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표정에 씁쓸함이 많이 드러났고 신유리를 한참 잡고 있었지만 도통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했다.신유리는 할아버지의 실망한 모습에 가슴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꽉 막혀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채리연은 두 사람의 모습에 얼른 가서 할아버지를 부축해주며 신유리에게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먼저 말을 했다.“나 먼저 할아버지 모시고 집에 갈게, 너도-”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유리는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네, 몸 잘 챙길게요.”채리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려고 하였다.신유리는 앞으로 다가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지만 할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며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그녀는 지금 도대체 어떻게 할아버지를 마주해야 할지 몰랐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 순간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신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짧은 시간동안 주름이 깊어졌고 얼굴도 많이 늙은 것 같았다.그의 시선은 신유리의 배로 향하다가 얼굴로 멈췄고 마음이 복잡한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너 반응도 그렇게 심한데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구나, 내가 데려다주마.”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신유리의 가슴은 더 답답해져왔고 코끝이 찡해졌다.신유리가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할아버지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했다.“이 일은 나한테 좀 센 충격이구나, 유리야 나한테 시간을 좀 주렴. 하지만 지금 너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 할애비가 너를 못 챙길 만큼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단다.”신유리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안 할아버지가 실망하고 그 때문에 사이가 소원해진다고 예상을 했지만 절대 이런 반응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갈팡질팡 했다.채리연도 아까의 놀란 표정을 잠시 거두고는 얼른 신유리에게 말했다.“할아버지께서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더 이상 거절하지마, 어차피 가는 길이 같잖니.”가는 길 내내 세 사람은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신유리가
서준혁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갔고 생각이 많은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신유리씨가 직접 알려줬습니까?”“병원 가서 검사해봤다.”할아버지는 땅에 지팡이를 탁 내려놓으며 대답을 이어나갔다.“유리가 너한텐 알리고 싶지 않아 하더구나, 너 이 못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사람 속 타게 하는 덴 일등이구나.”“유리가 너한테서 도망까지 갔고 이제 다 원하는 대로 됐냐? 어?”서준혁은 자신을 쉬지 않고 욕하는 할아버지를 아무 표정 없이 쳐다보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화가 나 마구 소리쳤다.“내 말 듣고는 있냐!”할아버지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서준혁을 경고하듯 말했다.“내가 유리를 예뻐하는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너희 둘 사이가 멀어진다 해도 나는 유리를 손녀라고 생각할거란다. 그러니까 너도 이젠 내 손녀 적당히 건드려!”할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버렸고 옆에 있던 유씨 아저씨는 그런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따라나섰다.서준혁은 그가 떠나는 모습에 그제야 반응이 온 건지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떠나가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는 있지만 서류를 정리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사무실 안의 공기는 개미 한 마리도 없는 듯 조용했고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려왔다.한참이 지나고 서준혁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원래 자리에 놓고는 의자에 앉지 않고 가만히 서서 할아버지가 했던 말들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신유리가 임신이라...]