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최면 치료까지 권유받게 되니 임유진은 조금 망설여졌다.만약 정말 그 모든 게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이고 강현수가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람이 그녀가 맞으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강현수를 찾아가 당신이 찾는 사람이 나라고 얘기라도 해야 하나?그때가 되면 불필요한 트러블만 일으키는 건 아닐까?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며 마음속이 헛헛할 것만 같다.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 벨 소리가 울렸고 발신자는 강지혁이었다. 전화를 받자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병원에서 볼 일은 다 끝났어?""응.""의사가 뭐래?"강지혁이 물었다."뭐... 별거 아니래. 며칠 더 지켜보고 다시 오라고 하네."연인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뢰인데 임유진은 지금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그럼 다행이고. 내일 비즈니스 전시회가 열리는데 누나도 같이 가야 해. 기사님한테는 내가 ‘루이블랑’으로 가라고 얘기해뒀으니까 누나가 좋아하는 드레스를 골라.""응, 알겠어."통화를 마친 후 강지혁은 고이준을 싸늘하게 쳐다봤다."그 의사가 최면 외에 또 무슨 얘기를 했지?""임유진 씨에게 심리상담 의사의 이름과 연락처를 줬습니다."그러고는 임유진이 받은 것과 똑같은 메모지를 강지혁에게 건넸다. 아마 임유진이 이걸 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유진이가 이 의사를 찾아가게 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강지혁의 가장 측근임에도 그가 왜 임유진의 진료상담을 감시하는지는 알지 못했다.물론, 가장 큰 의문은 역시 이 메모지를 건네준 의사가 바로 심리상담 센터 의사라는 것이다.임유진이 왜 심리상담 의사를 보러 갔는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고이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게 바로 그가 강지혁의 곁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이다....'루이블랑'은 S 시에서 유명한 드레스 숍이다. 하지만 주 고객이 상류층 혹은 연예인이라 일반인은 감히 이곳에서 드레스를 구매할 수 없었다.임유진
그 뒤로 임유진은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모든 직원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예의를 차렸다. 물론 이 모든 게 임유진이라서가 아닌 강지혁이라서인 걸 그녀도 잘 알고 있다.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게 당연한 사회이고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임유진은 다만 언젠가는 그녀의 뒤에 있는 누군가가 아닌 임유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임유진이 고른 건 보라색 드레스로 깔끔한 디자인에 조금은 보수적이지만 우아함이 돋보이는 그런 드레스였다. 게다가 허리 라인에 다이아몬드와 레이스를 포인트로 둬 영한 분위기까지 풍겼다.임유진이 드레스 선택을 마치자 옆에 있던 직원이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곧 김 실장에 의해 제지당했다.그 직원은 임유진이 탈의실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말을 꺼냈다."실장님, 저거 배여진 씨가 마음에 들어 한 거잖아요. 이따가 입으러 오시는 거 아니었어요?""지금 사태파악 안 돼? 배여진 씨가 그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하든 말든 임유진 씨가 먼저 골랐으니 이건 임유진 씨 거야. 그리고 배여진 그 여자는 아직 강현수 씨 여자친구도 아니잖아. 임유진 씨는 강지혁 씨가 직접 잘 모시라고 한 사람이고."김 실장이 핀잔을 주자 그 직원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그때 임유진이 드레스를 입고 탈의실에서 걸어 나왔고 직원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 드레스는 가게에서 제일 눈에 띄는 드레스도 아니었지만, 임유진이 입고 나오니, 마치 그녀를 위해 디자인된 옷인 것처럼 단아하고 청순한 임유진의 장점을 살려주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까지 더해주었다.아직 화장도 안 한 채 머리도 그저 위쪽으로 대충 묶은 것뿐인데도 벌써 아름다웠다.김 실장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의 대명사를 다 그녀에게 쏟아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임유진은 김 실장의 과장된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그녀 스스로가 봐도 확실히 아름다웠다."이 드레스로 할게요."임유
배여진이 강현수의 다음 여자친구가 될 거라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강현수가 직접 인정한 적은 없었기에 김 실장은 배여진이 나중에 화를 내도 대충 넘어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강현수가 직접 가게까지 같이 오는 모습에 그녀는 설마 자신이 잘못 생각한 건 아닌가 싶어 지금 퍽 곤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여자이고 배여진은 강현수의 여자이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두 남자의 심기를 거르지 않을 수 있을까!한편, 강현수는 아까부터 임유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걸어올 때도 지금처럼 김 실장의 대답을 기다릴 때도 그는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둬들일 수가 없었다.부드러운 그녀의 눈동자에는 강인함이 서려 있었고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마치 그녀를 상징하는 말인 듯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임유진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다.그 예시로 3년이라는 감옥생활도 그녀의 의지와 희망을 앗아가지 못하지 않았는가!