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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아니.”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강지혁의 뇌리에는 어제의 일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임유진을 침대에 눕힐 때, 유진이 갑자기 자기를 깔아 눕히던 기억.

그 순간만 떠올리면 놀랍기만 하다. 자기가 방심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만약 상대가 지혁의 목숨을 노렸다면 아마 반항도 못 하고 바로 죽었을 거다.

언제나 경계심이 많던 지혁이었기에 자신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유진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고 눈을 덮고 있던 앞머리를 들어 올리고는 두 눈을 소중하다는 듯 어루만졌다.

“혁아, 너 눈 진짜 예뻐…… 마음에 들어…… 좋아…….”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잇따라 귓가에 들려왔다.

“좋다고?”

이 단어는 그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단어라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은 다 지혁에게 좋아한다 눈이 마음에 든다 등과 같은 말을 해왔었으니까.

지혁의 두 눈은 아마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은 부분일 거다.

그리고 지혁이 어렸을 때, 지혁의 아버지는 매번 지혁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리곤 했다.

“이런 눈은 다정해 보이지만 제일 매정해. 혁이 넌 앞으로 다정할지 매정할지 모르겠네.” 하고 말이다.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유진의 대답이 들려왔다.

“응…… 왜냐하면…… 딸꾹…… 아주 맑고 깨끗해.”

‘깨끗하다고?’

지혁은 피식 웃었다. 지혁의 눈이 깨끗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유진이 처음이다.

“마치…… 죄악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엄청 깨끗해.”

유진은 술에 취한 모습으로 자기의 얼굴을 지혁의 얼굴에 바싹 붙인 채로 읊조렸다.

“혁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너 보호해 줄게…….”

그리고 말을 채 끝마치지도 않고 지혁의 가슴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다.

‘날 보호한다고? 자기도 보호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굴 보호한다고 그래? 진짜 바본가?’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고꾸라져 자던데?”

지혁은 어제의 기억을 접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그때, 지혁은 붉게 부어오른 유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얼굴 아직도 아파?”

“괜찮아.”

이 말은 사실이었다. 유진이 감옥에서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제 대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술에 취한 채로 다쳐 있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술주정뱅이한테 잘못 걸려 시비가 좀 붙었어.”

이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물쩍 넘어갔다. 솔직히 어제의 더러운 일을 지혁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지혁이 아무리 노숙자라지만 너무 깨끗하고 맑아 신생아 같다는 생각에 그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

유진의 말에 지혁의 속눈썹은 가늘게 떨렸다.

“내가 더 일찍 도착했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누나가 다칠 일은 없었을 텐데.”

사실 그 당시 지혁은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왕 이 게임을 시작하기로 한 거, 더욱 역할에 몰입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찌 됐든 지루한 삶에 재미를 더해주기만 한다면 뭐든 좋았으니까. 심지어 그는 유진이 룸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더 안 좋다는 걸 깨닫게 되어 그제야 도움의 손길을 보낸 거다.

“그래도 클럽 문 앞까지 데리러 와준 게 어디야. 안 그랬으면 나 길바닥에서 잘 뻔했어.”

유진은 말하면서 지혁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네가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게다가 나 정말 괜찮아. 뺨 한 대 맞은 건 나한테 아무 일도 아니야.”

이윽고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리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미소였지만 지혁의 눈에는 왠지 모르게 눈부셔 보였다.

……

“뭐? 임유라 그 계집애가 너를 불러내 감독 접대를 시켰다고? 진짜 뻔뻔하네! 안 되겠다, 지금 당장 그년을 찾아가야겠어!”

친구 만나러 찾아왔다가 유진의 얼굴이 부어오른 걸 보고 놀란 한지영은 그녀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어제 충격적인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찾아가서 뭐 하게?”

하지만 펄쩍 날뛰는 지영을 유진은 극구 말렸다.

“내가 너무 방심했어. 난 고작해야 걔가 나한테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까지 꾸밀 줄은 몰랐어. 그런데 다행히 내가 취해서 나왔을 때 혁이가 나 데리러 와줬어.”

“혁이?”

“지금 나랑 같이 사는 사람인데, 그냥 아는 동생 정도야. 내가 누나라 부르라고 했거든.”

혁이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지영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동생? 그 사람 몇 살인데?”

“27. 나보다 몇 달 어려.”

다 큰 성인 남자랑 동거한다는 걸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친구의 행동에 지영은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너 무슨 생각인 거야? 만약 그 사람 이상한 마음 품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너 그러고도 법대 나온 애 맞아? 남녀가 합숙하다가 사건 터진 게 얼마나 많은데, 이건 합숙보다도 더 위험한 거라고!”

“네가 걱정한다는 거 알아. 그런데 누군가 나랑 같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나 외롭지 않아서 좋아. 그리고 혁이 좋은 사람이고.”

“외롭다니? 너한테 나도 있잖아! 아니면 내가 나와서 너랑 같이 살까?”

“아니, 네가 집 나오면 너희 부모님 아마 날 더 미워할걸.”

유진은 얼른 대답했다.

몇 년 전 사고가 났을 때 유진은 분명 음주를 하지 않았지만 모든 증거는 유진이 음주 운전을 한 거로 나왔었다.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진을 믿지 않았는데, 그때 유일하게 그녀를 믿어준 사람이 바로 지영이다.

게다가 그녀가 감옥에 있는 3년 동안 지영은 재심청구 해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진의 사건을 파헤쳤고 심지어 해외 연수도 포기하는 바람에 지영의 부모님은 딸의 앞길을 방해한 유진을 미워하게 됐다.

앞길을 방해한 건 어찌 보면 사실이다. 유진만 아니었다면 지영은 작은 디자인 회사에서 회계로 있는 것보다 더 창창한 미래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생각을 고이 접어둔 유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혁이는 나한테 남동생 같은 존재야. 너도 알잖아. 나 예전에 남동생 얼마나 갖고 싶어 했는지. 그런데 이제야 소원을 이루게 됐어.”

친구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안 지영은 설득을 포기했다.

“그러면 나중에 한 번 자리 마련해 봐.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나도 한번 만나보게.”

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만나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알았어.”

“참, 이거 네 사건 자료들 복사한 거야. 그리고 내가 알아본 정보들도 있고.”

지영은 말하면서 자료 한 뭉치를 유진에게 건넸다.

“그런데 너 이미 나왔는데 재심청구 할 거야?”

“나도 모르겠어. 그때의 증인들도 어디 갔는지 모르겠고 그 증거들도 모두 나를 가리켰기도 했고. 내가 옥살이하는 3년 동안에도 재심청구가 계속 기각되었는데 앞으로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건 모르지.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르잖아. 너 임유진이잖아. 내가 아는 임유진은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 아니야.”

친구의 말에 유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3년 전의 유진이었다면 아마 최선을 다해 재심청구를 할 테지만 이미 3년간 옥살이를 한 유진은 그때 그 열정과 패기가 남아있지 않다. 그저 모든 고통을 운명인 듯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자아만 남았을 뿐.

유진이 두꺼운 서류뭉치를 가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전단지 나눠주고 있나 보네.’

요 며칠 동안 지혁은 낮에 전단지를 나눠주는 알바를 찾았다고 했었다.

이에 유진은 옥수수 두 개를 삶은 다음 간단한 반찬과 국물 요리를 하고 지혁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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