그는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서있었고 이석민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야 잔뜩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슬며시 폈다.“서대표님.”이석민의 부름에 서준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고 이석민은 해야 할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서대표님, 10분후에 회의 하나가 더 있습니다. 아까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시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회의 먼저 미룰까요?”“점심 휴식시간 다 취소합시다, 모든 회의 싹 앞으로 옮기고요.”서준혁은 침묵을
조명도 없는 어두컴컴한 곳에 앉아있는 서준혁의 앞에는 손도 대지 않은 새것 그대로의 술병이 놓아져있었다.그러나 상위에 있는 재떨이에는 많은 양의 담배꽁초가 버려져있었고 서준혁이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업계에서는 소문이 자자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우서진은 재떨이를 발견하고는 쯧하는 소리와 함께 그에게 말을 걸었다.“말해봐, 내가 들어줄게.”서준혁은 우서진의 말에 고개를 들어 힐끔 그를 쳐다볼 뿐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손에는 타들어가는 담배 한 대가 쥐어져있었다.우서진은 대답을 하지도 않는 서준혁의 모습에 캐묻지 않고 자신에게 술을 따르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그래, 말하지 마라. 그럼 내가 재밌는 거 하나 말해줄게.”“부성시에 곽준해 알지? 걔 와이프가 50이 넘은 할아버지랑 바람이 났는데 글쎄 그렇게 아끼던 아들도 결국은 그 할아버지 아들이었대.”우서진은 목이 말랐는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재밌는 이야기라도 해주듯 말을 이어갔다.“결국 곽준해가 알았는데 와이프랑 이혼도 안하고 그 짐승 같은 새끼도 친아들처럼 대해줬대. 그리고 며칠 전에 혈액검사 결과가 나와서 다 밝혀졌고 지금 너무 쪽팔려서 미칠 지경이라나 뭐라나.”그는 말을 하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풉 하고 웃고는 하려던 말들을 덧붙였다.“이거는 X발 바람이 문제가 아니지.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야. 짐승 새끼 하나보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더럽지 않냐?”“남자의 자존심?”맞은편의 서준혁이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어 물었고 그는 우서진을 공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어두운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서진은 지금 그의 기분이 최악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야? 어떤 사나이가 남의 자식을 키우고 싶어 하는데?”우서진은 술을 서준혁의 술잔에 따라주고 있었는데 그가 미처 발견 못한 점은 서준혁이 자신의 말을 듣는 순간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것이다.“근데 요즘 부산 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더라? 신연씨 동작이 너무 빨라서 태씨 가문
신유리는 문에 등을 기댄 모습으로 서있었고 남자가 말할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호흡은 고스란히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서준혁은 차가운 냉기만 뿜으며 그녀를 바라 보았고 신유리는 더 이상 물러날 곳조차 없다는 착각마저 들었다.사무실 안에도, 회사 복도 내에도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기에 공기는 조용하다 못해 서로의 심장 소리도 들려올 것 같았고 신유리는 자신의 배 위에 놓인 서준혁의 손의 온도가 미세하게 높아지고 있다고 느꼈다.원래 마른 몸매를 유지하는 신유리는 허리마저 얇기에 서준혁의 큰 손이 그녀를 감싸자 신유리의 몸매를 더욱 받쳐주었다.“신유리 씨.”서준혁은 목소리를 가라앉히고는 말을 이었다.“저를 속이시는 겁니까?”단호한 목소리를 하고 신유리를 뚫어져라 보는 서준혁은 마치 모든 것을 다 간파한 듯이 말했고 신유리는 조금 긴장하였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는 담담하게 물었다.“제가 다른 남자랑 자는 것을 직접 보셔야만 믿으시겠어요?”서준혁은 그녀의 물음에 배에 올려놓고 있던 손을 스르륵 풀어 허리를 감싸 쥐고는 잔뜩 힘을 주어 꽉 끌어당겼다.그리고는 호흡이 조금 무거워진 모습으로 신유리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보더니 되물었다.“말을 꼭 이렇게 듣기 거북하게 해야겠습니까?”신유리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깨끗한 눈빛으로 서준혁을 노려보고는 대답했다.“제가 좋게 말할 때 언제 한번 잘 들어주셨나요?”말을 하는 신유리의 얼굴에는 이상함 하나도 없이 당당한 모습이었고 서준혁은 눈동자가 떨리더니 표정은 짜증이 난 듯 잔뜩 일그러졌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서준혁의 손에 힘은 점점 더 거세졌고 신유리는 조금씩 허리춤이 아파왔다.“이거 놓으세요.”그녀는 참다못해 작은 소리로 말을 했고 서준혁은 신유리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냉정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한자 한자 똑똑히 중얼거렸다.“신유리 씨,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 좋습니다.”서준혁의 힘 때문에 자신의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에 휩싸인 신유리는 젖 먹던 힘까지
