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9시가 넘도록 강지혁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임유진은 그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하고 마음 졸였지만, 하필이면 지혁한테 핸드폰도 없는지라 연락을 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었다.이윽고 아예 집을 나와 동네를 둘러보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지혁이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도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먼발치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유진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혁아!”지혁은 멀리에서부터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멍해졌다.그리고 유진이 앞에 도착했을 때에야 지혁은 유진이 숨을 헐떡이는 건 물론 얼굴도 얼어 벌겋게 물들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유진의 눈은 오히려 예쁘게 반짝거렸다.“돌아와서 다행이다.”“혹시…… 나 기다렸어?”지혁은 조심스럽게 물으며 손을 들어 유진의 얼굴을 쓱 문질렀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냉기로 보아 유진이 밖에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을지 짐작이 갔다.“응.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했어.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유진은 말하면서 싱긋 웃었다.그런 유진의 눈에서 지혁은 유진이 걱정하고 있는 것은 혁이지 GH 그룹 대표 강지혁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순간 자기의 신분이 밝혀져도 유진이 자기를 이렇게 걱정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전단지를 돌리는 게 생각보다 늦게 끝났어. 손 차갑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이윽고 싱긋 웃더니 유진의 두 손을 잡은 채로 지난번 유진이 했던 대로 유진의 손을 살살 비벼주기 시작했다.점점 따뜻해지는 손에 유진의 마음에도 점차 온기가 차올랐다. 분명 추운 날씨임에도 유진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있어서 참 좋아.”지혁은 유진의 말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그 말 꼭 기억해. 앞으로 절대 후회하면 안 돼.”“당연하지. 절대 후회하지 않아. 이제 됐어, 나 이제 따뜻하니까 얼른 집에 돌아가자. 저녁 다시 데워줄게.”당연하다는 듯 대꾸한
“대표님, 저택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면…….”“서흥구로 가.”병원에서 나오기 바쁘게 물어 오는 고이준의 물음에 강지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서흥구는 바로 임유진이 살고 있는 동네다. 이준도 자기의 상사가 그 자그마한 단칸방에 얼마나 더 머물 예정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서흥구로 향하던 중, 신호등이 바뀌는 찰나 이준은 갑자기 지혁을 불렀다.“대표님, 저기 임유진 씨가 있습니다.”아니나 다를까 지혁이 고개를 돌려 봤을 때, 맞은편 거리에서 바닥을 쓸고 있는 가느다란 그림자 보였다.형광색 작업복에 질끈 묶어맨 머리를 한 채 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유진의 입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그리고 그때, 스쿠터 한 대가 적색 신호등에 걸리지 않기 위해 쏜살같이 유진의 곁을 지나면서 유진의 다리를 스치고 가는 바람에 유진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하지만 스쿠터 주인은 잠시 멈칫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쌩 지나가 버렸다.지혁과 이준 역시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대표님, 저 차주에 대해 조사하고 책임을 물을까요?”이준은 자기의 상사가 유진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는 데다 지난번 클럽에서도 유진을 위해 나섰기에 이번 일도 당연히 나설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길 건너편에 넘어진 유진을 보는 순간 지혁의 뇌리에는 할아버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오늘 네가 한 말 꼭 기억해 두거라 영원히. 네 아비처럼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그래, 난 절대 아버지처럼 여자 때문에 인생 망치는 짓 안 해.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이야.’게다가 지혁은 지금 평소의 자신이 아니기에 유진이라는 환경미화원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참견하지 마.”지혁은 눈빛을 거두며 담담하게 명령했다.하지만 그 명령을 받은 이준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설마 내가 잘못 짚은 건가? 대표님이 유진 씨한테 마음이 없나?’전방의 적색 신호등은 어느새 녹색으로 변해 차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시각, 서미옥이 넘어진 유진을 일으켜 세웠다.“유진 씨, 어때?