배여진은 넋이 나간 듯한 강현수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더니 곧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나 오늘, 이 드레스 입은 거 현수 씨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어릴 때 그랬잖아요. 현수 씨는 보라색을 좋아해서 나한테 꼭 보라색 치마를 선물해 주겠다고."강현수는 배여진의 말을 듣고 또다시 가슴이 미어졌다. 눈앞에 그의 시선을 단번에 뺏어간 여인은 자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고 옆에 있는 배여진이 어릴 적 그 소녀이다.왜 배여진일까? 왜 임유진이 아닌 걸까!"다른 거 고르면 되지. 보라색 드레스가 이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강현수의 말에 김 실장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배여진은 그의 말에 불만 가득한 얼굴을 했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이 옷이 그렇게 마음에 들면 언니 입어. 내가 양보할게."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김 실장에게 말했다."드레스는 다른 거로 고를게요."배여진은 임여진이 먼저 양보하겠다고 하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마치 자신한테는 적선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또
강지혁은 시선을 강현수에게로 돌렸고 강현수도 그의 시선을 느낀 후 강지혁을 바라봤다.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그러다 강지혁은 대뜸 입꼬리를 올리더니 임유진의 어깨를 감싸 안고 얼굴을 가까이에 갖다 대고 물었다."아까 뭘 양보한다고 한 거야?"강현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 그녀는 자신의 것이라고, 함부로 넘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다.강현수는 친구 약혼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여자들이 넘쳐났고 이제까지 한 번도 남의 떡을 탐내본 적이 없다.하지만 왜 임유진만은 예외일까? 역시 어릴 때 그 소녀와 너무 닮아서일까?임유진은 지금 온몸이 강지혁에게 둘러싸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지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온 탓에 그녀는 지금 고개를 들면 그의 속눈썹까지 셀 수 있었다."이 드레스, 언니가 마음에 들었던 거라고 하길래 그냥 언니한테 양보하고 나는 다른 드레스 고르려고."임유진이 핑크빛으로 물든 얼굴로 얘기하자 강지혁은 그제야 허리를 곧게 세우며 말했다."그래, 그럼."임유진은 배여진의 앞에 다가가 말했다."언니, 이따 이 드레스 벗어서 줄게."배여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토록 원하던 드레스였지만 지금은 마치 쓰레기를 주워입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어릴 때부터 항상 임유진에게 지고 살았는데 이제는 드레스 한 벌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가?배여진은 언젠가 임유진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그때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런데 언니, 강현수 씨가 정말 언니한테 보라색 치마를 선물해 주겠다고 했어?"임유진은 ‘언니한테’라는 말을 강조했고 그에 배여진은 순간 몸에 소름이 돋더니 이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연하지."하지만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잔떨림이 있었다.임유진은 그녀의 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채 고개를
게다가 아까 상황을 돌이켜 봤을 때 임유진은 분명 자신이 보라색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은 후 생각을 바꿨다.확실하게 선을 그으려는 걸까...?이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 강현수는 기분이 언짢아졌다....강현수와 배여진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VIP 탈의실에 들어왔다. 배여진이 임유진이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강현수의 앞에 나타나자 그는 그저 ‘괜찮네.’라는 한마디만 하고 아무런 리액션도 없었다.배여진도 이 드레스는 자신보다 임유진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아까 임유진의 모습을 먼저 봤던 터라 배여진이 상대적으로 덜 예쁘게 비칠 수도 있었다."현수 씨, 역시 이 드레스 유진이한테 양보할 걸 그랬을까요...?"배여진은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나는... 나는 그저 현수 씨한테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어릴 때 나한테 보라색 좋아한다고 그랬었잖아요."배여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또다시 말을 이었다."나 결혼생활이 힘들 때면 항상 어릴 때 생각을 했어요. 현수 씨가 꼭 나 찾으러 오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날 그 지옥 같은 생활에서 꺼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현수 씨가 짠하고 나타난 거 있죠!"그녀는 점점 격앙되어 강현수의 팔까지 잡았다.강현수는 고개를 숙여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더니 서서히 팔을 뺐다."여진아, 내가 너한테 잘해주는 건 네가 어릴 때 날 구해줬기 때문이야. 네가 필요로 하는 거, 원하는 거 다 들어줄 수 있어. 하지만 거기까지야."배여진은 그만 몸이 굳어버렸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지금 욕심부리지 말라는 건가?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건가?왜? 가난한 시골 여자라서? 아니면 대학교도 못 간 그런 여자라서? 그것도 아니면 이미 한번 결혼한 몸이라서?!배여진은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어릴 때 구해준 거에 대한 보답만 해주고 여자친구는 못 된다면 이 생활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강현수에게 애
