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최면 치료까지 권유받게 되니 임유진은 조금 망설여졌다.만약 정말 그 모든 게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이고 강현수가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람이 그녀가 맞으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강현수를 찾아가 당신이 찾는 사람이 나라고 얘기라도 해야 하나?그때가 되면 불필요한 트러블만 일으키는 건 아닐까?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며 마음속이 헛헛할 것만 같다.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벨 소리가 울렸고 발신자는 강지혁이었다. 전화를 받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병원에서 볼 일은 다 끝났어?""응.""의사가 뭐래?"강지혁이 물었다."뭐... 별거 아니래. 며칠 더 지켜보고 다시 오라고 하네."연인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뢰인데 임유진은 지금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그럼 다행이고. 내일 비즈니스 전시회가 열리는데 누나도 같이 가야 해. 기사님한테는 내가 ‘루이블랑’으로 가라고 얘기해뒀으니까 누나가 좋아하는 드레스를 골라.""응, 알겠어."통화를 마친 후 강지혁은 고이준을 싸늘하게 쳐다봤다."그 의사가 최면 외에 또 무슨 얘기를 했지?""임유진 씨에게 심리상담 의사의 이름과 연락처를 줬습니다."그러고는 임유진이 받은 것과 똑같은 메모지를 강지혁에게 건넸다. 아마 임유진이 이걸 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유진이가 이 의사를 찾아가게 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강지혁의 가장 측근임에도 그가 왜 임유진의 진료상담을 감시하는지는 알지 못했다.물론, 가장 큰 의문은 역시 이 메모지를 건네준 의사가 바로 심리상담 센터 의사라는 것이다.임유진이 왜 심리상담 의사를 보러 갔는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고이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게 바로 그가 강지혁의 곁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이다....'루이블랑'은 S 시에서 유명한 드레스 숍이다. 하지만 주 고객이 상류층 혹은 연예인이라 일반인은 감히 이곳에서 드레스를 구매할 수 없었다.임유진
그 뒤로 임유진은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모든 직원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차렸다. 물론 이 모든 게 임유진이라서가 아닌 강지혁이라서인 걸 그녀도 잘 알고 있다.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당연한 사회이고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임유진은 다만 언젠가는 그녀의 뒤에 있는 누군가가 아닌 임유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임유진이 고른 건 보라색 드레스로 깔끔한 디자인에 조금은 보수적이지만 우아함이 돋보이는 그런 드레스였다. 게다가 허리 라인에 다이아몬드와 레이스를 포인트로 둬 영한 분위기까지 풍겼다.임유진이 드레스 선택을 마치자 옆에 있던 직원이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곧 김 실장에 의해 제지당했다.그 직원은 임유진이 탈의실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말을 꺼냈다."실장님, 저거 배여진 씨가 마음에 들어 한 거잖아요. 이따가 입으러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지금 사태파악 안 돼? 배여진 씨가 그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하든 말든 임유진 씨가 먼저 골랐으니 이건 임유진 씨 거야. 그리고 배여진 그 여자는 아직 강현수 씨 여자친구도 아니잖아. 임유진 씨는 강지혁 씨가 직접 잘 모시라고 한 사람이고."김 실장이 핀잔을 주자 그 직원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그때 임유진이 드레스를 입고 탈의실에서 걸어 나왔고 직원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 드레스는 가게에서 제일 눈에 띄는 드레스도 아니었지만, 임유진이 입고 나오니, 마치 그녀를 위해 디자인된 옷인 것처럼 단아하고 청순한 임유진의 장점을 살려주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까지 더해주었다.아직 화장도 안 한 채 머리도 그저 위쪽으로 대충 묶은 것뿐인데도 벌써 아름다웠다.김 실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의 대명사를 다 그녀에게 쏟아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임유진은 김 실장의 과장된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그녀 스스로가 봐도 확실히 아름다웠다."이 드레스로 할게요."임유
배여진이 강현수의 다음 여자친구가 될 거라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강현수가 직접 인정한 적은 없었기에 김 실장은 배여진이 나중에 화를 내도 대충 넘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강현수가 직접 가게까지 같이 오는 모습에 그녀는 설마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건 아닌가 싶어 지금 퍽 곤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여자이고 배여진은 강현수의 여자이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두 남자의 심기를 거르지 않을 수 있을까!한편, 강현수는 아까부터 임유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걸어올 때도 지금처럼 김 실장의 대답을 기다릴 때도 그는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둬들일 수가 없었다.부드러운 그녀의 눈동자에는 강인함이 서려 있었고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마치 그녀를 상징하는 말인 듯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임유진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 예시로 3년이라는 감옥생활도 그녀의 의지와 희망을 앗아가지 못하지 않았는가!배여진은 넋이 나간 듯한 강현수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더니 곧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나 오늘, 이 드레스 입은 거 현수 씨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어릴 때 그랬잖아요. 현수 씨는 보라색을 좋아해서 나한테 꼭 보라색 치마를 선물해 주겠다고."강현수는 배여진의 말을 듣고 또다시 가슴이 미어졌다. 눈앞에 그의 시선을 단번에 뺏어간 여인은 자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고 옆에 있는 배여진이 어릴 적 그 소녀이다.왜 배여진일까? 왜 임유진이 아닌 걸까!"다른 거 고르면 되지. 보라색 드레스가 이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강현수의 말에 김 실장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배여진은 그의 말에 불만 가득한 얼굴을 했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이 옷이 그렇게 마음에 들면 언니 입어. 내가 양보할게."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김 실장에게 말했다."드레스는 다른 거로 고를게요."배여진은 임여진이 먼저 양보하겠다고 하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마치 자신한테는 적선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또