“네가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실망할 일은 없을걸?”임유진은 이 말만 남기고 다시 양말을 신고는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그런 유진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면 나중에 절대 실망하면 안 돼.”--클럽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임유라는 매일매일을 불안에 시달렸다. 그날의 하 감독의 태도는 이상하다 못해 지금까지도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더욱이 그다음 날 하 감독은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총감독마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심지어 교체된 이유를 제작진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게 함정이었다. 하지만 유라는 왠지 모르게 총감독까지 교체된 이유가 하 감독의 일과 관련 있으며 나아가서 유진과도 관련이 있다고 느껴졌다.그렇게 의심만 하기를 며칠째, 유라는 하 감독이 오른손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오른손은 하 감독이 임유진을 때린 손이었던 것 같은데.’그런 생각이 들자, 유라는 몹시 불안해졌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얻을 수 없었다.‘그날 하 감독이 전화를 받고 난 뒤부터 임유진에 대한 태도가 변했어. 게다가 하 감독이 이렇게 된 건…… 너무 우연의 일치 아닌가? 아니면…… 임유진 뒤에 정말 대단한 백이 있는 건가?’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대단한 백이 있다면 유진이 고생을 하며 길거리에서 청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혼자서 끝내 결론을 얻어내지 못한 유라는 그날 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부모님께 털어놓았다. 하지만 임정호는 작은딸이 큰딸더러 술 접대를 하게 했다는 걸 듣기 바쁘게 유라를 째려보았다.“넌 어떻게 네 언니한테 술 접대를 시킬 수가 있니?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안은…….”“술 접대가 뭐 어때서요? 게다가 유라도 우리 집을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유라가 유명해져야 우리 가족도 잘 먹고 잘살 거 아니에요. 설마 당신, 그 감옥 다녀온 큰딸한테 희망 거는 거예요
임정호, 방미령과 임유라 세 사람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를 살폈다.그리고 그때 미령은 그제야 반응했는지 몇 마디 욕설을 퍼부으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호가 한발 빠르게 방미령을 제지했다.“됐어, 저 남자도 감옥에서 알게 된 사람이면 어쩌려고! 감옥이라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데, 저 남자가 어떤 죄로 옥살이했을지 누가 알아.”그 말에 미령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애써 삼키며 분을 삭이다가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러면 당신 이 일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에요?”“상황을 지켜보자는 거야. 만약 하 감독이 유라한테 책임을 물으면 그때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이건 한참을 고민해서 얻은 정호의 결론이었다. 솔직히 지금 안에 들어가 남자와 다툴 배짱도 없었다.하지만 옆에 있던 유라는 미간을 구기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방금 유라는 안에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그 사람이 정말로 옥살이하고 나온 남자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분명 두꺼운 앞머리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지혁의 잘생긴 얼굴은 유라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특히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얼굴과 분위기는 분명 어딘가에서 본 것처럼 낯익은 느낌이었다.이윽고 저 사람도 연예계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그 시각, 방 안.“고마워.”유진은 지혁을 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만약 그가 제때 나서지 않았다면 유진은 아마 아버지에게 손찌검당했을 것이다.“에이 동생이 누나를 돕는데 고마워할 필요가 뭐가 있어? 당연한 거 아닌가?”지혁은 유진의 진지한 태도에 장난기 섞인 말투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겼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이 유진의 발목에 닿았다.“발목은 괜찮아? 내가 또 약 발라줄까?”지혁은 말하면서 벌써 약을 꺼내 들고 손에 덜어내더니 유진의 발목을 살살 문지르며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다시 조용해진 분위기에 유진은 쭈뼛거리다가 자기 입술을 꽉 깨물었다.“저 세 사람이 나 왜 찾아왔는지 안 물어봐?”“누나가 말 안 하면
예전에, 감옥에 있을 때 한지영이 시간 날 때마다 면회 와주고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또 임유진을 도와주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지 않았다면 유진은 아마 살아서 나올 수 없었을 거다.그 힘든 3년 지영이 곁에 있어 줬기에 유진이 버틸 수 있었다.‘생명줄이라고?’강지혁의 눈빛은 순간 번쩍였다.‘한지영이라는 그 여자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네?’“그런데 누군가를 생명줄이라고 여기는 거 바보 같은 생각 아닌가? 만약 언젠가 그 사람한테 버려지면 더 절망적이잖아.”“지영은 그럴 리 없어.”유진의 눈빛에는 확신과 절대적인 믿음이 차 있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진한테 그렇게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는 게 심술이 났고, 유진이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칠 것 같다는 게 불편했다.--그 후 며칠 동안 상급 부서에서 환경위생과에 검사하러 온다는 소식 때문에 유진의 업무량도 늘어나 야근이 잦아졌다.다행히 집에 도착할 때마다 지혁이 미리 음식 준비를 마치고 유진을 기다렸기에 번거로움은 덜 수 있었다. 심지어 늦게 들어올 수 있으니 먼저 먹으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자신을 기다리는 지혁을 볼 때마다 유진의 마음은 따뜻한 기운이 솟곤 했다.그 때문인지 유진은 가끔 두 사람이 이 작은 공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동생이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네.’새벽, 길거리를 청소한 뒤 유진은 환경위생과로 돌아가 모든 청소도구를 공구함에 넣고 빈자리에 섰다.잠시 뒤 도시정비국에서 검사하러 온다는 말에 모든 사람이 업무 보고를 위해 담당자를 맞이하는 중이었다.가녀린 몸을 가진 유진이 4, 50대 되는 아줌마들 사이에 서 있으니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유진? 너 임유진 맞지?”검사하러 나온 도시정비국 사람들 사이에 웬 20대 후반으로 돼 보이는 여자가 유진을 보자마자 유진을 불렀다.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남색 수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올린 여자가 서 있었다. 좁은 눈매에 평범한 외모 하지만 화
