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지금, 이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유승호는 그날 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유진 씨, 제발 받아주세요. 그날 일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런 식으로 무시하고 옆에 계속 세워두는 게 아닌데... 사실은 그 뒤로 줄곧 이렇게 제대로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사죄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몰라 오늘 이렇게 제 나름의 성의를 들고 온 겁니다. 그러니 제발 받아주세요.”유승호는 거의 애원하며 말했다.임유진은 상자 속 물건을 아직 보지 않았지만 딱 봐도 비싼 물건 같았다.“이럴 필요 없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사과의 의미로 이미 장미를 보내지 않으셨어요?”대체 왜 며칠이나 지난 지금 갑자기 또 노란 장미를 보내며 직접 사과까지 하려는 걸까.“그, 그럼 이것 역시 사과의 의미로 받아주세요!”유승호는 한사코 그녀에게 상자를 들이밀었다.오늘 임유진이 이 물건을 받아야만 앞으로의 모든 게 평화로울 것 같았다.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정말 남은 인생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니까.임유진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덜덜 떠는 그의 손을 보며 유승호가 뭔가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니요. 정말 필요 없어요.”하지만 그럼에도 단호하게 거절했다.이에 유승호는 거의 울고 싶어졌다. 솔직히 이렇게 선물을 건네주는 것도 임유진이 처음이었다.“제발요. 만약 받아주지 않으면 여기서 무릎까지 꿇을 겁니다!”“유승호 씨 장난은 이쯤 하세요.”장난이라니... 유승호는 절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그는 사과 한번 하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다.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예 임유진과 엮이지 않을 것이다.왜 하필 강지혁과 강현수가 동시에 좋아하는 여자를 건드렸을까.둘 중 아무나 그날 일을 가지고 문제 삼는다면 유승호는 그날로 죽은 목숨일 것이다.유씨 집안은 그를 지켜주려 하기도 전에 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두 사람이 계속 상자를 받고 말고
“다짜고짜 사람한테 손찌검하는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임유진이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예의? 그쪽이 나한테 예의를 바라면 안 되지. 지금 나한테 바람 현장을 딱 잡혀놓고 지금 누구한테 설교 질이야! 여자친구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감히 승호한테 꼬리를 쳐?”세레나는 씩씩대며 말했다.“저는 당신 남자친구한테 관심 없습니다.”지금, 이 상황이 제일 당황스러운 건 아마 유승호일 것이다. 임유진에게 선물을 건네주면 끝 날 일이 세레나 때문에 꼬이기 시작했다.그는 얼굴만 보고 여자친구를 사귀는 게 아니었다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그만해!”유승호는 정신을 차리고 세레나의 팔을 잡아당겼다.“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유진 씨한테 사과해!”“사과? 유승호 너 미쳤니? 나한테 지금 사과하라고 했어? 이딴 년한테? 대체 둘이 얼마나 많이 붙어먹은 거야?!”세레나는 연예인으로서의 품위나 체면도 없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막말을 해댔다.정한나가 그녀를 부른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격이 더러운 건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유승호는 그녀의 말에 기가 찼다.붙어먹었다니! 그런 일은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된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지금쯤 강지혁과 강현수 손에 죽어 있을 테니까!“그 입 닥쳐!”“내가 왜?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겨서 감히 임자 있는 남자를 건드리고 다녀? 내가 오늘 인터넷에 이 여자 얼굴 다 뿌려버릴 거야! 사람들한테 이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지 다 알려줄 거야!”세레나는 휴대폰을 들고 임유진을 찍으려고 들었다.유승호는 그녀의 행동에 머리가 지끈해졌다. 이대로 일이 커지면 그는 S 시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미쳤어?!”유승호는 세레나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 들고는 바로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세레나는 한번 맞더니 한참 뒤에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지금... 지금 나 때린 거야?”“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알아?!”유승호는 그녀를 향해 큰소리를 냈다.“뭐하긴 남의 남자 꼬신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세레나의 손은 이미 임유진의 등에 닿았고 그녀는 있는 힘껏 임유진을 앞으로 밀었다.임유진이 쓰러질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는 얼마 전 사무실에서 정리하다 남은 낡은 컴퓨터 부품들이 놓여있었다. 그게 한두 개가 아니었던 터라 만약 그쪽에 부딪히게 되면 아마 몸 여러 군데 상처가 생기게 될 것이 분명했다.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임유진의 팔을 잡아당겨 중심을 바로잡게 하더니 바로 세레나의 허리를 발로 차 그녀를 멀리 날려버렸다.이 모든 행동이 단 3초 안에 일어났다.세레나는 벽에 세게 부딪혔다. 그 탓에 벽에 부딪힌 곳과 허리가 알싸하게 아파 왔다.“누가 감히 날...!”세레나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에게 시원하게 욕을 퍼부어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상대의 얼굴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강현수?! 강현수가 왜 여기 있어? 그것도 저 파렴치한 여자를 안고?!’세레나는 아직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현수 씨, 그 여자 조심해요. 남의 남자나 꼬시는 더러운...”하지만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바로 뺨을 맞아버렸다.그녀를 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자친구 유승호였다.유승호는 지금 수명이 몇 년은 짧아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현수 씨, 정말 죄송합니다. 