고 저 한세형이라는 사람도 딱 보니까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신유리는 장수영의 말에 대꾸해주지 않았고 곧 몸을 돌려 오혁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오늘은 부선생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요즘 마무리 작업 때문에 전문가선생님 몇 분을 불러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나하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신유리는 꽤나 알고 있었기에 오늘 부선생을 찾아가 얘기를 좀 나누고 싶었다.오후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송지음은 계속해서 시비를 걸어왔지만 신유리는 항상 기복 없는 단호한 태도로 그녀를 방어했다.거의 끝이 날 때쯤이 돼서야 송지음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는 몸을 일으키며 한세형에게 낮은 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 신유리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신유리 씨, 한가지 안타까운 소식 하나 전해드리죠. 저희 회사에서 상의한 결과 버닝스타는 이번 입찰회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어요.”그녀는 서류 하나를 책상에 툭 던지며 말을 이어갔다.“준비하신 서류 다 챙겨서 돌아가세요, 여기 놓으면 방해되니까.”마침 회의도 끝이 났고 모든 사람은 다 제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신유리를 민망하게 만
빠르게 대화주제를 바꾸는 서준혁 때문에 신유리는 뭐부터 말해야할지 몰라 조금 멈칫거리며 입을 열었다.“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돼요.”신유리는 전에 가난했던 시절이 있던 터라 근검절약 정신은 이미 몸에 베여있었다.그녀의 말에 서준혁은 피식 의도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고 호텔로 돌아가서는 도시락을 신유리가 아닌 이석민에게 들려주었다.할아버지는 별로 음식을 드시지는 않았지만 온 저녁 기분이 좋으신지 내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나이가 있으신 탓인지 8시도 되지 않았지만 슬슬 졸려했고 신유리는 유씨 아저씨더러 얼른 할아버지를 모시고 호텔로 돌아가라는 말을 했다.할아버지는 서준혁과 신유리를 번갈아보며 뭔가 할 말이 있어보였는데 그 모습에 신유리는 할아버지를 달래듯 입을 뗐다.“저랑 준혁 씨는 따로 할 말이 있어서요.”그들은 호텔 2층에서 함께 밥을 먹었고 할아버지 방은 마침 딱 위층에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면 되는 간단한 동선이라 안전에 관한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보였다.신유리가 말한 서준혁과 나눌 얘기는 바로 입찰회에 관한 말이었다.버닝스타와 화인은 한곳에 묶여있는 터라 만약 버닝스타가 철저히 거절당한다면 화인그룹 또한 별 희망이 없게 된다.“나하진 씨 구체적인 입국 시간이랑 날자 알고계세요?”신유리는 단도직입적으로 서준혁에게 물었다.“말로는 다음 달 초쯤이랍니다.”서준혁의 말에 시간을 계산해본 신유리는 다음달초가 되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신유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나는지 서준혁에게 물었다.“제가 오늘 부 선생님이랑 장수영 씨한테 물어봤는데 나하진 씨 대하기가 되게 힘들다던데요, 서준혁 씨 생각에는 나하진 씨가 한세형 씨 쪽을 믿을 것 같나요 아니면 저희를 믿을 것 같나요?”신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서준혁과 자신을 같은 팀이라고 단정 지었다는 일을 자기가 말하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서준혁은 생각에 빠진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손끝으로 책상을 툭툭 쳐대다가 담담한 말
연우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또렷하게 들려왔고 신유리는 베란다로 향해 바깥의 야경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이 일도 참 오래 끌었어, 이제야 겨우 끝을 향해 달리네.”신유리를 대신해 이연지와 주국병의 일을 오랫동안 쫓아왔던 연우진이기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했다.갔다 왔다만 수백번 반복한 끝에 이젠 결과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신유리는 연우진의 말에 크게 흥분하지 않고 차분한 모습이었는데 눈에는 많은 감정들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이연지가 증인을 하고 증거를 대는 일은 아주 좋은 시작이었다.그러나 신유리의 가슴깊이 자리 잡고 있는 그 무거운 돌덩이는 최종결과를 얻기전까지 내려놓지 못할 것 같았다.연우진은 아무리 기다려도 신유리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그래도 많이 발전하고 있어, 천천히 시작을 떼고 진보해나가면 금방 해결 될 거야.”“응, 그렇겠지?”신유리는 그의 위로에 짧은 대답을 해주었고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는데 연우진은 행여 쉬고 있는 신유리에게 방해가 될까 얼마 가지 않아 전화를 끊어버렸다.신유리는 방으로 돌아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였다.[그래, 조금이나마 진전이 있으면 그걸로 됐어.][그래도 이번엔 진도도 꽤 많이 나갔네.]다음날 아침 신유리는 바로 이신에게 전화를 걸어 미래그룹의 일을 말해줬고 이신은 빠르게 수락하며 저녁에 재료들을 가져다주겠다고 대답했다.“언제 성남에 돌아오려고?”업무에 관한 말들을 마치고 이신은 또 다시 이 물음을 제기했다.보아하니 연우진은 이미 이신에게 발생한 일들을 다 알려준 것 같았다.“때가 되면 그쪽에서 나한테 연락 하겠지.”신유리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신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송지음이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지금 돌아가도 별 소용이 없다고 느꼈다.요즘 많은 일들이 한데 뒤엉켰고 신유리는 사람인지라 조금 힘들고 고단해졌다.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신유리는 이신에게
태송백은 신연을 향해 내리치려 했다.태지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신연을 밀어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태송백은 태지연을 보더니 급하게 행동을 멈췄다.그러나 이미 큰 힘을 실은 탓에 갑자기 멈추려 해도 늦었다. 그는 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결국 태지연의 어깨에 맞았다.뼈가 부딪히는 고통에 태지연은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에 그녀는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옆으로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혔다. 곧이어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신연이 반응했을 때 태지연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쥐 죽은 듯 고요한 방 안에는 태지연의 신음소리만 울려 퍼졌다.“아파...”신연의 눈에는 깊고 검은 파도가 일었다. 그는 태지연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성한빈, 당장 구급차 불러! 지금 당장!”그는 태지연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신연은 이내 고개를 들어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태송백을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태송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히 다가왔다.“태지연... 지연아...”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까의 광기 어린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진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태지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태송백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오빠... 내 말부터 들어줄래?”태송백은 숨을 죽이며 말했다.“그래, 네 말 들을게. 오빠가 나빴어. 오빠가 미안해... 지연아,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오빠는 항상 나를 제일 아껴줬잖아.”태지연은 여전히 고통에 시달린 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낮게 말했다.“오빠, 난 신연 편을 들고 싶은 게 아니었어. 그저 엄마 아빠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 가족이 다시