강지혁은 뒤에서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더니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댄 후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너무 예쁘다, 누나."임유진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킨쉽을 하는 강지혁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야.. 야 이거 놔. 직원들이 보잖아!"그녀는 낮게 속삭이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뭐 어때. 사랑하는 연인이 껴안고 스킨쉽 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임유진은 한숨을 내뱉은 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거울 속의 그녀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 강지혁의 올 블랙 슈트는 그녀의 은백색 드레스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마치 화보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그때 임유진은 거울 속 강지혁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마치 거울을 뚫어버릴 듯 서로를 뜨겁게 바라봤다.강지혁의 턱은 그녀의 어깨에 놓여있고 검은색 머리카락은 뒤로 넘겨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그의 눈동자는 임유진을 삼키듯 보고 있었고 그의 섹시한 입술은 천천히 열리며 그녀를 향해 예쁘다는 말만 반복했다."너무 예뻐."강지혁이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음에도 임유진은 행여 직원들에게 들릴까 봐 주위를 살폈다."걱정하지 마. 나 잘 참고 있으니까. 이따 잘 참았다고 상 줘야 돼, 알겠지?"강지혁의 입술은 그녀의 목을 간지럽혔고 임유진은 이제 몸 전체가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한편, 가게 직원들은 지금 말을 잇지 못했다. 차갑고 안하무인에 여자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 강지혁이 여자한테 이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게다가 그의 절절한 눈빛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임유진에게 푹 빠진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주얼리도 강지혁이 직접 임유진을 위해 루비를 골라주었다."너무 비싸.""누나한테 어울리는 거로 고른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에게는 뭐든 제일 좋고 제일 비싼 것만 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과거의 상처를 덮을만한 행복을 주고 싶었다. 물론 아무리 돈으로 메꾼다고 해도 이미 지나버린 시간과 그녀가 받은 상
배여진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 정말 임유진의 예상대로 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정말 최면을 하는 게 맞는 걸까?만약 그 소녀가 임유진이 맞다면 강현수와는 앞으로 어떤 사이가 되는 거지?그녀는 강현수를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한 친구로 볼 수 있지만 강현수는? 과연 그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리고 강지혁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임유진은 강지혁의 곁에 있으면서 알아낸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어릴 적 트라우마로 감정적으로 많이 예민하다는 것이다.그리고 전에는 강현수의 이름을 꺼내며 질투한 적도 있었기에 만약 임유진이 정말 강현수가 찾아 헤매던 소녀라면 강지혁은...이런저런 걱정으로 임유진은 더더욱 망설여졌다.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강지혁이 걸어 나왔다. 샤워가운을 입고 나온 그의 몸에는 아직 물기가 조금 남아있었고 앞머리는 이마를 덮고 있어 나른한 분위기를 풍겼다.임유진은 얼른 손에 들린 메모지를 서랍에 넣은 후 몸을 일으켜 그에게로 다가갔다."다 씻었어?""응. 뭐 보고 있었어?"강지혁이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임유진은 그의 손에 들린 수건을 받아 들더니 화제를 돌렸다."허리 좀 숙여 봐, 내가 닦아줄게."그 말에 강지혁은 눈이 반짝였고 이내 옅게 웃었다."자."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머리를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까만 눈동자에 임유진은 문득 그를 데리고 월세방으로 온 첫날이 떠올랐다.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강지혁의 머리를 닦아주었다.다만 그때와 다른 건 강지혁이 그녀를 보는 눈빛이었다. 그때는 삭막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다정하고 부드러워 마치 녹아버릴 듯한 눈빛이다.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유진아."강지혁의 목소리에 다시 이성을 되찾은 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나... 나 씻으러 갈게!"그러고는 그에게 다시 수건을 건네준 후 갈아입을 옷을 들고 빠르게 욕실로 향
임유진이 기억을 찾는 일 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강지혁은 그녀의 마음속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날이 어두워지고 임유진은 욕조에서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다 결국 욕실로 들어갔고 욕조에서 잠든 그녀를 보고 피식 웃더니 이내 그녀를 깨끗하게 씻겨주었다.임유진은 기절한 듯 잠에 빠졌고 물기가 어린 단아한 얼굴은 강지혁을 미치게 했다.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상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지 다 예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듯싶다.그녀의 하얀 피부 위에는 오래된 흉터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건 전부 감옥에서 얻는 것이다.강지혁은 매번 그녀의 흉터를 볼 때마다 죄책감이 일었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를 향한 죄책감은 아마 평생 뿌리치지 못할 것이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한 마음은 계속 무거울 것이다.물론 상처들만 있는 건 아니었고 군데군데 그가 새긴 붉은색 키스 마크도 있었다. 