얘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이래요. 오늘 일은 제가 반드시 유진 씨에게 사과하도록 하겠습니다!”유승호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사과? 고작 그딴 거로 해결될 거라 생각하나 보지?”강현수의 싸늘한 한마디에 유승호는 식은땀이 흘렀다.세레나는 멍한 얼굴로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도 지금쯤이면 상황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눈치챘을 것이다.세레나는 그제야 임유진은 유승호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유승호가 아닌 오히려 강현수와 뭔가 있는 것 같았다.“괜찮아요?”강현수는 품에 있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네, 괜찮아요. 고마워요.”임유진은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뒤 품에서 나와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강현수의
“아, 네! 그러세요!”강현수가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차 변호사는 이미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그는 곧바로 두 사람을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러고는 임유진에게 말했다.“여기서 얘기하도록 해요, 유진 씨.”임유진은 이 상황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문이 닫힌 후 회의실 안에는 강현수와 그녀 둘만 남았다.그들을 둘러싼 공기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회의실 밖.정한나와 주변 동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임유진과 유승호의 밀회에서 갑자기 세레나가 등장해 본처의 바람현장 목격 장면이 연출되더니 후반으로 가서는 사실 임유진은 유승호가 아닌 강현수와 뭔가 있었다는 결말로 끝이 났다.강현수가 등장했을 때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물론 정한나만 제외하고 말이다.전에 그녀가 임유진을 괴롭혔을 때도 강현수는 오늘처럼 임유진을 지켜주었다.요즘은 계속 배여진이라는 여자와 스캔들이 많이 뜨는 것을 보고 당연히 임유진에게는 흥미가 떨어졌다고 생각했다.그도 그럴 것이 강현수에게는 항상 여자가 많았고 그 여자들 모두 오래가지는 못했으니까.하지만 오늘 또 한 번 타이밍 좋게 나타나 또다시 임유진을 지켜줄 줄이야...대체 임유진이 뭐길래 강현수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정한나는 강현수를 떠올리다 문득 최근 부교수가 된 자신의 남자친구를 떠올리고는 혀를 찼다.임유진을 조롱하고 모욕하던 직원들은 사실을 확인하고는 마치 짠 듯이 입을 다물고 서로서로 눈치를 보았다.회의실 내부.적막을 깨고 임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하지만 저와 강현수 씨 둘이서 나눌 만한 얘기는 따로 없을 것 같은데 왜 보자고 하신 거죠?”만약 아까 그 상황에서 강현수가 1초라도 더 늦었더라면 임유진은 오늘 몸이 성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굳이 따로 얘기를 나누려는 강현수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강지혁이랑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강현수가 물었다.그날 파티장에서 임유진은 강지혁과 재결합
“더 할 얘기 없으시면 이만 나가볼게요.”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리고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강현수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꼭 그렇게 나한테 선을 그어야겠어?!”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을 유지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많이 감정적으로 변했다.강현수는 지금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다. 자기도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이 온몸을 지배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그저 가만히 눈앞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보고 있자니 어릴 적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오래전 앳된 얼굴의 강현수는 풀숲에서 그를 업고 내려와 잔뜩 지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었다.“이곳을 벗어나면 내가 예쁜 치마를 엄청 많이 사줄게. 그리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게. 그리고 앞으로는 내가 널 지켜줄게! 오직 너만을 지켜줄게!”그때의 임유진은 그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어린애란 원래 자기가 했던 말을 금방 잊어버리니까.하지만 그를 잊어버린 건 그녀였다. 임유진은 의도치 않는 고열로 그와 함께한 모든 추억을 전부 다 잊어버렸다.그 때문에 강현수가 그 뒤로 줄곧 그녀를 계속 찾고 있는 것도 몰랐다. 십몇 년의 세월 동안 그의 그리움은 어느새 집념이 되었고 그건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었다.그리고 그 집념은 현재 배여진에게로 향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그녀가 사랑하는 건 그가 아니었으니까. 만약 모든 걸 다 말해버리면 강현수의 집념은 오롯이 그녀에게로 향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에게 희망 고문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지금 이 순간 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하지만 강현수는 그 눈빛이 마치 어렸을 때의 그 소녀가 바라보는 듯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의 두 눈은 그의 꿈에 자주 등장했었다. 어릴 때 그 소녀가 크면 분명히 이런 눈일 거라고 수천 번은 더 상상했으니까.강현수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