태송백은 한층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신연을 노려봤다. 한참 후에야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었다.“뒤에서 숨고만 있다가 부하들만 짖게 놔두더니 이제야 직접 나선 거냐? 나한테 기회를 준다고? 신연, 너 진짜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구나?”태송백은 태지연을 흘겨보며 비웃음을 흘렸다.“너 내 동생을 완전히 속였잖아. 지금도 태지연이 여기까지 와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고.”태송백의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게 태지연의 가슴에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오빠, 제발 진정 좀 해요.”“태지연, 넌 입 다물어. 계속해서 그 새끼 편을 들면 넌 더 이상 내 여동생도 태씨 가문의 딸도 아니야!”태송백은 격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우리 태씨 가문이 이 꼴이 된 건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아버지께서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데다 나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숨어 다녀야 하지.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알기나 해? 모든 게 다 저 새끼 때문이라고.”“엄마는 창녀에 아빠는 손님이고. 참, 너도 신유리 알지? 걘 얼마나 똑똑한지 저 새끼랑 상종도 안 해. 너 혼자 보물인 양 여기고 있는 거야.”태송백은 쌓여 있던 울분을 쏟아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이미 단순히 말로 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닌 자존심 문제였다.그는 반드시 신연에게 자신이 당한 굴욕을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했다.태송백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설을 내뱉었다.“태지연, 넌 더럽지 않냐?”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제자리 굳어버린 채 태송백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오빠, 그만해요... 제발 그만 말하세요.”그녀는 차마 신연을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이 바싹 말라오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신연 앞을 막아서며 무시해 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마치 나무 말뚝에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태송백의 독설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악의 어린 말들이 허공에 울려 퍼지
성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도련님께서 문이 열릴 때마다... 전에 우리 쪽 사람들이 다친 적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신연은 바닥에 부서진 유리 조각들을 흘겨보더니 무표정으로 말했다.“아직도 부술 게 남아있어?”성한빈은 순간 안색이 굳어졌다.태지연은 그들의 대화를 신경 쓰지도 못한 채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오빠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신연은 눈을 내리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약속하듯 말했다.“아무것도 안 할게. 믿어줘, 응?”“아직 불안정할 텐데. 너희 둘만 남겨둘 수 없어.”“걱정 마.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그래도 내 오빠잖아. 어렸을 때부터 나를 가장 아껴주던 사람이야.”태지연은 신연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물건을 너한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이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고 있어.”“우리도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예전처럼 되지 못하더라도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태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지친 듯했다.“연아, 나 정말 너무 힘들어.”신연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지나서야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한번 얘기해 봐.”태지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신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근데 나가진 않을 거야. 보다시피 최근 태송백 상태가 불안정해. 단둘이 두는 건 불안해서 안 되겠어. 여기서 기다릴게.”현관에서는 안쪽 상황을 볼 수 없었다.그녀는 신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안쪽은 더 엉망이었다. 바닥에는 온갖 유리 파편들과 장식품들이 흩어져 있었다.태송백은 원래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인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녀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거실까지 다가갔다. 순간 태송백의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나가라고
다음 날 아침, 신연은 평소처럼 아침을 준비해 두었다.테이블 위에는 더 이상 초콜릿케이크가 보이지 않았고 신연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했다.그는 우유 한 잔을 따라 식탁 위에 놓더니 입을 열었다.“얼른 씻고 아침 먹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서 점심에 못 올 거야. 점심은 호텔에서 보내줄 거야.”태지연은 순간 마음이 움찔하며 신연에게 물었다.“회사? 아니면 어디?”신연은 동작을 멈추더니 속눈썹을 내리깐 채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응, 회사.”“연아.”태지연은 의자 등받이를 꽉 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어젯밤 한 말은 전부 진심이야. 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절대 용서 못 해.”