“이런 것도 충분히 좋아!”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을 끊고 고개를 숙인 채 열심히 핸드폰을 골랐다.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유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유진이 아니야?”고개를 들어 확인해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민화영과 웬 여자 하나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역시 쇼핑하러 온 듯했다.하지만 그 둘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유진은 그제야 다른 한 사람도 유진의 고등학교 동창 조민혜라는 걸 발견했다.“여기에서 널 다 만나다니, 우리도 참 인연이네. 이 사람이 혹시 네 남자친구야?”화영은 유진 옆에 서 있는 지혁을 위아래로 집요하게 훑어보았다.하지만 유진이 대답도 하기 전에 민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얘, 화영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유진이 남자친구는 어느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들었는데 이 꼬라지가 어딜 봐서 부잣집 도련님이야? 다 시장바닥에서 산 옷들이고만!”말하면서 눈썹을 치켜뜨는 민혜의 얼굴에는 비아냥과 경멸의 웃음이 섞여 있었다.“아참, 미안해. 네 남자친구가 새 여친 사귀었다는 거 깜빡했네. 이제 곧 약혼도 한다지? 요 며칠 소씨 가문 도련님과 진씨 가문 아가씨가 약혼하는 뉴스로 사이트가 도배됐더라고! 하긴, 역시 어울리는 건 그 두 사람이긴 하지. 그건 그렇고, 네 새 남자친구는 네가 길바닥에서 청소하는 거 알아?”“민혜야, 뭐 하러 그런 말을 해?”“내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네가 말했잖아. 얘 환경위생과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고!”자기를 막는듯한 화영의 말투에 민혜는 오히려 더 거만한 태도로 받아쳤다.고등학교 시절부터 유진에게 인기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대학에 가서도 유진이 민준의 여자친구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민혜는 유진을 향한 질투 때문에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왜 모든 행운이 유진한테만 가는지도 민혜로서는 의문이었다.하지만 지금 민준은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고 유진은 길바닥에서 청소나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모른다.눈앞의 두 사람이 일부러 자기를
자존심과 체면이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이었다.조민혜는 서둘러 자기를 창피하게 한 이곳을 떠났고 옆에서 보고 있던 민화영도 서둘러 민혜와 함께 떠나버렸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백화점에서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차를 부수는 장면을 본 것도 모자라 그 차가 민혜의 차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뭐지? 쟤가 누구한테 원한 산 적 있어서 보복당하는 건가?”“그러게. 그건 모르지.”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진을 보며 강지혁의 눈은 반짝거렸다.“뭐 어찌 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말을 마친 유진은 지혁을 끌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때, 지혁의 발이 순간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봤을 때 지혁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뭔가에 충격을 받은 듯 버스 정류장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왜 그래?”“아…… 아니야.”걱정스러운 유진의 말에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하지만…….‘방금…… 내가 잘못 봤나?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을 그 여자로 보다니. 남편과 자식을 버린 그 여자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혁아, 넌 절대 나처럼 되지 마.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네 모든 걸 바치면서까지 좋아하지는 마.”“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같잖은 거야. 상대가 너한테 마음이 떠나면 네가 무릎을 꿇어도 붙잡을 수 없어.”“혁아, 너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상에 누군가가 너의 감정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고 너의 생사까지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그런 감정은 영원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누구야? 누가 자꾸 말하는 거야? 그만 말해. 여기서 떠나! 추워…… 너무 추워…… 여기 있지 마…… 더 있으면…… 얼어 죽을 거야!’“혁아, 나 갈게. 네 아빠가 말로만 날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해, 네 아빠와 함께라면 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어! 나도 이미 할 도리 다 했어!”‘이건 또 누구야? 누가 자꾸만 말하는 거야?’“가지……
“나 계속 곁에 있어. 침대랑 바닥도 솔직히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으니까, 고개만 돌리면 나 볼 수 있어.”“같이 있어 줘. 응?”강지혁은 낮은 소리로 또다시 중얼거렸다. 심지어 그마저도 이 순간 자기의 눈에 갈망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윽고 나지막한 말과 함께 베개와 이불을 들고 지혁의 옆에 누웠다.그렇게 일련의 행동을 끝내고 난 유진은 그제야 자기가 남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자각했다. 정말 뭐에 홀린 게 틀림없다. 하기야, 방금 당장이라도 깨질 수 있는 도자기 인형처럼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기가 지혁을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침대에 누운 유진은 손을 뻗어 불을 껐다. 그 시각, 유진의 오른손은 이불 아래에서 남자의 손에 꼭 잡혀 있었다.“만약 또 아프면 나 꼭 불러.”“응.”지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약 때문인지 지혁은 죽도록 자기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지금껏 아프기 시작하면 이렇게 빨리 나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눈앞의 여자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누나는 내 곁에 계속 있어 줄 거지?”“당연하지. 우리 서로 힘이 되어주기로 했잖아. 네가 앞으로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도 계속 같이 있어 줄게.”아마 그때까지 유진은 계속 누나의 신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유진은 이미 혁이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니.지혁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진의 목소리는 지혁을 안심시켜 줬고 아픔도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결혼이라…… 진애령이 죽은 뒤 결혼은 생각도 한 적 없는데.’“그 약속 꼭 지킬 거지?”“응.”여자의 대답을 다시 한번 듣고 나서야 지혁은 한시름 놓은 듯 깊은 잠에 빠졌다.그리고 지혁의 곁에 누워있던 유진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