이건 마치 임유진이 그의 것이라는 일종의 표식과도 같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을 다 씻긴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조심스럽게 침에서 눕혔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씻겨주는 동안 한 번도 깨지 않았고 오히려 기분 좋게 자고 있었다.강지혁은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잃어버린 기억은 그저 잃어버린 대로 놔두면 안 돼? 왜 자꾸 찾으려고 하는 거야?"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원망도 섞여 있었다."유진아, 그냥 이대로 영원히 기억을 못 한 채로 살아. 제발 그렇게 살아주라."그의 손길은 다정했고 목소리는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한편, 임유진은 그저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 비즈니스 전시회에 가기 위해, 임유진은 강지혁이 골라준 은백색 드레스와 루비 장신구를 달고 헤어 스타일리스트의 손에 의해 아름답게 변신했다.임유진 자신도 거울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오늘 그녀에게 연한 화장을 해줬는데 평소와 같은 느낌을 풍기면
임유진은 기억이 돌아온 후 한지영과의 통화에서 그녀가 죽은 후 강현수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또 허구한 날 그녀의 무덤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던 기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S 시가 아닌 해외로만 계속 돌고 있었다는 얘기도 말이다.강현수는 목석처럼 차에 기댄 채 계속해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5년간 줄곧 꿈속에서만 또는 정신없이 취해있어야만 간신히 보이던 이의 모습이 이렇게 현실감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강현수는 순간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다 풀릴 뻔했다.그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이한의 말대로 임유진은 정말 살아있었다.“유진아...”잔뜩 매인 목소리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뛰어갔다.강현수의 마음은 임유진을 사랑했던 만큼 요동쳤고 또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제야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똘망하고 예쁜 것이 임유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 아이가 임유진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당시 뱄던 세쌍둥이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선율이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나는...”강현수는 무릎을 구부리고 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강현수 삼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강선현이에요. 원래는 임현이었고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현이를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임유진이 떠올랐다. 그날 우거진 풀숲에서 그를 구해주고 또 산 아래까지 그를 업어줬던 용감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말이다.그때의 기억은 강현수가 한평생 놓
이경빈은 탁유미 사건이 뒤집히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탁유미를 위해 당시의 사건을 뒤집어주었다.“이경빈 씨 나름의 속죄네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은 있어요?”“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걸 아니까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탁유미는 시선을 돌려 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이를 바라보았다.“오히려 이경빈보다 더 많이 찾아온 건 이경빈의 부모님이죠. 윤이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요.”“그걸 언니가 거절했고요?”만약 윤이를 보냈다면 지금쯤 탁윤이 아니라 이윤으로 살고 있었을 테니 거절한 건 분명해 보였다.“윤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빈이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뒤로 윤이는 이경빈에게 줄곧 마음을 닫고 있는 상태예요. 이경빈은 어차피 어린애라 몇 번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문제인가요?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또 섬세하다는 걸 몰랐던 거죠.”“그럼 언니는 어때요? 언니는 이경빈을 용서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경빈에 관한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경빈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아무래도 탁유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이경빈이 한 짓은 이미 용서했어요.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붙잡아두고 있어봤자 감정 낭비하는 건 나일 테니까요. 그런데 다시 합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사이는 이미 5년 전에 모든 게 다 끝이 났어요.”탁유미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치 그로 인해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을 이미 말끔히 지운 사람처럼 말이다.임유진은 탁유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인지 몰라 생각이 복잡했다.한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공수진의 개입으로 한평생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임유진은 딸을 데리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