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라앉았고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신연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지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만약 네가 오빠를 건드리면 나중에 내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조금 이기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어젯밤에 들은 말로만 신연이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태도를 봐서는 만약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태송백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태지연은 손에 힘을 풀더니 힘겹게 신연 곁으로 다가갔다.“연아,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찾아줄게.”순간 신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목젖을 울렁이며 태지연을 내려다보았다.“내가 물건을 찾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태지연은 잠시 멈췄다가 대답했다.“오빠가 말했어. 자기 손에 너한테 아주 중요한 게 있다고. 연아... 내가 찾아줄게. 내 오빠잖아, 내가 말해볼게.”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다소 잠겨 있었다.순간 머릿속이 약간 혼란스러워졌다.신연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태지연은 말을 마치고 신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신연은 눈을 내리깐 채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일으켜 세웠다.“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어. 얼른 먹어봐.”태지연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신연을 쳐다보며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되레 단단히 잡혔다.신연은 식탁 앞으로 가서 조심스레 케이크 상자를 열고는 라즈베리 초콜릿케이크를 꺼냈다.태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가게의 케이크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신연한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고 조르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녀는 가장 즐겨 먹던 케이크를 보면서도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그녀는 태송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오빠가...”그러나 신연이 바로 말을 끊어버렸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 또 둘째를 낳았대. 너도 기억하더라. 시간 되면 한번 들르라고 하길래 내가 대신 대답했어.”“신연...”“맛 좀 봐.”신연은 케이크를 그녀 앞에 건네며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태지연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지금 먹고 싶지 않아. 연아, 다시는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줘. 네가 오빠를 데려갔어?”태지연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흘렀다.신연은 그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이것뿐이야?”태지연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뱉어냈다. “대답해.”신연은 말했다. “일단 케이크부터 먹어봐.”태지연은 움직이지 않고 애써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녀는 이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순간 가족과 신연 사이에서 고민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연과 가족이 서로 평화롭게 지내길 바랐다.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토록 바라던 작은 소망이 애초에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깨달았다.신연과 태씨 가문은 이미 끊어진 실처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사이였다.모두가 이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직 그녀만이 되돌릴 수 있다는
태은정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연아, 신연이 송백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알고 있어?”태지연은 잠시 멍해 있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언니, 왜 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조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마치 사람들이 모든 걸 나에게 털어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태지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유일하게 그녀뿐이었는데 말이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태은정은 멈칫하더니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태지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갑자기 반응하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말했다.“그래.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미안해. 지연아, 내가 너무 급했나 봐.”태은정은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썹을 만지작거렸는데 이는 태은정이 곤란할 때 나오는 작은 습관이었다.태지연은 고개를 저었다.“방금 신연이 오빠를 데려갔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태은정은 지금도 상황이 엉망진창이라고 느꼈다. 태송백은 이미 이틀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고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다.전혜린과 태성민은 신연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태지연과도 연락이 닿지 않다 보니 한편으로는 부모님을 달래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송백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려야 했다.게다가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었다.태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그럼 신연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는 알아?”태지연은 대답했다.“대부분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회사에 있을 거야.”그녀는 잠시 멈춘 후 덧붙였다.“근데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보통 자세한 건 나한테 말하지 않