임유진의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고 심지어는 전에 산속에서 우연히 만나 그녀를 업고 산에서 내려갔던 장면을 자주 꿈으로 꿨다.그리고 매번 꿈속에서 임유진을 업을 때마다 그는 마치 그 어린 여자아이를 업은듯했다.“정말 더 이상 강지혁 사랑 안 할거예요?”임유진은 그의 질문에 어딘가 모를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며 옅게 웃었다.“내가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게 당신들한테는 그렇게 중요해요?”강지혁은 강현수를 사랑하지 말라고 하고 강현수는 이제 더는 강지혁을 좋아하지 않는지 묻는다.두 남자는 언제나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묻는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 임유진이 원하는 건 그저 별 탈 없이 무난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뿐이다.임유진의 미소와 목소리는 무수히 많은 비수가 되어 강현수의 심장을 찔렀다....임유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오늘은 너무나도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다.막 단지 앞에 도착했을 때 낯익은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강씨 저택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임유진의 앞으로 걸어왔다.“유진 씨, 대표님께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차량을 바라보았다.최근 강지혁은 보통 기사를 보내거나 아예 집 안에 들어가거나 둘 중 하나였기에 오늘은 조금 의외였다. 임유진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기사를 따라 차량 옆으로 다가갔다.기사가 그녀를 위해 뒷좌석을 문을 열어주자 바로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임유진이 차에 올라탄 후 차량은 천천히 단지를 벗어났다.“어디 가는 거야.”“오늘 갑자기 누나가 해준 요리가 먹고 싶어졌어. 월세방은 너무 작아서 불편하니까 우리 집으로 가.”“내가 한 것보다는 집에 있는 셰프님 요리가 더 맛있을 텐데.”“난 누나가 해준 게 제일 맛있어.”강지혁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전에 좁은 원룸에 있었을 때 임유진은 그에게 자주 요리를 해주었다.요리라고 해도 강지혁이 평소 먹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네 일이잖아.”강지혁은 아주 당연하게 대답했다.“찾아온 건 맞지만 딱히 별말은 안 했어.”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모든 꿰고 있는 듯했다.여전히 강지혁의 감시 아래 있는 건가?“그래?”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갔다.“솔직히 궁금해. 왜 강현수한테 네가 그때 그 여자아이라고 얘기해주지 않은 거야?”임유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며 다시 한번 물었다.“대답해줘. 왜 말 안 했어?”임유진은 갑자기 코가 시큰거렸다.왜 말 안 했냐니.어떻게 이런 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지?기억을 되찾은 뒤에도 강현수에게 얘기하지 않은 건 강지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배여진이 그녀의 행세를 하며 강현수를 속여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강지혁이 그 일로 불안해하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그래서 강현수와의 모든 걸 끊기도 마음먹은 것이다.임유진은 그에게 충분한 안정감을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흥미를 잃으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장기 말 같은 거였다.“왜 내가 얘기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해?”강지혁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그걸 말했으면 아까 너 혼자 오지 않았을 테니까.”임유진이 진실을 말했다면 강현수는 절대 그녀를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말할 필요를 못 느낀 것뿐이야. 이미 지난 일이기도 하고.”“그 사촌 언니라는 여자가 네 행세를 하며 그딴 태도를 보이는 데 정말 괜찮아? 만약 네가 원한다면 더 이상 사칭하지 못하게 내가 해결해 줄게. 강현수가 그 여자를 감싸고 돈다고 해도 말이야.”“필요 없어.”임유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가족 간의 정, 뭐 그런 거야?”“그런 거 아니야.”임유진은 배여진에게 가족 간의 정 같은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는 건 배여진도 결국 외할머니 손녀이고 어릴 때 할
강지혁은 이 순간 임유진에게 요리를 부탁한 것을 후회했다.“계속 그러고 있어. 찌개는 내가 끓일게.”“네가?”임유진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왜, 불안해?”강지혁은 냄비 앞으로 가더니 일단 내용물을 확인하고 물을 한번 넣더니 조미료도 한번 넣고 적당히 졸인 후 맛을 한번 보고는 만족한 듯 불을 껐다.그 일련의 행동이 너무 우아하고 자연스러워 임유진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지혁은 찌개를 다시 끓일 때 이따금 그녀 쪽을 바라보며 제대로 흐르는 물에 손을 두고 있는지 체크했다.임유진은 1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손을 뺄 수 있었다.아직 조금 붉은 기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큰일도 아니었다.“아직도 빨개.”강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틀 정도 지나면 괜찮을 거야.”임유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강지혁은 그녀의 데인 손가락을 입에 넣어 혀로 부드럽게 핥았다.그 행동에 임유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강지혁은 그녀의 손가락을 핥는 것을 그만두고 서서히 입술로 그녀의 손가락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의 시선은 줄곧 임유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임유진은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그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심장 박동도 점점 더 거세졌다.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계속 이대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녀는...임유진은 있는 힘껏 손을 빼고서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이제 정말 괜찮아!”강지혁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보다 더 어둡게 빛나는 그의 눈 때문에 지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채기 힘들었다.“먹자 이제.”도우미는 임유진이 만든 요리들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밥 먹는 동안 두 사람 중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온통 식기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생각을 했다.길었던 식사 시간이 끝이 나고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현관을 나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