진실한 마음과 더불어, 여위고 희게 질린 얼굴은 그녀로 하여금 더 가련해 보이게 만들었다.하지만 그녀를 보는 서준혁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의 미간에는 사람을 거부하는 듯한 냉담함이 서려 있었다.송지음이 입술을 깨물었다. 움직이지 않는 서준혁을 보며, 그녀는 직접 핸드폰을 열 수밖에 없었다.“봐봐, 거짓말이 아니야. 신유리가 김명우를 자발적으로 만났어. 김명우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무슨 음모를 꾸미지 않는 한 만날 리가 있겠어? 김명우가 돌아온 후에, 다른 사람한테 들었는데, 신유리가 화인 그룹에 복수하려고 한대.”송지음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붉어진 눈동자로 서준혁을 바라보았다.“나도 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나도 이전에 화인 그룹 소속이었고, 나도 화인 그룹이 잘되기를 바라.”그녀는 충분히 진정성 있게 연기했지만, 서준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의 관심은 오로지 송지음의 핸드폰에만 집중되었다.사진 속에서 신유리와 김명우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중간에는 무엇인가 놓여있었는데, 보아하니 아주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비록 옆모습만 몰래 찍은 사진이었지만, 신유리와 김명우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서준혁의 눈가가 어두워졌다. 아무런 흔들림 없는 자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서준혁의 반응을 기다리는 송지음은 가슴이 두근거렸다.솔직히 얘기하면, 세진 그룹에 있는 나날들이 너무 괴로웠다.특히, 김명우의 핸드폰에서 그가 다른 여자들과도 희희낙락하는 대화를 본 이후로 더 그랬다. 대화 내용은 김명우가 이전에 그녀에게 했던 방식과 똑같았다.송지음은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들어 서준혁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김명우는 서준혁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능력에서든, 외모에서든 서준혁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하물며, 송지음의 집 안에서는 아직 서준혁과 헤어진 사실을 몰라 여전히 서준혁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 했다.서준혁과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에 위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송지음은 본인이 세진
벌써 한 낮이 다 돼가고 있었다. 가을볕이 내리쬐는 게 굉장히 편했다. 하지만 신유리는 마음속에 있는 불편함을 참으며 서준혁에게 되물었다.“뭘 의심하는데? 송지음이 그래? 내가 자발적으로 김명우를 만나서 화인 그룹에 복수하고 싶어 했다고?”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경멸하는 말투로 말했다.“걔는 여전히 멍청하네.”또한 신유리는 상대를 바꿔 비꼬았다.“당신도 피차일반인 것 같고.”말을 마친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심유리는 호르몬과 내분비 문제로 임신 기간 내내 몸이 좋지 않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평소 업무를 할 때에는 그래도 정신을 다잡으며 본인의 감정을 통제했다.하지만 서준혁의 말을 듣자,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걷잡을 수 없이 짜증이 났다.신유리가 별장으로 돌아오자 마침 점심시간이었다.별장에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대충 점심을 때우고 업무에 집중했다.강모연과의 계약은 마지막 단계만 남아있었다. 이것만 끝나면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신유리는 오늘 오후 내로 계약서를 훑어보고 끝내고 싶었다. 업무에 집중하자 시간개념이 없어진 그녀는 일을 끝내고 나서야 밖이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누군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이신이 손에 따듯한 물 한 컵을 들고 들어섰다.“다 끝냈어? 얼른 와서 밥 먹어.”말을 마친 이신이 컵을 신유리에게 건넸다.“밖에 또 비와, 얼른 따듯한 물부터 마셔.”물을 건네받은 신유리는 목을 축였다. 따듯한 물이 넘어가자 많이 편해졌다.신유리는 손에 컵을 든 채 이신과 나섰다. 이신이 그녀에게 물었다.“오전에 임아중이랑 병원에 다녀왔어?”“응, 이현 언니가 뭐가 좀 필요하다고 해서.”답을 하고 나서야 신유리는 이상함을 알아챘다.“어떻게 알았어?”“오후에 전화 왔어.”말을 마친 이신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신유리를 쳐다보았다.오후에 이신에게 전화한 이현은 다짜고짜 신유리가 임신한 사실을 캐묻기 시작했다. 이현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