태지연은 마땅한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신연은 그녀에 대해 잘 알다 못해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였다.태지연은 눈물을 흘리며 처량한 모습으로 바라봤다.“왜겠어? 연아, 네가 생각해 봐.”“우리 아빠는 지금 병원에 있고 엄마랑 오빠는 널 원수처럼 대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건데?”“누굴 탓해야 할까? 내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있어? 나도 모르겠어.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어버렸는지...”다들 그녀가 당연히 자신의 편에 서야 할 뿐만아니라 자신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의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었다.태지연은 바닥에 다리를 웅크리고 앉은 채 서로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녀의 가족을 해치려는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그녀를 아껴주던 부모와 오빠조차 이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다.모두 그녀를 속이면서 정작 그녀한테는 진심을 다하라고 요구했다.태지연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쉬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내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일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야?”“날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 날 속이는데 왜 난 그걸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야? 난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진실만을 원할 뿐이야. 그게 다야.”“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해줄 수 없는 거야?”“왜? 내가 바보 같아?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왜 너희는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머리를 무릎에 묻은 채 어깨가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진실이 그녀 앞에 명백히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태지연이 절망에 빠진 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도 계속해서 속이려고만 했다.무언의 눈물에서 작게 흐느끼다 마지막에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태지연은 자신이 고집하는 게 과연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입술이 터져 피비린내가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신연은 그녀의
신연은 언제나 태지연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그의 눈빛은 차분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하지만 태지연은 마치 약점을 찔린 듯 몸이 굳어버린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신연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지나치게 평온한 시선이 되레 태지연의 마음을 한껏 졸여왔다.“왜?”신연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연아, 너도 그 계약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거지?”“착하지, 그만 돌려줘.”신연은 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하게 말했다. “너한테 있는 거 알아.”“...없어.”태지연은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계약서라니, 난 모르는 일이야.”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제야 의지와는 다르게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을 진정시켰다.그녀는 오빠가 신연을 해치지 않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신연이 오빠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태지연은 누구에게도 그 계약서를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며 모든 생각을 숨기려 했다.신연은 한참 그녀를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나 거짓말하는 거 제일 싫어해.”태지연은 순간 몸이 굳었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 “나 아니야...”“정말이야?”신연이 다시 물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응.””그럼 이게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어?”신연은 말을 마치고 서랍에서 약병과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전에 침대 옆 서랍에 숨겨둔 비타민 약병과 피임약이었다.최근에 산 피임약을 아직 비타민 약병에 넣을 시간이 없었다. 태송백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깜빡 잊고 있었다.신연은 순간적으로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연아, 말해 봐. 집에 왜 이런 약이 있는 거야?”그녀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신연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잠긴 목소리로 변명했
태지연은 눈앞이 흐려진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직 신연만이 떠올랐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가정에서 자랐을까? 신연이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던 그의 가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더군다나 신기철이 진정 신연에게 미안하다면 왜 그에게 한 번도 어떤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모두가 신연이 차갑다고 말했지만 태지연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연은 단지 그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신을 지켜준 소년만이 아니었다. 사실 그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그녀는 고등학교 뒤편 작은 정원에 항상 떠돌이 고양이들이 많았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신연이 작은 난간에 기댄 채 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나누어주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항상 신연 주위에 모여서는 그의 다리를 비볐다.그는 분명 귀찮아하는 표정이 있었지만 고양이들을 밀어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새끼 고양이가 그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도 허락했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리한 법이다. 그들은 항상 신연을 잘 따랐다.그런 신연의 모습이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애써 억눌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사랑했던 신연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었다....갑자기 손목이 세차게 잡히며 태지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제야 눈앞의 상황이 서서히 선명해지며 뒤에서 태은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야?”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까지 와 있었다. 방금 태은정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환자를 밀고 지나가던 간호사랑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태은정은 그녀를 흘겨보더니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데려갔다.차에 타고 나서야 태지연은 정신을 차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고마워.”“고맙긴. 내가 네 언니인데.”태은정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