강지혁은 시선을 강현수에게로 돌렸고 강현수도 그의 시선을 느낀 후 강지혁을 바라봤다.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그러다 강지혁은 대뜸 입꼬리를 올리더니 임유진의 어깨를 감싸 안고 얼굴을 가까이에 갖다 대고 물었다."아까 뭘 양보한다고 한 거야?"강현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 그녀는 자신의 것이라고, 함부로 넘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강현수는 친구 약혼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여자들이 넘쳐났고 이제까지 한 번도 남의 떡을 탐내본 적이 없다.하지만 왜 임유진만은 예외일까? 역시 어릴 때 그 소녀와 너무 닮아서일까?임유진은 지금 온몸이 강지혁에게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지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탓에 그녀는 지금 고개를 들면 그의 속눈썹까지 셀 수 있었다."이 드레스, 언니가 마음에 들었던 거라고 하길래 그냥 언니한테 양보하고 나는 다른 드레스 고르려고."임유진이 핑크빛으로 물든 얼굴로 얘기하자 강지혁은 그제야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말했다."그래, 그럼."임유진은 배여진의 앞에 다가가 말했다."언니, 이따 이 드레스 벗어서 줄게."배여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토록 원하던 드레스였지만 지금은 마치 쓰레기를 주워입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어릴 때부터 항상 임유진에게 지고 살았는데 이제는 드레스 한 벌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가?배여진은 언젠가 임유진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그때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런데 언니, 강현수 씨가 정말 언니한테 보라색 치마를 선물해 주겠다고 했어?"임유진은 ‘언니한테’라는 말을 강조했고 그에 배여진은 순간 몸에 소름이 돋더니 이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연하지."하지만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잔떨림이 있었다.임유진은 그녀의 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채 고개를
게다가 아까 상황을 돌이켜 봤을 때 임유진은 분명 자신이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은 후 생각을 바꿨다.확실하게 선을 그으려는 걸까...?이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 강현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강현수와 배여진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VIP 탈의실에 들어왔다. 배여진이 임유진이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강현수의 앞에 나타나자 그는 그저 ‘괜찮네.’라는 한마디만 하고 아무런 리액션도 없었다.배여진도 이 드레스는 자신보다 임유진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아까 임유진의 모습을 먼저 봤던 터라 배여진이 상대적으로 덜 예쁘게 비칠 수도 있었다."현수 씨, 역시 이 드레스 유진이한테 양보할 걸 그랬을까요...?"배여진은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나는... 나는 그저 현수 씨한테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어릴 때 나한테 보라색 좋아한다고 그랬었잖아요."배여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또다시 말을 이었다."나 결혼생활이 힘들 때면 항상 어릴 때 생각을 했어요. 현수 씨가 꼭 나 찾으러 오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날 그 지옥 같은 생활에서 꺼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현수 씨가 짠하고 나타난 거 있죠!"그녀는 점점 격앙되어 강현수의 팔까지 잡았다.강현수는 고개를 숙여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더니 서서히 팔을 뺐다."여진아,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건 네가 어릴 때 날 구해줬기 때문이야. 네가 필요로 하는 거, 원하는 거 다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거기까지야."배여진은 그만 몸이 굳어버렸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지금 욕심부리지 말라는 건가?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건가?왜? 가난한 시골 여자라서? 아니면 대학교도 못 간 그런 여자라서? 그것도 아니면 이미 한번 결혼한 몸이라서?!배여진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어릴 때 구해준 거에 대한 보답만 해주고 여자친구는 못 된다면 이 생활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강현수에게 애
강지혁은 뒤에서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더니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댄 후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너무 예쁘다, 누나."임유진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킨쉽을 하는 강지혁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야.. 야 이거 놔. 직원들이 보잖아!"그녀는 낮게 속삭이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뭐 어때. 사랑하는 연인이 껴안고 스킨쉽 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임유진은 한숨을 내뱉은 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거울 속의 그녀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 강지혁의 올 블랙 슈트는 그녀의 은백색 드레스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마치 화보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그때 임유진은 거울 속 강지혁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마치 거울을 뚫어버릴 듯 서로를 뜨겁게 바라봤다.