서창범은 잔뜩 화가 나 있었지만 서준혁은 되려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대답하고 그만 전화를 끊어버렸다.“알겠어요.”어르신께서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네 아버니냐?”서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르신은 콧방귀를 끼더니 입을 열었다.“센 척 하기는, 벌써 내가 죽은 줄 안다느냐?”서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어르신과 함께 식사를 끝까지 했다.어르신께서는 식사를 마친 후 곧장 방으로 향했다. 다만 그의 곁을 지날 때 걸음을 멈칫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예전부터 일만 하다 보니 네 아버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똑똑하지 못한 양반이야, 절대 닮아서는 안 된다.”서준혁의 새까만 눈동자는 더욱 깊어졌고 혹시라도 들킬까 봐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서창범은 전화를 걸어와 잊지 말고 오라고 일깨워주었다.서준혁은 아무런 심경의 변화도 없이 덤덤하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핸드폰 화면을 아래로 스크롤 하더니 신유리의 번호에 시선을 고정했다.사실 서준혁의 개인 핸드폰에는 가족의 번호를 별로 저장하지 않는 편이었다.가까운 사람의 번호는 머릿속에 기억하고 연락처에 저장하지는 않았다.이 모든 것은 서창범이 어릴 때부터 그한테 요구했던 습관이었다.서창범이 처음 서씨 가문의 기업을 인수한 몇 년 동안 시시각각 주변 사람들을 경계하는 바람에 서준혁도 다소 그를 닮아갔다.반면 신유리의 번호는 기억한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손끝이 그 일련의 번호에 멈췄을 때 서준혁의 미간은 움찔거리더니 이내 다시 풀렸다.다만 다시 고개를 들자 그의 눈동자는 다시 밝아졌다.그는 차를 운전하여 화인 그룹으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서창범한테로 돌아갔다.문에 들어서자 하정숙과 서창범은 마침 아침을 먹고 있었다.아침 식사 분위기는 조용했다. 하정숙은 잡지를 읽고 있었고 서창범은 신문을 읽었다. 마치 낯선 사람이 아무렇게나 합석한 것처럼 썰렁했다.서준혁은 차갑게 그들을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서창범에게 돌
“왜?”신유리는 물었다.“부산시에서 진행하는 정상회의가 올해 앞당겨졌어. 바로 다음 주인데 그쪽에도 배울 기회가 많아, 거기 가면 좋을 것 같아.”이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게다가 이랑이 가버려서 작업실에 당분간 마땅한 사람이 없다 보니 네가 갈 수밖에 없어.”이 정상회담에 대해 이신은 전부터 여러 번 말했었고 신유리도 가고 싶어 했지만 이연지의 일 때문에 계속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지금 다시 그 회의에 대한 말이 나오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 내가 갈게.”어쨌든 이연지의 일은 당분간 결과가 없을 것 같았다.이신은 그녀의 진지한 모습을 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그냥 평범한 교류회야, 너의 현재 능력으로 충분히 할 수 있어.”“그러니까. 유리야, 부탁인데 좀 쉬면서 하자.”임아중은 소파에 앉아 게임을 하며 아무런 표정도 없이 말했다. “너 왜 이토록 필사적으로 하는 거야? 나처럼 빈둥빈둥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곡연은 덤덤하게 한 마디를 뱉었다.“유리 언니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넌 언니랑 만날 수 없었겠지.”사실이었다.비록 임아중 같은 재벌 2세에 비하면 신유리의 가정은 확실히 평범했다. 심지어 하정숙의 눈에는 기초생활수급자와도 마찬가지였다.신유리가 만약 자신의 능력과 의지에 의존하지 않았다면 평생 임아중 같은 사람과 함께 엮일 일이 없었다.사회의 계층이 이처럼 뚜렷하게 나누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신유리는 곡연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녀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채리연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그들은 전부터 오늘에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약속했었다. 그녀는 바로 이신한테 말하고 떠났다.계약서를 거의 한 달 동안 갈고 닦아서야 마침내 쌍방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채리연이 펜을 놓는 그 순간을 지켜보면서 신유리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어.채리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잘 해보죠.”신유리도 미소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