강지혁의 턱은 그녀의 어깨에 놓여있고 검은색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임유진을 삼키듯 보고 있었고 그의 섹시한 입술은 천천히 열리며 그녀를 향해 예쁘다는 말만 반복했다."너무 예뻐."강지혁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음에도 임유진은 행여 직원들에게 들릴까 봐 주위를 살폈다."걱정하지 마. 나 잘 참고 있으니까. 이따 잘 참았다고 상 줘야 돼, 알겠지?"강지혁의 입술은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고 임유진은 이제 몸 전체가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한편, 가게 직원들은 지금 말을 잇지 못했다. 차갑고 안하무인에 여자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 강지혁이 여자한테 이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게다가 그의 절절한 눈빛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임유진에게 푹 빠진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주얼리도 강지혁이 직접 임유진을 위해 루비를 골라주었다."너무 비싸.""누나한테 어울리는 거로 고른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에게는 뭐든 제일 좋고 제일 비싼 것만 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과거의 상처를 덮을만한 행복을 주고 싶었다. 물론 아무리 돈으로 메꾼다고 해도 이미 지나버린 시간과 그녀가 받은 상
배여진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 정말 임유진의 예상대로 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정말 최면을 하는 게 맞는 걸까?만약 그 소녀가 임유진이 맞다면 강현수와는 앞으로 어떤 사이가 되는 거지?그녀는 강현수를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한 친구로 볼 수 있지만 강현수는? 과연 그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리고 강지혁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임유진은 강지혁의 곁에 있으면서 알아낸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어릴 적 트라우마로 감정적으로 많이 예민하다는 것이다.그리고 전에는 강현수의 이름을 꺼내며 질투한 적도 있었기에 만약 임유진이 정말 강현수가 찾아 헤매던 소녀라면 강지혁은...이런저런 걱정으로 임유진은 더더욱 망설여졌다.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강지혁이 걸어 나왔다. 샤워가운을 입고 나온 그의 몸에는 아직 물기가 조금 남아있었고 앞머리는 이마를 덮고 있어 나른한 분위기를 풍겼다.임유진은 얼른 손에 들린 메모지를 서랍에 넣은 후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다 씻었어?""응. 뭐 보고 있었어?"강지혁이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임유진은 그의 손에 들린 수건을 받아 들더니 화제를 돌렸다."허리 좀 숙여 봐, 내가 닦아줄게."그 말에 강지혁은 눈이 반짝였고 이내 옅게 웃었다."자."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머리를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까만 눈동자에 임유진은 문득 그를 데리고 월세방으로 온 첫날이 떠올랐다.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강지혁의 머리를 닦아주었다.다만 그때와 다른 건 강지혁이 그녀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때는 삭막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다정하고 부드러워 마치 녹아버릴 듯한 눈빛이다.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유진아."강지혁의 목소리에 다시 이성을 되찾은 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나... 나 씻으러 갈게!"그러고는 그에게 다시 수건을 건네준 후 갈아입을 옷을 들고 빠르게 욕실로 향
임유진이 기억을 찾는 일 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강지혁은 그녀의 마음속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날이 어두워지고 임유진은 욕조에서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다 결국 욕실로 들어갔고 욕조에서 잠든 그녀를 보고 피식 웃더니 이내 그녀를 깨끗하게 씻겨주었다.임유진은 기절한 듯 잠에 빠졌고 물기가 어린 단아한 얼굴은 강지혁을 미치게 했다.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상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지 다 예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듯싶다.그녀의 하얀 피부 위에는 오래된 흉터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건 전부 감옥에서 얻는 것이다.강지혁은 매번 그녀의 흉터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일었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를 향한 죄책감은 아마 평생 뿌리치지 못할 것이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한 마음은 계속 무거울 것이다.물론 상처들만 있는 건 아니었고 군데군데 그가 새긴 붉은색 키스 마크도 있었다. 이건 마치 임유진이 그의 것이라는 일종의 표식과도 같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을 다 씻긴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조심스럽게 침에서 눕혔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씻겨주는 동안 한 번도 깨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 좋게 자고 있었다.강지혁은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잃어버린 기억은 그저 잃어버린 대로 놔두면 안 돼? 왜 자꾸 찾으려고 하는 거야?"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원망도 섞여 있었다."유진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기억을 못 한 채로 살아. 제발 그렇게 살아주라."그의 손길은 다정했고 목소리는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한편, 임유진은 그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 비즈니스 전시회에 가기 위해, 임유진은 강지혁이 골라준 은백색 드레스와 루비 장신구를 달고 헤어 스타일리스트의 손에 의해 아름답게 변신했다.임유진 자신도 거울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오늘 그녀에게 연한 화장을 해줬는데 평소와 같은 느낌을 풍기면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